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대:1887 ~ 1959
◎ Villa-Lobos Heitor (빌라 로보스, 이에토르)
브라질은 커피의 나라, 축구 황제 펠레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브라질 음악하면 삼바 축제가 생각난다. 그러나 브라질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브라질의 민속음악, 대중음악, 예술음악을 온몸으로 감싸안음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민족음악을 실현한 사람, 바로 빌라 로보스다. 그는 '브라질풍의 바하'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빌라 로보스는 1887년 3월 4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아마추어 첼리스트였으며, 브라질 국립도서관의 공무원이었다. 브라질의 역사와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가족들은 빌라 로보스를 '부후'라는 애칭으로도 불렀다. 빌라 로보스의 어린 시절에 그의 집에는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음악회가 열렸다. 오후 6시에 저녁 식사가 끝나면 빌라 로보스의 아버지는 독일인 친구와 체스를 한판 둔다. 8시가 되면 음악가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곤 했다. 이들 연주 그룹은 통상적인 실내 앙상블과는 달리 제법 큰 규모의 작품도 연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년 부후의 어린시절 인상깊었던 일 중의 하나는 거리에서 떠돌이 악사들의 연주를 듣는 것이었다. 이들이 연주하는 세레나데는 그에게 도회풍의 대중음악에 대한 첫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평소 정의감에 불타던 그의 부친이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공직자의 비리를 고발하는 글을 게재한 후, 빌라 로보스 일가는 미나스 게라이스로 추방당했다. 여기서 소년 빌라 로보스는 농촌의 민속음악을 처음으로 접했다. 브라질의 민속음악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는 몇년 후 브라질 전역을 샅샅이 다니면서 음악을 수집했다.
여섯 살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특별히 개량하여 만든 비올라를 가지고 첼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서 그는 이 악기를 가지고 민요나 당시 유행하던 춤곡에 기초한 즉흥연주를 할 수 있었다. 11살때는 아버지의 소개로 클라리넷도 배웠다. 소년 빌라 로보스는 아버지를 따라 민속음악과 대중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의 본거지였던 알베르토의 집에서 음악을 듣기도 했다.
1899년 소년 빌라 로보스는 최초의 스승이었던 아버지 라울을 여의게 된다. 미망인 도나 노에미아는 병원에서 일하면서 가족들을 돌보았다. 어머니를 돕고 싶은 생각과 음악을 계속해야겠다는 결심사이에서 방황하던 빌라 로보스는 결국 집을 뛰쳐나와 고모 지진하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모는 바하의 평균율 곡집을 즐겨 연주했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으며 조카인 빌라 로보스가 민속 악사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해 별로 간섭하지 않았다. 10대 소년에게 리오 데 자네이로는 매우 풍부한 음악적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그는 커피 하우스, 술집 등을 돌아 다니면서 민속음악과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즉흥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도시에 매력을 상실한 바 아니었지만, 브라질의 음악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충동 때문에 브라질 전역을 여행하게 된다. 18세때 그는 부친이 어렵사리 유산으로 물려 준 희귀본 도서를 팔아서 북부 브라질 여행을 떠난다. 그는 떠돌이 악사처럼 각 지방의 음악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즉흥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곤 했다. 그가 쓴 기타 음악과 노래는 이때부터 작곡된 것이다.
20세때 그는 브라질 남부 지방을 여행하지만 이곳에서는 민속음악의 자원이 풍부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리오 데 자네이로로 돌아와서는 브라질 국립음악원에 프레데리코 나스치멘토의 화성법 클래스에 등록했다. 그는 여기서 첼로를 배우면서 아그넬로 프랑사에게 불어를 가르쳐 주는 대신 그에게 화성법을 배웠다. 빌나 로보스는 어렸을 때부터 불어에 매우 능통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그는 음악원을 박차고 나왔다. 브라질 민족음악 운동의 제1세대들이 유럽에서 음악을 공부했던 것과는 달리, 빌라 로보스를 포함한 제2세대들이 본토에서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퍽 흥미롭다. 그는 종종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해 왔다. "내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몸서리를 치면서 그것을 뛰어 넘었다"
음악원을 중퇴한 그는 바이아를 포함한 브라질 북부지방, 심지어는 이웃 나라도 여행하게 된다. 아르헨티나 여행 중에는 부잣집으로부터 청혼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과감히 뿌리치고 전국 순례 대행진을 계속했다. 이 대목에서 뤼베크에 갔다가 북스테후데의 딸과 결혼하면 그의 후임자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간 바하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난다. 그는 이 여행 도중 일천개가 넘는 민요 선율을 채보했다.
