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 영화
1. 1990년대는 한국 영화의 시련과 위기 그리고 저력을 확인한 시기였다. 1987년 민주화 투쟁으로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완화되었지만 영화계에는 새로운 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미 무역협상에서 미국 영화의 직배가 결정되었고 한국 영화시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무기력과 순응에 길들여 있던 영화인들 이었지만 변화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단합된 힘과 투지를 보여주었다. 1988년 미국 최초의 직배 영화 <위험한 정사>가 상영되었을 때 극장 앞에 집결했던 영화인들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2. 헐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외국 영화가 물밀 듯 들어오자 한국 영화의 경쟁력은 급속하게 떨어지게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무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새로운 영화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영화인들은 다양한 영화를 통하여 한국 영화의 경쟁력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영화계’는 매우 매력있는 영역이었다. 뛰어난 인재들이 영화계에 속속 진입하였고 1980년대 만들어진 <영화 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또한 영화 시장의 확대로 대기업의 영화 진출이 시작되었고 전통적인 영화 자본을 대치하는 새로운 자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3. 1990년대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말한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을 위한 헌법 재판소 제소와 판결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영화법 개정으로 영화사 설립이 자유로워지고 독립 영화 제작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주류 영화가 대변하지 못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독립 영화가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화법에는 공연위원회를 통한 사전 검열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민감한 문제를 다룬 독립 영화들은 사전 심의를 거부하며 정부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결국 끝없는 검열의 압박과 심의의 불안을 끝내겠다는 결의로 독립 영화인들은 헌법재판소에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열’에 대한 위헌 심판을 신청하였고 헌법재판소는 위헌으로 판결하였다. 실질적인 영화 검열 폐지는 2000년대 들어서 시작되었지만 ‘표현의 자유’을 위한 영화인들과 예술인들의 투쟁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지형을 만든 특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4. 199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중요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감독은 임권택이 유일했다. 이제 과거 세대는 서서히 영화판에서 사라져갔다. 임권택 만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영화인이었다. 그가 만든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는 영화적 묘미와 대중적 인기를 끌어들였다. 임권택을 제외하고 90년대 초반 영화의 흐름을 이끈 감독은 소위 ‘뉴 웨이브 감독’이라고 불렸던 박광수, 장선우, 정지영이었다. 이들은 분명한 영화철학을 바탕으로 ‘작가적’ 영화를 생산하였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모순과 그동안 다루기 어려웠던 사회적 이슈를 영화적 작업을 통해 표현하였다. 다양하면서도 묵직한 신념으로 완성한 영화들은 우리 영화 표현의 한계를 넓혔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들의 의도와 철학처럼 영화적 아름다움과 현실적 문제가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에게 강렬하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은 탄생하지 못했다.
5. 영화계의 중심은 곧바로 젊은 신인 감독들의 몫이 되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기획사 및 제작사와 손잡은 신인 감독들은 로멘틱 코메디나 세련된 멜로 드라마 그리고 감각적인 소재를 통해 관객들의 호응을 받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 변화된 한국 사회의 소비적 풍토와 자본주의적 호황에 호응하는 소재의 다양성과 남녀 관계를 비롯한 새로운 인간상의 제시는 점차 한국 영화의 경쟁력을 강화시켰다. 특히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여성의 모습은 새로운 영화의 중심이었다. 많은 영화들 속에서 죽어가거나 아픔의 대상은 이제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6. 1990년대는 영화 환경 변화가 가져온 위기 속에서도 한국 영화의 경쟁력을 위해 영화인들이 분투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얻은 시기였다. 점차 영화는 한국의 중요한 산업적. 문화적 중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당시 사적에서 들은 “요즘 머리 좋은 애들은 모두 영화판으로 가고 있다”라는 말처럼 영화는 가능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작업장이었다. 예술적인 요소와 상업적인 매력이 통합된 영화의 세계는 도전과 창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화판은 절대적으로 상업적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장소였다. 표현의 자유는 확대되었지만, 심각한 영화적 소재는 흥행과는 거리가 영화는 관객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영화적 흥미와 세련미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의 영화는 이제 기획자 그리고 제작사의 입김이 지배하는 영화로 바뀌었다. 소수의 명장을 제외하고는 수많은 신인 감독들이 기획사와 손잡고 영화를 만들고 주목을 받았지만 곧바로 영화계에서 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했던 수많은 감독 중에서 지금까지 영화판에 살아남은 감독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영화는 권력 대신 자본이 지배하는 절대적인 상업적 세계로 변모한 것이다.
7. 개인적으로 1990년대의 영화에 대한 기억은 별로 많지 않다. 80년대 가졌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사라졌다. 대표적인 한국 영화 중에서 직접 관람한 것도 거의 없었다. 나의 30대는 다른 일로 바빴다. 그때 영화는 나에게 위로도, 의미도 주는 세계는 아니었다. 많은 것이 허용되었고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잠시 나와는 멀어졌다. 그때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보았던 영화가 곽지균 감독의 <젊은 날의 초상>과 <겨울 나그네>였다. 낭만적인 사랑과 젊은이의 쓸쓸한 방황을 그린 두 영화는 영화적 완성도와 관계없이 여전히 지금도 특별한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이제는 회복할 수 없는 젊은 날의 회한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름 나에게 인생영화를 만든 곽지균이 가난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허무와 쓸쓸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느 순간 탈출할 수 없는 늪에서 발버둥치다 삶의 의욕이 파괴되는 순간이 슬펐다. 영화판에 등장하여 한 두편의 영화만을 만들다 사라진 감독들의 삶이 문득 궁금해진다. 뜨겁던 열정은 결국 무한한 허무와 동일하다는 것을 체험했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첫댓글 사회의 변화와 함께 영화도 변화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