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신이 깨어나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낯설었다. 온통 푸른색의 차갑고 날카롭고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청수는 가슴을 저미는 한기에 오한을 느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전신이 쓰라리고 갑갑증이 일었다. 이청수는 고개를 숙여 몸을 살폈다. 침상에서 솟구친 수백만 개의 가는 나무뿌리들이 그녀의 팔과 다리, 몸통과 목을 얽매었다. 심지어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저 잡아당겨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이청수가 놀라 눈을 부릅떴을 때 갑자기 집이 살아 움직였다. 벽이 꿈틀대고 마루가 일렁이며 문짝이 들썩였다.
“으으으으으으.”
안된다고 소리를 질러보려 했지만 혀가 구르지 않았고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천정이 비틀리며 뭉클대다가 이청수의 코앞까지 늘어졌다. 커다란 얼굴이었다. 백 년이 넘도록 세월의 풍상에 시달린 노파의 얼굴처럼 쪼글쪼글 주름살이 세로로 얼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찢어진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선혈들이 좌우로 쉬지 않고 구르고, 옹이 같은 뻥 뚫린 두 개의 구멍은 냄새라도 맡으려는 듯 쉬지 않고 벌름거렸다.
벌름거리던 두 개의 구멍이 축소되어 조그만 점들로 화하는 순간, 선혈 같은 눈망울이 커져 혈안으로 돌변하여 이청수를 노려보았다.
이청수는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몇 가닥 나무뿌리들이 그녀의 눈꺼풀을 잡아 위아래로 당겼다. 이청수의 두 눈이 찢어졌다. 눈의 좌우에 핏방울이 맺혀 눈물과 함께 귀로 흘러내렸다.
큰 얼굴의 아래쪽에 그어져 있던 긴 선이 덜컥 열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동혈이 드러나자마자 그 속에서 거칠고 날카롭고 붉은 혓바닥이 이청수의 눈앞까지 흘러나와 날름거렸다.
이청수는 고개를 좌우로 비틀어 붉은 혀를 피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검은 동혈에서 칼날 같은 음성이 흘러나와 이청수의 귀를 찌르고 머리를 뒤흔들었다.
이녀어언!
너를 귀여워하여 내 몸을 잘라 편히 잘 자리를 마련하여 주었고, 내 팔을 잘라 편히 쉴 집을 마련하여 주었다. 양식을 주고 옷을 주고 평안을 주었다.
이 할미가 뭐라 일렀더냐? 오직 하나, 이슬처럼 순결하게 살아 달라 했었다. 그것 하나 지켜 달라 했었다.
이것이 이 할미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더냐? 내 몸 가득 더러운 사내놈의 악취와 정액을 묻히고 추악한 숨결을 채우고 심어지어는 살기 가득한 피마저 뿌렸다. 그것도 모자라 더러운 씨앗을 품고 있어?
배은망덕한 년! 네 년이 정녕 나를 거역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오냐. 이제 이 할미, 네 년에게 쏟았던 사랑과 자비를 거두리라. 그리고 저주하리라.
너 이제 나무처럼 살아가리라. 대지는 너의 발을 옭아매고 산은 네 입을 내리 누르고 사람은 너를 증오하리라.
네 아이 또한 무엇이 다르랴? 축복을 내려주마.
네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이 또한 귀신을 보리라. 그러나 너와는 또 다르리라. 자비의 신은 없으리라. 칼끝에 피 뿌린 원념이 쌓아 가둔 귀신들을 볼 것이다. 평생을 따라 다니리라. 누구도 풀어 주지 못하리라.
이청수는 그때서야 자신의 눈앞에서 흉광을 뿜어대는 것이 그토록 자애롭던 나무 할미임을 깨달았다.
이청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나무 할미가 주지 못했던 실체의 손길뿐이었다. 그것이 그리도 큰 죄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용서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침상에서 돋아난 촉수는 그녀의 눈만이 아니라 그녀의 입술마저 지배하고 있었다.
“으으으으으으아아!”
이청수는 더 이상 자비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아량을 구하고 싶었다. 따뜻한 접촉을 원했던 것이 죄라면 벌은 자신에게만 국한되기를 소원하고 싶었다.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아이에게까지 벌을 준다는 것은 너무나 비정하다 항변하고 싶었다.
나무 할미는 무자비했다. 단 한마디 변명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이청수는 스스로의 의지로 나무할미를 직시했다. 눈으로 애원했다. 그러나 나무할미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으아아아아-안 돼요.”
절규가 터져 나왔다. 입술을 얽어매고 있던 가는 나무뿌리들 탓에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끄아아아아아아.”
