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문화연구회6월 답사》
언제:22년 6월 7~8일(1박2일)
어디로:문경 예천 영주
회비:실비(자체결산ㅡ전일정 112888원)
참석자:이세희 외 5명(전체6명)
회비잔액:65540+15만원(문지회 지원금)=215540원
일정
7일:12시 천안역 집결,
식사, 봉생정, 병암(봉천사), 주암정, 장수황씨종택, 문경 대하리 소나무,
예천권씨 병암정 및 별묘, 저녁식사, 체화정, 선몽대
8일:
예천 초간정,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 초정서예연구원(잠간 멈춤),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성혈사, 점심, 금선정, 이산서원, 만취당,
구은고택, 삼판서고택과 제민루, 식사
(숨가쁜 일정이었습니다)
《문경지역의 정자들》
5월 답사 때 6월 답사는 박으로 하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당일로 하기로 하였는데
채팅방에서 일정에 대한 얘기가 오고가는 중에 얼떨결에 다시 1박 답사가 결정되었습니다.
7일 약속도 있었고 새끼발가락 골절로 몸도 불편한데 양해를 얻어 약속을 미루고 답사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내게 답사는 대부분 새벽 4시 기상으로 시작됩니다.
보통 새벽에야 잠을 자는 생활을 하는 내게 그런 날들은 거의 뜬 눈으로 새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서둘러도 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고
고속버스나 열차를 놓칠까봐 뛰거나 종종걸음이 일상입니다.
새벽 별을 보고 나갔다가 거의대부분 대중교통 막차로 귀가하는 고된 일정입니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다가도 다시 그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천안역에서 12시?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늦게 일어나도 되고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덕분에 잠도 잘 잤습니다.
하루지만 집을 비울거라서 대충 정리를 해두고 집을 나섭니다.
전날 비가 좀 왔다고 하늘이 파랗습니다.
마음도 파란 하늘의 구름처럼 둥둥 떠갑니다.
서울의 하늘이 이렇게 맑아도 되나 싶습니다.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조금 전에 버스타고 갔던 길을 되돌아 갑니다.
지금은 개망초의 계절인가 봅니다.
철로 사이사이에 핀 개망초가 하늘바라기하며 손을 흔듭니다.
날이 가물어 난쟁이 개망초가 되었습니다.
어지럽게 널린 전선줄 뒤로 새남터 성당이 보입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한강이 나타납니다.
강 건너로 보이는 고층 건물들이 거리를 두고 보니 만만하고 정겨워보입니다.
한강과의 조화가 예뻐서, 푸른 하늘과도 잘 어울려서 카메라를 켰는데
열차의 빠른 속도때문에 내가 보았던 그 예쁜 풍경은 이미 저만큼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노량진 역을 지나니 월파정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정자가 있던 곳에 세워진
별장식당이라는 쇠락한 식당의 간판이 지나갑니다.
달이 뜨는 밤
잔잔한 물결이 이는 강에 달빛이 부서지고
그렇게 흘러간 달이 초승달에서 반달을 거쳐 보름달이 되고
또 이울어져가기를 반복하는동안 세상이 변하여
권력자의 손을 거쳐 온갖 술꾼들의 추태도 묵묵히 견뎌왔던 그 곳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고 그저 수많은 이야기와 영화를 간직한채 버려져있습니다
저 건물은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요?
이 선로 너머의 노량진 시장을 지나며
가뭄에 다 자라지 못한 흔하디 흔한 잡초인 개망초와 시장을 만들고 지켜내고
오고가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애잔한 삶이 오버랩됩니다.
서울의 하늘은 이리도 맑은데
화순에서 오시는 반선생님이 익산은 비가 온다고 합니다.
"참 좋은 세상이다"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나도 이제 나이를 좀 먹은 모양입니다.
오선생님께 "천안역 지난번에 만났던 그 장소에서 딱 기다리시라"고 했더니
"딱 그 장소는 아닐 수도 있다"는 답변을 하십니다.
재치있고 유머스런 답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천안에서 만나 이선생님의 승합차로 이동하면서
오랫만에 만나 반갑고 오늘 가 볼 장소들에 대한 기대감에 설레어 즐겁게 수다를 떱니다.
어느 순간 차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점촌에서 버섯전골을 먹기로 하였으나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우리매운탕>이란 상호를 가진 식당에 들러
잡어매운탕으로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배가 부르니 다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만 그런건 아닌가봅니다.
