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권변동 요약
풍산홍씨 21세 홍우록은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하의도 소유권행사가 순조롭지 못했던데다 후손간의 분쟁도 있어 홍우록은 지권을 집안의 홍우승에게 양도해 버렸고, 홍우승은 다시 하의3도 땅 전체를 은밀하게 서울갑부 한일은행장 조병택과 한일은행 전무 백인기에게 1만5천원에 팔아넘겼다.
이들은 다시 목포의 유달산을 세 번 팔아먹었다는 목포의 유명인사인 간척사업가 정병조에게 5만7천원에 팔았고, 정병조는 일본인 오사카 재벌 우콘곤자에몬에게 11만5천원에 팔아넘겼다.
지주 우콘곤자에몬은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조선인들의 독립의지에 위협을 느껴 일본 국회의원 가미나미에게 17만원에 매도한다.
가미나미는 1919년 9월 오사카의 무역업자 일본재벌 도쿠다야시치에게 하의3도 땅 약 400만평을 다시 20만원에 팔아 넘겼다.
1945년 9월 11일 미군정청이 발족되고 미군정은 신한공사를 세워 일본인들의 토지를 모두 신한공사에 부속시켰다.
이에 따라 도쿠다 야시치 소유의 하의3도 농지도 신한공사로 넘어갔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49년 7월 하의3도 면민대회가 열렸고 전라남도는 하의3도민들의 무상 환원 진정을 받아들였다.
1949년 8월 1일 국회의원과 농림부 직원들이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국회에서는 1950년 2월 하의3도 농지에 대한 소유권 무상 환원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그러나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하의3도민에 대한 농지 무상 환원조치가 중단되었다.
전쟁후 하의3도민들은 재차 국회에 탄원하였지만 정부는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을 내세워 무상 환원이 아닌 유상 환원으로 분배하였다.
1993년 신안군의회의 조사에 의하면 도쿠다야시치의 분배 농지 가운데 여전히 등기이전이 되지 않은 농지가 약 5800여 필지로서 전체 9167필지의 62%에 해당한다.
이후 등기를 정리하였지만 1994년 3월까지도 미등기 농지는 600필지로 조사되었다.
그 후 대부분의 미등기 농지도 등기가 완료되어 1994년 하의3도 토지의 소유권이 완전하게 주민에게 돌아갔다.
▣조병택(趙秉澤, 1831년~1924년)
조병택은 양주 농민으로 시작하여 22살에 상경하여 외숙부인 최상기의 소개로 당시 세도가인 민영익의 호종으로 일하게 된다.
돈만이 세상을 사내답게 인간답게 살수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갖었던 조병택은 기회를 잡기 위해 책읽기에 매달렸다.
호종으로서의 능력 뿐 아니라 이후에는 행수(집사)로서도 수완을 발휘하여 민영익의 눈에 든 조병택은 민영익으로부터 삼만원의 장사 밑천을 빌려 독립을 하게 된다.
삼만원은 그 당시 덕수궁 중건을 했을 때 들었던 돈이고, 민영익이 행수 하나를 독립시킬때 꾸어준 돈 3천원의 열배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리고 민영익의 오른팔격인 사람들도 함께 데리고 독립한다. 여기서 조병택의 배포뿐만아니라 민영익의 사람보는 눈 또한 알수 있다.
상인으로서 독립하여 성공한 이후에도 민영익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져, 갑신정변 당시에는 개화파의 칼에 맞아 큰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구해내기까지 한다.
조병택이 상인으로서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다름 아닌 소가죽 장사였는데, 청일전쟁을 앞두고 전국의 소가죽을 모두 사놓았다가 일본군부에 되팔아 30배의 장사를 한 것이다.
또한 러일전쟁을 앞두고는, 이번에는 닭과 달걀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되팔아 큰 이윤을 남기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른 승리를 거둔 일제는, 1905년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한 야욕을 드러낸다.
그 중 제일 먼저 기존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는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대한제국의 경제와 금융지배를 꾀하게 된다.
이에 조병택은 경성 내 조선상인들의 총파업을 이끌지만 일제와 친일파들의 조직적인 탄압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 하고, 상인회와 금융회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조선무역회사를 세운 후 그의 지혜로 인해 고종을 배알하게 되고 한일은행을 세우게 된다. 그가 맡은 직책은 경성상업회의소 두취, 한일은행두취, 조선무역회사 두취 그리고 중추원 참의까지 지내게 된다.
