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문학의봄 홈페이지 창작방4(공용) 수필(수기/기행문/칼럼)란에는 장성민 작가의 ‘내 고향의 여름은’과 임창순 작가의 ‘바위가 부드러운 스펀지로 변해가며’ 2편의 산문이 올라왔다.
수필은 한번 읽고 나면 여운이나 감동이 남아야 한다. 그래야 그 여운과 감동을 다시 느껴보고자 글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최근 문학의봄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수필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의 글을 만난 적이 드물다는 것이다. 이번 6월 산문 부분의 예심에 올릴 작품은 없는 것으로 했다.
장성민 작가의 ‘내 고향의 여름은’은 이육사 ‘청포도’ 시를 인용하면서 고향 생각/고남산과 승련사 일화/요천 수에서 다슬기와 물고기 잡은 추억/고향에 대한 회상/칠월의 고향을 돌아봄 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 고향의 전설과 유래 부분에 너무 많은 글을 써서 소재에 너무 치우지 않았나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유래와 전설은 주제에 빗대어 고향을 부각시키는 소재로 활용했으면 좋았을 텐데 소개에만 그친 것이 아쉬웠다. 누차 말하는 것이지만 수필도 무형식의 형식을 갖추어 서론, 본론, 결론으로 전개하고 축약과 거리 두기를 통해 주제가 함축적으로 배어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이 겪은 체험에 대하여 사색과 사유를 통해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장성민 작가의 글에서는 이런 점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임창순 작가의 ‘바위가 부드러운 스펀지로 변해가며’란 수필은 작가의 글과 주제가 다소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바위가 부드러운 스펀지로 변해가며’라는 글은 작가 인생의 전반을 돌아보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에세이다. 주제와 어울리는 글을 쓰려면 유년기, 아동기, 청소년기, 젊은 시절, 중장년기에 자신의 마음이 성장과정에서 어떻게 변해갔는지 과정을 그리면서 결론적으로 바위 같던 마음이 부드러운 스펀지처럼 변화되었다라는 방식으로 전개하였다면 글의 완성도가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글의 전반적인 내용과 주제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글의 내용도 자신의 인생 전반을 풀어서 쓸 것이 아니라 축약과 함축을 통해 특정 한 시기와 비교하되 글을 대폭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임창순 작가도 앞의 장성민 작가와 마찬가지로 수필의 형식이나 글다듬기, 거리 두기 등 전반적인 부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수필은 작가가 글을 쓰고 난 뒤 퇴고와 다듬기를 통해 완성도가 높아진다. 작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자 정성과 노력이다.
다음 달에는 문학의봄 홈페이지에서 아름답고 멋진 수필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예심을 마친다.
내 고향의 여름은
장석민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육사 선생의 "청포도“ 첫 번째 연이다. 이육사 선생은 이 시에서 조국을 일제에게 빼앗긴 고달픔 속에서도 광복의 그날을 기다리는 마음을 간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청포도, 마을 전설, 하늘, 푸른 바다, 흰 돛 단 배, 손님, 청포,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 시각적으로도 아주 시원하고 푸른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골에는 나름대로 그 마을의 전설과 전통이 있다. 내가 태어나서 열아홉 살 때까지 자란 내 고장도 그런 곳이다. 내 고장 칠월은 냇가에 나가 물고기 잡기 좋은 시절이다. 마을 앞에는 백두대간의 일부 구간인 고남산이 우뚝 솟아 있다.
