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운요호 사건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이번 시간에는 운요호 사건의 결과와 강화도조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운요호 사건 이후의 전개
한국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9월 29일에서 10월 8일 사이에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먼저 읽어보고 조작에 대한 자문을 한 것은 외교관인 모리야마 시게루와 이토 히로부미로 추정됩니다. 일본은 부산에 3척의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했지요. 이어서 서기 1876년 2월에는 강화도로 운요호를 포함한 7척의 함선을 보내 조선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묻게 했습니다.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조선은 근대적 조약이라는 미명 하에 불평등 조약을 강제로 체결할 상황에 몰렸습니다.
②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일본의 막무가내 행동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도움을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제 코가 석자였던 청나라는 조선에게 일본과 외교적으로 운요호 사건을 해결할 것을 잘 설득하고 달래어 권했지요. 결국 일본은 서기 1876년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 외교 대표와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개항시켰습니다(강화도 조약).
그것도 자신들이 미국에게 쿠로후네(흑선) 사건 때 당했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서 거의 똑같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끔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조선의 멸망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이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은 이른바 조선-대한제국 멸망사를 배울 때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로 꼽힙니다.
본래 국제 조약은 기본적으로 상호간에 이익이 되도록 체결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지만, 강화도 조약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지요. 조약 자체가 일본에게 조선 연해의 측량권, 무관세, 일본인의 불체포 특권 등을 주어 조선의 자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된 점을 간과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서기 19세기의 제국주의 시대라고 해도요.
일본은 운요호 사건에서 강화도 조약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본 내부의 문제도 일정부분 해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본은 이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을 개항시킴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을 위한 배후 시장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지요. 물론 조선의 시장은 결코 큰 것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낮춰 잡아도 없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습니다.
③ 운요호 사건 패전의 원인
한국사를 볼 때 의문스러운 지점은 왜 조선은 이보다 더 규모도 크고 무장도 잘 된 프랑스 해군(군함 7척을 동원했습니다)과 미 해군(3천 톤짜리 기함이 동원되었지요)을 상대로 잘 싸웠는데 왜 일본 해군의 운요호 한 척(250톤 슬루프(범선). 참고로 판옥선이 약 200톤이라고 합니다.)에게 허무하게 당했을까 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지요. 물론 프랑스와 미국에게 조선이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다지만 공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는데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말하자면 조선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미양요는 역사책에 흔히 “강화도의 5개 요새를 함락당했다.” 정도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엄청나게 큰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지요. 그나마 프랑스는 당시 서기 1862년에 베트남 정복의 첫 단추인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를 점령하고 서기 1864년 이래로 멕시코 제2제국을 거드느라 미국에 비해 조선에 전력 집중을 못한 탓도 있습니다만.
여하간 신미양요 때 빼앗긴 대포가 적지 않아 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대포라고 할 수 있는 불랑기포를 대략 500문 가량, 총기(볼트 액션이 아닌 화승총)는 무려 2만정 가까이 빼앗기고 잃었다는 것이 뼈아팠지요. 심지어 미군은 후퇴하면서 이것들을 물에 빠트리거나 불에 태웠습니다. 나름 당연한 것이 볼트 액션 기종을 쓰는 미군이 구닥다리 화승총을 쓸 리가 만무했지요. 그랬기 때문에 당연히 녹슬거나 녹아버린 대포들은 그대로 폐기처리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손실을 고작 4년 만에 복구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무리였습니다. 조선이 산업혁명으로 자동형(!) 공장을 보유했던 나라도 아니었으니 회복도 더뎠고요. 그렇다고 조선이 아주 방비 강화에 손을 놓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방비는 철저하게 두 양요로 초토화된 강화도의 방비 복구에 집중되어 있었지요.
운요호는 탑재한 암스트롱 포로 초지진과 포격전을 펼쳐 제압하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외에는 강화도에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하지 않았지요. 일본의 전력이 조선보다 앞서있다 한들 전면적인 군사 활동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운요호라는 자그마한 배 한 척과 소수 병력으로 조선에서 집중적으로 복구에 주력한 강화도를 전면적으로 치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전력 및 장비가 차출된 강화도를 전면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영종도를 강습해 공격하고 무력시위로 조선을 압박한 것이었지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었지만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국정의 난맥’으로 국력을 전부 소진한 상태였습니다. 모든 문제를 흥선대원군만의 실책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지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는 전란에서 회복되기도 전에 운요호가 와서 툭 친 것에 허무하게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회복하는데 2백년 가까이 걸렸던 조선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귀결이었지요. 물론 이 시점에서 이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뺨치는 여흥 민씨의 세도가 시작된 것은 조선으로서 크나큰 불행이었습니다.
조선이 근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군사 기술 격차를 고려하더라도 당시 조선군의 방비 태새가 너무 빈약했다는 점입니다. 조선 정부 차원에서 강화도 일대의 무장을 강화한다고 한 것이 고작 250톤 전투함과 수십 명의 수병에게 탈탈 털릴 수준에 불과했지요. 게다가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이후에도 명성황후 민씨는 궁궐에서 거듭 굿판을 벌이느라 많은 국세를 낭비했습니다. 뮤지컬을 기억하는 현대 한국인들은 떠올리기 어려운 황후의 실체였지요.
민씨 외척 세력은 국세를 착복하는데 혈안이 되어 국가 재정을 더욱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세금이 부족하더라도 국가의 존망이 달린 국방은 격동의 시대에서 다른 사안보다 높은 우선 순위를 가져야 했지요. 운요호 사건이 이후 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진 과정을 잘 알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당시 조선의 빈약한 안보 의식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종과 민씨 정권은 특히 중앙군 병력에게 갈 월급마저 착복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세도정치시기보다 퇴보된 모습이었지요. 그 세도가 정권조차 군부를 정권의 기반으로 활용했습니다. 간교한 고려 실권자 최우나 안동 김씨보다 못한 원균과 김경징, (총체적으로 본다면) 그 원균과 김경징보다 못한 민씨 세도 정권이었지요. 다음 글에서는 강화성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