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장
점심시간이 지난 후, 곧바로 북이 울리며 제 이조 서른 두 명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조는 유화결이 속해 있고 독사편 동태승. 광음마각 천개일등의 마두들이 속해 있어 그들의 격돌을 기대하며 모두들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이곳의 두 개 세력인 유가검보와 인가장의 대결이 비무대 위에서 펼쳐질지, 아니면 동방회가 어떤 식의 음모로 유화결을 해코지 할지 하는 추측과 함께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 관심에 긴장에 대한 화답이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대진표를 손에 든 소중부가 유화결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유화성은 물론, 제일검대주 유상기도 바짝 긴장하며 유화결의 상대가 누구인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유화결의 상대로 나온 사람은 크게 우려할 인물이 아니었다.
유화결은 비교적 간단히 상대를 제압하고 열여섯 명으로 줄어든 이조의 결선대열에 올랐다. 그 뒤 두어 번의 대결이 더 벌어졌다.
그리고 소중부의 입에서 인장호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장내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비록 이조 결선 첫판부터 유화결과 대결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인장호와 유화결의 이름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쥐죽은 듯 조용하던 관중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소중부가 인장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인장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부석 가까운 곳이나, 동방회 회주의 아들 천막 속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곳엔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인장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장호의 이름을 부르는 소중부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인장호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관중석에서는 더 큰 술렁거림이 일었다. 이제껏 인장호가 현성비무대회장에 유화결을 끌어내려고 얼마나 많은 수작을 벌여 왔던가?
뒷골목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유화결이 비무대회장으로 나오게끔 온갖 소문을 만들고, 온갖 비열한 짓거리들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현성비무대회를 거창하게 벌여 놓았다.
그런데 소중부의 두 번 외침에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부르겠네, 인장호 공자!”
소중부가 마지막으로 인장호의 이름을 불렀다. 웅성거리던 소리들이 사라지고 적막이 온 관중석을 가득 채웠다.
“인장호 공자 실격이오. 동시에 호남의 황석(黃石) 공자 부전승이오!”
세 번의 호명이 있고 나서도 인장호가 나타나지 않자 소중부는 인장호와 비무를 벌이기로 한 황석이라 젊은이의 부전승을 선언했다.
“뭐야?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가?”
“인장호가 기권을 하다니? 그럼 여태껏 그놈이 벌인 짓은 무어란 말인가?”
관중석에서 온통 술렁거리는 소리가 진동했다.
‘도대체 뭔가?’
유가검보의 일검대에 둘러싸인 자리에 앉은 유화성의 눈이 송곳날 같은 빛을 뿜었다. 그간의 모든 의문들은 인장호와 유화결의 대결로 다 풀리리라 생각했다.
차라리 인장호와 유화결이 대결을 하는 상황이 조금이라도 빨리 벌어진다면 그건 오히려 가장 바람직했다.
결과야 어찌됐든 대결이 끝나고 나면 일검대와 함께 뒤로 안 돌아보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비무와 상관없이 관중석에 숨어있다는 마두들이 신경 쓰이지만 백 명이나 되는 일검대 소속 무사들을 어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유화결과 인장호가 싸우기 전에 그 야비한 놈이 동방회의 힘을 벌어 고용한 마두들을 이용해 유화결을 처치하려고 할 때인데 그땐 부득이 자신이 나설 참이었다.
실수를 가장한 살초가 뿌려지는 순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고집불통 동생이 절대로 비무를 포기하지 않으니 위험 부담이 크긴 해도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장호란 놈이 비무대회에 결선에 불참하고 실격을 당해 버렸다.
이건 대체 무슨 말인가?
유화성의 머리가 급격히 회전했다. 이렇게 불참하고 실격패 할 것이라면 왜 그동안 그렇게 기를 쓰고 유화결을 비무대회에 출전하게 만들었을까?
그 야비한 놈은 유화결을 자신의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으로 처치하기를 바라며 불참한 것인가? 그러나 그것도 말이 안 된다.
광음마각이나 그 외 다른 인간들의 손을 빌어 유화결을 처치하려면 인장호는 계속 버티고 있으며 동생의 자존심을 긁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대진표를 조작해 마두들과 유화결을 싸우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불참해 버리면 동생 유화결 역시 당장이라도 검보를 돌아가면 그만이다.
‘대체 왜?’
유화성은 계속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직까지도 인장호의 실격패 선언으로 인한 관중석의 술렁거림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대체 왜?’
유화성은 똑같은 의문을 계속 되뇌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관중 속 그 어느 곳에도 인장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낯선 사람들의 얼굴만 보였다.
어느 순간!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
유화성은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뭐야, 무슨 소리야 형?”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만든 인장호의 불참으로 인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비무대 위만 쳐다보고 있던 유화결은 유화성의 고함에 흠칫 놀라며 유화성을 쳐다보았다.
“숙부님!”
유화성은 급박한 목소리로 숙부 유상기를 불렀다. 유화결 못지않게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있던 유상기는 유화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즉시 관중석에 흩어져 있는 일검대 소속 무사들을 모두 이곳으로 모이게 하십시오! 어서요!”
