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세계의 명수필 50선
저- 소광선 엮음
출- 을유문화사(1998.10.15. 350쪽)
독정-2019. 9. 15.일
<뒷모습>-주자청
지금도 내 가슴을 허비는 것은 아버님의 그 뒷모습이다. 나를 기차에 앉혀놓고 귤을 사러갔을 때 내 눈물이 아버지께 들킬까 두려웠고 또 남들이 볼까 두려웠다. 내가 바깥쪽을 봤을 때 아버지는 빨간 귤을 보듬고 이쪽으로 오셔 철도를 다시 건널 때 이번에는 귤을 땅ㅊ에다 놓더니만 먼저 서서히 기어 내려서는 다시 그 귤을 보듬고 뚱그적거리고 오는 것이다. 이쪽으로 겨유 기어오르셨을 때 얼른 가서 부축해 드렸다. 같이 찻간에 올라 귤을 내 오버 위로 와르르 쏟았다. 아버지는 흙 묻은 옷을 털더니만 한숨 놓는 말소리로 “나 간다. 도착하는 즉시 편지하렴.”하셨다. 승강구를 뛰어 내려 몇 발을 옮기더니만 또 뒤돌아보며, “들어가라. 네 자리 살피렴.” 하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고가는 인파 속에 파묻히자 다시 찾을 수 없었다. 내 자리로 돌아와 앉자 눈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내렸다.
<참새>-이반 트루게네프
부리가 노랗고 머리 위에 솜털이 난 새끼 참새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보금자리에서 떨어진 것이었다.(바람은 모질게 불어 자작나무를 흔들고 있었다) 새끼 참새는 몸을 움추린 채 아직 부실한 날개를 함부로 치고 있었다.
개가 새끼 참새 있는 데로 가까이 이르렀을 때, 돌연 곁에 서 있는 나무 위애서, 목이 까만 어미 참새가 개의 코앞에 마치 돌멩이처럼 날아 내려왔다. 전신을 벌벌 떨면서, 가엾게도 절망적 부르짖음을 외치고, 흰 이빨이 드러나 보이는 개의 입을 향해 두세 번 날면서 덤벼들었다. 그느 구원해 내고자 자기의 몸으로 새끼를 감싸 준 것이었다. 작은 몸뚱이는 공포로 벌벌 떨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쉬어 있었다. 공포에 떨면서도, 그는 자기 몸을 내던졌던 것이다. 그의 눈에는 개가 굉장히 큰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안전한 높은 가지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의지보다도 강한 힘이 그를 날아 내려오게 하였던 것이다.
<로사리오의 사슬>-나가이 다카시
· 가족의 옷은 전부 아내의 수제품이었다. 양말에서부터 와이셔츠에 가기 . 그걸 보고 연구실 아가씨가 “선생님은 낮에도 사모님에게 안겨 있군요.”했다. 아내는 갠 날엔 거름통을 메고 밭에서 일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바느질이랑 뜨개질로 일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이야기를 걸어오면 대답은 한다. 밥이 나오면 먹기는 한다. 아이가 울면 노려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잉크 냄새 나는 활자가 내 이름을 찍어놓은 그 페이지, 그것은 전문 용어로 가득 차 읽어도 이해 못하는 문장이다. 그것은 몇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것이지만 그 속에 남편의 생명이 마치 가다랭이 포처럼 깎여 들어 차있는 것을 아는 아내는 눈시울까지 적시면서 익어가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나는 아내 대신 어린 것을 안고 어르면서 잠시 가슴속에 온천물이 솟아나는 것 같은 생각에 잠겨 있다. 우리 집의 행복한 시간, 그것은 일요일 아침 모두 함께 성당에 미사 참례하러 가는 대였다. 나는 큰아이 손을 끌고 아내는 작은아이를 업고 밭둑길로 언덕 위 빨간 벽돌 성당에 간다. 종각에서는 우리를 부르는 종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진다.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나와서 같은 길에 합류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비쳐드는 아침햇살의 물결 속에 앉아서 내 목소리도 아내의 목소리도 더듬거리는 어린 것 목소리도 옆자리에 앉는 늙은 농부의 탁한 목소리도 하나가 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를 찬미해 올렸다. 그런 행복한 날은 이제 나에게는 오지 않는다. 나카무라 군은 왼손에 토마토를 올려놓고 오른손에 오이를 쥐고 그걸 난자와 정자로 가정하여 바짝 갖다 댔다가 떼었다가 하면서 계속 설명을 하면서 덥석덥석 베어 먹었으므로 어느 틈에 난자도 정자도 위장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좁은 뜰을 향해 나 있는 안방에서 셔츠에 다림질을 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5년 후 나는 연구실에서 방사선의 장해를 받아 백혈병에 걸렸다. 병세가 차츰 진행하여 공습경보가 내려 무거운 철모를 쓰거나 하면 다리가 비틀거릴 정도였다. 그 다음날 원자 폭탄이 내 위에서 폭발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환자의 구호에 바빴던 다섯 기간 뒤 나는 출혈로 밭에 쓰러졌다. 그때 아내의 죽음을 직감했다. -아내가 끝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흘 후 집에 돌아갔다. 온통 잿더미였다. 나는 금방 발견했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탈대로 타버리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곁에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이 남아 있었다.
불에 탄 양동이에 아내를 주워 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걸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갔다.
<질투> 프란시스 베이컨
가까운 친족이나 동료, 같이 자라난 사람들은 상대방이 출세하면 그것을 질투하기 쉽다. 왜냐면 그것은 그들의 불운함을 늘 절실히 느끼게 하고 그것이 멸시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서 자꾸 상대방의 출세가 기억에 떠오르고 다른 사람에게도 눈에 띄게 되기 때문이다.
·질투는 평지보다는 둑이나 급격히 솟아오른 당 위에 한층 따겁게 쪼이는 햇볕과 흡사하다. 같은 이유로서 순차적으로 승진하는 자는 급히 비약적으로 승진하는 자만큼 질투를 받지 않는다. 큰 노력과 심로와 위험을 수반한 명예를 얻은 자는 그다지 질투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힘들여서 그 명예를 얻은 것을 생각하고 때로는 동정까지 하는 수가 있다 그리고 동정은 언제나 질투심을 완화한다. ‘이 얼마나 우리는 고생했는가’는 질투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서다.
