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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 이원호
4권
---- 차 례 ----
1. 뜨거운 여인
2. 삼합회
3. 대야망
4. 도전자
5. 음모
6. 불타는 차이나타운
7. 상처
1. 뜨거운 여인
'
그들이 다섯 평쯤 되는 대기실에 단둘이 마주앉게 되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영환 씨였다.
「여위었구나, 피부도 거칠어지고.」
그는 김상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별것 아닙니다, 아버지.」
김상철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가 답답하셨겠어요.」
「나도 답답한 것 없다. 이젠 적응이 되었어.」
「일이 있어서 그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들었다.」
잠시 둘 사이의 말이 끊겼고 다시 입을 연 것은 김영환 씨였다.
「너는 살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렇게 만나보니 이제 여한이 없다.」
「아버지.」
머리를 든 김상철이 테이블의 귀퉁이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아버지는 곧 나가시게 될 겁니다. 올해 안으로.」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치켜뜬 그를 향해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준비를 해두세요. 목장을 하시든 사업을 하시든 간에요.」
「무슨 소리냐? 아직 3년이나 남았는데.」
「그것은 아실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
김영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럴 이유가 없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약속도 받아냈구요.」
김상철이 방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아버지, 이렇게 일반 면회실이 아닌 대기실에서 그것도 단둘이 만나게 해준 것을 보세요. 그들은 그럴 만한 힘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정부지요. 한국 정부기관입니다.」
「너, 그들과 어떻게 ‥‥」
「떳떳한 일입니다, 아버지.」
「애비를 위해서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누구를 배신하지도, 그렇다고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믿으세요, 아버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김영환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네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구나.」
「‥‥‥」
「아니면 내가 약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대기실을 나왔을 때는 정오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 시간 가깝게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무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감방 안에서 또 시베리아의 급박한 환경에서 상처들을 단련시켜 왔기 때문이다.
환한 햇발을 받으며 교도소의 정문을 나오자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특별면회를 주선해준 안기부의 심재택이었다.
「김 형, 이제 후련해?」
그렇게 묻는 심재택의 얼굴이 더 후련한 듯 보였다. 그들은 대기시켜 놓은 심재택의 승용차에 올랐다.
「언제 출발할 거요?」
심재택이 옆에 앉은 김상철에게 물었다.
이곳은 한국인 것이다. 김상철은 하룻밤을 대전에서 쉬고 면회시간에 맞춰 교도소에 갔을 때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심재택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비행기 편이 있으면 오늘밤이라도 출발할 겁니다.」
김상철의 말에 심재택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건 내 예상하고 다른데, 아니 어머니와 동생 산소에는‥‥‥」
「다음에 들리지요.」
「죽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습니까?」
「하긴.」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이던 심재택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뒤쪽을 가리켰다.
「교도소 앞에서부터 우릴 따라오는 뒤쪽 승용차, 서울 번호판의 흰색 차 말인데 ‥‥‥」
그는 김상철에게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강회장의 손녀 강미현이오. 그 여자, 교도소 앞에서 날 보더니 피하던데…· 아마 김 형을 만나려고 하는 모양이오.」
「어제 공항에서 만났습니다.」
「정보는 내가 주었소.」
「그런데 내 앞에서는 어색한 모양이지? 저러는 걸 보면.」
「이것 봐라. 이거 왜 이래?」
심재택이 차의 속력을 줄이더니 바깥 차선으로 비스듬히 나아갔다.
「내 차는 똥차라 가끔 이렇다니까. 가속기가 고장인지 연소가 제대로 안 되는지 정비소마다 말이 달라.」
그는 인도에 바짝 붙여 차를 세웠다.
「차가 또 고장이오, 김 형.」
이맛살을 찌푸린 심재택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턱을 들어 뒤쪽을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저 차도 서울 올라갈 테니까 이왕이면 고급차를 타고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
그들로부터 30미터쯤 뒤쪽에 흰색 승용차가 마악 멈춰서고 있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강미현은 속력을 냈다. 평일의 한낮이다.
차량통행이 현저히 줄어든 고속도로 위를 승용차는 총알처럼 달려 나갔다.
「몇 년 전에 미국을 차로 횡단한 적이 있어요. 한 달 예정으로 떠났는데 40일이 걸리던데요.」
핸들을 쥔 강미현이 앞을 바라본 채 말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출발했지만 도중에 친구 하나는 돌아갔어요. 몸살이 나서.」
「열홀쯤 지나니까 지루하더군요. 끝없이 이어져 있는 길을 보면 숨이 막혔어요.」
그녀는 1차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차를 보자 1차선에서 2차선으로 옮겨가더니 추월해 나갔다.
「잘 준비되고 보장된 것은 금방 진력이 나요. 환경 탓이기도 하겠지만… 난 거칠고 새로운 것이 좋아요.」
김상철이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여러 가지로.」
「인사 받으려고 한 일 아녜요.」
얼굴에 웃음을 띠운 강미현이 가속기를 밟아 차에 더욱 속력을 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요.」
「그런데 이제 이쯤 해두시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난 당신이 바라는 거칠고 새로운 스타일의 남자가 아닙니다.」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는 차 안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물론 당신은 아름답고 나무랄 데 없는 여자지만 당신과 같이 있으면 거북하단 말이오.」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근대와 나 사이에는 아직 불신감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나는 근대나 할아버지를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에요.」
속력을 줄인 강미현이 바깥 차선으로 옮겨가더니 곧 한적한 정류장을 발견하고는 차를 세웠다.
「내가 알고 있는데 당신이 한국에 와 있는 것을 할아버지가 모르실 리가 없어요. 아마 내가 당신과 같이 있는 것까지 아실지도 모르지요.」
그를 바라보는 강미현의 눈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당신을 수소문하려고 블라디보스토크의 파벨을 찾아간 후로 내게 금족령이 내려졌지요. 그리고 남자를 소개받았어요, 할아버지한테서.」
「‥‥‥‥」
「내가 즉흥적으로 이런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난 꽤 오랫동안 당신을 지켜봐 왔어요.」
그녀는 손을 뻗어 김상철의 손을 쥐었다.
「당신의 살아가는 자세, 그리고 여자에 대한 것도.」
「그런데 난 아직 당신을 모릅니다, 아무것도.」
김상철이 잡힌 손을 뗐다.