팔을 옥죄고 있던 나무뿌리들이 후두둑 끊어졌고, 그녀의 팔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청수는 피투성이가 된 두 손으로 배를 가리고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무할미를 응시했다.
“안돼요, 할머니. 아이만은 안돼요. 제발!”
나무 할미는 자신의 힘을 거부하는 이청수의 본능에 놀라 치뜬 두 눈을 움츠러뜨렸다. 그러나 이내 원래의 기세를 회복하고 다시 분노를 더해 이청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요망한 것!”
분노한 나무 할미의 얼굴이 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르르르륵!
방안에서 돌풍이 몰아치고 가구들이 부서져서 침상주변을 휘돌고 나무 바닥이 통나무 조각으로 부서져 바람을 따라 돌면서 벽도 부서지고 천장도 부서졌다.
이청수는 돌풍의 한 가운데 앉아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아아아아아아아!”
이청수는 눈을 뜨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안은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있다면 한 가지, 어둡고 음습하여 예전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청수는 식은땀이 흥건한 나무침상을 손바닥으로 확인하고 불현듯 아랫배를 감싸 쥐었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청수는 문득 천장을 올려다본 후에 급히 침상을 벗어났다.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목으로 가져가 거기에 달랑거리는 금패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쾅!
굉음과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창을 꼬나 쥔 건장한 청년 둘이 먼저 방으로 들어서고, 그 뒤로 색색이 화려한 옷을 입고 괴장을 든 노파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이청수는 소스라치게 놀란 눈으로 노파와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청수의 집은 금남의 지역이었다. 청년들은 감히 집은커녕 근처의 흙조차 밟지 못했고, 어린 처녀들만이 옷과 음식과 기타 생필품을 전달하기 위해 출입이 허락되었다.
한때 이청수는 처녀들과 친해져보려고 노력했으나 그녀를 대하는 처녀들은 오체투지도 모자라 무릎에서 피가 나도록 급히 무릎걸음 질치며 물러섰다. 그들이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청수는 친구로 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가급적이면 그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했었다.
그나마 사이난이라고 불리는 노파는 조금 나았다. 부족의 중대사를 묻거나 이청수가 받은 나무할미의 영언을 전달받기 위해 자주 들렀고, 오직 노파만이 조심스럽게나마 이청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노파마저도 감히 이청수의 방안까지 들어온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청수를 향해 노파가 괴장을 뻗으며 울부짖었다.
“배덕한 년! 수령신께서 그토록 사랑해 주셨건만 신덕(神德)을 저버렸으니 독사 굴에 처넣어도 그 죄를 사하지 못하리라. 네 년 덕에 이 늙은 것이 할 수 없이 신언(神言)을 이어받으니, 감히 몇 번이나 수령신의 음성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죽일 년 같으니라고.”
이청수가 놀란 눈으로 살펴보니, 겨우 두어 달 전에 만났던 노파의 얼굴이 십 년은 늙은 것 같았다.
이청수는 노파의 절규에 찬 한 마디를 잘라,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몇 번이나 감당할 수 있을까?
결국 이청수만이 나무할미의 음성을 많은 노고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는 말이리라. 그랬기에 울부짖듯 소리쳤으리라.
노파가 다시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수령신의 뜻에 따라 저년을 내쳐라. 영생토록 대지를 방황할 것이로다. 죽음보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로다. 끌어내!”
사내들이 다가섰다. 감히 얼굴도 바라보지 못하고 오체투지하던 그들이 무서운 눈빛으로 이청수를 붙잡았다.
이청수는 처음 깨달았다. 숲의 사람들은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통해 수령신을 대하였을 따름이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원치 않는 호랑이 흉내를 내며 살았던 이청수는 수령신이 그녀는 내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천한 여인이 되어버렸다.
이청수는 저항하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전신에서 힘을 뺐다. 두 발끝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발톱이 깨지고 피가 흘렀다. 섞은 나무토막처럼 다루어져서 마침내 질퍽거리는 땅에 내팽개쳐졌다.
이청수는 힘겹게 일어섰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어서 무작정 걸었다.
두 발을 질질 끌어 한참을 걷고 난 후에 멈춰서보니 오랑하의 앞이었다. 야속한 운녹산과 몇 번이나 함께 왔던 곳이어서 무의식중에 오랑하로 발걸음을 잡은 것이리라.
이청수는 멍한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세상천지 그녀가 아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던가? 이청수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여기 있어야 되는데---. 운 가가가 데리러 오겠다고 했었는데---.”
