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마 빈 라덴은 누구인가?
오사마 빈 라덴의 가정과 여자들
"4명의 아내를 둔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3억 달러 재산 가진 갑부"지난 9월11일 미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자살테러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 그는 어떤 인물인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그의 출생과 가정환경, 그리고 여자들까지 다각도로 취재했다. 지난 9월11일,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기상천외한 동시다발 자살테러사건이 미국에서 있었다. 수십 명에서부터 수백명이 탄 여객기가 미국 경제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박고, 이어서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국방성까지 공격하는 등 사상 초유의 동시다발 자폭테러가 일어나 전세계인을 경악시켰다.
세계인들의 관심은 누가 이처럼 엄청난 테러를 일으켰냐는 데 모아지고 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사건 발생후 즉각,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인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를 상대로 전쟁선언까지 했다. 이에 따라 세계의 이목이 라덴에게 향했지만 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테러리스트들의 모든 행적이 그렇듯 그도 지하에 숨어 잠수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 민간인이든 기자든 그를 직접 만나거나 인터뷰를 한 사람은 거의 없다. 라덴에 대해서 책을 쓴 피터 베르겐이라는 전기작가만이 겨우 한두번 만났을 뿐이다.
빈 라덴은 193cm(외신에는 2m가 넘는다는 보도도 있다)의 큰 키에 72.6kg의 몸무게, 과거 이란의 호메니옹을 연상케 하는 긴 수염을 하고 하얀 터번을 두른 전형적인 아랍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 5백만 달러(약 60억원)의 현상금을 걸 만큼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계의 최고 거물이다. 라덴이 태어난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우리에게는 국내 건설기업이 수로공사를 한 곳으로 낯익은 도시다. 그는 57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큰 건설업(총자산 50억 달러)을 하는 아버지 무하마드 빈 라덴의 일곱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지금도 이스라엘과 영토싸움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키가 2m가 넘는 장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도 사실은 사우디아라비아인이 아닌 예멘인이다. 예멘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 건설업을 하면서 거부가 되었던 것이다.
거부의 아들로 태어난 빈 라덴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의 부인이 10명이 넘었으며, 배다른 형제만도 52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자신은 늘 ‘외톨이’라고 생각했던 점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의 동생(이복동생이 아닌)을 만들기도 전에 자가용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일찍 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열살이었다.
그는 이복형제들이 특별히 무시를 하거나 차별을 하지 않았는데도 외아들이라는 인식 때문에 늘 외로워했다. 그래서 몰두한 것이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불어닥친 ‘이슬람원리운동’이었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늘 이슬람교 문헌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탐독했다.
“가족중 누군가의 장례식이 있었을 때, 방에 어른들을 가득 모아놓고 열변을 토하는 열아홉살 라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형제들은 그가 결코 평범하지 않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일본 중동정보센터 소장인 나카시마씨는 라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자기주관이 뚜렷했다고 한다. 한 예로 다른 형제들이 미국 등 선진국으로 모두 유학을 떠난 것에 비해 그는 자기 의지로 국내에 남아 교육을 받았다. 형제들이 함께 유학갈 것을 권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이슬람의 성지인 모국에서 좀더 이슬람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 그는 킹 아브돌 아지스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러면서도 이슬람신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네번째 부인은 열아홉살로 라덴과는 스물여섯살 차이
그러는 사이 결혼을 했다. 그가 정확히 몇살에 결혼을 했는지는 외신마다 다르다. 분명한 것은 20대 초반에 결혼을 했다는 것. 어쨌든 라덴은 첫번째 부인으로 시리아인을 맞았다. 그후 두명의 사우디아라비아 여인과 또 결혼했다. 일부다처제의 이슬람 교리 때문에 여러 부인을 거느릴 수가 있는 것.
