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설교(2023. 7. 9.)
거룩한 삶을 위한 지침
(부제: 위엣 것을 찾으라)
골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벧전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히 2:11,12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후 5:1,2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엡 2: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우리는 골로새서 말씀으로 주제설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은「골로새서 3장」입니다. 주제가 ‘거룩한 삶을 위한 지침’입니다. 말씀을 나누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거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각자가 다르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대부분은 ‘깨끗하다’, ‘더럽지 않다’, ‘추하지 않다’, ‘경건’, ‘성스럽다’ 등의 단어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특히 기독교에서 거룩할 ‘성(聖)’자를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거룩한 책’, ‘성막(전)-거룩한 건물’, ‘성가-거룩한 노래’, ‘성인-거룩한 사람’, ‘성모-거룩한 어머니(성모 마리아)’, ‘성도-거룩한 무리’, ‘성수-주일성수’, ‘성호-거룩한 이름’, ‘성지-거룩한 땅(성지순례)’, ‘성민-거룩한 백성’, ‘성배-거룩한 잔(영화)’, ‘성찬-거룩한 만찬’, ‘성직자-거룩한 직을 수행하는 사람’, ‘성회-거룩한 집회’, ‘성시-거룩한 도시(춘천성시화운동)’, ‘성산-거룩한 산’, ‘성의-거룩한 옷(예수님의 수의)’, ‘성부·성자·성령’, 등등
오늘 말씀의 주제가 ‘거룩한 삶을 위한 지침’인데요, 여러분은 거룩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거룩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우리는 지난 주에 ‘머리되신 주님을 붙들라’라는 주제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지만,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든다는 것의 의미를 전재유 형제님께서는 세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충만, 둘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용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자유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형제님의 교제를 들으면서 분명히 세 가지를 제시하셨는데, 실제 말씀교제는 두 가지, ‘완전한 충만’, ‘완전한 용서’만 나누시고 ‘완전한 자유’에 대하여는 그냥 넘어가셨습니다.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제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왜 완전한 자유에 대하여는 교제를 멈추셨냐구요?’ 그랬더니 설교시간이 너무 지나서 그냥 끝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 자유에 대한 내용이 나누어졌어야 오늘 나누게 될 ‘거룩한 삶을 위한 지침’이라는 주제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 형제님께서 시간 관계상 미처 나누지 못한 부분인 ‘완전한 자유’에 대하여 제가 대신 나누고 오늘 주제 말씀을 이어갈까 합니다.
잠시 기도하고 교제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2:16~23 “그러므로 1)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무도 2)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자유는 어떤 것일까요? 본문에서는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모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골로새서 2:16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계를 부탁하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거의 모든 교회에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일행이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면서 각 지역을 들어가면 제일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아마도 가장 먼저 복음을 접하고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교회가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그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11~2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당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율법준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법을 강조하면서 비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더라고 율법은 지켜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나오는 규례들, 즉 먹고 마시는 것, 어떤 음식은 먹어야 하나 어떤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수많은 규례들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었던 것 같습니다.