<꿈 속의 아이들>- 하나의 환상- 찰스 램
할머니는 고을 어딘가에 사둔 보다 새롭고 유행에 맞는 저택에서 살고자 했던 주인이 위탁을 해서 그 저택의 관리를 맡으셨을 뿐이다. 시저의 흉상을 혼자서 몇 시간이고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오래된 대리석 머리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고 내가 그들과 함께 대리석이 되어 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오렌지 재배 온실에 들어가 햇빛을 쬐고 있으면 그 포근한 온기 속에 오렌지와 라임 열매들이 익어가듯이 나 자신도 따라 익어가는 환상이 들기 까지 했다.
물속 황어들이 자발(행동이 가볍고 참을성 없이)없이 나댄다고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주고 곧장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총각 신세로 안락의자에 앚아 있다.ㄱ 거기에서 잠이 들었던 것이다.
<도토리> 데라다 도라하코
·앞섶 속에 손을 넣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쓸쓸한 뜰을 둘러본다. 지난 가을에 시든 국화가 쓰러진 채 처량하게 썩고 있다. 거기에 종이조각인지 무엇인지 걸려서 바람도 없는데 차갑게 떨고 있다.
“마음이 증발해서 아지랑이가 돼 버릴 것 같은 날씨지?”
도토리를 주워 지붕으로 던지니 또글또글 소리를 내며 뒤쪽으로 굴러 떨어진다. 손수건을 꺼내어 무릎 위에 펼쳐 두고 열심히 주워 모은다. 도토리를 주우며 기뻐하던 아내는 이제 없다. 무덤을 덮은 흙에 이끼꽃이 몇 번이고 피어서 졌다. 산에는 도토리도 ?떨어지고, 직박구리새 우는 소리에 낙엽이 진다. 아내가 남기고 간 어린 것을 데리고 식물원에 놀러 와서 도토리를 줍게 했다. 수확이 불어가는 것을 들여다보고 볼이 빨개져 가지고 기뻐하며 녹아 버릴 듯한 얼굴을 한다. 어김없는 제 어미의 모습이 천진한 얼굴 어느 구석에선지 살짝 내비치며, 희마해져 가는 옛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아빠, 커다란 도토리, 요거, 요거, 요거.......모두 큰 거지.”
흙투성이가 된 쬐그만 손가락으로 모자 속에 가득한 도토리의 머리를 하나하나 콕콕 찔러 본다.
“커다란 도토리, 꼬마 도토리, 모두 모두 착한 도토리들이...... .”
엉터리 노래를 부르며 나풀나풀 뛰면서 또 줍기 시작한다.
<먼지와 땀으로 산 책들>-조지 기싱
· 30년 동안이나 읽고 또 읽은 책인데 그것을 펼치면 반드시 그 페이지의 고상한 향기가 그 책을 내가 상으로 받던 순간의 그 의기양양하던 행복감을 고스란히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책을 발견하고, 더구나 값이 싸게 붙여진 것을 보고는 그대로 놓칠 수가 없어서 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그것을 산다는 것은 곧 굶주림의 고통을 의미했던 · 야생동물들이 들판을 가로지르기 위해 취했던 발자국들이요. 꼬불꼬불한 길들은 사람을 결코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고유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고유의 영혼이 있다. 한 거리에서 또 한 거리로 접어들면 여럿이 함께ㅐ 여행하는 것 같고, 여러 친구와 어울리는 것 같다.· 사실 어느 누구도 정월 초하루를 무심히 보내지 낳는다. 이날을 기점으로 누구나 자기의 시간을 셈해 보고 남은 날을 헤아린다. 이날이 우리 인류 공동의 생일인 것이다. 모든 종소리들, 그건 천계에 가장 가까이 임하는 음악인데 그 중에서도 제야의 종소리를 가장 엄숙하고 감동적이다. 그 종소리를 들을 때는 나는 언제나 지난 열두 달에 걸쳐 흩어져 있는 모든 영상들- 가 아쉬운 기간 중에 내가 행하거나 당했거나 이루었거나 등한히 한 모든 일을 응축시키는 데에 마음을 모두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죽을 때 그의 가치를 깨닫듯 나는 가버린 시간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가버린 시간은 인간적 색체를 가지게 된다.
<오래 된 도자기>찰스 램
· 돈이 여유가 생기니 물건을 사는 것도 그저 궁비에 불과할 뿐이야. 전에는 물건을 사는 것, 그것은 하나의 승리의 기쁨이었지. 물건을 사고 비축한 돈의 귀중함을 느끼던 그 시절에는 한 가지 물건을 사면 그만큼 보람 있게 느껴졌다. 자네는 그것을 꾸려 들고 오면서 귀찮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무게가 갑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 15실랑도 못 되는 돈을 쓰고서 사온 그림을 보고 돈을 생각하고 돈을 생각하고 나서는 다시 사온 그림을 쳐다보곤 했던 시절만 해도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 기쁨이 없었겠나? 이제 레오나르도 그림 복사 몇 장이라도 살 수 있게 되었ㄴ제. 하지만 그때 같은 기분이겠냐? 우리가 자라며 고생을 많이 한 대 대해 크게 감사할 이유는 우리의 우의를 돈독하게 해주고 한층 더 긴밀하게 해주기 때문. 옛 시절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누님과 내가 하루 30마일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
<파리>-구양수
파리야,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슬퍼한다. 벌이나 전갈의 독침도 엇고 모기나 등에의 날카로운 부리도 없어,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으니 천만 다행이리지만 기왕이면 왜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가? 너의 몸집이 지극히 작으니 너의 욕심도 또한 별게 아니어서, 잔에 묻은 술이나 국그릇에 남은 국물이나 쟁반에 남은 생선 비린내 정도로도 속하겠구나. 음식을 하는 기미만 보여도 쫓아다니고 냄새만 나도 용케 찾아 이르지 않는 곳이 없구나. 삽시간에 모여드니 누가 일러주더냐. 서로 연락하는 거시야? 비록 몸은 작지만 해가 됨은 크다. 그릇과 접시에 엉겨 붙고 식탁에 진을 치고 술에 취하며 뜨거운 국물에 빠져서 목숨을 잃고 만다. 탐욕을 부리다 죽었으니 후회야 없겠지만 탐욕이 어?던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아서 경계를 삼을 만하구나. 한 번 음식에 입질해서 더럽히면 사람들이 모두 먹으려 들지 않으니 탈이다. 육장이나 젓갈 같은 것은 일정 기간 동안 저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항아리 뚜껑을 단단히 봉해야 하는데, 그것은 파리가 때로 몰려 들어서 여럿이 합세해서 공격하고 온갖 방법으로 틈을 엿보기 때문이다. 커다란 편육, 살진 고기며 싱싱한 생선 같은 맛있는 것에 이르기까지 뚜껑에 틈이 생기거나 지키는 사람이 혹시 어렴풋이 졸기라도 하면 번번이 쉬를 쓸어서 수없이 번식한다. 너를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신에 비유하여 풍자한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야심은 명성보다도 사람을 도취시킨다. 욕망은 모든 것을 꽃피게 하고 소유는 모든 것을 시들게 한다. 인생은 살기보다 차라리 꿈꾸는 것이 낫다.-마르셀 프루스트