고종의 후궁인 엄비에게 궁중토 2,000평을 헌납한 인연으로 고종의 총애를 얻은 조병택은 1905년 말 조선 최초로 민간자본금을 출자한 한일은행을 설립하고, 초대 은행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고종황제는 조병택을 중추원 의관의 벼슬을 내려 이를 치하한다. 이후 한일은행의 조선상인들을 지키기 위한 행보가 일제의 눈 밖에 나게 되고, 총독부와 친일파 그룹인 일진회 상인들의 조직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사업에서 뿐만 아니라, 부인인 선우영이 학교에서 조선 역사와 글을 가르치고, 만세운동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형무소에 갇히게 되고, 조병택 자신도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부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일제와 친일파들의 조직적인 공격에 시달리고, 결국 1924년 가을 조병택은 위장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백인기(白寅基)(1882년~1942년). 일제강점기 친일기업가.
본관은 수원이며, 자는 남신이고, 별명은 백연기이고,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관촌면(館村面)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주진위대대대장(全州鎭衛隊大隊長)을 역임한 육군부령(陸軍副領) 백낙신(白樂信: 1860∼1920)이다.
처부는 전주(全州) 이재한(李在漢)으로, 부인 이윤성(李潤成: 1884∼1956)은 그의 3녀로, 숙명학교(淑明學校)의 1기생으로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다.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혜민원주임관(惠民院奏任官)‧육군보병참위(陸軍步兵參尉)를 거쳐 외부참서관(外部參書官)을 역임하고, 정3품 통정대부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의 감사, 일한와사주식회사(日韓瓦斯株式會社)의 취체역(取締役)과 경성전기(京城電氣)의 감사 등을 지냈다.
이 외에도 한일은행의 전무취체역, 조선식산은행의 상담역,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감사와 전북기업주식회사의 사장 등을 지냈다.
1921년 6월에는 조선 산업 개발을 명목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일본과 조선을 융합시키기 위하여 조직된 '산업조사위원회'의 전라북도 위원이 되었다.
1921년 11월에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친목이라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내선융합의 목적을 위하여 조직된 친일사교단체 조선구락부(朝鮮俱樂部)의 발기인이 되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조선축구단(朝鮮蹴球團)을 창설한 후, 1925년 일본과 상해(上海)로 원정경기를 가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사회체육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926년에는 이 해 11월 15일 창간되어 1931년 6월 29일 제1492호를 끝으로 폐간된 『중외일보(中外日報)』에 전액 출자를 하는 등 언론에도 지원을 하였다.
또 1927년에는 경기도 도회의원을 지냈고,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을 5만 석(石)이 넘게 불리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는 또 돈을 보람 있게 쓰겠다며 자신의 땅 15만 평에 소작인 1, 200여 명을 불러들여 소작을 시켰다.
그러면서 조선의 갑부 민영휘,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고종황제에 못지않은 사치스런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농부들을 먹고 살게 해준다는 명분과 달리 그는 일제에 빌붙어 살았으며, 노동 착취와 탄압 수법은 갈수록 간교해졌다.
마침내 1927년 4월 말 그의 농지를 소작하던 소작농 대표 70명은 소작료 인하와 분납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그는 일본 경찰을 불러들여 그들을 모두 연행해 가도록 하고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게 만드는 등 간악한 짓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나머지 소작인들도 일본에 항거하며 그의 집을 습격하는 등 전보다 더 격렬한 투쟁에 들어갔다.
투쟁한 지 10일 만에 모두 체포되었으며, 나머지 소작농들 역시 대부분은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자녀로는 한국 최초로 무성영화(無聲映畵)를 들여온 아들 백명곤(白命坤)이 있다. 손자로는 의료인(醫療人) 백윤승(白鈗勝)이 있다.
2006년에는 대통령 직속으로 일제강점 초기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이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었다.
그는 죽을 때 남은 재산으로 학교를 설립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유지에 따라 부인 이윤성 및 손자 백윤승(白鈗勝) 소유의 토지 148,000평의 땅을 기본재산으로 재단법인 화성학원(華星學園)을 설립하였고, 이리 남성중(南星中)‧고등학교(高等學校)가 신입생 129명을 선발하여 창인동의 옛 호남국토건설국 건물을 빌려 개교하였다.
초대교장에는 윤제술(尹濟述)이 취임하였으며, 교명 남성(南星)은 남쪽 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별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뜻하고 있다.
1947년 12월 남중동의 신축교사로 이전하였으며, 1951년 7월에 6년제 제1회졸업생을 배출하고,
1951년 8월 신 「교육법」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1956년 1월에는 여자부를 병설하였다가 1958년에 이리남성여자고등학교와 이리남성여자중학교로 분리되었다.
1980년 2월에 현재의 교사로 이전하였으며, 1990년 1월 학교법인 남성학원으로 개명 하였다.
1993년 5월 기숙사 일성당을 준공하였고, 1998년 10월 과학관을 준공하였다.
2003년 6월 도서관을 준공하였고, 2003년 12월 복지관을 준공하였다.
2006년4월 남성역사관 및 남성예술관을 개관하였다.