외신에 의하면 네번째 부인은 현재 19세라고 한다. 45세인 라덴과는 무려 스물여섯살 차이가 난다. 그는 나이 어린 네번째 부인을 늘 대동하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네명의 부인에게서 낳은 자식들은 모두 15명. 일부 언론에는 25명이라는 설도 있으나 외신들을 종합해 보면 15명이 근사치에 가깝다. 25명은 아마도 손자들을 합한 숫자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라덴의 아들중 결혼한 이가 몇명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부의 아들로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그가 국제적인 테러리스트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그것은 79년 12월말 당시 구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22세인 라덴은 불도저와 덤프트럭을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했다. 자신이 직접 불도저를 몰고 지하 벙커를 파는가하면, 산 속에 터널을 뚫어 적극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도왔던 것. 당시 소련의 적대국이었던 미국으로부터 최신식 무기를 지원받기까지 한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련군을 몰아내는데 일정부분 기여를 했다. 이때부터 그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에 대한 입소문을 전해 듣고 찾아왔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라덴은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을 보여 상당한 재력을 구축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한 공학도답게 토목공사로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 현재 알려진 그의 재산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포함하여 약 3억 달러(3천6백억원) 정도. 그는 주식투자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그가 재테크의 일환으로 금융업이 몰려있는 세계무역센터를 테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그런데 구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는 미국과 밀월관계였던 그가 왜 갑자기 미국을 증오하기 시작했을까? 일부 사람들이 이번 미국의 테러사건을 “미국이 뿌린 씨앗대로 거둔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91년 걸프전쟁 때 보인 미국의 태도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 어디서든 안하무인으로 일관하는 미국의 태도에 약소민족들이 분노를 느끼듯 그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걸프전쟁 때 사우디아라비아정부는 미국에 협력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미군들을 사우디에 주둔시켰다. 이때 라덴은 처음부터 미군의 사우디 주둔을 반대했다. 이유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인 사우디에 어디 감히 외국군이 들어올 수 있냐는 것이었다. 더욱이 많은 미군이 주둔한 뒤 기독교계가 사사건건 이슬람교도들과 마찰을 일으키자 라덴은 공공연하게 사우디정부를 비난하고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고 외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라덴이 이처럼 강경하게 미국을 비난하게 된 저변에는, 근래 들어 이슬람교의 위신이 눈에 띄게 추락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 모든 원인이 다 미국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라덴의 이같은 주장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라덴의 발언에 힘이 점점 실리자 그의 형제들과 정부는 93년, 라덴을 사우디 국적을 박탈하고 해외로 추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를테면 가문과 나라로부터 내쫓김을 당한 것이다. 그럴수록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늘어만 갔다. 그는 근거지를 수단으로 옮겼다. 물론 그의 부인과 자식들도 함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이미 88년에 결성한 과격 무장단체 ‘아르카이더’를 통해 본격적인 테러에 나서기 시작했다. 93년에 일어난 세계무역센터 폭발사건도 바로 이 직후에 나온 것이다.
그러자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수단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96년 수단으로부터도 추방명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옮긴 곳이 바로 현재 탈레반정권의 아프가니스탄. 이곳에서 그는 ‘성지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탈레반정권의 비호아래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슬람교도를 불러모아 테러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테러훈련은 매우 혹독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특수부대보다도 더 지독할 만큼 육해공에 걸쳐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킨다는 것. 특히 영어 회화 훈련은 기본이라고 한다. 이렇게 일정기간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난 뒤에는 각자 고향, 혹은 자국에 돌아가 일반인으로서 평범하게 지내다가 이메일이나 팩스를 통해 테러지시가 내려지면 행동에 옮긴다고 한다.
97년에는 세계의 전 이슬람교도들에 대해 ‘가능한 한 미국인과 대결하여 싸워라, 그리고 죽여라’라는 과격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이 그를 없애려고 조여오면 올수록, 그를 따르는 사람이나 지원한 나라에 대해 미국이 공격을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미국에 대한 그의 증오심도 깊어만 갔다.
