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답③
제시된 풍속화의 제목과 그린 인물이 '대장간도(김홍도)'라고 제시되었으니, 김홍도만 보고도 조선 후기임을 파악할 수 있네요. 따라서 3점 배점에는 합당하지 않네요.
조선 후기에는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경제 부분에서 그 변화의 모습이 두드러졌습니다. 농민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논농사에서는 모내기법, 밭농사에서는 견종법을 확대하였고,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는 등 새로운 영농 방법을 추구하였습니다.
모내기법에 따라 노동력은 줄어든 반면, 수확량이 늘고 벼와 보리의 이모작도 가능해져 단위 면적당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특히, 모내기법으로 일손을 크게 덜면서 농민들은 경작지 규모를 확대해 광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농민들은 광작을 통해 부농층으로 성장하였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지조차 얻기 어려워져 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도시나 광산으로 가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는 등 농민층의 분화를 가져왔어요.
조선 후기에는 소작인들의 개선 요구로 지대 납부 방식에서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즉, 지주와 작인이 수확량을 절반씩 나누어 갖는 타조법이 일반적이었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일정 액수의 지대를 정해 곡물이나 화폐로 납부하는 도조법이 등장하였습니다. 타조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납부할 지대가 정해져 있으므로, 지주의 간섭이 없었어요. 이에 따라 소작인들은 자유로운 영농을 추구할 수 있었고, 지주와 작인의 관계도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서 벗어나 계약적 관계로 전환되어 갔습니다.
한편, 이 시기 농민들은 담배, 인삼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전국적으로 개설된 장시에 팔아 소득을 늘리기도 하였습니다.
ㄱ - 목화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는 고려 말입니다.
ㄴ - 조선 후기 지대 납부 방식은 타조법(수확량의 일정 비율로 소작료를 내는 방식) 대신 도조법(일정 액수를 소작료로
내는 방식)이 확산되어 갔습니다.
ㄷ -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의 확산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등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들은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되어 광작 농업이 유행하였습니다.
ㄹ - 연분9등법은 조선 전기 세종 때부터 실시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인조 때 영정법이 실시되어(1635) 풍흉에 관계
없이 전세는 1결당 4두로 고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으로 묶인 ③번입니다.
조선 후기 경제의 발달
서민 경제의 발전
양반 지주의 경영 변화 | 토지 경영 | • 개간 및 매입을 통해 토지 확대 • 지주 전호제 일반화(18세기 말) |
지주 전호제의 변화 | 소작권 인정, 소작료 인하, 도조법 대두 →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가 신분적 관계에서 경제적 관계로 변화 | |
경제 활동 | • 소작료 수입을 토지에 재투자 • 물주로서 상인에게 자금 제공 • 고리대로 부 축적 | |
농민 경제의 변화 | 모내기법의 확대 | • 벼와 보리의 이모작 성행 → 생산량 증가, • 노동력 절감으로 1인당 경작지 규모 확대 → 광작 농업 성행 |
상품 작물 재배 | • 쌀 : 쌀의 상품화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 증가 • 면화, 채소, 담배, 약초 등 재배 | |
농민의 계층 분화 | 서민 지주의 등장 +몰락 농민의 임노동자화 |
수공업, 광업의 발달
민영 수공업의 발달 | 배경 | 상품 화폐 경제 발달 +도시 인구 증가 + 대동법 실시에 따른 수요 확대 |
발달 | 민영 수공업자(납포장)가 자유롭게 제품 생산 | |
선대제 수공업 성행 | • 상인 물주로부터 자금과 원료를 제공받아 제품 생산 → 상업 자본의 수공업자 지배 • 독립 수공업자 출현 | |
민영 광산의 증가 | 17세기 이전 | • 정부 직접 경영(농민 부역) |
잠채 성행 | • 민간인들이 몰래 광산 개발 | |
설점수세제(1651) | • 의미 : 민간인의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이들로부터 세금 징수 • 별장 수세제 : 호조가 광산에 별장을 파견해 광산 운영과 수세를 담당하도 록 함, 민간의 광산 개발 참여가 저조 → 호조가 설점 수세를 독점(1702) • 수령 수세제(1775) : 광산의 관할 수령이 호조가 정한 세금을 광산으로부 터 받아 수납하도록 함, 민간인의 참여 활발 | |
분업, 협업 | 덕대(경영 전문가) + 물주(상인, 지주) + 채굴업자(혈주)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상업 활동 | 사상의 대두 | 대동법 시행 후 → 공인의 활동 → 사상의 대두(칠패, 이현, 송파, 송상(개 성), 만상(의주), 평양(유상), 서울(경강 상인), 동래(내상) |
금난전권 | • 시전 상인에게 전매권, 난전 단속권 부여 • 신해통공(1791) :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 철폐 | |
장시 발달 | 18세기 중엽 1,000여 개소 → 5일장 → 보부상의 활동 | |
포구에서의 상업활동 | 선상, 객주․여각이 활동 | |
대외 무역 | 청과의 무역 | 만상(의주)․유상(평양), 중강개시와 중강후시, 책문후시 |
일본과의 무역 | 내상(동래), 왜관 개시 | |
중계 무역 | 송상이 만상과 내상 중계 | |
화폐 유통 | 배경 | 상공업 발달, 세금과 소작료의 금납화 |
전황 발생 | 유통 화폐 부족 현상(←화폐를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이용 |
유사 기출문제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25회 고급 26번 문제
26.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답④
자료의 출처인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저서이니 조선 후기를 먼저 떠올릴 수 있겠네요.
그리고 제시된 내용은 서울과 지방 대도시 주변의 밭에 파·마늘·배추·오이를 심어 (이를 팔아) 큰 수익을 올린다는 것,
담배, 삼, 모시, 생강, 지황 등 이른바 상품 작물을 재배해 팔면 그 수익이 벼나 보리를 심는 논농사보다 열 배나 된다는 것이네요.
이 시기는 조선 후기의 모습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 일반화되어 한 사람이 농사지을 수 있는 면적은 크게 늘어났고, 쌀 생산도 크게 늘었습니다.
이 시기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습니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아 이익을 얻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쌀 수요가 크게 늘어나 쌀의 상품화가 활발해지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나타났어요.
① 목화(씨)는 고려 말 문익점이 중국(원)에서 우리나라로 처음 들여왔습니다.
② 장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의 일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장시가 일반화되어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어요.
③ 조선 건국 직후의 모습입니다.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어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여 이들로
부터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죠. 또,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습니다.
④ 조선 후기에는 고구마·감자 등의 구황 작물(기후가 좋지 않은 흉년에도 비교적 안전한 수확을 얻을 수 있는 작물),
그리고 옥수수·호박·토마토 등의 새로운 작물이 전래되었어요.
⑤ 건원중보는 고려 성종 때 발행된 화폐입니다.
조선 후기에 널리 사용된 화폐는 상평통보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1회 고급 27번 문제
27. 조선 후기 경제 상황 답③
조선 후기 경제에 대한 문제는 매회 빠지지 않고 출제되는 매우 중요한 출제 주제입니다.
확실하게 공부해 두면 5점은 확보!!!
제시된 자료는 조선 후기에 쓰여진 "흥부전"의 일부네요. 당연히 이 흥부전에는 조선 후기 당시의 모습이 담아져 있을테니, 눈치 빠른 분은 조선 후기 경제 상황을 바로 떠올릴 겁니다.
이를 몰라도 자료의 내용에 '놀부가 장자로서 부모 재산을 혼자 차지였다(물려 받고).', '모(모내기(이앙법)할 때 사용하는 용어), 담배 재배' 등의 내용을 통해 조선 후기임을 파악할 수 있어요. 흥부는 품을 파는 임노동을 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어 조선 후기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조선 후기에는 장시가 일반화되어 전국적으로 개설, 발달하였습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어, 보부상 등 사상들이 이를 무대로 활동, 성장하였습니다.
