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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베드로와 요한의 체포와 베드로의 산헤드린 공회 변론과 석방 및 초대 교회의 성장
구속사적개관
실로 태초 아담의 타락 직후 제 1위 성부 하나님(God. the Father)이 세우신 구속(救贖)의 법은 구약을 관통하여 각종 예언과 예표로 주어져 오다가 제 2위 성자 하나님(God, The Son)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수난으로 일단 성취되었다. 그러나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택한 성도들이 주의 구속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을 충분한 시간의 확보를 위하여 주의 구속 사역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세상 끝날 주의 재림과 전 우주에 대한 심촌 이후에 임할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천국으로 유보되도록 섭리되었다. 그리하여 구속의 법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구약의 성취로 초림하신 주럼은 일단 구약(舊約)의 말씀대로 성취된 구속 사역의 실현으로서 세상 를날에 이루어질 당신의 재림과 그 이후의 천국 구원에 대한 새 약속 곧 신약(新約)을 남기시고 일단 승천하셨다.
그리하여 이제 여수의 강림으로 개시된 같은 신약시대이기는 하되 여수껴서 직접 세상에 계시던 때와도 달리 주께서 일단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숭천하신 이후 그리고 구속 사역 이 최종 실현되는 역사 종말까지의 능구한 중간기의 구속사가 전개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는 비록 구속 사역의 결과가 온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얘수의 사역으로 구속 사역이 이미 성취되기는 하였는 바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하던 죄의 문제가 법적으로는 해결되어 인간과 하나님이 교제할 길이 트였다(히 4:14-16). 그리하여 제 3위 하나넘(God, The Holy Spirit)이신 성령께서 오순절 강림 사건으로 역사 속에 임하였으며 향후 각 성도의 심령속에 내주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성도는 택한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 생쁠을 영위하게 되었다.
본장을 포함해 제 1-7장까지 이어지는 일련 기사가 바로 모든 구약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 오사 신약을 여신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으로 일단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신 직후 오순절 사건으로 강림하신 성령의 인도로 구약 선민(選民)의 수도였던 여루살렘(Jerusalem)에서부터 향후 세상 끝날까지 신약 선민의 생활 중심이 된 교회가 주깨서 공생애(公生涯)동안에 미리 훈련시키신 사도들을 통하여 내외의 폅박과 역경을 이겨내고 이재 막 태동되던 격변기의 역사를 보도하고 있다.
보다 상술하자면 먼저 제 1장은 십자가 수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구속 사역이 온전히 실현되는 때인 당신의 재림과 세상 종말에 대한 거듭된 약속과 동시에 향후 당신의 재림 때까지의 구속사를 주도하실 성령 강림의 약속을 주시고 승천하셨던 대전환기적 상황을 보도한다. 그리고 다음 재2장은 주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이루어져 먼저 주의 사도와 120문도(門徒)가 크게 변화되어 예루살렘에서부터 초대 교회가 태동되게 된 역동적 사건을 보도한다. 다음 제3-5장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이 전날 예수를 처형시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폅박과 내부의 갈등을 무릅쓰고 성령의 인도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를 급신장시켰음이 보도된다. 그리고 제 6-7장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사도들 외에 교회의 실무를 관장할 집사(deacon)들을 선출하는 등 기본적 조직을 정비할 정도로 발전하였음과 아울러 그에 따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박해도 더욱 거세어져서 마침내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殉敎) 사건인 스데반 순교 사건이 발생하였음이 보도된다.
이런 문맥하 본장은 예루살렘에 갓 태동된 초대 교회의 성장을 유대 정치 ․ 종교 지도자들이 핍박내지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조금도 굽힘이 얼는 사도들의 확고한 신앙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더욱더 성장을 거듭하였음을 보도하고 있다.
먼저 전반부 1-31절은 배드로와 요한의 체포와 변론 그리고 석방 등의 기사를 보도한다. 보다 상술하자면 전장의 솔로몬 행각 설교에 의하여 남자만 오천 명이 회개하는 대역사가 발생하자 그 옛날 자신들이 무고하게 처형한 여수의 부활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혐오한 유대 정치 ․ 종교 지도자들의 지시에 의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수비대에 투옥되었음이 보도된다(1-4절).
그리고 그후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Sanhedrin) 공회 앞에서 예수의 부활과 구원의 복음의 메시지(message)를 당당히 변론하였고(5-12절) 지금 당장 앉은뱅이가 일어나 서 있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과 군중의 눈이 두려운 나머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공연한 협박과 위혐만 하고 부득이 사도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음이 보도된다(13-22절). 그리하여 두 사도의 석방을 계기로 예루살램 초대 교회는 큰 감사 찬양 집회를 통하여 더욱 더 큰 성령의 충만을 헤험하였음이 보도된다(23-31절).
한편 후반부 32-37절은 이런 핍박을 이겨낸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신앙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더욱 크게 성장해 갔음이 개략적으로 보도된다.
전반부의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대한 핍박과 이를 이겨낸 감사 찬양의 기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먼저 교회와 성도에 대한 세상,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탄의 사주(使嗾)를 받은 세상에 속한 자들의 폅박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요 15:18,19). 그 엿날 사탄(the Satan)은 먼저 그 자신이 하나넘께 도전하여 타락하였고 첫 사람 아담까지 유흑하여 범죄에 동참시킨 이래 현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고 있다(엡 2:2).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서 오고 오는 세대 중에서 택한 하나님의 백성(God's People)이 당신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진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회개(repentance)하여 구원얻을 충분한 기회를 얻게 하시고자 사탄과 세상에 대한 심판도 함께 유보하고 장구한 구속사가 현 세상에서 진행되게 하셨으므로 마침내 세상은 선과 악,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로 구분되는 세상 끝날이 오기까지 계속될 것이다(벧후 3:8,9). 따라서 마침내 택한 백성이 모두 회개하여 구원(salvation)을 얻어 하나님이 마침내 사탄(Satan)과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세상 종말이 오기까지는 하나님의 구훤 진리를 믿는 성도(Saint)들을 향한 사탄으로 인한 환난과 핍박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속사(救贖史)의 전개애 담긴 하나텀의 뜻을 깨닫고 순간적 핍박이 올 때 영원한 구원을 기억하여 두려워하거나 넘어지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여야 하는 것이다(약 1:2-4,7). 그리고 환난과 핍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성도 각자에게 매우 다양하게 닥치는 바 자신의 삶속의 모든 상황의 겉모습이 아니라 근본을 통찰하는 지혜(wisdom)를 가져야 할 것이다.
