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진리 (제 3의 문학 2001년 겨울호)
문예지 발표시
2005-12-25 18:15:00
미루나무 잎새들이
허공에 대고
희끗희끗 배때기들을 뒤집어 보인다
순간 흰빛의 너울들이 넘쳐난다
어둡던 잎새 뒤 얇은 잎맥들이 푸른 힘줄처럼 드러나고
금방 빨아올린 물기가 푸르게 온 전신 잎맥들을 돌고 있다
그저 그렇게 쉼 없이 돌아야만
두툼한 생살 차오르고
결국은 훤히 꽃을 피워 무는 것
그래서 미루나무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살며시 손을 뻗는가 보다
반대편 미루나무 손잡아 서로 사랑하자며
반짝반짝 잎새들을 흔드는가 보다
거대한 권력
하찮은 나무뿌리라 말하지 말라
칡은 거대한 권력이다
순하디 순한 풀뿌리를 움켜잡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간담서늘한 공포를 봐라
산천은 그들의 진격으로 쑥대밭이다
힘약한 것들 위에 올라타
숨통을 조이며 반성하지 않는다
그래도 잔정은 있는지
보라색 꽃술로 위장전술을 펼치지만
오히려 꽃술 속에 숨은 어둠이 더 서늘하다
벌떼들 불러모아
육자배기를 부르며 잔치를 벌이면서도
야금야금 산야를 제 영역으로 접수하는
칡의 위선은
오로지 거대한 뿌리의 힘이다
낙엽
방금 허공을 갈라
떨어지는 잎들이 처연하다
며칠 굶어 깡마른 수행자의 살결처럼
말라비틀어진 잎들,
조용히 명상의 길에 들다가도
바람 한줄기 몰아치면
제 몸 부서질 듯 격렬하게 몸부림친다
아서라, 마음 다스릴 줄 알아라
한때 푸르름으로
수런거렸던 지난 날들을 잊었느냐
가을이 오면
온 몸 선홍빛으로 물들어
시끄러운 세상 위해
찬란한 배경 되어주겠다는 그 약속을,
바람결에 스산하게 흩어지는 낙엽 앞에서
눈물 글썽이지 않을 사람
어디 있더냐
이별을 생각하지 않을 사람
어디 있더냐
꽃들의 산 1(문학과사회 97년 가을호)
문예지 발표시
2005-12-25 18:17:26
내가 죽어 튼실한 바위로 태어나도
저기 저 높은 곳에 올라
비단이불 같은 영산홍 숲을 바라보겠네
안개 속에 뭉클 솟아오른 산부리들,
얇게 흩어지는 햇살들, 영산홍 숲 속
나른한 향기가 꽃들의 산을 이루네
하늘처럼 아득한 꼬불길 어디선가
그대의 무덤이 영산홍 따스한 손길로 싸여있는데
장끼인지 메추리인지 모를 새 한 놈,
그대 무덤 위를 날다 영산홍 꽃잎 하나 흩뿌리네
흔들리는 산자락 갑자기 슬픔 한 점 찍네
슬픔처럼 뒤엉킨 숲을 타고 올라 붉은 물감처럼 온 산을 물들이네
얼마를 물들여야 영산홍이
피멍든 꽃들의 산을 뭉클뭉클 쏟아낼까
내가 죽어 튼실한 바위로 태어나도
저기 저 높은 곳에 올라
영산홍 비단이불 밑에 내 지친 몸 누이겠네
달의 투신(문학과사회 97년 가을호, 시심문학 23호)
문예지 발표시
2005-12-25 18:17:52
달이 강물로 투신하는 건
강물 속에 고여 있을 사랑을 건져내는 일
하루 종일 자갈의 등을 밀어주던 고운 물살이
한 줌 달빛을 움켜쥐면
물 속으로 흥건히 퍼지는 달빛의 즙, 사랑의 즙
달빛은 물 밖으로 빠져나와
숙면에 취한 갈대를 흔들고
갈대는 쏴아쏴아
온 하늘에 달빛의 사랑의 뿌리는 일
