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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공회 앞에서 증거함
1-22절, 공회 앞에서 증거함
[1-4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성전 경비대장]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제사장들은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싫어하였다. 중생치 못한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할 것이다. 심지어 교회의 직분자라 할지라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만 깨달을 수 있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롬 10:17) 듣고 믿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엡 2:8). 남자들의 수가 약 5천명이 되었다. 이 말은 솔로몬 행각에서의 전도로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수가 약 5천명으로 늘어났다는 뜻일 것이다(칼빈, 매튜 풀).
[5-7절]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관원’이라는 원어(알콘타스)는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말로 아마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등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산헤드린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공회의 회원으로서 사두개파에 속하였다. 당시에 시무하는 대제사장은 유대인 공회의 의장이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었으나 바리새파에 속하였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로 성경의 사본을 보존하고 필사(筆寫)하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그들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즉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지 자신들의 이름으로 하는지 물었다.
[8-10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담대하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비상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담대함과 능력을 주신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에게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되어 그들의 앞에 섰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죄가 없으셨음을 증거했고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다(롬 1:4). 또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자주 표현하였다(2:22; 3:6; 10:38). 그것은 사람으로 오신 역사적 예수를 가리킨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독특한 인격 곧 하나님과 사람이시다. 그는 살아계셔서 지금도 신성(神性)의 영으로 일하시는 주님이시다. 그의 이름이 능력이 있고 그 이름이 그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이다.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시편 118:22의 말씀을 들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 말씀은 메시아 예언이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너희 건축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켰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고 마침내 로마 총독 빌라도를 통해 그를 죽게 했으나, 그 버린 돌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 집의 좌우의 벽을 연결하는 기초석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석이시다. 사람들은 그를 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셨고 중요하게 사용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다.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였다. 주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였다(딤전 2: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를 세상에 보내주시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한 구주이시다. 우리는 이 유일한 구주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를 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타종교와의 대화분과장이었던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타종교인들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고 동료 순례자들이라고 말하였다.6) 감신대학 학장이었던 변선환 교수도 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7) 우리는 이런 이단 사상을 경계해야 한다.
[13-14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파르레시아)[담대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보통 사람]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도들의 담대한 발언은 분명히 성령께서 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약속하셨었다(마 10:19-20). 모세가 하나님께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하며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고 말씀하셨었다(출 4:11-12).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구변(口辯)을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말했었다(요 7:15).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고 은혜스럽게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이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담대하고 은혜스럽게 증거하게 역사하신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반대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했고 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앉은뱅이가 그들과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리는 항상 당당하다. 진리에 대한 정당한 반대는 없다. 진리의 사람들에 대한 반대들은 항상 있어왔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대해서도 그러했으나, 모든 거짓된 반대들은 다 파하여지고 진리는 견고히 세워질 것이다.
[15-16절]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그노스토스)[확실한, 다툴 여지가 없는]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그 앉은뱅이가 나은 것은 공회원들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어두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진리는 은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이루어진 사실들에 기초하고 있다(행 2:22). 그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항상 진리를 부정하고 왜곡시키려 하였다.
[17-18절]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공회원들은 예수님에 대해 믿을 만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고 대적하며 그것이 전파되는 것을 싫어하고 방해하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다(롬 3:11).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다.
[19-20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말씀을 순종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과 그의 명령들을 말하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말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
[21-22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40여세나 되었더라.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원수들의 입을 막으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싫어하고 그들을 잡아 가두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셨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조건과 별개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
둘째로,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였고 또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앉은뱅이를 낫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가 없다고 증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인류의 구속(救贖)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자는 없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유일한 구원의 종교이다. 오늘날 교회들 속에 들어와 있는 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는 이단이며 그것을 포용하는 것은 배교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전해야 한다.
셋째로, 사도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증거하는가? 우리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증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람들의 위협 속에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하고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23-37절, 고난에 대한 사도들의 대처
[23-24절]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주께서는]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하나님이시니이다](전통본문).8)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잡혀 공회 앞에서 심문을 당했고 위협을 받고 놓여났다. 그들은 동료 사도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사도들은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다. 그들은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들은 창조자 하나님께 기도했다. 창조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의 기본이다. 그것은 창세기 1:1을 아는 것이요 믿는 것이다. 창조자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이 무신론이며 인본주의(휴머니즘)이다. 이 세상의 창조자께서는 또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자 곧 ‘대주재’이시다.