▣정병조(鄭柄朝, 1879년~1970년), 경남 동래군(마산)출생후 목포 거주한 일제시대 간척사업가
⊙ 간척 사업과 정병조(정병조 원뚝)
정병조는 구 한말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인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그의 총명함이 세상에 드러나자 일인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얻어 삽섬에서 뒷개까지의 간척사업을 성취시켰다. 그때 만든 원뚝을 정병조 원뚝 이라고 했는데 이는 비록 배움이 적은 그가 바다를 육지로 만든 자신의 이름 석자를 후대에 널리 알리고 싶어서 스스로 명명해 불었는지 혹은 후대 사람들이 그의 기인다운 기상에 탄복해서 그리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그 당시 화제의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사실로 몇 가지 전해온 이야기를 살펴볼 때에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다. 당시 등기법이 생겨나고 처음 법원이 생겨난 법원직 주사직에 있으면서 무안군 간척사업 허가를 주관하는 직책에 있었던 구 주사가 정병조의 간척사업에 사심 없이 협조해 준 보답으로 준 1만평의 땅이 영덕이 배추밭으로 김영덕과 구주사 사이에 다시 거래된 땅이다. 이 거래된 내용은 당시 친목계인 형제계를 하였는데 당시 계원은 이무영, 정병조, 김영덕,구주사,송간수 외 4명으로 모두 9명이 형제계를 하였다한다. 구주사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되어 가니 정병조가 구주사에게 그 동안 고마운 정으로 그땅을 주었다. 구 주사는 "내가 목포를 떠나는 마당에 땅을 가져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아무라도 필요한사람이 가지라" 고 하며 김영덕에게 주고 떠났다. 이 구주사는 정병조가 유달산을 일본인에게 3번이나 팔고 많은 땅을 갖게 해준 후견자겸 법률 처리자로 정병조의 뒤를 보아준 사람이다.그래서 수많은 일본인들과 재판을 하여도 전부 정병조가 승소를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정병조는 일본인들하고만 재판을 하였다 한다.
⊙ 형무소 석산과 정병조(지금의 일신아파트 자리)
정병조는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형무소 석산의 소유권을 주장하여 법적 소송을 벌였는데 일인검사 쓰쓰미에게 구속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자 물적 증거로써 석산 주변에 자기 이름 정병조란 명찰을 무수히 발굴하게 하여 쓰쓰미 검사를 욕보이고 승소하여 타협조건으로 오히려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정병조의 석조 건물과 그 저택에 자동차의 진입로를 신설해주는 조건으로 조선총독부를 궁지에 몰아넣은 기인이기도 하다.
⊙ 유달산과 정병조
유달산을 일인들에게 세 차례나 판 사람이 바로 정병조인데 이 또한 정병조라는 이름을 돌에 새겨 유달산 주변에서 파내게 하여 증거를 삼음으로 일인들을 세 번씩이나 우롱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위 사람들이 유달산을 세번이나 팔아먹은 사람이라 비난하자. "나 정병조는 내 민족을 단 한 사람도 괴롭힌 적이 없다. 유달산을 세 번이나 일본인에게 팔아먹었어도 유달산을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말이냐? 저기저 유달산은 옛모습 그대로 오늘도 우뚝 솟아 있지를 않느냐?" 하여 도리어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무색케 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그의 기인다운 면목이 민족심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씨 개명 이전 목포시에 초도 순시차 온 신임 재등 조선총독 접견시에 우편엽서 크기만한 은판에 금으로 정병조라 새긴 명함을 줌으로써 재등총독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방 후 상경하여 이 나라를 부강케 하기 위해서는 외자를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 이승만 박사와 그외 정치인들을 만나 자기를 재무부 장관에 수임해 주도록 수차 교섭했으나 허사가 되자 국민대학에 간척지를 기탁하여 목포에 국민대학 분교를 유치, 학교부속 건물을 세우기도 하였다.
