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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괄호 양력) | 혁명 중심지역/기타 지역들 및 주변 사건들 |
1892년 10월(11월) | 서인주․서병학 공주집회 |
11월(12월) | 삼례집회 |
1893년 2월(3월) | 복합상소, 척왜양운동/전국각지에서 농민봉기 빈발, 삼남지방 가뭄 |
3월(4월) | 삼남집회(보은 ․ 원평 ․ 밀양) |
11월(12월) 11월30일(1/6) | 고부군수 조병갑에세 등소, 사발통문작성/조병갑 익산군수로 발령 |
1894년 1월(2월) | 고부군민 전주감영에 등소 |
1월 9일(2/14) | /조병갑 고부에 재부임 |
1월10일(2/15) | 고부에서 봉기-고부성 진격 |
1월12일(2/17) | 말목장터로 진을 옮김 |
1월25일(3/2) | 백산으로 진을 옮김 |
3월 3일(4/8) | 고부 농민군 기본세력 해산/최맹순 예천 ․ 송양에 설접 포교 |
3월20일(4/25) | 무장에서 1차 기병, 창의문 선포 |
3월23일(4/28) | 고부성 재점령 |
3월25일(4/30) | 백산으로 본진을 옮김, 호남창의대장소 설치, 전봉준 대장으로 추대, 농민군 4대 행동강령 선포 |
3월29일(5/4) | 태인을 점령 |
4월(5월) | /김산군수 동학혐의자 대구감영 이송 |
4월2일(5/6) | /홍계훈 양호초토사 임명 |
4월3일(5/7) | 전라감영군 백산으로 출동(이경호 지휘) |
4월7일(5/11) | 황토재에서 감영군 격파, 정읍관아점령, 홍계훈 전주성 입성 |
4월8일(5/12) | 농민군 흥덕, 고창 점령/김학진 신임 전라감사에 제수 |
4월9일(5/13) | 무장 점령 |
4월12일(5/16) | 무장 출발, 영광 점령 |
4월16일(5/20) | 영광 출발, 함평 점령 |
4월18일(5/22) | 전봉준 나주 공형에게 통문을 보냄, 홍계훈 전주성을 출발하여 21일에 영광 도착 |
4월19일(5/23) | 전봉준 함평에서 초토사에 원정서 보냄 |
4월21일(5/25) | 전봉준 농민군을 나주와 장성으로 진격 |
4월23일(5/27) | 농민군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 격파 |
4월25일(5/29) | 농민군 정읍, 태인, 원평 점령 |
4월26일(5/30) | 농민군 전주 삼천에 주둔 |
4월27일(5/31) | 농민군 전주성 점령/이원화를 양호순변사로 엄세영을 삼남염찰사로 |
5월 5일(6/8) | /청의 섭사성 부대 아산만 상륙 |
5월 6일(6/9) | /오오도리 공사 인천항 상륙 |
5월 7일(6/10) | 전주화약 체결 |
5월 9일(6/12) | 농민군 집강소통치 실시/혼성여단장 오오시마 인천항 상륙 |
5월 6월(7월) | |
6월21일(7/23) | /일본군 경복궁 침범, 민씨정권의 몰락 |
6월23일(7/25) | /풍토해전 |
6월25일(7/27) | 김개남 남원 입성/친일개화 정권 수립(김홍집을 수반). 국군기무처 설치 |
7월 1일(8/1) | /청일전쟁 선포포고 |
7월 2일(8/2) | 전봉준 남원에 들어감 |
7월15일(8/15) | 남원대회 개최 |
7월26일(8/26) | 김학진을 우군으로 포섭, 집강소 통치가 감사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인정 / 예천 향리‘보수집강소’설치, 안동,의성 유림․민보군 조직 |
8월(9월) | /김산에 집강소 설치 : 도집강 편보언 강릉부 연곡 신리면에 오덕보가 접소 설치 |
8월10일(9/9) | 전봉준 일본 낭인을 전주 감영 안에서 만남/예천집강소 농민군 11명 한천 모래밭에 매장 |
8월13일(9/12) | 전봉준 나주로 내려감 (나주 집강소설치문제로) |
8월15일(9/14) | /남영병 200명 상주․용궁․예천 파견 |
8월21일(9/20) | /영남북서부 13접주 회합 예천에 경고, 산양 취회 농민군 태봉병참부 죽내 대위 처형 |
8월28일(9/27) | /예천읍내 공방전-농민군 패배 |
8월29일(9/28) | /일본군 충주주둔 공병대 석문리 기습 |
9월(10월) | /성주 농민군 읍내 점거 민가방화 |
9월 초순 4일(10/2) | 전봉준 원평에서 2차 기병문제 숙고, 전주에서 직속부대의 준비완료, 삼례 진출 /영월․평창․정선의 농민군 수천명이 강릉부 관아 점령 이회원 등 민보군이 강릉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을 야밤 기습, 20여명의 농민군 희생 |
9월10일(10/8) | /이두황을 죽산부사로, 성하영을 안성군수로 |
9월12일(10/10) | 본격적 2차 기병 결정, 삼례집결통문을 날림 |
9월13일(10/11) | 북접 교주 최시형 봉기 쪽으로 선회/남영병 120명 선산․김산 파견 |
9월18일(10/16) | /전라도 농민군이 금강을 건너 임청 굴앙포에 진을 침 |
9월20일(10/18) | /이두황 서울 출발 |
9월21일(10/19) |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양호순무영 설치 |
9월22일(10/20) | /상주․선산 농민군 읍내 관아 점령 |
9월 하순 | 동학 북접교단과 갈등 해소 |
9월28일(10/26) | /신임 조선주재 일본공사 이노우에 서울 부임, 낙동․해평 일본군 상주․선산 읍성 기습 |
9월29일(10/27) | /정부 사주 소모사에 전승지 정의묵 임명 |
