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웰 컴 투 코리아, 강진환
민정은 플랜카드를 옆구리에 끼고서 게이트를 나왔다. 태양이 작열했다. 매미 소리가 공항을 빼곡하게 뒤덮었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민정은 손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몇 번째 전화인지 헤어릴 수 없었다. 플랜카드를 들고 서 있을 때부터 공항 주변을 맴돌 때까지 민정은 핸드폰이 뜨거워지도록 노인의 손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아직 한국에 도착하지 않았겠거니 생각했다. 홍콩에서 오는 비행기가 도착했음을 알고는 수속에 문제가 있거나 짐을 챙기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자기암시를 걸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이어지던 전화가 끊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민정은 깨달았다. 이 인간……일부러 전화를 피하고 있다!
“진짜 미치겠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이기나 해보자. 그래. 오십 통 채운다. 내가!”
민정은 손가락에 힘을 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플랜카드는 이미 구깃해졌다. 민정은 등 뒤로 계속 들려오는 핸드폰 벨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노인의 손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정의 수화음과 함께 뒤에서 들리는 벨소리도 커졌다. 거 참! 전화 좀 받지. 그대로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달래던 민정은 신경을 긁는 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민정의 뒤에는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정갈하게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날카로운 남자의 눈매와 퍽 잘 어울렸다. 말쑥하게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는 비행기보다는 모던한 파티에서 더 빛이 날 것 같았다. 다부진 체격의 남자의 옆에는 새카만 캐리어가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은 아니었지만 심술궂은 얼굴은 아니었다.
남자를 힐끔 스캔하던 민정의 눈길이 남자의 손목에 멈췄다. 구릿빛 피부의 손목에 시계가 번쩍이고 있었다. 신상 피아제 시계! 민정의 눈이 커졌다. 피아제 신상을 사고 싶다고 울부짖던 동생이 군침을 흘리면서 보고 있던 시계였다. 수백 만 원의 시계를 차고 있다니 꽤나 성공한 사업가인 모양이라고 민정은 생각했다.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벌써 성공이라니. 참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이번에는 거머리군.”
인상을 찌푸리던 남자가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민정의 수화음이 끊겼다. 꺼림칙한 기운이 민정을 덮쳤다. 거머리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민정이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남자의 벨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남자의 짜증이 이어졌다. 민정은 마지막으로 확인을 해볼 심산으로 전화를 끊었다. 남자의 벨소리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남자가 떠나려던 찰나에 민정은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랜 몸놀림으로 남자에게 다가가 남자의 핸드폰을 살폈다. 남자의 핸드폰에 민정의 전화번호가 떴다. 남자가 무심하게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민정이 남자의 옆에 불쑥 나타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너무 비굴하게 인사했나 잠깐 후회가 밀려왔지만 일단은 첫만남에 좋은 인상이라도 주자 싶었다.
“강진환 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얘기 들으셨죠. 오늘부터 아무르에서,”
“거기까지.”
“네?”
“소개 됐다고. 내가 사람 바글거리는 공항에서 종일 당신 소개나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해보이나.”
“아니. 그래도 같이 일하게,”
“거기까지. 어차피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으니까.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할아버지께 전해. 공연히 힘 빼지 마시라고. 상속문제까지 흔드시면서 거머리 같은 여자 하나 옆에 붙이시는 거 유치하시다고.”
진환의 입술을 비집고 냉랭한 말이 나왔다. 민정은 여유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콜센터의 진상이 수화기에서 나와 현실에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일단은 진환의 말을 유연하게 넘길 필요가 있었다. 입놀림이 좋은 진환에게 조금의 상처도 받지 않았다는 뻔뻔한 모습으로 진환을 대해야만 3일이 아니라 3개월을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이만 가봐.”
진환이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진환의 걸음은 이미 승리의 여유로 가득했다. 민정이 재빠르게 진환의 앞을 가로막았다.
“못 갑니다.”
“이만 가보라는 말. 못 들었어?”
“듣기는 했는데……가게로 가시는 길 아닌가요.”
“간다면.”
“차 가져오셨음 제가 운전해서 모셔다 드릴게요.”
호랑이 굴에 들어갔으니 이제 호랑이 다리를 잡고 늘어질 때였다. 민정이 진환의 캐리어 손잡이를 잡으려고 할 때였다. 진환은 잽싸게 민정의 손아귀로부터 캐리어를 빼냈다. 무언의 캐리어 쟁탈전이 벌어졌다. 진환과 민정의 사이로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의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그들을 피해 슬금슬금 멀리 돌아갔다.
“제가 은근히 운전은 잘해서요.”
“됐고. 운전은 내가 해.”
“그럼 전?”
“본인 집으로.”
진환이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서는 민정을 지나갔다. 상속문제와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문제로 진환은 홍콩에서 한국으로 날아왔다.할아버지의 제안을 받은 사람들과 이런 식으로 몇 번 조우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전의 사람들은 제정신이었다. 무시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면 꿈틀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민정은 달랐다.