레위기 1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먹을 수 있는 육지 동물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입니다. 낙타(×), 샤반(×), 토끼(×), 돼지(×) 9절을 보면, 물에 있는 물고기 중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고등어(×), 꽁치(×), 임연수(×), 장어구이(×), 추어탕(×), 메기매운탕(×) 13절부터는 새 중에 아예 못 먹는 목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은 혐오 대상이었고, 다만 그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만은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먹지만 못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주검을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고, 그 주검이 나무 그릇에나 의복에나 가죽에나 자루에나 닿기만 해도 부정해졌습니다. 질그릇은 깨뜨려야했고, 옷은 빨아야 했으며 저녁까지 부정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음식 규례의 결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있어 음식은 그들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제가 유대인이었어도 정말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절기들은 어떠했을까요?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유월절이나 무교절, 초실절(첫 이삭 한 단을 바치는 절기), 칠칠절(두 번째 거둔 곡식을 바치는 절기, 오순절), 나팔절(일곱째달 첫날), 초막절(장막절) 등의 절기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유월절이나 무교절이야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였으니 그 기념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광복절과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같은 날이니 당연히 기념할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초막절 등은 사실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기념하라고 하셨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지켜야 할 명분이 있겠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유월절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초실절과 칠칠절은 우리나라 추석, 미국의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로서의 의미가 있긴 하겠지만요. 초막절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지키라고 하셨다고 하니 무의미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어쨌든 이 모든 절기가 율법으로 주어졌으니 당연히 지켜져야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초하루나 안식일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이해가 가는데 왜 초하루를 지켜야 한다고 했을까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초하루’라는 단어를 검색해봤습니다. 그랬더니 민수기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10:10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와~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이런 말씀을 들이대면서 초하루를 지켜야 한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데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 가운데 이런 율법을 제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더라고 모세의 법은 지켜야 한다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판단’이라는 단어는 원래 ‘분리’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κρίνω(크리노)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표현하자면, 먹고 마시는 것,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왕따시켰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초하루나 안식일’ 등을 들먹이면서 너희를 비판하거든, 즉 왕따 시키거든 그들에게 동조하거나 그들의 주장에 순응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제지하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골로새서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초하루나 안식일, 이런 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는 허상입니다. 그림자를 잡아야 헛수고입니다. 그러면 실체는 무엇입니까?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일반적으로는 ‘몸’을 구약 율법들의 실체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초하루나 안식일 등이 진짜 의미하는 것, 실체가 뭐냐? 바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라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헬라어 원어를 보게 되었는데요.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헬라어는 σῶμα Χριστός(소마 크리스토스)입니다. σῶμα Χριστοῦ(소마 크리스투)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정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몸’은 그림자의 실체를 의미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말합니다. 구약성경, 즉 모세의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613개의 율법 조항들의 실체는 ‘ἐκκλησία(에클레시아, 교회)’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교회는 율법의 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실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율법을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 율법 아래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율법 자체를 간직하고 있는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는 우월한 것입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바로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율법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교회는, 우리 성도들은 율법 그 자체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종교생활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골로새서 2:18을 보시겠습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당시 골로새 교회가 있던 지역은 그리스 헬라 문화권에 속해 있던 곳입니다. 그렇다보니 유대인 뿐만 아니라 그 지역 토착문화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 하면 신화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신화가 뿌리 깊이 사람들 인식 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세상은 신들의 왕국입니다. 신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어찌보면 사람은 신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놀아나는 듯한 꼭두각시 같은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태초의 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혼돈의 신’ 카오스입니다. 그리고 가이아라는 ‘대지의 신’과 가이아가 스스로 낳은 자식인 ‘하늘의 신’ 우라노스에게서 ‘농경의 신’ 크로노스가 태어납니다. 크로노스는 또 ‘풍요의 신’ 레아에게서 ‘하늘의 신’ 제우스를 낳습니다. 제우스의 자식들 가운데 ‘태양의 신’ 아폴론과 ‘달의 신’ 아르테미스가 있는데, 이들이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는 제우스, 헤르메스가 나오는데,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전령입니다. 그리고 19장에서는 아데미라는 신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아데미’가 헬라어 원어로는 ‘Ἄρτεμις(아르테미스)’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세상을 다섯 시대로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세계를 지배하던 태초의 시대로 ‘황금의 시대’라고 일컫습니다. 그 다음은 올림포스의 신들이 지배하던 시대로 ‘은의 시대’가 이어지고, 다음으로 인간들이 청동을 쓰고 폭력을 사용한 ‘청동의 시대’, 이어서 신들의 피를 가진 인간인 영웅들이 활약한 ‘영웅의 시대’, 마지막으로 고대 그리스를 ‘철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에서 시작된 올림픽의 메달종류가 금, 은, 동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화와 성경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신화는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리스’하면 신전으로 유명합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봐도 그리스 신전만큼 화려하고 멋진 건물들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는 종교생활이 아주 일상인 곳이었습니다. 골로새성도들은 이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종교생활은 익숙했습니다.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도 그동안 익숙했던 그들의 종교생활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의적인 겸손과 천사 숭배였었나 봅니다. 자의적인 겸손이란, 자기 스스로는 낮추는 행위로서 모든 종교에서 보여주는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의적 겸손은 신 앞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고 스스로를 보잘것 없는 존재로 인식하며 또 그렇게 자신을 다루는 것입니다. 여기로부터 고행, 자해 등 금욕적인 삶이 나타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자의적인 겸손을 통해 주님 앞에 서고자 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셨던 골고다 언덕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고행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천사 숭배는 자의적 겸손과의 연장선 상에 놓여있는 행위인데, 자신이 어떻게 신 앞에 나갈 수 있는가, 그러니 중간자가 필요하고 그 역할을 천사가 하니 천사를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간자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천사 숭배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로마카톨릭은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 등을 중간자로 제시합니다. 개신교에서는 목사를 중간자처럼 생각하고,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찟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직접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번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이제는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들어가는 지성소는 하늘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실체입니다.