10월(11월) | 농민군 여산과 은진을 거쳐 강경포 진출/황해도 농민군 해주감영 점령 |
10월 초순 | |
10월11일(11/8) | /이규태 서울 출발 남하 |
10월13일(11/10) | /차기석의 농민군이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있는 동창을 습격, 창고를 불태움 |
10월15일(11/12) | /일본군 용산 출발 남하 |
10월16일(11/13) | 전봉준 논산에서 충청도 감사에게 격문을 띄워 항일전선 구축 촉구 |
10월21일(11/18) | /이두황 복천 세성산에서 농민군 격파지평감역 맹영재가 이끄는 포군과 농민군이 홍천 장야평(장평)에서 접전 |
10월22일(11/19) | /농민군과 관군․포군이 홍천 서석자작고개에서 치열한 접전, 농민군 1,000여 명 희생, 남영병 100명 창년․의령․고령 파견 |
10월23일(11/20) | 이인에서 접전 |
10월24,25일 | 효포와 곰티에서 접전 |
10월26일(11/23) | 전봉준 경천으로 철수, 논산으로 본진을 옮겨 전열 재정비 |
10월29일(11/26) | /남영병 100명 김천일대 파견 |
11월(12월) | |
11월 초순 | 전봉준 본대를 노성과 경천으로 진격 |
11월 5일(12/1) | /평창군 후평에서 농민군 1만여 명이 일본군․관과 접전 |
11월 7일(12/3) | /해미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이 가야산 일락치 쪽으로 기습해온 이두황의 군관에게 패배 |
11월 8일(12/4) | 공주로 진격/매현에서 농민군이 관군에 또다시 패배 |
11월 9일(12/5) | 광주대회전(우금치, 효포, 곰티, 고나루, 금학동) |
11월10일(12/6) | 김개남 진잠 진격 |
11월11일(12/7) | 곰티에서 관군의 기습 공격당함, 노성으로 철수, 김개남 회덕 함락 |
11월12일(12/8) | 전봉준「고시 경군여영병이교시민」을 띄워 항일전선을 재차 촉구 /홍천군 내면(당시 강릉부) 원당에서 차기석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 생포 또는 포살 한산․임천의 농민군과 전라도에서 건너온 농민군이 연합하여 한산점령 |
11월13일(12/9) | 김개남 청주 공격 실패 |
11월15일(12/11) | 정부․일본연합군과 노성에서 접전, 논산 황화대에서 정부․일본연합군과 접전, 농민군 전주로 철수 |
11월18일(12/14) | /김산 소모사에 조시영 임명 |
11월20일(12/16) | /서천성 점령 |
11월22일(12/18) | /차기석을 비롯한 강원도 농민군 지도자 강릉 교장(敎場)에서 효수 |
11월23일(12/19) | 전봉준 전주성 출발, 원평으로 남하 |
11월25일(12/21) | 원평 구미란에서 정부․일본연합군과 접전/남영병 115명 안의 일대 순회 |
11월27일(12/23) | 태인에서 정부․일본연합군과 접전, 전봉준 휘하농민군 해산, 직속부대에게 상경지시 /해주에서 농민군과 관군 접전 |
11월29일(12/15) | 전봉준 수하 몇 명과 입암산성에서 일박 |
11월30일(12/26) | 백양사에 도착 |
12월 1일(12/27) | 손화중 휘하농민군 해산, 김개남 체포 |
12월 2일(12/28) | 전봉준 순창 피노라에서 체포 |
12월 3일(12/29) | 최경선 체포 |
12월 5일(12/31) 중순 | /전라도 남해안의 농민군 장흥 점령, 북접농민군 순창, 장수, 무주를 거쳐 북상 |
12월 7일(1/2) | 전봉준 일본군에 의해 담양부로 압송 |
12월10일(1/5) | /전라도 남해안의 농민군 강진병영 습격, 점령 |
12월11일(1/6) | 손화중 체포 |
12월12일(1/7) | /영동 용산장터에서 관군과 싸워 농민군 승리 |
12월18일(1/13) | 정부 각 군현 민보군 해산령 내림 /북실(종곡)전투 : 일본군과 상주 유격병이 농민군 2,600여 명 살육 |
12월20일(1/15) | /상주방어군(안동․예천․함창․용궁․개령 남영군)1,000여 명 집결 |
12월24일(1/19) | /남영병 165명 김산․영동․보은 일대 파견 |
1895년 1월18일(2/12) | 정부 각 군현 민보군 해산령 내림 |
3월30일(4/24) | 전봉준 ․ 손화중 ․ 김덕명 ․ 최경선 ․ 성두한 등의 농민군 지도자 교수형 |
<전봉준(全琫準)> 死刑에 處ᄒᆞ노라. 開國 504年 3月 29日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맞아 ‘녹두장군’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들의 형사재판원본을 복원해 디지털 이미지로 누리집(홈페이지)에 제공한다고 10일 밝혔다. 올해는 부패와 외세에 맞서 전국적으로 항거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6년이 되는 해이다.
국가기록원이 복원한 형사재판원본은 근대 최초의 형사재판 판결문으로 전봉준·손화중·최경선·대원군 손자 이준용 등 총 217명의 최종 판결선고서가 포함된 217장 분량의 판결기록이다.
근대 최초 형사재판 판결문
전봉준 등 217명 선고서 포함
폐정개혁요구안 등 낱낱이
‘우치다’ 서명, 일본 관여 확인
이 기록물은 120년 이상이 흘러 종이에 황변화가 생기고 일부 부위는 결실 및 바스러짐이 진행돼 복원이 시급했다. 이에 국가기록원은 3개월에 걸쳐 한지를 이용한 구조물 보완과 전통 오침안정법으로 오염 제거 및 결실부 보강 처리 등 복원 작업을 마쳤다.