「그리고 지금은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어,」
「이대로 당신과 헤어질 수는 없어요.」
눈을 치켜뜬 그녀가 김상철을 쏘아보았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당신이 이렇게 반발하는 것은 내가 회장의 손녀이기 때문인가요?」
브레이크를 내린 강미현이 핸들을 움켜쥐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경황이 없겠지만 나한테도 기회를 줘요, 나를 알릴 기회를. 날 강씨 가문의 여자로만 생각하지 말고.」
입맛을 다신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안다면, 어떻게 하나를 잃고 또 다른 하나를 금방 찾으라고 할 수 있습니까?」
김상철이 그녀의 옆얼굴을 쏘아보았다.
「그 상처를 당신으로 위로 받는다는 것은 당신에 대한 모욕이 됩니다.」
머리를 돌린 강미현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당신을 놓치면 나는 기회가 없어요. 당신에게 나를 알려줄 기회가 오지 않아요.」
「나도 보통여자예요, 난 지금 부끄러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단 말예요.」
「우습군.」
숨을 내려쉰 김상철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묻었다.
「한국에 와서, 고속도로 길가에서 이런 식의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난 상철 씨 아버님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당신을 기다렸던 유일한 사람이에요.」
「곧장 근대리아로 돌아가실 계획이지요?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
「며칠만이라도 한국에서 쉬세요. 제가 보살펴 드릴게요.」
김상철이 잠자코 있자 그녀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럼 가요, 서울로.」
나무젓가락을 쪼갠 강형문이 앞에 앉은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회사 근처의 일식집 방 안이다. 바깥 홀에서는 손님들의 소음이 들리고 있었지만 방에는 그들 두 사람뿐이었다.
「이봐, 전대리가 뉴욕지사에 있을 때 강재은 씨와 같이 근무했었지 않아?」
강형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고를 내고 좌천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심복이었다는 말도 있어. 뉴욕에 있다가 런던으로 간 내 동기 놈한테서 들었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쪽으로 보냈겠습니까? 아예 강재은 씨가 가 있는 중공업 쪽으로 보냈겠지요.」
「그건 그렇단 말이야,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좌천입니다. 본인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들었구요.」
「글쎄, 그런데 ‥‥‥」
회 접시가 들어 왔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퇴근 무렵에 강형문에게 끌려온 안인석은 이제 그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강형문은 전규영 대리의 인사고과서와 전출 제의서를 인사부와 경영진에게 제출한 사실이 은근히 불안해진 것이다. 그는 그동안 각지에 퍼져 있는 동기와 선후배를 통해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해 온 모양이었다. 정종을 한 모금 삼킨 강형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대리는 아직 시베리아 전출 희망서를 내지 않았어. 그건 어떻게 된 일이야?」
「곧 내겠다고 하던데요. 어제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과장님.」
「내일 아침이라도 과장님께서 저한테 들었다고 말씀하시고 시베리아 전출 문제를 직접 물어보시지요. 그러시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강형문이 머리를 저었다.
「그자가 직접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리지. 내가 서둘 필요가 있나.」
이제 그의 얼굴은 풀려져 있었다.
「하지만 팀 분위기를 봐서라도 그자가 빨리 알아서 해주었으면 좋겠단 말이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과장님.」
「나도 안타까워, 실력은 괜찮은 친군데 도무지 의욕을 보이지 않고 분위기를 깨니 말이야.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다시 술을 한 모금 삼킨 강형문이 머리를 들었다.
「고마쓰 지사에 가 있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오성과 고마쓰가 연간 2백만 장의 8인치 웨이퍼 공급계약을 맺는다는 거야. 그런데 주요 공급지역은 유럽이야. 우리 지역이라구.」
「고마쓰의 기존 거래선에 공급될 물량이라면 연간 50만 장이면 충분해. 그런데 2백 만 장이라니, 그놈들은 우리 거래선을 넘보고 있는 거야.」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성과 고마쓰가 연합하여 근대의 거래선에 침투해 올 것은 뻔한 일인 것이다.
「확실하다면 큰일인데요. 가격으로 치고 들어올 텐데.」
「확실하다마다.」
술잔을 내려놓은 강형문이 식탁 위로 상체를 끌어 당겼다
「나도 팀장이 되고나서 정보원을 인계받았어. 하마터면 자네가 갈 뻔했던 자리지만 말이야.」
그는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을 펴며 웃었다.
「그놈들이 하는 짓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니 우리도 앉아서 당하지는 않아.」
안인석이 강형문과 헤어졌을 때는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권하는 대로 정종을 마셨으므로 다소 취기가 오른 그는 길가에 세워진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섰다. 박스 문을 열어둔 채 그는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통해 박미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지금 과장하고 한잔 마시고 헤어진 참인데 ‥‥」
그는 팔목시계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어때? 내가 그쪽에 잠깐 들렸다 갈까?」
「피곤할 텐데 그냥 집으로 가.」
박미정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일 만나면 되잖아? 일찍.」
「그래. 그럼 내일은 만사 젖혀놓고 만나자. 과장이 아니라 사
장이 부르더라도 뺑소니를 칠 테니까.」
그러고 보면 결혼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안인석은 전화박스를 나와 택시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일식집 옆쪽의 편의점 안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상철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휘황하게 빛나는 네온 밑으로 활기찬 모습의 남녀가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잠시 거리의 인파를 바라보던 그는 안인석과 반대 발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아침, 마악 현관을 나서는 강미현에게 가정부 아줌마가 서둘러 다가왔다.
「아가씨, 회장님이 서재에서 부르시는데요.」
잠자코 몸을 돌린 그녀가 복도 끝 쪽의 서재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그도 출근하려던 참인지 양복차림이었다.
「부르셨어요?」
「음, 거기 앉거라.」
강미현은 그가 턱으로 가리킨 앞자리에 앉았다. 강회장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금 굳어진 표정이었다.
「어제 김상철을 만났다는데, 사실이냐?」
대뜸 묻는 강회장의 시선을 받자 강미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네, 할아버지.」
「대전 교도소까지 따라갔었다며?」
「‥‥네, 할아버지.」
「할애비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고 있으렸다.」
「………」
「그렇다면 그걸 말해보아라.」
「처음에는 화를 내셨다가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실 것 같았습니다.」
「흠, 제멋대로군. 그건 왜냐?」
「김상철은 하바로프스크에서 근대 측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지요.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에 근대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가 근대에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싶으실 것…… 아니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러자 강회장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는 어금니를 물고 콧김을 길게 뿜어 댔다.