골로새서 2:20,22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이제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결론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도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 말입니다. 유일한 길은 바로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20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바울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죽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당시 골로새 성도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다시한번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죽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죽었을 때, 종들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주인이 살면 종들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들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들도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이 사실, 이 진리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오늘의 본문인 3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지난 주에 나누어졌어야 했는데, 성도님들과의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말씀교제를 중간에 그만 멈추어야만 했습니다만... 앞으로는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강단에서 말씀을 나누는 분들이 준비한 모든 것을 충분히 나눌 수 있도록 성도님들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제가 나눌 본문이 3장이었는데 지금까지 2장을 다루었습니다. 언제 3장을 하려고 저럴까 의아해하실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강조 또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중요한 주제를 설교시간 때문에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3장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완전한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전제 하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대답을 안 하신 분들은 죽어서 말을 못하시는 거죠? 그럼 대답하신 분들은 아직 살아계신 건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이 본문은 수동태 가정법 과거형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박현옥 자매님께서 자주 쓰시는 전매특허, (자매님, 한번 시원하게 외쳐주시죠. 맞습니다.)‘개뿔’입니다.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했다면 그냥 있는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 살아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명백히, 아주 확실하게 ‘우리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2,3장에서 줄기차게 강조해온 것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우리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본문을 잘 눈여겨 보십시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냥 허투루 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절 한절, 한 단어 한 단어, 따져보면서 읽어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소설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잡지가 아닙니다. 한번 그냥 읽고 지나가도 되는 그런 류의 싸구려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러면 다시 살리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위’는 ‘하늘’,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저 세상’입니다. ‘땅’은 반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거기, 즉 위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지금 바로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죽기 직전 보았고, 사도 바울도 셋째 하늘에 갔을 때 보았을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자신들의 복음서에서 시편 110:1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사실을 모두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동일한 말씀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히브리서 기자도, 베드로 역시 자신의 서신에서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으실 유일하신 아들로서 상속자로 확정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 모든 것을 우리들과 함께 나누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과 공동 상속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3,4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바울은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너희가 죽었다.’ 그러나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 너희들도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 3:5~10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오래 전에 우리는 에베소서 말씀을 나누면서 이 말씀과 아주 유사한 말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사람’과 ‘새 사람’
‘벗어 버리다’와 ‘입다’
뭔가 같으면서도 다른 것 같고, 또 같으면서도 다른 것 같은 이 단어들, 에베소서에서는 명령형으로 쓰였고, 골로새서에서는 현재 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는 ‘아직’이지만, 골로새서는 ‘이미’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에베소서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행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인의 본질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가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골로새서는 속사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2~17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위의 것을 찾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또 어떤 설명을 가한다는 것은 사족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옛 사람: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
새 사람: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사랑, 평강, 감사, 가르침, 권면, 찬양
이상으로 말씀교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