유화성은 더욱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무슨 일이냐?”
전에 없이 서두르며 고함을 지르는 유화성의 모습에 유상기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즉시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화경이, 화경이는?”
유화성은 유화결을 쳐다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여자들끼리만 가는데 라며 이 소저와 같이 가서 아직 안 왔잖아? 그런데 왜 그래 형?”
유화결은 유화성의 얼굴에 드리워진 급박한 기운을 느끼며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언제 갔는데 아직 안 온단 말이냐? 호위는 철저히 하고 갔겠지?”
유화성은 유화결과 백봉령주가 찾아간 객점 쪽을 연신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열 명을 딸려 보냈어. 그런데 왜?”
유화결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답하며 숙부 유상기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화성아?”
유상기도 똑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명을 드릴시간 없습니다. 숙부님, 어서 일검대 무사들을 이곳에 모아주십시오. 그리고 최대한 빨리 본가로 돌아갈 준비를 하십시오.”
연속해서 고함을 지른 유화성은 빠르게 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결국은 낮술을 마셨군.”
진우청은 급하게 관중들 사이를 헤집는 유화성을 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한 이틀 멀쩡한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함께 관중들 사이로 허둥지둥 움직이는 모습은 거나하게 취한 상태 같았다.
“그런데 왜 이리로……?”
유화성이 곧장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진우청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유화결이나 유화경이 근처에 있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관중들을 밀치며 다가온 유화성은 곧바로 자신 앞에 섰다.
진우청은 두어 번 눈을 껌벅거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술이 취한 것은 아니었는데 유화성의 모습은 술이 취했을 때보다 더 이상했다.
“혹시라도 내 동생들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구해주게!”
유화성은 다짜고짜 말했다.
‘낮술도 아니고… 어제 먹은 술이 아직 덜 깬 것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유화성의 행동에 진우청은 할 말을 잃고 유화성을 쳐다보기만 했다.
“약속해 주게!”
유화성이 윽박지르듯 다시 말했다.
“낮도깨비에라도 홀렸습니까? 술기운도 안 느껴지건만…….”
진우청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발 부탁이네!”
유화성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이어졌다.
“비무대 위에서 동생과 만날 경우를 대비해 하는 말인 모양인데… 뭐 그렇게 하지요. 비무인데 죽일 이유까지야…….”
유화성의 말을 ‘비무대회에서 동생 화결을 만나면 좀 봐주라.’ 는 뜻으로 해석한 진우청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화성이면 몰라도 유화결이라면 피치 못해 목숨이 위험해질 상황까지 가지 않고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맙네!”
진우청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화성은 다시 관중들 속으로 사라졌다.
“언니! 표정이 왜 그래요? 혹시 그때 그놈들이 여기에도?”
유화경은 객점에서 나오며 시종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백봉령주를 보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는 자신들과 같은 목적으로 객점을 찾아갔다 나오는 여인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백봉령주를 노리는 사람들은 없어보였다.
설사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열 명이나 되는 일검대 소속 무사들이 은밀히 호위하고 있기에 걱정이 없었다.
“아, 아니에요. 속이 좀 좋지 않나 봐요!”
백봉령주는 서둘러 변명하고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난 또!”
유화경은 안심하는 기색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은 쏜살같이 달려오는 한 인영으로 인해 다 뿜어내지도 못하고 급히 멈추어졌다.
“큰 오빠!”
바람처럼 달려오는 유화성을 보고 유화경은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별일 없는 것이지?”
급하게 신형을 멈춘 유화성은 유화경과 백봉령주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별일? 무슨 일? 그러고 보니 큰 오빠가 이곳까지 쫒아온 것은 별일이네, 참!”
유화경은 어이없는 표정을 하며 답했다. 그녀는 여자들 뒷간 가는 데까지 허둥대며 쫒아온 유화성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것이다.
유화성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무사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난 이 소저와 함께 할 얘기가 좀 있으니 넌 먼저 가 있거라.”
유화성은 유화경을 보고 빠르게 말했다.
“오, 오빠!”
점점 이해하기 힘든 행동만 하는 유화성을 보며 유화경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말대로 해라!”
유화성은 일검대 무사들과 함께 떠밀듯이 유화경을 숙부와 유화결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고, 공자님!”
다짜고짜 유화경을 자신에게서 떼어내고 자신의 팔을 끄는 유화성을 보며 백봉령주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언제나 여유롭고 모든 것에 무관심한 듯 술독에 빠져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던 사내! 그 사내가 이처럼 급하게 서두르는 모습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게 했다.
“나는 지금 내 예상이 모두 틀렸으면 좋겠소. 한없이 실없는 놈이 되더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소.”
백봉령주의 팔을 끌고 도로 객점 안으로 들어온 유화성은 빠르게 말했다.
“무슨?”
백봉령주는 걱정스런 얼굴이 된 채 답했다.
“우선 소저의 정체부터 밝혀주시오. 소저가 누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최소한 적은 아닐 것이란 생각은 하고 있소.
