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탑
Tower of Basel(2013)
아담 레보어, 임수강 옮김, 더늠 2022
“국제결제은행BIS은 정부나 정치의 모든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게이츠 맥거러Gates Mcgarrah, BIS 초대 총재, 1931.
내가 친구와 지인들에게 BIS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하자 보통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무슨 은행이라고?” 그들은 나름대로 최신의 정세에 정통한 지식이들이었다. 많은 이들은 세계 경제와 금융위기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으며 이해도 깊었다. 그러나 BIS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BIS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은행일 뿐만 아니라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보다 먼저 설립된 기관이다. 수십 년 동안 BIS는 돈, 권력, 그리고 은밀한 세계적 영향력의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BIS는 1930년에 설립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 플랜Young Plan의 일환으로 독일의 배상금 지급을 관리할 목적으로 출발했다. 은행의 핵심 설계자는 잉글랜드은행의 총재 몬태규 노먼Montagu Norman과 독일 제국은행Reichsbank의 총재 알마르 샤흐트Halmar schacht였다. 샤흐트는 BIS에 대해 내 은행이라고 얘기할 만큼 애착이 강했다. BIS의 창립 멤버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의 중앙은행과 일본의 민간은행 컨소시엄이었다. 주식은 연준FRB에도 배정되었지만, 미국은 자국의 주권이 침해당할 수 있는 어떤 것이든 의심했기 때문에 주식 인수를 거절했다. 대신 상업은행 컨소시엄이 주식을 인수했다. J.P. 모건, 뉴욕퍼스트내셔널은행, 시카고퍼스트내셔널은행이 그들이다.
BIS의 진정한 목적은 법규에 자세히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중앙은행들의 협력을 촉진하고 국제금융 업무에 추가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중앙은행가들이 수십 년 동안 품어온 꿈의 결정판은 간섭하기 좋아하는 정치인이나 귀찮은 언론에서 멀리 떨어진 강력하고 독립적인 그들만의 은행을 갖는 것이었다. 아주 적절하게도 BIS는 자기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는데, 이점은 BIS가 오래 존속할 수 있는 토대였다. BIS의 고객은 설립자이자 주주, 곧 중앙은행들이었다. 샤흐트와 노먼이 지배하고 있던 1930년대의 BIS는 중앙은행 총재 무리가 몰려드는 모임 장소였다. 이 중앙은행 총재들은 독일의 재건을 도왔다. 샤흐트는 독일 경제의 부활을 떠받친 천재로 널리 알려졌다. 『뉴욕 타임즈』는 그런 그를 ‘철의 의지를 가진 나치 금융의 조종사’로 묘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사실상 독일 제국은행의 지점으로 전락한 BIS는 나치가 약탈한 금을 받아들였고, 나치 독일을 위한 외환거래를 수행했다.
BIS와 베를린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워싱턴과 런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BIS가 계속 기능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국가들 사이에 새로 만들어진 금융 창구를 계속 열어둘 필요가 있다는 점은 모든 당사국들 사이에서 완전한 의견일치를 본 사항이었다. 바젤은 안성맞춤 장소였는데, 그 이유는 스위스의 북쪽 끝자락에 놓여 있는 데다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 거의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치와 연합군 병사들은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이어갔고 또 수없이 죽어 나갔다. BIS에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사회의 개최는 중단되었지만, 여러 교전국들에서 온 BIS 직원들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따뜻하고 전문가다우며 생산적이었다. 국적은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제금융에 대한 충성이었다. 가장 중요한 충성심은 국제금융에 대한 것이었다. BIS 총재 토마스 맥키트릭은 미국인이었다. 사무국장 로제 오보앵은 프랑스인이었다. 사무차장 파울 헤실러는 나치 당원이었으며, 그가 쓴 편지에 하일 히틀러라고 서명했다. 비서실장 라파엘레 필로티는 이탈리아인이었다. 영향력 있는 은행의 경제고문 팔 야콥센은 스웨덴인이었다. 야콥센과 필로티의 스태프는 영국인들이었다.
