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24章. 녹정산을 찾아서
[반역자를 놓치지 말아라!]
수백 명 어전시위들이 활과 화기(火器)를 들고 위소보의 일행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홍안통과 구난사태 등 사람들은 이 엄엄한 대세를 보고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위소보 일가를 납치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무공기술이 높은 것은 말할 것 없고 대담하고 세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황궁에 들어가 위소보 일가의 열 한 사람을 안전하게 탈취해 와야만 했다. 수많은 적들 속에서 더욱이 화기를 물리치고 살아서 황궁문을 나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구난사태는 속으로 시름을 놓았다. 그것은 태후가 자기들 손에 있으니 감히 손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일은 끝장나는 판이었다. 구난사태는 황태후를 앞으로 밀며 신중한 소리로 말했다.
[몽골 황제, 누군가 봐요!]
(역자 주:구난사태가 말한 '몽골 황제'는 강희를 멸시하는 뜻임.)
그의 말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극히 두터운 내력을 내보냄으로서 떠들썩하던 적들의 소리를 눌러 놓았다. 함성으로 떠들썩하던 오문(午門)은 삽시에 물 뿌린 듯 잠잠했다. 구난사태가 태후에게 소리쳤다.
[어서 아들과 말해!]
태후가 겨우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내가 너의 황액낭이다.]
강희는 어머니가 적들에게 붙잡힌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놀라 말했다.
[황액낭, 어찌 되어....]
그는 말을 맺지 못하고 위소보를 찾았다.
[위소보! 제기랄, 네놈이 그래 태후 마님을 납치하다니 양심이 있느냐?]
위소보는 가슴을 내밀며 앞으로 나섰다.
[황상! 제기랄, 태후가 나를 죽이려 하니 양심을 따지다가는 내 목숨을 잃고 말아!]
강희는 비로소 부드럽게 말했다.
[소계자, 태후 마님을 놓아주시오. 우리 잘 이야기하면 되지 않소? 그러면 소계자 요구대로 다해 주지. 군자일언.... 그런 말이 있지 않소?]
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소현자, 다른 일은 다 이야기해도 되지만 태후만은 놓지 못하겠소이다. 태후를 놓아주면 군자일언.... 무슨 말도 따라잡지 못하오!]
두 사람은 서로 '제기랄'이고 '소계자', '소현자'고 또 '군자일언'이고 뭐고 주고받으며 말했다. 마치 강호 무리들의 암호 같아 옆에 있는 사람들은 멍해 있었다.
(역자 주:위소보가 말한 군자일언(君子一言)은 원래 일언기출(一言己出) 사마난추(駟馬難追), 즉 말은 한 번 하면 다시 거둬들일 수 없다는 뜻임.)
황태후가 불시에 소리쳤다.
[아들아(皇兒)!]
강희가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예!]
태후가 한자 한자 또렷또렷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묻겠다. 대청(大淸)의 강산은 어떻게 세워졌느냐?]
강희가 공손히 답했다.
[선조 황상들이 세웠소이다.]
태후가 또 물었다.
[너는 몇 대 황제냐?]
강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제4대외다.]
태후가 재차 물었다.
[일후에 누구에게 넘기겠느냐?]
강희는 하늘을 올려 보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자자손손이 천만년 이어가게 하겠소이다.]
태후는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아이신죠뤄(愛新覺羅) 후대에 손색이 없다.]
태후는 원래 몸이 쇠약한 여자였다. 구난사태가 내력으로 그의 혈도를 눌러 놓았으므로 숨을 가빠했다. 그녀는 숨을 좀 돌리고 나서 말했다.
[아들아. 또 한 가지가 있다. 너는 그 도리를 아직 모르고 있다.]
강희가 숙연한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황액낭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태후가 말했다.
[잘 기억해라. 충성을 다하면 효성을 다하기 어렵고 효성을 다하면 충성을 다하기 어렵다. 자고로 충성과 효성을 다 갖출 수는 없다.]
강희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 아들은 가슴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태후가 돌연 소리쳤다.
[대청의 강산을 위해 지금 여기에 있는 역적들을 몽땅 죽여라!]
구난사태는 그녀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것을 짐작하고 불진으로 그의 아혈을 누르려 했다. 그러나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구난사태는 놀랐다. 이처럼 여위고 가냘픈 여자의 눈에서 사람을 놀라게 할 만큼 늠름한 정기가 흘러나왔다. 구난사태는 불진으로 더 내려 누를 힘이 없었다. 하지만 눈을 딱 감고 내력을 가했다. 강희가 놀라며 소리쳤다.
[황액낭, 황액낭을 어찌....]
황태후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불효 자식! 그래 대청의 강산이 중요하냐? 나의 목숨이 중요하냐?]
구난사태가 냉소하며 말했다.
[흥! 이처럼 당당할 줄 몰랐는데?]
위소보가 생각했다.
(왜 몰랐겠는가? 이 진짜 태후년이 가짜 태후에게 여러 해 갇혀있으며 갖은 고생을 견디어 낸 것도 소황제의 안위(安慰)와 소황제의 강산을 위해서가 아닌가? 제기랄, 담이 작은 여자들이라도 태후가 되면 죽는 것도 겁내지 않는구나!)
구난사태가 살기를 돋우며 말했다.
[황제, 어떻게 하겠나?]
강희가 두 손을 힘없이 내렸다.
[구난사태님, 태후 마마를 놓아주시면 제가 여러분들을 무사히 황궁에서 내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태후가 또 말하려 하자 구난사태는 불진으로 그녀의 아혈을 눌렀다. 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 위소보는 강희, 더욱이 황태후에게 품었던 자그마한 환상마저 물거품으로 되었다. 구난사태가 강희의 말에 응낙할까 봐 위소보는 급히 외쳤다.
[사모하는 스승님, 소황제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구난사태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위소보를 노려보았다.
[소보, 왜 그렇게 말하오. 무슨 사모....]
구난사태는 젊은 시절에 불교를 믿게 되었다. 비록 남몰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정에 대한 말을 한 마디도 해 본 적이 없이 묵묵히 보내 왔다. 위소보의 경박한 말을 듣고 그가 비록 자기의 제자라고 하지만 구난사태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눈치코치 모르는 제자 위소보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스승님도 얼굴이 붉어지니까 참 예쁜 아가씨 같구나. 애석하게도 너무 늙었어. 젊어서는 아주 예쁘고 얌전했겠는데?)
위소보가 말했다.
[내 말은 듣기는 거북하지만 그 도리야 거북하지 않지요. 스승님, 제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눈앞의 손실을 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황제는 신의(信義)를 지키지 않고 당나귀를 부려먹고 잡아먹는 격이랍니다.]
구난사태는 원래 명조의 공주로서 제황(帝皇)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므로 황제들의 성미를 알고 말했다.
[몽골 황제, 소보의 말을 들었지요? 우리는 황제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강희가 냉소하며 말했다.
[믿지 못하면 어쩌겠습니까? 이 몸은 나라의 황제로서 협박해서는 안 되지요.]
구난사태가 말했다.
[홍 교주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홍안통은 수염으로 황태후를 감아 허공으로 던지며 말했다.
[제기랄, 뭘 이것저것 말할 거 있나? 너 죽고 나 죽고 해볼 판이지.]
위소보가 놀라며 소리쳤다. 홍안통의 수염에 크게 혼이 난 그인지라 위력도 잘 알았다.
[홍 교주님, 그래도 좀 사정을 봐줘야....]
강희는 홍 교주라는 말이 들리자 안색이 변했다. 태후가 한 가닥 낙엽처럼 날리는 것을 보자 매우 당황했다.
[홍 교주, 아무 짓이나 하지 말아!]
황태후가 공중에서 떨어질 때 홍안통은 수염으로 태후를 살짝감고 물었다.
[어쩌겠는가 말해 보시오.]
강희가 탄식하며 말했다.
[좋소. 당신들이 이겼소!]
그리고 어전시위와 어림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사람들을 놓아주어라!]
구난사태가 미소를 짓고 태후를 가리켰다.
[좋아요. 그런데 황제의 어머니는 우리를 따라 한 번 갔다 와야겠어요!]
강희가 물었다.
[어디로 같이 간단 말입니까?]
구난사태가 말했다.
[황궁 어귀까지요. 우리가 성문을 나가면 사람을 보내어 맞아 가시오.]
강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응낙했다.
[말한 대로 해야 합니다.]
위소보는 확실한 다짐을 받기 위해 한 마디 내뱉었다.
[군자일언....]
우아대가 구난사태에게 말했다.
[사태,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 우리는 어서 이곳을 떠납시다.]
이 일행은 북경성을 나왔다. 성 밖에서는 이미 마차와 말이 다 준비되어 있어 여러 사람은 밤을 도와 관외(關外)를 향해 질주했다. 위소보는 원래 감옥만 떠나면 새가 자기 둥지에 온 것처럼 아주 자유스러울 줄 알았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달랐다. 홍안통, 황룡대협, 관의호, 정극상, 현정도장, 청아, 서화룡.... 이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독특한 혈도를 짚는 수법으로 위소보의 수태음폐경(手太阴肺经) 족태음비경(足太阴脾经) 수소음심경(手小陰心經) 임맥(任脈) 독맥(督脈)을 짚어 놓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위소보는 꼼작 못하고 마차 안에 갇혀 있었는데 전신이 마비되어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반주검이 되었다. 참을래야 참을 수 없어 위소보는 고함을 쳤다.
[스승님, 저를 좀 살려 주십시오. 이 위소보가 죽습니다. 죽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구난사태는 제자의 고통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이 어려워 도와줄 수도 없었다. 단지 온화한 말로 권할 수밖에 없었다.
[소보, 좀 참게나. 며칠 지나면 나을 것이네.]