「그것이 그자를 만난 이유냐?」
어금니를 깨물고 말하는 그의 음성이 낮게 갈라져 있었다.
「말해라, 어서.」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할아버지.」
얼굴이 하얗게 된 강미현이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안기부의 어떤 사람이 그가 귀국한다는 정보를 주었을 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의 말씀도 잊었습니다.」
「‥‥‥」
「이렇게 부르실 줄도 알고 있었어요, 벌을 받을 각오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안의 어느 사내놈도 이렇게 나를 거역한 예가 없었다.」
강회장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마치 서릿발이 내려앉는 것처럼 방 안을 싸늘하게 했다.
「더구나 새파란 손주, 그것도 계집아이가 나한테 이러다니.」
「‥‥‥‥」
「그놈은 지금 어디 있느냐?」
강미현이 천근처럼 무거워진 머리를 들어올렸다
「시내에 있습니다. 하지만 오전 중에 저한테 연락하겠다고 약속을‥‥‥」
강미현의 말을 자르면서 강회장이 단호하게 내뱉았다.
「연락이 되면 나한테 데려오너라. 약속시간은 이 실장이 정해줄 테니.」
「그놈한테 내가 보잔다고 해. 그러면 올 것이다, 그놈은.」
「할아버지.」
「나가 봐.」
강회장이 턱까지 들어 올리며 나가라는 시늉을 했으므로 강미현은 굳어진 몸을 힘들게 펴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을 쫓았으나 그녀에게서 떠난 강회장의 시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직원을 내고 이번 달 말까지 근무하면서 업무의 인계인수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박미정은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 같은 처지였다. 그런 이유로 여유시간이 많다. 사무실 앞 복도에 커피 자판기가 있었지만 오늘도 그녀는 빌딩 아래층의 커피숍에 내려와 커피를 시켜 마셨다. 바쁜 사무실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도 싫었을 뿐 아니라 제법 업무에 익숙해진 미스 최에게 미리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아침 시간이어서 커피숍 안에는 손님이 두어 명뿐이었다. 커피 잔을 내려놓은 박미정의 앞으로 커피숍 주인아줌마가 다가왔다. 남편이 골프가게를 하고 있다는 그녀와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앞자리에 앉은 그녀가 버릇처럼 머리를 쓸어 올렸는데 손가락에 긴 다이아 반지가 반짝였다.
「이달 말에 그만둔다던데 결혼은 언제야?」
「한 달 남았어요.」
「좋겠다. 신랑 될 사람이 문세병원의 차남이라면서.」
「다 아시네, 뭐 .」
「비서실 여직원들이 말해주었어. 모두 부러워 하더라구.」
「그이와는 입사 동기에요.」
「미스 박은 복이 붙을 인상이야. 내가 사람들을 많이 겪어봐서 잘 알아.」
「고맙습니다.」
40대 중반의 주인은 인조 속눈썹의 끝부분을 조금 건드려 올리더니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돼. 한번 실패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 여자의 일생이야. 남자와는 달라.」
「‥‥‥‥」
「잘했어. 결혼식에 꼭 갈게. 청첩장 보내야 돼.」
「그럴게요.」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면서 박미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올라가 봐야 되겠어요.」
커피숍을 나와 계단을 오르면서 박미정은 이제는 두 번 다시 커피숍에 들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요즘 들어 주인의 힐끗거리는 시선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도 이제 이해가 되었다.
김상철과 함께 몇 번 커피숍에서 만난 적이 있었고 그때도 주인은 자신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비서실 여직원들의 수다로 김상철이 실종된 것도 알았을 것이다. 계단을 오른 박미정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가 한동안 번호판을 올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서실 여직원 가운데 자신과 김상철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그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박미정은 내일부터 회사를 나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꼭 월말까지 있을 필요는 없다. 업무 인계인수도 마친 상황이니 업무에 지장도 없을 터였다. 스위치 누르는 것도 잊고 서 있는 자신을 깨달은 박미정은 스위치를 누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비어 있는 로비의 한쪽에서 사내 하나가 마악 이쪽에 등을 보이며 돌아서더니 현관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내의 뒷모습과 걸음걸이가 김상철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으므로 그녀는 안으로 들어섰다. 마악 그의 생각을 하던 참이어서 사내들의 모습도 그와 닮아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잊어야 할 사람이고 이미 얼마쯤은 흐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타운 호텔의 라운지는 티 타임을 즐기려는 남녀들로 붐비고 있었다. 강미현은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김상철에게로 다가갔다. 12시 30분 정각이다.
「잘 쉬셨어요?」
앞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묻자 김상철은 입술 끝으로만 웃었다.
종업원이 다가와 커피 주문을 받고 돌아갔다.
「점심 안하셨으면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갈까요?」
다시 그녀가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미안합니다만 난 생각이 없는데.」
「그렇다면 그만두죠 뭐. 저도 생각이 없어요.」
「미안합니다. 억지로 앉아 있을 기분도 안 되어서.」
「근대타운의 영업은 잘 된다면서요?」
강미현이 말머리를 돌리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잘 됩니다. 난 열일곱 개 사업장을 거느린 사장입니다. 직원들도 꽤 있고.」
「마피아와 조선족 범죄자들이 뒤섞인 직원들 아녜요?」
「그런 셈이지요.」
종업원이 다가와 커피 잔을 내려놓고 돌아갔다.
「앞으로 근대리아 전역에 사업장을 늘려갈 작정입니다. 아마 근대 쪽의 사업계획에 그것도 포함되어 있을 텐데.」
김상철이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근대는 나를 통해 마피아의 세력을 중화시키고 북한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지요. 물론 나를 이용하는 것은 안기부도 마찬가지고.」
「저는 잘 모르고 있어요, 그쪽 상황은.」
「마피아의 자금이 대량으로 홀러들어 오고 있습니다, 이주민도 마찬가지고. 지금까지는 성공하고 있지요, 근대의 이주정책과 개발 사업이.」
「돈이 모인다고 하니까 돈 가진 러시아인들까지 타운과 근대시, 또는 북방의 개척지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제 몇 년 안에 근대리아는 동양의 번성지역이 될 겁니다.」
강미현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회장님의 꿈이 실현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어요. 그리고 나도 그 그늘 아래에서 새 꿈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뭔데요?」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오.」
「이제 김상철 씨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네요.」
얼굴에 웃음을 띠운 강미현의 시선을 받자 그는 커피 잔을 들었다.