거머리처럼 붙어 떨어질 기색이 없었다. 진환은 잔걸음으로 자신의 뒤를 따르는 민정을 피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무섭게 따라붙는 민정을 보니 어서 할아버지와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거머리를 붙이고 살 수 없었다. 진환은 민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공항 주차장에 있던 차에 올라타 문을 잠갔다.
“강진환씨.”
민정이 차창에 붙어 애절하게 진환의 이름을 불렀다. 진환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시동이 걸린 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럼 가게에서 보는 건가요.”
진환은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진환의 차는 순식간에 주차장을 벗어났다. 진환의 차를 타고 가게로 가겠거니 생각했던 민정은 허망한 얼굴로 진환의 차가 빠져나간 곳을 바라봤다.
“그래. 가게에서 보자. 개싸가지.”
민정이 이를 갈았다. 천사같이 착한 사람을 만나기는 이미 실패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3개월의 여정이 결코 쉽지는 않은 것 같았다. 민정은 서둘러 택시를 잡고는 진환의 뒤를 따랐다. 두고 보자. 개싸가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쪽에서 먼저 백기를 들고 사라지는 법은 없을 거다.
이쪽도 이판사판이라고옷!
***
민정은 인천공항부터 아무르까지 끈질기게 진환을 추격했다. 택시비를 내고 가게에서 들어선 민정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편안한 분위기로 가득하던 아무르가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가게는 침묵이 가득했다. 테이블부터 직원들까지 모두 질서정연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숨을 죽이는 직원들의 모습에 민정은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었다.
민정은 사장실을 기웃거리고 있는 직원들을 헤치고 지나갔다. 사장실 가까운 곳에는 기태가 서 있었다. 기태는 며칠 전부터 아무르에 출근했던 민정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 준 동갑내기 친구였다. 기태는 스포츠보다는 드라마나 연예인에 대해 떠드는 것을 더 좋아했고 미친 친화력이라는 별명의 소유자였다. 불과 며칠 만에 기태와 스스럼없는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기태의 사교성에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뿔난 마왕 떴잖아.”
“마왕? 뿔나? 그게 뭔데.”
“오 마이 갓! 마왕에 대해 전혀 들은 게 없다고? 전혀? 나는 다 알고 시작한 줄 알았는데?”
“그게 뭔데. 마왕인지 졸개인지가 그렇게 중요해?”
민정에 발언에 사장실을 향해 목이 빠져라 귀를 대고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민정에게 몰렸다. 기태는 볼드모트의 이름을 말하는 해리포터를 보고 놀란 마법사처럼 화들짝 놀랐다. 쏜살같이 기태는 민정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 내가 살린 줄 알아. 감사하게 여기란 말이야.”
“뭘 살려. 내가 뭘 어쨌는데.”
“마왕의 손아귀로부터 구했지. 마왕한테 잘못 걸리면 죽음이야. 데쓰!”
“그 개싸가지가 여기 있다는 거지.”
민정은 입을 막고 있는 기태의 손을 떼어냈다. 일단은 적진으로 돌진하기 전에 동태를 살피는 것이 필요했다. 민정은 사장실의 문에 귀를 대고는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날 줄 알았는데 사장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민정은 문에 손을 짚고 몸을 더욱 가까이 대려던 찰나였다.
사장실의 문이 열렸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직원들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민정의 뒷덜미를 잡고 도망을 치려다가 실패한 기태와 귀를 대고 있는 모양대로 굳은 민정만이 서 있었다. 진환이 자신의 가슴팍 가까이에 귀를 대고 있는 민정을 내려봤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여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이제는 별 이상한 여자를 다 데려다 놨군.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지.”
“어……멀리 여행 좀 다녀오시겠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아는 게 없어서. 예. 없습니다. 암껏도 모릅니다!”
“총지배인은.”
“홀에 계실 겁니다.”
“이쪽으로 오라고 해. 지금 당장.”
“옙!”
기태가 부리나케 홀 쪽으로 뛰어갔다. 제 말을 끝낸 진환은 사장실의 문을 세게 닫았다. 민정은 앞날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멋대로 화내고 호령하고. 능력도 외모도 모두 넘겨줬지만 성격만은 싸가지 중에 싸가지인 남자. 말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뿔난 마왕이라는 진환의 모습이 무섭기는 했지만 민정은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진환을 어르고 달랠 생각이었다.
온갖 달콤한 말로 와인의 매력을 던지면 의외로 쉽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서희가 말로 전쟁을 하지 않고 강동 6주를 얻은 것처럼 민정은 말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민정은 조심스럽게 사장실의 문을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서랍 속에 있던 부서진 목걸이를 들고 있던 진환이 민정을 발견하고 서둘러 목걸이를 숨겼다.
“이미 공항에서 이야기는 끝난 걸로 아는데.”
“제 대답은 못 듣고 가신 것 같아서요.”
“꼭 들어야 하나.”
“네. 그게 저희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해답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민정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애초에 민정을 고용한 사람은 진환이 아니라 진환의 할아버지였다. 고로 지금 민정을 해고할 수 있는 사람도 진환의 할아버지였다. 민정은 조금 더 열정적으로 진환에게 다가가자고 다짐했다.