형사재판원본은 갑오개혁기 설치된 법무아문권설재판소, 특별법원, 고등재판소의 판결문으로 구성돼 있다.
법무아문권설재판소는 지금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재판소다. 해당 판결문에는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된 배경, 1·2차 봉기의 시작과 그 과정 등 전봉준의 행적이 가장 압축적으로 정리돼 있다.
당시 함께 활동한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의 심문기록과 폐정개혁요구안 및 농민군의 진격 경로도 포함돼 있다. 이 밖에 당시 사법부가 일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경성 주재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쓰치(內田定槌)의 서명도 확인할 수 있다.
<판결선고서(判決宣告書)>
第三十七號 判決宣告書 全羅道 泰仁 山外面 東谷居 農業 平民 被告 全琫準 年四十一 | 제 37호 판결선고서 전라도 태인 산외면 동곡 거 농업 평민 피고 전봉준 년 사십일 |
右記者는 全琫準을 對ᄒᆞ여 刑事被告事件을 審問ᄒᆞ여 본즉 被告ᄂᆞᆫ 東學黨이라 稱ᄒᆞ고 匪徒의 巨魁로 接노라부르고 開國五百一年正月에 全羅道 古阜郡守 趙秉甲이가 쳐음 到任ᄒᆞ여 ᄌᆞ못 虐政을 行ᄒᆞᄆᆡ 該地方人民等이 疾苦를 견ᄃᆡ지 못ᄒᆞ고 翌年十一二月分에 郡守를 向ᄒᆞ여 其苛政을 곳쳐달라ᄒᆞ고 哀懇ᄒᆞ엿더니 非但所願을 일우지 못헐ᄲᅮᆫ더러 도루혀다 잡히고 獄에 갓치고 其後에도 數三次請願 ᄒᆞ엿건마ᄂᆞᆫ 卽時 물니치고 毫髮도 效驗이 업ᄂᆞᆫ 故로 人民等이 ᄆᆡ오 憤ᄒᆞ여 數千名이 모듸여 將次擧事 ᄒᆞᆯ려ᄒᆞᆯᄯᆡ 被告도 맛ᄎᆞᆷ 그 무리에 드러드ᄃᆡ여 衆人이 밀러 謀主를 삼아 昨年 三月上旬에 領率其徒ᄒᆞ여 古阜 外村倉庫를 헐고 錢穀을 ᄲᆡ셔 盡數히 人民을 排給ᄒᆞ고 ᄯᅩ 一二處에 作梗ᄒᆞᆫ후 ᄒᆞᆫ번 解散ᄒᆞ엿스나 其後 按覈使長興府使 李容泰가 古阜로 드러와셔 몬져 作梗ᄒᆞᆫ것슨다 東學黨의 所爲라ᄒᆞ고 東學修道 ᄒᆞᄂᆞᆫ者를 잡아 殺戮을 과히 ᄒᆞᆷ으로 이에 被告가 다시 其徒를 糾合ᄒᆞ여 募兵ᄒᆞ되 만일 不應者ᄂᆞᆫ 不忠不義된 사ᄅᆞᆷ이니 반드시 罰을쥬리라ᄒᆞ고 다른 사ᄅᆞᆷ을 脅迫ᄒᆞ여 其徒四千餘名을 어더가지고 各其所有ᄒᆞᆫ 凶器를 가지고 糧食은 其地方富民에게 徵捧ᄒᆞ여 是年 四月上旬分에 被告가 親히 其徒를 領率ᄒᆞ여 全羅道茂長의셔니러나 古阜泰仁院坪金溝等處를 갈ᄉᆡ 全羅監營砲軍 一萬餘名이 東徒를 치러온단 말듯고 ᄒᆞᆫ번 古阜로 물러갓다가 ᄒᆞ로 밤낫즐 接戰후 營門砲軍을 破ᄒᆞ고 前進ᄒᆞ여 井邑興德高敞茂長靈光咸平을 지나 長城을 니르러 京軍七百餘名을 만나 ᄯᅩ擊破ᄒᆞ고 晝夜兼行으로 行陣ᄒᆞ여 四月二十六七日게 官軍 보담몬져 全州城을 드러가니 其時 全羅監司는 임의 逃亡ᄒᆞ여 간곳슬모르거날 其翌日의다더러 招討使洪在羲가 軍士를 다리고 城下의 迫到ᄒᆞ여 城밧긔셔 巨砲를 놋코 攻擊ᄒᆞ기로 被告가 其徒로 더부러 應戰ᄒᆞ여 ᄌᆞ못 官軍을 괴롭게ᄒᆞ니라 이에 招討使가 檄文을 지어 城中으로 던지고 被告等의 所願을 드러쥴터히니 速히 解散ᄒᆞ라 曉飭ᄒᆞ엿ᄂᆞᆫᄃᆡ 被告 等이곳轉運所革罷事國結不爲加事禁斷步負商人作弊事道內還錢舊伯旣爲捧去則不得再徵於民間事大同上納前各浦口潛商貿米禁斷事洞布錢每戶春秋二兩式定錢事貪官汚吏竝罷黜事壅蔽上聡賣官賣爵操弄國權之人一竝逐出事爲官長者不得入葬於該境內且不爲買畓事田稅依前事烟戶雜役減省事浦口魚鹽稅革罷事洑稅及宮畓勿施事各邑倅下來民人山地勒標偸葬勿施事二十七條目을 ᄂᆡ여가지고 上奏ᄒᆞ기를 쳥ᄒᆞ엿더니 招討使가 卽時 承諾ᄒᆞᆫ 故로 被告ᄂᆞᆫ 同年 五月 初五六日게 쾌히 그 무리를 解散ᄒᆞ여 各其 就業ᄒᆞ게 ᄒᆞ고 ᄯᅩ 其時에 被告ᄂᆞᆫ 崔慶善以下 二十餘名을 다리고 全州로붓터 金溝金堤泰仁長城潭陽淳昌玉果昌平順天南原雲峰等各處를閱歷遊說ᄒᆞ여 七月 下旬의 泰仁 졔집으로 歸去ᄒᆞ니라 其後 被告ᄂᆞᆫ 日本軍隊가 大闕로 드러갓단 말듯고 必是 日本人이 我國을 倂呑코져 ᄒᆞᄂᆞᆫ ᄯᅳᆺ신쥴 알고 日本兵을 쳐물니고 其居留民을 國外로 驅逐ᄒᆞᆯ 마옴으로 다시 起兵을 圖謀ᄒᆞ여 全州近處參禮驛이 土地廣闊ᄒᆞ고 全羅道要衝之地기로 同年 九月分에 泰仁를 發程ᄒᆞ여 院坪을지나 參禮驛을 니르러 그곳으로 起兵ᄒᆞᄂᆞᆫ 大都所를 삼고 鎭安居東學接主文季八全永東李宗泰金溝居接主趙駿九全州居接主崔大奉宋日斗井邑居孫汝玉扶安居金錫允金汝中崔卿宣宋憙玉等과同謀ᄒᆞ여 上年 三月 以後 被告와 同事ᄒᆞᆫ匪徒臣[巨]魁孫化仲以下全州鎭安興德茂長高敞等處遠近各地方人民더러 或檄文을 돌니며 或專人ᄒᆞ여 遊說ᄒᆞ고 全羅右道의 셔軍士를 모흐기를 四千餘名이 되ᄆᆡ 處處官衙의 드러가셔 軍器를 强奪ᄒᆞ고 ᄯᅩ 各地方 富民ᄒᆞᆫᄯᅴ 錢穀을 徵捧ᄒᆞ여 參禮驛을 ᄯᅥ나가면셔 徒黨을 募集ᄒᆞ고 恩津論山을 지나 黨類萬餘名을 거나리고 同年 十月 二十六日ᄶᅳᆷ 忠淸道公州를 다다럿더니 日本兵이못져州城을 雄據ᄒᆞ여 잇기의 前後二次接戰ᄒᆞ여 보왓것마ᄂᆞᆫ 두번다 大敗ᄒᆞ엿ᄂᆞᆫ지라 그러나 被告ᄂᆞᆫ 더 日本兵을 치려 ᄒᆞ엿더니 日兵이 公州의 잇셔 움즈기지안코 其間의 被告 包中이 漸漸逃散ᄒᆞ여 收拾지 못ᄒᆞ게되엿기로 不得已ᄒᆞ여 