1945년 이후, 샤흐트를 포함한 다섯 명의 BIS 이사들은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독일은 전쟁에서 졌지만 경제적 평화를 얻었는데, BIS의 덕이 컸다. BIS는 처음에는 제국은행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그 승계 은행에게 국제무대, 대외 접촉기회, 은행 네트워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정당성까지 부여했다. 이를 통해 독일은 나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강력한 금융적, 경제적 이익의 연속성을 지킬 수 있었다.
BIS는 창서루터 47년 동안, 다시 말해서, 1930년부터 1977년까지는 바젤 중앙역에서 가까운, 옛 호텔 건물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은행의 입구는 초콜릿 가게로 가려져 있었고, 오직 작은 안내판만이 좁은 출입구가 BIS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은행의 경영진이 믿는 바로는, BIS가 어디에 있는지 알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낼 것이고 나머지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알 필요가 없었다. 쿰스는 건물 내부가 수십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BIS는 “과거 빅토리아 스타일의 호텔을 개조하여 간소한 업무공간을 마련했다. 사무실은 1인실과 2인실 호텔 방에서 침대를 빼내고 책상을 집어넣어 만들었다.”
BIS는 1977년에 센트랄반플라츠 2에 있는 현재의 본부로 이전했다. 본부는 과거 건물에서 멀지 않았고 바젤 중앙역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오늘날 BIS는 자기의 사명이 세 가지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 세 가지란, “첫째, 화폐와 금융의 안정을 추구하는 중앙은행들을 돕는 것, 둘째, 화폐와 금융 영역에서 국제적인 협력을 촉진하는 것, 셋째, 중앙은행들의 은행으로서 활동하는 것이다.” 또한 BIS는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매끄럽게 기능하는 데 필요한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여러 인프라를 제공한다. BIS에는 서로 연결된 두 개의 트레이닝 룸(바젤 본부와 홍콩 지역사무소)이 있다. BIS는 고객을 위해 금과 외환을 사고판다. BIS는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며, 필요할 때는 중앙은행들에게 단기 신용을 제공한다.
BIS는 독특한 기구인데, 국제조약에 의해 설립되고 보호받는 국제조직이고, 수익성이 매우 높은 상업은행이며, 연구기관이기도 하다. BIS는 고객이자 주주인 중앙은행들에게 책임을 지지만 거꾸로 그들의 운영을 지도하기도 한다. BIS는 중앙은행의 주요 임무를, 첫째, 안정적인 사업 환경을 보장하기 위하여 신용의 흐름과 유통 화폐량을 통제하는 것, 둘째, 환율을 관리 가능한 범위 내에 묶음으로써 통화의 가치를 보장하는 것, 셋째, 이를 통해 국제무역과 자본이동을 매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임무는 특히 글로벌 수준으로 발전한 경제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글로벌 경제의 특징은 시장이 마이크로초 단위로 반응한다는 점과, 경제적 안정과 경제적 가치에 대한 통찰력이 현실 경제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또한 BIS는 법적 권한이 없음에도 민간은행들을 사실상 감독한다. BIS에 속하는 바젤은행감독위원회(통칭 바젤위원회)는 상업은행의 자본과 유동성 충족 요건을 규제한다. 바젤위원회는 은행들에 대출을 할 때 위험 가중자산의 최소 8%에 해당하는 자본을 보유할 것을 요구한다. 곧, 어떤 은행이 1억 달러의 위험 가중자산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은행은 적어도 800만 달러의 자본을 유지해야 한다. 