아영과는 핏줄이 아니면 결코 그렇게 닮을 수 없는 특징들이 많으니까요.”
유화성은 찌르듯이 백봉령주를 쳐다보았다. 아영이란 이름이 나오자 백봉령주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미안해요.”
마침내 백봉령주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오. 최대한 빠르게 대처해야 하오. 이 소저가 알고 있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시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백봉령주는 너무 갑작스런 유화성의 행동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우선 동방회가 이곳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를 말해주시오.”
유화성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백봉령주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에서 동방회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그 핵심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고, 그나마 알고 있는 것도 어디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실마리는 유화성이 잡아주었다.
“그것보다는… 먼저 이 소저의 정체는 무엇이고,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는지부터 말해 주시오.”
유화성의 말에 백봉령주는 입술을 움직였다.
“전 아영과 외사촌간이에요. 아주 어릴 때는 가까운 곳에 살며 친형제처럼 지냈는데 아영이 멀리 이사를 간 열 살 때 이후로는 만나지 못하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났어요.
그리고…… 전 남패천의 사람이에요.”
백봉령주는 간략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남패천? 남패천이 왜……?”
부릅뜬 눈으로 고함을 치던 유화성은 입을 다물었다. 동방회가 이곳에 왔다면 남패천도 오지 말란 법이 없다. 지금 현재 무림의 정세로는 동방회와 남패천이 가장 충돌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까? 유가검보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은 남패천과 동방회의 싸움으로 귀결 되는 것일까? 그랬다면 정말 좋겠지만 모든 정황들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유화성의 상념을 끊으며 백봉령주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우리… 그러니까 남패천의 정보조직인 비원각(秘苑閣)에서는 최근 동방회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그들이 이곳에서 무슨 일을 꾸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은밀히 조사를 벌였어요.
그러던 중, 동방회가 유가검보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걸 알아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유가검보와 동방회가 손을 잡은 것으로 의심했어요.
그건 우리 남패천에서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라 좀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동방회는 이곳 유가검보에 첩자를 여러 명 심고는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빠르게 말한 백봉령주는 잠시 말을 끊고 마른 침을 삼켰다.
“유가검보와 동방회가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는데 대해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동방회가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며 이곳 유가검보에서 노리는 것이 무언지는 알아야 했고,
비원각에서는 그 적임자로 나를 지목했어요. 아영과 난 외모에서…….”
“됐소!”
유화성은 백봉령주의 말을 끊었다. 그 이후부터 백봉령주가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접근하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는지는 직접 겪은 일이다.
유화성은 타들어가는 목구멍 속으로 억지로 침을 넘겼다. 백봉령주의 대답을 미루어보면 이곳에서 벌이지는 일은 동방회와 남패천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우려대로 동방회의 목적은 자신 가문을 노린다는 것이다. 남패천의 개입은 그 이후이다.
“그들이 우리가문에서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냈소?”
유화성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직 그걸 알아내지 못했어요. 비원각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여기 와서 우리도 다각도로 알아보았지만 아직…….”
백봉령주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유화성은 질끈 입술을 씹었다.
이들이 적이 아니란 것은 확실해졌지만 모든 상황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대로인 그 상황은 시시각각 가문을 덮쳐 오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급박한 일이라도……?”
이번에는 백봉령주가 질문을 던졌다. 이 사내는 자신이 유가검보로 들어간 그날부터 자신의 연극을 눈치 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사내가 지금 이 순간 불현듯 자신의 정체가 궁금해서 이렇게 급히 달려온 건 아닐 것이다. 뭔가 이상한 징후를 발견한 것 같았다.
“인가장의 장남 인장호가 비무대회에 출전하지 않았소!”
유화결은 빠르게 말했다.
“그 자의 목적이 화결 공자님과의 비무가 아니었던가요?”
백봉령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을 이용해 화결 공자님을……?”
“그러려면 인장호 그놈은 더더욱 출전을 해야지요. 그놈이 없으면 화결이는 더 이상 비무대회에 출전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역시 그렇죠?”
백봉령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대체 그들의 목적이 무얼까요, 무얼 노리고 이런 번잡한 일을 벌였을까요?”
“인장호는 미끼였을 뿐이오. 검대를 분산시키기 위한!”
유화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끼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백봉령주가 물었다.
“소저의 정체를 알고, 동방회와 어떤 다른 세력 간의 다툼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니 더욱 확실해졌소.
이런 비무대회를 열고, 뜻밖의 고수들을 출전시켜 계속 화결이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 유가검보의 검대가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지요. 지금 일검대의 반이 이곳에 와 있지요.”
유화성은 자괴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찌 됐다는 거죠? 일검대의 반이 이곳에 있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요? 오히려 더 안전하지 않나요?”
백봉령주는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놈들이 노리는 것이 화결이나, 우리가문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아닌, 우리 유가검보 자체라면……?”
유화성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요. 유가검보가 무슨 작은 무도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요? 유가검보 정도의 세력과 싸우는 건 전쟁이나 마찬가지예요.