“아랍인이 그를 따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청렴한 신앙 때문”
미국에 대한 그의 증오심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98년 라덴을 인터뷰한 미국의 ABC기자에 의하면 “우리들은 군복을 입은 자와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모두가 우리들의 표적이다. 반드시 미합중국의 종말을 맞이하도록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때 자식들의 시체들을 모아서 되돌려 보내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은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정작 피해를 입는 것은 아무 죄도 없는 수단 국민들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라덴을 지원한 나라들에 대해 미국이 늘 보복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의 장본인인 라덴은 지하로 잠수하고 애꿎은 국민들만 희생당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가 많은 것은, 그의 이슬람교도로서의 강한 신념과 청렴한 생활태도 때문이라고 중동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수단에 있을 때입니다. 몸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날씨인데도 그는 단 한번도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도피생활을 할 때는 쥐가 우글우글한 동굴 안에서 빵 몇 조각으로 지내는 것은 보통이고요. 그러면서도 기도와 운동을 단 하루도 빼 먹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가 거부이기 때문에 그 재력으로 테러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 외에도 그를 지원하는 이슬람교도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인 카불 주재 국제난민고등법무관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야마모토씨의 이야기다. 팔레스타인이 사는 이스라엘의 자치구역과 파키스탄에서는 신문에 그의 사진만 들어가도 불티나게 팔린다. 또한 그의 얼굴이 들어간 티셔츠나 포스터, 달력, 연설 테이프는 없어서 못팔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심지어 신생아에게 그의 이름을 붙여주는가 하면, <오사마약국> <오사마병원>이라고 이름 붙인 곳도 많다고 한다. 이처럼 이슬람교도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의 강한 카리스마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처럼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는 신비감도 한몫 하고 있다.
그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산 속에 숨어 있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그곳에는 핵폭탄이 터져도 끄떡없을 만큼 깊은 지하요새가 있으며, 6개월간 수천여명이 먹을 식량과 무기가 준비돼 있다고 한다. 외신에 의하면 이미 그의 부인들과 자식들은 안전지대로 피해 있으며 당분간 잠수생활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결정적인 구체적 증거가 나타나면 라덴을 미국에 인도하겠다’는 탈레반정권의 발표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쉽사리 라덴의 아지트를 알려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중동국가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편 라덴의 무장 테러단체에는 마스미라는 일본여성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현재 일본당국이 그녀의 행방을 쫓고 있는데 그녀의 남편이 라덴과 관계가 깊은 알제리 출신의 하미드 아이크라는 것. 하미드는 LA공항 미수폭발사건의 범인으로 지명수배된 사람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행여 미국 테러사건의 불똥이 일본에게로 튈까 전전긍긍이다. 이미 고이즈미 수상은 전쟁이 터질 경우 자위대를 파견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누구인가?
미첼 초수도브스키 (by Michel Chossudovsky) 오타와대학 경제학과 교수 (Professor of Economics, University of Ottawa)
지구화 연구센터(Centre for Research on Globalisation (CRG)), 몬트리올
2001년 9월12일 globalresearch.ca에 올려짐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이 발생한 지 단 몇시간만에 부시 행정부는 증거도 없이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카에다 조직이 주요 용의자"라고 결론냈다. 중앙정보국의 조지 티네트(George Tenet) 국장은 빈 라덴이 "경고를 거의 안하거나 아예 안하면서 연쇄 공격"을 계획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외무장관 콜린 파월(Colin Powell)은 이 공격을 "전쟁 행위"라고 불렀고, 부시 대통령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저녁 텔레비전 연설에서 "이번 일을 저지른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보호해주는 이들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전직 중앙정보국장 제임스 울시(James Woolsey)는 "국가 차원의 후원"을 지목하면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외국 정부가 공모했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전직 국가안보보좌관 로렌스 이글버거(Lawrence Eagleburger)는 "우리가 이런 공격을 당하면 우리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으며 엄청난 보복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공식 발언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서방 언론의 주술문은 중동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징벌 행위(punitive actions)"의 개시를 승인했다. 뉴욕타임스에 쓴 윌리엄 사피어(William Saffire)의 글은 "우리가 공격자들의 기지와 캠프를 합당하게 확정했을 때는 그곳을 분쇄해야 한다. 부차적인 피해의 위험을 최소화하되 인정하면서 말이다. 또 테러를 수용하는 국가들을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히 흔들어 놓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이 글은 오사마 빈 라덴의 역사와 냉전시기 이슬람 "지하드(성전, Jihad)"와 미국 외교정책 형성의 상관관계 및 그 여파에 대해 약술한 것이다.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 공격의 핵심 용의자이며, 아프리카 지역 미국 대사관 폭탄 공격 때문에 연방수사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라고 이름 붙여준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은, 소련과 아프간 전쟁기간 중에 "역설적으로도 미국 중앙정보국의 후원 아래 소련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도록" 불려 나왔다. [1]
1979년 소련이 친공산 정부인 바브라크 카말(Babrak Kamal)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에 대응해 "중앙정보국 사상 최대 규모의 비밀 공작"이 벌어졌다. [2]
아프간의 성전(지하드)을 소련에 대항하는 전체 무슬림 국가가 참여하는 전세계적 전쟁으로 만들고 싶어한 중앙정보국과 파키스탄의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ISI, 인터 서비시스 인텔리전스)가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가운데 40개 나라에서 3만5천명의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여했다. 수만명은 또 파키스탄의 마드라사(madrasahs, 이슬람교 대학)에 유학을 왔다. 결국 10만명 이상의 외국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아프간 성전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이다. [3]
이슬람의 "성전"은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가 후원했으며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은 황금 초승달 지역(the Golden Crescent) 마약 거래를 통해 확보한 것이었다.
