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이다. 영원에 계시는 분이 구속 사역을 완결하기 위해 인간으로 오셨다. 신이 인간으로 온 것이다. 이것은 고대 유렵의 신화에서도 각양 형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말 전달하기 게임처럼 10명을 줄로 세워놓고, 처음 사람에게 "아"라고 말하면, 나중 사람에게 가선 "애"라는 말로 전달된다. 이것은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육신의 진리가 선포돼 들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왜곡된다. 이것은 부패성을 지닌 인간에게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는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맞서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박사 과정에서 배운 것은 원본(Original Sources)이었다. 누군가 쓴 것이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을 쓰는 상식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지적받았다. 들었거나 아는 내용은 누군가 최초로 언급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 원자료, 즉 원본을 찾아야 한다. 박사 학위 논문이나 소논문이든 들은 이야기가 누군가 인용한 글을 재인용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학자나 책임 있는 자의 자세가 아니다. 이것을 실행하려면, 원본의 언어가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등 무슨 언어든지 터득해야 한다. 능숙할 필요는 없지만 읽을 수 있고 해석할 정도면 된다. 언어 훈련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본을 보는 자세가 아니면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또는 글을 쓸 수도 없다. 이 훈련을 받는 것이 곧 석사, 아니 박사 자격이 있다. 이 훈련을 적어도 4~7년이 걸린다. 많은 글을 읽으면서 그 내용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료에선 뭐라 했을지를 항상 떠올려야 한다. 이 자시는 신앙에 절대적이다.
성경은 신앙의 원본이다. 늘 신학생들에게 "너 나이 몇 세냐? ㅎ신앙 경력이 몇 년이냐? 성경을 몇 차례 읽었냐?"를 물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의 원본은 성경이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해하기 위해 원어인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배울 수도 없을뿐더러 신학생이나 목회자의 전유물이다. 이 따금 이것에 도전하는 자들도 있지만 헛수고이다. 언어 통달로 성경의 내용을 파악하는 유일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경 읽기를 경시해서도 안 된다. 신앙의 유일한 준거 기준이고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원본은 성경이다. 매사, 매일 성경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 근데 읽어도 읽어도, 들어도 들어도, 말해도 말해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성경의 전체 문맥에 있는 그분의 의도, 의지 또는 의미를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수백 권의 책을 읽는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3~5년 동안 책에 파묻힌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주제가 수정보완된다. 자신의 생각도 정리 돼 글을 쓰는 데 모든 자료나 정보를 갖게 된다. 비로소 글을 쓸 준비가 된 셈이다. 아니 쓸 수 있는 내용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본래, 원자료에서 무엇이라 말했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 시간의 변천을 통해 왜곡된 내용을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하지만 성경의 뜻을 쉽게 파악하려는 착각은 자유이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훈련시켜 그 의미를 파악하도록 할 것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교회의 설립 목적이다. 성경의 뜻을 자신이 파악하게 하는데 도움을 줘야 한다. 이 목적은 ㄹ위해 갖가지 프로그램을 고안하여 적용한다. 이 적용과 훈련은 고되다. 지도 교수가 박사 과정의 학생을 훈련시키는 것과 같다 하겠다. 난 이 훈련에 익숙한 자라고 감히 말한다. 근데 어렵고 힘들다. 난 한 명, 한 명을 훈련시키는데 익숙해 있다. 물론 대중을 감동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충격을 주고 하나식 정리하면서, 지적하면서, 수정하면서 훈련시키는 과정은 적어도 꾸준히 했을 때 최소한 13년이 걸린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평생 훈련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