둘째, 아무리 사탄으로 인한 핍박이 닥치더라도 사탄을 능히 이기시고 훗날 영원히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능히 이를 물리럭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요 16:33; 빌 4:13). 나아가 사탄의 시련을 이겨내는 귀한 체험을 경험한 사람은 단순히 그 시련을 순간적으로 이긴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더 큰 믿음의 분량과 성숙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실지로 사도행전의 경우를 보더라도 엄청난 핍박이 있은 후에는 꼭 더욱 더 큰 교회의 성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4절; 행 6:7; 9:31). 이것은 또한 2000년 신약 교회사(敎會史)의 피묻은 중언이기도 하다. 그 옛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무고히 처형하였으나 예수는 이를 오히려 자신의 택한 성도를 구속하시는 기회로 삼으시고 또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셨다. 또한 이런 예수를 구주로 믿는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극히 미천하고 유약한 식민지의 일개 무리에 불과했으나 그 엄청난 로마제국의 대박해를 이겨내고 오히려 로마 제국을 영적으로 점령하였다. 그후 2000년을 두고 계속 세계 도처에서 핍박과 박해가 있었을지라도 아니 그런 핍박이 있었을 때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앙은 불타 올랐던 것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역사 이면에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도도히 흐르는 구속사 곧 우리 주 여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에게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살아있음을 입중하는 구속사의 산 증거라 하겠다.
한편 신약 성경 시대 중에서도 아직 초대 교회가 얘루살렘에 국한되고 선교의 1차 대상이 로마 제국 도처에 산재(散在)한 유대인에게 제한되었을 때에는 주로 유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만이 박해자로 등장했었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선교가 전제국 만민에게 미침에 따라 마침내 로마 제국 전체가 기독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초대 교회 박해사의 전개에 대해서는 행 제 12장 연구자료를 보라,
후반부 32-37절의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성장을 계속한 개략적 보도의 구속사적 이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라.
외울 말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히 4:12)
베드로와 요한의 투옥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베드로의 산헤드린 공의 변론
5 ○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들을 책잡지 못하는 공회와 사도들의 석방
13 ○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도들의 석방에 따른 성도들의 반응
23 ○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초대 교회 성도들의 유무상통
32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6 ○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주제-4:1, 사도의 이해
행 1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4:2, 성도의 부활
고전 15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4:32-35 예루살렘 초대 교회 공동체 생활 이해
1. 공동체의 형성 배경
예루살렘 공동체는 오순절 사건 이후 폭발적인 복음 전파와 함께 매우 들뜬 분위기 속에서 급작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공동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은 유대교(Judaism)와는 분리된 독립된 신앙 생활 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보다 활성적인 복음 전파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공동체에 자발적으로 헌납하고 함께 신앙 생활하였다.
한편 이러한 기본 취지는 그 이후 초대 교회에서도 계속 유지되었으나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개인적인 생활을 전폐하고 사유 재산을 헌납하는 그런 공동체 생활이 계속해서 유지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루살렘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공동체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그 기본 정신은 계승되었음이 서신서들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2. 공동체 생활의 특징
예루살렘 공동체 생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지만 성경의 기록(2:42-47; 4:32-35)을 근거해서 볼 때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 생활 대부분 유대인 개종자들이었던 초기 구성원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Temple)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전에 모인 것은 과거 유대교에 속했을 때와 같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들은 회당에서 모이는 대신 한 가정집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성찬식을 나누며 또 애찬(愛餐)을 통해 성도 간의 교제를 돈독히 하였다.
이처럼 예루살렘 공동체의 종교 생활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며 이 는 신약 시대 모든 교회의 본이 되었다.
② 물질의 공유와 나눔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공동체에 헌납하고 각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었다. 이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의식과 신속한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한 필요성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러나 복음 전파 사업이 그렇게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자 그런 식의 공동체 생활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후 재산을 전부 헌납하는 일들은 곧 없어진 것같다 다만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 하기 위해 물질을 얼마씩 나누는 일은 계속되었으며 또 연보가 적극 권장되기도 하였다(고후 8장; 갈 6:6; 히 13:16).
3. 의의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생활 풍습은 이후 초대 교회 전체와 신약 교회 전체의 신앙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그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막론하고 반드시 과거 죄된 생활이 청산되어야 한다(롬 12:2; 엡 4:21-24).
②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갈 2:20; 골 3 :15-17).
③ 지상의 소유물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심을 버리고 항상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전 9:11-14).
④ 그리스도인들 간의 교제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나 물질적인 측면에서나 막론하고 삶의 전영역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요일 3:13-18).
⑤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자신의 전소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마 6:33).
역사배경-4:1-21 산헤드린 공회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참조
역사 배경-4:2,3 초대 교회 박해사
행 12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4:11,27,33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호칭들
1. 예수(1:11)
2. 나사렛 예수(2:22)
3. 주의 거룩한 자(2:27)
4. 그리스도(2:31)
5. 그 종(3:13)
6. 거룩하신 의로운 자(3:14)
7. 생명의 주(3:15)
8. 그 선지자(3:23)
9. 건축자들의 버린 돌(4:11)
10. 머릿돌(4:11)
11.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4:27)
12. 주 예수(4:33)
13. 임금(5:31)
14. 구주(5:31)
15. 인자(7:56)
16. 하나님의 아들(9:20)
17. 만유의 주(10:36)
18.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10:42)
19. 주 예수 그리스도(11:17)
20. 정하신 사람(17:31)
원어연구-4:13 기탄없이 말함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명사 '파르레시아'는 '모두'를 뜻하는 '판'과 '말'(speech)을 뜻하는 '흐레시스'가 합성된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말'이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자유롭게 그리고 담대히 말함'(엡 3:12; 히 10:19).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함'(막 8:32; 요 11:14), '자신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임'(요 7:4)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같은 용례에서 우리는 사람들 앞에 모든 말을 숨김없이 다 한다는 것은 곧 정직함, 담대함, 진실함을 나타내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혹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매개체로서의 '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한편 본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기탄없이 말했다는 것은 곧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외 복음에 대하여 빠뜨림없이 담대하게 증거하였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공회원들은 지금까지 무식한 어부들로만 알았던 베드로와 요한을 이제 달리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함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과 담대 함은 필연코 요청된다 하겠다. 그리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우러 모든 성도들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는 주님의 말씀을 경고로 삼아 담대한 신앙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하겠다.