ᄒᆞᆫ번 故鄕으로 도라가 다시 募兵ᄒᆞ여 全羅道의셔 日兵을막으려 ᄒᆞ엿더니 應募者가 업ᄂᆞᆫ타스로 同謀三五人과 議論ᄒᆞ고 各其 變服ᄒᆞ여 가만이 京城으로 드러가 情探코져ᄒᆞ여 被告ᄂᆞᆫ 商人ᄆᆡᆫ도리 ᄒᆞ고 單身으로 上京次 泰仁을 ᄯᅥ나 全羅道 淳昌을 지날ᄉᆡ 民兵ᄒᆞᆫ태 잡힌 것시니라 右에 記錄ᄒᆞᆫ 事實은 被告와 밋 其同謀者 孫化仲 崔慶善 等이 自服ᄒᆞᆫ 供招押收ᄒᆞᆫ 證據文籍이 分明 ᄒᆞᆫ지라 其所爲는 大典會通刑典中의 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時斬이라 ᄒᆞᄂᆞᆫ 律을 照ᄒᆞ여 處罪ᄒᆞᆯ 거시니라 右에 理由로ᄡᅧ 被告 全琫準을 死刑에 處ᄒᆞ노라 開國五百四年三月二十九日 法務衙門 權設裁判所 宣告 법무아문(法務衙門) 대신(大臣) 서광범(徐光範) 법무아문(法務衙門) 협판(協辦) 이재정(李在正) 법무아문(法務衙門) 참의(參議) 장박(張博) 법무아문(法務衙門) 주사(主事) 김기조(金基肇) 법무아문(法務衙門) 주사(主事) 오용묵(吳容默) 회심(會審) 京城駐在日本帝國 領事 內田定槌 | 우기자는 전봉준을 대하여 형사피고사건을 심문(審問)하여 본 즉 피고난 동학당이라 칭하고 부도의 거두 접주라 부르고 개국 오백일년 정월에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가 처음 도임하여 자못 학정을 행하매 해지방인등이 병고를 견디지 못하고 익년 십일, 이월분에 군수를 향하여 기구정을 고쳐달라하고 애간(哀懇)하였더니 비단 소원을 이루지 못할뿐더러 두루혀 다 잡히고 옥(獄)에 갓치고 그 후에도 수삼차 청원하였건마난 즉시 물리치고 호발(毫髮)도 효험이 없난 고로 인민 등은 매우 분하여 수 천명이 못되어 장차 거사(擧事)하여 할 때 피고도 맛참 그 무리에 드러 드듸여 중인이 밀려 접주(接主)로 삼아 작년(昨年) 삼월상순(三月上旬)에 영솔기도(領率基徒)하여 고부(古阜) 외촌(外村) 창고(倉庫)를 헐고 전곡(錢穀)을 빼셔 진수(盡數)히 인민을 배급(排給)하고 일, 이처에 작경(作梗)한 후 한 번 해산(解散)하였으나 기후 안핵사(按 使)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가 고부로 드러와서 몬져 작경하거슨 다 동학당의 소위라 하고 동학수도하난 자를 잡아 살육(殺戮)을 과히 하므로 이에 피고난 다시 기도를 규합하여 모집(募集)하되 만일 불응자(不應者)난 불충불의(不忠不義)된 사람이니 반드시 벌을 주리라 하고 다른 사람을 협박(脅迫)하여 기도 사천여명(四千餘名)을 어더가지고 각기 소유한 흉기(凶器)를 가지고 양식(糧食)은 기지방 부민에게 징봉(徵捧)하여 시년 사월 상순분(上旬分)에 피고가 친히 기도를 영솔(領率)하여 전라도 무장(茂長)의셔 니러라 고부(古阜), 태인(泰仁), 원평(院坪), 금구(金溝), 등처(等處)를 갈새 전라감영 포군(砲軍) 일만여명(一萬餘名)이 동도(東徒)를 치러 온단 말을 듣고 한 번 고부(古阜)로 몰려 갔다가 하루 밤낮을 접전 후 영문포군(營問砲軍)을 파하고 전진하여 정읍(井邑), 흥덕(興德), 고창(高敞), 무장(茂長), 영광(靈光), 함평(咸平)을 지나 장성(長城)을 니르니 경군 칠백여명을 만나 또 격파(擊破)하고 화야겸행( 夜兼行)으로 행차하여 사월 이십육, 칠일게 관군보담 몬져 전주성을 드러가니 기시(其時) 전라감사는 임이 도망하여 간 곳슬 모르거날 기익일(其翌日)의 다더러 초토사(招討使) 홍재희가 군사를 다리고 성하의 박도(迫到)하여 성밧거셔 거포(巨砲)를 놋코, 공격(攻擊)하기로 피고가 기도(其徒) 더부러 응전(應戰)하여 쟈못 관군을 괴롭게 하니라. 이에 초토사가 격문(檄文)을 지어 성중으로 던지고 피고 등의 소원을 드러줄터이니 속히 해산하라 효칙(曉飭)하엿난대 피고 등이 곳 전운소핵파사(戰運所革罷事), 국결부위가사(國結不爲加事), 금보부상인작폐사(禁褓負商人作弊事), 도내 환전구백위봉거(還錢舊伯爲捧去) 즉부득재징어민간사(則部得再徵於民間事), 대동상납전각포구잠상무미금단사(大同上納前各浦口潛商貿米禁斷事), 동포전매호춘이양식정전사(洞布錢每戶春秋二兩式定錢事), 탐관오리병파출사(貪官汚吏竝罷黜事), 옹폐상층매관매작조국권지인일병축출사(雍蔽上聰賣官賣爵操國權之人一竝逐出事), 위관장자부득입장어해경내차부위매답사(爲官長者不得入蔣於該境內且不爲買沓事), 전세의전사(田稅依前事), 연호잡역감성사(煙戶雜役減省事), 포구어람세혁파사(浦口魚籃稅革罷事), 보세급관답물시사(洑稅及官沓勿施事), 각읍졸하래민인산지륵표투장물시사(各邑 下來民人山地勒標偸葬勿施事). 이십칠수목(二十七脩目)을 내여 가지고 상주(上奏)하기로 청하였더니 초토사(招討使)가 즉시 承諾한 고로 동년(同年) 오월(五月) 초오(初五), 육일(六日)께 쾌히 그 무리를 해산(解散)하여, 삼례역(三禮驛)을 니르러 그곳으로 기병(起兵) 각기(各其) 취업(就業)하게 하고 또 기시에 피고난 최경선(崔景善) 이하(以下) 이십여명(二十餘名)을 다리고 전주로부터 금구(金溝), 금제(金堤), 태인(泰仁), 장성(長城), 순창(淳昌), 옥과(玉果), 창평(昌平), 순천(順川), 남원(南原), 운봉(雲峰) 등 각처를 열력(閱歷) 유설(遊說), 하여 칠월하순(七月下旬) 태인(泰仁) 제집으로 귀거(歸去)하니라. 