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의_벽
페루의 수도 '리마'에는 산등성이를 따라 높이 3m, 군사시설을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철조망까지 붙어 있는 10km에 이르는 독특한 콘크리는 장벽이 있다.
Muro de la verguenza(무로 데 라 베르겐사)라 불리는 이 장벽은 3년 전, 부자마을 주민들이 빈민촌 주민들의 출입을 막아 안전(?)을 확보하고자 쌓기 시작했다는데, 빈부격차와 사회경제적 차별로 몸살을 앓고 있는 페루의 오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벽을 따라 한쪽은 물도, 가스도,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무허가 판잣집이, 다른 한쪽에는 수영장이 딸린 수십억 원 넘는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일거리가 많은 부촌 '라 몰리나'를 걸어서 다닐 수 있었지만, 장벽이 막히면서 버스를 3번 이상 갈아타야 하고 일당의 1/4을 교통비로 써야 한다. 경제생활을 위한 이동권마저 제한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난도 가난이지만, 장벽 때문에 더 큰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수치의 벽'이라고 부른다. 페루는 상위 10%가 전체소득의 61.2%를 차지하는 반면, 하위 50%가 전체 소득의 5.7%에 불과하는 등 빈부격차가 극심하다. <세계 소득불평등 데이터, 2021>
그런데 우리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일까?
우리 또한 별다르지 않다. 상위 10%가 절반에 가까운 46.5%의 소득을 차지하는 반면, 나머지 절반(53.5%)을 하위 90%가 나눠 갖는다. 부동산만 놓고 보면 페루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전 국토의 55%를 상위 1%가, 상위 10%가 97.6%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통계청 2020>
그런데 지난 27일 정부는 혼인신고 전후 각 2년간 부모로부터 받은 결혼자금에 대해 증여세를 공제하는 '저출생 혼인촉진 세법개정안'을 내놓았다. 현행 증여세법은 최저 10%에서 최고 50%까지 5단계 초과누진세율 구조인데, 결과적으로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도 시원찮을 판에 1쌍 당, 최소 3천만 원 이상 세금을 깎아줄 심사다.
그러나 자녀에게 결혼자금 3억 원을 선뜻 건넬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부의 편중과 대물림을 가중시키는 해괴한 정책은 혜택이 일부 고소득계층에 집중될 수밖에 없고 ‘부의 재분배’라는 조세정책의 핵심 기능에도 역행한다. 마땅히 철회되어야 할 테지만, 페루의 '수치의 벽' 만큼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수치의 벽' 또한 매우 견고하다.
미국에선 '어플루엔자(affluenza)'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부유하다는 '어플루언트(affluent)'와 바이러스 '인플루엔자(influenza)'를 합친 말이다. 일명 '부자병'이라고도 한다. 돈이 너무 많은 환경에 있어 공감 능력은 물론,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어플루엔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끊임없이 '수치의 벽'을 쌓아 올린다. 하지만 '빈부격차' "사회적 불평등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닌, 부자들에게도 전염되는, '사회적 질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