「솔직히 강미현 씨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총회장의 손녀가 날 생각해준다는 것은 명예이기도 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이합 관계를 우습게보게 하는 효과가 있었거든.」
「안인석과 박미정의 관계를 말하는 거요.」
「난 안인석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전화를 했어. 그런데 그놈은 아버지한테도 그 말을 전하지 않았더구만. 혹시 박미정이 면회왔을 때 그것이 전해질까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오.」
「어제는 그놈을, 오늘 아침에는 박미정의 모습을 보았지‥‥ 그냥 호텔 방에 앉아만 있기에는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오.」
강미현의 시선을 받은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절대로 그들의 판을 깰 생각은 없어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실종자 신세로 남아 있을 수도 없을 것이고. 그들의 행복과 불행은 전혀 내 탓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강미현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이해해준 것으로 내 할 일은 끝내야 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결혼할 때까지는 나는 철저히 실종자 신세로 돌아가야 할 겁니다. 그래서 안기부 사람들한테도 부탁해 놓았지요.」
「할아버지가 뵙자고 하셨어요.」
강미현이 말머리를 바꾸었으므로 김상철이 처음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은 대단한 여자요.」
「천성인가 봐요. 그런 소리 많이 듣는 걸 보면.」
「그 말은 마음에 안 드는데…·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 같고.」
「저녁에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셨어요. 당신은 꼭 오실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
「지독히 야단을 맞을 줄 알았는데 곧 풀려났어요. 당신을 만난 것을 알고 계시는데도‥‥‥」
강회장이 밀실에 들어선 것은 약속시간보다 10분쯤 늦은 6시 10분이 되었을 때였다. 김상철과 강미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보이더니 안쪽의 자리에 앉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이쪽으로 시선이 옮겨오지 않는다. 10평 가까운 방안에 한동안 침묵이 홀렀으나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방음장치가 잘된 곳이어서 옆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종업원도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들어올 기척도 없다. 이윽고 강회장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살아 만나서 반갑다.」
그의 굵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네 운은 그만하면 되었다.」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회장님.」
김상철이 말하자 그는 입맛을 다셨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말고.」
「‥‥‥‥」
「타운에서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니 제법이다. 사업의 맥도 잘 짚은 거야.」
그때서야 문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지배인이 들어와 주문을 받고 나갔다. 강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는 네가 근대리아에 마피아를 끌어들였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어차피 그놈들은 들어올 놈들이었고 초창기부터 네가 그놈들을 이끌어 기반을 잡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야. 그러면 그쪽에서 네 위치도 굳어질 것이고 그것이 우리한테도 나을 테니까.」
「북한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도 마피아가 적격이지. 그자들도 기반을 굳히려고 들 테니까.」
그는 머리를 돌려 옆에 앉은 강미현을 홀겨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김상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여기 있는 미현이를 좋아하느냐?」
김상철의 시선이 강미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져 있었다.
「예, 좋아하고 있습니다, 회장님.」
「흥.」
짧게 콧소리를 낸 강회장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붉어져 있던 강미현의 얼굴이 이제는 희게 변하면서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듣자하니 네 여자와 남자친구가 결혼하게 되었다면서? 네가 실종된 줄 알고.」
「예, 회장님.」
「프프‥‥」
방 안에 다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회장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놈이 너를 쫓아다니는 것 같던데‥‥ 너는 꽁무니를 빼고.」
「‥‥‥」
「이놈은 너보다 그런 경험이 적어 풍파가 없는 집안에서 자라 성격이 곧을 뿐으로 앞뒤를 재지도 못한단 말이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강미현에게 힐끗 시선을 준 그가 말을 이었다
「사귀는 것은 허락한다. 서로를 잘 알게 될 때까지 말이다.」
「김상철이가 내 손녀에게 정략적으로 접근했다고는 믿지 않아. 그리고 내 손녀도 그저 고집만으로 남자를 택한다고 믿지도 않고.」
문이 열리더니 지배인이 음식그릇을 받쳐 든 종업원들을 이끌고 들어섰으므로 그는 말을 멈추었다. 종업원들이 물러가고 다시 방 안에 그들 셋만이 남게 되자 강회장이 젓가락을 들었다.
「자, 먹자. 나는 너희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각자 깨달을 시간을 말이야.」
최선호가 방에 들어서자 신문을 읽고 있던 조영규 실장이 머리를 들었다.
「실장님, 어제 저녁에 근대의 강회장이 누굴 만났는지 아십니까?」
앞자리에 앉으며 최선호가 대뜸 물었으므로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강회장이라니? 총회장 말이야?」
「그럼요. 아들 강회장은 중공업 회장으로 불리지 강회장이라고는 안합니다.」
「그래, 누굴 만났는데?」
「김상철이오. 안기부 요원을 살해했다가 실종되었다고 했던 그놈을 만났단 말씀입니다.」
조영규가 신문을 내려놓았다.
「김상철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더욱 흥미를 끄는 사실은‥‥‥」
상반신을 굽힌 최선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강회장과 김상철, 그리고 또 하나의 참석자가 칼튼 호텔의 밀실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그 참석자는 강회장의 손녀 강미현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시간 가깝게 밀담을 나누고 헤어졌답니다.」
「김상철과 강미현이라, 그게 어울리는 짝이 될까?」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조영규의 말에 최선호가 코웃음을 쳤다.
「글쎄요. 당사자보다도 강회장의 의중이 관건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김상철의 살인혐의가 어느 사이에 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실장님.」
「강회장이 손을 썼나?」
「솔직히 그것도 아직 자세히 모릅니다. 저도 조금 전에 김상철의 기록을 보고 온 참이어서요.」
조영규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강회장처럼 엉뚱한데다 충격적이군, 그래. 어쨌든 김상철에 관해서는 더 조사해 보는 것이 낫겠어. 놈의 역할도 역할이지만 로열패밀리가 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열려진 차창으로 습기를 띈 바람이 휘몰려 들어왔다. 경부 고속도로상의 간이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그들은 한동안 앞쪽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한낮이었지만 하늘은 어둡다. 옆쪽을 질주하는 차량들로부터는 찢어져 가는 듯한 타이어의 마찰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후불 티켓을 빼들고 고속도로로 진입한 참이어서 아무 곳이나 목적지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핸들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꼬물대던 강미현이 머리를 돌려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맑았고 오늘따라 엷은색 루즈를 칠한 입술이 선명했다.