바젤위원회는 강제력은 없지만 막강한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규제가 매우 강력한 탓에 8% 원칙을 국내법으로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페테르 야코스 보드는 말한다. “이것은 220볼트로 설정된 전압에서 95볼트를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론적으로는, BIS가 은행을 감독하면 현명한 관리와 상호 협력으로 글로벌금융시스템은 매끄럽게 기능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현실은 우리가 경기침체를 넘어 심각한 구조적 위기로 빠져드는 모습이며, 게걸스럽게 덤비는 은행들의 탐욕은 그러한 위기에 기름을 붓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모든 금융안정을 위협한다. 1930년대처럼 유럽의 일부 지역은 경제 붕괴에 직면해 있다. BIS에서 가장 힘센 축에 속하는 두 회원(독일 연방은행과 유럽중앙은행)은 긴축재정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긴축은 이미 한 유럽 국가, 곧, 그리스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여기에 지배계급의 독직과 부패까지 더해지면서 그리스는 고비를 맞았다. 다른 나라들도 곧 그리스를 뒤따를 것이다. 낡은 질서는 삐걱거리고, 그 정치와 금융 제도는 안쪽부터 썩고 있다. 오슬로에서 아테네까지, 치솟는 빈곤과 실업을 주요한 자양분으로 삼으면서 극우 세력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분노와 냉소가 민주주의와 법치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을 좀먹고 있다. 다시 한번, 눈앞에서 부동산과 자산의 가치가 증발하고 있다. 유로화는 붕괴 위협을 받고 있는 반면, 돈을 가진 사람들은 스위스 프랑이나 금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는다. 젊고, 재능이 있으며, 이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시 고국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외국으로 떠나고 있다. BIS를 탄생시키고 여기에 힘과 영향력을 가져다준 강력한 국제자본 세력이 다시 이기고 있다.
BIS는 무너지고 있는 국제금융시스템의 정점에 앉아 있지만, 그 간부들은 BIS가 국제 금융 규제기관으로서 행동할 힘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BIS는 유로존 위기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1940년대 말에 맺은 첫 번째 다자간 지급 합의부터 1998년의 유럽중앙은행 설립에 이르기까지, BIS는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핵심에 있으면서 통화 협조에 대한 기술적인 전문지식과 금융 메커니즘을 제공해 왔다. 1950년대에, BIS는 유럽지급동맹EPU을 운영했는데, 이를 통해 유럽 대륙의 결제시스템이 국제화했다. BIS는 1964년부터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중앙은행총재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유럽 나라들의 통화정책이 조절된다. 1970년대에 BIS는 유럽 통화들의 환유을 일정 폭 안에 묶어 두는 스네이크 메커니즘을 운영했다. 1980년대에 BIS는 들로르위원회를 주관했는데, 1988년의 들로르 보고서는 유럽 통화동맹과 단일통화 실현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 BIS는 유럽중앙은행의 전신인 유럽통화연구소를 탄생시켰다. 이 연구소의 소장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경제학자의 한 명이자 유로화의 아버지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람파루시Alexandre Lamfalussy였다. 람파루시는 1994년 유럽통화연구소에서 일하기 전에 BIS에서 처음에는 경제고문으로, 나중에는 사무국장으로 17년 동안 일했다.
듬직하고 비밀스러운 조직으로서, BIS는 놀라울 정도로 민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BIS는 세계 대공황, 독일 배상금 지급과 금본위제도의 종료(독일 배상금 관리와 금본위제도는 BIS의 주요한 존재 이유였다), 나치즘의 부상, 제2차 세계대전, 브레턴우즈 협정,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탄생, 냉전,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금융위기, 코뮤니즘의 종말이라는 사건들을 헤쳐 나왔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사무국장을 맡은 맬컴 나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BIS는 작고, 유연하며,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는 조직으로 남았다. BIS는 자기의 역사를 개척하면서 진화하는 환경에 매우 성공적으로 적응해왔다. 이는 주목할 만한 일이다.”
