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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삼성산 성지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가 1843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묏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 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 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 교구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 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했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11년 6월 27일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43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다. 1970년 5월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동(현 서원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삼성산 본당은 성지 녹화사업을 추진하고 매주일 성지에서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01년 11월 성지에 설치된 성모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해 다음해 3월에 새로운 성모상을 봉헌했고, 2001년 12월에는 성지 입구에 건립된 삼성산 성령수녀회 본원과 청소년 수련관 및 피정의 집 축복식을 가졌다. 2012년 10월 12일에는 삼성산 본당 설립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성지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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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성산 성지
(서울시 관악구 호암로 545)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한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鄭)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사흘 동안 이들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그 동안 교우들이 그들의 시신을 찾아오기 위해 노력하다가 몇 명이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20여일 만에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몇몇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해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인 1943년 당시 유해를 훔쳐 낸 교우들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에 세 성직자의 시체를 다시 옮겨 모시고, 후에 그 사실을 어린 아들 박순집(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3. 앵베르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 약전
1) 나 베드로(모방 베드로) (羅 Peter(Maubant Peter))
활동연도 1803-1839년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 바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그는 “세상 끝까지 가서 우상을 섬기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비르(Vire) 고등학교와 바이외(Bayeux)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29년 5월 13일 사제품을 받았다. 보좌신부로 사목하면서 동양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서한을 읽고 선교사가 될 결심을 굳힌 그는 1831년 11월 18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마카오로 출발했고, 마카오에서 중국 사천(四川) 교구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선교지인 사천으로 가는 도중 조선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1833년 3월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경건함과 열정적인 면을 좋게 보아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복건성(福建省)과 북경(北京) 등을 거쳐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서 1년간 머무르며 한문과 중국 문화를 공부하였다. 1835년 10월 20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내몽골에서 선종한 후 그 소식을 들은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즉시 서만자를 떠나 11월 17일쯤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 도착했다. 이미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그는 주교의 장례를 치른 다음 즉시 마가자를 떠나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국경에 와 있던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조선 입국을 결정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 성문을 비밀리에 통과해 천신만고 끝에 입국에 성공했는데, 이때가 1836년 1월 13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가 되었다.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글을 써서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는 서울에서 시작해 다음으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 16~17개를 방문해 세례를 주고 여러 성사를 집전하였다. 1836년 12월까지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회장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아 공동으로 기도하고 교리문답과 그날의 복음 성경과 성인 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崔方濟, Franciscus Xaverius),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 등 세 명의 소년을 선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 상황에서 조선 내에서의 신학생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3일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1837년 1월 성 샤스탕 야고보(Chastan Jacobus) 신부가 무사히 조선에 입국하자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그를 맞이한 뒤 곧바로 경기도 양근(楊根) 땅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며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해 부활 대축일을 양근에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보낸 그는 남쪽 지방으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북쪽 지방으로 가서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지나친 활동으로 몸이 쇠약해진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1837년 7월 심한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는 상태가 심각해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에게 종부(병자)성사까지 받았는데, 그 후 차츰 열이 떨어져 3개월 뒤에 건강을 회복하였다. 1837년 12월 말에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aurentius) 주교까지 조선에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는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839년 기해년이 시작되면서 조정은 다시금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배교자의 밀고로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기해박해가 본격화하자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고, 주교의 명으로 충청도 홍주(洪州) 교우촌으로 숨어들었던 성 모방 베드로 신부 또한 자수를 권유하는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라도의 한 교우촌으로 피신했다가 자수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까지 서울로 압송되면서 세 선교사는 비로소 포도청 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하였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포졸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 쪽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문을 읽고 칼을 들어 처형하였다. 성 모방 베드로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그리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두 선교사의 시신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20일 뒤 죽음을 각오한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843년 삼성산(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01년 10월 21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고, 그해 11월 2일 명동대성당에 안치했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2)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라우렌시오)(9.20) 기본정보
활동연도 1796-1839년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시오(Laurentius)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조차 없었는데,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알파벳을 배우고 카브리에 본당 신부의 도움을 받아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공부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열심이었다. 틈틈이 묵주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며 연로한 아버지의 생활도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었다.