“당신이 나가는 거. 그게 해답이야.”
민정의 부드러운 말을 진환은 단칼에 잘랐다. 민정은 이내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꾸역꾸역 참았다. 이번에는 간절함으로 승부를 보자. 자기도 사람인데 마음이 흔들리겠지.
“저……여기서 오래 일하고 싶어요. 강진환씨한테 와인 지식을 알려주면 꿈이 이루어질 것도 같은데.”
민정은 순수한 눈빛을 쏟아내면서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애교에도 진환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민정은 진환이 와인의 시작을 레드 와인으로 시작해서 와인은 참 맛이 없는 술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 편견이라면 깨줘야지. 민정은 진환이 와인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려 안간힘을 썼다.
“저희 와인 있는 곳으로 가볼까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랬다. 싱싱한 포도와 짙은 와인의 향기를 맡으면 자연스럽게 와인에 대한 애정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 정규직으로 가는 첫발은 진환을 포도밭에 데리고 가는 것에 있다고 민정은 확신했다.
“와인은 이미 지겹게 보고 있어.”
“아니요. 만드는 거요. 직접 보러 같이 가요. 생각보다 열차타면 가깝거든요. 공기도 좋아서 산책하면 기분도 좋아지구……분명 좋을 거예요. 속는 셈 치고 같이 가요!”
“내가 왜 당신한테 속아서 거길 가.”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진환은 굳세게 민정의 회유를 막아내고 있었다. 어느 방법도 통하지 않고 있었다. 인정에 호소하거나 와인 체험의 기회도 모두 불발이었다. 민정은 답답함에 이마를 긁적거렸다. 민정이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던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탈모로 고생을 하고 있는 아무르의 총지배인인 종구가 사장실로 들어왔다. 삐질 땀을 흘리는 종구의 이마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종구는 진환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장실 중앙에 있던 소파의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진환과 최대한 멀찍이 거리를 유지하려는 종구 나름의 꼼수였다.
“할아버지 어디 계십니까.”
“잠시 여행을 가신다고만 하셔서 자세한 사항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사장님이 오시면 따악! 두 가지만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뭐죠.”
“하나는 당분간은 찾지 말라고 하셨고요. 나머지 하나는……거기 김민정씨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사장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시겠다고.”
사장으로서의 권한을 모조리 압수한다는 소리에 진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진상 고객이 나타났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눈을 굴리면서 사태를 파악하던 종구가 소파의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만 일 보세요.”
“예. 거시기 그 뭐시냐. 뭐다냐.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바로바로 말씀해주십쇼. 그럼 좋은 시간 되십쇼옷!”
종구는 무사히 살았다는 사실에 미소를 지으면서 사장실을 나갔다. 직원들은 사장실에서도 말끔하게 살아남은 종구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사장실에는 진환과 민정만이 있었다. 진환은 책상에 있던 명패를 매만졌다. 거머리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사장의 권한은 모두 박탈한다라……가히 진환의 할아버지가 내민 초강수였다.
진환의 할아버지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정과 같은 목적으로 진환에게 온 모든 사람들 중에 진환에게 와인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환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초강수를 내밀어도 자신이 먼저 백기를 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이 없나.”
“저……요?”
“그럼 누가 또 있어?”
“아……저는 강진환씨 교육만 맡으면 되는 걸루.”
“베지도 못할 나무 괜히 쳐다보지 말고 나가서 일이나 해.”
민정은 진환이 내뿜는 찬기운에 밀려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장실을 나왔다. 사장실을 나와서 민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없었다. 진환의 할아버지가 부탁한 일은 진환을 교육시키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민정은 아무르의 총주방장인 석만의 허락을 받아 주방에서 잡일을 하거나 서빙을 하는 것을 돕기도 하면서 호시탐탐 진환에게 접근할 방법만을 궁리했다.
취할 수도 취할 수 없을 수도 없는 계륵같은 민정을 보면서 진환은 하루라도 빨리 민정이 포기하기를 바랐다. 진환은 민정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무시를 하다보면 으레 민정이 도망갈 줄 알았다. 확신에 찼던 진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민정은 진환이 밥을 먹고 있을 때나,
“냄새 좋죠? 맡아 봐요. 와인에 호기심이 막 들죠?”
“밥 맛 떨어져.”
“왜요. 냄새만 좋은데.”
“와인 값은 계산했어?”
“아뇨. 이것도 수업의 일환이니까,”
“수업의 일환 좋아하네. 여기 와인 값 받아.”
진환이 업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나,
“사장님 가십니까.”
“뭐야.”
“집에 가시는 길에 포도밭에 가면 더 최곤데.”
“완전 돌았군.”
심지어 진환이 화장실에 갈 때까지도,
“여기 남자 화장실이야.”
“알아요.”
“남자였나.”
“아뇻! 그게 아니구 사장님 만나려고 왔죠. 저희 수업은 언제쯤 시작할까요.”