고남산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일화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 이성계가 장군으로 활동하던 고려 우왕 때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으니 소탕하라는 명을 받고 출정하여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가 고남산에 올라 승리를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고 나서 운봉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활로 쏘아 죽이고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지금도 운봉에 황산대첩비가 남아 있다. 마을 앞으로 흘러가는 섬진강의 지류인 요천 수가 굽이쳐 흐르는 모습은 아름다운 자연 그 모습 그대로이다. 마을 뒤쪽에는 연꽃을 닮은 산봉우리 연화봉(蓮花峰)이 있다. 연화봉 아래에는 고려 때 지었다는 승련사라는 절이 있고 승련사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고려말 공민왕 때 금강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 뒤에 아주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금강사는 상당히 큰 절이었고 승려도 많고 신도들도 많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선지 바위가 갈라지면서 그 바위 속에 있던 금새 세 마리가 나와 고남산에 있는 창덕암, 만행산에 있는 귀정사, 청룡사로 날아간 후 금강사가 망했다는 설이 있다.
바위가 갈라진 이유에 대하여는 승려들이 불도는 닦지 않고 호의호식 해서 벌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동네 사람들과 스님들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세월이 흘러 금강사 터에 다시 절을 지었고 지금은 승련사라는 절이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밖에 안 보이는 산골 마을 내 고장! 어렸을 때 내 고장 칠월은 냇가에 나가 물고기 잡고 멱 감던 시절이었다. 요천 수는 장수군에 있는 영취산과 장안산 사이 지지계곡이라는 곳에서 발원 해서 60여 킬로미터를 흘러 전남 곡성군 동산리 섬진강까지 이어진다. 요천 수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 물가에 여뀌꽃이 많이 피었고, 여뀌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여뀌꽃 요(蓼)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요천 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천 수는 1급 하천으로써 물에 수많은 어종이 살고 있다. 어렸을 때는 피라미 낚시도 많이 했고, 커다란 해머로 물속의 돌을 두들겨서 물고기를 기절시켜 잡는 방법도 많이 썼다. 밤에는 횃불을 들고 나가 다슬기를 잡기도 했다.
다슬기는 낮에는 물속 모래 속으로 들어가 있다가 밤이 되면 물속의 돌 위로 올라와 있는 습성이 있어서 밤에 많이 잡을 수 있다. 가끔 홍수가 나면 붉은 황토물이 흘러가는데 그때는 민물새우 중 가장 큰 것으로 진거미라고 하는 것이 물가로 나와 큰물에 떠내려가므로 소쿠리를 들고 나가 진거미를 뜨는 사람들이 많았다.
산골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이 준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큰물이 지나고 나면 메기 낚시도 잘 되었다. 하루는 대나무에 낚싯줄을 묶어서 만든 엉성한 낚싯대로 메기를 낚고 있었다. 운 좋게도 메기 세 마리를 잡았고, 빠가사리, 퉁가리 등 잡고기는 십수 마리를 잡았다.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 담아서 콧노래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다고 평판이 난 청년 둘이 오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 녀석들은 내게 다가와 물고기 들어 있는 주전자를 보자고 한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자들이어서 어쩔 수 없이 주전자를 보여주니 물고기를 내놓으란다. 안 된다고 하니 계속 어르고 협박하고 번갈아 가면서 얘기한다. 나는 그때 낫을 가지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이 낫으로 저놈들을 찍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생이고 저 자들은 스무 살이 된 청년들이었다. 승산이 없을 것 같아 그 생각을 접었다. 한참 옥신각신 하다가 한 녀석이 제안을 한다. 메기를 줄 것인지, 내가 메기를 가질 것인지를 선택하란다. 남의 물건 가지고 도둑놈들이 선심 쓰는 꼴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메기를 내가 갖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그나마 다 뺏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추스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씩 고향에 갈 때면 그때 그 생각이 나곤 한다. 지금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물고기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해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이 벌써 강산이 4번도 더 변했으니 냇가도 옛날 그 물이 아니다. 상류에 댐이 생기면서 수량도 많이 줄어들었고 어종도 줄었고 냇가를 찾는 사람들도 줄었다.
그런데도 고향에 가면 마음은 항상 어릴 때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내 고장 칠월은 물고기 때문에 즐거웠던 시절이었고, 또한 물고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 받은 계절이기도 하다. 또 다시 칠월이 와서 내 고장을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다.
