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30 주일설교
예수님의 멍에는 왜 쉽고 가벼울까요?
마태복음 11:25~30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는 불신자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말씀인데 신자들조차 그 진의를 오해하는 말씀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이 있는데 본래 의미와 상관없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느니라”라는 말씀도 이상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다음에 설명해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특별히 유명한 이 말씀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인생살이가 피곤한데 쉬게 해 주겠다니 일단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새로운 짐과 멍에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30절에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계명은 정말 쉽고 가벼울까요?
여러분이 느끼기에 예수님의 계명이 쉽고 가볍습니까?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이 쉽습니까?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 억지로 짐을 지우고 오 리를 가게 하면 십 리까지 가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습니까? 순종하기 어려워도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부르시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이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감사가 충만하고 신앙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신 이 말씀을 깨닫고 복된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25~27절과 28~30절로 나누어집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올립니다. 그 기도에 이어 사람들을 보면서 28~30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던 예수님이 왜 사람들에게 28절의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저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고민하고 저의 설명을 들으면 꿀처럼 달게 느껴질 것입니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 주는 음식은 맛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궁금하지 않은데 설명해주는 것도 고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예수님이 왜 기도하다가 갑자기 제자들에게 28절을 말씀하셨는지 생각을 좀 해보세요. 25~27절의 기도는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왜 이 기도 끝에 28절을 말씀하셨을까요? 28~30절의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이사야 6장에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께 소명 받는 사건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사야가 자기 죄를 생각하며 크게 낙담하고 있을 때 천사가 제단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해 주죠. 거기서 이런 찬송이 나왔습니다.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 주소서.”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사 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말씀은 백성들이 깨닫게 하라는 말일까요? 깨닫지 못하게 하라는 말일까요? 깨닫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깨닫지 못하게 하려면 가만히 두면 되는데 왜 가서 외치라고 하실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실까요? 정답은 “No”입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2:4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실제로 모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정리해 드릴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한다는 말씀은 어느 한 민족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족이 구원받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구상 모든 사람이 구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이 구원받기 원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든 민족 속에는 하나님의 택자가 있고 불택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깨닫는 귀를 열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깨닫는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전도해도 안 믿는 사람을 미워하지 마세요. 불신자는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못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안 믿어지는 것이 정상이지 믿어지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이 믿어지는 것은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예수 내 맘에 오심”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을 버리실까요? 하나님은 자기를 하나님 보다 높이는 사람을 버리십니다. 죄 중에 가장 악한 죄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강도가 아닙니다. 가장 악한 죄, 절대 용서받지 못하는 구제 불능의 죄는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남보다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5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라고 하실 때 지혜롭다는 말은 잠언이 말하는 지혜가 아닙니다. 아이큐가 200인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슬기롭다고 착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복음을 깨닫는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내 생각에는요”라고 말하지 마세요. “성경대로 순종하면 못 살아요.”라고도 말하지 마세요. 저와 여러분이 할 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옳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선합니다.”
자, 이제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아이는 몇 살 정도의 아이일까요? 5살 이하일까요? 6~10살일까요? 11~15살일까요? 정답은 13살입니다. 유대인들은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합니다. 성인식은 히브리어로 “바르-미츠바”(בר מצוה)라고 하는데 “율법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성인식을 할 때 13살 아이에게 율법 두루마리가 담긴 상자를 어깨에 올려줍니다. 그것을 지고 성전에 들어가는데 오늘날은 성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성전이 있었던 서쪽 벽, 일명 통곡의 벽으로 걸어갑니다. 그때 일가친척이 모두 노래하며 춤추며 동행하며 축하해 줍니다.
율법의 아들, 바르-미쯔바가 된다는 말은 이제 이 아이와 율법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이와 율법이 하나가 되는 나이가 왜 13세일까요? 그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하나’를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에하드(אחד)입니다. 에하드(אחד)는 א ח ד 세 글자로 이루어졌습니다. א는 알파벳 첫 번째 글자이므로 숫자 1입니다. ח는 8번째 글자여서 8이고 ד은 4입니다. 1+8+4=13, 그래서 율법과 하나(에하드 אחד)가 되는 나이를 13세로 정했습니다.