이청수는 문득 오랑하의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운녹산이 늘 그 방향을 바라보며 복잡한 눈빛을 드리웠던 것을 기억해낸 것이었다.
이청수는 걸었다. 강변을 따라 운녹산이 갔을 그 벼랑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외로움에 어두움을 접붙이면 무서움이 피어난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느낌 속에서 무작정 걷기만 하던 이청수는 눈앞에 땅거미가 짙어지자 불현듯 몸을 떨었다.
좌우를 둘러보았다. 우측으로는 세상보다 더 어두운 숲이 드리워져 있고 좌측으로는 수십 길 낭떠러지였다. 이청수는 급히 주변을 훑어 가슴까지 오는 굵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밝은 벼랑 쪽으로 바싹 붙었다.
파스스스스스!
이청수의 발끝에 밀린 흙더미들이 벼랑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한 발 숲 쪽으로 다가갔다.
오우우우우우!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다시 벼랑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파스스스스스!
흙더미 떨어지면서 눈물도 왈칵 흘러나왔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한 밤중에 숲을 돌아다녀도 무서움에 몸을 떨었던 기억은 전무했다. 가끔 길을 잃고 이청수의 집에 이른 동물들은 그녀의 손짓 한 번에 길들인 짐승처럼 온순해졌고, 맹수들마저도 꼬리를 내리고 그녀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었다.
경험도 없는데 갑자기 무서워졌다는 것, 그것은 이청수로 하여금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것이 느낌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청수는 나뭇가지를 버팀목 삼아 힘겹게 일어섰다.
“난 혼자가 아냐. 운 가가가 있고, 여기에---.”
이청수는 문득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렸다.
“내게도 이제 가족이 있어. 가야지. 찾아야해.”
이청수는 후들거리던 다리를 진정시키고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가고 또 가다보면 틀림없이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이고 틀림없이 운녹산이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걸었다.
이청수는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한발만 더 내딛으면 바로 벼랑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길을 택했다. 본능이 있는 짐승이라면 그 어떤 맹수라도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고 느끼도록.
밤이 되었다. 그래도 이청수는 걸었다. 소경처럼 나뭇가지 끝으로 한발 한발 앞길을 짚어가며 걷고 또 걸었다. 낮과 밤이 교차하여 다시 밝음이 찾아올 때까지 걷고, 뙤약볕 아래서도 쉬지 않고 걸었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배가 고픈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갈증만큼은 견뎌낼 수 없었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이 바로 아래에서 흐르고 있는데 마실 수 없었기에 더더욱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이옥수는 처음으로 진로를 바꾸어 숲에서 가장 그늘 곳으로 들어갔다. 아직 장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축축한 땅을 발견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옷자락을 넓게 펴서 땅 위를 덮었다. 두 손으로 땅을 내리눌렀다. 땅이 토해낸 물기가 옷자락을 적시자 그 위로 혀를 대고 수분을 얻었다. 짜고 핥고 짜고 핥고---. 옷을 적신 물에서 흙냄새 가시지 않는 것처럼 갈증도 쉬 가시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그러하리라. 물로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이 되지 않으니 갈증은 여전할 수밖에 없으리라. 겨우 목이 말라붙는 것을 면하자 물 핥기를 포기한 이청수는 자포자기 한 듯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숲에서 기어 나온 화사 한 마리가 이청수의 두 다리를 넘어 반대쪽 숲으로 들어가도 그녀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늘어져 있던 이청수가 문득 자신의 아랫배에 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아이야! 넌 정말 있는 거니? 아무 것도 못 느끼겠는데, 정말 있는 거야? 그래, 있을 거야. 나무 할머니가 있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있을 거야. 그런데 넌 세상을 보고 싶니? 외롭단다. 전에는 몰랐지만, 힘들기도 할 것 같아. 그런데도 보고 싶니? 왜 대답이 없니? 하기야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 문 앞에서 그만두긴 그렇지? 알았어. 조금 더 힘을 낼께. 네가 세상을 보고 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
이청수는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고 어렵게 일어났다. 이상했다. 진이 빠질 정도로 지친 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발 떼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마치 수십 개의 징이 박힌 쇠 신발을 신은 것처럼 발이 무거웠다. 그래서 발을 끌어도 보았지만 발과 땅 사이에 질긴 끈이 달린 것처럼 끄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청수는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힘겹게 걸었다. 각 발로 한 발씩 떼고 나니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걷노라면 힘겹기는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아? 나무처럼 살리라?”
이청수는 공포에 휩싸인 눈으로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뛰다시피 걸었다. 발바닥에서 내려온 기운이 땅에 뿌리박히기 전에 쉼 없이 걸었다. 지치고 갈증 나고 힘들었지만 걷지 않으면 땅에 뿌리박혀 버릴 것만 같아서 한없이 걸었다.