보감-4:23-31 본문에 기록된 사도들의 기도의 특징
1. 창조주 하나님깨 대한 신앙고백과 찬양이 있는 기도(24절)
2. 어려움에 직면혔을 때 다른 무엇보다 먼저 주깨 부르짖은 기도(24절)
3. 어려움에 직면했을 매 함께 간구한 일심의 기도(24절)
4. 핍박에서의 안일한 보호보다는 담대히 가게 해달라는 적극적인 기도(29절)
5. 개인적인 필요보다 공동체 전체의 필요를 위해 간구한 기도(29절)
6.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이름만 존귀케 해달라는 헌신의 기도(30절)
7. 간구한 대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응답받은 기도(31절)
지도-4:35, 구브로의 위치
주요주제-4:31 성령 세례와 성령 내주 및 성령충만
행 9장 자료노트 참조
지리배경-4:36 구브로(Cyprus)
행 13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4:30, '주의 손'에 대한 본서의 묘사
1. 높이시는 손(2:33)
2. 치료하시는 손(4:30)
3. 영화롭게 하시는 손(5:31)
4. 구원하시는 손(7:25)
5. 창조하신 손(7:50)
6. 믿고 회개케 하시는 손(11:21)
7. 심판하시는 손(13:11)
4:1-4 베드로와 요한의 투옥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행한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에서는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행 2:37-41). 그러나 앉은뱅이를 치유하고 행한 솔로몬 행각 설교에는 유대교의 핍박이 뒤따랐다. 본문에는 그러한 유대교의 핍박을 보여 주는 본장의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처럼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박해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투옥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와 요한의 투옥이 기록되어 있는 본문은 짧은 내용이지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박해하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다(1절).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와 같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도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둘째, 박해의 원인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과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싫어하여 막기 위함이었다(2,3절).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정죄하여 죽인 예수를 구주로 전파하는 것을 막으려고 박해하였는데, 이는 자기들이 메시야를 살해한 주모자요 불의한 교권주의 자로 몰릴 것을 염려하였기 래문이다. 결국 이젓은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써 박해를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예수님의 치유 이적과 같은 능력을 사도들이 행하였으므로 종교 지도자들의 긴장과 불안은 핍박을 더욱 가할 수밖에 없게 하였을 것이다. 이런 박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미 예언하셨었는데(요 16:1-4), 이러한 사실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언제나 핍박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셋째, 박해 가운데서도 사도들의 복음 전파는 더욱 확산되었다(4절). 이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초대 교회가 더욱 확장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매임이 없이 그 능력을 더해 간다(딤후 2:9)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본문은 결국 핍박 속에서도 성장해 가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하겠다. 그런데 유대교의 기독교 핍박은 스데반의 순교 사건(행 7장)으로 첨예화되는데 이러한 핍박은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한다. 따라서 세상의 교회에 대한 핍박은 교회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내외적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는 바 이러한 사실은 교회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행 12장 연구자료. '초대 교회 박해사'를 보다 참조하라.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필박을 받을 때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담대함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보다 공고히 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도우심을 베푸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 전파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다(고후 4:11;벧전 2:20).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 본장에서는 사도들의 능력 있는 복음 전파로 인해 성도의 수가 점차 중대해 다는 사실과 아울러 사도들에 대한 핍박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 나라의 전파'와 '핍박'이라는 전형적인 구조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도 확인되었거니와 '예수의 도'(2절)를 전하는 사도들의 경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백성들에게 말할 때'란 전장의 사건, 즉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걸인을 치유한 후 몰려온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던 때를 가리킨다(행 3:1-26).
제사장들. - 성전에서의 제사 및 각종 의식을 집전하던 자들로서 여기서 복수로 표기된 것은 방대한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많은 수의 제사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 40장 자료노트, '제사장' 참조.
성전 맡은 자. - 학자에 따라서 성전의 질서를 유지했던 안토니 성의 로마 주둔 군대 지휘자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성전의 전체적인 관리 책임을 맡은 레위인 출신의 성전 경호 책임자로 보고 있다(Aford, Hervey). 대개 이들의 지위는 대제사장 다음가는 서열로서 주로 성전 내의 치안과 경비를 전담했던 요직이라고 할 수 있다(Bruce).
사두개인. - 이들의 기원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①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② 산헤드린 의장이었던 안티고누스(Antigonus of socho)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 두 가지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견해를 따라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사두개파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이들의 신학적 ․ 정치적 입장에 관해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사도들을 핍박하는 데애도 그들의 신학적 ․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신학적 입장-사두개인들은 육체의 부활과 영의 존재들을 믿지 않았다(행 23:8). 또한 이들은 모세 오경에만 최고의 권위를 두고, 그외 선지서나 성문서에는 약간의 가치만 부여했을 뿐이다. 이들의 이같은 신학적 입장은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 나라의 존재를 믿지 않게 만들었고, 또한 그 나라에서의 부활을 업신여기게 된다(마 22:23; 막 12:18; 눅 20:27). 둘째, 정치적 입장-사두개인들의 신학적 입장은 자연히 이 세상에서의 삶에 더 귀한 가치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바, 그것은 그들이 사후의 영이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로마적인 민족 정서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로마의 식민지 정치에 적극 협조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로마의 비호하에 이스라엘에서의 정치적, 정제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두개인들의 신학적 정치적 입장은 자연히 복음과는 배치되었으니 따라서 자신들의 종교적 ․ 정치적 기득권 유지를 위해 저들은 예수와 그의 재자들에 대하여 핍박의 칼날을 세웠던 것이 다.
4:2 백성을 가르침. - 이는 제사장들을 위시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핍박하게 된 첫번째 이유이다. 즉 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대의 공식적 선생인 자신들의 권위를 침해하는 어떤 종류의 선생들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사도들이 가르치는 바 교훈의 진리 여부에는 하등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들의 생존과 기득권 유지애만 혈안이 되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예수를 들어‥‥부활하는 도 전함. - 여기서 '예수를 들어'는 '예수 안에'라는 뜻으로서, 의역하면 '예수 때문에'라고 할 수 있다. 즉 죽은 자 가울데 첫 열매로서 부활한 예수는 그를 믿는 성도들도 부활할 것임을 보증해 주는 증표인 것이다(고전 15:20).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그같은 '부활의 도'를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한 것이다.
싫어하여. - 이에 해당하는 '디아포네오'( )는 단순히 실어하는 것을 넘어서 '분개하다', '격노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중거하던 사도들에 대하여 얼만만큼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Robertson).
4:3 저희들 쫓으매. - 이는 사두개 인들을 위시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취한 조치로서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백성들로부터 차단시키기 위해서였다.