위소보는 울상이 되어 말했다.
[참지 못하겠어요. 조금도 참지 못하겠어요.]
구난사태는 너무도 불쌍하여 말했다.
[단전의 진기(眞氣)를 천천히 사백(四白) 곡지(曲池)에 보내려무나....]
홍안통이 돌연 이것을 보고 '허허!' 하고 냉소했다. 우아대가 의아해서 물었다.
[왜 웃습니까?]
홍안통이 말했다.
[이 어르신이 웃는 까닭이 있소. 내놓고 돕지 못하겠으니 암암리에 도와주니 참 가소롭단 말이오.]
황룡대협은 인피면구를 써서 그의 기색은 볼 수 없었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무엇이 가소롭단 말이오?]
홍안통이 답했다.
[글쎄, 이 녀석이 내력이란 전혀 없는데 어찌 운기를 하겠소? 사태께서 그에게 내력을 펼쳐 보라 하지만 소귀에 경 읽기지!]
우아대가 대노하여 외쳤다.
[너 무엇이 좋다고....]
구난사태가 살며시 말했다.
[홍 교주님, 실례했소이다.]
위소보는 그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스승님, 이 제자가 죽는데 실례가 다 뭣입니까?]
구난사태는 엄하게 꾸짖었다.
[소보, 자네가 살려면 떳떳하게 살아야 하고 못살겠다면 이 스승이 일장으로 죽여 버리겠네. 우리 철검문(鐵劍門)의 명예에 손상을 주지 말아야지.]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위소보는 구난사태가 왈칵 성을 내자 감히 대꾸질 못하고 혼자 말같이 투덜거렸다.
[철검문이고 목검문(木劍門)이고 다 뭔가? 이 제자는 그 개 같은 철검문에서 뛰쳐나오고 말겠습니다.]
소전은 그가 점점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소보, 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위소보가 말했다.
[어르신이 이렇게 말하면 어때. 내가 모를 줄 아는가? 너와 아가 화냥년은 이 어르신이 빨리 죽기를 바라지?]
소전이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그건 무슨 뜻인가요?]
위소보가 말했다.
[딴뜻이 없어. 네 두 화냥년은 원 남편이 다 살아오니 지금 이 남편에게 푸른 모자를 씌우자는 거지!]
아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왜 나까지 끄집어 넣어요? 자기들끼리 말할 거지.]
위소보가 이상해 하며 말했다.
[내가 너를 끄집어 말한 것이 무엇인가? 이 어르신이 말한 것은 너희들 두 화냥년이 간사한 남편과 결탁하여 이 어르신의 혈도를 눌러서 죽이자는 것이란 말이야. 그래 이것이 네년들과 관계없단 말인가?]
아가가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크게 억울한 듯 자신의 얼굴까지 쥐어뜯었다. 소전이 소리쳤다.
[아가, 울 건 뭐냐?]
아가가 금속성의 목소리를 발했다.
[함부로 사람을 모함하니 어찌 견뎌요!]
소전이 온화한 기색으로 위소보를 타일렀다.
[소보, 잘 말해 봐요. 나와 아가가 잘못한 일을 한 것이 무엇인가요?]
위소보가 빈정거렸다.
[잘못한 것 없어. 이 어르신께 푸른 모자를 씌운 것 뿐이지. 그것도 물론 큰 일은 아니야!]
소전은 너무도 분해 이를 악물고 위소보의 뺨을 번개같이 후려쳤다. 위소보는 놀라 고함쳤다.
[더러운 계집년, 죽일년, 화냥년, 그래, 남편을 죽일 작정이란 말이냐?]
소전이 냉소하며 말했다.
[죽이면 죽였지 차라리 억울한 말을 듣지 않게 해야지. 홍안통, 정극상, 이리로 와요!]
미인이 노하니 위풍도 있었다. 희로애락이 분명치 않은 홍안통, 악독하고 음침한 정극상도 그만 무서워 다가왔다. 소전이 정극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극상, 그대는 원래 아가를 사랑한 적이 있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정극상은 말뚝처럼 서서 말 못했다. 소전이 또 홍안통을 보고 말했다.
[홍안통, 내가 당신의 처가 옳소, 아니오?]
홍안통은 어물어물하며 말했다.
[소전, 내....]
아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소전 언니, 언니 말이 아주 듣기 거북해요.]
소전이 앙칼지게 말했다.
[거북할 거 있나? 남자들은 처를 서넛씩 가져도 죄가 없는데 왜 여자들이 마음에 있는 남자가 있었거나 시집가면 이처럼 큰 죄로 된단 말인가?]
소전은 안색이 파랗게 되어 눈물을 흘렸다.
[정극상, 홍안통, 만약에 당신들이 사람이라면 소보를 주먹으로 죽여 버려요. 우리 둘은 당신들을 따라 당신들의 부인으로 가겠어요!]
쌍아가 놀라 말했다.
[소전 언니, 아가, 욕하면 욕하지 어찌 이런 농담을 하오?]
소전이 분기탱천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이 살아서 이런 신세로 전락하고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겠소? 아가, 우리는 갑시다.]
그녀는 두 아들을 끌고 성난 김에 떠났다. 겨우 몇 발짝 걸어갔는데 돌연 청아가 몸을 날려 그들 앞에 막아섰다. 그리고 살그머니 웃었다.
[두 분 언니, 이런 연극은 그만하면 됐어요!]
아가가 눈을 크게 떴다.
[청아 아가씨, 무슨 연극 말이오?]
[호호호.... 두 분이 남몰래 보물을 취하려 떠나려는 것을 다 알고 있어요.]
[뭐라고?.... 보물을 찾으러 떠난다고? 기가 막히는군요. 정 의심을 한다면 보물을 찾은 후에 떠나도 좋아요. 하지만 소보와는 절대로 살지 않을 거예요.]
소전은 태연하게 아가의 손을 쥐고 위소보에게 되돌아왔다.
[소보, 이 연극이 이만하면 어때요? 채 끝나기도 전에 청아의 거짓 갈채를 받았군요!]
위소보는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소전은 꼭 된다고 했지. 그대들은 모를 게요. 청아 아가씨는 양주 여춘원에서 사랑 때문에 질투한 일들이 많다오. 그런데 어찌 속일 수 있겠소?]
아가가 들올수록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나는 들을수록 어리둥절해요. 여 무슨 원인지 청아 아가씨가 어찌 그 곳에 갔었나요?]
소전이 코웃음을 쳤다.
[소보의 헛소리를 믿어요?]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저 고모가 우리를 가지 못하게 하니 너는 어서 아버지 있는 데로 가거라.]
이것은 한 차례 머리를 짜내 꾸며낸 계책이었다. 위소보는 원래 소전, 아가 그리고 두 아들을 데리고 이 위험한 곳을 떠나 밖의 구원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요 괴상한 청아가 그만 눈치를 차렸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할 뿐 별수가 없었다. 홍안통 일행들도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위소보에 대한 감시가 더 엄밀했다. 그들도 저마다 딴 생각을 하고 서로 의심하다 보니 누구도 위소보와 접촉 못하게 했다. 이렇게 가다가 객잔에 들리게 되었는데 위소보를 단독으로 다른 방에 들게 했다. 이렇듯 다른 방에 들게 했건만 서로 시름을 놓지 못하고 그와 접촉할까 봐 밖에서 윤번으로 지키게 했다. 위소보는 욕했다.
[제기랄, 어르신이 무슨 놈의 보배라고 부인들까지 시중들지 못하는지? 네놈들은 이 어르신께서 계집년이 없으면 자지도 못하는 성미를 모른단 말이냐?]
이날 밤 위소보는 성이 나서 혼자 외롭게 이불 속에 파묻혀 잤다. 그가 흐리멍덩하게 잠이 들려는데 돌연 침대 앞에 얼굴을 가린 여자가 나타났다. 위소보는 놀라 소리쳤다.
[누구냐?]
그 여자는 위소보의 입을 막으며 밖을 가리켰다. 위소보는 그녀의 냄새를 맡고 기뻤다.
[문아 여동생!]
그 여자는 소리를 죽여 가며 말했다.
[비구니 심무(心無)입니다. 스승 오라버니를 뵈옵고저 합니다!]
위소보는 맥이 탁 풀렸다.
[문아 여동생, 정말 비구니로 되었소? 아니, 농담이겠지!]
심무 즉 문아가 말했다.
[스승 오라버니, 이런 말을 하면 아미타불, 죄이오다. 죄이오다.]
위소보는 몹시 반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요 문아 년이 스승님 꾀임에 들어 며칠 가 있더니 말끝마다 아미타불이고 뭐고 하니, 제기랄, 미치지 않았나?)
위소보는 전처럼 다정스럽게 불러 보았다.
[문아 여동생....]
문아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문아는 이미 죽었어요. 빈니는 심무예요.]
위소보도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래. 심무면 심무지. 무슨 다른 점이 있소. 결국 말해서 여동생은 나의 마음 가운데 있으니 어떻게 불러도 나의 친한 여동생이지.]
위소보의 말은 입에 발린 소리 같지만 이 '친한 여동생'이라는 말만은 아주 경건했다. 심무는 얼굴에 면사를 썼기에 그녀의 기색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소리는 아주 쌀쌀했다.
[사형(師兄), 만약 그렇게 말하면 심무는 가겠소이다.]
위소보는 급히 말했다.
[아니, 아니, 지금부터 다시는 문아 여동생이라고 부르기 않겠소. '친한 여동생'이라고는 더욱 부르지 않고 심무 여동생이라고 부르고 친한 심무 여동생이라고....]
심무는 위소보의 말이 너무도 우스워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사형은 말할 때 친.... 자를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무슨 '친'이 그렇게도 많은가요?]