② 조선 후기 농촌에서는 광작과 상품 작물의 재배가 활발해졌습니다.
즉, 이 시기에는 모내기법 확산으로 잡초 제거하는 일이 수월해지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광작)해 나갔어요.
이에 따라 지주들은 물론, 자작농이나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었죠.
이러한 광작 농업으로 일부 농민들은 부농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많은 농민들은 소작지를 잃고 도시나 광산 등으로
가 임금 노동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 상품 작물을 재배
하여 팔았습니다.
③ 관영 상점을 둔 것은 조선 전기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어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죠.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하였습니다. 또,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습니다.
④ 조선 후기에는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폈어요.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
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
행되었어요.
⑤ 조선 후기 소작인들의 지대 납부 방식에서는 정률 지대(타조법)보다 정액 지대(도조법)로 전환되어 갔어요.
기존 소작 농민들이 지주에게 소작료를 납부하는 지대 납부 방식은 수확량의 일정 비율(보통 1/2)을 내는 것이었어요.
이는 수확량이 많으면 더 내고 수확량이 적으면 덜 내는 것이기에 수확량을 늘리기 위한 지주들의 간섭도 심하였죠.
조선 후기에는 농민들의 노력으로 소작료를 납부하는 방식에서 변화가 나타납니다.
즉,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도조법이 일반화됩니다.
이는 수확량이 많거나 적어도 동일 액수를 내야 하는 것으로, 소작인에게 불리할 수도 있으니, 반대로 수확량이 늘면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것이었어요.
조선 후기에는 농업 기술 발달 등으로 수확량이 증대하면서 더 많은 소득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지대 납부
방식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6회 고급 29번 문제
29. 조선 후기(신해통공이 발표된 시기)의 경제 모습 답①
한국사능력시험에서 경제 분야 문제 출제에서 가장 많이 출제되는 시기가 조선 후기입니다.
조선 후기의 경제에 대해 묻는 문제들은 대부분 자료를 주고 '이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은 것은? 또는 옳지 않은 것은?'을 묻는 유형으로 출제됩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경제의 다양한 발달 모습은 잘 알아두셔야 합니다.
문제에 주어진 자료를 통해 어느 시기인지 파악하는 것은 쉽네요.
'30년 이전에 생긴 시전 혁파', '육의전 이외에는 금난전권을 행사치 못하게 하자'라는 것만 보고도 조선 후기 정조 시기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 때에는 정치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개혁 정치가 실시되었습니다.
특히 경제 부분에서는 시전 상인들의 특권인 금난전권을 혁파한 것이 가장 인상적이죠.
시전 상인들은 국가의 필요 물품을 공급하거나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금난전권을 부여받아 난전(허가받지 않고 장사하는 상점)을 단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전이 금난전권을 이용해 물품을 매점하여 물가 상승 등의 부작용이 심화되어 소상인·소비자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는 문제점이 지속되자 정조는 신해 통공 정책을 발표(1791)해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합니다. 이에 따라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가능해져 사상(私商)이나 난전의 활동이 더욱 활성화되는 결과를 가져 오죠.
① 건원중보는 고려 성종 때 발행된 화폐입니다.
조선 후기에 널리 사용된 화폐는 상평통보입니다.
② 조선 후기에는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 상품 작물
을 재배하여 팔았습니다.
③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 확산으로 잡초 제거하는 일이 수월해지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광작)해 나갔어요.
이에 따라 지주들은 물론, 자작농이나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었죠.
이러한 광작 농업으로 일부 농민들은 부농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많은 농민들은 소작지를 잃고 도시나 광산 등으로
가 임금 노동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④ 조선 후기에는 설점수세제를 운영해 민간의 광산 개발이 허용되었습니다.
당시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⑤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 확대되어 농민들은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시
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5회 고급 30번 문제
30.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답④
제시된 내용은 조선 후기 상품 작물의 재배에 대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 들어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어요.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습니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는데,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습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게 일어나기도 하였어요.
① 조선 후기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벼를 수확하고 바로 보리를 심는 이모작이 확산되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늘어 소득이 증대되었습니다.
②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펴자 민간의 광산 개발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이 시기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
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어요.
③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져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개시와 사상들 간에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여진과는 경원과 회령에서 개시 무역이, 일본과는 왜관에서 개시와 후시 무역이 이루어졌습니다.
④ 15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는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⑤ 조선 후기 민간 수공업자들은 대체로 작업장과 자본의 규모가 소규모여서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상업 자본
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4회 고급 20번 문제
20.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답②
1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12번 문제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출제되었어요.
그때도 문제에 주어진 자료에서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키포인트는 '칠패'였습니다.
이 문제도 '칠패', '난전', '어물전', '누원점', '이현' 등의 핵심 개념을 통해 조선 후기 사상의 성장이라는 시기적 상황과 관련한 자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답지에서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과 관련이 없는 것을 찾으면 되겠네요.
답지를 보기 전 칠패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해보죠(바로 답지 설명으로 가도 됩니다).
칠패(七牌)는 조선 후기에 남대문(숭례문) 밖에 형성된 난전으로, 현재의 남대문 시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18세기 전반 들어 칠패는 종루(종로), 이현(동대문 밖, 오늘날 동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난전들 밀집 지역이자 상업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칠패에서는 미곡·포목·어물 등의 물품이 매매되었는데, 그 중에서 어물의 매매가 가장 규모가 크고 활발하였습니다.
칠패의 사상 도고(私商都賈, 도매상)들은 직접 지방에 내려가 어물을 구입하거나,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어물을 길목에서 매점하는 방법으로 어물을 확보하고 이를 판매함으로써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시전 어물전은 어물 공급에 차질을 빚어 문제가 되었는데, 문제에 주어진 사료도 이러한 내용이 나타나 있죠?
즉, 칠패에서 어물을 취급하는 사상들은 삼남 지방에서 들어오는 길목인 광주의 송파, 그리고 원산을 비롯한 동북 지역에서 들어오는 길목인 도봉산쪽의 누원점(樓院店)과 칠패를 연결하는 유통 체계를 갖추어 지방에서 서울로 유입되는 어물을 거의 독점적으로 확보하였습니다.
칠패의 난전 도고상인들은 독점한 어물의 가격을 자의로 조절할 수 있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자, 이 부를 기반으로 점차 시전의 어물전들을 압도해가죠.
① 조선 후기 이전에는 민간의 광산 개발을 금지하고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 들어 민간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설점수세제)을 실시합니다.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② 부역제에 바탕을 둔 관영 수공업의 발달은 조선 전기의 모습입니다.
부역제란 일정 기간 동안 동원되어 성, 건축물 등을 짓는 노역이나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조선 전기에 정부는 수공업자들을 공장안에 등록시킨 후 서울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 속하게 하고, 이들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 공급하게 하였습니다(관청 수공업).
16세기 들어 부역제가 해이해지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관영 수공업은 점차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해 갑니다.
③ 조선 후기에 소작 농민들은 좀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도록 하죠.
그리고 소작료 납부 방식도 타조법(수확량의 반을 납부)에서 도조법(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것)으
로 바꿔 소작인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갑니다.
수확량의 반을 소작료로 내게 하는 타조법은 수확량이 많을수록 지주가 소작료를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주의
소작인에 대한 간섭(수확을 늘리도록)이 심해 소작인에게 불리하였던 겁니다.
④ 조선 후기에는 직파법 대신 모내기법이 일반화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죠?
모내기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내기철에 물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농업 용수를 저장 ·관리하는 수리 시설(제언 시설)이 중요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조 때인 1778년에 제언절목을 반포, 수령 등이 담당하던 제언사 업무를 비변사에 이관하도록 합니다.
⑤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상평통보 등의 화폐 사용이 일반화되고, 환, 어음 등의 신용 화폐도 점차
보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3회 고급 12번 문제
20.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답①
문제에 제시된 민요가 언제인지 파악해야 풀 수 있는 문제네요.