민정은 끈덕지게 진환을 찾아냈다. 이 여자는 왜 이리도 거머리 같은 걸까. 웬만하면 다른 사람처럼 떨어질 법도 한데……자존심도 없나. 민정을 보던 진환은 고개를 내젓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대답은 해주고 가셔야죠. 사장님! 벌써 이주째 대답도 안 해주구.”
차마 화장실은 습격하지 못하는 민정은 입구에서 목을 빼고 진환에게 소리쳤다. 민정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다시 민정에게 돌아왔다. 타협점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진환과 민정은 동시에 지쳐가고 있었다. 진환은 미팅을 잡거나 결제를 하는 업무의 일선에서 권리를 빼앗겼다.
가끔 진환은 사장의 권한을 찾기 위해 민정과 타협할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쇼윈도 사제관계로 민정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민정이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와인에 대한 지식을 배울 생각도 없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진환은 민정이 있던 화장실의 입구를 재빨리 지나 사장실로 들어갔다.
“또 들어갔네.”
닫힌 사장실을 보면서 민정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진환은 자신의 허락이 있거나 급한 용무가 아니면 사장실 출입을 금지했다. 만일 누구라도 진환의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직원들의 칼퇴근을 보장할 수 없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진환은 협박을 하면서도 서글서글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진환의 어색한 미소는 오히려 마왕이라는 이미지만 더욱 부각시켰다.
여기서 문을 두드린다면 민정은 암행어사와 백성들에게 몰매를 맞는 변사또의 신세가 될 것이 분명했다. 문을 두드리던 민정이 그대로 손을 말아 쥐었다. 오늘은 물러간다! 물러가!
“마감합시다!”
“드디어 퇴근이네.”
한참 동안 사장실을 맴돌던 민정은 큰 소득없이 열일곱 번째 마감 시간을 맞이했다. 마지막 손님들이 나가고 직원들은 분주하게 가게 정리를 했다. 민정은 팔을 걷어붙이고 직원들을 도와 홀과 주방을 정리했다. 직원들이 유니폼을 갈아입을 때도 민정은 묵묵하게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었다.
처음 가게로 출근한 날부터 지금까지 민정에게 일을 시키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인 사람들 틈에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총주방장인 석만과 기태가 유일했다. 가끔 면접 날에 자신을 훑어봤던 분홍 립스틱을 칠한 수경의 괴롭힘도 민정은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신입하고 마왕하고 사이가 아주 그냥!”
“신입 와요. 쉿!”
진환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은 민정에게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민정에게 관심을 가지던 일부 직원들조차도 민정을 멀리했다. 공연히 민정과 얽혀 마왕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직원들은 민정을 철저하게 고립시켰지만 민정은 악착같이 직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가히 생존 본능이 만든 끈기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직원들이 인사를 하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진환은 홀의 불이 꺼지는 순간에도 사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민정은 진환의 끈질김에 고개를 내젓고는 기태와 인사를 나누었다. 주방에 남아 있던 석만은 모두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주방의 불을 껐다. 굳게 닫힌 사장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외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석만이 민정을 발견했다. 석만이 손을 흔들자 민정이 꾸벅 인사를 했다. 석만은 가게에서 근무를 가장 오래 한 직원이었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요리를 배운 석만의 음식은 각종 매체부터 까다로운 맛칼럼니스트까지 모두에게 찬사를 받았다. 회장의 신임을 얻고 있는 석만은 진환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새 메뉴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사장님.”
“형편없군요.”
“시정하겠습니다.”
홍콩에서 돌아온 진환은 제일 먼저 주방을 습격했다. 기태에 말에 따르면 진환은 석만의 음식을 최악이라고 평했다고 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마왕은 역시 마왕이었다. 진환은 석만의 음식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렸다. 기태에게 석만의 일을 들으면서 민정은 석만에게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마왕에게 핍박받는 동지들이여! 뭉치자!
“사장님은?”
“사장실에 계속 있어요. 보물이라도 숨겼나. 거기서 꿈쩍도 안하는 것 같아요.”
“오늘 만나기는 했고?”
“아뇨. 제가 없을 때만 나왔었대요. 무슨 초능력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구. 요즘에는 무슨 마왕 호위무사라도 된 것 같다니까요. 사장실만 지키고 있으려니까 다리만 아프고.”
민정이 시큰거리는 다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입술을 샐쭉거리는 민정을 보고 있던 석만은 민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 이해가 안가요.”
“어떤 점에서?”
“와인하고 평생 붙어 살 것 같은 사람이 와인이 싫다고 하니까 신기해서요. 좋아할 법도 한데. 와인이 맛이나 향에서 꽤 매력적이잖아요. 분위기 잡을 때도 좋고 몸에도 좋구.”
“누구나 하나씩 입에 대지 못하는 것들이 있잖아.”
석만은 예시를 들기 위해 잠자코 생각을 했다.
“예를 들면……미역국이라든가.”
“미역국이요?”
“누가 떠올라서.”
“신기하다. 주방장님은 모든 음식을 다 잘 드실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래도 음식도 하시니까.”
“어쩌다 보니…….”