위소보는 그제야 시름을 놓고 물었다.
[여동생, 어떻게 왔소? 여기는 아주 위험하오. 어서 돌아가시오!]
심무는 대답이 없이 마음 가운데 아주 감동을 받고 생각했다.
(사형은 말은 반지르르하지만 그래도 나를 많이 생각해 주는구나.)
'생각해 준다'는 말을 생각하자 어쩐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면사로 가려 위소보는 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버릇처럼 또 자기 뺨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요놈, 친한 심무 여동생을 만나니 너무 기뻐했구나. 심무 여동생, 내상은 다 치료했소?]
심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승님께 많은 폐를 끼쳤어요.]
이렇게 말한 심무는 위소보의 손목을 쥐고 맥을 한참 짚어 보았다.
[사형은 일곱 사람들에게 혈도를 짚혔는데, 다 풀자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위소보는 다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욕을 퍼부었다.
[어렵다구? 제기랄, 이 어르신 보고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말하기를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혈도를 눌러 놔서 다른 사람이 열어 주기 어렵다고 했소!]
심무는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저마다 다르게 혈도를 눌렀다는 것은 옳아요. 그러나 열 수 없는 것은 아니지요. 혈도를 열자면 내력이 있어야 하지요. 구난사태, 그리고 의동생 우아대가 열자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아요!]
위소보가 급히 물었다.
[심무 여동섕, 가만! 이제 방금 누가 나의 혈도를 풀어 줄 수 있다고 했소?]
심무가 말했다.
[스승님과 우아대 말이에요. 그 두 분의 내력이면 아주 쉬울 것 같아요.]
위소보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아주 쉽다, 아주 쉽다. 스승님과 우아대면 된다고?]
[사형,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위소보는 대충 얼버무렸다.
[오, 아무것도 아니오.]
심무가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시간이 가는데 지체하면 사람들에게 발각되겠어요. 사형, 내가 혈도를 열어 드리지요!]
위소보는 놀랄 지경으로 기뻐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동생도....]
돌연 위소보는 심무의 무공은 우아대나 구난사태와 비슷하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그녀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가운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알고 왔소?]
심무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며 말문을 떼었다.
[나는 줄곧 남모르게 뒤를 따랐지요. 그러나 그들의 무공이 고강하고 경계가 심해 조금도 틈이 없어 오늘 여기에 와서 이 방에 숨어 있었지요. 마침 운수가 좋아서 이렇게 만난 거예요.]
위소보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감동되었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이 위소보는 복이 많고 명이 길어 언제나 위험할 때면 관세음마님께서 그의 옥녀(玉女)를 보내 구해 준단 말이오.]
심무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먼저 임맥 혈도를 열어 주지요.]
두 시간 남짓하여 위소보의 임맥이 열렸다. 심무는 피로하여 이마에 구슬땀이 흘렀다. 심무는 한참 동안 운기조식을 한 후에 말했다.
[사형, 아직도 일곱 곳의 혈도를 열지 못했어요. 매일 오후 어느 객잔 간판에 붉은 단풍나무 잎사귀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집에 머무세요. 객잔에 들어가 어느 방에 자리 잡으면 그 잎사귀를 창문에 붙여 놓으세요. 그러면 내가 그 곳으로 찾아가겠어요.]
위소보는 마음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근심도 되었다.
[놈들이 모두 심술 사나운데 어르신의 말을 들을까?]
심무는 웃기만 했다. 뺨에 보조개가 패여 더욱 미모가 돋보였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문아 여동생은 비구니로 되었지만 그래도 아주 총명하구나. 이 어르신의 작은 일까지 다 알아주니 정말 마음에 꼭 드는구나.)
그 날부터 위소보는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심무가 사전에 마련해 놓은 객잔으로 갔다. 거기에 가서도 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죽네 사네 하며 생떼를 쓰곤 했다. 그랬지만 여러 사람은 장보도를 얻기 위해 위소보를 더 어쩌지 못했다. 여드레 후 위소보의 혈도는 다 열렸다. 그제서야 허리도 쭉 펼 수가 있었다. 그는 또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며칠 동안 어르신은 죽을 뻔했네!]
심무가 주위를 환기시켰다.
[사형, 혈도가 안 풀린 척하세요.]
위소보는 퉁명스레 물었다.
[그건 왜?]
심무의 얼굴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들에게 발각되면 다시 혈도를 짚이게 돼요. 그러면 이번처럼 풀기 어려워요.]
위소보는 그녀의 사려가 고마웠으나 호기를 부렸다.
[나중에 발각된다고? 제기랄, 그놈들에게 또 나중이 있을까?]
심무가 눈을 크게 떴다.
[사형, 그럼 어쩌자고?]
위소보는 벌떡 일어서서 도망가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 오라버니는 말이야 그놈들과 '안녕' 하면 그만이지. 이 어르신은 널따란 길을 따라 제 갈 길을 가고 그들이야 외나무다리로 가면 되지. 그러면 누가 누구를 건드릴 것도 없어!]
심무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망하려고?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들은 모두 무공고수들이고 지금 경계가 아주 심한데 도망칠 수 있나요?]
위소보는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들의 무공이 드세면 심무의 무공도 약하지 않지?]
심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손에 가져갔다.
[사형, 나와 함께 도망하자고요?]
위소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결의남매를 맺지 않았소!]
심무는 좀 주저하다가 말했다.
[만약 사형이 도망하면 부인과 애들은 어쩌나요?]
위소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의 여동생이여. 왜 그리도 머리를 못쓰오? 내가 가면 장보도가 날아가는 판인데 그들이 부인과 애들을 끌어안고 뭘 하겠소? 이제 10년 20년이면 남자는 장가들고 여자는 시집가는 법이니 그들이 나를 도와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맞아 들여야지. 이러자면 돈이 많이 들어야 하니 이런 밑지는 노릇을 그들이 하겠소?]
심무가 생각해 보니 이치는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이 이치는 있어요. 그런데 지금 부인들과 애들이 그들의 수중에 있지 않아요? 그들 생각이 나지 않아요?]
위소보는 탄식하며 말했다.
[왜 섕각이 나지 않겠소. 하룻밤 부부는 백날 은인이라고 이 어르신의 그 더러운 부인들은 비록 이런저런 흠집이 있지만 그래도 이 어르신을 대하는 데는 괜찮소. 정말 그들을 버릴 수 없지.]
좀 쉬었다가 위소보는 또 말했다.
[그러나 제대로 말하자면 친애하는 여동생과 같이 있는 다면 그들이 그리 생각나겠소?]
심무는 벌컥 화를 내며 일어섰다.
[사형, 다시 한 번 경박한 말을 하면 나는 가겠어요.]
위소보는 정색했다. 잠시 생각하다가 지금까지 품고 있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여동생,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요. 나는 동생이 나를 깔본다는 것을 아오. 나는 거리의 유망(市井流氓) 출신이고 아무것도 모르오....]
심무가 그의 말을 막았다.
[사형, 이 여동생이 깔보는 게 아니에요. 영웅은 출신이 낮은 것을 가리지 않으니 거리 유망(流氓)이라는 게 흠이 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오라버니는 부인들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러니 말은 분별이 있어야 하고, 사람은 스스로를 고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해요.]
위소보는 계속 떠들었다.
[나는 부인들이 있소. 그러나 많지는 않소. 일곱밖에 안 되오. 부인가 일곱이 있은 후 늘 재수가 없고 업신여김만 당한단 말이오. 그래서 처 여덟을 하려고 마음먹었소. 팔선녀가 바다를 건넌다고 그래야 복도 있고 만사대길이란 말이오.]
심무는 참지 못해 키드득' 하고 웃었다.
[사형, 정말 우스갯소리를 잘하는군요!]
위소보는 얼굴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우스개 소리가 아니고 진심의 말이오. 천지신령이 다 계시는데 이 제자 위소보는 부인을 여덟으로 하지 않으면 이 몸이 갈기갈기 찢어 죽어도 괴롭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겠소이다.]
심무는 한참 잠잠했다가 나직이 물었다.
[사형, 몇 개의 마음이 있나요?]
위소보는 얼른 대답했다.
[한 사람이 한 가지 마음이지!]
심무는 실내를 거닐며 천천히 말했다.
[그렇지요. 하나밖에 없는 마음을 여덟 여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어요.]
위소보가 다급히 말했다. 그녀의 심중을 직시했다.
[아니, 줄 수 있소, 줄 수 있어! 나는 그들에게 대해서는 일반적인 정으로 일반적인 사랑, 일반적인....]
심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형은 잘 몰라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마음뿐이고, 또 그 마음은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어요.]
위소보는 좀 생각나는 바가 있었든지 심무의 말을 입 속으로 반복했다.
[한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마음뿐이고, 그 마음은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다?....]
돌연 그는 무엇인가 깨달은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일곱 부인을 만나면 남녀지간의 일만 생각나고 문아를 만나면 조그마한 잡념도 나지 않을까? 무엇 때문에 일곱 부인을 생각하면 그들의 아름다운 용모만 생각하고 문아를 생각하면 하늘의 신선처럼 생각될까?)
위소보는 백승도왕(百勝刀王) 호일지가 생각났다. 호일지는 마음 가운데 사랑하는 여자 진원원에게 접근하기 위해 일대대협(一代大俠)의 신분이었지만 달갑게 채소를 가꾸는 농부로 되었으며 또 진원원에게 앵금을 켜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도 호일지의 '네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그를 기뻐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절대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체험해 보려 했다. 위소보는 어릴 때부터 기생원에서 자라며 보고들은 것이라면 남녀 육체 접촉에서의 정감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지간의 육욕보다 더 높은 정감을 느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아 여동생, 나는 알았소. 오늘부터 내 이 마음을 그대에게 주겠소. 나는 밤낮 그대를 생각하고 그리오.... 그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꼭 하고 그 어떤 시달림도 견뎌 내겠소.... 나는 나의 일곱 부인에 대해 관계가 좋소. 앞으로도 좋을 것이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일이고, 여동생에 대해서는 마음 가운데 또 다른 일이라오....]