어느새 다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이청수는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우측의 숲이 끊겼다. 그리고 벼랑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낮은 풀과 황토가 대부분을 차지한 넓은 고원이었다. 그 앞으로 멀리 또 다른 숲이 있었다.
이청수는 힘겹게 눈을 치뜨고 고원 너머 숲을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가야할 것만 같았다. 고원만 지나면 나무 할미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비명을 질러대며 발을 떼었다.
이청수가 고원의 반 정도를 가로질렀을 때였다.
“크르르르르르!”
소리를 듣는 순간 등에서 차가운 한기를 느껴졌다. 보지 않고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그러나 발은 여전히 천근만근.
그녀 스스로는 뛴다고 생각했지만 발가락에서 뭉클뭉클 피가 터져 나오도록 빠르게 발을 옮겼을 따름이었다.
등골 서늘해지는 느낌이 점차 강렬해졌다.
쉭!
왼쪽 귀에서 낮은 파공음이 들렸다. 그 순간 칼날 같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이청수는 본능적으로 우측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결과 그녀와 벼랑 사이가 일장 가까이 벌어져 버렸다.
바닥을 뒹굴던 이청수가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르르!”
이빨을 드러낸 늑대 한 마리가 이청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청수는 급히 일어나 벼랑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그쪽에도 또 다른 늑대가 그녀를 향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우측과 뒤를 보았다.
거기에도 각각 한 마리씩이 더 있었다.
모두 네 마리. 평소의 이청수라도 감당할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늑대들은 미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똑똑했다. 바로 덮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이청수의 좌측을 위협하여 벼랑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청수는 물기 고인 눈에 독기를 품고서 나뭇가지를 굳게 쥐었다. 그리고 고통이 가득한 비명을 지르며 한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늑대들이 점차 간격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면의 늑대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청수는 있는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무엇인가와 부딪치는 느낌이 있었다. 이청수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강한 진동 탓에 나뭇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덤벼들었던 늑대가 입에 물고 있던 나무를 옆으로 팽개치고 있었다.
이청수는 공포에 질린 채 무작정 앞으로 뛰었다. 그러나 단 두 발을 움직이는 순간 왼발 허벅지에서 격통이 일었다.
“아악!”
이청수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에서 덮친 늑대가 이청수의 허벅지를 깨물어 좌우로 계속 비틀어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좌우에서 두 마리 늑대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쉐엑!
“케켕!”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고 늑대 두 마리가 동시에 죽창을 옆구리에 꽂은 채 울부짖었다. 이청수의 다리를 물고 있던 늑대는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와 전면에 있던 늑대와 함께 크르르거리며 이청수의 앞쪽을 노려보았다.
이청수도 고개를 들었다. 십여 장 앞쪽에서 겨우 하물만 가린 네 사람이 이청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앞의 두 사람은 허리춤에서 박도를 빼어들었고 뒤의 두 사람은 죽창을 든 채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항할 기색을 보이던 두 마리 늑대가 숫적 열세와 달빛에 반사되는 금속의 차가움을 발견하고는 결국 이빨을 숨겼다.
그리고 곧장 꼬리를 내린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이청수는 자신의 바로 코앞에 사람의 발이 보이는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정신을 잃었다.
느안카이와 상초소이는 여인을 새로 생긴 듯한 무덤에 기대어 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군, 느안카이. 무슨 사연일까? 한족이라기엔 장소가 이상하고, 묘족이라고 하기엔 생긴 게 묘하군.”
느안카이는 상초소이의 의문에 답하는 대신 이청수의 발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발을 주의 깊게 살폈다.
“이것 봐! 발톱이 다 까졌어. 발바닥엔 상처투성이고. 고운 발등을 보면 이렇게 다닐 여자가 아닌데, 정말 이상하군?”
상초소이와 나머지 두 사람도 느안카이가 가리키는 것을 보고서 동감을 표했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청수를 바라보던 상초소이가 박도를 빼어들어 이청수의 하의 끝자락을 찢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청수의 허벅지를 친친 감으며 말했다.
“어쨌든 다행이야. 그 사람 부탁을 받아 할 수없이 이곳을 살피고 있었으니 구했지, 안 그랬다면 젊은 여자 하나 늑대 밥이 될 뻔 하지 않았나?”