⊙ 정병조 (일화소개)
정병조는 본래 일자무식이었지만 머리는 참 좋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북 마산 사람인데 조실부모하고 16살에 목포로 왔다. 그래서 일정시대에 남교동에 있는 이등이토지합병회사'라는 곳의 애기담살이(아기보는일)로 가게되었다. 애기담살이로 있었지만 정병조는 어깨너머로 주어들은 것을 가지고서 애기를 업고 북교동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서 부자집의 애기담살이, 식모들을 알사탕 사줘가며 사귀게 되었다. 체격도 우람하고 얼굴도 잘 생긴 청년이 말을 거니 마다할 여자가 있었게는가. 그리고 그 여자들한테 돌멩이 하나를 주며 정제(부엌)구석에 묻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여자들은 못해줄 거 뭐있나 싶어 그냥 묻어 주게 되었고 자기는 종이에다 표시를 해놓고 있다가 10, 20년이 흘러서 나이 20, 30여세가 되었을 무렵 등기법이 새로 설정되어 토지세부측량법이 발효되어 측량을 하기 시작했고 북교동 일대 부자집 사람들이 땅세 고지서를 받고 보니 기가 막힐 일이 일어난 것이다. 지난 몇 십년 동안의 세를 갚지 못한 사람은 집을 뺏기다 시피하여 물러났고 돈 많은 집은 사정해서 이전해 가고 그렇게 해서 차근차근 자기 땅을 만들고, 돈을 벌었다. 그런 방법으로 유달산을 일본 사람에게 팔아먹은 것이고 그래서 생긴 일화가 일본에 천일방이란 유명한 사기꾼이 있었는데 정병조를 그 다음가는 사기꾼이라 하여 제2의 천일방이라고 했다. 그리고 북교초등학교 옆, 또 그 너머까지 강물이 들어 왔었을때 북교동 사람들이 손도 못대고 있는데 정병조는 돈을 많이 벌어놓은 까닭에 자기 집 앞에서부터 죽교 2동까지 둑을 막았다. 그러니까 그안이 전부 정병조 땅이 되어 버렸고 또 연동 왕자회사가 있는 데가 원둑인데 남해개발 삼학초등학교,연동초등학교 주변이 전부 바다였는데 거길 막아서 지금 목포고등학교, 유달중학교 있는 땅이 되었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정병조가 하는 토지합자회사에 땅세를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태풍에 둑이 터져서 연동에 있는 집들이 모두 물에 잠겨 버렸고 밤새도록 싸웠지만 정병조는 그걸 어떻게 막을 재간이 없어서 결국 땅을 반으로 나누어 목포시에 주기로 하고 시에서 둑을 막았다. 시에서도 자금이 없어 당시 천주교 현신부에게 부탁해서 자금과 구호양곡을 받아서 그 일을 해냈다. 정병조는 여기서 받은 땅세로 충청도에 큰 부지를 마련해 놨었는데 지금은 없을 것이다. 정병조에게는 정병소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마 8.15해방후 3년째되는 해에 국회의원에 출마했었을 때 유달 초등학교에서 강연을 하는데 대한부인회에서 유달산을 세 번 팔아 먹고, 이제는 대한민국 땅 다 팔아 먹을려고 아들을 국회의원 출마시켰냐고 반발하자. "유달산은 저기 번듯하게 서 있는데 웬 말이냐"며 당당히 말했다.
아들 정병소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 정병조 (해방후 사회환원)
1948년 4월 목포의 교육사업을 위해 5만여평의 땅을 목포서부초등학교, 동광중고등학교(목포홍일중고등학교로 개명), 목포제일중학교, 목포상고, 유달산중학교의 학교부지로 기증했고, 철도부지를 비롯한 15만평의 땅을 목포시에 기증했으며, 25만평의 땅을 국민대학교에 기증하는등 32억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15만평에 달하는 부지에는 영세민 3천여 세대가 살고 있으나 지세마저 받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어 그 옛날 정병조에 대한 일시적인 오해는 고마움으로 해소되었다.
▣매매대금의 사회환원 요약
1. 홍우승의 매매대금 1만5천원 : 한일은행 증자자금.
2. 조병택과 백인기의 매매차액 4만2천원 :
조병택의 매매차액 - 한일은행 증자자금, 대성중학교 기부금, 만주거주 조선인 피해구제금, 선행기부금, 경성상업회의소운영
백인기의 매매차액 - 한일은행 증자자금, 상속토지 148,000평으로 (이리남성중고등학교, 이리남성여자중고등학교) 설립
3. 정병조의 매매차액 5만8천원 :
- 목포시 소재 학교부지로 5만여평, 국민대학교 부지로 25만평, 철도부지등 공공용지로 15만평 기부
- 영세민 3천여세대의 택지로 15만평 제공
4. 유상분배 토지대금- 400만평 매매대금(평당 200원) 약8억원.
매각자금의 대부분이 개인적인 치부나 일제수탈자금으로 사용되지 않고, 사회사업이나 교육사업 독립운동자금등으로 사용되었고, 유상분배대금 8억원은 정부예산에 편입되었다.
첫댓글 돈이란 위와 같이 사용 되어야 한다.
종재도 마찬가지다. 종중재산은 종원간 나누지 못하도록 종헌으로 정하고 선조의 제례비와 선양사업에 사용하고 장학사업으로 후예를 길러내고
경제적 지위가 야한 종원을 도와 쇠외되는 계층을 없애야 한다.
토지 보상으로 재산을 나누어 가진 문중이 존재하는 사례를 보지 못 하였다.
우리는 상기의 글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