「참, 어제 저녁 할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날 좋아한다고‥‥‥」
그녀는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바른 대로 이야기했다가는 할아버지 체면이 엉망이 되었을 테니까요. 눈치는 채고 계신 것 같았지만.」
「그런 일로 기분 상하실 회장님은 아닙니다.」
김상철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나도 꾸며서 이야기한 것만은 아니오. 미현 씨의 성격에 끌리고 있기는 했으니까.」
「이제 제대로 순서를 찾아가는 것 같네.」
강미현이 목구멍을 콕콕 울리며 웃었다.
「간지러운 느낌이 와요. 당신한테서 그런 말을 듣게 되니까.」
「소름이 돋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러자 카폰의 벨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반짝이는 카폰을 바라보던 강미현이 손가락으로 스위치를 켰다.
「여보세요.」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마이크를 켠 것이다
「네, 강미현인데요.」
핸들을 움켜쥔 강미현이 앞쪽을 바라보며 대답하자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 미현 씨, 저 한민숩니다. 회사에 연락했더니 아침에 나가셨다고 해서.」
「아아, 네.」
「그런데 지금 바쁘십니까?」
「네에, 조금.」
「이런, 그럼 다시 연락하지요. 아니 저한테 연락을 주시렵니까? 회사에 있을 테니까.」
「연락드릴게요.」
「기다리겠습니다.」
전화가 끊기자 강미현의 손가락이 다시 핸들을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아직 앞쪽을 향한 시선은 돌려지지 않았다.
「일부러 마이크를 켠 것 ‥‥ 너무 심했지요?」
이윽고 머리를 돌린 강미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한데 말예요.」
「아니, 나는 괜히 미현 씨한테 미안한데. 전화가 왔을 때 얼른 밖으로 나가는 것인데 멍청하게스리.」
그러자 강미현의 얼굴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내가 조금 서두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금방 그 사람한테 미안하단 생각이 들 정도면 염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강미현이 풀썩 웃었다.
「할아버지가 소개시켜준 사람인데 아마 곧 상황을 알게 되겠지요.」
「꿈만 같아요. 이렇게 한국에서 당신과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난 아직 증오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올 때까지 내 가슴속에 들어 있던 것은 두 사람에 대한 그것뿐이었어요.」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김상철의 말에 차 안의 분위기가 금방 가라앉았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결합을 방해할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 행동할 거요. 그들은 이제 나에게는 완전한 타인이란 말입니다.」
「‥‥‥」
「미현 씨가 다가왔을 때 우선 위안이 되었어요. 의지가 되었습니다. 표현은 억제했지만 당신의 감정을 내 허전함을 채우는 데 이용하고 있었지요.」
「우리, 약속하지 맙시다. 흐르는 대로 맡겨둡시다. 다시 전쟁터나 다름없는 그곳으로 가야만 하고 목숨을 건 생활을 해야만 하는 나요.」
김상철이 손을 뻗어 핸들 위에 놓인 강미현의 손을 쥐었다.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내 예의요, 고마옴에 대한 보답이고. 내 지난 여자한테 한 것처럼 당신에게 부질없는 언약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나도 따라가고 싶어요.」
김상철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놓으면서 강미현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당신을 선선히 받아들이신 것, 그것이 정책적인 수단이라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요.」
둥근 접시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그녀의 유방은 약간 작았지만 탄력이 있었다.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젤리 덩어리처럼 흔들렸고 팽팽한 허벅지와 다리 사이의 검은 음모가 정면으로 보였다. 침대를 향해 다가오는 강미현은 자신의 알몸을 가리려는 아무런 몸짓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시트를 들치고 그의 옆으로 들어서면서 시선이 마주치자 밝게 웃음을 띠워 보인 것이 유일한 반응이었다. 김상철은 비누 냄새가 나는 그녀의 조금은 찬 몸을 받아 안았다. 그러자 그의 온몸에 빈틈없이 몸을 붙여온 강미현이 만족한 듯 가늘고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자 반쯤 벌린 입으로 서슴없이 받는다. 말랑말랑한데다 유연하게 꿈틀대는 그녀의 혀에는 힘살이 전혀 배겨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김상철은 곧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래에 깔린 강미현이 발끝으로 시트를 걷어 제쳤다. 이윽고 입술에서 떨어진 김상철의 혀가 그녀의 목과 가슴, 그리고 아랫배를 더듬어 내려갔다.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가 귀를 당기고 머리를 들어 그의 어깨에 걸치며 몸부림을 치던 강미현의 입에서 참다못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지만 시선에는 초점이 없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미 젖어 있는 그녀의 깊은 곳에 다다르자 그녀가 두 다리를 갑자기 죄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겨우 머리를 빼낸 김상철은 상체를 들어 올려 그녀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곧 깊은 곳으로 진입해 들어서자 강미현의 입이 딱 열리면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는데 그의 어깨를 움켜쥔 그녀의 손 모양을 보면 고통을 참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움직임을 멈춘 김상철은 그녀의 귀를 가볍게 물었다.
「아파서 그래?」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천천히 해줘.」
그것은 기술적인 요청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뤄달라는 표현이었다.
김상철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강미현은 신음소리를 뱉아내었고 그것이 조금씩 깊고 느리게 움직이며 길어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그녀는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땀으로 범벅이 된 두 몸이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그들은 한동안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미안해요, 서툴러서.」
강미현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하지만 좋았어.」
이윽고 몸을 굴려 그녀의 옆에 누운 김상철은 엉덩이가 젖은 느낌에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손바닥만 하게 퍼져 있는 혈흔을 보았다. 그러자 강미현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시트를 잡아당겼다.
「내가 치울 테니 저리 비켜요.」
이금철이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그를 맞았다. 코즈모프 바의 뒤채에 세워진 사무실 안이다.