지나간 시간은 모두 다 아름다웠노라고 한 말을 되새겨 보며 잠시 마음 속의 시간을 뒤로, 뒤로 돌려 보고 있다.
바위가 부드러운 스펀지로 변해가며
임창순
배고픈 시절에 태어났다. 태어나마자 죽을고비를 겼었는데 의사가 내 코에 무엇을 집어넣어 간신히 작은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주변 친척집들의 첫 아기들은 죽었다는데 나만 살아났으니 기적이라고 해야 하는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인가
할머니는 첫 손자라 엄청 귀여워했다. 첫돌맞아 어머니는 사진관서 사진을 찍게 하였고 밥 먹을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은숟가락을 주면서 네 첫돌선물 숟가락이라고 하셨다. 점점 자라면서 제 나이에 맞도록 자질을 갖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말 더듬거렸고 심부름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고 코 질질 흘리고 코후벼 코딱지 먹었고, 얼굴엔 주근깨가 있어 주위로부터 못난놈이라 들어야 했다. 공부뿐 아니라 예체능 실기 실력도 완전 밑바닥이었다.
아이들한테 놀림받고 얻어 맞고 다녔고, 집에선 부모님한테 학교에서는 선생님한테 이래저래 혼나야했다. 학교 끝나고 집에오면 여기저기 돌아나니고 특히 극장 앞을 잘갔고 영화배우 이름은 줄줄이 외우고 다녔다. 어른들로부터 약지 못하다고 바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집에서는 8살에 학교를 보냈어야 하는데 7살에 학교 보냈다고 한탄하였고, 2학년이 되자 담임은 다시 1학년으로 내려 가라고 권유하였지만 가질 않했다. 아이들한테 얻어맞아 할머니가 학교에 찾아가는 일도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는 놀이터서 그네에 다쳐 10바늘을 꼬매야 했고 학교에선 걸어가다가 서로 부딪펴 눈 밑이 부어야 했다.
어머니는 학교 가지 말라고 책가방을 던졌다. 반 아이들이 띨띨하다고 별명을 만들어 괴롭히고 놀림을 받아야 했다. 중학교때도 마찬 가지였다. 6학년때 아버지는 국민학교만 졸업시키고 중학교 보내지말고 기술이나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고. 고등학생때 서점 하는게 낮다고 하셨다.
코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 코에서 콧물이 흘렀고 코딱지가 자꾸 생겨나 코딱지를 뜯어 먹었다. 약 발라도 소용 없었다. 화가난 아버지는 나를 때려 코에서 피가 흘러 어머니는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받게 해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마침내 종합병원가서 치료 받았고, 의사의 지시로 더 이상 그 짓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코소리를 계속하니 부모님한테 쓴소리 들었고 소심한 성격이 되었다. (한쪽 코가 막혀 숨쉬지 못해 입으로 숨쉬었고 2014년 수술하여 정상이 되었음. 아마 콧속에 넣은 주사바늘 때문인가 추측함. 작년 별도로 체험 수필을 썼음)
이런 속에서 희망의 빗줄기도 있었다. 그래도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찬구들이 있었고, 4학년때는 비록 공부는 바닥권이었지만 사회과목 하나는 높은 점수를 받았고 끝나면 학교도서관서 책을 많이 읽었다. 5학년 시절 부모님께 과외공부 받게 해달라고 떼를서서 담임한테 과외를 받아 공부를 하기 시작 하였고 성적이 조금씩 올라갔다
과외는 나를 살려주는 씨앗이 되었다. 어머니가 사주신 강소천 동화집 10권을 읽어 문학의 기반을 닦았고 신문을 읽었다. 우표수집을 하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한다. 개신교를 다니다가 고등학교땐 천주교로 개종해 영세를 받았고 성당활동 하면서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대학생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였고 사회인이 된 후 정상적인 활동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상사한테 못났고 일 못한다고 엄청 혼나야했고 동료들한테 빈축을 받았으니 그만 두려고 했었다. 그러나 역량을 높이려고 부단히 애를 썼고 주위로부터 서서히 인정을 받았다.