민요의 가사 중에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키포인트는 '칠패의 생선전'입니다.
이것을 파악해내지 못하면 도대체 어느 시기 민요인지 알 수 없기에, 이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찍어야 하는 막막함에 처하게 됩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든 주어지는 자료가 생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알 수 있는 개념을 우선 파악해내어야 합니다.
실제 시험 문제를 풀 때 이점을 잘 기억하세요.
칠패는 조선 후기에 남대문(숭례문) 밖에 형성된 시장으로 현재의 남대문 시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당시 새롭게 형성된 시장은 칠패 외에도 종루(종로), 이현(동대문 밖, 오늘날 동대문 시장), 그리고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교통의 요지인 송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시전 상인이 아니라, 자유 상인인 사상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지요.
이 당시 사상들은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때 성장한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개성의 송상, 평양의 유상, 의주의 만상, 한양의 경강 상인, 동래의 내상이 있습니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어요. 사상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여 갔답니다.
특히,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경강 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는데,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국제 무역에서도 사적인 무역이 허용되면서 청과의 무역에서는 의주의 만상,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동래의 내상이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성의 송상은 양자를 중계하며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① 저화는 고려 말부터 사용되었으며, 조선 시대 들어 태종 때 이를 만들어 유통시켰어요.
그러나 당시에는 쌀과 무명을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사용해 화폐의 사용은 여전히 부진하였습니다.
② 조선 후기에 등장한 중도아(中都兒)는 시전 등에서 물건을 사서 송파·칠패·이현 등의 난전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중간
도매상이었습니다.
③ 조선 전기에는 광산 개발을 국가가 독점하고 민간에 광산 개발을 허용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에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민간인에 의한 광업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광산 개발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
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어요.
④ 조선 후기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였습니다.
⑤ 조선 후기에 들어 포구가 새로운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어요.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의 역할을 했으나, 18세기에 들어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
로 성장하였습니다.
포구의 상거래는 장시보다 규모가 훨씬 컸으며, 포구를 거점으로 선상, 객주, 여각 등이 활발한 상행위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6회 고급 30번 문제
30. 모내기법이 보편화된 시기의 사회 경제 모습 답③
이 문제에 제시된 현상은 모내기하는 그림, 그리고 '모내기'라는 개념을 통해 모내기임을 알 수 있어요.
모내기법(이앙법)이 보편화된 것은 조선 후기이니 이 시기의 모습을 찾으면 되겠네요.
바로 답지 설명으로 가겠습니다.
①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시장 판매를 위한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졌고, 대동법의 실시로
관수품의 수요도 증가하여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민간 수공업자들은 장인세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간 수공업자들은 대체로 자본의 규모가 작아서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았어요.
따라서 공인이나 상인에게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습니다.
② 지주 전호제에서는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은 수확량의 반을 지주에게 납부하였습니다(병작반수제, 타조법).
결국 수확량에 따라 지주의 소득이 달라져 수확량을 늘리려는 지주의 간섭이 심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소작인들의
저항과 요구에 조선 후기에는 수확량에 관계 없이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납부하는 도조법이 나타나 일반화
되어 갑니다.
③ 조선 후기에 이앙법이 일반화되면서 광작이 유행하였고 이는 농민층의 분화를 가져옵니다.
즉 일부 농민은 농토를 늘려 부자가 될 수 있는 반면에 대다수 농민은 토지를 잃고 몰락하였습니다.
④ 조선 후기에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란 어용 상인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는데, 공인들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
로 상품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농민들도 대동세를 내기 위하여 상품 작물을 재배하거나 토산물을 시장에 내다 괄아 쌀, 베, 돈을 마련하였죠.
이와같이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였습니다.
⑤ 조선 후기에는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사상들이 성장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송상), 평양(유상), 의주(만상), 동래(내상)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5회 고급 30번 문제
30.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답②
조선 후기 경제 상황을 묻는 문제들은 자료를 분석해 그 시기의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 유형으로 출제됩니다. 이 문제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이러한 유형, 이러한 내용을 묻는 문제로 출제되니 이 시기 경제 상황을 잘 공부해 두세요.
제시된 내용은 당시 농민들이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모시, 생강, 고구마 등 이른바 상품 작물의 재배로 벼나 보리를 심는 논농사보다 몇 배 이상의 이익을 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이 시기는 조선 후기로, 당시에는 이앙법이 일반화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여 부농들이 등장하고,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송상, 만상, 경강 상인 등 사상들의 성장하였던 시기입니다..
ㄱ - 조선 후기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송상), 평양(유상), 의주(만상), 동래(내상)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여 갔습니다.
ㄴ - 직전법에 대한 설명으로, 직전법은 조선 전기에 폐지되었습니다.
ㄷ - 이 시기 논농사에서는 모내기법(이앙법), 밭농사에서는 견종법의 재배 기술이 확산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크게 높아
집니다.
또한 자료에 나타난 것처럼 큰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상품 작물을 활발하게 재배해가죠.
ㄹ - 조선 후기에는 타조법(정률 지대) 대신 소작인들에게 보다 유리한 도조법(정액 지대)의 비율이 늘어갔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2회 1급 16번 문제
16.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답①
먼저 문제 자료에 공통적으로 제시된 밑줄 친 '이 시기'가 언제인지를 파악해야겠네요.
첫번째 자료를 보면, 경공장(부역제로 서울에 올라와 정부 필요 물품을 만드는 데 동원되는 수공업자(장인))의 숫자가 1/10로 크게 줄었다는 것, 즉 부역제의 해이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두번째 자료에는 황해도 평산 지역의 자영 수공업자(민영 수공업자)가 430명이나 된다는 사실, 즉 민영 수공업이 그만큼 발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번째 자료는 부상대고(부유한 상인)들이 재물(자본)을 분담하고 이 돈으로 고용 노동자를 모집해 은점을 경영하려고 하는 사실, 즉 민간인들의 광산 개발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부역제의 해이, 민영 수공업의 발달, 민간인의 광산 개발은 모두 조선 후기에 나타난 모습들입니다.
그럼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이 아닌 것을 찾으면 되겠네요.
① 조선 전기의 모습입니다.
공납이란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각종의 수공업 제품과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재 등)을 거두는 것을 말합니다.
조선 전기까지 공납은 각 지역의 토산물을 조사하여 중앙 관청에서 군현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각 군현은 각 가
호에 다시 할당하여 이를 현물로 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 할당된 공물의 생산량 감소, 생산지의 변화로 이를 납부하기 어려워지면 그 물품을 다른 곳에서 구
입해다가 납부해야 했는데, 이것이 엄청난 부담을 주고 문제가 됩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개혁 논의를 걸쳐 광해군 때 대동법이 실시되기 시작합니다(1606).
대동법은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로 토지 1결당 미곡
12말만 납부하면 되었습니다.
정부는 대동세를 받아 필요 공물은 공인(貢人)들을 통해 구입하였죠.
② 조선 후기에는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이에 따라 17세기 말에는 전국에 약 70개 정도의 은광이 개발되었습니다.
③ 조선 후기에는 장시가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들은 쌀뿐만 아니라,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
이른바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팔았습니다.
④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의 발달은 화폐 유통도 활발하였습니다.
이 시기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기도 하였어요.
이 때문에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 현상(전황)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⑤ 조선 후기에 민간 수공업자들은 대체로 작업장과 자본의 규모가 소규모여서 초기에는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수공업자가 공인이나 상인에게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성행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농업의 발달
24회 고급 27번 문제
27. 구황 작물인 감자와 고구마의 전래 답③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작물은 '감저(감자), 고귀마(고구마)'네요.
감자와 고구마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부족한 식량을 보충해 주어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데 기여한 대표적인 구황 작물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고구마·감자 등의 구황 작물(기후가 좋지 않은 흉년에도 비교적 안전한 수확을 얻을 수 있는 작물), 옥수수·호박·토마토 등의 새로운 작물이 전래되었어요.