석만이 말끝을 흐렸다. 석만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더 깊어지는 것을 보고는 민정은 더 묻지 않았다. 석만은 민정의 배려가 고마웠다. 미역국이라는 단어를 꺼내기 무섭게 추억 속에 살았던 사람의 모습이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생각나 마음이 아릿해졌다. 미역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코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소고기를 자글자글 볶아 만든……그 미역국이 참 생각났다.
“그래도 노력은 해볼 수 있는 거잖아요.”
“도전에는 용기가 필요하니……민정씨가 잘 도와줘.”
석만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민정을 봤다.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민정만은 진환의 곁에 오래 있어주기를 바랐다. 모든 사람들이 진환을 떠났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지지 말기를.
“포도밭에 가서 냄새만 맡아도 관심은 생길 것 같은데. 중요한 건! 도무지 데리고 갈 방도가 없다는 게 문제죠.”
민정이 한숨과 함께 답답한 마음을 밀어냈다. 사춘기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엄마가 싫어욧! 혼자있고 싶어욧! 민정은 뿔난 얼굴로 방문을 걸어 잠근 사춘기 마왕 아들을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정당당한 방법을 썼는데도 다 실패했다면…….”
“했다면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다른 방법이라면……따라다니지 말아 볼까요? 갑자기 모르는 척하면 궁금해서 말이라도 걸겠죠.”
민정은 마왕 무시라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이 바로 밀고 당기기 작전이다!
“그럼 오히려 환영할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석만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민정이 날름 자리에서 일어나 석만에게 다가갔다. 민정의 귓가로 고민을 단번에 날려버릴 묘책이 흘러들었다. 이거다. 이 생각은 왜 못했던 걸까. 민정의 얼굴에 악마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 방법까지 쓰는데 설마 내뺄 리가 있겠어? 절대 안 되지. 우리 할머니 포도밭에 가게 되고 말고. 자기가 뭘 어쩌겠어. 갈 수 밖에 없는 거지!
“어때.”
석만이 민정에게 물었다. 민정은 덥썩 석만의 손을 잡았다.
“주방장님은 역시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생명의 은인까지야.”
“아뇨. 은인이죠. 이 은혜……꼬옥 갚겠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받던 석만은 먼저 버스에 탔다. 석만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민정은 석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댔다. 뒤이어 온 버스를 타고 민정도 집으로 향했다. 버스가 힘차게 출발했다. 신나게 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순식간에 민정의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천군마마를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온 민정은 곧장 창현의 방문을 열었다.
“아이고 동생님. 공부하시고 계셨습니까.”
창현이 징그럽다는 눈빛으로 민정을 봤다. 아무르에만 사춘기 마왕 아들이 있는 줄 알았더니 집에도 하나 더 있을 줄이야. 민정은 불쑥 올라오는 화를 참으면서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왜 이래. 잘렸어?”
“에이. 잘리기는. 그냥 응원해주려고 왔지. 바빠?”
“무슨 부탁할 일이라도 있나봐. 뭔데 그래?”
“이거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대. 별 거는 아닌데…… 열 시에 우리 가게로 좀 와라.”
창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중요한 일을 맨입으로 하시면 되나.”
창현이 두 손을 벌렸다가 닫았다가를 반복했다. 금전적 이득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나름의 의사표명이었다. 허! 그래. 공짜는 없다는 거지. 가만 있어보자. 뭐 걸어야 구미가 확 당기려나. 민정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게임 아이템은 녀석의 전투력을 급상승 시킬 수 없었다.
얼핏 공항에서 진환을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피아제 시계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시계다. 그 시계라면 창현은 마지막 전쟁에 임하는 장수만큼이나 진지한 자세로 이 일에 동참할 것이었다. 민정의 입술 사이로 음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뭐야. 설마. 맨입이야?”
“동생님께 설마 맨입일 리가 있나요. 피아제 시계 건다. 것도 따끈따끈한 신상으로다가!”
“뭐…… 내가 움직여줘야겠네. 꼭 시계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고. 물보다 진하다는 피 때문에 움직인다. 내일 가게로 가면 되는 거지?누나를 위해 내 한 몸 희생해야지.”
창현의 머릿속은 피아제 시계로 가득 차고 있었다.
“어. 딱 열 시에 와야 돼. 가게 들어올 때는 일단 나 아는 척 하지 말고 무조건 왼발부터 먼저 들이밀고 들어와.”
“갑자기 무슨 왼발 타령?”
“그런 게 있어. 꼭 왼발부터다. 오른발 들이밀면 시계고 뭐고 없어!”
“것만 하면 시계는 바로. 알지? 그럼 좋은 거래 감사.”
창현이 콧노래를 불렀다.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던 밝고도 괴기한 노래였다. 창현은 저녁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민정의 어깨를 열심히 주무르기까지 했다.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만큼이나 엄숙한 거래의 현장이었다. 민정 남매의 은밀한 거래와 함께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화와 권유를 지나 내기까지 이어지는 싸움에서 이제는 이겨야했다.