1910년 빌라 로보스는 리오 데 자네이로에 정착하여 55개의 작품을 썼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거의가 민요 선율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물론 이 당시 그는 첼리스트로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1915년 11월 13일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는 세인의 주목을 끄는 음악회가 열렸다. 모두 빌라 로보스의 작품으로만 프로그램이 꾸며진 음악회, 말하자면 빌라 로보스의 첫 작품 발표회였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적 소나타 제2번, 가곡,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소품, 피아노 독주를 위한 소품 등이 연주되었다. 아내인 루칠리아 구이마레스가 피아노 반주를 맡아 주었다.
1915년부터 약 5년간 그는 토속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교향시와 발레 음악을 작곡했다. 1917년에 작곡된 교향시 '위라푸루'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인디오들을 숲으로 불러 들였던 전설상의 새를 소재로 한 것이다. 당시 빌라 로보스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접한 적이 없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당시 스트라빈스키의 어법과 유사한 분위기가 이 작품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곡에서는 복잡한 텍스추어와 불협화적인 화음이 사용되고 민속 악기가 관현악 편성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분노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결국 이곡은 당시 음악계에 일대 논란의 불씨를 가져왔다. 특히 평론가 오스카 귀아나바리노의 저항은 매우 거세어 이들 두 사람은 오스카가 193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으르렁대면서 싸웠다. 평론가나 청중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난해한 작품을 연주할 수 없다 하여 반발했다.
1917년과 1918년 사이에 빌라 로보스는 음악가로서의 일생에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가 당시 유럽 음악계의 거목이었던 다리우스 미요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요는 1917년 브라질 주재 프랑스 대사를 따라 비서관으로 오게 되었고, 루빈스타인 은 이듬해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미요와 함께 영화 구경을 나섰던 루빈스타인은 극장에서 연주되는 생소한 음악에 흥미를 느꼈다. 작곡가를 만나 축하 인사를 전하려 하자 빌라 로보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명연주자이지만 내 작품을 이해할 수는 없을 거요!" 이튿날 빌라 로보스는 어제 저녁의 무례함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면서 함께 데리고 간 친구들과 함께 루빈스타인을 위해 음악을 연주해 주었다. 이때부터 루빈스타인과 빌라 로보스는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41년 넬슨 록펠러의 요청을 받고 루빈스타인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칸디도 포르니타리의 작품이 전시되는 동안 빌라 로보스 작품만으로 꾸며진 독주회를 가졌다. 빌라 로보스는 이 거장 피아니스트를 위해 여러 작품을 편곡해 주었다. 같은 해 그는 브라질 국립 음악원에서 그의 관현악곡이 연주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것은 독학으로 매진한 빌라 로보스를 음악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피아노를 위한 그의 첫 작품인 '아기 인형' 모음곡(1918)은 1922년 7월 5일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로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초연되었다. 루빈스타인은 이곡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주회 레퍼토리에 포함시킴으로써 이 모음곡, 그중에서도 특히 '땅달이 곱추인형'은 20세기 피아노 음악 문헌에서 최고 걸작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기 인형'(Prole do Bebe, 1918) 은 슈만, 드뷔시 등이 이미 작곡한바 있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의 범주에 속하는데, 여기서 어린이는 개발 도상국으로서의 브라질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부모'는 브라질 남부 해안에 위치한 대도시, '어린이'는 식민지 국가를, '그 아이들 또는 인형들'은 식민지, 즉 브라질의 국민들을 가리킨다. 이 작품은 모두 8곡으로 되어 있다.
-백색자기 인형(Brquinha): 비인 왈츠를 연상시키는 선율 주제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상류층 여성들에게 잘 어울리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나타낸다. 이곡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럽의 백인종, 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강대국을 가리킨다.
-암갈색 마분지 인형(Moreninha): 아랍 영향을 받은 지중해 근처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을 가리킨다. 이 인구 집단은 브라질 건국 초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흑색 나무 인형(Mulatinha): 이 곡에서는 흑인 음악의 요소가 브라질 민속음악에 미친 영향이 그리 강하게 부각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는 흑인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이라기 보다는 동정심의 표현에 그치고 있다.
-누더기 거지 인형(A Pobresinha): 매우 향수적이고 슬픈 분위기 곡으로 인간의 슬픈 운명을 생각나게 한다. 가난과 고독, 소외를 맛보고 있는 대도시 빈민층과 하층 계급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주로 북 동부 농촌 지역에서 대도시로 이주해 온 결과로 하루 아침에 거지나 날품팔이꾼으로 전락한 사람들이며, 경제적, 사회적 억압과 수탈로 브라질에서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소외 집단이다.
-땅딸이 곱추 인형(0 Polichinels): 스케르초 형식의 쾌활한 곡이지만 슬픈 '광대'의 운명을 느끼게 한다. 곱추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지만, 자신은 언제나 슬프다. 여기서 작곡자는 자신을 포함한 브라질의 예술가 집단을 묘사하고 있다.