기후(其後) 피고난 일본(日本) 군대(軍隊)가 대궐(大闕)로 드러갓단 말듯고 필시 일본인이 아국(我國)을 병합(倂合)코저 한난 뜻신 줄 알고 일본병(日本兵)을 쳐물리고 기거유민(其居留民)을 국외(國外)로 구축(驅逐)할 마음으로 다시 기병(起兵)을 도모(圖謀)하여 전주(全州) 근처(近處) 삼례역(三禮驛)이 토지(土地) 광활(廣闊)하고 전라도(全羅道) 요충지지(要衝地之地)기로 동년(同年) 구월분(九月分)에 태인(泰仁)을 발정(發程) 원평(院坪)을 지나 대도소(大都所)로 삼고 진안거(鎭安居) 동학접주(東學接主) 文季八(文季八), 김영동(金永東), 이종태(李宗泰), 금구거접주 조준구(金溝居接主 趙駿九), 전주거접주 최대봉(全州居接主 崔大奉), 송목두(宋目斗), 정읍거(井邑居), 손여옥(孫汝玉), 부안거(扶安居), 김석윤(金錫允), 김여중(金汝中), 최경선(崔慶善), 송희옥(宋喜玉), 등과 동모(同謀)하여 상년삼월이후(上年三月以後) 피고(被告)와 동사(同事)한 비도거괴(匪徒巨魁) 손화중(孫化仲) 이하(以下) 전주(全州), 진안(鎭安), 흥덕(興德), 무장(茂長), 고창(高敞) 등처(等處) 원근(遠近) 각지방(各地方) 인민(人民) 더러 혹(或) 격문(檄文)을 돌리며 혹(或) 전인(專人)하여 유설(遊說)하고 전라우도(全羅右道)의셔 군사(軍士)를 모흐기를 사천여명(四千餘名)이 되매 처처관아(處處官衙)의 드러가셔 군기(軍器)를 강탈(强奪)하고 또 각지방(各地方) 부민(富民) 한띄 전곡(錢 )을 징봉(徵捧)하여 삼례역(參禮驛)을 떠나가면서 도당(徒黨)을 모집(募集)하고 은진(恩津), 논산(論山)을 지나 당수만여명(黨數萬餘名)을 거느리고 동년(同年) 십월(十月) 이십육일(二十六日)쯤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를 다다럿더니 일본병(日本兵)이 몬져 공주성(公州城)을 웅거(雄據)하여 잇기에 전후(前後) 이차접전(二次接戰)하여 보앗건마난 두 번 다 대패(大敗)하였는지라 그러나 피고(被告)난 더 일본병(日兵)을 치려 하였더니 일본병(日本兵)이 공주(公州)의 있셔 움직이지 안코 기간(其間)의 피고(被告) 포중(包中)이 점점(漸漸) 도산(逃散)하여 수습(收拾)치 못하게 되엿기로 부득이(不得已)하여 한번 고향(故鄕)으로 도라가 다시 모병(募兵)하여 전라도(全羅道)의셔 일병(日兵)을 막으려 하엿더니 응모자(應募者)가 없는 타스로 동모(同謀) 삼(三), 오인(五人)과 의논(議論)하고 각기(各其) 변복(變服)하여 가만이 경성(京城)으로 드러가 청탐(淸探)코져 하여 피고(被告)난 상인(商人)맨도를 하고 단신(單身)으로 상경차(上京次) 태인(泰仁)을 떠나 전라도(全羅道) 순창(淳昌)을 지날 새 민병(民兵)한대 잡힌 거시니라. 우(右)에 기록(記錄)한 사실(事實)은 피고(被告)와 밋 기동모자(其同謀者) 손화중(孫化仲), 최경선(崔慶善) 등(等)이 자복(自服)한 공초(供招) 압수(押收)하나 증거문적(證據文籍)이 분명(分明)한지라. 기소위(其所爲)는 대전회통형전중(大典會通刑中)의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불대시참(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時斬)이라 하난 율(律)을 조(照)하여 (處罪)할 거시니라 우(右)에 이유(理由)로써 피고(被告) 전봉준(全琫準)을 사형(死刑)에 처(處)하노라. 개국(開國) 오백사년(五百四年) 삼월(三月) 이십구일(二十九日) 법무아문권설재판소 선고 법무아문 대신(大臣) 서광절(徐光節) 법무아문 협판(協辦) 이재정(李在正) 법무아문 참의(參議) 장박(張博) 법무아문 주사(主事) 김기조(金基肇) 법무아문 주사(主事) 오용묵(吳容默) 경성주재일본제국 영사 우치다 사다츠지 |
1895년 4월 24일 날의 두 사건:
동학운동 <녹두꽃이 떨어지고>,
불교는 <부흥의 계기>가 마련되다 !
1. 새벽에 동학혁명의 우두머리 전봉전 장군을 처형
(“京城特報 四月 二十四日 特派員發,” <時事新報> - 1895년 5월 7일 )
4월 23일 오후 4시 경 사형 선고 후
4월 24일 새벽 2시에 손화중, 최영창과 함께 교수형에 처했다.(陰 1895년 3월 27일)
관군에 쫓기던 전봉준은 전남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12월 2일에는 순창 피노리에 도착했다. 전봉준이 피로리를 찾은 이유는 고부 출신으로 자신이 고부 접주로 활동할 때 접사 업무를 맡았던 김경천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봉준은 몸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김경천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담양으로 향하다 피로리로 들어왔다. 김경천은 전봉준과 일행을 반색하며 맞이하고는 자신의 집이 좁다고 하면서 길가의 주막으로 안내해서 전봉준 일행에게 국밥을 사주고 쉬도록 한 다음 계략을 짰다. 그는 급히 이웃 마을에 있는 전주 퇴교 한신현(韓信賢)에게 전봉준이 자신을 찾아 이곳으로 와서 주막에 일단 쉬게 했다고 일러바쳤다. 