여자 앞에서 위소보는 낯이 두껍고 말이 줄줄 흘러나왔으나 오늘은 웬일인지 꺽꺽거리며 잘 되지 않았다. 위소보는 스스로를 욕했다.
[제기랄, 네놈이 평시에 요리조리 잘 주워대던 입이 오늘은 웬일이냐?]
심무가 몸을 떨었다. 그녀는 합장을 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사형이 이렇게 말하면 죄이오다. 죄이오다.]
위소보는 참지 못해 심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동생, 비구닌지 뭔지 그만두고 민간에 다시 돌아오오. 우리는 가만히 보물을 파내어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가 둘이서 한 평생 잘 살아가면 어떻소? 말해 보오!]
돌연 심무의 완맥으로부터 강력한 내력이 전도되어 왔다. 위소보는 손이 떨리며 심무의 손을 잡았던 것을 놓았다. 심무가 처연하게 말했다.
[심무, 심무, 저는 심무예요. 마음도 없어요. 이 몸은 이미 불문으로 들어간 몸이니 어찌 다시 이 세상으로 오겠어요!]
위소보는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았다. 한참 있다가 위소보는 일어서서 최대의 결심을 내린 것처럼 어전시위 장강년이 보내 준 주사위를 꺼내며 말했다.
[문....심무 여동생, 이렇게 합시다. 우리 이 주사위로 내기하여 하늘이 시키는 대로 합시다. 지존보가 나오면 심무가 나를 따라오고 별십(別什)이 나오면 내가 심무를 따라가겠소.]
심무가 물었다.
[사형이 나를 따라가 뭘 하겠어요?]
위소보가 말했다.
[우리는 남매이니 복이 있으면 다 같이 받고 재난이 있으면 다 같이 겪고 여동생이 비구니가 되고 내가 중노릇을 하면 되지!]
심무가 차갑게 대꾸했다.
[오라버니, 우스개 말을 더 하지 않는 것이 어때요?]
위소보가 말했다.
[오늘 내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요. 자고로 잊어 본 적이 없는 진심이오.]
이렇게 말하며 주사위를 높이 높이 던졌다. 비록 주사위 속에 연은 넣었지만 딴 수작은 쓰지 않았다. 주사위는 뒹굴뒹굴 돌다가 마치 싫어하는 듯이 별십이 나왔다. 위소보는 실망하는 대신 기뻐하며 말했다.
[야아, 이 어르신은 무뢰한 시러배 잡놈질을 해봤고 큰 벼슬, 장군질도 해봤지. 이제는 또 중 나으리질도 해야겠구나. 거 참!]
심무는 이 사형이 헛소리만 하는 줄 알고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했다.
(사형이 그들을 따라가면 확실히 호랑이의 굴로 들어가는 것과 같지. 어쨌든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지.)
그녀는 이렇게 섕각하고 말했다.
[사형, 내가 먼저 염탐해 보겠어요.]
심무는 살그머니 도괘금구(倒掛金鉤)로 두 다리를 대들보에 걸었다. 이 여관 창문은 아주 높았다. 심무는 침으로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바깥 동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살짝 내려오며 말했다.
[뒤에는 의동생 우아대가 지키고 있어요.]
위소보는 몹시 기뻤다.
[그럼 잘 됐소. 셋째 동생이 그래 우리를 놓아주지 않겠소?]
그러나 또 생각해 보니 우아대가 그리 미덥지 않아 위소보가 소리쳤다.
[제기랄, 정극상 놈은 청아가 싫다고 하는데 그녀와 실랑이를 벌일 건 뭐람? 청아는 지금 의동생과 눈이 맞아 좋아하는데 그놈이 끼어들어 뭘해?]
심무가 놀라며 낮게 말했다.
[사형, 무슨 말씀을....]
위소보는 오히려 손을 내저으며 높이 말했다.
[청아 아가씨는 정말 말이 아니오. 그는 나의 제수씨가 되겠다고 손이야 발이야 맹세까지 했는데 정극상 그놈과 더 이상 쑥덕거리지는 말아야지. 우아대가 푸른 모자를 쓰면 이 형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소?]
심무는 위소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행낭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꺼냈다.
[사형, 이것 좀 봐요. 이 방법도 괜찮지 않아요?]
위소보가 본 즉 원래 자기 물건들이었다. 비수, 암기, 관의호가 갖고 다니던 백독을 막을 수 있는 장갑, 몽환약, 돈뭉치였다. 심지어 주사위까지 있었다. 이 물건들은 강희 서재에서 다륭이 수색해 간 것인데 어떻게 되어 심무의 손에까지 왔는가? 심무가 말했다.
[사형을 구하러 황궁에 갔었어요. 이 물건들이 사형과 한시라도 떠날 수 없는 물건인 줄 알고 닥치는 대로 집어 왔어요.]
황궁은 경계가 심하여 그리 쉽게 갖고 올 수는 없었다. 문아의 재간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위소보는 그녀에게 더욱 깊은 정감을 느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여동생, 앞으로는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마시오.]
심무는 위소보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럼 우리 갑시다.]
위소보는 심무의 내력에 힘입어 창문을 뚫고 제비처럼 날아갔다. 심무의 경공은 출중하고 위소보의 신행백변도 어느 정도 쓸모가 있어 두 사람은 이 위험한 곳을 떠나 밤낮 쉴 새 없이 보름이나 걸려 겨우 녹정산에 도착했다. 녹정산은 관외(關外) 만주 제일 북쪽에 있었고 기복을 이룬 몇 백리 뻗은 산들은 구름 속에 우뚝 솟아 비할 바 없이 험준하였다. 위소보는 입을 딱 벌렸다.
[히야! 지도에 '후니마디산'은 깨알만 하고 시니바디강'은 실오리 같은데 보기에는 가까운데 와 보니 멀고 이처럼 크단 말인가!]
위소보는 원래 녹정산의 보물은 자그마한 땅굴 속에 묻은 줄로 여기고 이 큰 산중에서 돌아다니며 찾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제기랄, 골짜기만 세는 데도 십 년은 걸리겠네.]
위소보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녹정산의 보물이고 지랄이고 더 찾을 마음이 섕기지 않았다. 평소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고 골치 아픈 일이라면 도망갈 구멍부터 살피는 그인지라 목전의 상황을 접하자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형,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찾아봐요. 샅샅이 뒤지면 뭔가 단서를 발견할 거예요.]
[에구구.... 그보다 사매하고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봐야겠소. 죽자 사자 보름을 달려왔더니만 사지육신이 안 쑤시는 곳이 없소. 사랑하는, 아니 친애하는 심무 여동생의 부드러운 안마를 받아야 걸을 것 같소.]
이 말에 심무의 얼굴이 일순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가 다시 차갑게 굳어졌다.
[또 한 번 그런 말로 이 동생을 놀리신다면 당장 되돌아가겠어요. 그리고 영원히 사형 앞에 나타나지 않겠어요!]
위소보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외쳤다.
[심무 여동생, 이 사형의 말은 한 글자도 틀림없는 사실이오. 자, 보시오. 이렇게 발이 부르터서 더는 걸을 수 없다오.]
그는 신발을 벗어 냄새나는 발가락을 심무의 코앞에 들어 보였다. 심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살피니 그의 왼쪽 새끼발가락에 좁쌀보다 약간 큰 물집이 하니 있을 뿐이었다.
[흥, 고작 티끌만 한 물집 가지고 엄살을 부리나요? 무릇 사내대장부라면 발가락이 하나 잘라져도 아무 내색하지 않고 걸을 거예요.]
[아.... 아니오. 이 물집으로 말하자면.... 에, 과거 양주 여춘원에 있을 때, 발에 생긴 물집을 잘못 터뜨렸다가 파상풍 독이 올라 다리를 자른 사람을 봤소. 이충(李忠)이란 자였는데 그 후 며칠 못가서 죽었다오. 헌데, 그 자식이 하도 가난해서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서 내가 은화 다섯 냥을 내놨다오. 이충의 형이란 작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동생을 대신해 갚을 능력도 마음도 없으니 훗날 저승에 찾아가서 이자까지 받으라고 했소. 난 그냥 승낙하고 돌아왔는데 집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그 형이라는 작자가 못내 괘씸해 견딜 수가 없더군. 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쫓아가서 얘기했지. '오늘 중으로 자네가 저승에 있는 동생을 찾아가서, 자네도 몹시 빈한한 듯하여 내가 자네 몫으로 은자 만냥을 꿔 줄 테니 훗날 동생이 갚게나 하고 물어 보게'라고 했더니 그 멍청한 자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날 밤 자결을 했소. 가족들에 말에 따르면 잠시 동생을 면회가는 것이니 염라대왕도 편리를 봐 줄 것이라 하면서 목매어 자살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소이다.]
[듣기 싫어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심무는 어이가 없는지 다소 풀어진 어조로 말했다.
[문아, 아니 심무 여동생! 이 사형은 비록 부처님을 믿지 않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오. 도박의 신인 오로재신(五路財神)께서는 거짓말이라면 극히 싫어하는 분이오. 내가 거짓말만 찰찰 하고 다녔다면 어찌 지존보가 밤낮 나와서 수십만 냥의 은자를 땄겠소? 다 신령님들의 보살핌이 계셨기 때문이오.]
위소보는 너스레를 떨면서 신발을 다시 신었다. 그리고는 큰 대자로 쭉 뻗으며 중얼거렸다.