많은 인원을 투입하고, 근 열흘은 싸워야 결판이 날거예요. 지금 동방회의 인물들로 추측되는 사람들은 흑사편 동태승, 광음마각 천개일,
그리고 이미 패해서 사라진 탈명철검 조탁과 거력패도 염호광 정도와 몇 명 더 있다고 보아져요. 아무리 그들이 고수라도 유가검보를 상대할 순 없어요!”
백봉령주는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제까지라면 몰라도 오늘이면 인원은 충분하지요!”
번쩍 하고 섬광을 내뿜은 유화성의 눈이 비무대회장 주변의 관중들을 훑었다. 어제에 비해 또 두 배는 더 되는 관중들이 비무대회장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 설마 저들이…….”
유화결을 따라 관중들을 쳐다보던 백봉령주는 와락 고개를 돌려 유화성을 쳐다보았다.
“저들 중에 사분지 일만 일검대수준의 실력자라면 검보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소.”
유화성의 눈빛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입을 벌린 백봉령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번 둑이 무너진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졌다.
“서왕문, 서왕문의 인물이 이곳에 있다는 단서를 조금 전에 포착했어요. 세상에…….”
백봉령주는 자신의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서왕문이 동방회와 손잡고 그들의 세력을 비무대회 관중으로 위장시켜 은밀히 투입했다면……. 은밀히 투입할 필요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예상 밖의 고수를 내세우고 온갖 방법으로 잔뜩 고무시켜 놓은 비무대회의 결선에는 인산인해를 이루며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다.
그냥 그들과 함께 산책하듯 들어오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유가검보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동방회의 계획이었단 말인가?
일만 냥의 상금을 내걸고 예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비무대회를 열어 관중이 물밀 듯 모이게 한 것과, 인장호를 미끼로 유화결을 끌어내고,
위기감을 증폭시켜 유가검보의 전력을 양쪽으로 분산시킨 것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대규모의 인원을 끌어들여 전력이 분산된 유가검보를 단숨에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
백봉령주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는 계획 같았지만 왜 그런단 말인가, 그들이 왜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유가검보를 무너뜨리려 한단 말인가?
아무리 무림간의 싸움이 치외법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지만 안휘성에서 제일 큰 검가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함부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유가검보를 무너뜨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유가검보는 화산파와는 형제지간이나 마찬가지인 사이가 아닌가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백봉령주는 강한 부정이 서린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 ‘무엇 때문’ 이라는 질문에 막혀 미처 이런 사태까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했소!”
유화성은 이를 악문 후 말을 이었다.
“그들이 유가검보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유가검보를 무엇 때문에 무너뜨리려 하는지 아직까지도 도저히 알 수 없소.
하지만 그걸 덮어 두면 막혔던 생각이 이어지오. 만약 그들에게 앞서 말한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유가검보를 무너뜨릴 이유가 있다면……. 그래서 이런 일을 벌였다면?”
거의 성공한 것이다. 제일검대는 반으로 나눠졌고, 다른 인원들도 광산과 채석장으로 분산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유화성의 눈빛이 다시 비무대 주변의 관중들에게로 향했다.
“비약이 너무…….”
“나도 제발 터무니없는 비약이었으면 좋겠소!”
유화성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어, 어떻게 하죠, 이젠?”
유화성의 눈빛과 음성에 동화된 백봉령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허둥거렸다.
“소저는 동료들과 함께 소리 없이 이곳을 빠져 나가시오. 절명자라는 노인 정도라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오.”
몸을 일으킨 유화성은 빠르게 말했다.
“좀 전까진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어요. 마지막 순간 아영과 약속했어요.”
절명자가 자신의 동료라는 것을 유화성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백봉령주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유화성은 백봉령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몸을 날렸다.
유화성이 몸을 날린 후 백봉령주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억지소리 같았지만 뇌리 한 구석에서는 계속해서 경종이 울려댔다. 백봉령주는 급히 이층 객실로 올라갔다.
“노야! 어서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전서구도 함께!”
백봉령주는 다급한 표정으로 오무평에게 지시했다.
“이곳으로 말인가?”
오무평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아마도 이곳에서 분란이 일 것 같아요.”
백봉령주는 급하게 말했다.
“마차는 유가검보 가까운 곳에 있지 않은가? 자네와 현기조장이 그곳에 있었으니…….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모든 준비를 마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리고…….”
오무평의 말을 들은 백봉령주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에게 무슨 위험이 닥쳐도 유가검보에서 닥칠 줄 알았다.
유가검보 소유의 광산이나 채석장에서 뭔가 발견되면 폭파시키고 그곳에서 마차에 올라 탈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차는 정작 이곳에서 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도착하셔서 마차를 이리로 몰아오세요, 노야!”
백봉령주는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겠네.”
오무평은 객실 뒷문으로 나가 신형을 날렸다. 그러는 사이, 강변의 관중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그 소란은 이제껏 비무를 치루면서 수없이 발생했던 소란과는 너무 달랐다. 자리에서 일어선 백봉령주는 급히 객실을 빠져나왔다.