날이 이미 저문고로. - 유대 종교적 관슴에 따르면 일몰 후에는 죄인들을 심문할 수 얼다는 규정이 있었는데(Lenski, Knowling), 이로 인해 사도들은 하룻밤을 감방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는 적어도 유대 지도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종교적 규례를 준행하는 데 열심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들의 외형적인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의 사도들을 체
포한 것온 신앙의 역설이 아닐 수 얼다. 행 12장 연구자료, '초대 교회 박해사' 참조.
4:4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 학자에 따라선 본절의 '남자의 수'에 대하여 말 그대로 남성의 수만 가리킨다는 의견(Meyer, 0lshausen)과 여성을 포함한 사람의 수를 가리킨다는 견해(Knowling)로 양분되고 있다. 그러나 '남자의'에 해당하는 '안드론'( )이 남녀 모두를 가리키는 '안드로포스'와는 분명히 구별되므로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Heryey).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본절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사도들을 백성들에게서 격리시킴으로써 복음의 전달을 차단시키려고 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시도는 무위로 들아가고 말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 개심한 수가 오천 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120명으로 시작된(행 1:15) 초대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인해 나날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4:5-12 공회의 심문과 베드로의 변른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후 산혜드린 공회(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참조)에서 실문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눅 22:66-71) 사도들도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당하였다. 본문은 공회에서 사도들이 심문당하고 베드로가 이 심문에 대하석 답변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먼저 종교 지도자들의 심문인데(5-7절) 이는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치유한 근거와 방법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과 유사한 것으로(마 21:23-27)사도들이 행한 능력의 수단과 방법을 사탄에 의한 것으로 몰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것이라면 이단자로 정죄 당한 자의 교설(敎說)을 퍼뜨린 것으로 몰아 사도들을 정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의 간교한 심문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담대하게 증거하였다(8-12절). 즉 베드로는 그들이 이단자로 몰아 죽였으나 하나님깨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러한 치유의 능력을 행했으며, 바로 그 샐수가 은 세상의 구주되심을 담대하게 전하였다.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의 구주되심과 메시야되심을 시 118:22을 인용하여 증거했는데, 이 시 118:22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당시 유대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구절이며 예수께서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드러내신 바 있다(마 21:42; 막 12:10; 눅 20:17). 사실 예수깨서는 건축자들이 쓸모없는 돌이라고 버린 돌처럼 유대인들에 의해 멸시받고 죽임을 당하셨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사 하늘에 올리워 당신 우편에 두시고 구원의 문이라 할 수 있는 교회의 머릿돌과 기초돌로 삼으셔서 그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셨으며, 그를 버린 자들에게는 거침돌이 되게 하겼다(롬 9:33; 엡 2:20; 벧전 2:6). 한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베드로의 담대한 모습은 여종 앞에서 예수의 제자인 것을 부인했던 것(요 18:17)과는 실로 엄청난 변화를 수반한 것으로 성령의 충만함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변화되는 신앙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외에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박해하여 복음전파를 막으려 했으나 베드로는 오히려 이러한 기회를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다. 그와 같이 성도들도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한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두려워 말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선용해야 한다.
②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의 통로가 되신다(행 10:43; 16:31). 실로 다른 이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하나님은 천하 인간애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바 없다(12절).
4:5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 이들은 산헤드린의구성 회원들이다(막 14:53; 행 5:21). 산헤드린 (Sanhedrin)은 70인의 회원으로 구성된 유대인들의 최고재판 기관으로 유대인들 자체의 종교적 문제는 물론 민사 문제도 처리하였다. 그러나 로마 통치 하에서 사형권만은 행사할 수 없었는 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유대 총독의 판결에 따랐다. 산헤드린에 대해서는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서 '관원'은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서기관'은 대부분 바리새인 출신인 율법사(lawyer)들을 가리킨다. 마 2:4 주석 참조․
4:6 대제사장 안나스. - A.D. 6-15년에 대제사장직에 있던 자이다. 따라서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아니었지만 9년에 걸친 대제사장직으로 인해서 그에게 '최고 제사장'이란 호칭이 주어졌다. 더욱이 그는 퇴임 후에도 자신의 가문 사람 중 일곱 명이 계속 대제사장직을 독점함으로써 이스라엘 내에서 최고의 정치적 · 종교적 권력을 휘둘렀다(눅 3:2). 그는 예수와 사도들을 죽이고 핍박하는 데 항상 앞장 선 탓에(요 18:13) 오고오는 세대에 걸쳐 불경건한 종교인의 전형이 되는 가장 저주스런 인생이 되었다. 한편 본래 대제사장직은 아론의 후손이 계승하는 종신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대제사장의 임기가 한정적인 것은 이스라엘의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로마 정부가 그들 마음대로 대제사장 임면(任免)을 단행한 까닭이다. 마 26:3주석 참조.
가야바. - 안나스의 사위로서 당시 현직 대제사장이었다. A.D. 18-36년까지 재임했는데, 예수님의 처형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요 18:13-24). 요 11장 연구자료 참조.
요한과 알렉산더. - 이들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요한은 A.D. 36-37년 동안 대제사장으로 재임한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이라는 설과 알렉산더는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의 동생 알레산더라는 설이 있을 뿐이다(Longeneker, Hervey, Wolf). 하여간 분명한 것은 이들 역시 안나스 가문의 사람으로서 당시 안나스 가문의 세도가 막강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 이는 당시 제사장들을 위시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관심의 정도를 보여 주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미 죽인 예수의 영향이 다시 살아난 듯한 감을 사도들의 사역 속에서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즉 이들은 예수 제자들의 능력 있는 복음 전파의 영향력에 대하여 예사롭게 대처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을 끼고선 공동 대처의 필요성에 따라 함께 모였던 것이다.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 이는 산헤드린에서 피고인을 심문할 때의 자리 배치인데, 이때 대개 피고인들은 반원형으로 둘러 앉아 있는 산헤드린 회원들의 위임에 주눅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들이 인위적인 좌석 배치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기세를 꺽으려고 했던 시도 자체가 자신들의 빈약한 권위를 드러내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 먼저 산헤드린은 사도들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치유한(행 3:1-10) 근거와 방법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이는 사도들의 치유 능력을 이방신이나 사단에 의한 것으로 몰아붙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즉 그들도 익히 아는 바 앉은뱅이의 치유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처지에서 사도들을 기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도들의 치유 능력이 여호와의 권세와 이름에 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길 뿐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산헤드린 위원들의 질문에서 우리는 저들이 인정하는 권위 이외의 모든 권위는 사단적으로 판단하려는 독선(善)을 읽을 수 있다.