BIS는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중심 축으로 발돋움했다. BIS는 글로벌경제회의뿐만 아니라 글로벌 은행업무를 다루는 4개의 가장 중요한 국제위원회를 주관한다. 4개 위원회란 바젤은행감독위원회, 글로벌금융시스템위원회, 지급경제시스템위원회, 중앙은행 통계를 다루는 어빙피셔위원회를 말한다. BIS는 또한 세 개의 독립조직, 곧, 금융안정이사회FSB, 보험감독협회IAIS, 그리고 국제예금보험협회IADI를 관할한다. 금융안정이사회FSB는 여러 나라 금융당국 사이에서 규제정책을 조정하는 조직인데, 이미 BIS,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에 이은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네 번째 기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BIS는 현재 세계에서 서른 번째로 많은 금 보유기관이다. 그 규모는 카타르, 브라질, 캐나다보다 많은 119톤에 이른다. BIS 회원이라는 것은 이제 권리를 넘어서는 특권이다. 이사회는 “국제적인 금융협력과 BIS의 활동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중앙은행들의 회원가입을 결정한다. 중국, 인도,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는 1996년에야 겨우 회원에 가입했다. BIS는 멕시코시티와 홍콩에 사무소를 열었지만 아직도 매우 유럽중심적인 기관이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합계 인구 1,620만 명)는 회원에 가입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인구 1억 6,900만 명)과 중앙아시아의 강국인 카자흐스탄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알제리와 남아프리카공화국만이 회원이다. 아프리카의 두 번째 경제 대국인 나이지리아의 회원 가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BIS의 옹호자들은 다음과 같인 말한다. 곧, BIS는 새로운 회원이 되려는 중앙은행에게 높은 지배구조 기준을 요구한다. 나이지리아나 파키스탄과 같은 나라의 중앙은행들도 그 기준에 도달한다면 회원 가입이 논의될 것이다).
초국가적 경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BIS의 인지도가 낮다는 사실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과거 1930년, 『뉴욕 타임즈』의 한 기자는 BIS의 비밀주의 문화가 너무 강해서 이사들이 떠난 뒤에도 이사회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변한 것은 거의 없다. 글로벌경제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기자들은 본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BIS 직원들은 공식석상에서 거의 발언을 하지 않으며 언론인들을 상대로 한 발언도 꺼린다. 이러한 전략은 효과를 발휘한 듯하다. 월 스트리트 점령 운동, 세계화 반대주의자, 소셜 네트워크 시위자들은 BIS를 항의 대상 기관으로 삼지 않았다. 바젤의 센트랄반플라츠 2는 조용하고 잠잠하다. BIS 본부 바깥에 모인 시위대도, 인근 공원에 진을 친 항의자들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의 중앙은행 총재들을 위한 시끌벅적한 환영 인파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경제가 연이은 위기로 휘청거리는 가운데, 금융기관들은 전례 없는 정밀감사를 받고 있다. 수많은 언론인, 블로거, 탐사전문 기자들이 은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뒤진다. 어찌 된 영문인지, 신문 금융란의 짧은 토막 기사를 제외한다면 BIS는 용케도 비판적인 감시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28~35)
옮긴이 후기
이 책은 스위스 바젤에 본부를 둔 국제결제은행BIS의 역사와 본질적인 한계를 다룬다. BIS는 중앙은행들의 은행 기능을 하는 기구라 할 수 있는데,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중앙은행들의 역사, 한계와도 밀접하게 엮여 있다. 이 책의 제목 바젤탑은 구약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을 패러디한 것이다. 18층의 원통형으로 솟아 있는 BIS 본부 건물은 탑의 모습을 닮았다. 이점에 착안하여 저자는 바젤탑이라는 조어로 BIS를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구약 성경에서 인간의 욕심을 상징하는 바벨탑이 무너졌듯이, 금융으로 쌓은 탑도 잘 통제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무너질 수 있음을 바젤탑이라는 조어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BIS를 알아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BIS라 어떤 기구인지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별 관련이 없기 때문에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BIS는 의외로 우리 삶과 직간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예컨대 금융기관 종사자들은 BIS 자기자본 비율이라는 규제정책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비율 때문에 금융기관들의 영업활동이나 손익이 큰 영향을 받기도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97년의 우리나라 경제위기도 이 자기자본 비율과 상당 정도 관련이 있다. 일본의 은행들은 1998년에 제정된 이 규정을 1990년대 초부터는 지켜야 했는데, 이것이 주변국들의 유동성 축소, 나아가 경제위기에 영향을 준 것이다. 무엇보다 BIS는, 여러 단계를 거치기는 하지만, 우리의 자산가격, 특히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주고 있다. 자산가격은 중앙은행의 금융정책, 감독기구의 규제정책, 그리고 글로벌 자본이동 규제정책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들은 모두 중앙은행의 은행이라 할 수 있는 BIS의 활동과 이러저러하게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가상자산의 미래마저도 그것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무관할 수 없다는 점에서 BIS의 영향권 속에 놓여 있다. 우리가 BIS를 알아야 하는 이유들이다.
