【 양녕과 효령 】
■ 양령대군
○ 출생과 이력 양녕대군은 1394년에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이며 세종의 친형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02년(태종 2년) 제(禔)란 이름을 받았고 동년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406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 세자 시절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1410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사가 발생했다. 이 일로 원경왕후는 병석에 누웠고, 친정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 차 대궐을 출입했다. 이때 형제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두 형의 억울함을 하소연을 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난 터라 이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은 두 외삼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품성이 잘못되었다며 도리어 외가를 비난했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뒤, 계성군 이래가 빈객 겸 세자의 스승으로 결정되어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과 함께 왕자들을 가르쳤다. 양녕대군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궁리할 때 별감으로부터 계성군의 출입을 보고받자 일부러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병으로 취급하였다. 이래는 이후 태종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은 물론 그 뒤로도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아뢰었다.
세자는 이래 등 사부들이 와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였다. 동궁의 뜰 앞에 새덫을 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또한 조정의 하례 때에는 머리가 아프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에서 혼자 새덫을 놓고 참새사냥을 즐기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난 김호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사족 출신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호기심에 양녕은 김호생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비밀리에 출입하던 중 내시에게 발각되어 도주하다 붙잡혀 어전에서 태종에게 심문을 받았다. 태종은 양녕이 몰래 시중의 잡것들을 불러들여 장난을 치는 등 체통없는 짓을 한다 하여 잡는 대로 귀양보내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는데, 김호생에게 붓을 만들게 한 뒤 그의 재능을 본 뒤 오히려 기특히 여기고 김호생에게 특별이 공조(工曹)로 보내 필장(筆匠)직을 내리기도했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하기도 했으며,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여색을 금하고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 하였으나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이 여색을 밝히고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1417년에는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봤다가 발각되어,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왕 태종의 불신을 사게 되는 등 태종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 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 세자 폐위 배경 김시양(金時讓)은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추론 하였다. ①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②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③ 양녕대군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양녕대군은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위와 같은 자료를 보면 양녕대군이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 세자 폐위 이후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경기도 광주의 사저로 내려갔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여자 종 13인과 남자 종 10여 인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한 특별히 배려하여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 가지 가재도구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 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대궐을 떠나던 날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광주의 사저로 나온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論語)와 대학(大學) 이외의 책은 금지시켰다. 그 뒤 그는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사귀면서 일생을 마쳤다.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언관들로부터 탄핵되었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계유정난이 끝나자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 사망 1462년(세조8년)에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에 재능이 있어 시와 서에 능하였으며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의 현판의 글씨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자녀는 정실에서 3남 5녀를 두고, 측실에서 7남 12녀를 두었다.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강정(剛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장지는 경기도 금천군 강적골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이다. 사후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7대손 참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사후 그는 음란함과 문란함의 대명사가 되어 그의 시문과 작품 중 상당수가 인멸되거나 사라졌다. 또한 1457년(세조 2년)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까지 언급되며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 숙종이 우연히 퇴락한 그의 사당을 발견함으로써 복권되고 사당 개수의 명이 내려졌다.
○ 야화 충녕대군이 왕이 되고 나서 어느날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이 있는 절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효령과 중들이 말리려했지만 양녕의 말 한마디로 모두 잠잠해졌다. " 내가 살아서는 임금의 형님이고 내가 죽어서는 불자의 형님인데 내가 무엇이 두렵겠느냐?"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세종보다 오래 살며 사냥도 하고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 효령대군
○ 생애 초반 그는 10세 시절이던 1405년 효령군에 책봉되었으며 12세 시절이던 1407년에 해주 정씨 부인(정역의 딸)과를 가례를 치렀고 17세 시절이던 1412년에 효령대군에 진책되었다. 1417년 자신의 아호(雅號)이기도 한 연강(蓮江)이라는 법명(法名)으로 수계를 받았다. 그는 어릴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에도 능해 명필이었다고 전해진다. 활쏘기에 능숙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 양녕의 세자 폐위와 효령 양녕대군은 어느날 밤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던 중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의 재질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대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원경왕후 역시 태종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부왕과 모후의 뜻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나있다는 것을 간파한 효령대군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다. 그는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 고 말했다.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는 야사가 전해 온다. 이에 크게 낙심한 효령대군은 매일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그래서 속담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효령대군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출가, 합천 해인사로 들어갔다.
○ 불교 활동 불교를 심오하게 믿어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였으며, 조정의 숭유억불 정책하에서 불교 보호의 방패 역할을 감당하였다. 원각사 창건 때에는 조성도감 도제조를 맡았다. 이 때 주조되어 1985년까지 보신각에 달려 있던 큰종과 탑골공원의 10층 석탑은 그 제조기법이나 예술성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10층 석탑은 국보 제2호로, 원각사지 대종은 보물 제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반야심경》, 《능엄경》, 《선종영가집》 등 불경의 번역과 교정에도 힘썼고, 많은 사찰을 순회하면서 신도들을 온후하게 계도하였다. 그리고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헌(鄕憲) 56조를 지어 백성들의 윤리 도덕심을 함양하였으며 유불심법동일원(儒佛心法同一原)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 전해오는 이야기 1395년에 태어나 91세의 천수를 다하고 1486년(성종 17, 丙午年)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예장되었다. 묘소는 1972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현 사당은 1736년(영조 12)에 왕명으로 효령대군 묘 앞에 처음 세우면서 청권사(淸權祠)라 불리는데 청권(淸權)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본떠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칭찬하면서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라 이름 하였다.
효령대군은 아버지 태종(太宗)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세종대왕이 '나의 형(효령대군)이 곧 청권'이라고 칭송하였고, 정조(正祖) 대에 이르러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賜額)하였다. 또한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이 편집한 『조야휘언』필사본에는 '세종이 태평관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하는데 효령대군이 술을 권하자 일어나 받았다. 이를 보고 사신이 말하길 "임금이 형을 우대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당시 왕실의 형제간 우애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슭에는 연주암(戀主庵)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629m) 절벽 위에 연주대(戀主帶:경기도 기념물 제20호)가 자리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나한도량(羅漢道場)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사찰이다. 나한은 여섯가지 신통(神通)과 여덟가지 해탈을 모두 갖추어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이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이라 한다. 이곳에 특이하게도 효령각을 만들어서 효령대군의 영정(경기도 문화재 제81호)을 봉안하고 있다. 1411년(태종 11), 전국을 떠돌던 양녕과 효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관악사를 현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를 바꾼 이유는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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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녕은 왕세자 자리를 양보했을까? - 대단히 미묘한 심리상태?
효령은 세자 자리에 대하여? - 한번 노려보자 했으나 깨끗이 포기하고
화끈하게 충령을 밀어 주지 뭐 까짓거.... ?
과연 그랫을까?
진실은 양녕대군 맘 속에 잇을거 같다
굿~~~굿!~~~~
오늘 관악산 연주대 에 대해서 ~~~~
방배역에 있는 청권사에 대해서 ~~~
의미를 알고 나니 더욱 새롭다~~~
그러게...
글을 읽다보니 아버지 태종에대한 불만과 두려움도 한 몫했을듯...
형님들의 그마음을 헤아려 예우했다는 세종님도 위대한 왕이었음이 맞는 듯하다
새로운 가설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네..
우리들이 국사시간에 줄줄 외워서 공부한것들이 새로운 의혹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