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의 초대 칸, 구부라트는 고려인
산빛노을(원광) 2016.09.05
이번 불가리아 유적답사 여행에서 가장 큰 성과는 불가리아 초대 왕인 구부라트 왕의 유물을 접한 것이다. 구부라트 왕은 610년~ 613년까지의 기간 동안 2개의 주요 불가르아인의 씨족인 쿠트릴구르(Kutrigur)와 우티구르(Utigur)를 통일하여 '온오구르'를 만든 왕이다.
'구리' '구르' '그르' 소리가 나면 '골'(짜기)의 다른 발음이고, '마을' 이름일 때는 '고을'이고, 국가 이름일 때는 '고려高麗'로 음차한다. 이것을 알면 고구려 마을 경기도 '구리'가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몽골은 '몽구리'이고, 일본인들은 '모쿠리'라고 불렀다. 터키인들은 한국은 '뵈쿠리', 몽골은 '모쿠리'라고 했는데 사실 같은 말이다. '몽'은 몽조리의 몽으로 주몽(中몽~다 명중)의 고高씨 쿠리 후손들을 부르는 말이다.
일본은 몽고군(과 고려군의 연합부대; 주)이 소위 가미카제(神風)로 인해 일본 땅에 상륙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큐슈 곳곳에
상륙 흔적을 보전하며 치를 떤다. 당시를 그린 그림에도 ‘모쿠리와 고쿠리의 만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쿠리'가 위로, 조금 서쪽으로 간 것이 '위구르'이고, 이 '구리족'이 카프카스까지 가서 둘로 갈라졌는데, 이들은 윗말의 ‘웃 쿠리’ (Utigur)와, 제사권을 이어받아 굿을 드리는 '굿드리쿠리'(Kutrigur)일 것이다. 비록 간단히 썼지만 이 견해는 비교언어학자라면 수긍이 가게 고증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구부라트 왕이 통일한 '온오고르'는 우리가 온 누리 할 때 '온'과 '구리'가 결합한 말이다. 현대 한자말로 하면 ‘전 고려’(전체 고구려)이다. 구부라트 칸의 아들이 지금의 불가리아로 이주했다. 여기에 구부라트칸의 유물들로, 그가 고구려나 부여인이라는 근거를 대 본다.
위는 구부라트 칸의 유물집이다. 이들은 '칸'을 '한'으로 발음한다. 왕의 환두대도를 보라. 이런 보검을 접해보지 않은 서양의 학자들은 비잔티움(로마)의 선물인 줄로 안다.
위는 왕의 무덤에서 나온 동경(銅鏡)이다. 이 무덤이 혹 무령왕릉이 아닌지, 정신이 아득하다. 동경은 삼종신기의 하나이며 천부인의 하나이다. 당연히 왕의 상징이다.
여기서는 황금보검도 나왔다. 신라 황금보검과 무늬만 다르다.
위 사진에서 왼쪽은 발해의 삼채 호리병이고 오른쪽은 칸의 굽 높은 삼채 접시이다.
출토된 목걸이도 오른쪽 발해의 것과 비슷하다.
허리띠도 발해의 것과 비슷하다. 왼쪽 아래 발해의 것이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이다.
위는 칸의 태극 귀고리이다. 태극 문양이 선명하다.
위는 불가리아의 박물관에서 발견한 삼족오의 변형이다. 삼족오는 새의 상징인데, 꼬리로 해(태양)를 감싸고 있다. 원래는 중족(中足)이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위는 불가리아의 초기 유적지에서 발굴된 인골을 복원한 것이다. (마치 구수한 시골 아저씨 같은) 한국인의 얼굴이다. 이들이 노예로 부렸던 슬라브 종족과 혼합된 불가리아인들이 싫어해서, 눈에 띄지 않는 박물관 한 구석에 놓여 있었다.
위는 불가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보야나 성당'의 모습이다. '보야'라는 말은 불가리아에서 왕이나 귀족에 붙이는 존칭의 칭호이다. 이 성당은 바로 '보야들'을 위한 성당이다. 그런데 '보야'는 옛 부여 왕의 성인 '부여'씨가 변한 말이다.
위는 보야나 성당을 세운 왕이라고 한다. 그 모습은 동양인이다.
원문: 카페 >삼태극 |글쓴이 : 순한
출처; https://cafe.daum.net/okryun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