고구마는 영조 39년(1763)에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종자를 부산진으로 보냈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씨앗을 가져다가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 재배하여 성공함으로써 널리 재배히게 되었습니다.
감자는 1820년대에 청으로부터 도입되었으며, 전래된 지 얼마되지 않아 여러 지역에서 재배될 정도로 보급이 빨랐습니다.
고구마와 감자는 척박한 토지와 기후 환경에서도 잘자라 구황 작물로써 농민들의 식량 해결에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한편 고추도 조선 후기에 전래되어 생활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고, 배추는 이전부터 재배해왔던 종자가 있었지만, 18세기에 중국으로부터 포기가 큰 배추가 전래되면서 보급이 급속히 이루어졌어요.
① 명에 수출된 대표적 특산물은 인삼을 들 수 있어요.
② 고려 말 문익점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여온 것은 목화(씨)입니다.
③ 고구마와 감자는 기후와 토질에 관계 없이 잘자라 정부에서도 구황 작물로 재배를 적극 권장하였죠.
④ "농사직설"은 고구마와 감자 전래 이전인 조선 전기 세종 때 편찬된 농서이므로, 고구마와 감자를 시험 재배한 결과가
이 책에 소개될 수 없죠.
⑤ 조선 후기에는 쌀의 상품화가 활발해지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려는 현상이 가속화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9회 고급 26번 문제
26. 모내기법(이앙법)의 결과 답②
모내기법(이앙법)에 대한 문제는 오랜만에 출제되었네요.
그동안 조선 후기 경제 모습을 묻는 문제에 답지로 포함되어 출제되었는데, 이번에 단독 문제로 출제되었습니다.
'금령에도 불구하고 여러 도에 퍼져 있으니 모두 금지하기 어렵다.', '광작', '1년에 두 번 농사지음'을 통해 모내기법(이앙법)을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농민은 황폐한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였으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고, 새로운 영농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새로운 영농 방법 중 농민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모내기법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고려 말 부터 남부 일부 지방에서 실시되던 모내기법을 더욱 확대해 갔습니다.
정부에서는 모내기철에 가뭄이 들면, 한해 농사를 망칠 수가 있으므로 이를 엄격히 금지하였으나, 농민들은 모내기법으로 얻는 이익(노동력 절감, 소득 증대)이 커 이를 점차 확대해 나갔던 것이죠.
또한, 모내기법은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모를 모판에서 키우는 동안 논에서 보리를 재배할 수 있었기에 한 논에서 1년에 벼와 보리를 재배할 수 있었음)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해 주었습니다.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 재배가 확대되었고,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농민은 농업을 경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습니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자, 농민은 경작지 규모를 확대해 넓은 농토를 경작(광작)하였습니다.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대부분의 농토를 소작시키고 일부 농토만 직접 경영하던 지주도 소작지를 회수하여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직접 경영하였습니다.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이나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죠. 이렇듯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소작 농민은 소작지를 잃기는 쉬워지고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농촌을 떠난 농민은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으며,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광산, 포구 등에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ㄱ - 모내기법으로 수확량이 늘어났으며, 여기에 이모작이 가능해져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더욱 증가하였습니다.
ㄴ -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시작된 것은 삼국 시대부터로 볼 수 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철제 농기구가 보급,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우경도 기록상 6세기(502년 지증왕)에 나타난
것을 통해, 적어도 6세기에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 들어서는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었습니다.
ㄷ - 모내기법은 일정한 간격으로 모를 심는 방법이었기에 모 사이사이에 난 잡초를 제거하기가 수월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잡초를 제거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력을 줄일 수 있었죠.
ㄹ - 고려 시대의 농사 기술에 대한 설명입니다.
앞서 말했듯 고려 시대에는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고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휴경지가 점차 줄어 계속해서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늘었습니다.
밭농사는 2년 3작 윤작법이 점차 보급되었고, 논농사도 고려 말에는 직파법 대신에 모내기법(이앙법)이 남부 지방 일
부에 보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10회 고급 29번 문제
29. 모내기법의 보급 결과 답⑤
자료에 나오는 내용 중에 '5월에 맥추(麥秋),.....문 앞에 터를 닦아 타맥장(打麥場)'이 나오는데,
이는 5월에 보리 추수를 하고 문앞 마당에서 보리를 타작한다는 내용으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밑에 줄에
'농우(農牛)를 보살펴....그루갈이 모심기 제힘을 빌리로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농사짓는데 힘을 써야할 소를 잘 먹여 모심기 전에 논을 다듬을 때 힘을 잘 쓸 수 있도록 대비하라는 내용입니다.
결국 여기에 나타난 농법은 '이앙법(모내기법)', '1년 2모작(벼, 보리)' 등입니다.
이앙법으로 벼 생산이 늘어 소득이 늘어나자 밭을 논으로 바꾸고
노동력은 줄어듦으로써 한 사람이 많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어 넓은 논을 경작하는 광작(廣作)이 유행합니다.
(이앙법은 줄을 맞춰 모를 심으므로, 벼를 직접 논에 뿌려 심는 직파법보다 제초(잡초 제거) 작업이 쉬워 많은 일꾼이 필요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이에 따라 일부 농민이 부농으로 성장한 반면, 많은 소작 농민들은 농토를 잃고 품팔이로 전락하거나
일부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광산이나 포구의 임금 노동자(임노동자)나 상공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ㄱ -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해지죠?
ㄴ - 한전(旱田)에서도 변화가 일어나, 농종법(밭이랑에 심는법)이 견종법(밭고랑에 심는법)으로 바뀌어 갔어요.
한전 농업이란 밭 등에서 벼를 기르는 것으로, 물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벼농사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9회 고급 26번 문제
26. 모내기법의 보급 결과 답②
이 문제는 농법을 묻는 문제네요.
'한해(가뭄 피해)', '파종하는 방법(직파법)을 버리고 이 농법만 숭상', '(모내기) 때 맞추어 비가 내리기를 기대하기 힘드니' 등을 통해 자료에서 비판하고 있는 농법이 '이앙법(모내기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말부터 일부 지방에서 실시된 모내기법은 조선 후기에 들어 보편화됩니다.
직파법(파종법)은 벼를 논에 직접 뿌려 자라나게 하는 농법입니다.
반면 모내기법은 벼를 못자리에서 길러 이를 논에 옮겨 심는 농법입니다.
모내기법은 모를 논에 옮겨 심는 모내기철에 논에 물이 있어야 모내기를 할 수 있고, 모가 한참 자랄 때 물이 있어야 한해(가뭄 피해)를 입지 않는 등 위험 요소가 많은 농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농민들이 직파법보다 모내기법을 선호한 이유는 모를 일정하게 심을 수 있어 잡초 제거하기에도 좋아 일손이 덜 들어가고, 수확량도 배 이상이 되었으며, 논에서 재배하는 기간이 짧아(못자리에서 길러 모내기를 하니)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위험 요소는 있지만 모내기법이 가져다 주는 수확량이 크기 때문에 이를 선호한 것이죠.
그래서 정부와 농민들은 가뭄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각지에 수리 시설로 저수지나 보 등을 만들어 이를 극복해 갑니다.
ㄱ - 모내기법이 보급되자 농민들은 벼를 수확한 후 바로 보리를 파종하고 봄에 못자리에서 모를 재배하는 동안 보리를
수확한 후 그 자리에 모를 옮겨 심는 이모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ㄴ - 소를 이용한 경작(우경)은 신라 지증왕 때 처음 나타났고,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 시대입니다.
ㄷ -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이 줄자,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경작지의 규모가 확대되어 광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ㄹ - 소작 농민들은 좀 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소작 쟁의를 벌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고, 소작료도 수확량의 반이나 내던 것에
서(타조법)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도조법).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6회 고급 26번 문제
26. 조선 후기 농촌 사회의 모습 답⑤
문제에 주어진 자료를 보면 조선 후기 상황임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죠?
