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원효의 탄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해석본을 소개한다. 성사 원효의 세속 성은 설씨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잉피공인데 적대공이라고도 한다. 적대라는 연못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담날내말이다.
원효는 처음 압량군의 남쪽에 있는 불지촌 북쪽 밤나무골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이름이 불지인데 혹은 발지촌이라고도 한다. 그의 어머니가 만삭이 됐을 때 마침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밤나무 아래에서 갑자기 해산했다. 너무 급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만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나무를 사라수라 부른다. 그 나무의 열매 또한 보통의 것과 달라서 사라율이라고 한다.
원효의 처음 아명은 서당이며 또 하나의 이름은 신당이었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가 유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부터 태기가 있었다. 해산할 즈음에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이때가 진평왕 39년인 617년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나 특별히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스스로 혼자 학문을 닦았다. 여러 지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전체의 내력과 불교를 널리 편 많은 업적들은 국내는 물론 중국의 당전과 향전 등에도 실려있다.
스님은 언젠가 하루는 상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어느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그 누구도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이 스님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나라의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데려오게 했다. 왕의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러 간 관리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고 있는 원효와 만나게 됐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해 옷을 벗겨 말리게 하고 거기에 머무르게 했더니 공주가 그만 임신해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해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니 신라의 현인 10명에 이름을 올렸다. 설총은 방언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방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고 사리를 깨달아 6경과 문학의 뜻을 풀었다.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에는 세속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사용하는 큰 박을 얻었다. 그 모양이 진기해 그 형상에 따라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에 있는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무애라 이름 짓고 이에 따라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으며 돌아오니 가난뱅이는 물론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무리들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됐고, 그들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읊게 되었으니 원효대사야말로 신라 대중불교의 창시자라 불러 마땅하다.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네 살에 벌써 사서삼경을 터득하고 마을에서 보이는 책이란 책은 모두 섭렵해 모르는 것이 없는 신동으로 통했다.
원효는 자라면서 사람들을 거느리는 위치에 서고 싶었다. 호연지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 무술을 익혔다. 서민의 위치에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길은 전쟁 영웅이 되는 방법이 가장 빨랐다. 그래서 화랑이 돼 물 만난 승냥이처럼 눈에 불을 켜고 전쟁터를 누볐다.
원효의 활약은 눈부셔 금방 상관들의 눈에 들어 빠르게 승진했다. 그의 호탕한 성격과 뛰어난 실력 때문에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그와 함께 하는 전쟁은 백전백승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상을 당한 이후 그의 생각은 크게 달라졌다. 세상이 모두 허무했다. 장군도 재상의 자리도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죽으면 그만인 세상에 무엇 하러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서로 죽이고 죽어 가는지, 자신이 왜 그렇게 전쟁터에서 칼을 휘둘렀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고뇌에 빠졌다. 결국 원효는 승려가 돼 불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고구려 보덕스님을 찾아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기 위한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보덕스님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법문에 밝은 승려로 가장 이름이 높았다. 보덕에게서 5년을 공부한 원효는 신라에 걸맞은 자신들이 찾는 이념을 만족시켜줄 공부를 위해 고국인 신라로 돌아왔다.
원효와 의상은 신라에서는 더 배울만한 스승이 없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배우기로 하고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도중에 원효는 해골의 물을 마시고, 다음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해골을 본 순간 원효의 마음은 환하게 밝아왔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 부처가 살고 있으므로 내가 바로 부처다. 스스로 부처라고 생각하는 순간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라고 생각하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세상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다.
방울장수도 부처요, 주막집 주모도 부처요, 나무꾼도 부처, 부랑자 거지도 부처다. 단지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내가 가르쳐준다면 백성들은 모두 부처가 되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효는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미친 듯이 웃기도 하고, 혼자 울기도 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춤을 추며 길거리를 쏘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등을 치고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원효는 백성들의 삶 속에서 뒹굴면서 다시 고민이 찾아왔다. 자신이 부처가 된다고 해서 바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또한 모든 백성들이 부처라는 걸 깨닫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혼자 떠돌며 일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원효는 결국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요석공주와 일가를 이룬다면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 이후 원효는 분황사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많은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대승기승론을 비롯해 그의 생각이 붓끝에서 말 달리듯 쏟아져 나와 100여 종, 240여 권의 책을 써내려갔다.
원효는 책을 쓰면서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 있고, 그를 백성들에게 알려도 욕심을 앞세운 사람들의 권력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진실로 모든 백성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어 잘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또 고민에 빠졌다. 더 깊은 고민으로 온 백성들을 위한 실천적 학문을 익히기 위해 원효는 고선사로 자리를 옮겼다.
고요하게 깊은 토함산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길의 태동을 보며 고선사에서 참선에 들었다. 저잣거리를 떠돌며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유랑하던 원효의 자세가 돌변한 것이다.
세상사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화두에서 더 깊이 들어가 마음이 머무는 곳에 육신도 함께 머물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참선에 들었던 원효는 육천통의 실마리를 잡고 토함산 능선을 넘어 임정사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임정사를 크게 중창하고, 석가모니의 기원정사와 첫 글자를 따서 기림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효는 기림사에서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고민에 빠졌다. 갖가지 방식의 참선과 이웃 항사사 혜공스님을 찾아가 문답으로 궁금증을 풀어보는 수행을 이어갔다.
그러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인도에서 온 광유선승이 득도한 흔적을 발견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던 끝에 육천통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천리 밖에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경지를 체험하면서 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원효는 드디어 육천통에 이르렀다. 천시통, 천후통, 천미통, 천촉통, 천이통, 천심통의 능력을 오롯이 터득했다.
원효는 시간을 거슬러 전생에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다시 내세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혈사에서 석 달 열흘을 벽만 마주하고 참선에서 들었다. 그것이 원효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행위였다. 앉은 자세 그대로 영원한 안식으로 입적했다.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이미 육신은 의미가 없는 껍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무가 되고, 참새가 되었다가 토끼, 노루가 되는 것도 이미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렀던 그의 깨달음의 깊이는 한량이 없었다.
오직 혈사에 남은 것은 원효의 정신이 빠져나간 육신일 뿐이다. 영원을 사는 생명체가 돼 지금도 신라의 터를 부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첫댓글 신라불교의 대중화를 이룬 최고의 공로자는 원효
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일
진정한 자유를 마음으로 누리며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