1985년 3월, 레이건 대통령은 국가안보 결정 명령(National Security Decision Directive) 166호에 서명했다... 이는 점차 늘고 있는 무자헤딘에 대한 비밀 군사지원을 승인하는 것이었으며 비밀 아프간 전쟁의 새로운 목표가 정해졌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 목표란 비밀 공작을 통해 아프간에서 소련군이 패배하게 만들고 소련의 철수를 부추기는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비밀 지원은 군수 물자를 크게 늘리는 것에서 시작됐다. 군수 물자 공급은 1987년에 연간 6만5천톤에 달할 때까지 꾸준히 늘어났다... 파키스탄 라왈핀디(Rawalpindi) 근처 간선도로변에 있는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비밀 본부로 향하는 중앙정보국과 국방부의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행렬"도 진행됐다. 거기서 중앙정보국 전문가들은 파키스탄 정보기관원들과 만나 아프간 반군의 작전 수립을 도왔다. [4]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의 군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를 이용해서 무자헤딘을 교육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중앙정보국이 후원하는 게릴라 훈련은 이슬람의 가르침과 합쳐졌다.
주제는 이슬람교가 완벽한 사회-정치적 이념이며 성스런 이슬람이 무신론자인 소련 군대에 의해 침해당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교도들은 모스크바가 지원하는 좌파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독립을 다시 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5]
파키스탄 정보기관 (Pakistan's Intelligence Apparatus)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는 "중개자"로 이용됐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성전" 비밀 지원은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졌다. 중앙정보국은 직접 통로를 통해 무자헤딘을 지원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비밀 공작이 "성공"하기 위해 워싱턴은 소련 파괴라는 "지하드"의 궁극의 목표가 드러나지 않게 조심했다.
중앙정보국의 밀턴 비어드먼(Milton Beardman)의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아랍인들을 훈련시키지 않았다." 카이로의 알아람 전략연구센터(the Al-aram Center for Strategic Studies)의 아브델 모남 사이달리(Abdel Monam Saidali)에 따르면, 빈 라덴과 "아프간 아랍인들"은 "중앙정보국이 허용한 고도의 세련된 훈련"을 받았다. [6]
비어드먼은 이 점에 대해서 오사마 빈 라덴이 워싱턴을 위해서 하고 있는 임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확인해줬다. (비어드먼이 인용한) 빈 라덴의 말로 표현하면 "나와 내 형제들 누구도 미국의 지원을 보여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7]
민족주의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한 이슬람 전사들은 그들이 미국을 위해서 소련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정보기관의 고위층에서는 접촉이 있었지만, 현장의 이슬람 반군 지도자들은 워싱턴이나 중앙정보국과 전혀 접촉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의 후원과 대규모의 미국 군사지원으로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는 "정부기관 모든 곳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수평적인 구조"를 만들어 냈다. [8] 이 기관은 15만명에 달하는 군인, 정보부원, 관료, 비밀 공작원, 정보제공자들로 구성된 스태프를 갖췄다. [9]
한편 중앙정보국의 공작은 지아 울 하크(Zia Ul Haq) 장군이 이끄는 파키스탄 군사정권 또한 강화시켰다.