4:8 성령이 충만하여. - 이는 비상한 시기에 특별한 성령의 권능을 덧입은 것을 가리킨다(31절; 행 9:17; 13:9). 즉 베드로는 성령으로부터 산헤드린의 질문에 능히 대항하고 변증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받고서 담대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마 10:16-20; 눅 21:12-15). 이는 중생한 성도가 자기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의미로서의 '성령 충만'(행 6:5)과는 구분된다. 행 2:4 주석 참조.
4:9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 - 이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을 말하는데,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의 행한 일에 대한 가치 판단을 이미 긍정적으로 내리고 있다. 즉 그는 산헤드린의 질문에 대하여 본격적인 대답을 하기에 앞서 자신이 행한 일을 '착한 일'이라고 전제함으로써 이 일을 두고서 산헤드린이 트집을 잡는 것은 부당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같은 대담한 태도는 이전에 자신의 목숨 부지를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모습과는 뚜렷이 대조되고 있어 주목된다(마 26:69-75).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 이처럼 베드로의 변증은 비단 산헤드린에 국한되지 않고 이스라엘 전백성들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산헤드린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일조를 했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는 지금부터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전해져야 한다는 당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리신. - 베드로의 변증이 매우 주도 면밀하게 구사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여기서 '하나님'은 산헤드린의 '권세'에 대한 질문(7절)의 대답이 되고 있는 바, 먼저 베드로는 자신의 치유 능력이 사단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살리신'이라는 부분은 산헤드린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던 것과 대조되고 있다. 즉 그들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저를 살리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산헤드린이 하나님께 정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이는 산헤드린의 '이름'에 대한 질문(7절)의 대답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나사렛'이라는 예수의 출신지를 명시함으로써 다음절의 '건축자들의 버린 돌'(11절)이라는 이미지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즉 예수님은 나사렛이라는 이스라엘의 변두리 지방 출신으로서,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그 예수가 '그리스도' 이심을 밝힘으로써 그가 '집 모퉁이의 머릿돌'(11절)이 되었음을 주저없이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증에서 보듯 베드로는 비록 산헤드린에게서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을 증거함과 동시에 자신의 앉은뱅이 치유가 바로 그 예수의 이름에 근거한, 즉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것임을 치밀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4:11 건축자들의 버린 돌. - 본절은 시 118:22의 인용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배척을 묘사하기 위해 신약에 종종 인용되었다(엡 2:20; 벧전 2:7).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를 자신이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에게 배척당한 것과 관련하여 자신에게 적용하셨던 적이 있다(마 21:42).
집 모퉁이의 머릿돌. - 이는 건물의 양벽이 연결되는 곳의 요석(要石)을 말하는데, 여기서 베드로는 이를 승귀(昇貴)하신 예수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데 적용하고 있다(Bruce, Toussaint).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 여기서 '구원'은 육체적 질병과 영적 암매(暗昧)에서의 회복을 동시에 뜻하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행 14:9). 즉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육체적 질병 치유를 넘어선 인간 영혼의 구원까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총체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직설법적인 증언은 여태껏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자격과 율법 준수를 통해서 자력 구원의 길을 모색했던 유대인들의 신앙을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예수의 하신 일과 그 효력에 대하여 믿는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딤전 2:5).
4:13-22 공회의 결의와 사도들의 석방
본문은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담대한 변론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석방하는 장면을 소개한다. 본문을 보면 공회가 사도들을 석방한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베드로의 담대한 변론과 논리 앞에 논박할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13절). 둘째는 앉은뱅이 병을 고친 사람이 직접 증인으로 나와 있었기에 거짓 증거를 행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14절). 셋째는 사도들의 복음이 이미 많은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졌기에 사람들의 비난과 대적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16절).
그런데 이들은 사도들을 석방하면서도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위험하는 간교함을 버리지 않았다(17,18절).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사도들의 태도는 참으로 담대한 신앙 고백서 자세를 보여 준다(19-21절), 즉 사도들은 봉희의 힘과 하나님의 명령을 대립시키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어떠한 세상의 법적 제재도 단호히 기부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위험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위하여 살아갈 것을 결단한 것이다(19,20절), 사도들은 비록 세상의 학문을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의 지혜와 능력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충만한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있어 복음 전파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한편 누가는 앉은뱅이의 나이를 사십여 세라고 기록하여 인간의 능력으로 고칠 수 없어 10여 년 동안 불구생활을 한 자를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였음을 강조한다 (22절).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비록 세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사도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압도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감당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고전 1:25).
② 종교 지도자들은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사도들의 담대한 변론으로 복음이 더욱 전파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인간의 훼방으로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딤후 3:8).
③ 산헤드린 공회의 협박과 위협 속에서도 사도들은 담대한 믿음을 보여 주는데, 이는 진정한 신앙은 박해와 핍박 속에서 더욱 빛이 나며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신뢰만이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이룰 수 있음을 교훈해 준다(고전 9:16).
4:13 기탄없이 말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판'(모든)과 '레시아'(연설)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말하다', '숨김없이 말하다'는 뜻이다. 즉 베드로는 조금도 막힘이 없이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증거한 것이다.
학문없는 범인. - 이는 산헤드린 공회로 모였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베드로에 대한 선입관이다. 여기서 '학문이 없다'는 말은 정규 랍비 교육을 못받은 사람들을 뜻하는 전문 용어이다. 즉 자신들처럼 당대 최고의 종교 교육도 받지 못한 베드로가 기탄없이 담대하게 말하는 사실이 산헤드린 회원들에게는 무척이나 의외였던 것이다(Robertson, Longeneker, Hervey).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 이것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놀라게 된 두 번째 이유이다. 즉 그들은 예수님 역시 정규 랍비 교육을 받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요 7:15). 따라서 그의 제자인 베드로가 그에게서 특이할 만한 지식을 전수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의아해 하고 있는 것이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이런 의문은 당시의 지식 전수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물려주는 형식을 거쳤던 이스라엘의 교육 풍토를 반영해 주고 있다(Bruce).
4:14 병 나은 사람이…함께 섰는 것. - 본절만 갖고서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어떻게 해서 산헤드린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출석은 산헤드린이 더 이상 베드로를 심문할 여지가 없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이전의 앉은뱅이가 완전히 회복된 모습으로 출현한 것은 지금까지 베드로가 얘기한 바가 모두 사실임을 명백히 입증해 주는 산 증거였기 때문이다.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심문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저들의 완악함을 확인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런 정도의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었다면 마땅히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도들을 정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는 완악함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4:15 공회에서 나가라. - 이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난처함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더 이상의 공소 유지가 어렵게 된 그들로서는 이스라엘 최고 재판소로서의 위상에 누(累)가 될만한 요소를 최소 한도로 줄이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의논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앉은뱅이에 대하여 그 자리에서 잠시 동안의 퇴정을 명령하게 된 것이다.