그렇게 기분좋게 첫 답사지에 도착했습니다.
<봉생정>
이 곳의 위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속리산 대야산 희양산 등에서 발원한 가은천과
주흘산 조령산 대미산 등에서 발원한 조령천이 합수하는
용연龍淵에 위치한다고 안내판에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에는 영강과 조령천이 있는걸보니 가은천이 영강인가봅니다
봉생정의 현판은 1900년 해사 김성근이 썼다고합니다
생笙은 생황이란 관악기인데 봉생이란 봉황의 모습을 닮은 피리라는 뜻입니다
중국 주나라 영왕靈王의 태자인 왕자王子 교喬가 봉생을 잘 불었는데
피리를 불며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유람했다고하여 봉생은 신선이 부는 피리라는 의미가 되었답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신선이 부는 피리일까요 아니면 신선이 피리를 부는 곳일까요?
신선도 이곳에서는 피리를 불고 싶을것같기는합니다
서애 유성룡이 안동에서 한양으로 오갈 때 처가가 있는 이 곳에서 쉬어간 모양입니다
영강 건너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고모산성이 있고
강을 따라 절벽 위로 토끼비리라는 벼랑길이 있습니다
이 곳에 앉아 늘 바라보았던 곳이기에
임진년의 왜란 때 신립장군이 이곳을 지키지 않았던 것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립장군과 휘하의 군사들은 기병이라
이런 험지에서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결국은 군통솔자의 잘못이라 여겨집니다
아무리 급했어도 이 곳은 보병위주의 방어전을 펼쳐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다면 전쟁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까요?
이 곳에 건물을 지은 이는 서애가 아니고 그의 제자 우복 정경세와 지방의 유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건물이 임란때 불타고 200년이 지나 순조 년간인 1804년에 문경지역 유림들이 복원을 위해 계를 시작하였습니다
1836년 계가 깨어지고 풍산유씨의 지원과 이익섭선생의 주도로 다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1837년 이익섭 선생이 돌아가시고 이상행 이도행 등이 뜻을 이어 헌종 때인 1844년에 복원이 되었습니다
안동 하회의 풍산유씨 문중에서 50냥의 복원 비용을 부담하며 복원에 참여하였습니다
50년간 이 정자의 복원에 함께 노력해온 김참봉金參奉은 노론으로 가면서 계금으로 낸 돈을 찾아갔습니다
25명의 참여자 중 중간에 의견이 맞지않아 탈퇴하면서
계금을 찾아간 사건 등이 이희철 선생이 소장하고 계신
<봉생정실록>과 <봉생정영건사적>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는데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이런 경험을 토대로 10개 조항의 계원들이 지킬 회칙 같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니
소잃고 외양간은 고친 셈인가요?
현재의 건물은 2005년에 중수하여 7문중이 관리하고 있다고합니다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이 있는 구조인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복원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온돌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각각 있는데
이 아궁이가 마루 아래 공간인 토방을 분할해놓아
정상적으로 건너다닐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이런 형식을 본적이 없어
잘못된 것인지 이 지방의 형식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많이 불편해보입니다
담장밖 일각문 쪽으로 오죽이 무성하게 자라 일부 잘라내었습니다
정자 바로 앞의 소나무가 태풍에 가지가 꺾였는지 성치않은 상태이지만
어째 그래서 더 멋스러워 보입니다
말없이 이 장소의 역사를 대변해주는것 같습니다
정자는 어디나 멋있지만 특히 이 곳의 입지는 탁월해보입니다
정자에서 영강건너 왼편 산위에 고모산성이 있습니다
앞쪽으로 삼각봉을 영강이 감싸고 흐릅니다
그 한쪽 끝부분에 고모산성에서 내려다보았던 멋진 소나무 숲이 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오토캠핑장으로 나오는데 가보지않았습니다
다음에 고모산성에 가면 봉생정이 보이는지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봉생정이 자리한 산도 삼각봉도 다른 산들과 이어지지않고 따로 서있습니다
일각문을 나오면 아래로 데크가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문앞까지 차로 갔지만 이 데크를 이용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봉생교를 지나 우측으로 돌면 올라가는 길이 있지만
시골길 운전이 서투른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산아래 데크가 있습니다
여기서 깎아지른 직벽의 바위를 눈으로 보고 오르면
이 정자를 가장 잘 느끼는 방법인것같습니다
내비에 모심정을 치고 가도 될것같습니다
봉생교 건너 바로 눈앞의 산입니다
모심정도 꽤나 유명한 곳인가봅니다
<병암>?