중앙정보국과 아이에스아이의 관계는 지아가 부토를 축출하고 군사정권을 세운 이후 더욱 긴밀해졌다... 아프간 전쟁 기간 내내 파키스탄은 심지어 미국보다도 더 강한 반 소련 성향을 띄었다. 소련군이 1980년 아프간을 침공한 직후 지아는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을 동요시키기 위해 아이에스아이의 우두머리를 파견했다. 중앙정보국은 1984년 10월에 이 계획에 동의했다...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파키스탄과 미국은 뒤에서는 군사활동 확대가
최선이라는 데 합의했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협상을 내거는 위장술을 폈다. [10]
황금 초승달 마약 삼각지대 (The Golden Crescent Drug Triangle)
중앙 아시아의 마약 거래 역사는 중앙정보국의 비밀 공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련-아프간 전쟁 이전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아편 생산은 그 지역내 소규모 시장으로 향했다. 헤로인은 생산되지 않았다. [11] 이 점에 대해, 알프레드 맥코이(Alfred McCoy)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중앙정보국이 아프간에 대한 맹공격을 벌이기 시작한 지 2년 안에 "파키스탄과 아프간 국경지역은 세계 최대의 헤로인 생산지역이 돼 미국내 수요의 60%를 공급했다. 파키스탄에서 헤로인 중독자는 1979년 사실상 전무했으며... 1985년에 120만명에 달했다. 그 어느 나라보다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 [12]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다시 이 헤로인 무역을 통제했다.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아프간쪽 국경 지역을 장악했을 때 농민들에게 혁명 세금 차원에서 아편을 재배하도록 명령했다. 국경 넘어 파키스탄쪽에서 아프간 지도자들과 지역 조직들은 파키스탄 정보기관의 보호 아래 수백개의 헤로인 제조 공장을 운영했다. 이 완전 개방된 마약거래 기간동안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 마약청은 주요 마약사범 체포에 앞장서지 않았다... 미국 관리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마약 정책은 소련 영향권에 대항한 전쟁에 종속되어 있다"며 아프간 동맹국들의 헤로인 거래 혐의 조사를 거부했다. 1995년 전직 중앙정보국 아프간 담당 책임자 찰스 코건(Charles Cogan)은 중앙정보국이 냉전을 위해 마약 전쟁을 희생했음을 인정했다. '우리의 주요 임무는 소련에 가능한 한 최대의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약거래를 조사할 자원도 시간도 정말 없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상황은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 있게 마련이다... 마약이라는 부산물이 있었다, 맞다. 그러나 주 목표는 달성됐다. 소련이 아프간을 떠난 것이다.' [13]
냉전의 흔적을 좇아서 (In the Wake of the Cold War)
냉전의 흔적을 좇아보면 중앙 아시아 지역은 단지 광대한 원유 매장량 때문에만 전략적 요충이 아니다. 기업이나 금융기관, 정보기관, 조직 폭력단에게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의미하는 세계 아편의 4분의 3을 생산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황금 초승달 지역의 연간 마약 거래 규모 (1천억에서 2천억 달러 규모)는 국제연합이 5천억 달러로 추정하는 전세계 마약류 거래의 3분의 1에 달한다. [14]
소련 붕괴와 함께 마약 생산이 다시 급격하게 늘었다. 국제연합 추산으로는 구 소련 연방내 무장 반란이 시작된 때인 1998년에서 1999년 사이 아프가니스탄의 아편 생산량은 4600톤으로 사상 최고치에 달했다. [15] 구 소련의 조직 폭력단과 연합한 강력한 기업 집단들이 헤로인 통로를 전략적으로 장악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광범한 군 정보 네트워크는 냉전이 끝난 뒤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은 여전히 파키스탄 발 이슬람 "지하드"를 지원했다. 새로운 비밀 공작이 중앙 아시아, 코카서스, 발칸 지역에서 시작됐다. 파키스탄의 군, 정보 기관들은 본질적으로 "소련 해체와 중앙 아시아 지역 6개 무슬림 공화국 건설의 촉매제 구실을 했다." [16]
한편,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Wahhabi)파 선교사들은 세속 국가 기구를 잠식하면서 러시아 연방은 물론 이들 무슬림 공화국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반미 이념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이슬람 근본주의는 구 소련내 워싱턴의 전략적 이해에 크게 기여했다.
1989년 소련군의 철수 이후에도 아프간 내전은 약화되지 않았다. 탈레반은 파키스탄 데오반디스(Deobandis)와 그들의 정당인 자미아트 울 울레마 에 이슬람(Jamiat-ul-Ulema-e-Islam, JUI)의 지지를 받았다. 1993년 제이유아이는 베나지르 부토(Benazzir Bhutto) 총리의 연정에 참여했다. 제이유아이와 군부, 군 정보기관의 끈이 형성됐다. 1995년 카불의 헤즈브 이 이슬라미 헥트마티아르(Hezb-I-Islami Hektmatyar) 정권이 무너지자 탈레반은 강경 이슬람 정부를 출범시키고, "제이유아이 파벌에게 아프간 내부 훈련소의 통제권을 넘겼다..." [17]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 운동의 지지를 얻은 제이유아이는 발칸 지역과 구 소련 지역에서 싸울 자원자들을 모집하는 데 핵심 임무를 맡았다.