[아! 만청의 지맥(地脈)도 수려하다. 흥안령(興安嶺)을 베고 누워 청풍(淸風)과 미녀의 향기를 음미하니 이곳이 봉래(蓬萊)인가 곤륜(崑崙)인가....]
심무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여기서 주무실 건가요?]
[동생이 원한다면 인가를 찾아 깨끗한 정실에 몸을 눕힐 수도 있지.]
[좋아요. 정 피곤하시다면 인가를 찾아서 오늘 하루는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보물을 찾아봐요.]
[그게 정말이오?]
위소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날은 이미 중천을 훨씬 지나 해가 서편으로 절반쯤 드러누운 형상이었다. 이곳 북쪽 지방은 해가 짧아 금방 어둠이 오고 한 번 찾은 어둠은 쉽게 사라질 줄 몰랐다. 심무는 산속에서 야숙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익히 아는 터라 발걸음을 앞세워 길을 열었다. 그들이 두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 어느 협곡에 들어서자 쏴아 하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이, 삼 마장 나아가자 제법 큰 물줄기가 보였다. 두 사람은 골짜기 물을 따라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한 채의 통나무집이 보였다.
[사형, 집이 있어요! 헌데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군요.]
심무가 날렵한 경신재간을 일으켜 초막을 향해 쏘아졌다. 초막은 지은 지 오래된 듯 풍우에 썩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했는데 흐르는 계곡물 옆에 서 있었다.
(제기랄, 귀신이라도 나올 집 같군! 만청 오랑캐의 귀신이라면 이 어르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텐데....)
위소보가 중얼거리는 사이 심무가 겨우 붙어 있는 나무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 먼저 귀신 쫓는 경문부터 외우시오. 내가 아는 신령님들은 오랑캐 귀신하고는 얘기가 안 통하니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초막 안으로부터 '악!' 하고 심무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비명소리에 놀란 위소보도 '으악!' 하고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에구구! 오랑캐 놈들의 지독한 귀신이 숨어 있는 모양이구나. 문아 여동생의 무공으로 봐서 놀라게 할 무공고수가 숨어 있지는 않을 테고, 보나마나 흥안령에 사는 무서운 산도깨비거나 추위에 얼어죽은 오랑캐 귀신이 분명하다.)
이같은 생각에 위소보는 도망갈 길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문아는 죽어서라도 서방 극락세계에 태어날 것이리라는 자위를 하며 자신의 비겁함을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초막 안에서 심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형, 여기는 사냥꾼의 초막이에요. 호두(虎頭), 녹두(鹿頭), 웅두(熊頭) 등 짐승의 뼈다귀가 가득해요.]
[뭐라고? 난 그것도 모르고 동생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놈들과 사생결단을 하려던 참이었다오.]
위소보는 큰소리로 자신의 충심을 내보인 후 초막 안으로 몸을 날렸다. 과연 초막 안에는 짐승 뼈다귀가 즐비하게 쌓여 있었는바 두개골은 껍질을 벗긴 채 벽에 걸려 있었다. 심무가 우측에 있는 조그만 나무문에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이 방이 침실인 모양이에요. 다소 지저분하지만 하룻밤 지내기에는 적당하군요.]
[집주인이 아주 게으른 놈이군! 이 어르신께서 오실 줄 알면 깨끗이 방을 치우고 불을 지펴야지.]
위소보가 발을 한 번 내지르자 바닥에 쌓여 있던 잡뼈들이 와스스 부서졌다. 그는 다시 홧김에 소리쳤다.
[나쁜 놈들, 가죽은 그렇다 치고 고기 몇 점이라도 남겨 놔야 들르는 사람이 먹고 갈 게 아닌가? 눈이 쌓여 있을 대 왔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군!]
[건량을 가져왔잖아요. 그나마 비를 피할 수 있고 맹수를 막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동생은 부처님을 믿으니 어느 놈이든 다 이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오라버니는 다르다오. 내가 이곳의 주인이라면 쌀과 고기부터 가득 쟁여 놓고 오가는 사람을 실컷 포식시키겠소. 또 따뜻한 옷도 수십 벌 준비해 몸에 맞는 것을 골라 입게 하겠소. 이런 경우 어떤 행동이 부처님의 마음이오?]
이 같은 억지에 심무는 할 말을 잊고 '그건, 그건....' 하고 뒷말을 잊지 못했다. 그때 지독한 사투리가 섞인 음성이 초막 밖에서 전해 왔다.
[크흐흐.... 어딜 와서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가? 헤헤혜, 산군(山君)께서 잡아가면 큰상이 있다.]
음성은 만어(滿語)가 섞여 있어 머리를 두어 번 굴려야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위소보는 박장대소하며 응수했다.
[하핫핫! 낮말은 개미가 듣고 밤말은 모기가 듣는다고, 밖에 있는 개미 양반 어서 오시오! 글쎄, 이 초막 주인 오랑캐가 높디높은 이 어르신의 왕림도 모르고 집안에 고린내만 남겨 놓았구려. 우리 그놈을 잡아 함께 혼을 내줍시다.]
[크큭, 어젯밤 지렁이가 그곳을 무는 꿈을 꿨는데.... 과연 물렸군!]
어조가 시원찮은 목소리가 재차 들리더니 와하하 하고 몇몇 사람의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심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재빨리 목소리를 죽여 소근댔다.
[사형, 벗이 아니라 적이에요. 말조심하지 않으면 큰 변을 당할 거예요.]
[동생, 걱정 마시오. 내 비록 무공이 약하다 하더라도 이 흥안령에 사는 짐승 도적놈은 혼내 줄 수 있다오.]
위소보의 장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의 사투리가 들려 왔다.
[크크크, 흥안령이라니?.... 그러고 보니 중원에서 온 놈이구나. 흐흐흐, 감히 금아림(金阿林)의 성스러운 곳을 침범하다니.]
[금아림?]
[크크크.... 아림(阿林)은 만주어로 산이라는 뜻이다. 금아림을 가리켜 동금산(東金山)이라고도 부르지.]
갑자기 초막문이 쾅!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문밖에는 팔척 거구의 가죽옷을 입은 거한이 세 명의 사냥꾼을 대동한 채 서 있었다. 거한 역시 활과 전통을 메고 있었는데 장비가 환생한 듯 우락부락한 체구에 무성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크크크.... 녹정산을 지키는 산군(山君) 휘하의 호력사(虎力士) 니얼츠(尼爾子)이다.]
[산군?]
위소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녹정산을 지키는 산군이란 자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듣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녹정산이란 곳이 아주 은밀한 곳으로 사람은 커녕 너구리 한 마리 얼씬못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던 바, 산군의 존재는 크게 충격적이었다.
(흐윽! 어쩌면 그 산군인지 산적인지 하는 자가 벌써 녹정산 보물을 파내서 날름 집어 삼켰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어르신이 십 년 동안 고심했던 게 털빠진 호랑이 가죽 꼴이 됐구나!)
그가 맥이 탁 풀려 꼬리털 빠진 장닭처럼 낭패해 할 때 호력사 니얼츠가 전통에서 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꼼짝 말고 두 손을 내밀어라. 나 호력사의 화살은 호랑이 여덟 마리의 숨통을 끊은 신전(神箭)이다!]
[아니? 여덟 마리나? 혹시 거짓말을 약간 보탠 게 아니오?]
위소보의 너스레에 호력사 니얼츠의 안색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는 화가 몹시 치민 듯 뒤따르는 세 사내에게 만어로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세 놈은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 밧줄까지 꺼내 들었다. 문아가 앞으로 나섰다.
[시주님들, 잠시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이 분은 저희 사형이신데 평소 우스개 소리를 자주 합니다. 언사에 오해가 있었다면 빈니가 대신 사죄할 테니.]
그녀의 말을 가로채듯 니얼츠가 하늘을 향해 하하하! 하고 방성대소를 터뜨렸다.
[산군께서 명하시길 중원 사람이 녹정산에 발을 딛으면 그 즉시 주살하라 명하셨다!]
그러자 뒤에 있던 세 사내도 이구동성으로 뒤따라 외쳤다.
[산군께서 명하시기를 중원 계집이 녹정산에 말을 딛으면 먼저 잡는 자가 이레 동안 데리고 잘 수 있다고 하셨다! 여럿이 함께 잡으면 사람마다 이레씩 교대로 데리고 자고 목을 베라 하셨다!]
세 사내의 눈가에 갑자기 음탕한 기운이 감돌았다. 승복을 걸쳤지만 문아의 자색은 선녀가 현신한 듯 아름다웠다. 위소보는 기가 막혀 속으로 꺽꺽할 뿐이었다.
(우라질 새끼들, 문아를 어쩐다고?.... 이 어르신도 문아 여동생의 속살 냄새를 못 맡았는데 감히 이레씩이나 끼고 잔다고.... 씹어 먹다가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개자식들!)
그가 마구 욕을 퍼부을 때, 문아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당장이라도 푸른 피를 토할 듯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니얼츠가 음충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크크크, 말을 고분고분 들으면 살 수도 있다. 산군께서 말씀하시기를 팔기(八旗)의 아이를 잉태하거나 노비로 평생 살기를 원하는 자는 용서한다 하셨다.]
[닥쳐라! 내 아무리 불문의 제자라 할지라도 너희들의 방자한 입까지 용서할 줄 아느냐?]
심무가 살기등등하게 외치며 쌍장을 곧추세웠다. 위소보는 홀연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어 그녀를 막아섰다.
[잠깐! 당신이 말하는 산군이라는 사람도 팔기(八旗) 중의 사람이오?]
[그렇다. 양남기주(穰藍旗主) 부륵호씨(富勒瑚氏)의 후예이신 칠십삼(七十三)이시다.]
