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조용기 목사의 65년 목회후 하나님 품으로 떠나 가시다 2021년09년14일...국민일보 설립자이자 20세기 세계적 복음 전도자로 존경받던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 14일 별세했다. 고인은 하나님의 품으로 되돌아갔지만, 기독교계는 또 한 분의 귀한 영적 지도자를 잃었다. 한국은 물론 지구촌 곳곳의 기독인,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고인을 떠나보내는 깊은 아쉬움을 나누고자 한다.기독교계 귀한 영적 지도자 잃어-조 목사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 손에 꼽히는 복음 전도자였다.
1958년 5월 서울 은평구 대조동 천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뒤 30여년 만에 78만명의 성도를 결집하는 폭발적인 부흥을 이뤄냈다. 73년 헌당예배를 올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 최대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고인은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과 국제교회성장연구원 등을 통해 성령운동을 주도하고 교회 부흥의 원리를 전 세계와 공유했다. 아호 영산(靈山) 그대로 그는 영적 성장을 떠받치는 큰 산이 됐다.조 목사는 80년대 이후 해외 선교를 강화했다. 아프리카 인도 남미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주도한 성회에는 군중이 운집했다. 92년 러시아 모스크바 대성회엔 4만명이 모여 1만5000여명이 결신했고, 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는 150만명이 참석하는 기적을 보여줬다.
그는 71개국에서 개최한 370여 차례 성회를 통해 1500만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외 교회 1194곳을 개척함으로써 세계 성회 부흥의 중심에 우뚝 섰다.조 목사는 전인 구원의 사역에도 힘을 기울였다. 굿피플, 사랑과행복나눔재단, 심장병어린이돕기, 영산조용기자선재단, 엘림복지회 등을 통해 인권 및 환경과 관련한 사회 활동을 펼쳤고 아동과 청소년, 노인을 위한 맞춤형 복지의 틀을 제시했다. 순복음교회 성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너도나도 헌혈에 나섰던 광경은 사회적 책임의식과 공동체 정신을 교계와 우리 사회에 환기했다. 또 신앙계와 FGTV, 굿티비 기독교복음방송 등을 설립해 문서 및 방송 선교에도 진력했다. 88년 하나님의 명에 따라 창간한 국민일보를 2006년 공익법인인 국민문화재단을 통해 한국 기독교계에 헌납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일꾼임을 보여줬다.
고인은 한세대와 순복음영산신학원, 미국 베데스다대 등을 설립해 교육에도 헌신했다. 남북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평양 조용기전문심장병원 설립 추진 등 대북 인도적 지원 활동에 앞장섰다.‘희망·긍정’ 65년 이어온 목회 인생-고인의 86년 삶과 65년 목회 인생을 관통한 것은 희망과 긍정의 신앙이었다. 고인은 요한3서 1장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를 가장 사랑해 평생 묵상했다. 예수를 믿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는 삶을 살며, 구원받은 성도가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돼 강건하게 된다는 삼중축복을 역설했다. 2018년 2월 4일 예배에서는 “꿈을 가슴에 품고 그 꿈이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늘 긍정적인 믿음의 선언을 할 때,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일상의 언어로 어려운 신앙의 원리를 쉽게 설명하는 조 목사 특유의 달변은 대중의 마음을 열었다.