제인 디펜스 위클리(Jane Defense Weekly)는 이에 대해 "탈레반의 인력과 장비의 절반은 정보기관 지배를 받는 파키스탄에서 보낸 것"이라고 확인했다. [18]
사실, 소련의 철수 이후 아프간 내전을 벌인 두쪽 모두 계속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를 통해 비밀 지원을 받은 것 같다. [19]
다른 말로 하자면, 미국 중앙정보국의 통제를 받는 파키스탄 군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후원을 등에 업은 탈레반 이슬람 정권은 미국의 지정학적 이해에 주로 봉사한 것이다. 황금 초승달 지역 마약 거래는 (1990년대초에 등장한)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와 코소보 해방군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마지막 몇달 동안 무자헤딘 용병이 마세도니아를 침공한 코소보 해방군 테러리스트들에 섞여 싸웠다는 증거가 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것은 왜 미국이 노골적인 여성 인권 침해, 소녀들의 교육 금지, 정부기관내 여성의 해고, "샤리아 처벌법"의 시행 등을 포함한 탈레반의 폭력적 통치에 눈을 감았는지를 설명해준다. [20]
체첸 전쟁 (The War in Chechnya)
체첸과 관련해서 주요 반군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Shamil Basayev)와 알 카탑(Al Khattab)은 중앙정보국이 지원하는 아프간 및 파키스탄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다. 미국 의회의 테러리즘과 비재래식 전쟁에 대한 특별팀 팀장인 요세프 보단스키(Yossef Bodansky)에 따르면 체첸 전쟁은 1996년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서 열린 히즈브알라(HizbAllah) 국제 비밀 정상회담 중에 계획됐다. [21] 이 회담에는 오사마 빈 라덴과 이란 및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의 고위 정보기관 관리들이 참석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의 체첸 사태 개입은 "무기와 전문적 기술을 제공하는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과 이 기관의 급진 이슬람 대리인들은 실제로 전쟁을 지휘했다." [22]
러시아의 주요 송유관은 체첸과 다게스탄(Dagestan)을 지난다. 워싱턴이 형식적으로 이슬람 테러리즘을 비난하긴 했지만, 체첸 전쟁의 간접적인 수혜자는 카스피해 유역의 석유 자원과 송유관 통제권을 놓고 경쟁하는 앵글로섹슨 계열의 석유 메이저들이다.
(각각 샤밀 바사예프와 에미르 카탑이 이끄는) 두개의 핵심 체첸 반군들은 3만5천여명으로 추정되며, 직접 체첸 반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키기까지 한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지원을 받았다.
[1994년에]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는 바사예프와 그의 신뢰받는 부관들이 아프가니스탄 코스트(Khost) 지역의 아미르 무아위아(Amir Muawia) 캠프에서 집중적인 이슬람 교화와 게릴라 전쟁 훈련을 받게 해줬다. 이 캠프는 1980년대 초반 미국 중앙정보국과 아이에스아이가 설치했으며 유명한 아프간 군사지도자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Gulbuddin Hekmatyar)가 운영했다. 1994년 7월 이 캠프에서 교육을 마친 바사예프는 파키스탄의 마르카즈 이 다와르(Markaz-i-Dawar) 캠프로 옮겨 고급 게릴라 전술 교육을 받았다. 파키스탄에서 바사야프는 파키스탄 최고위급 군 장성과 정보기관 관계자를 만났다. 국방장관인 아프탑 샤흐반 미라니(Aftab Shahban Mirani) 장군, 내무 장관 나세룰라 바바르(Naserullah Babar) 장군, 아이에스아이의 이슬람 진영 지원 담당 지부장 자베드 아슈라프(Javed Ashraf) 장군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현재 모두 은퇴했다) 고위급 관계는 바사예프에게 아주 유용했다. [23]
훈련과 교화를 받은 이후 바사예프는 1995년 첫번째 체첸전쟁에서 러시아 연방 군대에 대한 습격을 이끄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조직은 알바니아 조직 폭력배, 코소보 해방군은 물론이고 모스크바의 조직폭력배와도 광범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97~98년 러시아 연방 보안 서비스(FSB)에 따르면 "체첸 반군 지도자들은 코소보에서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위장을 위해 유고슬라비아에 부동산 업체로 등록한 몇몇 기업을 통해서." [24]
바사예프의 조직은 수많은 부정 행위에도 개입해왔다. 여기엔 마약거래, 불법 도청, 러시아 송유관 파괴, 납치, 매춘, 위조 달러 거래, 핵물질 밀매 등이 포함된다.(마피아가 알바니아의 붕괴된 피라미드 판매조직과 관련된 것을 참고하라) [25] 광범한 마약 자금 세탁과 함께, 다양한 불법 활동으로 얻은 수익금이 용병 모집과 무기 구입을 위해 흘러 들어갔다.