<유리창 안에서>-나쓰메 소세키
유리창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겨울 채비 지푸라기로 싼 파초며 빨간 열매를 맺은 나도매화나무 가지하며 아무렇게나 우뚝우뚝 솟아 있는 전봇대 따위가 곧바로 눈에 띄는데, 그밖에는 특별이 이름을 들 만한 것은 없다. 서제의 나의 안계(眼界-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범위)는 적이 단조롭고 협착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나는 지난해 연말부터 감기에 걸려 거의 바깥출입을 않고 날마다 이 유리창 안에만 웅크리고 있으니 세태의 변화를 알 까닭 없다. 기분이 안 내키니 독서도 흥미 없고 그저 앉았거나 누웠거나 하며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나의 두뇌는 대대로 움직이고 기분도 조금은 변화를 보인다. 광활한 세계를 격리시키기 있는 이 유리창 안에도 대대로 사람이 찾아온다. 뜻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내가 미처 생각도 못했던 사건들을 가지고 오기도 한다. 흥미에 찬 눈으로 그들을 맞이하기도 하고, 그저 덤덤히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여기 조금씩 써 볼까 한다.
<물레>-데라다 도라히코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이는데 자신이 죽는다는 것만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계속 쓰러지는 걸 보면서도 자기만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까요?”“있고 말고요. 죽을 때까지는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자가 추락하여 죽었다면 나만은 끄덕 없지 하는 기분이 되지요.”
· 물레의 추억에 얽힌 어린 시절 전원생활의 기억은 내가 가난한 사족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자랐다고 하는 아무런 자랑거리도 될 수 없는 이 일이 세상에 다시 없는 행운인 것처럼 느껴진다.
<마을> 헨리 소로
나의 외부는 완전히 닫아 버리고서 사색이라고 하는 유쾌한 선원들과 함께 선실로 들어간다. 어느 때고 숲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고 놀랍고도 기억할만한 경험이다. 그것이 시베리아로 가는 길인 양 낯설기만 하다. 하찮은 길에서도 우리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항해사처럼 늘 잘 알고 있는 등대나 곶을 표적으로 하여 방향을 잡는 것이고, 우리가 흔히 가는 길을 벗어날 경우에도 우리는 언제나 근처의 어느 곶의 위치를 마음속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길을 잃거나 한 바퀴 빙 돌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이 이 세상에서 길을 잃으려면 눈을 감고 한 바퀴 빙 돌면 되니까-우리는 대자연의 거대함과 신비로움을 올바로 인식한다. 잠에서 개어나건 방심에서 깨어나건 누구나 그때마다 나침반의 방위를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세계를 잃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 위치와 우리 관계의 무한함을 깨닫게 된다.
< 러시아의 숲과 초원>-이반 투르게네프
빛나는 햇살이 물줄기처럼 퍼지고 가슴은 참새처럼 들먹이기 시작한다. 그 상쾌함, 그 즐거움, 그 아름다움, 멀리까지 주위가 환히 트여 보인다.
다소 싸늘한 느낌이 감돌아 외투깃 속으로 얼굴을 파묻는다. 하늘이 밝아지며 구름이 흰 빛을 뜨기 시작하고 들판은 초록빛으로 물든다. 농가에선 관솔불이 빨갛게 타오르고, 문 뒤에서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사물들이 빛난다.
이슬에 젖은 덤불을 헤치면 밤새 쌓이고 쌓였던 훈훈한 밤 향기가 확 퍼져 나온다. 공기는 쌉쌀하면서도 신선한 쑥 냄새와 메밀과 클로버의 달콤한 냄새를 담뿍 들이마시고 있다. 먼 곳에는 자작나무 숲이 성벽처럼 우뚝 솟아서 햇빝 아래 빛나며 벌겋게 물들고 있다. 주위의 공기가 바르르 몸부림친다. 주위의 공기는 유난히 투명해서 마치 유리 같다. 먼 곳은 부드러우면서 따사로운 수증기로 깔려 있다. 조금 전만 해도 금빛으로 넘쳐 흐르던 수풀 속의 공기는 이슬과 함께 진흥빛으로 물든다. 나무와 덤불과 건초더미로부터 기다란 그림자가 달린다.
해는 저물었다. 별 하나가 점화되어 불바다를 이룬 저녁놀 솔에 바르르 떨고 있다. 이윽고 불바다도 자취를 감추고, 주위는 어슬어슬 어두워 온다. 오른쪽 아래쪽 마을의 등불이 반짝인다. 드디어 농가로 돌아온다. 창문 너머로 흰 상보를 깐 식탁이며, 불타는 촛대가 보인다.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가슴은 평화롭게 숨을 쉬지만 이상한 불안이 마음속을 스친다. 숲 가장자리를 따라 개 뒤를 쫓고 있노라면, 기룬 모습, 얼굴, 죽은 사람, 산 사람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상상은 새처럼 날개를 펴고 날아다닌다. 강에서는 푸른 물결이 즐겁게 달리면서 태평스러운 거위와 오리들을 율동적으로 흔들어놓는다. 멀리 버드나무에 반쯤 가려진 물방앗간에서는 방아 찧은 소리가 들려오고, 그 위에선 비둘기들이 맑은 공중에 알록달록 무늬를 그리면서 날쌔게 맴돌고 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정원이 들여다보이는 집을 지난다. 이 마을 저 마을, 끝없는 들판을 지나 푸른 대마밭을 끼고 하염없이 자구만 간다. 가치들이 버드나무에서 버드나무로 날아다닌다. 깊은 골짜기 위에 걸쳐 있는 낡은 다리. 얼음이 녹은 땅 위에서는 기울어진 햇빛을 받으며 종달새가 마음껏 노래하고 계곡의 급류는 즐겁게 아우성을 치며 골짜기 골짜기로 기운차게 흘러내린다.