“크아아아-”
비무대 위에는 무릎을 꿇은 한 중년인이 처절한 절규를 토하고 있었다. 그 중년인 옆에는 가슴 부위에 예리한 검상을 입은 청년이 누워 있었다.
청년은 인장호였다. 그리고 그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인장호의 부친 인가덕은 아들의 시체 옆에서 피를 토하듯 통곡했다.
비무의 열기로 한껏 고조되었던 장내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이런 비무대회를 만들고 유화결을 끌어내기 위해 그토록 광분했던 인장호가 결선 대회에 출전하지 않은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인장호의 시체를 보며 그 의문을 해소했다.
그러나 뒤이어 더 큰 의문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대체 누가 인장호를 죽였단 말인가? 그런 의문과 동시에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한 두려움을 일게 했다.
‘이것이었구나. 결국은 이렇게……!’
급히 비무대회장에 도착한 백봉령주는 비무대 위에 있는 인장호의 시체를 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모든 상황은 유화성의 짐작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곳으로 달려올 때까지도 반신반의했다.
동방회가 아무리 큰 힘을 축척했다고 하지만 안휘성의 제일 큰 검보를 무너뜨리리란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화산파와 구내문파의 개입도 불사할 만큼 무모할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들이란 판단이 들었다.
인가장의 장남 인장호까지 이렇게 시체로 만들어 올 인간들이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장호의 죽음은 동방회의 사주를 받은 인가장이 유가검보를 칠 수 있는 커다란 구실을 제공할 것이다.
백봉령주는 자신도 모르게 경직되어 오는 근육을 억지로 이완시키며 비무대 위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비무대 위에 무릎을 꿇은 인가덕의 오열은 영원히 끊이지 않은 것처럼 계속됐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어느 누구나 똑같았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인가덕의 통곡은 한참이나 더 계속됐고 아무도 쉽사리 만류하지 못했다.
결국은 인가장의 집사 공야순이 다가가 인가덕을 달랬지만 망연자실한 인가덕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인가덕을 대신한 공야순이 비무대회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공야순의 얼굴에서 뭉클 살기가 피어올랐다.
“만장 하신 여러분!”
분기 가득한 고함소리가 장내를 진동시켰다. 목소리에 적지 않은 공력을 불어 넣은 것이리라.
“여러분의 즐거운 행사를 방해한 행동 차후 백배 사죄 하겠소. 여러분들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계신 바와 같이 우리 인가장의 장남 인장호 공자는 오늘 한 구의 주검이 되어 집으로 왔소.”
비분강개한 공야순의 목소리가 이제는 통곡처럼 울려나왔다.
한참 열기가 달아오르던 비무대회는 중단 되었지만 아들의 시체를 놓고 통곡하는 인가덕의 모습과 공야순의 목소리에 그 누구도 불평을 토로하거나 소란을 피우지 못했다.
먹구름처럼 자욱하게 내려앉는 정적 속에서 공야순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리고 인 공자의 죽음이 이곳에서 열리는 비무대회와 절대로 무관하지 않기에 우리는 여러분의 유흥을 멈추면서까지 이곳에 올랐소.”
인장호의 죽음이 비무대회와 연관이 있다는 공야순의 목소리에 적막이 감돌던 비무장 주변에 서서히 소란이 일어났다.
“우리 인 공자가 이번 비무대회에서 누구와 그토록 비무하기를 원했는지 여러분도 잘 알 것이오.
우리 인 공자는 저기 앉아 있는 유가검보의 둘째 공자인 유화결 공자와 필생의 비무를 원했고 만반의 준비를 해왔소!”
고함과 함께 공야순의 손가락이 유가검보의 사람들이 자리한 곳을 가리키자 관중석이 일렁이며 모든 시선들이 유가검보의 사람들 쪽으로, 그리고 유화결 쪽으로 모여졌다.
“오, 오빠!”
하얗게 질린 표정의 유화경이 유화결과 유상기를 쳐다보았다. 아직 상황의 시작에 불과했지만 그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불길한 느낌이 구름처럼 엄습했다.
“가만히 있어라!”
유상기도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사방으로 돌려 유화성을 찾았다. 갑자기 일어서서 일검대의 모든 검수들을 이곳으로 모으라던 유화성의 얘기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술에 찌들려 폐인처럼 지냈지만 조카 유화성은 비무대회장에서 풍기는 음모의 기운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고 지금의 상황 역시 한 발 앞서 간파하고 몸을 움직인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 검보로 달려가 상황을 알리거나 다른 조치를 취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일검대원 백 명이면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야순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렇게 준비를 한 우리 인 공자의 실력에 위협을 느낀 저 유가검보의 무리들이 우리 인 공자을 살해했소.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유가검보 사람들을 향해 한참동안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던 공야순은 결정적인 말을 내뱉고 인가덕처럼 통곡성을 터뜨렸다.
웅성거리던 관중석의 소란이 훨씬 더 커지며 이곳저곳에서 슬며시 자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지금 무슨 수작을 벌이고 있는 것이오?”