아프간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샤밀 바사예프는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 노병인 무자히딘 사령관 "알 카탑(Al Khattab)"과 줄이 닿았다. 알 카탑은 자원해서 아프간 전쟁에 참여한 인물이다. 바사예프가 그로즈니로 돌아간 지 채 몇달이 안됐을 때 (1995년 초) 카탑은 무자헤딘 전사들을 훈련시킬 군 부대를 체첸에 구축하기 위해 초청됐다. 영국방송공사에 따르면 카탑이 체첸에 자리잡은 것은, "체첸에 자금을 공급하는 모스크와 갑부 개인들이 재정을 책임지는 전투적 종교단체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제) 이슬람 구제 조직(Islamic Relief Organisation)의 주선을 통해서 였다." [26]
마치는 말 (Concluding Remarks)
냉전 시대 이후 워싱턴은 오사마 빈 라덴을 세계 최고의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연방수사국의 "최우선 수배자 명단"에 올려놓은 동시에 의식적으로 그를 지원했다. 무자헤딘이 발칸 지역과 구 소련에서 미국을 위한 전쟁을 벌이느라고 바쁜 와중에, 미국내 경찰 조직인 연방수사국은 소련-아프간 전쟁 이후 비밀 공작을 통해 국제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한 중앙정보국과 별개로 움직이면서 국내에서 테러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지독하게 역설적으로, 부시 행정부가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고 지목한 이슬람 지하드가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에 대한 테러 공격의 혐의를 받고 있는 와중에, 바로 그 조직이 발칸과 구 소련에서 미군과 정보기관의 핵심적인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뉴욕과 워싱턴의 테러 공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활짝 드러남으로써, 부시 행정부가 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과 함께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군사 모험을 강행하지 못하게 해야할 것이다.
주석
[1] Hugh Davies, International: `Informers' point the finger at bin Laden; Washington on alert!! for suicide bombers, The Daily Telegraph, London, 24 August 1998.
휴그 데이비스, 국제 뉴스: '정보제공자들은' 빈 라덴을 지목한다. 워싱턴이 자살 폭탄으로 초긴장에 돌입, 데일리 텔레그라프, 런던, 1998년 8월24일
[2] See Fred Halliday, "The Un-great game: the Country that lost the Cold War, Afghanistan, New Republic, 25 March 1996)
프레드 할리데이, "위대하지 않은 게임: 냉전을 잃어버린 나라, 아프가니스탄, 뉴리퍼블릭, 1996년 3월25일을 보라.
[3] Ahmed Rashid, The Taliban: Exporting Extremism, Foreign Affairs, November-December 1999.
아메드 라쉬드, 탈레반: 극단주의를 수출함, 포린 어페어스, 1999년 11-12월호.
[4] Steve Coll, Washington Post, July 19, 1992.
스티브 콜, 워싱턴포스트, 1992년 7월19일.
[5] Dilip Hiro, Fallout from the Afghan Jihad, Inter Press Services, 21 November 1995.
딜립 히로, 아프간 지하드의 부산물, 인터 프레스 서비시스, 1995년 11월21일.
[6] Weekend Sunday (NPR); Eric Weiner, Ted Clark; 16 August 1998.
주말 일요일(NPR); 에릭 와이너, 테드 클라크, 1998년 8월16일.