밀고를 접한 한신현은 김영철(金永澈)과 정창욱(丁昌昱) 등 동네 장정들을 모아 전봉준이 묵고 있던 주막을 포위했다. 동학농민군이 대패한 이후 피로리에 숨어있던 김경천은 전봉준을 잡아 현상금을 차지하려고 전봉준을 밀고했다. 김경천의 태도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느낀 전봉준은 밖으로 나왔지만 이미 주막은 포위돼 있었다. 전봉준은 뒷문을 통해 담장 아래 놓인 나뭇단을 딛고 담을 넘기 위해 뛰었는데 그때 동네 장정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다리를 맞아 꼬꾸라지고 말았다. 전봉준이 다리가 부러져 도망가지 못하자 장정들은 전봉준을 마구 두들겨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든 다음 마을 공회당에 가둔 후 순창 관아에 인계했다. 순창 관아에서는 전봉준을 전주로 압송할 예정이었지만 후비보병 제19대대장인 미나미 소좌가 이 소식을 듣고 순창으로 달려와 군수를 협박했다. 당시 순창 관아에서의 실랑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총을 쏘아 전봉준의 심복 윤정오를 사살했다. 이렇게 총을 앞세워 전봉준을 차지한 미나미는 12월 7일 전봉준을 담양으로 압송했고 자신들의 주둔지인 나주로 데려갔다. 전봉준을 체포한 공으로 한신현은 상금 1천 냥과 함께 황해도 금천의 군수직을 받았다. 또 김영철은 3백 냥을, 정창욱은 2백 냥을 받았다. 이밖에 전봉준을 체포하는 데 동원된 마을 주민 9명은 각각 1백 냥의 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피로리에는 2백 냥의 포삼금이 내려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전봉준을 체포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김경천에게는 아무 보상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동학도였고 동학혁명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전봉준을 밀고해 부귀영화를 노렸던 김경천은 군수는커녕 아전 자리도 얻지 못하고 백성들로부터 전봉준을 밀고한 역적이라고 해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결국 그는 떠돌아다니며 얻어먹다가 이평면의 어느 노상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울산 저널) 전봉준은 체포 당시 입은 부상이 커서 그곳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역시 1895년 1월 6일에 체포되어 온 손화중이 나주목사 민종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으로 자칭하자, 전봉준은 “진실로 짐승 같은 놈”이라며 사람을 잘못 보고 거사를 도모해서 일을 그르쳤다고 질책했다. 전봉준은 관리들을 보고 모두 너라고 부르고 꾸짖으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내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라며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자들을 꾸짖으며 끝까지 당당했던 것이다.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을 당하는데, 그 고초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전봉준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타박상에 좋다는 죽력고(竹瀝膏)와 인삼(人蔘)을 달라고 해서 스스로 몸을 추스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어, 법무아문(法務衙門) 권설재판소에서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재판을 받고 3월 29일에 사형을 선고받았다.(우리역사넷) 녹두야 녹두야 전녹두야 그 많은 군사 엇다 두고 쑥대밭에 낮잠 자냐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황현은 그때 그의 언행을 이렇게 기록했다. “전봉준이 벼슬아치를 보고는 모두 너라고 부르고 꾸짖으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내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너희들이 어찌 함부로 다루느냐’고 했다. 잡아가는 자들이 이를 보고 ‘예예’ 하며 잘 모셨다.”(중앙일보) |