시베리아에도 어느덧 봄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5월 중순의 한낮, 사내들의 차림새도 모두 가벼운 점퍼나 조끼 차림이었다.
비워져 있는 상석에 이금철이 앉자 사내들이 따라 앉았다.
「그래, 노조문제는 어떻게 되었어?」
이금철이 오른쪽에 앉은 30대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유정 기지의 노조 간부로 북한에서 조직교육까지 받고 나온 조선족이다. 그가 머리를 저었다.
「임금인상은 가능성이 없습니다. 고용계약서에 모두 서명까지 해놓은 입장인데다가 선동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잠자코 있는 이금철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온 놈들도 이곳에 와서는 금방 남조선 물이 들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놈들한테 잘 보이려고 고자질하는 놈도 있습니다.」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야, 평양에서도.」
이금철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거세게 운동을 일으킬 수는 없지만 각 단위 사업장마다 기율을 잡아가야만 한다는 지시가 내려 왔다.」
사내들의 시선을 받은 그가 말을 이었다.
「불순분자, 기회주의자를 가려내서 본보기를 보여야만 한다. 각 단위 사업장에서는 즉각 시행하도록.」
찬 기운이 내려앉은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홀렀다.
이윽고 왼쪽 줄에 앉아 있던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동지, 경비부에서는 이미 우리들뿐만 아니라 행동대원의 명단까지 확보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 그렇다고 모두를 잡아들일 수는 없을 테니까. 이제부터는 우리도 움직여야만 돼. 시간이 지날수록 남쪽 물이 들어서 힘들어진단 말이야.」
그는 머리를 돌려 옆쪽에 잠자코 앉아 있는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장인규를 처단하는 것은 당분간 미룬다. 안팎으로 경비부와 마피아를 상대로 일을 벌인다면 복잡해질 테니까.」
「장인규는 가게 세 곳을 지을 모양입니다. 동로와 서로에 터도 배당받았고 자재도 근대에서 공급된다고 합니다.」
얼굴을 찌푸린 최태호가 말을 이었다.
「이젠 김상철의 업소가 우리의 세 배가 넘습니다. 장인규의 가게까지 놈이 장악하고 들어간다면 말입니다.」
「평양에서도 생각이 있으니까 서두르지 마.」
의자에 등을 기댄 이금철이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근대와 마피아가 자금을 풀어 이 땅을 장악하려 하지만 어림없는 수작이다. 우리는 조직으로 움직인다. 우수한 조직력, 그리고 그것의 뒤를 받쳐줄 인력이 우리한테 있단 말이야.」
근대타운은 이제 사변의 길이가 2킬로에 가깝게 늘어난 정사각형의 도시가 되어 있었고 길도 예전의 십자형의 외통길이 아니다.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정해 가로 세로로 직각을 이룬 도로가 뻗어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숙사와 민가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가 도로를 가득 메웠고 거리의 상가에서 명멸하는 네온사인은 이미 번화한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기에 충분했다. 행인의 대부분이 남자인데다가 나이든 사람이 드물어서 다소 거친 분위기였지만 그것이 도시를 더욱 활기 있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크라우프 바 안. 벌써 가득 차 있는 손님들의 소음과 담배연기로 뒤덮인 구석자리에 바의 지배인인 하용준이 느슨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북한군 탈주병 출신으로 갖은 신고를 치르며 이곳까지 홀러들어 온 그로서는 대단한 출세였고 본인도 그것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 타운의 양복점에서 맞춘 검정색 양복을 입고 흰색 셔츠에 붉은색 넥타이를 맨 그의 차림새는 조금 어두운 실내에서도 금방 눈에 띄었다. 양복 차림은 그 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근무시간에는 금주를 해야 했으므로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에게로 러시아인 한 명이 다가갔다. 털투성이의 얼굴에 남루한 겨울 파카를 걸친 거한이다. 그러자 하용준의 옆쪽 테이블에서 조선족으로 보이는 사내 두 명이 일어서서 러시아인 앞을 가로막았다. 하용준의 경호원 겸 바의 종업원들이다
「무슨 일이야?」
경호원이 내쏘듯 러시아어로 묻자 사내가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보스를 만나려고 해.」
「나한테 말해.」
「너한테는 안 돼. 보스에게 전할 말이 있어.」
그러자 뒤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하용준이 헛기침을 했다.
「야, 그 새끼 이쪽으로 보내라.」
러시아인이 다가와 하용준의 앞자리에 앉았다. 수염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눈에 타서 검붉은 색깔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아?」
제법 러시아어에 익숙해 있는 그가 묻자 사내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움켜쥐더니 벌컥이며 두어 모금을 마셨다.
「술 마시려고 거짓말 했다면 그 술이 마지막 마신 보드카가 될 거야.」
작달막한 체격이었지만 상체는 제법 큰 하용준이 어깨를 세웠다.
「자, 말해라, 어서.」
「총 보스인 미스터 김을 만나야겠는데.」
입가의 술을 손등으로 닦은 사내가 하용준을 바라보았다.
「난 그레고리 파트킨의 부하 이반이야. 우리 대장의 전갈을 갖고 왔어.」
눈을 치켜뜬 하용준이 사내를 쏘아보았다. 그레고리 파트킨이 동부 시베리아를 횡행하는 강도단 두목이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나한테 말해. 너는 직접 말할 수 없어.」
사내가 다시 보드카 병을 기울여 두어 모금을 삼키고는 내려놓았다. 주위가 소란스러웠으므로 그는 테이블 위로 상반신을 굽혔다.
「우리 대장이 당신네 총 보스를 만나야겠다는 거야, 열홀 후에. 장소는 다시 연락할 것이고.」
「너희 두목이 왜?」
「협상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너희들하고 그럴 이유가 있단 말이냐?」
하용준이 입술을 찌그러뜨렸다.