<연꽃>-주돈이
물과 뭍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무에 피는 꽃 가운데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런데 진나라 도연명은 그 많은 꽃 가운데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모란을 사랑했다.
하지만 나는 연꽃을 사랑한다.
연꼿은 더러운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며, 맑은 물결에 남실남실 씻기어도 조금도 요염한 빛이 없다. 속은 텅 비어 욕심을 비운 사람 같고 겉은 항상 꼿꼿한 몸가짐으로 서 있으며, 서로 얼기설기 얽혀서 넝쿨지는 일도 없고 가지를 무성하게 사방으로 뻗어 세력을 확장하는 일도 없다. 은은한 향기는 멀수록 오히려 맑은데, 게다가 언제나 정결하게 우뚝 서 있는 모습에 위엄이 서려 있으니 멀리서 우러러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서 어루만지며 합부로 대할 수는 없다. 연꽃은 높은 인품을 지닌 군자와 같은 꽃이라고나 할까?
<달밤>-주자청
중략, 연못을 따라 꼬불꼬불한 샛길이 열려 있다. 대낮에도 한적한 길인지라 지금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다. 사면으로 둘러진 빽빽한 나무가 유독 검푸르고 길가에는 버드나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열을 지어 있다. 달빛이 없었더라면 털끝이 오싹할 만큼 음산하겠다. 그런 길이 오늘밤엔 쾌적한 느낌이다. 담담한 달빛 아래. 엉뚱한 별세계에 나만 뚝 떨어져 온 것 같고 나는 소요를 즐긴다. 정적도 사랑한다. 외로움도
달빛은 흐르는 물처럼 고요히 연꽃과 연잎에 쏟아지고 있다. 얇디얇은 파란 안개가 연못에서 으스스 일어난다. 잎사귀와 꽃은 마치 우유에다 멱 감은 듯 보얗게 아롱져 있고, 어쩌면 가벼운 면사(綿絲: 솜에서 자아낸 실. ‘무명실’로 순화.)에 가리운 꿈처럼 몽롱하다.
<꽃에 관하여>-원광도
(꽃의 목욕)
꽃을 목욕시키는 법은 맛이 달고 맑은 샘물을 쓰되 물방울을 가늘게 뿌려서 마치 가랑비에 취한 술이 깨고 맑은 이읏레 갑옷이 젖듯이 해야 한며 손길로 맞닥뜨리거나 손가락으로 부더뜨려도 안 된다.
매활ㄹ 목욕시키는 것은 은사(隱士:예전에, 벼슬하지 아니하고 숨어 살던 선비)가, 해당화는 운치를 아는 손님이, 작약은 곱게 단장한 묘령의 소녀가, 석류화는 얼굴 예쁜 어린 아이가, 계수화는 깨끗하고 영리한 아이가, 연꽃은 얼굴이 해사한 첩, 국화는 예스러운 이가, 남매는 얼굴이 밝고 마른 스님이 적당하다. 그러나 겨울 꽃은 목욕을 견디지 못하므로 가벼운 비단으로 싸 주어야 품격이 유지되고 산뜻한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며 수명도 길어지는데 어찌 윤기만 흐를 뿐이랴!
차를 곁들여 꽃을 감상하는 것이 최상이요. 이야기를 나누며 감상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꽃의 품(品))
깊은 산골짜기에 있어서 소문을 들을 수 있어도 구경할 수 없는 꽃은 명품이요.
무성한 숲속 아름다운 골짜기에 있어서 가까이 할 수는 있어도 친할 수 없는 꽃은 은품이다.
선선(禪-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히 생각하는 일)은 해탈하는 것을 목표하므로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도 좋지만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무궁화나 아침에 봉오리가 벌어졌다가 저녁에 오므라드는 원추리도 그 본성에 맞는다.
<대(竹)를 사랑하는 마음 >–스스키다 규킨
장마철이 긑난 뒤의 청자빛 하늘 아래에서 마음껏 가지와 잎을 뻗고 생명을 뻗쳐서 밝은 햇빛과 산들바람의 애무 속에 들떠 서성대던 어린 대도 시월의 아침 저녁나절 차가움이 몸에 스미게 되면 그 생활과 모습 위에 어느새 고요한 사색과 한적한 한 가닥 차가운 냉기가 역력히 나타나게 됨을 어쩔 수가 없다. 여린 대 잎에도, 그 하나하나에 약간의 꿋꿋함이 깃들고 가벼운
바람결에도 쓸리는 잎새 소리가 사각사각 울리게 된다.
“대竹가 있으면 사람이 속되지 않거든.”
거실로 삼았던 소속누실을 만들 때에도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앞뜰에 대를 심기를 잊지 않았다.
<아름다움>-랠프 에머슨
인간의 한층 고상한 욕망이 자연으로써 만족된다. 즉, 미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것이다. 눈이 가자 우수한 구상자인 것과 같이 광선은 화가 중 제일의 화가다 . 아무리 누추한 물상이라도 강렬한 빛을 받아서 아름다워지지 않는 것은 없다. 강렬한 광선이 오관에 주는 자극과, 그것이 공간과 시간만큼이나 갖고 있는 일종의 무한성은 모든 물상을 화려하게 만든다. 상인이나 변호사는 거리의 소음과 장사에서 벗어나 하늘이나 숲을 바라 볼 때 다시 인간이 된다. 하늘이 숲의 영원한 고요 속에서 그는 자신을 발견한다. 눈의 건강에는 지평선이 필요한 모양이다. 먼 저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고달프지 않다. 언덕 꼭대기에 서서 새벽부터 해가 뜰 때까지의 아침 경치를 바라볼 때 천사도 같이 느끼는 듯한 정서를 체험한다.
나는 겨울 풍경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하늘은 순간마다 변화한다.
<옛 전쟁터에서>-이화
모래벌은 넓어 끝이 보이지 않고, 멀리 바라보아도 사람은 그림자조차 찾을 길이 없다 . 황하는 디를 두른 듯 구불구불, 산들은 첩첩, 사방은 어둑어둑 슬픔에 싸여 있다. 바람은 스산하고 해는 저문다. 쑥대는 바람에 꺾이고 풀은 말라, 세상은 서리 내린 새벽처럼 차디차니 하늘을 나는 새들조차 내려앉지 않고 짐승들도 무리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다.