참, 즐거워라
강물 끝에 앉아 강물에 투신하는 달을 바라보면
누군가 내 몸 끌어당겨
물속으로 잡아끄는 힘
그래 사랑이 있었구나
연약한 제 몸 일으켜 무수히
꽃망울 피우는, 그런 꽃들 속에 휘감기는
사랑의 힘이 있었구나
나는 푸르게 물이 든다 (문학과사회 97년 가을호)
문예지 발표시
2005-12-25 18:18:19
말풀이 술렁대며 웃는 연못 속으로
나의 푸른 웃음이 번진다
햇살은 태양을 따라 길을 낸다
아이들의 웃음이 깔깔거리며
태양을 잡아 흔들 때, 태양은 버릇처럼
그 연못에 중심의 무게를 던진다
연못 속이 훤히 밝아진다
말풀들의 속살이 비치고
연못속의 바람과 구름과
말풀이 부딪히는 소리들이
엷은 햇살로 엉긴다
안개 뒤쪽의 세상(문학과사회 97년 가을호)
문예지 발표시
2005-12-25 18:18:54
안개가 가린 뒤쪽 세상이 궁금하다
내가 흔히 보았던
계곡의 깊은 숲,
꽃단풍 불길로 타오르는 산길과
산길 옆 오복한 싸리나무,
모두가 사랑으로 이 세상 슬픔 지우는데
안개는 자꾸만 산 아래로 내려가
산 아래 마을을 가리고
우리의 슬픔을 가리자고 한다
그렇지만 햇살은 안개를 걷으러
산으로 올라가는데
그 마주치는 길목에서
나무들은 저마다 자유를 꿈꾸며 살고 싶어할까
내가 궁금한 것만치, 그쪽 세상의
나무들도 조용히 눈뜨고
안개를 버리며 살고 싶어할까
환한웃음
여든을 바라보는 할머니 얼굴에
비로소 꽃이 피었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는 미명의 새벽,
산발한 바람이 지상의 모든 것들을
허공으로 쓸어 올릴 때
할머니 그 다정하던 눈매에 글썽이던 눈물
지상의 모든 것들은 허무해서
꽃에도, 잎에도 서서히 내려앉는 절망의 무늬들,
그것들이 웬지 저승꽃 같아
언젠가는 무한의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말 죽음 같은 것,
할머니는 저승꽃을 꺾지 않았다
어차피 그 꽃이 수북히 피어나야
한량없이 오를 수 있다는 눈부신 하늘
백발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주름진 살결 어둔 그늘로 번지는 저승꽃에도
할머니는 단지 환한 웃음만을 지었다
자살극--몽롱한 하루(시심문학16호)
시심문학 시 모음터
2005-12-25 18:33:42
동생은 늘 몽롱함에 젖어 있었다
마약을 먹고 잠이 든 동생은
선한 마음 한 쪽을 악마에게 내주고 있었다
악마는 피와 살 속까지 파고 들어
동생을 늘 몽롱하게 만들었다
몽롱한 골목길을 몽롱한 기분으로 걸을 때마다
몽롱한 세상이 울렁울렁 어지럼을 탔다
늘 몽롱한 세상에 살면서도 동생은 무섭지가 않았다
가끔씩 날선 부엌칼을 사람들 앞에 들이댔다
웃통을 훌렁 벗고 버럭버럭 악을 쓸 때마다
섬뜩한 칼날이 반짝였다
하늘의 별빛조차 빌딩의 유리창을 타고 내려와
동생을 더욱 몽롱하게 만들었다
몽롱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희한한 자살극
그러나 동생은 끝내 자살하지 않았다
반야사 쪽으로 2 -내 마음의 깊은 벼랑-
아득한 벼랑을 타고 칡넝굴이 오른다
뱀처럼 늘어진 붉은 길을 놔두고