느안카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청수가 눈을 떴다. 이청수는 흐릿한 눈빛으로 느안카이 등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혀가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느안카이는 이청수의 말라붙은 입술을 바라보며 수통을 들어 여인의 입에 기울여 주었다. 입술이 젖고 혀가 젖고 목구멍이 젖었다. 이청수는 만족하지 못하고 한없이 물을 원했다. 마시고 또 마셨다. 느안카이가 되었다 싶어 수통을 거두려는 순간에도 애절한 눈빛을 보내 그로 하여금 다시 수통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상초소이가 말했다.
“배가 고팠나 봐.”
상초소이는 가슴에 사선으로 맨 가죽 가방을 열어 그 속에서 구운 감자 두 알을 꺼냈다. 그것을 본 이청수는 상초소이가 내밀기도 전에 손을 뻗었다.
상초소이가 우호적인 미소를 머금고 감자를 건네자 이청수는 빼앗듯이 받아들고 급히 먹기 시작했다. 느안카이는 수통을 흔들어 물이 바닥에서 찰랑거린다는 것을 확인하고응 상초소이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수통을 이청수의 옆에 내려놓았다.
감자 두 알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이청수는 다시 수통을 들어 남은 물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상초소이가 그때서야 이청수에게서 눈을 떼고 멀리 이청수가 나섰던 반대쪽 숲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묘족의 영역,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오래 있을 곳이 못돼. 숲으로 들어가자고.”
“음! 안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이상해. 낮에 햇살이 그리도 좋았는데 여기 오니 이상하게 축축한 것 같아.”
느안카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고 나서 이청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어찌할 것인가 묻는 듯한 눈빛으로 상초소이를 응시했다.
상초소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청수를 바라보았다.
힘없는 눈빛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고 발은 상처투성이에다가 입 주변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는 연약한 여인을 남겨두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 몇이나 될까.
상초소이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 이청수의 얼굴을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어떻게 이런 지경이 되었나?”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이청수는 그저 멀뚱멀뚱 상초소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초소이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서 다시 한어로 물었다.
“무-무슨 일?”
그 순간 이청수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입을 열려했다.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분명 입술을 꼼지락거리는데 나오는 소리는 절망에 찬 신음밖에 없었다.
이청수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산이 네 입을 옭아매리라?’
이청수는 절망에 차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상초소이와 다른 사람들은 그 반응을 보았다. 더듬더듬 한어로 물으니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이청수가 원래 벙어리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한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상초소이가 슬픔과 절망에 가득 찬 이청수를 외면하고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쨌든 돌봐줘야겠지? 우리 집에 데려다 놓고 몸이 회복되면 그때 갈 길로 가라 그러자구.”
모두들 동의하자 상초소이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느안카이와 나는 여기에 남아 이 무덤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자네들 둘이서 이 여자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 가서 우리 안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맡기라구.”
조금 더 젊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초소이의 지시를 받은 두 사람은 이청수의 지친 기색을 읽고 그녀를 좌우에서 부축하려고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이청수와 사람들 주변에만 차가운 한기가 감돌았다.
“흐윽!”
이청수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으며 두 발바닥을 땅에 붙인 채 활처럼 등을 들었다. 그녀의 하복부가 꿈틀거렸고 다시 둔부가 땅에 닿았다.
사람들이 놀라 눈을 치떴다. 바로 그 순간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어 무려 여덟 번이나 이어졌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이청수의 신음은 더욱 고통스럽게 변했고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산통을 연상케 하는 여덟 번째 고통을 호소하고 난 이청수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던 식은땀을 흘려버리면서 겨우 눈을 떴다.
파랗던 입술이 서서히 제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청수의 눈은 지친 기색 속에서도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이청수는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이 등을 대고 있는 것이 아직 땅도 마르지 않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 아이에게 무엇인가가 붙었어. 그것도 여덟이나. 귀신을 보리라 했었지? 평생을 따라다닌다 했었지? 누구도 풀지 못한다
했었지? 아가야, 어쩌면 좋으니?’
이청수는 아이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편 기이한 광경을 목도한 네 사람은 할 말을 잃고 이청수를 바라보았다. 그때 이청수가 다시 눈을 뜨고 물기 그득한 눈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에 정신을 차린 상초소이가 물었다.
“같이 가?”
이청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상초소이는 젊은 사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들이 이청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그녀를 들었다.
작고 연약한 이청수는 번쩍 들려 일어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청년이 의아한 눈빛으로 이청수의 두 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힘을 주어 당겼다. 두 발바닥이 아교 칠을 한 듯 달라붙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상황에 익숙해진 이청수는 상체를 흔들어 두 사람을 떼어냈다. 그리고 상초소이의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박도를 가리켰다.