'상품 화폐 경제 발달', '소작인의 저항에 따라 지주들이 소작료를 낮추거나 일정 액수로 정하는 추세(도조법) 등장', '지주 전호제가 신분적 관계에서 경제적 관계로 전환'이라는 내용에서 조선 후기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조선 후기의 농촌 사회 모습을 <보가>에서 하나씩 찾아볼까요?
ㄱ -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 급격하게 확대되어 갑니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었어요.
이에 따라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혀갔지만, 자작농이나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났고, 일부
서민들도 부농으로 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ㄴ -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들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이를 장시
에 내다 팔았습니다.
특히, 쌀의 수요가 늘면서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게 일어나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습니다.
ㄷ - 모내기법이 확대되면서 벼 수확 후 바로 보리를 재배하는 이모작이 일반화됩니다.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습니다.
ㄹ - 광작으로 토지를 잃고 농촌을 떠난 다수의 농민은 도시로 옮겨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으며, 일부
농민은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고용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ㄴ,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10회 고급 28번 문제
28. 조선 후기에 들어온 담배와 관련된 사실 답③
문제에 제시된 '풀'은 담배입니다.
자료에서 '남령초', '일본으로부터 왔다...' 등에서도 담배라는 힌트를 얻을 수 있지만
결정적 힌트는 '불을 붙여 빨아들인다...'라는 표현에서 담배임을 확신할 수 있죠?
담배는 예전에 연초(煙草)라고 불렀어요.
그럼 <보기>에서 담배와 관련된 사실을 찾으면 되겠지요.
ㄱ - 담배에 대해서는 생산자와 판매하는 상인에게 적은 세금을 물리는 정도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재정
수입을 늘리려 1921년 연초전매령을 공포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연초 전매제를 실시하였어요.
ㄴ - 조선 후기에는 장시가 활성화되고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농촌에서도 여기에 팔 작물, 즉 상품 작물 재배가 활발
해졌어요. 당시에 재배된 상품 작물로는 쌀, 채소, 목화, 인삼, 약초 등과 함께 담배가 대표적이었지요.
ㄷ - 조선 후기 당시 담배는 인기 물품이었기에 담배를 전문적으로 파는 연초전(煙草廛)이라는 시전이 있었어요.
ㄹ - 당시 담배는 신분에 상관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피울 수 있었어요.
네덜란드 사람 하멜은 “조선 사람들 사이에 담배가 매우 유행해서 어린아이들도 네댓 살부터 피우기 시작한다. 남자
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피운다."라고 하멜 표류기에 적어놨을 정도랍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으로 묶인 ③번입니다.
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4회 고급 25번 문제
25. 조선 후기 광업의 변화 답③
이 문제는 조선 후기 광산 개발의 흐름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일반적일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제 해설은 조금 깊이 들어가 어려울 수도 있으나 이 기회에 공부해 봅시다.
조선 시대 광산은 본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몰래 채굴하는 잠채가 성행하자 17세기에 이르러 허가를 받은 민간인에게 정부의 감독 아래 광물을 채굴할 수 있도록 하는 설점 수세제를 실시합니다.
초기 설점 수세제는 호조 별장 수세제로 운영됩니다. 즉 호조에서 은점을 설치(효종, 1651)하고 수세하며 정부의 감독 아래 허가를 받은 민간인의 광물 채굴을 허락한 것입니다(호조 별장제). 이로써 민간인의 광물 채굴이 어느 정도 가능하였으나 활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때는 주로 호조가 광산 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대고 호조에서 파견한 별장이 이를 경영, 수세하는 방식으로 광산이 운영됩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령 수세제로 전환(영조, 1775)되어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고 민간인이 광물을 자유롭게 채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후 민간인에 의한 광산 개발이 활기를 띱니다. 이는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① 조선 후기에는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② 잠채란 정부에 허가받지 않고 광산을 몰래 채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산의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채굴 이외에 몰래 채굴하는 이른바 잠채도 성행하였습니다.
③ 초기 설점수세제는 별장 수세제였습니다.
별장 수세제 아래서 광산의 개발비용은 대개 호조가 대고 수세와 경영은 호조에서 파견한 별장이 담당하였습니다.
(마) 이후 그러니까 영조 때인 1775년 수령 수세제로 전환되면서 민간인 물주가 광산 개발에 필요한 돈을 대고 덕대가
광산을 운영하게 됩니다.
수령 수세제 실시로 광산의 관할 수령이 호조가 정한 세금을 광산으로부터 받아 수납하게 됩니다.
④ 17세기 중엽부터는 민간의 광산 개발을 허용해 주는 대신 세금을 내도록 합니다(설점 수세제)
이때 광산에서의 수세 업무는 호조에서 담당하였는데, 호조는 광산에 별장을 파견하여 수세와 경영을 대행시킵니다.
⑤ 광산 개발에는 각 군영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1702년에 호조가 광산의 설점 수세를 모두 독점합니다.
그러자 군영들이 반발하여 광산에 각종 세금을 부과하여 은점 운영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또 지방 토호나 대상들이 수령과 결탁하여 별장 수세제에 대항하며 사채나 잠채가 성행하자 호조에 수세하는 은점 수
가 크게 줄어듭니다. 이에 정부는 1775년에 수령 수세제로 전환하여 광산의 관할 수령이 호조가 정한 세금을 광산으로
부터 받아 수납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상업의 발달
24회 고급 26번 문제
26. 조선 후기 전황의 발생 답⑤
제시된 첫번째 자료는 관청과 영진 등에서 화폐를 저축해 두고 있어 화폐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상황,
두번째 자료는 상인들이 화폐를 쌓아두고 이를 이용해 고리대 등의 이익을 취하려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자료 모두 화폐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화폐가 부족해지는 상황, 즉 전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네요.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써 금속 화폐인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됩니다. 정부도 화폐의 유통에 힘써서 인조 때 동전을 주조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그 쓰임새를 살펴보고, 숙종 때는 이를 널리 유통시켰죠.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는 등 화폐 사용이 일반화되었어요.
그러자 동전은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지주나 대상인들을 중심으로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기 시작하죠. 이에 따라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전황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호 이익은 화폐 사용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면서 폐전론을 주장하기도 했어요.
① 영정법은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킨 제도입니다.
이는 전세 제도와 관계된 탐구 주제입니다.
② 원납전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거둔 것이므로, 경복궁 중건과 관계된 주제입니다.
③ 직전법의 시행 결과는 관리에게 지급할 과전의 부족과 관계 있는 주제입니다.
④ 건원중보는 고려 성종이 발행한 철전으로 화폐 유통과 관계된 주제입니다.
⑤ 제시된 자료는 시중 유통 화폐의 부족 현상, 즉 전황의 발생 원인을 분삭하는데 적합한 탐구 주제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3회 고급 24번 문제
문제해설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 부여'라는 내용을 통해 (가)에 들어갈 상인은 시전 상인임을 알 수 있네요.
조선 초기에는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어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죠.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습니다. 또,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습니다.
조선 후기 들어 사상(私商)들이 성장하면서 시전의 상권을 잠식합니다. 18세기 전반 들어서는 칠패(남대문), 종루(종로), 이현(동대문 밖, 오늘날 동대문 시장)은 서울에서 가장 큰 난전들 밀집 지역이자 상업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이에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허가받지 않고 장사하는 상점 즉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을 행사하며 난전을 단속하며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전이 금난전권을 행사하며 물품을 매점하여 고가에 판매하는 등의 불법 행위로 소상인·소비자들이 큰 피해를 입는 폐단이 지속되자 정조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한다는 신해통공 정책을 발표합니다(1791). 이 정책의 실시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가능해져 사상(私商)이나 난전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죠.