4: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 산헤드린의 고민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그들의 입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에 대하여 당장의 억압 조치를 취하고 싶었지만, 명백한 증거 불충분으로 공소 유지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방면하자니 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사상이 백성들에게 유포될 것 같아서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것이다. 한편 이런 산헤드린 의회의 진행 과정이 사도들이 회의장 밖으로 쫓겨난 상태에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기록자 누가에게 전해졌겠는가 라는 문제는 충분히 제기할수 있는 의문점이다. 비록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회심 전 사울이나 그의 스승 가말리엘에 의해서 전갈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Longeneker, Toussaint). 사실 당시 사울이나 그의 스승 가말리엘은 산헤드린과 깊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회의 진행 과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런 추측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사울이 회심 후(행 9:1-22) 누가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Moulton, Milligan).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 -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자를 고친 것을 가리킨다(행 3:1-10). 당시 사람들 역시 그 말하는 바에 증험(證驗)이 있는 여부에 따라 여호와의 참된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였으니(신 18:22) 이러한 표적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었음을 증거해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 이런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발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 역시 베드로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것으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사실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완악한 불신앙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4:17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 이는 앉은뱅이 사건에 대한 산헤드린의 처리 방향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당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즉 그들의 최대 관심은 자신들의 지위 유지와 입지 확대에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사도들의 종교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신들의 종교적 입지가 좁아지고, 이는 결국 자신들의 영향력 감소로 나타날 것이 뻔한 이치였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사도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저희를 위협하여. - 하나님의 진리를 협박을 통해서 봉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산헤드린의 이같은 비열한 방법의 동원은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폭력과 협박에 의지한 것으로서, 이는 저들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지도할 영적 권위를 스스로 포기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이름.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킨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권능을 베푸는 것만은 막으려 했는데, 그 이유는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과거에 예수를 죽였던 자신들의 불법성을 폭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4:18 예수의 이름으로…가르치지도 말라. - 사도들에대한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판결로서 복음 전파에 대한 중지 명령이다.
4:19 너희 말 듣는 것…하나님 말씀 듣는 것. - 여기서 베드로는 산헤드린의 협박과 하나님의 명령을 첨예하게 대립시킴으로써, 산헤드린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사람의 법률을 단호하게 거부한 베드로의 태도는 초대 교회 이후 오늘날에까지 계승된 전례로서,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견지되어야 할 황금률이 아닐 수 없다.
옳은가 판단하라. - '판단하다'에 해당하는 '크리노'는 '분별하다', '심판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산헤드린에서 어떠한 문제를 놓고 공회원들이 서로 면밀한 분석과 의견을 주고 받는 가운데 공식 판결을 내리듯이 이번 일에 있어서도 사사로이 감정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4:20 보고 들은 것. - 이는 사도들의 증거의 확실성을 나타내 준다. 즉 그들이 전한 예수의 복음은 자신들이 직접 목격하고 교훈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사도들은 단지 풍문으로 들은 불확실한 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전수받은 생명의 복음을 확신 가운데 전했던 것이다.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 사도들이 관원들의 위협 때문에 주께로부터 직접 받은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는 것은 몸과 영혼을 함께 죽일 수 있는 하나님보다 단지 몸만 해칠 뿐인 세상 왕에게 굴복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마 10:28).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들이 받은 사도적 임무를 계속 수행할 것이며, 이를 중지하라 한 산헤드린의 명령은 수납할 수 없다고 명백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4: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 이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근본적인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교권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뜻보다는 백성들의 이목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불법적 재판과 심문 과정을 통해서 죽였던 장본인들인 만큼 사도들을 처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과 연관된 재판을 억지로 강행해서는 안된다는 형세 판단 정도는 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직접 목격한 것이었으니 이와 관련하여 부당한 조처를 취할 경우 저들의 반발을 살수 있었기 때문이다.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 산헤드린 회원들이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처벌할 어떠한 빌미도 얻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다시 위협하여. - 이같은 협박은 산헤드린 공회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사도들의 당당한 태도와는 극단의 대조를 보이는데, 끝까지 자신들의 불의를 부인하려 한 비겁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놓아주었으니. - 이런 산헤드린의 석방 결정은 다소 전술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일시 석방했지만, 초대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자 곧바로 사도들을 다시 핍박했기 때문이다(행 7,8장). 따라서 산헤드린의 석방 조치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는 전술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 이후 전개된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 본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이는 본 사건이 이들 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큼 명백한 신적 역사의 증거로 제시되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본절은 본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복음의 증거를 유일하게 거부하고 있는 산헤드린의 반 종교성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소위 고등 종교 정규 과정을 이수하지 않은 평범한 백성들조차 이 일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사건임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로 자처하는 산헤드린이 유일하게 본 사건을 왜곡하려 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4:22 이 표적. - 이것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치유사건(행 3:6)을 말한다. 여기서 특별히 '표적' 이라는 단어를 채택한 것은 그 사건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앉은뱅이를 치유할 때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에 의지했는데, 이때 치유의 역사가 드러나자 백성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행 3:9,10). 따라서 본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증표가 되었는데, 이런 면에서 본 이적을 '표적'(sign)으로 표기한 것은 매우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행 2:19,22 주석 참조.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나이를 말한다. 그가 출생 때부터 불구였던 점을 감안하면(행 3:2), 이 횟수는 그의 연령이기도 하지만, 불구로 지낸 고통의 기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앉은뱅이 자신뿐 아니라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치유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 조차 갖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서 그가 치유되었다는 것은 단지 이 사건이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은 기적이라는 놀라움 보다는 명백히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라는 표적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한편 이 앉은뱅이에게 있어 지난 40여 년의 불구의 세월이 세상 사람들의 동정에 의지하는 삶이었다면, 치유 이후의 기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참 신앙인의삶이었다고 하겠다.
4:23-31사도들의 석방에 따른 성도들의 반응
지난 단락(13-22절)에서는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기탄없는 변론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위협하여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놓인 사도들을 맞은 성도들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세 가지 사실을 보여 준다. 먼저 핍박을 보는 교회의 반응이다.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이 교회에 가서 그 상황을 보고하자 성도들은 예고된 박해를 생각하면서 더욱 담대한 신앙을 갖기 위하여 기도하였다. 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성도들은 분열하거나 배교함이 없이 더욱 하나된 모습을 보였다. 즉 이러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는 교회를 더욱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성도들의 기도이다. 성도들은 이사야 37:15-20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기도를 인용하여(24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시편 2:12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자신들의 고난이 동일한 것임을 강조한다(25-28절).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모두 주님과 한 지체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롬 12:5; 고전 12:27; 엡 1:23; 골 2:19). 또한 성도들의 기도는 당면한 박해의 기운만을 제거하여 평안을 원하는 수동적인 기도가 아니라 그 박해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게 해달라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기도를 드려(29,30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성숙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 준다(마 6:33). 마지막으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31절).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성령 충만의 체험을 주시고 땅이 진동하는 역사를 보여 주셨다. 이런 성도들의 성령 충만은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교회를 하나되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믿는 자는 환난과 핍박이 가해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더욱 큰 능력과 소망을 소유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고후 4:16-18).