13세 어린아이가 율법 상자를 어깨에 메는 순간부터 평생 율법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어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의 살은 흙에서 왔고 흙은 부정하다고 생각하므로 몸에서 살이 사라지고 뼈만 남을 때 비로소 율법의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굴 무덤에 넣고 입구를 큰 돌로 막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뼈만 남았을 때 그 뼈를 돌상자나 항아리에 담아 본 장례를 치릅니다. 그제야 율법의 짐을 벗게 됩니다.
예수님이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부르신 것은 세상살이가 고달픈 사람에게 형편이 잘 풀리게 해 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켜 의인이 되어보겠다고 율법 상자를 짊어지고 신음하는 그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힘쓰는 자들은 유대인 율법 학자, 바리새인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구원받을 사람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득도하여 인간이 모든 욕심을 버리고 무아지경에 도달하면 생노병사의 문제가 사라진다고 한 이후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결심과 노력으로 욕심과 죄를 버릴 수 없습니다. 참선해도 안 됩니다. 불교에서 선행을 적선(積善)이라고 하는데 사람은 아무도 선을 쌓아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을 쌓고 또 쌓다 보면 어느 날 해탈할 것이라는 소리는 허무맹랑한 소리입니다. 사람이 오른발이 물에 빠지기 전에 왼발로 빨리 물을 밟고 왼발이 빠지기 전에 다시 오른발로 물을 밟으면 물 위로 걸을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허경영씨 뿐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사람에게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유대인들이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번 해보라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지킬 수 없음을 확인하고 항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동시에 언젠가 너희들 대신 이 율법을 지키고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 줄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실패의 역사이고 동시에 메시아를 보내겠다는 약속의 역사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율법의 멍에를 메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율법 상자를 짊어지고 수고하는 자들아, 내게 오너라. 내가 그 율법의 멍에를 벗겨주며 안식을 주겠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안식입니다. 안식일은 일하면 벌 받는 날이 아니라 일하지 않아도 사는 것을 연습하는 날입니다. 여러분도 주일에 일하면 벌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주일에 일하지 않고 예배만 잘 드리면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이 지키기 쉽습니까? 서로 사랑하라,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는 것이 쉽고 가벼운 짐인가요? 아닙니다. 지키기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쉽고 가벼운 짐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속담에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산에서 교회 선배가 서울에 사는 아가씨와 결혼했어요. 그 선배가 연예할 때 애인을 부산역에 바래다주러 가더니 기차 타고 서울역까지 바래다주고 오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고도 그 선배는 너무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사랑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행복한 일이고 저절로 되는 일입니다. 계명을 안 지키면 지옥 갈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좋아서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 예배드리고 말씀 듣는 것, 십일조와 헌금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친구와 동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예수님을 사랑해서 하면 쉽고 가볍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순종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예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이 찬송을 참 좋아합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하네. 크고도 넒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운동선수나 연예인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fan, mania, オタク(오타쿠), 덕후 등 뭐라고 부르든지 그들은 그 연예인을 만나기 위한 어떤 수고도 힘들지 않습니다. 그게 힘들면 덕후가 아니죠. 그들의 모든 수고는 절대로 힘들지 않고 돈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들의 수고는 쉽고 가볍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자기에게 주는 즐거움 때문에 덕후들의 수고가 쉽고 가볍다고 한다면, 죄인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은 얼마나 큰지 깊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짐이고 쉽고 가벼운 멍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왜 쉽고 가벼울까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의무적으로 예배드리고 억지로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벌 받지 않으려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자격 없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을 나도 사랑할 때 예수님의 모든 계명은 쉽고 가볍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이 좋아하는 대로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https://youtu.be/GzKIPng7x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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