이렇듯 어려운 시절을 꿋꿋하게 견뎌낸 그는 1812년 엑스 교구의 대신학교에 진학해 사제의 길을 준비했다. 대신학교 때부터 그는 선교사가 되어 동방의 선교 지방으로 가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18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신부는 10여 년간 사천 대목구에서 선교 사제로 활동했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 4월 조선의 제1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실제로 그 이듬해에 임명 소식과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1835년 10월) 소식을 들은 그는 1837년 5월 14일 사천 대목구장 퐁타나 주교에 의해 제2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성성되었다. 그리고 사천을 떠나 10월경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했고, 다시 북경과 산해관을 경유해서 12월에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조선 사신단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와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Carolus) 등을 만나 그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일행은 1837년 12월 31일 서울에 도착했는데, 이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는 조선 교회가 창설된 지 53년 만의 일이었다. 불과 3개월 정도 조선말을 배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말로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고, 어려운 한자를 잘 모르는 신자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1838년경에는 우리말 기도서를 완성했다. 그는 또한 이미 조선에 와 있던 성 모방 베드로(Manbant Petrus) 신부와 성 샤스탕 야고보(Chastan Jacobus)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며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환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무를 수행해 1년 남짓한 활동 기간 중에 수천 명의 신자가 증가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그는 허약하고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매우 바쁜 사목활동을 전개하며 그 안에서 최고의 행복을 찾았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박해가 본격화되기 전에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돌아갔고, 배교자의 밀고로 주교의 거처와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를 유인하려 했으나, 그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다른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1839년 8월 11일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른 두 명의 신부들도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 선교사는 포도청 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여러 번의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당하면서 두 신부와 함께 모든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하였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의 새남터로 결정되었다.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포졸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 쪽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문을 읽고 칼을 들어 처형하였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두 신부는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의 나이는 43세였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두 신부의 시신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20일 뒤 죽음을 각오한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843년 삼성산(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01년 10월 21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고, 그해 11월 2일 명동대성당에 안치했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한국에서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 목록에서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동료들의 순교에 대해 기록하였다.
3) 정 야고보(샤스탕 야고보)(9.20) 기본정보
활동연도 1803-1839년
성 자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신부의 한국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본명인 야고보(Jacob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아각백(牙各伯)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10월 7일 프랑스 디뉴(Digne) 인근에 있는 마르쿠(Marcoux)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앙과 공부에 열성적이었던 그는 1823년 디뉴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3년 만인 1826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고 해외 선교를 자원하여 이듬해 1월 13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선교사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1827년 5월 동양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료와 함께 보르도(Bordeaux) 항구에서 프랑스를 떠나 그해 말에 코친차이나(지금의 남부 베트남)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9개월 뒤에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도착했고, 다시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 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마카오에 머물 때 조선 포교지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 선교를 자원했으나 바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페낭에서 5년 정도 교수로 활동해야 했다.
1832년 7월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다시 한번 조선 선교를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833년 5월 페낭을 떠나 마카오에 도착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11월에 복건(福建)에서 얼마 전에 조선 선교를 자원한 성 모방 베드로(Maubant Petrus) 신부를 만난 뒤 요동을 거쳐 만주에 도착해 조선 국경까지 갔으나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만나지 못해 입국하지 못했다. 그래서 1834년 8월부터 약 2년 동안 산동(山東) 지방에 머물며 중국인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지내다가 1836년 초에 조선에 입국한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산동을 떠나 그해 12월 말에 책문(柵門)에서 조선 신학생들을 데리고 온 조선 교회의 밀사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 ·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Carolus) · 성 이광렬 요한(李光烈, Joannes) 등을 만나 그들의 안내로 1837년 1월 1일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어렵게 조선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가 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감격하여 “나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의 구원과 특히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할 것이므로 어떤 일이라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님께 기대합니다.”라고 벅찬 기쁨을 토로했다. 상복 차림을 하고 15일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성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 머무르다가 성 권득인 베드로(權得仁, Petrus) 회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조선말을 배웠다. 그는 2개월 정도 고해성사를 위한 “성찰규식”(省察規式)을 외워 조선말로 신자들에게 첫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부활 대축일을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함께 지내며 선교 의지와 각오를 새롭게 하고,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조선의 남쪽 지방을 맡는 대신 그는 북쪽 지방을 맡아 사목하기로 했다. 이들의 활발한 노력으로 조선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1837년 7월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심한 열병에 걸린 성 모방 베드로 신부를 위해 서울로 돌아왔고, 그에게 병자성사를 주었다. 다행히 3개월 뒤에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건강을 회복했고, 그때부터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남쪽 지방 교우촌을 순회하며 성사를 주고 회장을 임명하는 등 선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해 말에 제2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aurentius) 주교가 조선에 입국했고, 이듬해 5월에야 비로소 서울로 와서 주교를 만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다시 남쪽 지방으로 가서 전교에 힘썼다. 이렇게 한 명의 주교와 두 명의 선교 사제가 활발히 활동하면서 1836년 초에 6천여 명 미만이던 조선의 신자수가 1838년 말에는 9천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839년 기해년이 시작되면서 조정은 다시금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배교자의 밀고로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기해박해가 본격화하자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자수를 결심했고, 주교의 명에 따라 두 선교사 신부는 일단 충청도의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홍주(洪州) 교우촌에서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헤어져 전라도의 한 교우촌으로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신자들을 위해 자수를 권유하는 주교의 편지를 받고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함께 포교에게 자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 선교사는 비로소 포도청 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하였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포졸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 쪽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문을 읽고 칼을 들어 처형하였다. 성 샤스탕 야고보와 성 모방 베드로 신부 그리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의 나이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같은 35세였다.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와 두 선교사의 시신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20일 뒤 죽음을 각오한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843년 삼성산(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01년 10월 21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고, 그해 11월 2일 명동대성당에 안치했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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