점점 커져가는 소란 속에서 유상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공야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후한 공력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술렁이는 관중석의 소란을 대번에 가라 앉혔다.
비록 유가검보주의 막내 동생이었지만 근 사년 동안 일 검대 주직을 맡아오며 크고 작은 싸움을 치러낸 유상기의 신위는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또한 유상기의 고함소리와 함께, 이미 한 곳에 모인 일검대 소속 대원 백 명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자세를 갖추자 처음보다 더 강한 정적이 주변을 에워쌌다.
기세 좋게 나오던 공야순도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크아아-”
정적이 감돌던 장내에 다시 인가덕의 통곡성이 울려 펴졌다. 자식의 주검 앞에서 이성을 상실한 인가덕에겐 그 어떤 위압도 딴 세상의 얘기 같았다.
인가덕의 통곡소리에 다시 비통한 표정이 된 공야순이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 인가덕이 통곡을 멈추고 일어섰다.
“수작이라고? 네놈 눈엔 아들의 주검을 안고 통곡하는 내 모습이 수작으로 보이느냐? 내 아들……. 내 아들의 몸에 모든 증거가 있는데 수작이란 말이냐?”
피를 토하듯 외친 인가덕이 인장호의 상의를 걷어 올렸다. 인장호의 상의가 벗겨지고 알몸의 상체가 드러나자 다시 소란이 일었다. 인장호의 상체에는 선명한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미 피는 말라져 있었지만 쩍 갈라진 살점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 섬뜩한 상처는 오른쪽 옆구리에서부터 이상한 궤적을 그리며 그어져 올라가 심장에서 훨씬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옆구리에서는 베기의 공격이었고, 심장에 이르러 찌르기 공격으로 생명을 끊는 치명적인 검초였다.
“표풍관일(飄風貫日)!”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바람처럼 휘몰아쳐 올라가 해를 꿰뚫는 표풍관일의 수법! 인장호의 상체에 새겨진 상처는 표풍검법 전반부의 한 초식이었다.
이곳 출신의 무인이라면 누가 보아도 그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곳 사람이 아니더라도 안휘성을 진동시키는 유가검보의 표풍검법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맞다. 표풍관일이다.”
잠시 후 누군가 맞장구를 쳤다. 그와 함께 둑이 무너지듯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군중심리란 것은 그래서 항상 위험했다. 누군가 거두절미하고 ‘이게 옳으니 이렇게 합시다.’ 하고 고함을 친 후, 덩달아 몇 사람이 옳소!, 옳소! 하고 선동하면
그 이면에 깔린 내막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우르르 일어선다. 지금 관중석에서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 선동하는 사람들은 짜여진 대로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으음!”
유상기는 침음성을 터뜨렸다. 어처구니없는 모함이었다. 그러나 그걸 확실하게 뒤집지 못한다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그 정도의 검상이라면 충분히 흉내 낼 수 있소. 그리고 인가장의 장남이 그런 상처를 입고 죽으면 그 의심이 우리에게로 제일 먼저 돌아올 텐데 우리가 왜 그런 바보짓을 한단 말이오?”
유상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과 함께 불끈 내력을 불어넣어 고함을 쳤다. 유상기의 반박과 함께 점점 커져가던 소란이 조금 줄어들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인장호의 시신만 따진다면 유가검보의 소행으로 여겨야겠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본다면 유상기의 말이 지당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설명하겠소!”
소란이 줄어들고, 다시 적막이 내려앉으려는 찰나, 두 명의 인영이 비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짙은 흑의에 키가 큰 중년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보통의 키에 갈색 폐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한쪽으로 휩쓸리려는 상황을 겨우 진정시킨 유상기는 비무대 위로 오르는 두 사람과 함께 전신을 덮쳐오는 불길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검갑을 움켜쥐었다.
인가장의 장남을 아무 거리낌 없이 시체로 만들 정도로 잔인한 놈들이라면 이렇게 뭔가 다른 올가미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런 예감이 유상기의 뇌리속으로 강하게 자리 잡아갔다.
“우린 이곳 비무대회를 구경하러 오다가 오늘 새벽 우연히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오.”
자신들을 간단히 소개한 흑의 중년인이 말을 이어갔다. 전혀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흑의 중년인의 말을 비무대회장 구석구석까지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중년인의 내력이 고수의 수준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음 목격했을 때는 너무 먼 거리인지라 세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한 명을 상대로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다고 느꼈소.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니 그냥 지나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한 명을 상대로 너무 많은 인간들이 이리떼처럼 달려드는 상황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어 우리는 사건 현장으로 몸을 날렸소.”
중년인의 설명을 모든 관중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허나 거리가 워낙 멀었기에 우리가 싸움터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늦은 상태였소. 다수를 상대하며 기력이 떨어진 청년은 결국 흉수 한 명의 공격에 심장을 찔리고 절명했소.
그리고 복면을 쓴 흉수들은 합공으로 청년을 처치한 것도 모자라 그 현장을 은닉하고자 시체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려하고 있었소.”