그대 소 관리인이 내가 말하기를 이곳은옛 전쟁터인데 예전에 많은 군인이 죽어 흐리거나 비 오는 날 밤이면 가끔 귀신 울음소리가 들린단다.
그런데 진나라는 만리장성을 쌓고 바다 끝에다 관문을 만들어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그때 백성들이 받은 고통은 마치 씀바귀를 씹은 듯, 독충에 물린 듯 혹독하였고, 만리 장성은 백성들의 검붉은 피로 얼룩졌다고 한다.
<정년 퇴직자>찰스 램
어디에 기대했던 휴식이 있었던가? 그것은 내가 맛보기도 전에 사라졌고,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똑같은 짧은 휴가가 있기까지 기여 있기 마련인 51주일을 꼬박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휴가가 돌아온다는 기대는 유폐된 어두운 생활에 밝은 빛을 던져 주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나는 내 노역을 배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밤새 다시 일을 하고, 회계 잡부에 기장이 잘봇된 것은 아닌가, 계산 착오는 없었나 하는 따위의 걱정으로 잠을 깨곤 하였다. 퇴직하여 처음 이틀 동안은 행복을 붙잡았을 뿐 너무 어리둥절하여 진정으로 맛볼 수 없었다. 사람이 시간을 온통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나는 주체할 수 있는 시간 이상의 시간을 수중에 넣고 있는 기분이었다. 시간에 궁한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서 거창한 수입이 있는 처지로 갑자기 끌어올려 진 것이요. 내 소유의 한계를 알 수도 없이 내 대신 시가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한 관리가 필요할 판이다. 서둘러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일요일이란 일요일은 다 가지고 있지만 이를 즐기려고 서두를 필요가 ㅇ벗다. 시간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산책으로 몰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옛날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던 일요일에 그날을 최대로 이용하려고 하루에 30마일을 걷든 온종일 걸을 필요가 없다. 이젠 기쁨을 좇지 않고 기쁨으로 하여금 내개 오도록 한다. 여러 시간을 그렇게도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이 내게 죽은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때 누렸던 흔쾌한 친밀감이 회복되지 못하고 우리들 사이에 묶여 있는 끈을 우지끈 끊어버린 것이다. 이제 엄격한 독방 수도 생활에서 어던 혁명으로 인해 갑자기 세상으로 귀환한 불상한 신세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이 늘 있어 왔던 일처럼 여겨진다.
대는 장날인데 이상하게도 즐비하게 늘어선 석상들 가운데에 서 있다. 내 처지의 변화를 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다. 어떤 의미로는 시간이 멎어 있다. 계절의 차이를 모두 잃었다. 어떤 의미로는 시간이 멎어 있다. 계절의 차이를 모두 잃었다. 요일도 모르고 날짜도 모른다. 전에는 하루하루가 아직 겪지 않은 생소한 날들에 관련되고 다음 일요일도 멀고 가까뭄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느껴졌었다. 수요일의 느낌이 달랐고 토요일 저녁의 흥분이 있었다. 온 주일의 요일 하나하나의 특징이 내개는 분명했고 구미와 기분 등에 영향을 주었다. 주말가지의 그 다분한 닷새를 보낼 월요일 날의 무슨 마력이 그 검정색을 하얗게 표백했단 말인가? 그 잿빛 월요일은 무엇이 되었는가? 모든 날이 한결 같다. 일요일-덧없다는 아쉬움, 최대의 기쁨을 얻어 내려는 지나친 걱정 따위로 번번이 실패한 억울한 휴일이었던 그 일요일 자체가 녹아내려 평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몸져 누워 있는 친구를 찾아갈 수도 있고, 일에 골몰해 있는 친구를 찾아가 그것도 가장 바쁜 시간에 훼방을 놓을 수도 있고 이 5월의 화창한 아침에 가서 함께 하루를 즐기자고 일하는 사람을 무안하게 할 수도 있다. 돌려도 돌려도 끝없는 연자매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 방앗간의 미소 같다. 한데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해서인가. 사람이간 자신에게 시간이 많이 줄수록, 할 일이 ㅇ벗으면 없을수록 좋은 것 아니가? 낵 어린 자식이 있다면 그에게 불유노작이란 세례명을 붙일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사람은 활동하는 한 사람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나는 전적으로 명상적 삶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미 텅 빈 얼굴, 태평스런 거동, 일정한 걸음걸이로 정해진 목적도 없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재)-미셀 몽테뉴
서재는 원형으로 새겼고, 내 책상과 의자가 놓일 만큼만 네모로 되어 있다. 내 자리를 향해 삥 돌아 워형을 이루어 내 둘레로 다섯 층에 꽃힌 책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서제는 3면으로 풍부하고 광활한 전망을 가지고 있다. 실내에는 직경 16보의 공간이 있다. 겨울에는 나는 여기에 다른 때만큼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는 자기 집에 자기로 돌아가 있을 곳, 자기 한 사람만의 궁전을 차릴 곳, 몸을 감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신세가 참으로 비참하다.
<악수론>- 엘프레드 가드너
악수는 서로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악수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예의상 부득이 한동안만 쥐고 있다가 살며시 그것을 피커에게 돌려보낸다. 그러면 그는 다른 누군가에, 말하자면 자기 손에서 그것을 가져가도록 하기 위하여 떠난다. 어리석게도 손을 그에게 빌리기만 한다면-아파서 뼈가 이지러질 정도로 쥐고서 어깨에서 거의 빠질 정도로 팔을 흔들어낸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이 내 인격입니다. 내게 미지근한 점은 조금도 없습니다. 철저한 요크셔인입니다. 그에게 반환됐을 대의 손의 아픔이란 눌려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작별할 때엔 두 번 다시 손을 그에게 주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런가 하면 부들부들하고 머뭇거리는 손이 있다. 지나치게 애졍이 차서 언제 손을 떼야 할지 모르고 창밖으로 내팽개치고 싶을 때까지 상대방 손바닥에 놓여 있다. 그러나 비록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손, 몸부림치게 하는 손이 있긴 하지만 이 악수의 의례는 우리들이 때대로 벌금을 지불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무지의 기쁨> 로버트 린드
뻐꾸기는 하늘로 날 때만 우는가? 나뭇가지들 사이에서고 가끔 우는가?