확신에 찬 신앙고백과 영적 각성을 설파한 사자후는 6·25전쟁 직후 절망에 빠진 민중의 심금을 울렸다. 개발시대 이후 영적 공백으로 빠져드는 한국 사회를 향해 혼돈의 3차원 세계를 지배하는 4차원 영적 세계의 문을 열기 위한 영성을 강조했다. 고인은 지난해 7월 19일 마지막이 된 설교 ‘예수님과 강도’에서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이때 물질만능주의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섬길 것을 역설했다.한경직 강원룡 옥한흠 하용조…. 한국 교회는 고인에 앞서 많은 교계 원로들을 떠나보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족적과 영적 각성은 교계의 큰 자산으로 남아 우리 사회를 깨우치고 선한 곳으로 이끄는 역할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의 발자취 위에 더 새롭고 뚜렷한 흔적이 더해질 것임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인 뜻 이어 밝은 새벽 만들어가야..오늘 조 목사를 홀연히 하나님 곁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우리는 큰 슬픔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공유하고자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대면 예배가 축소·중단되면서 교회로부터의 원심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그의 떠남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인이 전후의 궁핍 속에서 믿음의 힘을 결집시켰듯 우리도 분열과 반목, 불신과 패덕이 기승을 부리는 이 어두운 시대를 물리치고 밝은 새벽을 반드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고인이 이 땅에서의 노고와 무거운 짐을 벗고 하나님 품에 평안히 깃들기를 기도하며, 믿는 이들의 슬픔이 잦아들기를 기원한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는 1936년 울산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부친 조두천씨와 모친 김복선 여사의 5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학, 유교, 불교 철학에 해박한 부친으로부터 다양한 지식을 습득했다.조용기 목사(앞줄 왼쪽)가 1939년 4세 때 생가에서 촬영한 사진. 뒷줄 왼쪽이 부친이고 왼쪽 두번째가 모친이다.조용기 목사(뒷줄 왼쪽 두번째)가 경남 언양국민학교 육상부 시절 울주군 육상대회에 참석 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부산 동래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1950년 부친이 울산 갑구 민의원 선거에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기술자가 되기 위해 부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마침 학교 근처에 미군 부대가 있어서 미군 병사들에게 영어를 배울 수 있었고 교장 선생님과 부대장 간 통역을 맡기도 했다.조용기 목사(오른쪽)가 부산공고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다.켄 타이즈 선교사가 1956년 조용기 목사에게 선물한 성경책.그러나 조 목사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 폐병에 걸린다. 그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 영어사전을 외우고 교과서를 독파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다 세 살 위 누나의 친구로 병문안을 온 동래여고 학생 김정애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됐다.병이 호전되지 않자 공기가 맑은 고향에 내려가 휴양을 하면서 부산으로 통원치료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인 켄 타이즈 선교사가 부산의 한 거리에서 인도하던 천막 부흥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게 됐고, 선교사의 통역을 도우며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게 됐다.분명한 확신이 없어 신앙적으로 갈등하던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기도를 했고 어느 날 찬란한 광채 속 나타나신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나고 성령 충만을 체험한다.조용기 목사(가운데)가 1957년 신학생 시절 수원 부흥성회를 가던 길목에서 기념촬영을 했다.조용기 목사(왼쪽 두번째)가 1958년 순복음신학교 재학 시절 선교사와 함께 촬영했다.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6년 서울에 올라온 조 목사는 순복음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여기서 평생 목회의 동역자이자 장모인 최자실 목사를 만난다. 조 목사는 탁월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학교장 존 허스톤 선교사의 통역을 맡았고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했다.
“신문은 시민의 것” 조용기 목사와 국민일보-+2021-09-14 16:08 2018년 국민일보 창간 30주년 행사에 참석한 조용기 목사. 국민일보DB..14일 별세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는 국민일보 설립자다. 1988년 12월 10일자 국민일보 창간호에 ‘이사장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조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 주요 교단 지도자들이 출발부터 이사진으로 함께 했다. 국민일보는 태생부터 초교파적 기독교 종합일간지였다.조 목사는 2008년 국민일보 창간 20주년을 기념사에 “신문은 한 교회의 소유가 아니라 시민의 것으로서 사회에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저의 바램이었다”고 말했다.
2006년 국민일보가 국민문화재단 출범을 계기로 한국사회와 교회를 위한 공익 매체로 거듭난 이후 나온 발언이다.당시 조 목사는 “국민일보가 겪어온 길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라면서도 “많은 굴곡과 역경을 극복하고 한국사회와 교회 속에 튼튼히 뿌리내린 것은 한국교회와 성도님들의 관심과 성원 그리고 임직원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명실 공히 한국사회의 정론지로서, 6만 교회와 1200만 한국 크리스천의 대변지로서 뿐만 아니라 복음 실은 일간지로서 일반 국민에게도 사랑받고 신뢰받는 매체가 됐다”고 평가했다.국민일보 사시인 ‘사랑·진실·인간’은 조 목사가 직접 정했다. 그는 “사랑이 있는 이웃, 진실한 사회,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세상이 되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참된 신문이 되기를 소원했다”고 배경을 밝혔다.‘어둠을 헤치고 태양처럼 환하게/ 민족의 가슴에 밝은 소식 전하자’로 시작하는 국민일보 사가 역시 ‘조용기 작사 김성혜 작곡’이다. 부부는 7개월의 시차를 두고 2021년 별세했다.