한편, 조선 후기에 성장한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개성의 송상, 평양의 유상, 의주의 만상, 한양의 경강상인, 동래의 내상이 있습니다. 국제 무역에서도 사적인 무역이 허용되면서 청과의 무역에서는 의주의 만상,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동래의 내상이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성의 송상은 양자를 중계하며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① 보부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혜상공국은 보부상의 특권 기구로 1883년에 조직되었습니다.
장시에서 활동하던 보부상은 개항 이후 외국 상인들에게 점차 상권을 위협받자 외국 상인의 불법적인 상행위 저지, 불량
행상의 폐단 근절, 보부상의 권익 보호, 보부상의 민폐 근절 명목으로 설치되었죠. 그러나 혜상공국이 자유로운 상행위를
막는 폐단도 보였어요. 이 때문에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개화당)는 혜상공국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어요.
② 시전 상인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들은 개항 이후 외국 상인들의 침투에 맞서 1890년 철시 투쟁을 벌였으며, 황국 중앙 총상회(1898) 등을 조직하여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어요.
③ 대일 무역인 왜관 개시에서는 내상(동래 상인)이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④ 개성을 중심으로 성장한 사상인 송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해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⑤ 대청 무역인 책문 후시에서는 청 상인과 조선의 만상, 송상 간의 밀무역이 성행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2회 고급 24번 문제
24. 신해통공(1791) 정책 답④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물건 주인이 듣지 않으면 난전이라 부르면서 결박하여'라는 내용을 통해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행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자료의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서울로 들어오는 물품을 싼값이나 헐값에 강제적으로 매입하고 있는 폐단을 지적하고 있네요.
따라서 이러한 시전 상인들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실시한 개혁 정책을 찾으면 됩니다.
국초부터 시전 상인은 국역의 형태로 왕실이나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부담을 지고 그 대가로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과 금난전권을 부여받았어요.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여섯 점포(육의전)가 가장 번성하였습니다.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감시하기 위하여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경시서(후에 평시서)라는 관청을 두었어요.
조선 후기 들어 사상(私商)들이 칠패, 배오개(이현), 송파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시전의 상권을 잠식합니다. 이에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허가받지 않고 장사하는 상점 즉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을 행사하며 난전을 단속하며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하였습니다.
여기에 시전이 금난전권을 행사하며 물품을 매점하여 고가에 판매하는 등의 불법 행위로 소상인·소비자들이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아지죠. 이러한 폐단이 지속되자 정조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한다는 신해통공 정책을 발표합니다(1791). 이 정책의 실시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가능해져 사상(私商)이나 난전의 활동이 활발해지죠.
① 상평창은 물가 조절 기관으로 물가 조절이나 때에 따라서는 구휼도 담당하였던 기관입니다.
② 당백전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였던 특별 화폐입니다.
명목가치가 실질 가치의 20배에 이르는 화폐였기 때문에 물가 상승을 가져와 곧바로 발행이 중단되었어요.
③ 혜상공국은 보부상의 특권 기구로 1883년에 조직되었습니다.
외국 상인의 불법적인 상행위 저지, 불량행상의 폐단을 없애 보부상의 권익을 보호, 보부상의 민폐도 근절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만, 자유로운 상행위를 막는 폐단도 보였어요. 이 때문에 갑신정변(1884.12)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서재
필 등의 급진 개화파는 혜상공국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어요.
④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 행사로 폐단이 많아지자 정조는 신해통공을 발표해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합니다.
⑤ 시전은 국초부터 국역의 형태로 왕실이나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0회 고급 31번 문제
31. 서울 도성의 상인 시전 상인 답③
조선 후기 경제에 대한 문제는 매회 1~2문제 꼭 출제됩니다.
이 문제는 8회 고급 26번과 유사하게 출제되었네요.
흔히들 난이도를 기준으로 13회 이전 또는 2~10회 기출문제는 풀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분석입니다.
난이도는 다를지라도 자료나 답지는 반복되어 출제됩니다.
그러니 난이도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공부 차원에서 풀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빗금친 지역은 운종가, 오늘날 종로입니다.
주어진 설명처럼 조선은 건국 초에 이곳에 상가를 만든 후 이를 시전 상인들에게 빌려 주고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어요.
사상들은 이곳이 아니라 도성 문밖(동대문 밖에 이현), 숭례문 밖에 칠패 등)에서 활동하였다는 것 기억하세요.
따라서 제시된 설명은 시전 상인들을 설명하는 것이니 이들에 대해 파악하면 되겠네요.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농본억상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어요.
조선은 한양 도성을 건설할 때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운종가입니다.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내도록 하였어요.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죠.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여섯 점포(육의전)가 가장 번성하였습니다.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감시하기 위하여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경시서(후에 평시서)라는 관청을 두었어요.
조선 후기에 사상(私商)들이 칠패, 배오개(이현), 송파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시전의 상권을 잠식합니다.
앞서 말했듯 시전 상인들은 국가의 필요 물품을 공급하거나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금난전권을 부여받아 난전(허가받지 않고 장사하는 상점)을 단속할 수 있었기에, 난전을 단속하며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전이 금난전권을 이용해 물품을 매점하여 물가 상승 등의 부작용이 심화되어 소상인·소비자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는 문제점이 지속되자 정조는 신해통공 정책을 발표(1791)해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합니다. 이에 따라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가능해져 사상(私商)이나 난전의 활동이 더욱 활성화되었고, 반대로 시전 상인들의 활동은 위축이 되죠.
한편 개항 이후에는 조·청수륙무역장정의 체결(1882)로 청·일 등 외국 상인들이 내륙으로 침투해 오자, 시전 상인들은 이에 맞서 1890년대에는 철시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해(1898) 상권 수호 운동을 벌였습니다.
①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경시서(후에 평시서로 개칭)라는 관청을 두어 시전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감시하였습니다.
경시서는 개경의 시전 상인들의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고려 시대에도 설치되었던 관청입니다.
② 정조는 신해통공을 발표(1791)해 시전 상인들의 특권인 금난전권을 혁파하였습니다.
이에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가능해져 사상(私商)이나 난전의 활동이 더욱 활성화되었어요.
③ 송방은 시전 상인이 아니라 사상인 개성상인들이 전국의 주요 도시에 설치하였던 지점입니다.
④ 시전 상인들은 국가의 필요 물품을 공급하거나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금난전권을 부여 받았습니다.
⑤ 개항 이후 외국 상인들이 내륙으로 진출, 상권을 침탈하자 시전 상인들은 철시 시위를 전개하고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해 상권 수호 운동을 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8회 고급 23번 문제
23. 개성의 송상 답③
1점짜리 쉬운 문제입니다.
조선 후기 사상에 대한 단독 문제는 그동안 출제가 거의 없었고 주로 답지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출제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송방 개설'이라는 것에서 개성의 송상을 떠올릴 수 있죠?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을 주도한 것은 공인과 사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대동법 실시 이후 국가에 필요 물품을 구매해 납품하는 어용 상인인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내상 양자를 중계하며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가)의 의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것은 만상입니다.
만상은 대중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는데, 대표적 인물로 '임상옥'이 유명하죠.
(나)의 평양을 기반으로 활동한 사상은 유상입니다.
(다)의 개성은 송상이 기반이었습니다.
(라)의 한성에는 경강 상인이 기반을 두고 활동하였습니다.
경강 상인은 도성을 기반으로 하는 경강 상인은 세곡 운송 등의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어요.
(마)의 동래에는 내상이 있었습니다.
내상은 일본에 조선의 인삼, 쌀, 무명, 그리고 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팔고, 일본에서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
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8회 고급 34번 문제
34. 상평통보 답③
고대~근대에 걸쳐 동전을 비롯한 화폐에 대한 문제도 자주 출제됩니다.
이 문제는 화폐만 찾으면 되는 쉬운 1점짜리 난이도입니다.
제시된 자료에 ‘숙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주조되어 조선 말까지 사용된 화폐’라고 했으니 상평통보임을 알 수 있죠?