중년인은 그 장면이 제 삼자인 자신으로서도 삭이기 힘들다는 듯 분개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용하던 관중석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소. 그래서 복면을 쓴 흉수들을 공격했소. 그런데 그들은 결코 만만치 않은 실력들을 지니고 있었소.
나 하나뿐이었다면 그들에게 당해 고인과 같이 불에 타 죽었을 것이오. 옆에 계신 노 선배 덕분에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더 나아가 흉수들을 핍박하기까지 이르렀소.”
중년인은 갈색 폐포 차림의 노인을 쳐다보고 다시 말했다.
“밀리기 시작한 흉수들은 어떻게 하든 고인의 시신만은 뺏어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지만
노선배의 주먹 앞에서 그것은 불가능했고 나중에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들 흉수 중, 두 명을 생포했소.”
낮고 긴 중년인의 설명이 끝을 맺었다. 비무대 주변의 관중들은 흉수 두 명을 생포했다는 중년인의 말에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 흉수를 끌어내라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무대 위의 중년인과 노인의 얼굴에서 흐릿한 음소가 흘렀다.
“끌고 와라!”
고함을 지른 사람은 중년인에게 잠시 자리를 양보한 인가덕이었다.
인가덕은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재차 고함을 지르자 관중들 속에서 여러 명의 사내들이 흑의 복면을 한 채 결박된 두 인영을 끌고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복면을 벗겨라!”
“어서 복면을 벗겨라!”
관중석에서 다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복면을 벗겨라!”
인가덕이 고함을 질렀다. 즉시 주변에 있던 인가장의 사내들이 흑의 두 명의 복면을 벗겼다.
온통 땀에 젖은 얼굴이 복면 아래로 드러났다. 짐작했듯이 그들은 유가검보의 무사들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들은 유가검보의 향주들이었다.
그것도 젊은 향주들이 아닌, 제법 고참 축에 속하는 향주들이라 휘주 인근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저들이었구나…….’
온통 웅성거리는 소란 속에서 백봉령주는 신음성을 삼켰다.
삼검대 소속의 향주 나지강 외에 다른 검대 소속 향주 몇 명도 동방회에 포섭 당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신원은 몰랐는데 저들이었던 모양이다.
저들 두 사람의 이검대 소속 향주는 이들의 손에 생포되고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건 연극일 것이다.
저들은 인장호와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고 애초에 정해진 각본대로 연기를 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백봉령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일어날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털어놓고 유가검보주와 공개적으로 상의하는 것이 나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후회가 들었지만 처음에는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총단에서는 동방회와 유가검보가 손을 잡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또한, 남패천과 유가검보는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립하는 관계에 더 가까웠으므로 자신들의 행동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동방회의 움직임이 너무 신속했다.
어렵게, 어렵게 유가검보에 잠입하고 채 사흘도 지나기 전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젠 그런 후회는 백 번을 해도 소용없다.
모든 것이 음모이고, 모든 증거들이 조작이겠지만 인장호의 시체에, 증인까지 둘씩이나 준비하고,
포섭된 이검대 소속 향주들까지 꿇어앉혀 놓았으니 저들은 그것을 구실로 밀어부칠 것이다.
지금의 수작은 마지막 요식행위일 뿐이리라. 이곳에 모인 수많은 관중들을 의식하고,
또 차후에 이곳의 일을 동방회가 아닌 인가장과 유가검보의 싸움으로 소문내기 위한…… 백봉령주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름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이건 모함이오. 모두 누군가 꾸민 모함이오.”
소란스런 움직임 속에서 유상기강 고함을 질렀다.
“모함? 모함이라고……? 이 찢어 죽일 놈! 이렇게 완벽한 증거들이 있는데 모함이란 말이냐?”
유상기의 고함에 인가덕은 절규를 하듯 소리쳤다.
“저 두 사람이 모든 걸 꾸몄다면 모두가 속은 것이오.”
유상기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검갑으로 중년인과 노인을 가리켰다. 당장이라도 몸을 날려 검을 휘두를 듯한 유상기의 모습에 소란들이 다시 잦아들었다.
“무슨 사연이 있고, 무슨 음모가 있는지 우린 모르겠소. 우린 유가검보나 인가장 어느 곳과도 원한을 맺고 싶지 않소.
우리는 그냥 우리가 겪은 일만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을 뿐이오. 음모든 모함이든 그건 두 가문이 알아서 가리시오. 모함이라면 이들 두 사람이 가장 확실히 밝혀 주겠지요.”
그 말과 함께 증인으로 나섰던 두 사람은 훌쩍 비무대 아래로 사라졌다.
유상기는 다시 신음을 삼켰다. 그들 역시 한패일 것이지만 그건 심중뿐이었다. 그나마 그들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표면상에 나타난 증거들이었다. 그것들이 상황을 이끄는데 더 큰 작용을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집사 공야순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똑똑히 말해라. 누구의 사주를 받고 우리 인 공자를 해쳤느냐?”
공야순은 유가검보의 이검대 소속 향주 한 명의 목에 검을 들이대며 물었다.