4:23 동류에게 가서. - 여기서 동류는 다른 사도들과 초대 교회 교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자 함께 모여 기도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행 12:12), 베드로와 요한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저들의 염려를 덜어주기 위해 저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다 고하니. -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의 재판 과정을 상세히 전달했는데,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동행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힘있게 증거했던 것 같다(행 4:8).
4:24 일심으로. - 원어로 '호모뒤마돈'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나뉘이지 않은 믿음을지녔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주로 초대 교회 교인들의 연합과 관련해서 종종 사용되었다(행 5:12:15:26),
대주재. - 이에 해당하는 '데스포타'는 보통 종이 주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데, 여기에는 주인의 권위와 권능을 높이는 의도가 들어 있다(Robertson, Longeneker). 고로 초대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을 '대주재'로 부른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석방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칭송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본절 이하 30절까지 계속되는 기도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찬양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이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비록 세상에서 가해지는 환난이 심중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해칠 수 없다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Calvin). 사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고서는 참새 한 마리도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마 10:29).
4:25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 본절과 26절은 시 2:1,2의 인용이다. 그런데 시편 2편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그것이 다윗의 저작인 양 언급되고 있음은 시편 2편의 내용이 '다윗 언약'(삼하 7:5-16)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인 듯하다(Bruce, Lenski).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 시 2:1의 인용이다. 이는 1차적으로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과 주변의 국가 간의 복잡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날 메시야에 관한 예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시 2편은 항상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행적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해석되었는데, 여기서 열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언도한 로마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사실을 뜻한다.
4:26 세상의 군왕. - 이는 전절의 '열방'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비록 유대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인해 로마의 정권이 깊숙하게 연관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에 대한 고발은 유대인 관원들이 했지만 사형 언도 및 집행은 전적으로 로마 정부가 주관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다윗 시대에 이런 정치적인 상황과 관련된 메시야 수난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고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의 원 저자가 성령이심을 분명히 확인시켜 준다(25절).
관원들. -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행 3:17 주석 참조.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적수로 생각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의 권력을 이용하여 처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선민(選民)으로 자처하면서 로마의 지배를 증오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는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가증스런 족속들이었다. 따라서 골고다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한 권력과 위선적인 신앙을 폭로하는 잣대가 되기에 충분했다.
주와 그 그리스도. - 시 2:2에는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로 나와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로마 정권과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를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를 민중 선동가와 종교적 이단자로 몰아 죽였지만, 그는 실상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는 '주'이시며 만물을 자신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이셨던 것이다(엡 1:10,21). 따라서 그들이 집행했던 십자가 처형은 결국 허사를 경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죽였던 예수를 하나님께선 다시 살리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앉히사 만물을 통치하는 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빌 2:9,10).
4:27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 이 두 사람 다 로마의 하수인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지만, 전자는 '분봉왕'이고 후자는 '총독'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여기서 헤롯은 대(大)헤롯(마 2:1)의 아들인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로서(마 14:3)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렸고, 빌라도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 지방을 관장했던 로마 황제 직속의 총독이었다. 이 두 사람은 당시 정치 권력 역학상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예수를 죽이는 일에는 동지가 되었다(눅 23:12). 이는 서로의 이해 관계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속받지 못한 세상 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반대하는 공통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헤롯 안디바와 빌라도에 대해서는 마 14장과 27장 연구자료를 각각 참조하라.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 이는 구약 시대 제사장이나 왕, 선지자를 세울 때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구별되어 세움 받은 자임을 뜻하는 의미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던 의식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출 40:13 주석 참조. 여기서는 예수께서 그러한 삼중직을 감당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셨음을 나타내 준다.
거룩한 종. - 행 3:13 주석 참조.
4:28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 본절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폭로된 인간들의 음모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보여 준다. 즉 유대 관원들과 로마 정권은 자신들의 필요와 지혜를 좇아서 예수를 처형했고 더 나아가 지금도 예수로 말미암은 복음을 훼방하고 있지만(29절), 그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허용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4:29 본절과 30절에서는 예상되는 초대 교회에 대한 핍박과 관련하여 성도들이 간구한 세 가지 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 간구의 첫 번째 내용이다. 여기서 '하감하옵시고'(에페이데인)는 원어의 의미상 ‘돌아보시고’(눅 1:25)라는 뜻이다. 고로 이 간구는 대적의 핍박의 강도를 낮추어 달라고 하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감찰하셔서 적절한 대책을 세워달라는 의미이 즉 이것은 자신들의 안락 여부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강조점을 둔 바람직한 기도이다.
종들로. - 이는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의 자기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단어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이해함으로써,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뜻을 언제라도 수행할 것이라는 사도적 사명감에 충일(充溢)해 있음을 보게 된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 간구의 두 번째 내용이다. 이들은 대적들이 복음 전파를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축됨 없이 능력 있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런 간구로 미루어 보건대 이들은 적어도 자신들에게 임할 핍박이 증대될 것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같다.
4:30 표적과 기사가…이루어지게. - 세 번째 간구의 내용이다. 이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더 효과적이고 능력 있게 전파하기 위한 것으로서, 초대 교회의 태동기에 반드시 필요했던 사항이다. 즉 이들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의 경우(행 3:1-10)에서처럼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표적을 통해서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공인을 받은 것으로 명백하게 드러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들의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달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드린 간구인 것이다.
예수의 이름. - 세 번째 간구의 중요한 내용으로서, 자신들의 표적어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발생하는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원하고 있다. 즉 표적과 기사의 근원적인 힘은 자신들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고, 자신들은 단지 그 사실을 증거하는 종에 지나지 않기를 원하는 저들의 겸손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세는 오늘날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도 항상 지녀야 하는 것임은 두말할나위 없다.