2021-09-14 07:52..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의 65년 목회를 요약하면 오중복음(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재림), 삼중축복(영혼과 범사 잘되는 축복, 강건하게 되는 축복), 4차원의 영성(생각 꿈 말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축약하면 절대 희망과 절대 긍정의 신학이다. 특히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라”는 당부는 영산(靈山, 조 목사의 호) 신학의 요체다.오중복음 삼중축복..평생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강조했던 조 목사는 1950년대 미국 오순절 계통 선교사들을 통해 순복음신학을 접했다. 한국전쟁 이후 절망에 빠진 가난한 민중에게 희망의 신학을 전파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기에 고통과 절망, 병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절대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조 목사는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은 강조했는데, 여기서 영혼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삼중구원이 나왔다.조 목사의 제자그룹인 ‘영제회’ 1대 회장인 손문수 동탄순복음교회 목사는 “조 목사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목회는 성령의 권능을 받고 가서 귀신 쫓아내고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었다”면서 “그 가르침대로 목회 현장에서 성령세례를 중시했더니 정말 이뤄지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손 목사는 “조 목사는 성령세례를 중시했는데, 성령의 역사가 불일 듯 일어났다”면서 “앞으로 조 목사처럼 한국교회에 성령에 사로잡힌 지도자가 나온다면 제2의 부흥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1953년 시작된 신생 교단이었던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폭발적 부흥에 힘입어 국내 3대 교단에 올라섰다. 순복음선교회는 65개국에 66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 대규모 단체가 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육연구소장 출신인 이일성 파주 순복음삼마교회 목사는 “조 목사는 성령운동을 전개하며 전국에 520여개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키워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설명했다.이 목사는 “순복음 교단이 장로교, 감리교 다음으로 성장했던 비결도 조 목사의 개척정신에 있다. 정말 1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라고 강조했다.
박명수 전 서울신대 교회사 교수도 “조 목사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교회와 사회에 성령운동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준 지도자”라면서 “산업화 시대 한국 사람들이 부정적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개한 새마을운동과 조 목사의 성령운동을 통해 사고를 바꾸고 사회변혁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오순절 교단은 해방 이후 작은 교단에 불과했지만 조 목사의 왕성한 성령사역을 통해 한국교회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이동했다”고 분석했다.4차원의 영성..그는 기하학적 비유를 통해 믿음 기도 꿈 말 등에 관한 영적 원리를 소개했다. 그것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 믿음 비전 꿈 언어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성령께서 인생의 운명을 바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다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변화 받아 4차원의 생각과 믿음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이루어진 것으로 믿는 것이다.
이것은 더 높은 차원이 낮은 차원을 지배한다는 원리에서 착안했다. 말씀과 성령의 관계, 성경적 원리를 성도들의 삶 속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십자가와 성령의 복음을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들고 ‘구원’과 ‘희망’을 제시한 것이다.장훈태 전 백석대 선교학 교수는 “러시아 오지와 케냐 우간다를 갔을 때 현지 목회자들로부터 ‘혹시 닥터 조를 아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 정도로 조 목사는 전 세계 목회자에게 적잖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이어 “한국교회의 큰 별이었던 조 목사는 항상 예수를 강조했으며, 청중에게 비전과 꿈을 심어주고 주님을 영접하도록 인도했다”면서 “설교 후 늘 영과 육의 치유를 위한 기도와 선포로 성도를 깨웠던 참된 목회자였다”고 말했다. ..한국교회 이끈 선각자...조 목사는 한경직 김준곤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를 이끈 대표적 지도자였다.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면 조 목사를 초청해 안수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유석성 안양대 전 총장은 “조 목사는 단일 교회로 가장 큰 교회를 이루고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기독교 선교에 큰 역할을 한 목회자”라고 평가했다. 이어 “교회의 사회적 실천, 봉사에 앞장서고 복음전파라는 교회 본래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것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고 덧붙였다.장 교수는 “조 목사는 한국교회 성장과 세계선교의 획을 그었다. 한국교회 성장모델을 세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어 “50년 전 매스미디어 선교를 시작하고 대규모 주차장을 마련하는 등 세상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예측했다. 요즘 말로 하면 ‘메타버스’를 타고 움직인 선각자였다”고 평가했다. 국민일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