[7] 같은 자료(Ibid)
[8] Dipankar Banerjee; Possible Connection of ISI With Drug Industry, India Abroad, 2 December 1994.
디판커 바네르제; 아이에스아이와 마약산업의 연계 가능성, 인디아 어브로드, 1994년 12월2일.
[9]같은 책 (Ibid)
[10] See Diego Cordovez and Selig Harrison, Out of Afghanistan: The Inside Story of the Soviet Withdrawal,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5. See also the review of Cordovez and Harrison in International Press Services, 22 August 1995.
디에고 코르도베즈와 셀리그 해리슨, 아프간에서 나옴: 소련 철수의 내막, 옥스퍼드대학 출판부, 뉴욕, 1995를 보라. 또 코르도베즈와 해리슨이 인터내셔널 프레스 서비시스 1995년 8월22일치에 쓴 평론도 보라.
[11] Alfred McCoy, Drug fallout: the CIA's Forty Year Complicity in the Narcotics Trade. The Progressive; 1 August 1997.
알프레드 맥코이, 마약 부산물: 미국 중앙정보국의 마약거래 연루 50년, 더 프로그레시브, 1997년 8월1일.
[12]같은 책 (Ibid)
[13]같은 책 (Ibid)
[14] Douglas Keh, Drug Money in a changing World, Technical document no 4, 1998, Vienna UNDCP, p. 4. See also Report of the 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 for 1999, E/INCB/1999/1 United Nations Publication, Vienna 1999, p 49-51, And Richard Lapper, UN Fears Growth of Heroin Trade, Financial Times, 24 February 2000.
더글러스 케, 변화하는 세상의 마약 자금, 기술 문서 4호, 1998 빈 UNDCP, 4쪽. 국제 마약 통제회의의 1999년 보고서, E/INCB/1999/1, 국제연합 출판부, 빈 1999, 49~51쪽, 리차드 래퍼, 국제연합이 헤로인 무역 증가에 대해 우려하다, 파이낸셜 타임스, 2000년 2월24일도 보라.
[15] Report of the 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 op cit, p 49-51, see also Richard Lapper, op. cit.
국제 마약 통제회의의 보고서, 49~51쪽, 리차드 래퍼의 같은 책도 보라.
[16] International Press Services, 22 August 1995.
국제 프레스 서비시스, 1995년 8월22일
[17] Ahmed Rashid, The Taliban: Exporting Extremism, Foreign Affairs, November- December, 1999, p. 22.
아메드 라쉬드, 탈레반: 극단주의를 수출함, 포린 어페어스, 1999년 11-12월호, 22쪽.
[18] Quoted in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3 September 1998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 1998년 9월3일에서 인용.
[19] Tim McGirk, Kabul learns to live with its bearded conquerors, The Independent, London, 6 November 1996.
팀 맥거크, 카불이 수염기른 정복자와 공생하는 법을 익히다, 디 인디펜던트, 런던, 1996년 11월6일.
[20] See K. Subrahmanyam, Pakistan is Pursuing Asian Goals, India Abroad, 3 November 1995.
케이 수브라흐마니암, 파키스탄이 아시아 내부 목표를 추구하다, 인디아 어브로드, 1995년 11월3일을 보라.
[21] Levon Sevunts, Who's calling the shots?: Chechen conflict finds Islamic roots in Afghanistan and Pakistan, 23 The Gazette, Montreal, 26 October 1999.
레본 세번츠, 누가 지휘하는가?: 체첸 분쟁은 이슬람의 뿌리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찾는다, 23 더 가제트, 몬트리올, 1999년 10월26일.
[22] 같은 책(Ibid)
[23] 같은 책 (Ibid)
[24] See Vitaly Romanov and Viktor Yadukha, Chechen Front Moves To Kosovo Segodnia, Moscow, 23 Feb 2000.
비탈리 로마노프와 빅토르 야두크하, 체첸 전선이 코소보 세고드니아로 이동하다, 모스크바, 2000년 2월23일을 보라.
[25] The European, 13 February 1997, See also Itar-Tass, 4-5 January 2000.
더 유러피언, 1997년 2월13일, 이타르타스 통신, 200년 1월 4~5일도 보라.
[26] BBC, 29 September 1999.
영국방송협회, 1999년 9월29일.
첫댓글 되도록 하루에 한가지씩 읽어보려 합니다. 그런데 이 자료를 통해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