***
단비가 내렸다. 실로 오랜만에 내리는 비였다. 연이은 가뭄으로 고생하던 땅에 빗물이 스몄다. 평소보다 늦게 아무르에 도착한 민정이 급히 우산을 접었다. 우산살을 타고 빗물이 떨어졌다. 민정은 옷에 스민 빗물을 털면서 가게 문을 열었다.
순간적으로 번개가 쳤다. 환한 빛이 사라지기 무섭게 어둠이 번졌다. 강한 천둥소리와 함께 가게에서 스산한 기운이 몰려왔다. 민정은 주변을 살피면서 조심스레 가게로 들어섰다. 폭풍우가 가게를 뒤집고 간 것 같았다.
“이 긴장되고 음침한 분위기는 언제쯤 스탑 되는 건지 몰라. 하긴 뭐. 마왕이 가게를 점령해도 살 수는 있겠지. 오늘 마왕한테 한참이나 깨진 쟤도 살아있는데. 웃자. 스마일.”
“누가 깨져?”
“으맛! 놀랬네. 왔어?”
“분위기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어둡고 칙칙한 냄새가 멀리서부터 풍기지 않아?”
기태가 몸을 최대한 움츠리면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수경을 가리켰다. 테이블에 기대어 서 있던 수경은 주문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넋이 나간 상태로 입만 벌리고 있었다. 수경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던 분홍 립스틱은 이미 입술에서 말라비틀어졌다. 구석에 박힌 수경의 목표는 철저한 외모 관리로 돈 많고 잘생긴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었다.
가게 직원들에게 있어서 진환은 마왕일 뿐이었지만 수경에게 진환은 빛과 소금 같은 존재였다. 홍콩에서 진환이 돌아온 직후부터 수경은 외모 관리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런 수경에게 가장 큰 적은 김민정이었다. 민정이 언제나 진환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통에 제대로 된 작업은 시작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은 수경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두 사람은 어느새 아무르를 대표하는 앙숙이 됐다. 물론 진환은 두 사람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수경의 존재에 대해서도 일체 알지 못했다.
“마왕한테 작업 좀 건다고 향수 좀 사서 뿌렸대. 이성을 유혹하는 향수라던데.”
“향수를 뿌리고 왔다고?”
“나한테 손목까지 들이밀면서 성적 매력 타령하더라.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친구의 원수는 눈도 마주치지 말라셨는데. 내가 그깟 향수 하나 맡아서 홀딱 반할 것 같아? 어림도 없는 소리지.”
“그래서 넘어갔어?”
민정이 수경을 힐끔 봤다. 수경은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성적 매력은 개뿔. 와인바에서 향수 뿌린다고 욕만 엄청나게 먹었지.”
마왕의 강력한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수경은 손목에 남은 향기만 맡고 있었다. 수경이 크게 한방 맞았다는 소리에 싱글벙글 웃고 있던 민정의 웃음이 멈췄다. 마왕이 열을 냈다고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수경이 꽈배기처럼 몸을 꼬아서도 아니고 콧소리를 내서도 아니었다. 진환이 화가 났던 이유는 수경이 향수를 뿌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향수 때문에……마왕이 화를 냈다고?”
민정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다른 이유가 아니라 향수 때문에?”
“롸잇! 향수 때문에! 퍼퓸!”
기태가 답답함에 소리를 높였다. 민정의 눈빛이 흔들렸다. 와인의 향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향수를 피하는 것이 좋았다. 향수의 향기에 와인의 향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진환이 진심으로 와인을 싫어하거나 와인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면 알 수 없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미 마왕이 알고 있다? 게다가 화까지 냈다?
처음에는 진환이 모든 와인 지식을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럼 진환이 와인을 싫어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석만처럼 누군가가 생각나기 때문일까. 여러 고민을 하다가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아무르 경력이 몇 년인데 그런 사소한 지식 하나 모르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참 별 걱정을 다하네.”
민정은 진환에 대한 걱정을 털어냈다. 진환이 와인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중요한 것은 진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었다. 정규직으로 가는 입구가 될 진환과 결판을 짓기 위해 민정은 주먹을 그러쥐고 세차게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김민정이에요.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민정이 문을 열었다. 가게나 사장실이나 무거운 분위기는 매한가지였다.
“무슨 일이지.”
“포도밭에 가자구요.”
“꿈도 야무지네.”
“야무지면 야무진 손놀림. 손놀림하면 과일 깎기. 깎기 안하는 과일은 포도. 포도하면 포도밭이니까 이참에 포도밭이나 가죠.”
민정의 말도 안 되는 말장난에 진환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참 특이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자신의 옆에서 조잘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한 걱정들을 잊게 만들었다. 진환은 아마 민정과 함께 있으면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러 놀리면 반응하는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포도 생각만 해도 구미가 막 당기지 않아요?”
“별로.”
“알이 꽉 차서 맛있게 익고 있는 걸 쏙 빼 먹는 재미! 고거 무시 못 하죠.”
진환이 지갑에 있던 카드를 한 장 꺼내 민정에게 내밀었다.
“성가시게 하지 말고 가서 포도 한 박스 배터지게 먹고 와.”