(역자 주:팔기군 가문의 이름들은 거의 숫자로 불리웠다. 예를 들어, 구십(九十), 육십일(六十一), 팔십육(八十六) 등 숫자를 이름으로 불렀다. 이 같은 이름은 체제가 완비된 건륭시대까지 이어졌다.)
니얼츠의 말에 위소보는 한시름 놓았다.
(어느 산도깨비인가 걱정했더니 고작 팔기군(八旗軍)의 나부랭이였군! 그렇다면 나 일등녹정공 위작 나으리의 맛 좀 보여줘야지.)
위소보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양남기주 휘하 호력사 니얼츠는 황상의 성지를 받거라!]
[뭐라고?]
니얼츠를 비롯한 놈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 찢어 죽일 새끼들아, 여기 계신 이 어르신으로 말하자면 당금 황상 폐하의 처남이자 일등녹정공 어전대시위이신 위소보 위작 나으리시다! 황상의 성지를 받고 녹정산에 오신 고귀한 분이란 말이다. 냉큼 무릎을 꿇고 삼배(三拜)를 올려 조금 전에 범한 불경을 사죄해라. 조금이라도 소홀히 했을 때는 성지를 거역한 죄로 구족(九族)을 멸하겠다!]
[진....짜 황상의 성지이....십니까?]
니얼츠가 못 믿겠다는 투로 물었다.
[정말 걸레 같은 자식들이군! 이 위작 나으리의 지저분한 욕설을 듣고도 신분을 모르겠느냐? 흥흥....]
[그럼 성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대체 네 놈들이 목이 몇 개냐? 황상께서 녹정공이라는 작위를 내렸을 때는 녹정산을 염두에 두고 하사하신 이름이니라. 이곳 녹정산의 대만청(大滿淸)의 용맥(龍脈)이 있는....]
위소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니얼츠와 세 놈이 에구구! 하는 경악성을 터뜨리며 납죽 땅에 엎드렸다.
[소인들이 눈이 있어도 위작 나으리를 몰라 뵈었으니 얼른 죽여주십시오!]
[흠, 이제야 이 위작 나으리의 신분을 알겠느냐?]
[예예, 황상께서 파견하신 칙사이신 것을 몰라 뵙고....]
[알았다. 내 이번에 황상의 지엄하신 분부를 받고 녹정산에 왔느니라. 지금 산군이란 자가 어디 있느냐?]
위소보는 평상시처럼 위작의 위엄을 뽐냈다. 그는 니얼츠의 말속에서 산군이란 자가 녹정산 보물의 비밀을 알고 있고, 어쩌면 몰래 캐내 뱃속에 삼킨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황제의 성지를 사칭해 산군을 문초할 생각이었다.
[산군께서는 지금 퉁구리(天君) 제단에 오르신 지 두 달이 됐습니다.]
[제단이 어디 있느냐?]
[녹정봉(鹿鼎峰)에 있습니다.]
니얼츠는 겁을 먹었는지 술술 대답했다.
(역자 주:퉁구리는 만주어로 동북 아시아 및 우랄 알타이어족의 창조신 하느님의 이름이다. 어원을 살펴보면, 텡그리 - 퉁구리- 당구르 - 당골 - 단군으로 이어져 한민족의 창조신과 연결된다. 놀랍게도 불가리아 건국 당시의 창조 하느님 이름이 텡그리임을 밝혀 둔다.)
위소보는 내심 무릎을 쳤다. 니얼츠의 말속에서 녹정산의 비밀이 한겹씩 벗겨지는 것을 알았다.
(아하, 녹정산에 녹정봉이 있었구나! 결론적으로 녹정봉에 만청의 용맥이 숨어 있고 이 때문에 퉁구리인가 천군인가 하는 신의 제단을 세웠구나. 그렇다면 녹정산의 보물은 녹정봉 천군 제단 밑에 파묻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위소보는 나는 듯이 기뻐하며 하마터면 '찾았다!'하고 외칠 뻔했다. 문아가 그의 심중을 헤아리고 생긋 미소를 던져 보였다. 위소보는 지닌 바, 기질을 발휘해 니얼츠를 부추겼다.
[흠, 자네 이름이 니얼츠라고 했던가? 어쨌든 이번 성지를 완벽하게 수행하면 자네를 녹정후(鹿鼎侯)에 봉하도록 황상께 진언하겠네. 에, 그리고.... 자네들 셋도 공이 있으니 팔기군 참령(參領)을 삼고 녹정백(鹿鼎伯)의 작위도 주겠네.]
[예엣! 가, 감....사하옵니다.]
네 사내들은 감투를 씌워 준다는 말에 눈이 홱 뒤집혀 머리를 땅바닥에 연신 찧어 댔다. 이리하여 위소보는 니얼츠와 세 사람을 앞세우고 녹정봉을 향해 치달았다. 그 동안 네 사내들은 산군에 대한 갖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녹정산 산군은 팔기군의 가문에서 선출된 자였다. 청나라가 중원천지를 점령하자, 고토(故土)를 중시하고 선조의 맥을 잇는다는 취지 아래 녹정산 녹정봉에 퉁구리 제단을 쌓고 여덟 가문의 선령(先靈)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렸다. 따라서 녹정산 산군은 팔기군 가문의 제사장으로 그 실권이 엄청났다. 하지만 만청이 중원 천지를 지배하고 황권(皇權)이 강화된 후에는 팔기군 잔여 세력에 의해 겨우 명맥이 유지됐다. 쉽게 설명하자면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퇴락한 종갓집의 종손 같은 존재였다.
[그럼, 산군은 어디 사느냐?]
위소보가 달리면서 물었다.
[산군께서는 녹정봉 아래 운도신궁(雲圖神宮)에 기거하십니다. 저희 팔기에서는 매년 용모가 아름다운 동녀(童女) 한 명씩을 뽑아 신궁에 바칩니다. 또한 무예가 출중한 용사 한 명을 선발해 신궁수신(神宮守神)으로 보내지요. 이들은 구년 동안 산군님을 모시다가 각기 가문으로 돌아갑니다. 개중에는 산군님의 총애를 받아 계속 산궁에 머무는 경우도 있습니다.]
니얼츠는 묻지도 않는 말까지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는 녹정후라는 말에 경각심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위소보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했다.
[그렇다면 신궁에 꽤 많은 사람들이 있겠군?]
[수신역사(守神力士)가 백여 명, 신녀(神女)가 팔십여 명 정도 기거합니다. 하지만 삼관(三關)에는 몇 명이 있는지 소인들은 모릅니다.]
[삼관이라니?]
[황상께서 삼관에 대한 말씀이 없으셨나요?]
계속되는 질문에 니얼츠는 약간 의심이 생긴 듯 위소보를 바라보았다. 위소보는 거침없이 대꾸했다.
[황상께서 얼마나 다망하신 분인데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하시겠나? 설마 자네 이름까지 들먹이며 하교(下敎)하셔야 하겠나? 이 위작 나으리에게 녹정산의 중요한 지점을 살피고 어떤 일을 처리하라는 한 말씀만 계셨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자네의 얘기를 뭣 때문에 세이청경하겠으며 녹정후를 삼겠다고 하겠나?]
[아,예예....]
니얼츠는 위소보의 핀잔에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세이경청(洗耳敬聽)을 세이청경이라 틀리게 말한 것도 모르고 고개만 조아렸다. 순식간에 세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 전망이 탁트인 협곡에 이르렀다. 문득 전면에 하늘을 찌를 듯한 암봉(岩峰)이 운무에 감싸여 웅자를 뽐내고 있었다.
[녹정봉입니다. 듣기로는 산정상에 오르면 사슴뿔처럼 여러 갈래의 지맥(枝脈)이 있어 천하 어느 산과도 다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 같은 소인들은 오르지 못합니다. 산군님과 신녀님들만 오를 수 있습니다. 삼관을 설치한 것도 속인의 근접을 막기 위함 때문입니다.]
[삼관은 누가 지키는가?]
[소인들은 신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해서 삼관이 있다는 것만 알지 그 내막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얘기하는 사이에 일행은 녹정봉 아래 깎아지르는 벼랑을 기대고 서 있는 고색창연한 건물 앞에 당도했다. 건물은 십여 채의 고루거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오장 여에 달하는 기단(基壇) 위에 세워져 있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돌층계를 오르자, 삼층 누대로 만들어진 궁문이 보였다. 붉은 편액에 금글씨로 '운도신궁 녹정봉(雲圖神宮 鹿鼎峰)'이라 쓰여 있었다. 문아가 나직이 소근거렸다.
[지금 산군이 없으면 누가 우리를 영접하죠?]
[산군이 없으면 어느 놈이라도 있겠지!]
위소보는 굳게 닫혀 있는 궁문 안을 향해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
[궁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나와 이 어르신을 말을 듣거라! 화냥년도 빠짐없이 나와 무릎을 꿇어라. 황상 폐하의 처남이며 황태후 마마의 사위이신 일등녹정공 위소보 위작 나으리인 이 어르신이 황상의 지엄하신 성지를 받들고 운도신궁에 왔느니라. 누구든 명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단칼에 목을 베서 황실의 기강을 세우겠노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운도신궁의 궁문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네 명의 무장을 한 사내가 부복을 했다.
[삼가 위작 나으리를 뵈옵니다.]
이들의 어투는 만주어가 섞여 있었으나 과거 황궁에서 태감들과 생활한 위소보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이에 그는 약간의 만어를 섞어 쓰며 얘기했다.
[나 일동녹정공 위소보는 폐하의 성지를 받잡고 녹정봉을 살피러 왔다. 지금 산군은 어디 있느냐?]