상초소이는 처음에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겨우 뜻을 알아차리고 박도를 건넸다.
이청수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땅과 두 발 사이에 박도를 찔러 넣었다. 모두가 놀라 눈을 치뜨는 사이에 박도는 피가 번지는 땅과 이청수의 두 발바닥 사이를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발가락 밑으로 들어갔던 박도가 발꿈치 뒤로 나왔다.
이청수는 급히 일어나 발걸음을 떼었다.
네 사람은 걸음을 옮긴 이청수를 바라보는 대신 그녀의 두 발바닥이 조금 전까지 붙어있던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피가 번져있을 뿐, 그 자리에는 오로지 황토뿐이었다.
영문을 몰라 다시 이청수를 보는데, 겨우 되찾은 안색이 다시 하얗게 된 그녀는 늑대에게 물린 자리가 아플 텐데도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제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모두의 눈길이 자신에게 닿아있다는 것을 느낀 이청수는 박도를 상초소이에게 건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청년에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심전심이랄까? 말이 안통하는데도 모두가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상초소이에게는 감사의 뜻이 그리고 두 청년에게는 가자는 뜻이 마음 그대로 전달되었다.
두 청년이 이청수의 좌우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청수는 상초소이와 느안카이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청년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상초소이의 아내는 즐거운 고양이라는 뜻의 상메오라는 이름을 가졌다. 멀지 않은 과거의 상처를 대부분 잊은 듯, 항상 유쾌한 웃음을 달고 다녔다.
이청수가 상메오의 친절하고 부담 없는 이틀 동안의 보살핌으로 기운을 차렸을 때, 상초소이가 부족의 다른 사람들과 임무를 교대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상초소이는 상메오와 이청수에게 얼굴도장을 찍자마자 우선 마을의 최고어른이며 현자이며 토지신과 조상신의 제사를 주관하는 부룬카 노인을 찾아갔다.
상초소이는 부룬카 노인에게 그 기이한 경험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기대와는 달리 부룬카 노인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만 상초소이에게 이청수를 격리하여 돌보라고 권고했을 따름이었다.
상초소이는 느안카이를 찾아갔다. 격리라는 말에 느안키이는 즉각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내 집이 마을의 끝에 있으니 그 여자를 거기에 두세.”
상초소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이 기회에 합치게?”
느안카이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부룬카께서 재촉하시는 것도 있고, 조금 이른 것 같기도 하지만 탄흐츄이와 나에게도 함께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슬픔을 오래 간직하면 병이 되기도 하지.”
죽은 사람에게는 매정하게 여겨질 일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토가족의 전통이었다. 미망인이 있고 홀아비가 있어서 짝을 지워줄만 하다 싶으면, 마을 어른이 월하노인이 되어 재혼을 켰다.
그것은 “젊음이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힘”이라는 토가족의 오래된 금언과도 관계가 있지만 결국은 힘없고 작은 부족을 이어가려는 본능의 소산이리라.
느안카이와 탄흐츄이의 경우가 그에 속했다. 느안카이가 아내를 비후방에서 잃었다면 탄흐츄이는 그 복수를 위해 나섰던 남편을 잃었다. 두 사람은 마을 사람이 나서서 짝을 지워줄 만 했고 두 사람도 동병상련의 아픔을 서로에게 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느안카이의 결심으로 그렇게 간단하게 토가족의 마을 안에 이청수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이청수는 저주받은 자신의 인생이 과연 불행한 것인지 의문이 일었다. 자신을 저주받게 만든 운녹산이라는 존재는 짧으나마 그녀의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저주를 받아 한 동안 슬프고 불안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무 할미의 말을 믿음으로 해서 그 존재를 느끼게 된 아기는 그녀의 굳건한 의지처가 되었다. 이청수는 붙박이가 되기로 작정했다.
잘라내야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잘라냄으로서 그만큼 쇠약해지는 것도 알아차렸기에 불편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제 나무처럼 살리라는 저주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니었다. 단지 불편함일 따름이었다.
다른 불편함도 없지는 않았다. 늘 남도록 먹을 수 있었던 맛난 음식들은 이제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몸이 요구하는 음식물의 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이상 오래갈 불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만 깨끗한 물이었다.
그럼으로 해서 그녀의 배설량도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말하지 못하는 것 또한 불편했다. 하지만 토가족과 사는 한, 말이란 의미가 없었다. 말은 있고 글이 없는 토가족과는 어차피 입으로 의사소통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느낌으로 통하는 것은 가능했고 그림으로 통하는 것 역시 이족(異族)이 상동(相同)이었다.