“말할 수 없소!”
질문을 받은 사내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 대신 바른대로 말을 하면 죽이지는 않겠다. 네놈들은 주인 명을 받은 개들일 뿐이니까.”
공야순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절대 말 못하오!”
목에 칼을 들이댄 향주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듯 완강히 대답을 거부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유상기를 쳐다보았다. 향주의 눈에서 충성을 다짐하는 무사의 기개가 엿보였다.
“음!”
유상기는 입 밖으로 신음을 토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유가검보에서 시킨 일이라고 시인했다면 사전에 짜여진 음모라고 밀어부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검대 소속 향주는 악착같이 대답을 거부하며 죽음으로서 비밀을 지겠다는 자세를 고수했다. 그리고 더없이 충직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이검대 소속 향주의 모습에, 이 모든 것이 혹시 동방회가 꾸민 음모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을 하던 사람들도 서서히 그런 의심을 접게 되었다.
“이 쳐 죽일 놈, 어서 말해라, 어서!”
인가덕이 갑자기 뛰어들며 공야순이 들고 있던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대답을 거부하는 향주의 어깨를 찔렀다.
“크윽!”
어깨를 질린 유가검보의 향주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인가덕을 향해 침을 뱉었다.
“이, 이놈!”
인가덕이 검을 높게 쳐올렸다. 그러나 공야순이 급히 만류해 검이 향주의 목을 자르는 사태는 피했다.
“젊은 혈기가 가상하구나.”
공야순이 이제껏 질문을 던진 향주에게서는 더 이상 답을 얻기를 포기했다는 듯 다른 한명의 향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퉤!”
그러나 또 다른 유가검보의 향주 하나도 공야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라! 우리 검보는 네깐 장사꾼 놈들에 굴하지 않는다.”
다른 향주는 훨씬 더 강경한 태도로 고함을 질렀다.
감탄을 자아내게 할 만한 기개와 의기였지만 그건 유가검보에 대한 올가미를 더욱 조이게 만드는 튼튼한 밧줄 역할을 했다.
"누구도 지시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돈의 힘만 믿고 건방지게 날뛰는 냄새나는 놈들은 용서할 수 없다.”
제 오향의 향주 이진석(李晉席)의 말에 장내는 쥐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지시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장호를 죽인 것은 유가검보 소속 향주들의 소행이다-
그 말이 폭풍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비록 유가검보의 수뇌부가 지시를 하지 않았다지만 개의 잘못은 주인의 책임을 져야하고 그 책임이 어떤 것일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래도, 이래도 더 할 말이 있느냐? 뚫린 입이 있으면 어디 계속 떠들어 보아라!”
인가덕이 두 눈 가득 혈광을 번뜩이며 검을 치켜들고 유상기를 가리켰다. 유상기는 수염만 부르르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이들의 행동은 유가검보를 치기 위한 표면적인 구실을 만드는 것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내막은 철저히 감추어두고 드러난 증거만으로 모든 것을 꾸며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내막을 밝힐 시간은 절대로 주지 않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무언가 탈출구가 있을 함정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마저도 이젠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음모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끈이라 생각한 그 끈마저 끊어져 나가고 있었다.
“크윽!”
“큭!”
인가덕의 손에서 검을 뺏어든 공야순이 두 명의 향주들 목을 베었다.
-왜?-
목이 베어지는 이검대 향주들 눈에 그런 의문이 강하게 떠올랐다. 각본대로 움직인 이후에 보장된 부귀영화가 저승행일 줄이야....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공야순의 잔인한 칼질에 묻혀 허망하게 사라졌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한 인가덕을 제치고 공야순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은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했지만 우린 절대로 믿을 수 없소. 정말 그렇다면 저기 저렇게 겹겹이 둘러싸고 앉아 있는 일검대 무사들은 무엇이오?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 백 명이나 되는 무사들을 끌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겠소? 이젠 그만 가증스런 표정은 치우고 무인답게 인정하시오!”
공야순이 검첨으로 유상기와 유화결등을 호위하고 있는 유가검보 일검대 무사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모든 관중들의 시선이 유가검보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유상기는 부셔져라 검병을 움켜쥐었다. 놈들의 수작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비무대회를 개최한 것도, 인장호를 이용해 조카 화결을 끌어내고 전혀 예상 밖의 고수들을 출전시켜
대진표까지 조작하여 지속적으로 화결을 위협하는 인상을 주어 일검대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것도……. 그 모든 것들이 이 순간을 위한 수작이었다.
‘대체 이놈들이 무얼 믿고 이런 억지를?’
유상기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눈을 부릅떴다. 호랑이 코털을 잡아 뽑는데도 한도가 있는 것이다. 일검대 인원 백 명이면 인가장 정도는 한시진 안에 쓸어버릴 수 있다.
‘지금까지는 각본대로 움직였겠지만 이제부터는 그 각본을 갈기갈기 찢어 주겠다.’
유상기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공야순의 목소리가 한 발 앞서 울려 퍼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즐독! 늘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즐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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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즐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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