저자는 국제결제은행의 기능과 본질이, 20세기 들어 성장하기 시작한 금융자본의 이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는 자본일반의 지배에서 금융자본의 지배로 넘어가는 문턱에 해당한다. 문턱을 넘어서서 금융자본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이제는 이 금융자본의 이해와 운명을 같이하는 초국적 금융자본 계급이 탄생한다. 이 계급의 이익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조직이 BIS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BIS가 여러 나라들에 적용되는 통일적인 정책을 직접 수립하지는 않는다. BIS는 중앙은행들의 단순한 친목 모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BIS는 그렇게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BIS는 내부적으로 중앙은행들 사이에서 위계를 철저하게 세우면서도 동시에 초국적 금융자본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금융정책들이 수립될 수 있도록 조율해왔다.
BIS는 자기의 이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크게 보아 두 가지의 특징적인 행태를 발전시켰다. 첫째, 비밀주의 행태이다. BIS는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비밀주의를 유지해 왔다. BIS는 여러 나라들에서 수집한 통계자료나 분석보고서 등은 공개하지만 이사회나 여러 위원회의 회의록, 중앙은행들이나 국제기구들과 거래한 내용 등 핵심 사항은 지금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둘째, 기술관료적인 전문가주의를 강조하는 행태이다. BIS의 여러 활동이나 정책은 매우 정치적이다. 그럼에도 BIS는 자기의 활동을 정치와 거리가 먼 전문가들의 기술적인 일 처리로 포장해왔다. 그러나 저자는 BIS의 정치적 독립성, 그리고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개념이 초국적 금융자본 계급이 자기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BIS 개혁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최소한 이러한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BIS에 대해 비밀주의를 폐기할 것과 정치적 독립성을 선출된 권력에 의한 민주적인 통제로 대체할 것을 주장한다.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중앙은행 독립성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금과옥조로 간주하는 주장을 자주 듣는다. 중앙은행 정책은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는 영역이지 일반인들이나 정치인들이 따따부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주장도 듣는다. 실제로 우리나라 정당들은 중앙은행의 정책에 대해 발언을 매우 꺼려 한다. 어쩌다 정치인이나 정당이 중앙은행 정책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는 주류 언론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러한 중앙은행의 정치적인 독립성 개념이 금융자본 계급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선출된 권력이 중앙은행을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 개념은 다차원적이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정치적인 독립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앙은행 독립성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독립성 외에도 다른 차원의 독립성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한국은행이 정부에게서는 독립적이지만 미국 연준에게서는 독립적이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곧, 한국은행이 외국 중앙은행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의 독립성 개념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은행이 시장의 영향력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의 독립성 개념도 있다. 유명한 중앙은행 연구자이자 과거 미국 연준 부의장을 역임한 앨런 S. 블라인더는 이러한 독립성 개념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필요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의미의 중앙은행 독립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은행을 장악한 외국계 자본, 은행에서 대규모로 자본을 끌어다 쓰는 건설업자, 재벌기업, 그리고 자산가 등에게는 한국은행이 정부나 정치에서 독립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 더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 대중의 이익과 관련해서는 한국은행이 연준에서 독립하는 것, 시장에서 독립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다수 대중에게는, 중앙은행이 정부나 정치에서는 독립해 있지만 시장 권력이나 연준 정책에 종속되어 있을 때가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현재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듯하다. 우리가 올바른 중앙은행 독립성 개념을 정립하고 중앙은행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고민 지점을 짚어주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