초강수였다. 민정은 이대로 진환에게 밀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서 카드를 가지고 꺼져. 진환의 눈빛이 전하는 강렬한 메시지를 민정은 읽어냈다. 진환은 얼이 빠진 민정의 얼굴을 감상하면서 아침에 기태가 사다 놓은 커피를 마셨다. 온기가 빠진 커피가 진환의 목구멍을 타고 몸에 퍼졌지만 꽤 나쁘지 않았다. 진환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원하신다면 긁죠. 포도밭으로 가는 기차 두 장.”
초강수의 대응법은 초강수 하나였다. 민정은 진환이 준 카드를 들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헛소리야.”
진환이 카드를 빼앗기 위해 팔을 뻗었다. 민정이 더 높이 카드를 들었다. 의자에 앉았던 진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드를 뺏기는 일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내기해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민정이 소리쳤다.
“무슨 내기 타령이야.”
“서로 물러날 생각 없잖아요. 그러니까 정정당당하게 내기해서 한방에 승부를 보자는 거죠.”
민정이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 남자가 정말 걸려들었나. 모든 사람의 오금을 절게 만들 정도로 깐깐한 마왕이니 한 번은 튕기지 않을까. 맙소사! 눈 하나 깜빡이지 않다니. 이거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하는 거 아니야?
“이제는 정말 결판을 내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게 서로한테 좋잖아요.”
목이 마른 놈이 말이 더 많은 법이었다.
“어떤 점에서?”
“그래야 무슨 일이라도 진행될 거 아니에요. 제가 영원히 아무르를 떠나든가 강진환씨가 포도밭에 가든가. 밑지는 장사는 아니잖아요. 어때요?”
“무슨 속임수를 썼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마왕의 눈치는 신보다 빨랐다. 민정의 등이 오싹했다. 진환이 이미 속임수를 간파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민정이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열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민정은 깊게 숨을 마시고는 최대한 덤덤한 얼굴로 열 시 이후에 가게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 내미는 발이 왼발인지 오른발인지 맞추는 내기를 하자고 했다. 진환은 말이 없이 잠자코 민정의 말을 들었다.
“먼저 선택하세요! 그럼 됐죠?”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환에게 민정은 크게 외쳤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민정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다. 왼발은 외치지 않기를. 왼발은 피해주기를. 왼발은 외치지 않기를……민정은 아주 간절하게 빌었다. 진환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민정의 손에 땀이 흥건했다.
“왼발하지.”
“그럼 전……오른발이겠네요?”
민정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불만 있어?”
“아……아뇨. 제가 왜요. 제가 불만이 있을 일이 없죠. 하하.”
민정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창현은 지체없이 왼발을 들이밀고 가게에 들어설 것이었다. 자신의 대답을 듣고 심하게 동요하는 민정의 눈동자를 보면서 진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참 속마음을 알기 쉬운 여자네. 민정의 속임수를 간파한 진환에게서는 승리의 기운이 샘솟았다.
민정을 가게에서 해고하면 한동안은 잠잠하게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진환은 초강수를 두었던 할아버지와도 한바탕을 할 생각이었다. 완벽하게 가게의 경영권을 쥐면 총주방장인 석만도 무참히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민정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예전처럼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었다.
팔짱을 끼고는 자신을 보고 있는 진환을 보면서 민정은 한시도 몸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일단은 사장실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 계획 수정만이 살 길이다. 이대로 잘릴 수는 없다구!
“어디가. 여기 가만히 있어.”
“화장실 가고 싶어서요.”
“참아.”
“참으면 병 되는데.”
민정이 배를 붙잡고는 울상을 지었다.
“잠깐 참는다고 안 죽어.”
“죽으면요!”
“그게 나 때문이라면 적절하게 보상해주지.”
진환은 단호했다. 민정은 사장실에서 나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수도 없었다. 내기가 끝날 때까지 민정에게 허락된 공간은 사장실 뿐이었다. 꺼내줘. 민정은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진환을 쳐다봤지만 진환은 감옥의 감시자처럼 민정을 더욱 철저하게 감시했다. 열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민정은 사장실에 완벽하게 갇혔다.
09:45.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는 민정의 얼굴에는 초조와 불안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결전의 순간이 바싹 다가왔지만 민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창현이 예정대로 가게에 도착한다면 자신은 당장 해고 당할 것이었다. 그럼 다시 백조가 돼서 구직 생활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지친 얼굴로 와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월급날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회사라면 어디든 입사하겠지.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는 민정의 낯빛이 우중충해졌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백조가 될 수 없었다. 정규직이라는 글자를 생각하면서 민정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제 슬슬 나가보지.”
“저기요. 강진환씨.”
“그만 두자는 말이면 안타깝지만 불가야. 손해볼 일이 없으니 멈출 이유도 없지.”
“그게 아니라 제가 배가 너무 아파서요. 아까부터 살살 아픈게 체한 것 같은데. 약이라도 먹고 다시 하면 안 돼요?”