무지의 큰 기쁨은 결국 질문을 하는 기쁨이다.
소크라테스가 지혜로 명성이 자자한 것은 그가 전지하였기 때문이 아나라 칠십 고희의 나이에 아직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란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부끄러운 아버지들>-로버트 린드
어린이의 초대를 거절하기란 어렵다. 학기말의 학예회에 나와 달라는 것일지라도 쑥스러워 변명했으나 조카애는 입을 뽀로통 내밀고 말했다.
“어른들은 모두 그러는가봐. 엘리자베스도 그랬어. 아빠가 쑥스럽다고 한다고. 앤의 아빠도 역시 쑥스럽다는 거야. 그래도 앤은 꼭 아빠를 나오시게 만든대. 왜 아빠들은 그렇게 부끄럼을 타지? ”아빠들에 대한 걸 내가 알 수가 있나?‘ 하며 조카에게 대꾸했다.
“다만 아저씨로서 대답할 수가 있을 뿐이지.”
“그럼 아저씨들은 왜 부끄럼을 타지?”
실토하지만 이 한마디에는 꼼짝없이 지고 말았다.
“그래, 부끄럼 타는 아빠들과 함께 가겠다.”하고 말해 주었다. 나는 솔직히 쑥스러워하는 아버지들이 꽤 많이 거기 기다리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부끄러움의 ‘부’자도 모른 여성과 어린이들 무리 한가운대에서 달리 남성이란 아무도 없는 널찍한 교실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부끄럽다. 뭐 여성인 어린이들과 사귐이 싫다는 건 아니나 베이컨도 말했듯이 여성과 아이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인 남성의 고독감은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서의 고독보다 더하다.
아이들은 사실 자기 아버지보다 어떤 면에서건 훌륭한 다른 아버지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믿기 싫어한다.
“그 사람, 아빠만큼 훌륭한 천재야?”
꼬마 아가씨가 물었다.
“어렵쇼, 날 천재라고 부르면 안 돼!”
“난 아빠를 천재라고 생각해.”
하고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난 천년을 산대도 <활이여> 같은 시는 못 써. 난 그보다 오 보나 보나 족이 더 좋은 걸.”하고 그녀는 그가 쓴 형편없는 정치시의 첫 줄을 인용해 말했다. 그의 아이가 오랫동안 아버지를 신으로 잘못 알고 있을까 해서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아버지의 참모습을 알게 되는 과정은 느린 것이겠지만, 그것은 조금씩 쌓여 가는 것이며 확실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이의 학교 친구들의 비판의 눈초리 앞에 나서 달라고 하면 갑자기 쑥스러워하고 신경 쓰게 된다. 그러나 그는 남의 아이의 눈이 자기 키를 몇 자 낮게 보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희심을 품고 있다. 부끄럼 타는 아버지가 두려워한 것은 주로 허영심에 상처 입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남의 아이들이 만약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을 언제나 갑절로 싫어하는 것으로 보관해 줄 수가 있다. 난 묘한 놈으로 보일거야 하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는 자기 아이가 우스운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을 매우 싫어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우스운 어버이와 함께 나타나는 것도 싫어한다. 자기의 친구 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장 축복받은 안도감을 느낀다. 초점이 안 맞는 농담이라든가, 요점ㅇㄹ 아무도 알 수 없는 농담을 듣고, 아빠는
또 실없는 소리하고 조그만 얼굴에서 그들이 보게 되는 초조한 표정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아버지를 염려해서 어린이가 떠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라. 걱정되어 떠는 아버지를 자신은 불쌍하다고 여기라. 친구들 앞에서 훌륭히 행세할 수 있는 아버지를 가진 아이는 행복하다. 또 어렸을 때, 그렇듯 난처한 경우에 자기 아버지가 멋지게 행세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좋았던가! 여느 때는 말 없던 아버지가 그럴듯한 농담을 하고 이야기책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자기의 경험담을 들려 주었을 때, 마음속으로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친구들의 얼굴이 활짝 피는 것을 보고 자기 얼굴도 확실히 환히 발아졌던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야기 한가운데에서 아버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쩔쩔 매니까 소년은 싱긋 웃으며 “아빠, 그만 하시죠!”한마디로 이야기를 딴 방향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여섯 살 꼬마들은 더욱 천진스런 완전에 가까운 나이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무대에 나타난 것 같았다. 온 세계 사람이 이처럼 인형 같은 키가 된다면
아저씨들에게는 단 한 가지 의무가 있다. 조카들에게 인기가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부탁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 엘프레드 가드너
쓸데없이 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한 푼도 없는 것을 알고서는, 나는 힘껏 정직한 얼굴을 꾸미고는 차장에게 요금을 치를 수 없으니, 돈 가지러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 내리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가시는 데까지 표를 끊어 드리겠습니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그는 어디든지 차표를 끊어 주려는 태도로 차표 뭉치를 손에 들었다. 그가 매우 친절하다는 말을 하고 목적지를 말했다. 그가 차표를 끊어 주었을 때 “그런데 이 요금은 어디다 보내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네 언제고 만나게 되겠습죠”라고 유쾌하게 말하면서 그는 발길을 돌렸다. 노인에 대해선 아들처럼 자상하고, 어린이들에겐 아버지처럼 마음을 썼다. 언제나 그들과 어떤 유쾌한 농담을 즐겼다. 만일 앞 못 보는 사람이 탔을 땐, 그를 안전하게 포도에 내려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운전대의 빌을 불러 기다리라고 소리 지르고, 맹인의 길을 건내주거나, 모퉁이를 돌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는 길로 안전하게 인도해 주곤 했다.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 신사를 공손히 점잖게 대우했더라면 그는 더 슬기롭고 효과 있는 보복을 했을 것이다 버릇없는 놈에 대해서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보람찬 승리다. 예의 바른 사람은 물질적 손실을 볼지라도 항상 정신적 승리를 얻는 법이다. 한 사람은 “나는 결코 악당에게 벽 쪽을 양보하지 않습니다.”했을 때 “난 언제나 양보합니다.”하며 머리를 숙이고 길 복판으로 걸어들었다. 진흙탕 속에 내던졌던 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이었음을 수긍할 것이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릴케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무 심는 사람 곽탁타 이야기>-유종원
나무의 본선이라는 것은 뿌리를 뻗고자 하고, 북을 돋울 때는 편편하게 해주는 것을 좋아하며, 흙은 본래부터 자라던 곳의 것을 좋아하며, 뿌리를 다질 때에는 꼭꼭 밟아서 흙이 뿌리에 잘 붙게 해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나무를 심는 법을 빌어서 관리가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로 삼으면 어떻겠는가?