칡넝굴이 왜 벼랑만 타는지를 사람들은 모르리라
벼랑은 오직 꽃향기를 위해 굳건했으니
저 붉은 길을 휘돌아가면
움막처럼 나올듯한 쓰러진 암자
그 암자속의 향 내음이
바람 속에서 숱한 칡꽃을 울긋불긋 피우게 했을지도 모를
세상일은 도무지 알 수 없고
인연은 칡넝굴로 깊이 뿌리내려
꽃향기로 덮여진 벼랑을 이루고
벼랑은 그렇게 어지러운 삶으로 우굴거리는데
붉은 길 휘도라진 그 암자를
꿈결처럼 바라볼 때도
칡넝굴은 여전히 적군처럼 벼랑을 오르고 있었다
꽃이 예쁜 이유
제 몸 가누지 못해 휘어진 꽃은
세상 삶의 무거움을 잘 알고 있다
내 어깨 위를 짓누르는 삶처럼
꽃을 내려누르는 삶 또한 그렇다
그래도 꽃을 맺고 터뜨리는
그 질긴 욕망의 힘,
나 또한 그 꽃을 닮는다면
시련의 땅 밝은 쪽으로 훌쩍 건너뛸 수 있으리
제 몸 가누지 못해 휘어진 꽃이
더 가혹하게 예쁜 이유를,
나 이제야 알겠구나
나른한 강가, 나른한 오후
나른한 오후에
감은 무섭도록 텅 비어 있었다
세월에 떠밀린 물살은
안개처럼 흐려있고
내장이 부푼 붕어와 찌그러진 깡통
쪼개진 스티로폼 몇 개만 떠다닐 뿐
이웃한 공장에서 몰래 버린 폐수가
말풀들이 하늘 보려고
뿌연 물살 밀어낼 때
구름 몇 덩이
빛바랜 그늘을 내렸다가 다시 지우고
햇살 한줄기 성난 칼날처럼
깊게 물살을 내리꽂아도
강물은 비명조차 없다
둑방 위 버드나무 휘청 머리 풀어
사죄를 하는 시간에도
나른한 강가에는
눈 뒤집은 부엉와
찌그러진 깡통,
스티로폼 몇 개만 떠 다닐 뿐
대나무 밭의 구름 떼
푸르게 멍든 물결이
통곡처럼 하늘을 때린다
강변의 둔덕을 치고 받던 물보라처럼
그 주변 푸른 대나무 밭이 요동친다
내 마음 속의 허튼 생각들
모두 물결 속으로 숨을 때
대나무밭도 무성한 댓잎 흔들어
생각들을 지워버린다
그러면 허전히 몰려오는 구름 떼
부푼 제 몸도 지워달라는 듯
물보라처럼 부서지는 달
물새들의 사랑법
무성한 꽃잎이 둥둥 떠서 개울로 내려가고 있네
꽃배로 고이 접혀
성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
누군가는 저 꽃잎 건져와
사랑이란 이름 써 넣고
다시 띄워 보내고
누군가는 저 꽃잎에
눈물 몇 방울 흘리며
울적히 개울가를 걸어 가겠네
그러면 물새들도 하염없이
긴 개울 따라가다가
지친 꽃잎 머무는 자리
점찍어 놓고
다시 돌아 오겠네
그리고는 알려 주겠네
우리들의 사랑이
모두 저기 모여 있다고
고추잠자리
가을볕이 별로 뜨겁지도 않은데
고추잠자리는
몸 전체가 붉게 탔다
어디서 불 화상을 입고
날아왔을까
틈만 나면 이슬 젖은
풀 위에 앉아
끄덕끄덕 붉게 탄 몸을 식히고 있다
별의 노래
성근 별빛이 죽창이 되어
내 가슴을 마구 찌르면
나는 피곤에 지쳐 잠 깊이 들겠네
아마 오늘 밤 하늘이 무너져도
깨어 일어나지 않겠네
산중의 포근한 무덤처럼
영원히 잠들고 말겠네
갈대
잠 못든 자들이 긴 밤을 뒤척이며
성긴 꿈을 쫒을 때
산갈대 허옇게 피어 세상을 비질합니다
그 오랜 세월 쓰러진 자들의 절망을 쓸어
내 작은 가슴 같은 난지도에 버립니다
그러면 희망 같은 낮달하나
내 가슴에서 떠올라 실눈을 뜨고
빤히 세상을 쳐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