<봉천사>?
병암은 내비에 안나옵니다
봉천사를 치고가면 됩니다
그런데 가는 길이 어째 낯이 익습니다
<호계 봉서리 3층석탑>을 보고서야 지난 겨울 답사지였다는걸 알았습니다
그 때는 이 곳을 탑과 석불 및 마애불을 보러 들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자를 보러 다시왔습니다
그 때 예사롭지 않아보여 자꾸만 뒤돌아 봤던 곳입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간이 화장실이 있습니다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닙니다
주차장 위쪽에 넓은 밭이 있습니다
오선생님이 거기 밭에 심은 작물이 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잡초인줄 알았는데 취냄새가 난다며 잎을 뜯어 코앞에 갖다대십니다
향긋한 취나물 냄새가 나지만 모르는 풀입니다
그런데 그 풀 무척이나 유명한 존재였습니다
개미취라는데 이 곳에서는 개미취 꽃이 필 때 따로 축제 비슷한 것이 열리나봅니다
식용이니 봄에 부드러운 새싹은 나물로 드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꽃이 피면 이런 모습이라니까 이 곳은 가을이 가장 예쁜 곳일까요?
언제와도 좋을 것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이 더 좋을것같기도 합니다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습니다
작은 정자가 커다란 소나무 양산을 쓰고 있는것같습니다
소나무의 수형(나무모양)도 어찌나 예쁜지요
또 작고 아담한 정자는 손바닥에 올려도 될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정자대신 소나무를 손바닥 같은 바위 위에 올렸습니다.
1982년에 약 400년이 되었다고 보호수가 되었다는데
이 바위 위에 누군가 심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옆모습입니다.
건물만 정면에서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병암이라는 현판을 달고있습니다.
병풍바위라는 뜻입니다.
정자 뒤의 바위절벽이 보이나요?
바로 이 절벽이 병풍바위입니다.
병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이 바위 절벽이 정자를 감싸고 꺾여서 봉천사 뒤로 계속 이어져 있습니다.
한 쪽 마루에 의자가 놓인걸 보니 누군가 이 곳을 이용하고 있나봅니다.
병풍바위 위에서 내려다본 소나무의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소나무였던가
소나무만 짝사랑하다 죽었던가
그런 사연이 있나봅니다.
사진으로 보는 소나무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넉넉해지고 미소가 번집니다.
"내사랑 소나무?"
마음으로 팔을 벌려 안아봅니다.
소나무와 바위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고 정자가 인사를 건네옵니다.
정자의 앙증맞은 작은 지붕이 꼭 장난감같습니다.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정자에서 공부가 되었을까요?
나는 내안의 장난기가 자꾸만 발동되어 이 곳에서 공부는 못할것 같습니다.
안내판에는 안동김씨인 병암 김현구가 후손들의 학문 증진을 위해 1832년에 지은 정자라고 적혀있습니다.
소나무는 400년을 넘게 살았다는데 정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나봅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도 이런 정자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부훤당 김해(1633~1716)가 산북면 서중리로 들어왔을 때
그 때부터 이 곳에 정자가 세워졌다면 연대가 대충 맞을 것 같습니다.
부원당 김해는 제 생각에는 조금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안동김씨는 서인인데 서인과 동인이 싸울 때
동인의 대표로 송시열을 탄핵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라니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만큼 제 지식이 짧고 공부가 얕다는 뜻이겠지요?
병암 김현규는 부훤당 김해의 6세손입니다.
병암은 병암정기에서 후손들이 몸을 바르게하고 행실을 삼가는 것을 근본으로하여
강학하여 도리를 밝히고 서로 선을 베풀고 길러서 몸을 튼튼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 정자가 편히 즐기고 노는 장소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셨다니
나같은 날라리의 속마음을 너무나 정확히 간파햐심에 가슴에 뜨끔해집니다.
아마 선생도 이 곳에서는 놀고 싶은 마음이 강하여 그렇게 경계하셨던 것은 아닐까요?
성인의 마음을 모르는 철부지는 이렇게 억지를 부려봅니다.