이제 이청수에게는 저주가 저주로 여겨지지 않았다. 저주받음으로서 그녀는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얻었다. 작고 누추하지만 누구나 들어설 수 있는 집을 얻었고, 같은 눈높이로 마주하여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얻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밖은 왁자했다. 이청수는 생각에서 깨어나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지 그녀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탓이었다.
이제 그녀가 주인이 된 집의 원주인인 느안카이가 어제 함께 인사하고 갔던 여인의 집에 들어감으로서 혼인이 성사되었다는 것을 상매오의 그림과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엊저녁에도 한바탕 주연이 벌어지는 것 같더니 오늘 아침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청수는 까닭을 알기에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에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속 깊이 느안카이의 행복을 빌었다.
그때 작은 동창으로 한줄기 햇살이 스며들어 이청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청수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햇살을 음미하듯 지그시 눈을 감으며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내 아이야. 기분 좋지?’
그때 또 다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청수는 가만히 눈을 뜨고 그녀의 옆에 있는 나무통에서 물 한바가지를 퍼서 두발에 부었다. 그리고 다시 한 사발을 떠서 마셨다.
햇살과 물과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청수를 평안하게 만들었다. 이청수는 다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눈으로 활짝 열린 문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어제의 혼사 분위기가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살펴보니 집 앞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박도와 죽창까지 챙겨 든 장정들뿐이었다.
이청수는 귀를 기울이고 의아한 눈으로 사람들을 살폈다. 그때 집 앞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토가족 사람들과는 달랐다.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들이었는데 그 얼굴에 어울리게 옷마저 흑면경장을 입었다.
나이든 세 사람이 지나갔고 그 뒤로 관을 든 청년들 두 사람이 지나갔고 또 다른 청년 일곱이 사람 상반신만한 목함을 들고 지나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이청수의 시야에 들어섰다.
‘운 가가!’
이청수의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틀림없이 운녹산이었다. 예전의 그 넝마 같은 옷에 산발한 머리가 아니라 단정하게 차려입은 말쑥한 모습이었지만, 달포 이상 살을 맞대고 살았던 그 운녹산을 못 알아 볼 이청수가 아니었다.
‘운 가가!’
이청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나 소리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이청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여자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려 나무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막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운녹산을 향해 집어던졌다.
딱!
나무바가지가 문기둥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졌다. 이청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팔로 바닥을 긁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두 손으로 오른발을 붙잡아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발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것은 불편이 아니라 저주였다.
이청수는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바닥을 긁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나무 할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피가 터지도록 ‘운 가가’를 외쳤다. ‘나 여기 있다’고 외쳤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이청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이청수는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목에 걸린 운녹산의 금패를 주먹으로 쥐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청수는 운녹산을 보고도 만나지 못한 그 비통함에 결국 반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 그녀가 근 보름이나 넋을 놓고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다른 어떤 외부의 자극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난 꿈틀거림 때문이었다.
성심껏 이청수의 수발을 들어주던 동정심 많은 상매오와 탄흐츄이는 그녀의 회복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감탄했다.
아랫배를 쓰다듬는 이청수의 눈빛이 너무나 영롱하고 포근하여 두 여인마저도 그 품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였다.
세월이 흘렀다. 토가족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찾아왔다.
세월이 흐른 만큼 이청수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작은 동산 만하게 부풀어 오른 배가 출산을 알리고 있었다. 그것을 직감한 상매오와 탄흐츄이는 이청수에게 더욱 더 신경을 썼다.
이청수를 옆에서 돕는 그들은 늘 감탄했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성녀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퍼석거리는 피부와 회색빛 도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는 달리, 이청수의 전신에서 풍기는 자애로운 기운은 너무나 눈이 부셔서 보기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청수의 변화는 좋은 쪽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발바닥 아래로만 변화할 줄 알았는데 나무껍질 같은 딱딱한 기운이 보드라운 이청수의 다리를 서서히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고 겨울을 거치자 그녀의 허벅지까지 침범했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경화되어 가는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상매오와 탄흐츄이의 걱정은 거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출산 때가 되면 경화는 그녀의 허리까지 침범하리라. 그렇게 굳은 하체로는 도저히 아이를 출산할 수 없으리라. 두 사람은 걱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그런 데까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이청수는 굳은 다리 탓에 앉지도 눕지도 못했다. 그래서 상초소이와 느안카이는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서있는 침상’을 만들어 주었다. 이상하게도 별 달리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이청수는 두 사람의 호의에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마침내 출산의 시기가 다가왔다. 이청수는 얇은 나무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고 한편으로는 손짓을 이용하여 상초소이에게 나무판자와 비수를 부탁했다.