50대가 되니 서서히 트라우마가 생겨났다. 학생시절 아이들한테 당했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복수심이 불타 올라 만나면 완전히 죽이고 싶었고. 설령 잊으려고 해도 잊지를 못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폭군적인 기질이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직장이나 가정에서 일이 풀리지 얺으면 다혈질 기질이 나왔다.
대학교때 배웠던 교육심리 내용이 생각 났다. 그중 하나가 많은 독재자들이 자라온 과정이 비정상적인 사고와 삶을 살았다고 하였다. 예로 나폴레용은 키가 너무 작아서 등등이었다. 다른 책을 통하여 스탈린 폴포트 히틀러 연산군 등이 잘못된 성장과정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았다,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같이 근무하신 상담교사로 부터 상담을 받았다. 상담교사는 어느정도 안정이 되가니깐 않 좋았던 기억이 떠 오른다고 하였다. 상담을 받았지만 크게 나이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고지식한 성격이며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으며 부드럽고 순진한 이미지를 느낀디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렇지 않다. 사람인지라 이익과 실속을 차리고 있고, 싫은 사람은 아예 상종을 하지 얺는다. 단점이라면 대인관계가 서툴고 내면속에 착한 콤플렉스가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쓴소리와 윗 사람들에게 아양을 떨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보았고 생각을 했다. 많이 배웠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어리섞기는 마찬가지임을 뉴스나 다른 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고 옥심 부리다가 감옥에 갔으며 사기를 당하기도 하였다. 용서가 무엇인가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무조건 용서를 해주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용서는 일방적 행위가 아니다.
물론 나를 위해서라도 마음속에서 용서 해주어야 하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 안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모욕을 당할 수 있다. 피해자는 죽을때까지 두고두고 응어리를 품고 살아가지만 가해자는 잊어버린다. 아니 잊지않고 그 일을 자랑이라고 가지고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언제인가는 부메랑이 되는 날이 있다고 보며, 종교를 가졌다면 믿는 신에게 온전한 참회를 해야한다. 댓가를 치루지 않고 죽으면 저 세상가서 반드시 댓가를 치르게 되어있다. 그땐 아무리 신 앞에서 발뺌해도 소용앖다.
정년퇴직을 하니 세상을 이겨냈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받았다. 못났놈이라고 들었던 내가 정년퇴직하고 연금받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하나 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인품을 존중해주었다.
그때 나를 괴롭혔던 인간들 만나면 무슨 생각을 할까. 기억이나 할려나. 지금 나를 사람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그들과 자주 카톡을 주고 받으며 친분을 쌓아간다. 시를 써보라신 분이 같이 근무했던 교장선생님 이셨다. 처음엔 못 쓴다고 거부했지만 조금씩 써나갔으며 배웠다. 지금도 계속 쓰고 있고 예전부터 써왔던 수필도 쓴다. 작년에는 대덕구청에서 시행했던 문학강좌 결과로 교육생들이 쓴 문예지가 나왔으며 시5편과 수필3편이 실린 기쁨도 있었다.
역사 지리 문학 과학 한문 신학등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매일 과학 관련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듣는다. 친구는 나를 천천천천 천재라고 한다 이제는 마음속 무거운 바위가 부드러운 스펀지로 변할 때가 왔다. 당장 표시는 나지 않지만 서서히 녹여감을 느까고 있다. 이제는 어리섞게 살지 않는다. 축적과 판단력이 생겨났다. 서서히 종착지로 달려 가는 인생 후반기의 삶 않 좋았던 일들을 블랙홀에다 집어 던지고 멋진 삶을 살아 가고싶다.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마음고생 하시고 뒷바라지 하신 어머니께 죄송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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