「네놈이 그레고리 부하이고 전갈을 가져왔다는 증거가 있어?」
「우린 지난번에 너희 보급트럭을 습격했어. 트럭 열 대 분량의 보급품을 몽땅 털어 갔지, 나머지는 태우고.」
「‥‥‥‥」
「나는 저쪽 유정기지가 아직 세워지기도 전에 그곳을 습격한 사람이다. 북한 쪽의 부탁을 받고 말이야. 이만하면 되었나.」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 하용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와.」
그가 사내를 데려간 곳은 클럽 주방의 뒤쪽에 딸린 대기실이다. 방문을 닫고 마주서자 소음이 딱 끊겼으므로 사내는 정신이 새로워지는지 허리를 폈다. 밝은 곳에서 자세히 보니 아직 20대 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대장은 북한과의 거래를 끊겠다는 거야. 그놈들은 약속을 지키지도 않는데다 우리를 이용하기만 했어.」
「그거야 당연하지. 믿었던 너희들이 잘못이다.」
하용준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내가 그쪽 사정을 잘 알지,」
「그래서 대장은 너희 보스와 손을 잡고 싶다고 했어.」
「우리 보스는 누가 손을 내밀면 그냥 잡아주는 사람으로 아는 모양인데 ‥‥」
얼굴을 찌푸린 하용준이 비스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가지고 괜히 손을 잡는다 발을 내민다 하지 말란 말이다. 항복하고 기어들어 온다면 몰라도.」
그러자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우릴 적으로 만들면 손해가 될 텐데, 여러 가지로. 그렇게 큰 소리 칠 것도 없다.」
「좋아, 보스한테 전하지. 하지만 대답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주일쯤.」
벽에 걸린 달력으로 시선을 옮긴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보스는 생각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거든.」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마침 그자리가 비었기 때문이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이한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가고 안 가고는 네 맘이야. 이곳이 좋다면 남아도 되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황윤이 일어섰다.
「가겠어요.」
더듬거리는 한국말이다.
이한을 만나고 나서 맹렬히 배운 그녀의 한국말은 이제 어지간한 대화소통을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 언제부터 ‥‥」
「내일부터.」
황윤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나파스 클럽의 2층이어서 복도 양쪽에는 수십 개의 방들이 만들어져 있었고 방 안에서 들려오는 갖가지 소음이 복도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의 교성과 과장된 신음소리들로 남자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뒤쪽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장인규가 머리를 들었다.
「뭐라고 해? 오겠다고 해?」
「예, 누님.」
이한이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내일부터 누님한테 가기로 했습니다.」
「잘 되었어. 나도 그 애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장인규가 짓고 있는 세 채의 사업장은 두 달쯤 지나야 영업을 하게 될 것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경리를 필요로 했다. 하얼빈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국영상점에서 경리일을 본 적도 있다는 황윤을 그가 소개하자 장인규가 선선히 승낙해준 것이다.
「그런데 김 선생은 언제 돌아오신다는 거야?」
「며칠 후에 오신답니다.」
「지금 서울에 있는 거야?」
「예, 송 형이 전화를 받아서 자세한 것은‥‥‥」
「예정보다 많이 늦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녀가 문득 머리를 들고 이한을 바라보았다.
「김 선생의 애인이 서울에 있다던데, 그 여자 때문인가?」
「모릅니다, 누님.」
「이렇게 바쁘고 불안한 때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오래 자리를 비우다니.」
「‥‥‥‥」
「이주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이러다가는 근대리아의 인구가 금방 백만 명이 되겠어.」
그는 가끔 그녀의 말동무가 되었다. 깅상철의 부하들 중에서 그녀와 제일 가까운 것은 이한이다. 김상철의 지시로 장인규의 경호 역을 맡은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수가 없고 언제나 어두운 표정의 이한이 그녀를 누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장인규의 친화력 때문이었다. 여자지만 보스 기질이 있는 장인규였던 것이다. 장인규가 답답한지 길게 숨을 내쉬자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게를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누님.」
밤에는 외출을 삼가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장인규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이한은 방을 나갔다.
이금철 휘하의 최태호가 운영하는 코즈모프 바도 그날 밤에는 예외 없이 붐비고 있었다. 러시아인 여자 댄서가 플로어에서 몸을 뒤틀며 춤을 추었고 음악은 요즘 유행하는 미국곡이 흐르고 있었다. 혼잡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벽 쪽으로 다가간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숨을 내쉬었다.
「보드카 세 병에 안주 두 접시니 95달러.」
종업원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내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선불이요, 여러분.」
「지배인 오라고 해.」
사내 하나가 말하자 종업원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배인은 왜?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
그는 조선족 출신으로 모든 종업원들과 마찬가지로 유사시에는 행동대원이 되도록 훈련이 되어 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내들을 훑어본 그는 그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선족이라면 여기 와서 이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다. 생김새를 자세히 살펴보니 두상이 조선족과 다른 것이다.
「이런 개새끼들이.」
이제 종업원은 대놓고 욕설을 했다.
「어디 와서 행패야? 돈을 내든지 아니면 눈앞에서 꺼져, 이 새끼들아.」
요즘 들어 중국계 이주민이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왔는데 대부분이 부랑자나 노름꾼이 아니면 범죄자들이었고 자본을 가진 자들은 드물었다. 이들도 옷차림은 말쑥했지만 그들 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말대꾸를 하던 사내가 옆에 앉은 사내에게 중국어로 무어라고 말하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나가지.」
그리고는 사내들이 일제히 일어섰으므로 종업원은 코웃음을 쳤다.
「병신 같은 중국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이번에 몸 성히 나가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이 새끼들아.」
한국어를 하는 중국 사내가 종업원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테이블 밑에 폭탄을 장치해 놨어.」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건드리면 넌 가루가 돼. 그리고 5분 후에 폭발하게 되어 있으니 서둘러야 될 거다, 이 조선족 놈아.」
눈을 치켜뜬 종업원을 뒤로 하고 그들은 테이블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개새끼들이 무슨‥‥‥」
그러면서 다시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종업원은 상반신을 굽히고 머리를 테이블 밑으로 집어넣었다. 순간 그는 입을 딱 벌리고는 숨을 멈추었다. 테이블 밑바닥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시한폭탄이 있었던 것이다. 깜박이는 초침의 표시가 보였고 유리판에 나타난 붉은색 시간 표시는 4분 35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이구.」
머리통을 테이블에 부딪히며 상반신을 세운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이구, 폭탄이네.」
그가 아우성을 치며 동료들을 불렀고 수십 개의 머리가 테이블 밑바닥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나오고 난 다음 코즈모프 바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입구로 몰려 나가다가 넘어지고 짓밟힌 손님들의 비명과 고함소리가 그친 후 홀 안은 텅 비어졌다. 난장판이 되어 있는 홀 안에는 색색의 조명만이 번쩍이고 있을 뿐 숨막힐 듯한 정적에 덮여있다. 홀의 현관 바깥쪽에 서 있던 최태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주위로 벽을 등지고 붙어선 부하들은 모두 긴장으로 굳어진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입맛을 다신 최태호가 마악 상반신을 안쪽으로 돌렸을 때 '펑' 하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두어 걸음 다가가 홀 안을 들여다본 그는 벽 쪽의 테이블 한 개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손님들을 몰아내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테이블 한 개만 태운 것을 보면 전문가가 한 짓이오.」
코즈모프 바 뒤채의 사무실 안이다. 최태호가 턱으로 탁자 위에 놓인 폭탄의 잔해를 가리켰다.