나는 나무를 심을 줄만 알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나의 직업이 아니어서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시골에 살면서 수령들이 하는 것을 보니까, 번거롭게 명령을 내리기를 좋아하여 백성들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백성들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관리들이 마을에 와서 백성을 불러내어 상부 명령이라면서 밭을 갈라고 재촉하고, 심기를 힘쓰게 하며 거두기를 독촉한다. 우리 같은 소인배들은 아ㅊ미 저녁으로 음식을 차려서 관리들을 대접하기에도 정신이 없다. 그런데 언제 틈을 내어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나?
<삶과 죽음의 예지>-장자
소의 근육에 숨어 있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뼈와 살 사이에 있는 틈바구니를 도려내고, 뼈마디의 구멍에 칼을 넣어 근육 골절의 조직대로 각을 뜨니 내 기술이 여태까지 칼을 잘못 휘두른 적이 없다. 하물며 큰 골절에 칼을 건드릴 리 있겠나? 시선을 멈춰 자세히 보고 식칼을 슬며시 들이대면 흙덩어리가 땅에 떨어지듯 철컥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프랜시스 베이컨
세상에는 부모나 학교 선생이나 하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형제간에 어릴 때부터 경쟁심ㅇ르 일으켜서 기르는 어리석은 습관이 있다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불화를 가져오고 가정의 화목을 파괴하게 하는 수가 흔히 있다.
<비를 맞으며>알랭
고약한 비야 말한들 무슨 소요인가, 오 근사한 가랑빈데 하는 미소는 벌써 사람들은 덜 우울하고 덜 따분하게 만든다.
<느릅나무> 말랭
일꾼이 자루 굽은 나사송곳을 가지고 강철벽에 구멍을 뚫으려고 드는 것을 보았어. 느릅나무에 비하면 애벌레 작은 이빨질 하나가 숲 모두를 먹어치워 작은 노력을 믿고 벌레하고는 벌레가 되어 싸워야 해. 숱한 원인들이 자네를 도와주고 있어.
<위트와 유머의 차리>찰스 브룩스
위트가 냄새에 민감한 코를 가진 야원 생물체라면 유머는 따뜻한 눈매와 편안한 허리띠를 갖고 잏다. 위트는 때로 승부를 위해 악의를 쓸 때도 있다. 고양이처럼 도약에 빠르다. 유머는 반대로 안락의자 같은 평화를 간직한다.
음악에 비유하면 위트는 솔로일 때 빛을 발하고 유머는 코러스 속에서 최상의 음을 낸다. 빛에 비기면 위트는 번갯불 같고 유머는 대지를 내리 비추는 태양의 산광이다. 위트는 계절의 유행을 반영하고 하나의 말과 판단에서 정확하지만 유머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다반사에 관심을 쏟는다. 위트는 덫을 놓고 유머는 그 마음에 누굴 해칠 생각 없이 슬슬 휘파람을 분다. 좋은 세월 지나가면 위트는 쓴맛을 남기기 쉽지만 유머는 환경에 관계없이 흘러간다. 유머는 다른 사람의 농담에 따라 웃고 공감하지만 위트는 남의 농담에 대해 어떻게 맞받아 넘길까 하고 묵묵히 다진다. 위트는 아웃사이더에겐 생소한 좁은 동인그룹의 희원과 같다.
<결혼과 독신 생활>프랜시스 베이컨
처자를 가진 사람은 이미 운명에 인질을 비치고 있는 셈이다. 처자는 대사업에 장애물이다. 처자는 인간성을 수양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독신자는 자력의 소비가 적어서 볓 배나 더 자선적일 수 있지만 반면에 한층 잔인하고 몰인정하여 준엄한 심문관이 되는 것이 적당하다. 아내는 젊은 남자에겐 연인이고, 중년 남자에겐 반려자이고, 노인에겐 보호자이다.
언제 결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 젊은이는 아직 안 되고 나이가 들어선 아주 안 된다.”
<여자에게 여인상을 주라>데이비드 로렌스
여자는 남자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다르다면 여자는 한 여인상을 요구할 뿐이다. 내가 좇을 ㅇ인상을 주오. 이것이 한결같은 여인의 부르짖음이다.
남자가 당신을 차지한 순간, 전혀 다른 형의 여인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기 도련님상의 소녀와 결혼한 순간 곧바로 이번엔 순결하고 점잖으 귀부인형 아그네스를 갈망하게 된다. 그게 아니면 가슴 깊이 정을 담은 영원한 어머니형의 여인, 빈틈 없는 사업가형 부인, 아니면 바보 천치 같이 위의 여인상을 합친형을 동시에 탐낸다. 그리고 그것이 이성적 논리라고 한다.
삶의 현실은 부인들이 별 수 없이 남성이 바라는 여인사에 추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본을 따야 할 여인상을 제살 대, 여자는 최선을 다하게 된다.
<저작술>워싱턴 어빙
종이 위를 달리는 펜소리. 무겁고 큰 책을 들고 돌아오면 작자는 굶주린 듯이 탐을 내서 그 책에 달라붙었다. 철학가는 마음의 문이 다시 열렸을 때, 문을 나선 그는 인간에게 금지된 지식에 통달한 나머지, 중생들의 머리 위를 날고, 대자연의 힘을 좌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책을 대충 읽어 복, 사본의 책장을 펄렁펄렁 넘기고, 이 책에서 조금,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따왔다. 그의 저서의 내용은 마치 맥베스에 나오는 마녀의 큰 가마솥의 내용물처럼 잡다한 것같이 보였다. 여기에 집게 손라갈, 저기에 엄지, 개구리 발가락도 있고 가락 없는 도마뱀의 침도 있는데다가, 자기 자신의 잡소리를 비비의 피처럼 부어넣고 그 혼잡물을 찰지고 좋게 만들려고 했다.
지식과 지혜의 씨를 맨 처음에 낳은 저작물이 필연적으로 썩어 없어지더라고 시 만큼은 이 시데 저 시대까지 보존되도록 신의 섭리가 돌보고 있다.