상평통보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을 이용하여 만든 조선 시대의 법정 화폐로, 조선 말까지 유통된 명목화폐입니다.
앞면에 常平通寶(상평통보)라고 새기고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정부에서는 지속적으로 화폐를 유통시키고자 하였으나 사회 경제적으로 화폐의 필요성이 적어 널리 유통되지 못하고 일반적인 거래는 여전히 곡식이나 삼베를 사용하였습니다.
조선은 왜란과 호란 이후 재정 확보를 위해, 그리고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화폐 발행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이에 인조 때인 1633년 김육 등의 건의로 상평청(常平廳)을 설치, 동전을 주조하여 상업이 발달한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그 쓰임새를 살펴보고, 효종 때에는 이를 널리 유통시켰으니 활성화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숙종 때인 1678년 영의정 허적의 제의에 따라 상평통보를 법화로 채택하여 본격적으로 주조, 유통하게 되면서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편, 상평통보의 주조는 호조, 상평청, 진휼청, 사복시, 어영청 및 훈련도감 등 7개 관청과 군영에서 맡았습니다.
이후 상평통보의 주조 및 발행을 합리적으로 철저하게 통제하고자 화폐 주조 관리 체계를 일원화하는 시도 끝에, 정조 때인 1785년에 호조에서 상평통보 관련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순조 때 들어 화폐 주조 관리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각 관청에서는 재정 궁핍을 타개하기 위하여 상평통보를 독자적으로 주조하였고, 여기에 국가에서 전담해야 할 화폐 주조에 민간인들까지 참여하는 도급제까지 나타나는 등 극도로 문란해졌습니다.
결국 고종 때인 1888년 상평통보는 그 발행이 완전 중단되었고, 통용되던 상평통보도 화폐 정리 사업(1905)을 실시하며 새 화폐로 교환되면서 완전 폐기되었습니다.
① 건원중보(乾元重寶)는 고려 성종 때 주조된(996),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입니다.
당의 화폐를 모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② 1888년 경성 전환국에서 발행된 1환짜리 주화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주화입니다.
③ 상평통보입니다.
④ 조선통보(朝鮮通寶)는 세종 때인1423년에 발행된 화폐입니다.
고려 말부터 태종 때까지 발행, 유통되던 저화는 그 가치가 날로 떨어져서 화폐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세종 때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저화와 함께 사용하도록 사섬시에서 관장하여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부진하였습
니다.
⑤ 대동이전(大東二錢)은 1882년에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화로, 대동일전, 대동이전, 대동삼전이 발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 고려~조선 시대의 화폐
1 고려 시대 ① 건원중보 : 성종 때 발행된 철전 ② 활구, 해동통보(해동중보), 동국통보, 삼한통보 : 숙종 때 발행(의천의 건의가 영향을 줌) ③ 저화 : 공양왕 때(1391) 발행된 종이 화폐
2. 조선 시대~대한제국 ① 저화 : 태종1년(1401)에 발행된 조선 최초의 지폐 ② 조선통보 : 세종 5년(1423)에 저화를 대신하기 위해 발행, 저화와 함께 사용되다 구리 부족으로 발행 중단 ③ 전폐 : 세조 10년(1464)에 만든 유엽전으로 전시에는 화살촉으로도 이용 ④ 대동통보 : 광해군 때 발행 ⑤ 상평통보 : 인조 때 처음 발행되다가 효종 때 재발행, 이후 숙종 4년(1678)에 다시 발행되어 조선 말까지 사용 중앙 관청의 각 부서, 각 도 감영, 한성부 및 각 지방에서도 발행해 그 종류가 35종이나 되어 혼란을 가져옴 ⑥ 당백전 : 고종 3년(1866) 경복궁 중건 비용 마련을 위해 발행, 명목가치 100배의 화폐 발행으로 물가 폭등을 가져와 1~2년 만에 폐지됨, 대신 청의 화폐를 수입해 사용 ⑦ 당오전 : 고종 20년(1883) 발행해 1895년까지 통용, 강화도, 의주에서 발행, 상평통보의 5배로 통용케 해 물가 앙등을 가져옴 ⑧ 백동화 : 대한제국 시기에 발행, 화폐 정리 사업(1905~09) 때 폐기 처분됨 |
8회 고급 26번 해설
26. 조선 후기 서울의 시장과 상인 답②
(가)의 운종가(종로)에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운종가입니다.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습니다.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죠.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여섯 점포(육의전)가 가장 번성하였습니다.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감시하기 위하여 경시서(후에 평시서)를 두었습니다.
(나)는 숭례문(남대문) 밖에 위치한 칠패네요.
조선 후기에는 장시가 발달하고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이현, 송파 등 도성 주변,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어요.
칠패(七牌)는 난전으로, 현재의 남대문 시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18세기 전반 들어 칠패는 종루(종로), 이현(동대문 밖, 오늘날 동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난전들 밀집 지역이자 상업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칠패에서는 미곡·포목·어물 등의 물품이 매매되었는데, 그 중에서 어물의 매매가 가장 규모가 크고 활발하였습니다.
칠패의 사상 도고(私商都賈, 도매상)들은 직접 지방에 내려가 어물을 구입하거나,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어물을 길목에서 매점하는 방법으로 어물을 확보하고 이를 판매함으로써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칠패에서 어물을 취급하는 사상들은 삼남 지방에서 들어오는 길목인 광주의 송파, 그리고 원산을 비롯한 동북 지역에서 들어오는 길목인 도봉산쪽의 누원점(樓院店)과 칠패를 연결하는 유통 체계를 갖추어 지방에서 서울로 유입되는 어물을 거의 독점적으로 확보하였습니다.
(다)의 송파는 삼남 지방(영남, 호남, 충청)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난전이 형성되었지요.
ㄱ - 평시서는 경시서의 후신으로, 시전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감시하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입니다.
ㄴ - (나)의 칠패 상인은 사상이었으며, 왕실, 관청에 물품을 공급한 것은 이들이 아니라 시전 상인입니다.
ㄷ - 송파 상인은 이곳에서 활동하였으며,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던 상인은 아닙니다.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던 상인들은 의주 만상, 개성 송상 등이었습니다.
ㄹ - 정조는 신해통공을 발표(1791)해 시전 상인들의 특권인 금난전권을 혁파하였습니다.
시전 상인들은 국가의 필요 물품을 공급하고 점포세을 납부하는 대신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와 금난
전권을 부여받아 난전(허가받지 않고 장사하는 상점)을 단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전이 금난전권을 이용해 물품을 매점하여 물가 상승 등의 부작용이 심화되어 소상인·소비자들이 막대한 피
해를 입게 되는 문제점이 지속되자 정조는 신해통공을 발표해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했죠.
신해통공으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가능해져 사상(私商)이나 난전의 활동이 더욱 활성화되는 결과를 가져 오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ㄹ로 묶인 ②번입니다.
8회 고급 30번 문제
30. 조선 후기 화폐의 유통과 전황 답②
이 문제는 화폐 유통과 관련있는 문제입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써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됩니다.
정부도 화폐의 유통에 힘써서 인조 때 동전을 주조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그 쓰임새를 살펴보고, 숙종 때는 이를 널리 유통시켰죠.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고 누구나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그러자 동전은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지주나 대상인들을 중심으로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기 시작하죠. 이에 따라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전황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죠.
② 저화는 고려 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까지 발행되었던, 일종의 지폐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6회 고급 27번 문제
27. 조선 후기 장시와 관련 있는 그림 답④
문제에 주어진 자료에 나타난 경제 활동이 무엇인지 알아보죠.
자료의 핵심은 '1470년 흉년이 들었을 때 전라도 백성들이 스스로 시포를 열고 이를 장문이라 하였는데, 이를 통해 필요한 구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부가 시포를 설치하도록 허용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눈치빠른 분들은 '장문'이라는 개념에서 파악하였겠지만 여기서 시포는 장시를 의미합니다.