[예예.... 천군단(天君壇)에 오르셔서 기도를 올린 지 육십오 일이 되었사옵니다. 이번 천제(天祭)는 백 일이 지나야 끝이 나옵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대답할 때, 신궁 안으로부터 십 수 명이 달려나와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반백이 된 도복(道服) 차림의 노인이 절하며 말했다.
[소인은 운도신궁의 원주(院主) 바루타(巴魯打)이옵니다. 칙사님을 뵙게 되어 일생의 영광이옵니다. 누추한 곳이지만 헤아려 주시고 용서해 주소서.]
[흠, 산군이 천제를 지내고 있다?]
위소보는 잠시 망설였다. 곧장 녹정봉으로 오르느냐 아니면 신궁을 살펴본 후 행동을 취할까 생각했다.
(어차피 녹정산은 코앞에 있고, 보물도 이 산중에 있을 테니 한바탕 놀고 갈까? 재수가 좋으면 이놈들이 이 어르신의 호주머니에 몇 푼 채워 줄지도 모르고 그것도 안 된다면 노름이라도 해서 주머니를 채우자.)
자신이 어마어마한 보물을 노리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위소보는 소류망 기질이 발동되었다.
[우선 상방으로 안내하라. 보름이나 걸려 당도했더니 몹시 피곤하구나. 또 시장도 하니 입에 맞는 음식과 술을 준비해 이 위작 나으리를 기쁘게 하도록 해라. 이 어르신이 피로가 풀리고 주효가 입에 맞으면 네 공을 기록부에 적어 황상께 보고하마.]
[황감하신 말씀이옵니다.]
바루타는 좌우를 호령해 길을 열고 위소보를 안내했다. 머뭇거리던 니얼츠가 소리쳤다.
[위작 나으리, 소인들은 어찌할깝쇼?]
위소보는 뒤돌아보며 손짓해 불렀다. 적진에 들어온 이상 한 명의 방수라도 필요했다. 따라서 네 사내들은 녹정봉 꼭대기까지 데려갈 생각이었다.
[너희들은 내 호신위사(護身衛士)가 되어 폐하의 성지가 순조롭게 완수되도록 본 위작을 수행하라!]
[알겠사옵니다.]
네 사내는 평소 만청의 성지인 운도신궁에 발 한짝 들여놓지 못하던 바, 위소보의 명이 떨어지자 크게 기뻐하며 뒤를 따랐다. 이를 본 바루타는 이맛살을 크게 찌푸리며 무어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마 크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칙사가 동행을 허락하는 터라 아무 소리도 꺼내지 않았다. 바루타는 기암괴석을 늘어놓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질러 향나무 숲에 자리 잡은 한 채의 정사(精舍)로 안내했다.
[이곳은 팔기의 도통(都統)께서 머무르는 서홍관(瑞洪館)이옵니다.]
[도통?.... 본 위작이 황상의 성지를 받들고 왔는데 고작 도통이 냄새 피웠던 곳으로 안내한단 말이냐?]
위소보가 욕설을 퍼붓자 바루타는 사색이 되어 손을 비벼 댔다.
[신궁에서 이보다 더 깨끗하고 정결한 장소가 없습니다.]
[산군의 거처는 여기보다 못하단 말이냐?]
[산군께서는 고작 세 칸의 석실만을 쓰고 계시옵니다. 침상도 돌침상이온데.... 그곳이 마음에 드신다면.]
위소보는 깜짝 놀라 정색을 표했다.
[아, 아니다! 본 위작이 황궁에서만 잠을 잔 까닭에 웬만한 시설은 눈에 차지도 않아서 나무란 것이다. 훗날 황상께 말씀드려 운도신궁을 크게 중수(重修)시키도록 하겠다.]
그가 연신 황상의 이름을 들먹거리자 바루타와 니얼츠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연신 허리를 굽혔다. 서홍관은 생각보다 시설이 화려했다. 커다란 대청 좌우로 각기 네 개의 협실이 있었는데, 서재와 욕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자 만청의 전통의상을 걸친 여덟 소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영접했다.
[아니, 이 아이들은 누군가?]
[팔기의 가문에서 보내 온 신녀(神女)들입니다. 올해 뽑혀 온 아이들이죠.]
위소보는 내심 놀랐다.
(제기랄, 이 어르신도 팔선녀를 얻지 못해 봉래산에 못 가는데 여기 있는 산군이라는 놈은 매년 여덟 계집씩 데리고 놀 수 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위작인지 녹정공인지 때려치우고 녹정산 산군 노릇을 해먹는 건데.)
여덟 소녀의 자색을 살피니 피부도 희고 입술도 붉은 예쁜 계집아이였다. 나이는 고작 열다섯 살 정도, 첫눈에 사내의 손길이 가지 않은 깨끗한 소녀들이었다. 그가 입을 헤벌리고 있을 때, 심무가 앞으로 나섰다.
[여기 계신 위작 나으리는 황상 폐하의 지엄하신 명으로 녹정산에 오셨다. 너희 어린아이들은 성지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니 물러들 가거라.]
비구니가 소사미를 나무라듯 그녀의 어조는 매우 단호해 위소보까지 두려움을 느꼈다.
(알고 보니 문아가 여승질을 한다고 입으로 나불대지만 속심은 화냥년 심보가 그대로 남아 있구나! 이 어르신이 요 어린 계집들을 주물러 댈까 두려워 쫓아내자는 수작이구나!)
바루타는 묘령의 여승 심무에 대해 갖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황제의 칙사가 무슨 연유로 비구니를 데리고 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행여 호통이 떨어질까 하는 마음에 그 호기심을 꾹 눌러 밟고 있었다. 그런데 심무가 위소보를 제치고 명을 내리자 더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위작 나으리, 이분 여스님은 어떤 신분이신지?]
[아, 그 스님은 황실의 안녕을 부처님께 기원하는 심무대사님이시오. 삼 년 전 황상께서 황궁 내에 황불사(皇佛寺)를 세우고 주지로 임명하셨다오. 법술과 도술이 높아 귀신을 쫓고 죽이는 데 엄청난 신통력이 있지요. 이번 만청의 용맥을 범하는 요괴(妖'怪)가 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모셔왔다오. 그뿐만 아니라 이 위작 나으리의 의동생이기도 하오.]
위소보의 능란한 거짓말에 심무가 도리어 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바루타는 잘 보여 손해 볼 것 없다는 심산으로 얼른 합장을 했다.
[예, 심무 대사님!]
심무도 마지못해 합장을 하고 답례를 했다. 바루타가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은 듣거라. 심무대사님의 말씀도 계시고 하니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물러가 있거라. 그리고 화주님(火主任:주방장)께 알려 칙사님이 드실 음식을 준비하라 일러라.]
원주 바루타의 말에 여덟 소녀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제기랄! 잠시 방심하는 사이 아름다운 기러기 떼가 날아갔군. 이럴 줄 알았으면 문아를 데려오지 않는 건데. 요즘 웬일인지 이 어르신의 일진이 항상 상문(喪門)이란 말이야. 에잇! 황제인지 소현자인지 하는 놈은 날 잡으려고 안달이고, 태후년인지 황액낭인지 하는 년은 독을 먹여 이 어르신의 사랑스런 일곱 부인들과 새끼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니 넓은 천지에 해골쪽 마음 놓고 눕힐 곳이 없구나. 정 그렇다면 녹정산 보물을 파내서 나도 모반이나 일으킬까? 다행히 운이 좋으면 황제가 되고 재수 없으면 붙잡혀 목이 뎅겅 잘려 자금성 문루에 효수되겠지. 반란?.... 소현자만 죽이면 황상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일곱 부인은 황후와 황비가 되어 금이 번쩍번쩍 박힌 가마를 타고 다니겠지. 그렇게 되면 문아도 강제로 승복을 벗기고 머리를 길러 이 어르신의.... 히히!)
위소보가 엉뚱한 상념에 사로잡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대 바루타가 고개를 조아렸다.
[칙사님과 대사님께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화주를 재촉해 음식을 장만해 오겠습니다.]
[술도 가져오게!]
위소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다시 찬란한 보관(寶冠)을 쓴 심무의 모습을 연상하기 시작했다. 심무가 다시 그의 생각을 깨뜨렸다.
[저 사람들은 어쩌나요?]
대청 밖에 서성거리는 니얼츠와 세 수하를 가리켰다. 위소보는 네 사람이 명을 기다리고 서 있음을 발견하고 어조를 돋구었다.
[녹정후와 세 참령은 서홍관의 문을 지키고 허락 없이 사람을 출입시키지 말도록 하게.]
[삼가 명을 따르겠습니다.]
네 사람은 크게 감동한 듯 우렁차게 답하고는 문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널따란 대청 안에는 단지 두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위소보는 대청 중앙에 있는 팔선탁(八仙卓)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대사님, 이 위작 나으리의 권력이 어떻소?]
[호호호, 사형의 연기는 매우 훌륭했어요. 하지만 이 동생을 대사라고 부르는 것은 승려의 법도에 어긋날 뿐더러 제가 감당하지 못하겠어요.]
[황불사의 주지께서 대사의 칭호를 감당할 수 없다면 천하에 누구를 감히 대사라 부르겠소? 차라리 국사(國師)라고 부를 걸 잘못했구려.]
두 사람이 허리를 잡고 웃을 때, 니얼츠가 달려와서 소리쳤다.
[주효가 준비됐사옵니다. 들여보낼까요?]
.
위소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이어 십여 명의 남녀가 음식과 술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것은 첩첩산중에서 구할 수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두 사람은 주위의 시중을 받으며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배가 부르자 위소보는 졸음이 몰려왔다.
[커억, 이제 한숨 자는 일만 남았군. 심무 여동생도 일찍 쉬시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합시다.]
그는 우측에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위소보가 깨어났을 때는 동녘이 훤히 밝아 있었다. 침실을 나서자 대청에 앉아 있는 심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밤새 의자에 앉아 있었는지 약간 초췌한 기색이었다.