문학적 가장 행렬이 한창을 이루었을 때, 사방에서 도둑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울렸다. 보니까 웬걸, 벽에 걸린 초상화들은 화폭에서 처음에는 머리를 , 다음에는 어깨를 내밀고서는, 호기에 찬 눈으로 갖가지 모양의 무리들을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눈에 분노의 불을 켜고 내려와서 빼앗긴 그들의 소유물을 요구했다. 여섯 명의 노승이 현해 한 대학 교수의 옷을 벗기고 있고 눈 깜작할 사이에 가발은 벗겨지고 위풍당당하던 기세는 숨을 헐떡이는 난도질ㅇ을 당한 대머리 사수로 오그라들어 겨우 두서너 옷 조각을 등에 펄렁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학자들의 파탄이 어찌나 우스웠던지 그 때문에 환영은 깨어지고 말았다. 소동과 난투도 끝이 났다. 방아는 본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갔다. 엣 저작가들도 그들의 그림틀 속으로 되돌아가서 벽의 으슥한 곳에 정중히 걸려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잡고 있던 구석자리에서 완전히 잠이 깼다. 책벌레들이 놀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움직이는 박물관의 영감을 여기에 가져오면 글감이 되겠다)
<소크라테스의 문제>-니체
권위가 아직도 좋은 관습에 속하고 논거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는 곳이면 어디나 변증가는 일종의 어릿광대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했던 어릿광대였다. 소크라테스는 죽기를 원했다. -그에게 독배를 준 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그는 아테네가 독배를 내리도록 강요했다. 소크라테스는 의사가 아니야. 여기에선 죽음만이 의사야. 소크라테스 자신은 오랫동안 병들어 있었어“하고 그는 종용히 자신에게 말했다.
<분노의 눈물>-조지 기싱
화창한 봄날, 하늘도 땅도 인간의 영혼에 축복을 내려주는 그러한 때에, 제대로라면 어린 시절만이 맛볼 수 있는 그런 기쁨을 즐기고 있을 아이가 6펜스의 돈을 떨어뜨렸다는 까닭으로 가슴이 터질 듯 울고 있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6펜스 가치의 기적을 만들어 주었다. 6펜스의 기적은 중대한 일이었다. 무리해서 낸다면 그 때문에 한 끼의 식사가 달아나 버리던 시절이 있었다.
<회복기의 환자>-찰스 램
고약한 병마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제야 조금씩 풀려나고 있다. 누워서 침대를 다스리는 폼이 얼마나 제왕다운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의 끝없는 요구에 베개를 엎었다가 던졌다가 밀었다.낮췄다. 높였다. 두둘겼다. 폈다 하는 폼이 얼마나 제왕다운가! 정치인들이 자주 등을 돌린다고 하지만 어찌 환자에 비기겠는가. 몸을 펴고 길게 누었다가고 금세 반으로 웅크린다. 비스듬히 옆으로 등을 돌리는가 하면 머리와 발은 침대를 가로지른다. 글도 그 변덕을 탓하는 사람이 없다. 사방을 가린 커튼 안에서 그는 절대 군주요. 그 안은 그의 영해일 따름이다. 환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존재가 된다. 그는 이기심을 최대로 갖는 것만이 그가 해야 할 의무며 이를 지키는 것만이 그가 반은 신의 율법이다. 어떻게 병을 이겨낼 것인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집의안팎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소란한 소리만 없으면 그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다. 친구라는 마르 망했다는 말도 그에겐 의미 없이 지껄이는 군소리에 불과하다. 병이라는 든든한 갑옷을 입고, 고통이라는 굳은 껍질에 쌓여 있다. 그는 동정심을 조직 자기만의 용도를 위해 단단히 자물쇠를 채운 귀한 포도주처럼 간직해 둔다. 자기를 측은하게 여기며, 자기를 서러워하고 신음하며 누워 있다. 그는 자기를 몹시 그리워한다. 겪어야 할 고통을 생각하면 안에서 창자가 녹을 지경이다. 그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처지가 서러워 운다. 자기를 편하게 할 방도만을 끊임없이 획책한다. 최고로 자신을 활용한다. 자신을 쪼개어 아프고 괴로운 곳의 수와 동수의 독립된 개체들로 분할시켜 보는 그럴듯한 허구를 꾸민다. 골이 쑤시는 가엾은 머리를 자기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 대하듯 명상에 잠기고서 자기의 가냘픈 여윈 손가락을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몸의 모든 부분을 동정하고 그의 침상은 자비와 온정의 수련장으로 변한다. 자신의 동정자며, 그를 대시해서 아무도 그 일을 그처럼 잘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병에 걸린다는 것은 군주의 대권을 향유하는 것이다. 회복기의 안락의자로 옮겨 앉으면 권위의 몰락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혼자서 그처럼 독차지하던 그 영토는 이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억지로 돌아 눕기 아니면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고쳐 누웠다든지, 억지로 돌아 눕기 아니면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취하려고 몸부림쳤던 역사의 기록이요, 쭈글쭈글해진 살갗인들 그 구겨진 침대 덮개만큼 환자의 고통을 진실하게 전하진 못했다. 영문 모를 한숨과 신음 소리, 얼마나 큰 고통의 동굴에서 터져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끔찍하기만 했던 그 소리들도 이제는 잠잠하던 고통도 사라지고 병과의 수수께끼도 풀려 필록테네스는 정상 인간이 되게 되었다. 자기 존대에 대한 환자의 몽상은 가끔 찾아오는 의사나 간호사의 무안 속에나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병고를 호사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모든 것이 그대에게 하직을 고한다. 온 집안을 숨죽이게 했던 그 마력, 집안 구석구석 스며든 황랑한 정적이며 묵묵히 시중들어 주던 일, 표정만으로 문병하던 일이며 자기만을 돌보던 보다 부드럽고 미묘한 기분, 세상 생각이란 철저히 배재되고 아프다는 것에만 고착된 병고에 대한 유일무이한 눈이며, 온 세상이 매달렸던 인물, 그가 누렸던 그 독무대가
환자란 오직 아프다는 골똘한 생각 하나로 풍선철 부풀어 올라 자신을 신화 속 티티우스와 같은 거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넓은 땅도 한 뼘으로 줄어들고 있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듯 오만한 거이었소만 이제 다시 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보잘 것 없는 수필가인 그 여위고 깡마른 모습을 보여 드리게 되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