법무협판 이재정(李在正)의 판결 -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의 보고 - 국왕 고종(高宗)의 윤허로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고등법원 판결은 이재정(李在正) 협판과 장박(張博) 참의, 일본영사관 우치다 사다츠치(内田 定搥) 일등영사로 구성된 3인 판사들이 내렸다.
당시 교수형은 대개 동대문 밖 남벌원에서 실시했고, 처형된 자의 목은 3일간 서소문 밖에 효시했다.
그러나 전봉준의 경우는 효시하지 않았다.
이에 양반들은 “역적을 목 베어 조리돌리지 않았다”고 개화정부에 항의했다.
일본의 <메사마시신문>에 동학당 효수 사진이 처음 실리고, 이사벨라 비숍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이 사진을 수록하면서 사진 속 수급의 주인공이 전봉준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수급의 실제 주인은 수원에서 활동하다가 잡혀 서울 동대문 옆 수구문 밖 남벌원에서 참수된 최재호와 안교선이다. 생전 전봉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호송 장면을 찍은 사진 단 한 장뿐이다.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텐신이 일본 영사인 우치다의 허락을 받아 1985년 3월 27일(양력) 일본영사관 구내에서 사진을 찍었고, 2개월이 지난 5월 10일 발매된 《사진화보》 제14권에 게재했다. 그러나 3월 12일자 <오사카매일신문>이 전봉준의 호송 기사를 내보내면서 ‘압송당하는 전봉준 장군’이라는 제목의 삽화를 함께 게재했는데, 이는 무라카미 텐신의 사진을 삽화로 그리고 다시 목판으로 만들어 찍은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부자에게 재물을 울려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적에도 윽박지르지 않고 설득을 펴서 동의를 구했으며 (…) 부정한 높은 벼슬아치와 수령들에게 칼을 들어 내리치기보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꾸짖었다." 남원 일대에서 활동했던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의 부하들이 양반들의 씨를 말리자며 “불알을 까고”, 양반집 처녀와 늑혼(강제로 맺는 혼인)을 하는 등 과격했던 것과 달랐다. 전봉준은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개와 닭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으며, 밥을 얻어먹으면 꼭 사례를 했다. 가장 원통한 대목은 역시 마지막이 된 공주 전투다. 조선 관군이 일본군의 지휘를 받아 자국 백성인 농민군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다시 봐도 아프다. 공주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전봉준은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낸다. “일본의 도둑들이 군대를 움직여 우리 임금을 핍박하고 우리 백성을 걱정스럽게 하니 어찌 참는단 말인가. 임진왜란의 원수를 초야에 있는 필부나 어린애까지도 그 울분을 참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는데 하물며 각하는 조정의 녹을 먹는 충신이니 우리 무지렁이들보다 몇 배 더 하지 않겠는가.” 녹두장군 신화와 윤색 걷어내고 따뜻한 평화주의자 모습 오롯이 일본 제국주의 맞선 2차 봉기 등 동학혁명 사실에 가장 가깝게 담아 역사 부인하는 이들이여 똑똑히 보라 하지만 박제순은 충신이 아니었다. 나중에 을사오적의 하나로 오명을 남긴 박제순은 자신을 부하처럼 부리는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 농민군 타도에 앞장선다. 농민군은 1만명이 넘었으나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에게 통한의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이 전북 순창에서 옛 부하의 배신으로 붙잡히는 과정과, 친일의 앞잡이로 활용하려는 일본의 회유를 물리치고 당당히 죽음을 택하는 마지막 모습을 차분한 어조로 전한다. .(冊: 전봉준, 혁명의 기록) 일본인들의 회유에 대해 “너희는 나의 원수이고, 나는 너희의 원수가 아니냐. 나를 죽여라. 구차한 삶을 위해 살길을 찾는 것은 내 본뜻이 아니다. 난 죽음을 기다린지 오래다.” 라 했다. |
일본은 전봉준이 체포되자 그를 병원에서 치료하는 등 특별대우하며 심문했는데,
대원군과의 관계를 밝혀 대원군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끝까지 그 관계를 밝히지 않았다.