「마피아가 다시 도전해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놈들은 아예 우리를 이곳에서 완전히 몰아낼 모양입니다.」
그러자 이금철이 입맛을 다셨다. 지난번에 하석태와 그의 부하들이 몰살당한 사건 이후로 타운의 양대 세력인 마피아와 북한 측은 적극적인 마찰은 자제해 왔었다. 그러나 양측은 필사적으로 각자의 세력을 키우면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상철이 서울로 가 있는데 일을 벌인단 말인가?」
손끝으로 턱을 쓸면서 이금철이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정보원들의 보고를 들으면 저쪽 간부 놈들은 전혀 움직임이 없어.」
「시치미 떼고 있는 겁니다. 폭탄 소동으로 코즈모프 바의 오늘 장사는 망쳤고 손님들은 겁이 나서 앞으로도 발길을 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쪽의 다른 영업장도 영향을 받을 겁니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위원장 동지. 가뜩이나 밀리고 있는 판인데 손님까지 끊기게 되면 ‥‥」
「서두르지 마라.」
단호한 말투로 이금철이 말하자 최태호가 입을 다물었다.
밤 12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단둘이서 방에 마주앉아 있었지만 바깥에는 20여 명의 부하들이 대기하고 있는 중이다.
「저쪽의 그루진스키에게 사람을 보내겠다. 오늘밤 일을 항의하고 그쪽의 해명을 듣자.」
이금철이 피로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루진스키는 파벨이 보내온 김상철의 보좌역이다.
「그리고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놈들의 사업장을 완전히 박살낼 것이라고 경고를 하는 거다.」
「놈들의 짓이건 아니건 간에 경고를 한다.」
찌푸린 표정의 최태호를 향해 그가 밀어붙이듯 말을 이었다.
「섣불리 대응했다가는 놈들의 함정에 빠져들 가능성이 많단 말이야. 다음번에는 아마 우리가 선수를 치게 될 것이다.」
기세에 눌려 한동안 눈을 껌벅이며 앉아 있던 최태호가 머리를 들었다.
「놈들은 중국계로 보였다고 했습니다. 한 놈은 한국어를 제법 했지만 나머지는‥‥」
「위장한 것이겠지. 내가 파리야킨을 칠 적에도 중국산 기관총과 로켓포를 썼으니까,」
이금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한 조가 되었던 김상철과 장인규가 다시 한 조가 되었군. 이젠 내 상대가 되어서.」
근대타운의 경비소장으로 새로 부임해온 사람은 경비본부에서 근무하던 안현국 차장이었다. 그는 근대에 파견된 안기부 직원으로 이상훈 부장의 직속 부하여서 이제 근대리아의 보안과 경비 체제는 안기부가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안현국이 자리에 앉자 차석으로 있는 전동석이 바쁘게 들어섰다.
「소장님, 어젯밤에 유정과 시(市) 건설단 소속의 근로자 세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놀란 듯 바라보는 안현국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시체는 모두 아침에 타운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강도들 소행 같습니다.」
「모두 조선족인가?」
「그렇습니다. 모두 서약서를 쓴 B그룹 소속인데 ‥‥‥」
그는 테이블 위로 바짝 다가와 안현국을 내려다보았다.
「세 명 모두가 노조 간부들입니다.」
「물론 빨강색이겠지?
「아닙니다. 모두가 노란색 입니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안현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옆쪽의 소파에 마주앉았다.
경비본부에서는 편의상 근로자를 A와 B의 두 그룹으로 구분했는데 A는 근대에서 직접 채용한 근로자였고 B는 북한쪽에 서약서를 쓰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거기에다 사상을 색깔로 나누어서 빨강은 북한 측, 노랑은 변색의 가능성이 있는 자나 중립, 파랑은 믿을 만한 사람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어젯밤의 세 사람은 노조 간부로 북한에 서약서를 쓰고 들어왔지만 이쪽에 협조적인 사람들이었다. 전동석이 서류를 내밀었다.
「세 명 모두 칼에 찔렸거나 흉기를 맞아 죽었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소장님.」
「놈들이 이제 실력행사를 하는군.」
서류를 뒤적이던 안현국이 머리를 들었다.
「본부에 보고를 해야겠다. 노조 간부가 하룻밤 새에 세 명이 피살되었다는 건 심상치 않아.」
더구나 노란 색깔의 간부이니 안현국의 얼굴색도 변할 만했다.
탁자 위에 놓인 수화기를 들고 본부의 이상훈에게 보고를 하는 동안 전동석도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근대중공업 출신의 30대 초반의 사내였다. 통화를 마친 안현국이 전동석을 바라보았다.
「본부에도 비상이 걸릴 거야. 이부장도 놀라는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꽤 힘든 싸움이 되겠어.」
「그 일과는 상관이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만 어젯밤 코즈모프 바에서 폭탄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전동석이 소동의 내막을 설명해주자 안현국은 한동안 그를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자들은 마피아의 소행이라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영업 방해를 하려고 그랬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했나?」
「아침에 송길수한테 물어보았더니 펄쩍 뛰더군요. 김 선생도 안 계신데 무슨 일을 벌리겠느냐는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누구 짓이야?」
「누가 장난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양쪽이 대립해 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장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으므로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것, 상황이 수상한데. 김상철 씨가 빨리 돌아와야겠는데요, 그래야‥‥」
전동석이 말하자 안현국이 힐끗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8시 30분이 조금지난 시간이었다.
「돌아오겠지. 오늘 내일 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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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요
즐독하였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
굿,,
즐감요~~~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ㅈㄷ
즐감요~^^
잘 읽고 갑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상철화이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