이세희 선생님이 찍은 여름 날의 병암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에는 담장과 출입문도 보입니다
언제 없어졌는지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옛모습을 함께 보면 좋을듯하여 모셔왔습니다
<봉천사>
병풍바위에서 내려다 보면 소나무를 사이에 두고 병암과 봉천사가 시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병풍바위 위에서 내려다 보는 봉천사의 모습입니다.
마당아래로 구름이 깔려 마치 이 곳이
저 아래 인간의 세계가 아닌 천상의 세계인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절집 마당 앞에도 바위가 병풍처럼 서 있는데
멋진 소나무 세 그루가 손잡고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 곳이 일출명소로 소문 난 곳이랍니다.
그래서 사철 진사님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고하네요.
이 곳의 해는 어떻게 떠 오를까요?
문득 이 곳에서는 해가 저 아래 땅위에서 떠오를 것만 같은 착각이 듭니다.
두 소나무 사이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봉천대라는 이름을 가진 이 바위에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 앉으면 호연지기라는 것이 절로 생겨나겠다 싶습니다.
바로 이 모습 때문에 병암을 이 곳에 세운 것이 아닐까요?
이 곳에서 수련도 하고 배운 것을 토론하고 그러라는 뜻이었을 것 같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고 가장 감동스러운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부훤당고택까지 자동차로는 13분 정도 도보로는 2시간 46분
내비가 알려준 정보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돌아오지 않고 직선 거리로 걸어서
절반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하는 짐작을 해봅니다.
바위 위에 물이 고이고 그 곳에 무당개구리 서식지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어째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절집의 모습은 딱히 볼만하지 않습니다
부지런한 스님 덕분에 주변이 잘 가꾸어져있고
지역에 대한 애향심도 대단하지만 정치적인 견해는 심하게 치우친 감이 있으니
혹시 기회가 된다면 참고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병암정 바로 앞에는 허물어져가는 농가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속에 녹아들어서 그런지 어째 흉물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밭에서는 우리가 오고 가는 것에 아랑곳않고
부부로 보이는 농부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더 평화로운 느낌이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나는 봤지만 보지못한
사람들을 위해 잠시 신라시대의 탑을 보고왔습니다
올라오지않고 아래에 서 계신 이세희 선생님의 마음은
주암정을 향해 저만큼 달리고 있습니다
황보명숙
정말 멋진 곳들을 다녀오셨네요...
우리나라 안에 정말 모르는 멋진 곳들이 정말 많은듯 싶어요.
병암과 사찰의 소나무들에 무당개구리 서식지까지😃
이가경 서울64
@황보명숙
정말 멋있더군요
기회되면 다녀오세요~~^^
황보명숙
@이가경 서울64 네^^ 친구들과 함 잡아 봐야겠어요🤭
이세희(천안)
최고!
설마, 이걸로 끝나는 건 아니지요.
앞으로 7부작은 더 나야할 것 같습니다 만.
이가경 서울64
@이세희(천안)
내용상 그래야하지만 그러다가 사망할지도 몰라서요ㅎ
이세희(천안)
만휴정이 있는 보백당 김계행 家에서 보듯이
영남, 특히 안동 풍산에서 태어난 부훤당 김해도
장동 김씨들과는 다른 길을 걸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이 또한 일반적이기도 하고요.
사진은 부훤당 김해를 모신 사당입니다.
주암정 뒤편 도로가에 고택과 함께 있습니다.
이가경 서울64
@이세희(천안)
그러니까요
여기도 들렀다 왔어야 했나 봅니다^^
錦輪 최윤희
우리 산천이 어디라도 절경이지요.
사람들 옷차림, 생활 터 집들이 바뀌었을 뿐.
물길은 땅속으로라도 흐르고
사람 마음도 그러하지요.
錦輪 최윤희
문경 가은에 묻힌 친구가 그립습니다.
선비의 눈길과 발길이 남아 있는 산길 물길에
문지회 선연 회원들이 찾아가셨다니
함께 하지 못했지만 흐믓 기쁩니다.
이가경 서울64
@최윤희
사연이 많은 곳이군요
오관석(13,14,15기)
답사지의 첫장면 만으로도 이럴진대,
전 구간 마져 쓰게되면 어떤 작품이 될까?
기대 만땅!
이가경 서울64
@오관석(13,14,15기)
ㅎ
기대는 마옵소서
전구간 답사기 쓰라면 아마도 실종될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