대원군이 밀사를 보낸 적은 있으나, 전봉준이 그와 협력하지는 않았다.
(이이화, 『전봉준, 혁명의 기록-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2014), 231~232.)
■ 세상을 놀라게 한, 대 위인, 대 영걸
“사형을 선고받으면 대개 정신이 혼비백산하고 사지가 떨리는 법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선사람은 배짱이 좋다.
동학의 거두를 자임하는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더한) 같은 사람은 매우 대담했다.”
당시 재판을 지켜봤던 일본의 <시사신보> 서울 특파원(다카미 가메·高見龜)의 소감이다.
고문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전봉준은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관아의 서리(衙吏)가 안고 사형장으로 갔다.
다음날 새벽 2시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 등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전봉준의 나이 41살 때의 일이다.
가족에게 남길 말을 묻자
전봉준은 “다른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리라”고 했다.
“어찌 이 깜깜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느냐”고도 했다.
교수형 집행 당시 총순(판임관)을 맡았던 강 모(謀)는 전봉준의 됨됨이를 이렇게 전했다.
“전봉준이 잡혀올 때부터 형을 받을 때까지 죽 지켜봤다.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느낌이었다.
외모부터 천인만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청수(淸秀)한 얼굴과 정채있는 아미(眉目·눈썹과 눈), 엄정한 기상, 강장(强壯)한 심지(心志)는
과연 세상을 한번 놀라게할만한 대위인·대영걸로 보였다.”
전봉준은 즉흥시 ‘운명(殞命)’을 읊었다.
時來天地 皆同力 시래천지 개동력 때가 오매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는데
運去英雄 不自謀 운거영웅 불자모 운이 다했으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르겠구나.
愛民正義 我無失 애민정의 아무실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겠나.
爲國丹心 誰有知 위국단심 수유지 나라 위한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
2. 서울 도성 안에 불교 승려, <출입 허락>
천민인 불교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는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1451년 문종 때 처음 시행되었으나
명종, 임란 후에 일시 해지되었지만, 1625년 인종이 다시 명하여 시행되었다.
270년 만에 해금되었다.
일본 일연종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청원으로 천시와 서러움의 표상이었던 승려 도성 출입금지가 풀렸다.
일본 불교는 강화도조약(1876)을 교두보로 정토진종 오타니파(大谷派)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이 1877년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한 이후 서울에 진출하였다. 청일전쟁 후 친일 내각이 들어서면서 일본 불승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서울 시내 일본인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었고, 한국인 승려도 서울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발전 1]
10월 8일 새벽 을미사변. 일본 영사관의 사주를 받은 낭인들이 경복궁에 쳐들어가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를 때, 민 왕비의 침소인 옥호루에 침입한 낭인 중에는 허리에 칼을 찬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도 끼어 있었다. 을미사변의 핵심세력은 <한성신보> 팀이었다.
[발전 2]
1902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가 건축되었다. 대한제국 정부 주도로 설립된 원흥사는 1902년 1월에 개당(開堂) 법회를 열었다. 국내의 사찰과 승려를 관리하고자 하는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1902년 4월 원흥사 안에 설치되었다. 1903년 9월에는 고종 황제의 위축전각(位築殿閣)과 명성황후의 원당(願堂)과 법당을 신축했다. 1904년 사사관리서가 폐지되면서 원흥사도 폐사될 위기에 놓였으나, 봉원사(奉元寺) 이보담(李寶潭), 화계사(華溪寺) 홍월초(洪月初) 스님이 중심이 된 불교연구회로 이관되었다. 1906년 원흥사에 명진학교가 세워졌는데, 현재 동국대학교의 출발이었다. 원흥사는 1910년까지 한국 불교의 중심 사찰 역할을 했다. 1908년 3월 불교계의 대표 52명이 원흥사에 모여 원종을 설립하니 근대 종단의 출발점이었다.[이후 창신학교로 바뀜]
1910년 처음으로 사대문 안에 불교사찰인 원종(圓宗)의 각황사(覺皇寺)가 건립되었다.
동대문 원흥사에서 종무원 소속 불교당을 중부 사동에 건축하기로 내부에 청원하여 인허를 받고 3월에 공사를 시작했다. 전국 사찰이 이에 호응하여 2,000여 석의 백미 연조가 이루어졌다. (“잡보: 불교당 건축,”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8일.) 각황사 창건은 1909년 12월 전국 승려대표 150여 명이 원흥사에 모여 새로 설립한 원종설립 인가에 맞춰 한성부 안에 불교총합소를 설치하기로 결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사대문 안에 원종 사찰을 창건하는 것을 숙원사업으로 정했다.
각황사 터로 박동(薄洞)에 있는 옛 동녕위궁(東寧尉宮: 현재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근처, 보성학교 옆] 자리를 3천 원에 매입했으며, 10월 초에 건축을 마무리하고 1910년 10월 26일과 27일에 봉불식을 열었다. 이를 위해 강원도 각 사찰에서는 6,000원을 모아 보냈고,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각 사찰에서도 백미 1천 석을 불사금으로 내놓았다. 각황사를 짓기 위해 전국 사찰에서 모은 불사금이 백미 2천 석과 현금 8만 원에 달했다.
출처: (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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