4:31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 이같은 현상이 행 2:2에서와 같은 '급하고 강한 바람'에 의한 것이었든 아니면 일종의 지진 현상이었든(행 16:26) 간에(Hervey, Robertson) 함께 모였던 성도들이 공히 체험했던 객관적 현상이었음에는 틀림 없다. 이런 현상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서 나타났던 바(출 19:18; 시 114:7; 사 6:4; 암 9:5; 행 16:26), 성도들의 기도가 열납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성령이 충만하여. - 여기서 성령 충만은 오순절 성령 체험과 유사하지만(행 2:4), 엄밀하게는 서로 구분을 해야 한다. 즉 오순절의 성령 체험은 성도의 구원과 관련된 '성령 세례'이고, 여기서는 성도의 성숙 과정에서 주어지는 성령 충만이다. 전자는 일회적인 반면 후자는 지속적이다. 더욱이 본절에서의 성령 충만의 체험은 성도들의 능력 있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성령의 도우심의 외적 표징인 것이다. 8절 주석 참조.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이는 성도들의 두 번째 간구 내용이었는데(29절), 성령 충만함을 받은 이후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기도 응답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간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이 세상에 전파되기를 바라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4:32-37성도들의 나누는 생활
본문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고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더욱 성숙된 믿음의 모습을 보여준 전단락(23-31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 부분으로 경력 만한 삶을 사는 자들의 모습이 어떤가를 소개하는 부분이다. 즉 본문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서로의 물건을 통용하고 나누는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시체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
이미 누가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 소개한 바 있지만(행 2:44,45) 여기서는 바 속에서도 더욱 화장되고 지속되는 공동체의 일면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공동체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은혜의 메시지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은혜를 받아 나눔의 생활을 했기에 핍절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33,34절). 이것은 결국 외부적으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내적으로는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의 본질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인 바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인 천국의 모습을 예시해 준다.
한편 누가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 성도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바나바의 봉헌을 기록하여 참된 성도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바나바의 헌신은 결국 그를 바울과 함께 하는 선교사의 사명을 갖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삶 속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의 불신자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마 19:21; 빌 2:4; 계 12:11).
4:32 믿는 무리. - 이는 일반적으로 '성도'를 뜻하는 용어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구주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4절). 이들은 각기 상이한 성장 배경과 정서적 감정을 지녔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같은 구주로 고백함으로써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한 마음과 한 뜻. - 이는 같은 성령을 받은 결과로 주어진 믿음의 표징이다. 비록 개인적인 편차가 다양한 사람들이었지만, 성령의 일치시키시는 사역은 이처럼 성도의 연합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같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는 역사는 인류 역사상 제기되었던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실현시키지 못했던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이런 유무상통의 덕행은 행 2:43-47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바, 성령의 강력한 역사의 결과로 인한 것이다. 이것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서로가 사랑의 정신에 입각한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였음을 보여 준다. 행 2:44,45 주석 참조.
4:33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 사도들의 교훈과 설교, 증거에 있어서의 핵심 내용이다(행 1:22). 전통적으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었는데(고전 1:23), 이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사상 때문이었다(신 21:23).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은 제자들을 다 제 갈길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의 못박히신 십자가가 구원의 표적이 되며, 예수만이 세상의 주되심이 확증되어진 것이다(엡 1:21-23). 따라서 예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초대 교회에 힘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점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 하나님의 은혜란 항상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당신의 백성들에게 적당한 시기에 주시는 선물임을 감안할 때, 비록 무리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연유된 것임을 알 수 있다(Alford, Hervey). 이처럼 은혜 수여의 주도권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각종 부흥 집회를 통해서 행해지는 인위적인 '은혜' 부여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 이는 일종의 경제적 평등의 실현이다. 이런 평등 사회는 이미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에 하나님께서 온 백성에게 일용할 양식인 만나, 즉 부의 축적이 허용되지 않은 양식을 주심으로써 이미 실현된 적이 있다(출 16:16-21).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 이는 초대 교회 성도들 중 핍절한 사람이 없어지게 된 재정적인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 즉 밭과 집이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성도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만나의 경제 원리를 수납함으로써, 나머지 여유분을 필요한 자들에게 분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공동체 내에서 극단적인 부와 지독한 가난이 사랑의 구제를 통해서 경제적 평등과 연대감을 창출해 내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것이다.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 본절은 초대 교회 초기에는 말씀과 구제의 사역이 사도들에게 집중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당시 초대 교회가 아직 태동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유일한 직분자가 사도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구제 사업은 나중에 집사들의 전담 업무로 이관되었다(행 6:2,3).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 이는 당시 초대 교회에 헌납된 재산의 분배 원칙으로서 참으로 공정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항상 인간의 탐욕과 쟁탈전이 결부된 인간사에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가난한 자에 대한 물질 분배가 이처럼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본 적이 없었던 일인 것이다. 가진 자의 더 가지려는 탐욕과 가지지 못한 자의 투쟁을 통한 쟁취라는 대립적 양상만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 있어서 초대 교회의 분배 원칙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점이 너무도 크다 행 2:45 주석 참조.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 - 본절로 미루어 보아 바나바(Barnabas)는 지중 해상의 구브로(Cyprus)섬에 근거지를 둔 레위인 출신의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훗날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동역자가 되는데, 이때 첫 전도 여행지로 자신의 고향 구브로 섬을 통과하게 된다(행 13:4). '구브로'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행 13장 자료노트와 행 11:19 주석을 참조하라.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 - 이 이름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지만 여기서처럼 '권위자', 즉 '권면하고 위로하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보면 무방할 것이다. 그는 초대 교회 태동기 때부터 큰 사역을 담당하는 바, 다음 절의 내용처럼 유무상통 정신에 솔선 수범했을 뿐 아니라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에도 훌륭한 동역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안디옥 교회의 자생적인 교인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아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된 목회자였고(행 11:21-26), 여기서 그의 목회 사역에 더 필요한 사도 바울을 초빙함으로써 훌륭한 공동 목회를 수행하는 등 목회자로서의 책임감과 관용(행 9:27)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바나바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행 11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4:37 그가 밭이 있으매. - 이로 미루어 보건대 바나바는 비록 구브로 섬 출신의 디아스포라였지만, 예루살렘에서도 어느 정도의 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것 같다(Longeneker). 한편 이러한 본절에서 문제가 되는 점이 한 가지 있는데 곧 바나바가 레위인으로서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원래 레위인은 사유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민 18:20; 신 10:9).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 이후 시대에 이르면서 이 법규가 사문화되었기 때문에, 바나바의 토지 소유는 당시로서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Bruce, Longeneker).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 바나바가 자신의 재산을 자진 처분하여 사도들에게 맡긴 것을 뜻한다. 바나바의 이러한 행위는 그의 순수한 신앙을 보여 주는 일면으로서 다음 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공명심이 앞선 행위와는 좋은 대조가 된다(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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