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열차 안에서
저는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에 타고 있어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미래의 시간에 데려다준대요. 목적지는 잘 모르지만,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갑니다. 차창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경치를 감상하는데, 중간에 내릴 수는 없어요. 제가 탄 열차의 종착지는 아직 보이지 않아요. 남은 거리가 얼마쯤일까 궁금했는데, 지금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달리니까요.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보다 멀지 않게 남았다는 건 확실해요.
열차 안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지요. 그 만남이 깊은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스쳤다가 헤어지기도 해요. 동석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나누지만, 자잘한 다툼도 있어요. 사랑과 미움, 갈등을 겪으며 수많은 사연의 이야기를 만들어요.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소중한 의미를 남기지요.
여덟 살 때 아버지와 서울행 기차를 탄 적이 있어요. 역마다 자주 쉬었는데 아버지는 그때마다 이동식 매점에서 군것질거리를 사주셨어요. 삶은 계란, 빵, 사이다 등을 먹고 잠 들었는데 열차는 계속 달렸어요. 그때는 왜 그리 멀고 지루하게 느껴졌는지. 서울역에 내렸을 때 거대한 도시에 압도되었어요. 몇 년 후에 고속도로가 생기고 열차를 탈 기회는 많지 않았어요. 방학 때마다 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내려갔으니까요. 그 뒤로 열차만 보면 아련한 향수가 떠올라요.
방학이면 집이 있는 도심의 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시골 큰댁에 갔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시골의 간이역까지 열차를 타고 가서 한없이 뻗은 논둑길을 걸었어요. 방학 때면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사촌 언니나 오빠를 만날 수 있거든요. 호롱불 아래서 바느질하던 백모님의 모습이 생생해요. 마음속 고향을 품고 지내다 삭막한 현실에서 자주 꺼내봅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의 의미는 각별하지요. 명절이 되면 매스컴을 통해서 고향에 내려가는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 길게 줄 선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좌석표를 구하지 못한 이는 내내 통로에 서있거나 앉아서 오랜 시간을 견디며 고향으로 향했지요. 지금은 간편하게 인터넷으로 예매하지만, 인정이 넘치던 그때의 풍경이 그립네요. 타지에서 돌아오는 가족을 위해 분주하게 명절 음식을 준비하시던 어른들의 모습도.
오래전에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행 야간열차를 탔는데 이층으로 된 침대칸이었어요. 출발 직전의 열차 옆에서 제복을 입은 남자 승무원들이 차렷 자세로 서있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마치 ‘톨스토이’ 작품에 나오는 장교처럼 멋지고 인상적이었어요. 밤새 달린 열차에서 낯선 풍경의 아침을 맞이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요. 그때만 해도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시절이었어요.
열차를 생각하면 아쉽게 이별하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영화에서 자주 본 장면이거든요. 먼 길 떠날 때 기대감으로 설레지만, 누군가와 헤어져야 하는 건 슬픈 일이에요. 사람들이 열차에 타고 내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작별을 했을까요. 대부분이 꿈과 희망을 안고 떠났고 좌절과 아픔을 안고 돌아온 이들도 있을 거예요.
달리는 열차는 덜컹거리기도 하고 터널을 만나기도 해요. 어둠의 시간이 길어지면 두려움이 몰려오지요. 터널이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아서. 어둠 끝에서 빛의 세계가 환히 열릴 거란 걸 안다면 두렵지 않아요. ‘위기’가 ‘기회’란 말도 있잖아요. 열차는 터널의 끝자락을 향해 달리니 희망이 보이네요.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새로운 기운이 생긴다고 해요. 열차 안에서 만난 사람이 전해준 얘기랍니다.
차창을 통해서 밝은 햇살에 빛나는 마을과 도시, 달빛이 잠긴 강과 산도 보았어요. 빛과 그림자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바퀴처럼 구르며 끊임없이 달려갑니다. 어두울 때 실내의 얼굴들이 창에 환히 비치네요. 태연하게 잠든 이도 있지만, 뭘 해야 할지 두리번거리는 이들도 있어요. 어둠이 멈출 때까지 눈을 감고 상념에 젖기도 해요. 사람마다 서로 다르단 걸 알게 되지요.
열차에서 보는 창밖의 그림은 시간 따라서 달라져요. 눈 부신 햇살이 비치다가 어느새 석양빛이 스며들어요. 천천히 달리던 열차가 지금은 고속으로 달리고 있네요. 어렸을 때는 지루했는데, 이제 너무 빨리 달려서 바깥 풍경을 음미할 틈이 없어요. 천천히 흐르던 일상이 번개처럼 바뀌고 상상도 안 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요. 그렇다고 쉬거나 멈출 수도 없으니 앞만 보며 달려요.
창밖의 노을이 찬란한 빛을 발하네요.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했고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는데, 잘 견뎌온 자신이 대견해요. 이제 함께 탄 이들을 돌아보며 헤아릴 마음의 여유도 생겼는데. 어차피 종착지에 도착하면 달리던 열차에서 내려야 해요. 고속으로 달리는 제 열차가 하차 역까지 무리 없이 달려주길 바랄 뿐이에요.
첫댓글 열차 여행을 우리 삶의 여행에 비유한 것이 매우 좋습니다. 탁월한 비유인 것 같습니다.
소련 열차까지 타 본 행운이 있었으니, 얼마나 복된 삶의 여정인가요. 부럽기만 합니다.
가장 열성적으로 글을 쓰시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다만 열차 여행을 인생 여행에 비유하다가 실제 경험한 내용을 중간에 넣었는데,
이를 어떻게 접목하고 해석해야 하는지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