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길♡
성경: 요한복음 14장 5~6절
찬송: 258, 257, 263, 249
설교: 이 경준 목사님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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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이 물음이 사도 도마가 예수님께 물었던 물음의 핵심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물음은 아주 오랜 옛적부터 이어온 인간의 질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8절에도 같은 질문을 하는 청년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르기를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청년은 인간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영생이라는 것은 아는데 영생은 어떻게 얻는 것인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십니다. 다소 핵심에서 벗어난 답변같이 느껴지지만,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말씀입니다. 영어로는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그리고 "Without me, no one can go to the Father. 라고 하셨는데 다시 말해서 내가 그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하시며 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8편에서도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는 말씀으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 빚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신 생령입니다. 시편 90편 3절에는 “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간다는 의미는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되 하나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생기는 필연코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인생이 누리는 삶의 연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 신속히 날아가는 것과 같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잠시뿐인 세상 길 허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은 다른 것 같습니다. 인생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건강한 몸과 넉넉한 재물과 명성이 있으면 행복한 삶이 될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바 있는 청년도 그와 같은 조건은 고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청년은 삶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행복의 조건으로 우리가 나열해 보았던 것들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건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다고도 합니다.
사람의 삶이 행복해지려면 필수적으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는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영혼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 곧 영생을 얻기로 확정된 사람입니다. 돌아갈 곳을 모르고 떠도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명성을 얻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갈 곳이 없는 여행자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갈 곳이 있는 여행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청년은 돌아갈 곳을 걱정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에 대한 답을 구했던 것이지요. 그는 바리새인이면서도 영생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유대교는 율법(모세오경)을 지키면, 이생에서 복을 받고, 장수하며, 자손 대대로 번창하게 된다는 보상계율은 있어도 영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잘 알듯이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들로 이루어진 종교파벌입니다. 유대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가 정치 지도자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 구심점이 대제사장들인데 그들은 사두개파로써 바리새파와는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모세오경)만 받아들이고, 영혼과 영생과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바리새파는 B.C 2세기경부터 평신도들로 구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율법 학자라고 하는 서기관이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실생활에 적용하며 지켰습니다. 모세오경과 장로들의 구전을 같은 위치에 두고 지켰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나타나게 될 메시아 대망론과 부활의 신앙, 그리고 최후의 심판 등을 믿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청년은 바리새파의 가르침과 같이 내가 선한 행위를 많이 해야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신본주의 사상과 인본주의 사상으로 나뉘어 발전되었습니다. 이 두 사상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사상은 사람이 선한 행실을 많이 함으로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사상이고, 신본주의 사상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라고 믿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파가 주장하는 모든 계율을 지켜야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청년은 예수님께 그와 같은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러시면서 그것을 다 지켰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부자 청년의 대답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바리새인 청년이 지킨 율법은 구원받기에 합당할 만큼 완벽한 것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다음으로 하신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청년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율법은 계명 중에, 한 가지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어긴 것과 같이 여깁니다. 청년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신 계명을 어겼던 것입니다. 재물이 많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누어주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지키지 못한 죄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하신 계명을 지키지 못한 죄도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하고 어겼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라고 하셨는데, 청년은 가진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며 예수님 앞을 떠났다고 합니다.
구원은 사람이 무엇을 이루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에 구원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영생을 믿고, 얻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를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상 재물을 택하는 것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모든 부귀와 영화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간과 재물을 다 바쳐서라도 꼭 얻어야 할 것이 구원입니다. 인생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에 선택이 영생과 영벌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알면서도 세상 것에 더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눈앞에 보이는 재물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원하기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 5~6)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다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들이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여 이것이 그런가 저것이 그런가 하여 세상에서 온갖 우상과 미신을 따르며 하나님께 범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은혜로 주의 복음의 말씀이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이 위대한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우리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값 없이 받은 이 귀한 선물에 감사하며 이 복음의 메시지를 믿지 않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이 말씀의 씨가 뿌려질 때 풍성한 열매 맺는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 있게 하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올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