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한 단락
두 번째로 의미의 한 단락으로 한 행이나 한 연을 구성한 예가 현대시에서 뚜렸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의 내부에도
몇 마리의 새가 논다
은유(隱喩)의 새가 아니라
기왓골은
쫑
쫑
쫑
옮아 앉는
실재(實在)의 새가 놀고 있다
--박남수의 「새」중에서
여기에서 ‘쫑, 쫑, 쫑’을 세 행으로 끊어서 배치한 것은 새가 밭이랑처럼 생긴 기왓골을 날아 옮어앉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정신(내부) 속에 스민 사랑스럽고 자연스러운 것들의 의미가 비유로서 적절하다고 하겠습니다.
깊은 산에 들어가
산바람 몰래 길어다가
뒤꼍에 두어 독 묻어 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한 대접씩 퍼마셔야겠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엔 몸으로 때우는 거지.
--김명배의 「산바람」전문
여기에서는 깊은 철학적 의미를 교감하게 합니다. 무형(無形)의 ‘산바람’을 ‘길어다가’ ‘한 대접씩 퍼마’시는 시적 정황이 ‘마지막엔 몸으로 때’운다는 것으로 차원 높은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지의 한 단락으로 시행을 구분하는 작품은 박목월의 「靑노루」에서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릎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렇게 리듬의 속도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늦추어지면서 ‘도는 / 구름’이 자연습럽게 ‘청노루 / 맑은 눈에’와 동일한 시간적인 길이를 가지는 심리현상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리듬의 속도 변화는 이미지의 이동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청노루 /맑은 눈에’에서는 이미지의 규모가 행의 바뀜에 따라서 한 단계 더 축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지의 운동을 더욱 선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냥 ‘도는 구름’이 아니고 ‘도는’과 ‘구름’을 각각 분리해서 한 행으로 하여 이미지의 변화를 시도한 특이한 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墨畵)」에서도 간결한 표현이나 시적 구도는 ‘소’와 ‘할머니’가 무언(無言)으로 교감하면서 전달하는 이미지는 그 깊이가 상당한 사유(思惟)를 깃들이게 하고 있습니다. 결국 ‘서로 적막하다’는 이미지는 인간과 동물(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심리적인 심층의 일단을 나타내고 있어서 그 이미지의 폭은 무한한 공감을 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의 한 단락은 시 전체에 스며있는 이미지나 상징 또는 주제가 한 연, 한 연이 갖는 의미와 서로 연관되거나 부딪쳐서 긴장되고 화합하는 특징을 느끼게 합니다.
①바람은 밤새
창문 두드리며 잉잉거렸어
나무들도 속을 끓이다가
보송보송 꽃망울을 트뜨리고 있었어
②황사 아우성치며 몰려와
거품 게우듯 꽃보라 뿌려주었어
어지럼증도 떠돌았어
웬 꽃가루 이리도 어른거리고
③검은 나뭇가지엔 부스럼도 돋고 있었어
형광색 아가 손가락
뾰죽히 허공에 첫발 내딛는
4월의 끝
④연두빛 새눈들도
껍질 뚫고 나오는 저 아픔들
나도 함께 꿈틀거리고 있었어
--윤서희의 「4월의 끝」전문
이 작품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있는 것들의 탄생이나 존재에 대한 아픔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체가 네 연으로 구성했는데 한 연, 한 연이 완결된 것이 아니고 전체의 흐름으로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①과 ②는 긴장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서로 부딪치는 느낌이고 ③은 ‘4월의 끝’을 강조하면서 서로 화합(또는 화해)하려는 의지로, ④는 ‘나도 함께 꿈틀거’림으로써 자신의 몰입을 통해서 시적 공감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강조의 한 단락으로서 행과 연이 갖는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요즘 시들은 연을 가르지 않는 것을 많이 대할 수 있는데 연을 구분하지 않더라도 앞에서 본 리듬이나 이미지 그리고 의미 등이 고르게 배합되어 시의 생명인 주제를 선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기법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은빛 한 웅큼 내리는 소리
너의 옷자락에 계절이 묻어오면
어둠 속에서 홀로 낯을 붉힌다
목마른 당 온몸으로 적셔
고즈넉이 가라앉고
겨우내 쌓인 기다림으로
돌담 사이 버들강아지
수줍은 듯 솜털 내미는데
논둑밑 냉이처럼
나는 파란 눈을 뜬다
--김현기의 「봄비」전문
불면증이었다. 빈 가슴 가득 채워질 꿈이 보이다가 무시로 창문을 넘나드는 하얀 별빛이 밤하늘을 깨운다. 그가 허공에 던져져 처음 빛을 뿜어내는 별이었다면 어쩔 수 없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갈대의 노래를 넓은 초원에서 들었으리라. 그가 내 뻗은 따수운 손길에서 분홍빛 순수가 출렁이는데 어느날 사랑이 느껴졌다 나는. 치유될 수 없는 불면의 그리움이 어둠 속 소복히 쌓이는 밤 그대여, 이밤사 내 영혼 은빛 날개를 펴고 훠이훠이 그대 곁에 영원히 머물지니 무지개 빛 시가 휘황하고 사랑의 선율이 은은할 때 그대는 거기 영롱한 눈빛 속에 어린 미소로 충만된 아아, 이것이 비로소 사랑이었다. 사랑의 속성은 불면증이었다.
--졸시 「사랑법 . 14-Z에게」전문
김현기의「봄비」는 전편을 행과 연을 구분하지 않고 구성하였으며 졸시「사랑법 . 14-Z에게」는 산문시의 형태로 아예 행이나 연의 표시가 없다는 점이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