그들은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께 기도하되 일심으로 기도하였다. 신자들의 마음을 합한 기도는 힘이 있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19). 또 제자들은 소리를 높여 기도하였다. 묵상기도도 참된 기도이지만, 그것은 사람이 약하여 명상이나 망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기도는 또박또박한 말로 하는 기도가 좋고 특히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는 속한 응답을 가져올 것이다. 주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아버지께 기도하셨다(히 5:7).
[25-28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사도들은 헤롯과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메시아를 대적한 것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시편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도들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했다. 또 그들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신앙과 대항도 그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셨음을 증거하였다.
[29-31절]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내려보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주의](전통본문)9)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들은 하나님께 담대함을 구하였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위협을 당했다. 위협은 사람에게 두려움과 위축과 의기소침과 낙심, 포기, 좌절을 가져올 수 있다. 그것은 변절의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다. 위협에 대해 의연히 대처함, 담대함, 용기, 인내, 충성이 필요하다.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했다.
주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6:33). 또 그는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10).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했고(고전 15:58), 또 그는 디모데에게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교훈했다(딤후 4:5). 우리도 담대함을 간구해야 한다.
또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간구하였다. 사도 시대에는 병 고침과 기적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었다.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며 신약교회가 아직 튼튼하게 건립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통해 복음 진리를 확증하셨으나, 하나님의 기사들과 능력들은 교회 역사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것들 없이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기독교는 기적을 전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고(고전 1:22-23) 교회의 확장은 기적들을 통해서가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모인 곳은 진동했고 모든 사도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성령께서는 능력의 영이시며 능력을 주시는 영이시다. 사람은 대적자들의 위협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기 쉽지만, 성령의 충만함으로 담력을 얻는다. 오늘날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얻음으로 담대히 전도할 수 있다. 전도의 담력은 성령의 충만함에서 나온다.
[32-37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공동으로 사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는 고난을 당했으나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함과 담대함을 얻었고, 또 구제와 선행으로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함께 사용하였고, 또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팔아 헌금했고 그 헌금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으로써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없었다. 사도행전 2:44-45도,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의 그런 삶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 사랑함에서 나왔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실천한 것이고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졌고 한 순종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물론, 기독교는 개인의 재산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신 15:11). 왕정 시대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다. 또 부지런한 자는 부해지고 게으른 자는 가난해진다(잠 10:4). 그러나 비록 성경이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지만, 우리의 모든 재산은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돈에 종이 되지 말아야 하고 돈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편에서 다윗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증거했다(시 24:1). 또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라고 기도하였다(대상 29:11, 14-16).
우리가 우리의 모든 재산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즐거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이 자기의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사용할 수 있었고 물질적 여유가 있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물질을 내놓을 수 있었던 정신이었다. 내 것이라고 자랑하며 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그의 뜻과 그의 영광을 위해 내놓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게으름은 악한 것이다. 사람마다 건강 상태가 다르고 타고난 재능도 다르겠으나, 누구든지 손으로 하는 일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면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쳤다(살후 3:10).
구제와 선행은 참된 믿음과 순종의 표이다. 고린도후서 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고린도후서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확실히 그런 표를 가졌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제자들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합심하여 창조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기도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대처하는 최선의 방책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가 곧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류 역사를 주장하신다. 무신론자나 인본주의자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기도한다. 또 우리는 기도하되 일심으로 또 때때로 소리 높여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잘 응답하신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제자들은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담대함을 기도하였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직면한다. 그러나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함과 용기, 인내와 충성이다. 우리에게 그런 담대함과 용기, 인내와 충성이 없다면, 우리는 두려워하고 위축되고 의기소침하게 되고 낙망하고 자포자기하고 좌절할 것이다. 또 믿음의 변절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힘과 능력과 담대함을 주신다. 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위로와 담대함을 주시기 위해 계신다. 그는 우리의 위로와 힘과 담대함의 원천이시다. 우리의 심령이 평안과 힘을 잃어버릴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붙드시고 평안과 힘을 공급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담대함을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구제와 선행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함께 사용하였고 재산이 있는 자들은 그것을 팔아 가난한 교우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구제와 선행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표이다. 헌금의 한 주요한 용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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