자료에 나와 있는 것처럼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힘입어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습니다.
장시는 지방민들의 교역 장소로, 인근의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장시에서 가장 큰 활동을 한 것은 보부상으로, 이들은 각 장시를 돌아다니며 상행위를 하였습니다.
ㄱ - 김홍도가 그린 '신행'이라는 풍속화입니다.
신행이란 신부가 혼례식을 마치고 신방(新房)을 치른 뒤 신랑집으로 가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ㄴ - 김득신이 그린 귀시도(歸市圖)입니다.
장시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죠.
ㄷ - 권용정이 그린 '등짐 장수'라는 그림입니다.
등짐장수란 장시에서 활약하던 보부상 중 부상(負商)을 의미합니다.
ㄹ - 김홍도의 '장터길'이라는 그림입니다.
장시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5회 고급 29번 문제
29. 조선 후기 화폐 유통의 결과 답④
이 문제는 조선 후기 화폐 발행으로 나타난 사회 모습을 파악하는 문제입니다.
조선 후기 숙종 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널리 발행하여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습니다. 화폐 유통이 일반화되면서 물건 매매나 정부에 내는 세금은 물론 지주에게 내는 소작료도 화폐로 내는 것이 확산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화폐 사용에 따른 폐단도 나타났는데,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여 시중에 동전이 부족해지는 전황(錢荒) 현상이 그것이었죠.
ㄱ - 고려 시대의 화폐들입니다.
ㄴ - 화폐 품귀 현상(전황)으로 인플레이션 대신 오히려 물가가 내려갔습니다.
ㅁ - 조선 전기에는 정부가 광산 개발을 독점했으나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해 주는 대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4회 고급 39번 문제
39. 조선 후기 인삼 로드 답③
이 문제는 1점짜리 쉬운 문제이니 간단하게 해설합니다.
주어진 자료의 주요 내용은 '조선 상인들이 중국에서 비단을 구입해 일본에 은을 받고 팔고 이 은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다시 비단을 사다 일본에 파는 중계 무역을 하였다. 그래서 이 한-중-일 무역로를 실크로드(비단길), 실버로드(은길)라 하는데, 이 길을 통해 조선의 OO이 중국, 일본에 수출되어 'OO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 청에서는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을 수입하고 은, 종이, 무명, 인삼 등을 수출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고 인삼, 쌀, 무명 등을 수출하였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답지에 들어갈 'OO'은 바로 인삼입니다.
인삼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는 대표적인 품목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사상 중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서도 중계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은 개성 상인(송상)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회 2급 25번 문제
25. 조선 후기의 경강 상인 답①
이 문제는 제시된 자료 (가)에 '조선 후기 경강 지역' 이라는 것으로도 경강 상인을 떠올릴 수 있어요.
(가)는 경강 상인의 활동 무대를 나타낸 지도이고,
(나)는 경강 상인이 곡식값을 올려 큰 이익을 보고자 여각과 객주 등과 짜고 매점매석하자 이에 분개한 백성들이 소란을 피웠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가), (나) 두 자료와 관계깊은 상인은 경강 상인입니다.
ㄱ - 조선 후기 들어 포구가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성장합니다.
포구의 상거래는 장시보다 규모가 훨씬 컸는데,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이들 포구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하였던 사상들이 선상, 객주, 여각입니다.
특히, 선상은 선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여 큰 이득을 봅니다.
선상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 상인입니다.
경강 상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습니다.
이후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습니다.
개항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증기선을 이용해 세곡 운반을 차지하자 이들도 증기선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ㄴ - 정조의 화성 행차 때 한강을 건너기 위해 정약용이 설계한 배다리(주교:舟橋)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배다리를 만드는 데에 동원된 배가 경강 상인들의 배였습니다.
ㄷ - 개성의 송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송상은 전국에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였으며, 대청 무역과 대일 무역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에 관여해 부를 축적합니다.
ㄹ - 공인에 대한 설명입니다.
공인은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등장한 어용 상인입니다.
이들은 관청(선혜청 등)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를 독점하며 이익을 축적해 갑니다.
공인은 물품 납부를 위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 증가를 일으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
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ㄴ으로 묶인 ①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27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이번 시험을 보고온 분들을 포함해
이 문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나 느낌 등을 적어주세요.
정답은 3번입니다 조선후기에는 타조법에서 도조법으로 바뀌고 광작이 유행합니다
매번 잊지않고 나와주시는 조선후기 경제상황 땡큐...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고려, 조선 당시 상황을 구별해서 외우는게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맨처음문제의 경우 도조법, 목화에 대한 도입시기를 잘 알지 못하면 답을 잘못 체크할 확률이 높네요. 따라서 농업, 광업, 상업 등은 시기별로 표를 만들어 비교하며 외우면 수월할 것 같습니다.
사료를 통해 조선시대의 시기를 분류해야 하고 그 안에서도 특징을 분류해서 외워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급은 아직 저에겐 버거운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조선시대는 물론 고대 삼국시대, 중세 고려, 조선초기, 후기에서 특히 경제와 문화 파트 부분에 약한편인데 조선후기 경제파트에 대해서 문제에 대한 해설 외에도 간략한 도표식 정리 자료를 같이 탑재해주셔서 진짜 좋은거같아요. 두번째보는 한국사 시험이라 전에 조선시대 공부한게 생각은 나는데, 아직 진도가 고려말 원간섭기 부분이라 조선공부하고 나서 이 자료 참고하고 도움이 될것같아요.
아직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 어렵지만 열심히 공부하면서 이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흥부전이 조선후기 광작의 확대가 배경이라고 하는데.. 생산력의 증가가 사회 경제의 변화의 시작이라는것을 다시금 배우게되었습니다
전체적인 난이도를 보면서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몸소 실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박 겉 핥기 식으로 공부해온 저를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봐야 될까요?사료를 보면서 당시상황을 구별하는 연습부터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공부를 자세히 하지 못해 어렵네요.. 그래도 해설이 자세하고 암기하기 쉽게 되어있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공부를 하진않아 잘모르겠는 내용도 있지만 해설이 잘되어 보기 편하고 틀려도 오답공부가 잘될꺼 같아요~!
이제공부를 막 시작하려고 해서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 계기로더욱 열심히 해서 합격을 향하겠습니다.
이렇게 자세한 자료 감사합니다.
이제공부를 막 시작하려고 해서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 계기로더욱 열심히 해서 합격을 향하겠습니다.
이렇게 자세한 자료 감사합니다.
이제시작하는 병아리라 무슨말인지잘 이해가 가지 않으나 그래도해설이잘 되어있어서도움이 되네요
기출을 풀면서 노트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선전,중,후기 연대표를 작성해 시대별 특징을 정리해놔야 흐름을 파악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역시 어려워 ㅠㅠ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전기와 후기를 비교하면서 공부해야 이런문제가 나와도 당황하지 않고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 시기의 문화까지 연결해서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달기에는 아직 미숙한단계라 조심스럽네요 아직고려시대 공부중이랍니다 조선시대공부후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설이 정말 좋네요 !! 감사합니다 !!
생각보다 어렵네요.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경제는 역사나 지금이나 어렵네여 ㅠㅠ
감사합니다^^
경제는 쉬운듯 하면서도 애매한거같아요ㅠㅠ
조선 전기, 후기별로 경제, 문화, 학자 등 주제별로 정리만 잘 해 놓으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는 문제인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 경제라는 것만 알면 비교적 평이하게 풀 수 있는 문제인것같습니다^^
아직 조선..초기도 못들어갔는데ㅜ_ㅜ 빨리 공부해서 기출문제 풀고 풀이 보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타조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납부할 지대가 정해져 있으므로, 지주의 간섭이 없었어요. 라고 써있는데
이건 도조법의 설명이 아닌가요...제가 잘못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데 위에 계속 도조법은~이러다가 갑자기 타조법이라고 나와서 좀 이상해서요!!아니라면 죄송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