민정은 힘을 주어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진환이 민정의 얼굴을 살피면서 민정의 어깨를 잡았다. 진환이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민정의 마음이 들떴다. 신들린 환자 연기로 이 난관을 넘어가리라고 다짐했다. 민정은 자연스럽게 연기의 강도를 높이면서 가벼운 배앓이를 맹장염으로 둔갑시켰다.
진환의 눈치를 살피던 민정은 진환이 적당한 선에서 자신의 연기를 끊어주기를 바랐다. 맹장염의 정확한 고통이나 증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정의 연기를 간파했던 진환은 열심히 민정의 연기를 관람하고만 있었다.
“끝났나.”
진환이 물었다.
“아픈데.”
“배우는 무리겠네. 얼굴도 얼굴이지만 연기가 영 아니야.”
진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발연기도 아니었다. 발톱 연기라고 해도 후했다. 허리를 고부리고 있던 민정이 헛기침을 하면서 허리를 세웠다. 머쓱하게 웃고 있던 민정의 웃음소리가 사그라졌다. 순식간에 밀려드는 어색함에 민정은 애꿎은 목만 계속 쓸어내렸다. 사장실에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일정하게 창에 부딪히는 빗소리에 진환은 민정의 올렸던 손을 뗐다.
진환은 하루라도 빨리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 빈대도 없고 사무치게 미운 사람도 없는 자신의 유토피아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진환은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타고 밀려오는 에어컨 바람에 와인의 향이 실려왔다. 진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와. 직접 확인해야지. 누가 이기는지.”
진환이 민정에게 나오라는 고개짓을 했다. 이 순간 민정은 진환이 정말 마왕처럼 보였다. 절대 악. 오락실에 있는 총싸움의 막판에 나오는 아주 거대한 대마왕.
“왜 그렇게 놀라? 속임수라도 썼는데 안 통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속임수는 무슨 속임수요. 가요. 가죠.”
민정은 잽싸게 표정을 관리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보다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민정은 진환을 지나 먼저 사장실을 나왔다. 민정은 자신의 왼발과 왼팔이 동시에 앞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걷고 있었다. 열의는 넘치지만 허술함이 넘치는 여자였다. 민정의 용기는 민정이 가지고 있는 엉성함을 채우고 있었다고 진환은 생각했다.
민정과 진환은 나란히 테이블에 앉았다. 직원들은 불안한 얼굴로 웃고 있는 진환의 모습을 봤다. 진환의 웃음은 마치 시한폭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웃음과 정색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진환의 모습에 직원들은 서빙을 하면서도 진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가끔 진환의 표정이 일그러지면 직원들은 서늘해진 간담을 달래느라 애를 썼다.
“무슨 일이래.”
“일단 튀어.”
직원들의 마왕의 기운에 슬금슬금 도망을 쳤다. 악의 기운이 강할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진환이 팔짱을 끼고 밖을 봤다. 굵은 빗줄기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우산살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잰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진환이 시계를 봤다. 정확히 열 시였다. 창현을 발견한 민정의 얼굴을 새파래졌다. 요란한 스텝까지 밟으면서 창현이 걸어오고 있었다.
‘야! 오른발. 오른발이라고.’
민정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민정은 눈을 꿈뻑거리기도 하고 눈빛을 쏘아대기도 했다. 텔레파시라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남매의 기운을 담아 텔레파시를 쏘기도 했다.
“알았어. 알아. 왼발부터 들어간다니까.”
텔레파시의 오류였다. 창현은 윙크를 날리면서 여유롭게 가게 앞에 섰다. 비상인 상황에서도 눈치 하나 없는 창현을 탓하면서 민정은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달래고 있었다. 피가 말랐다. 제 명에 살지 못한다는 소리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숨 막히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민정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창현이 요란하게 우산을 털면서 물기를 제거했다. 여유 넘치는 창현을 보고 있자니 민정은 눈에서 피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동생의 왼발 하나로 다시 백조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이 참으로 기구했다. 창현이 자동문 버튼을 눌렀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면서 빗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민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게임은 끝났다.
끝났다구!
김창현. 이 웬수 같은 동생아!
회사에도 진환이만큼 개싸가지만 그래도 훈남이 있기를 바라는……야심한 시각.
야근으로 지친 몸으로 녀석들의 이야기 던지고 갑니다요. 불같은 금요일이여. 안녕. 금요일이 제일 좋은데요.
첫댓글 ㅋㅋㅋㅋㅋㅋㅋㅋ치열하다
저러다 정분나지ㅋㅋㅋㅋㅋㅋ
넘어져서 오른발로 들어오면 좋겟ㅇㅅ다
하나씩하나씩 가져와서 완성시키나요???? 대단👍엄지척
ㅎㅎ 재미져요
아이구야~ 완전 재밌는 커플이네요ㅋㅋㅋ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19 23:59
ㅋㅋㅋ재밌어욥!
다음편다음편이 필요해요!!
민정이 허무하게 질리가...ㅋㅋㅋㅋ 담편이 기대되네요ㅎㅎ
민정이가 보낸 텔레파시가 통했기를ㅋㅋㅋ 담편이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