[아주 늘어지게 잤구려. 심무 동생은 안 잤소?]
[니얼츠와 얘기를 했는데 삼관이 매우 흉험한 모양이에요. 지난 백여 년 동안 아무도 통과한 자가 없었대요.]
[아무 걱정 말아요. 설마 황상의 성지를 받고 녹정봉에 오르는데 어느 시러배 잡놈이 앞길을 막겠소?]
위소보는 탁자 위의 찻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손뻑을 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니얼츠와 세 부하가 달려왔다.
[가서 원주라는 자를 불러오너라.]
위소보는 원주를 통해 삼관의 허실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녹정봉에 오르는 길은 양장혈(羊腸穴) 밖에 없습니다. 하오나 소인들도 양장혈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화급한 일이 생겨 산군님을 찾을 때는 봉화를 올려 산상에 신호를 보냅니다.]
원주 바루타의 대답은 이러했다.
위소보의 이마에 내천(川)자가 그려졌다.
(요것 보게. 결론적으로 산군이란 놈은 아주 음흉한 너구리구나. 자기 혼자만 여덟 계집을 데리고 녹정봉에 올라 실컷 재미를 보는 작자로군! 그러니 양장혈인지 양모혈(羊毛穴)인지 하는 동굴을 만들어 쥐새끼 한 마리 못 오르게 하지. 에잇! 그렇다고 이 위작 나으리.... 아니, 이젠 위작이 아닌 위 대인이지. 어쨌든 내가 삼관이고 삼십관이고 다 때려 부수고 녹정봉에 오르겠다.)
이같이 결심한 그는 품안의 소지품을 한 번 확인한 후에 큰소리로 외쳤다.
[본 칙사는 황상께서 하사하신 몇 가지 신병이기가 있어 도산검림이라도 갈 수 있는 몸이다. 성지가 지엄하니 속히 양장혈로 안내하라!]
[아침도 안드시고 오르실 작정이십니까?]
바루타가 손을 비벼 대며 물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더 머무를 수 없다. 허나 그대의 성의를 봐서 몇 가지 음식을 챙겨 갈 테니 저들에게 지워 보내라.]
니얼츠의 부하에게 음식과 술 세 병을 등에 지게 한 위소보는 바루타의 안내로 양장혈을 향했다. 몇 채의 건물과 층계를 지나 깎아지를 듯한 봉우리 아래 이르자 입을 쩍 벌린 동굴이 보였다. 동굴 입구에는 돌로 쪼아 새긴 만어 세 글자가 보였다. 위소보는 만어로 말할 줄만 알았지 읽을 줄은 몰랐다. 바루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이 양장혈입니다.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산군께서 말씀하시기를 통과하는 데 세 개의 횃불이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수고했네. 이번 일이 잘 처리되면 자네를 팔기군의 도통으로 삼으라고 황상께 주청하겠네.]
[황송하옵니다.]
위소보는 바루타가 건네주는 횃불에 불을 붙이고 성큼성큼 굴 안으로 들어섰다. 니얼츠와 세 사내들은 다소 두려운 표정이었으나 감투를 씌워 준다는 말을 생각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심무도 일행을 따랐다. 동굴 안은 몹시도 냉기가 감돌았다. 몇 걸음 나아가기도 전에 횃불이 거센 바람에 흔들리고 뼈를 에이는 한풍이 엄습해 왔다. 위소보는 심무를 보고 말했다.
[동생, 이 안에 요괴가 숨어 있으니 귀신 쫓는 경문이 있으면 외워 이 오라버니의 앞길을 막는 사악한 요괴를 물리쳐 주시오.]
심무는 가볍게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꾸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전과같이 무엇이라도 꿰뚫을 듯 예리해졌고 두 손은 가슴 부위에 두어 언제라도 출수할 기세였다. 대략 오십 보쯤 나아가자 길이 우측으로 꺾어지며 통로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눈앞에 널따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에는 음산한 귀기만이 감돌고 있었는데 벽쪽에 세 개의 굴이 뚫려 있었다.
[길이 세 갈래로군! 동생, 어느 길이 녹정봉으로 오르는 길일까?]
[우선 가운데로 가 봐요.]
심무의 답변에 위소보는 더 망설이지 않고 가운데 길을 택해 들어섰다. 그러자 백여 척쯤 걷기도 전에 다시 세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지?]
[오라버니,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가운데 길로만 가요.]
위소보등 일행은 다시 가운데 길을 택했다. 그러자 굴은 전처럼 다시 구불구불 뱀이 또아리를 튼 것처럼 이리 돌고 저리 돌았는데 그때마다 좌우에서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급기야 이들은 되돌아 갈 길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횃불 세 개가 다 타 들어가고 니얼츠가 예비로 준비해 온 두 자루의 횃불만 남았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아요. 누군가 인공적으로 굴을 뚫어 출구를 찾지 못하게 만든 모양이에요.]
[제기랄, 어떤 개자식이 만들었는지 되게 복잡하게 만들었군. 차라리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점괘를 가지고 길을 찾아볼까? 천지신명, 지장왕보살, 관음대사, 구천현녀가 도와주셔서 험지를 벗어날지도 모르지.]
위소보는 맥이 빠져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무언가 와스스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횃불을 들고 살피니 놀랍게도 뼈만 앙상하게 남은 백골이었다.
[크악! 해....골이다.]
그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꽁지가 빠지게 앞으로 달렸다. 그가 정신없이 달리자 일행도 기겁을 하고 뒤를 따랐다. 이십여 장쯤 나아갔을 때 또 다른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에는 어디서 흘러들었는지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여기서 좀 쉬다 갈까?]
위소보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을 때 니얼츠의 수하 한 사람이 천정을 가리켰다.
[박쥐가 있습니다! 저 박쥐를 놀라게 해서 깨우면 출구로 안내할 것입니다.]
사냥꾼이라 길을 찾고 위기를 벗어나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하하! 자네 말이 훌륭하이. 그럼 저놈에게 길안내를 시키지.]
위소보는 남은 횃불에 불을 붙이고 천정의 박쥐를 향해 마구 휘둘렀다. 천정에 붙어 있던 박쥐는 빛에 놀랐는지 아니면 화기에 놀랐는지 끼익! 하는 괴성을 발하며 허공을 맴돌았다. 그것도 잠시 놈은 하나의 굴을 택해 번개같이 날아갔다.
[어서 가요!]
심무가 위소보의 횃불을 뺏아 들고 박쥐를 추격했다. 위소보와 네 사내도 그녀를 따라 몸을 날렸다. 다행히 박쥐는 중간 중간 천정에 몸을 붙였다가 사라지곤 해서 뒤따르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박쥐를 따라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오르고 내려가고 몇 차례 숨바꼭질을 한 끝에 환한 광선이 비추는 출구에 이르렀다.
[네가 진짜 상을 받을 충신이구나. 이 어르신이 황상에게 아뢰어 네 놈한테도 벼슬을 내리겠다.]
동굴에서 쫓겨나서 어디론가 날아가는 박쥐를 향해 위소보는 소리쳤다. 출구 밖은 녹정봉 중턱 부근에 있는 곳으로 아래는 천길만길의 낭떠러지였다. 또 암벽에 의지한 채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만한 길이 보였다. 그것은 사람의 손을 빌려 만든 듯 제법 단장되어 있었다.
[휴유, 양장혈이 제일관이라면 나머지 두 관문도 흉험하기 그지없을 것 같아요.]
심무가 낭애를 내려 보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자칫하면 사소보가 되어 밑에서 뼈를 추리겠군!]
위소보는 암벽에 몸을 붙이고 천천히 나아갔다. 조금만 실수해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 걸음마다 신경을 썼다. 암벽에 나 있는 협도를 따라 반 마장쯤 올라갔을까? 주위 경물이 크게 일변하며 산상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은 석공(石工)의 솜씨가 가미된 듯 한 개 한 개 정확한 높이와 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젠 살 것 같군! 아무렴, 이 어르신이 오르기로 약정되어 있는 데 녹정산 산신이 마다할 리 없지. 공사할 때 현몽을 해서 길을 넓히라 한 모양이야.]
그는 신바람이 나서 산상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밟았다. 대략 삼백 개의 계단을 밟았을까? 돌연 주위가 희뿌옇게 변하더니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짙은 운무(雲霧)로 순식간에 한자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동생, 내 옷자락을 잡고 천천히 따라오시오.]
위소보는 심무를 향해 소리쳤다.
[저는 상관 마시고 사형이나 조심하세요.]
[무서우면 언제든지 이 오라버니를 부르시오.]
위소보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때었다. 운무는 계단을 오를수록 점점 짙어져 급기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청천벽력이라더니 대낮에 무슨 안개가 이토록 낀담?]
위소보는 입으로 연신 투덜거렸지만 발걸음마다 경각심을 두었다. 한발만 잘못 딛어도 수천 길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는 전신의 모든 촉각을 발에 두고 일 보 일 보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하지만 짙은 운무는 쉽게 걷히지 않았고 돌계단도 끝날 줄 몰랐다.
[동생, 아무래도 잠시 쉬었다가 안개가 걷히면 올라가는 게 어떨까?]
위소보가 등을 돌리며 물었으나 심무의 응답이 없었다.
[심무 동생!]
[....]
여전히 아무 대꾸가 없었다. 위소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머리칼이 쭈뼛 하늘을 향해 곤두섰다.
[문아? 지금 어디 있소?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위소보는 계단 아래를 향해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로 되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만약 문아 여동생의 몸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니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면....)
그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전신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솟구치고 무서운 한기가 전신을 엄습해 왔다.
[니얼츠!]
[....]
니얼츠 역시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아무 응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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