여전한 얼굴이었음에도 상초소이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상초소이는 이청수의 요구에 응했다.
이청수는 나무판자에 비수를 사용하여 글을 새기고 나서 그것을 상초소이에게 넘겼다. 그리고 비수를 서있는 침상에 꽂아두고 나무막대기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배부른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그 배 안에 아이를 그렸다. 또 그 옆에 하체가 나무인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손을 잡은 아이와 그 아이의 다른 손을 잡은 남자의 모습을 그렸다.
상초소이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때 이청수가 상초소이에게 목걸이처럼 차고 있던 금패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사내의 목에 목걸이를 그렸다. 상초소이는 그것도 이해했다.
이청수는 다시 사내의 뒤에 집을 그렸다. 그리고 나무막대기로 상초소이가 들고 있는 나무판자를 가리켰다. 이청수는 간절한 눈빛으로 상초소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상초소이가 이청수에게 나무막대기를 건네받아 그림을 그렸다. 벌거벗은 남자가 판자와 아이를 이청수가 그린 목걸이 남자에게 건네는 그림을 그렸다. 그때서야 이청수는 간절한 눈빛을 거두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틀이 지났다. 토가족 사람들이 모두 걱정스런 얼굴로 이청수의 집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나무여인이라고 부르는 이청수의 진통이 시작된 탓이었다.
이청수의 진통은 여느 여인들과는 달리 조용했다. 그래서 더욱 더 처절했다.
이청수는 나무였다. 양수가 경화된 두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진통의 간격이 점차 짧아지는데도 신음성 한번 뱉어보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상체는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아픔을 호소하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초소이를 비롯한 부족의 장정들이 모두 동원됐다. 그들은 쉴 사이 없이 물을 길러 날랐다. 아낙네들이 연신 물을 퍼서 이청수의 전신에 퍼부었다. 그러나 굳은 하체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청수가 ‘서있는 침상’에 꽂혀있던 비수를 뽑아들었다. 여인네들이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청수는 서슴없이 비수를 배꼽 아래에 꽂았다. 비수는 그대로 그녀의 음부까지 가로질러나갔다.
이청수는 나무가 아니었다. 붉은 피를 흘리는 사람이면서,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는 성스런 어머니였다.
이청수의 뜻을 알게 된 아낙네들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상매오와 탄흐츄이는 목을 놓아 통곡했다. 이청수는 그들에게 힘겨운 미소를 보여주고 나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상체를 내리 눌렀다.
뿌드드득!
“으아아아악!”
놀람과 기적이 동시에 일어났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굳게 잠겨있던 이청수의 두 다리가 고사목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고, 동시에 토가족 사람들이 아는 한 처음으로 이청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주저앉은 이청수는 힘겹게 손을 까닥여 상매오와 탄흐츄이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은 두 팔로 연신 눈물을 훔치다가 비장한 몸짓으로 이청수의 다리 사이를 헤집었다.
“응애, 응애, 응애!”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다. 상매오는 이청수에게 보통아이와 하등 다를 바 없이 울어 제치는 아이를 들어보였다. 이청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상매오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아이에게 입을 가져가 탯줄을 끊었다.
상매오는 탄흐츄이가 들이미는 물통에 아이를 담아 정성스럽게 씻겼다. 그리고 누렇게 빛바랜 마포에 싸서 이청수의 품안에 넣어주었다.
이청수는 하얗게 웃음 지었다. 어떤 이상한 조짐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아이의 입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눈빛에서 힘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상매오와 탄흐츄이는 급히 이청수에게 달려가 그녀의 등을 받히고 있는 서있는 침상을 치우고 그녀를 눕혔다. 이청수는 다시 한번 감사의 미소를 보낸 후 한 팔로 아이를 지탱하고 다른 한 팔을 바닥에 뻗어 힘겹게 청산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
이청수가 아이에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까지 지배하는 저주는 없단다. 내 아기, 삶이 조금 힘들더라도 늘 푸른 산처럼 맑고 꿋꿋하게 살아다오. 내 아기, 청산(淸山)!”
그랬다. 저주는 풀렸다. 이청수가 말을 함으로서 풀렸고, 토가족과 같은 순박한 사람들을 만난 탓에 사람이 싫어하리라는 저주는 아예 효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이제 죽음으로서 영원히 저주의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이청수.
스물여섯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등졌으나 그 강한 모성은 토가족 사람들의 가슴에서 영원히 살아남았다. 훗날 토가족 사람들의 입에서는 성스러운 어머니의 노래가 자장가처럼 구전되었다.
일권 끝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