-마녀 인형(Bruya): 브라질 내부의 갈등과 긴장을 해소시키는 주변 집단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이 곡은 현실 참여에 소극적인 브라질의 토속 종교나 카톨릭 사제들을 묘사하고 있다.
1922년 '현대 예술 주간' 행사가 끝난 후 빌라 로보스는 일생 중에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유럽 여행 초청을 받아 들여 1923년 6월 30일 드디어 파리행 프랑스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앞서 파리에 와있던 다리우스 미요의 소개로 많은 작곡가들을 만났고 프랑스에서 작품 발표의 기회도 가졌다. 카를로스와 아르날도 등 브라질에 있는 후원자들의 재정적인 도움과 출판업자 막스 에시크의 적극적인 주선에 힘입어 작품 발표회가 여러 번 있었다.
빌라 로보스의 파리 데뷔 연주회는 1924년 5월 3일에 있었다. 현악 4중주, "아이러닉하고 센티멘탈한 짧은 귀절"(Epigramas Ironicos e Sentimentais), 그리고 루빈스타인이 연주한 '아기 인형'모음곡 중 제 1번 등으로 꾸며졌다. 특히 신작인 '9중주'(Noneto)는 극단적인 불협화를 사용함으로써 보수파와 모더니스트들 사이에 논쟁의 불씨를 던졌다. 청중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이 9중주는 플루트, 오보, 클라리넷, 색소폰, 바순, 첼레스타, 피아노, 타악기, 혼성 합창을 위한 것인데 타악기에는 코코스, 레코레코, 쿠이카 등 브라질의 민속악기도 포함되었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그는 가장 현대적인 기법으로 '브라질의 영혼'(Alma brasileira)이라는 부제를 단 '코로'(Choro)제5번을 작곡했다. 한편 같은 시기에 현대 피아노 음악 문헌 중 가장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루데포에마'(Rudepoema), 브라질 민요에 바탕을 둔 '치란다스' 등의 피아노 작품을 남겼다. '루데포에마'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되었고, 작품 내용도 이 거장 피아니스의 모습을 담는 것이었다. 한편 '치란다스'는 이 당시 브라질의 민족 음악 운동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같은 해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바그너 협회로부터 세 차례에 걸친 관현악곡 발표회를 갖도록 초청을 받았다. 이 연주회의 대성공은 이듬해 10월 24일과 11월 5일 파리 연주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청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실내악 작품 발표를 해달라거나 관현악곡을 직접 지휘해 달라는 초청이 런던, 암스텔담, 비인, 베를린, 브뤼셀, 바르셀로나, 리스본등지에서 쇄도했다. 1930년 잠시 다녀올 생각으로 귀국길에 올랐던 그는 상당히 오랜 동안 유럽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브라질로 돌아 온 그는 브라질의 공립 학교에서 음악 교육의 수준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음을 깨닫고 극도의 실망감을 느끼고 드디어 상 파울로 주정부의 교육 장관에게 음악 교육의 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빌라 로보스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고 공립 학교에서 형편없는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술음악은 자라나는 브라질의 청소년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음악교육의 개혁을 부르짖던 그는 주정부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시 유럽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짐을 다 꾸렸을 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부 관리로부터 캄포스 엘리제오 궁에 나와서 음악교육 개혁안을 설명해 달라는 전갈이 온 것이다. 그후 몇년간 빌라 로보스는 상파울로와 리오데자네이로의 음악교육 커리큘럼의 개혁 작업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후 그는 상파울로, 미나스게라이스, 주라 리마 주에서 모두 54차례 의 순회 공연을 가졌다. 이 순회 연주회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 준'사람은 평론가 로드리후에스 바르보사, 작가 로날드 데 카르발호, 그리고 당시 브라질 최고 수준의 일급 연주자들이었다. 빌라 로보스 일행이 방문한 곳에는 음악회 일정이 축구 경기와 겹쳐 청중이 거의 없다시피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빌라 로보스는 가는 곳 마다 즉흥 연설을 통해 음악감상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반면에 스포츠는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브라질이 축구 강국이 되기까지에는 어렸을 때부터 동네 축구로 시작하여 온 국민이 축구광이 될 정도의 열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판국에 범국민적인 여가활동을 비난하는 빌라 로보스의 연설은 마치 성모 마리아를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연주자들이 토마토와 썩은 달걀로 뒤범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빌라 로보스가 평소에 주장했던 음악교육 개혁안이란, 브라질의 민요이나 국민 가요를 연주하는 대규모 합창단을 조직하여 악보 읽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빌라 로보스가 가르친 일군의 교사들로 합창단을 조직하여 맹연습을 한 결과 1932년 1만 8천명 규모의 매머드 합창단이 공연을 가졌다. 이것은 마치 프랑스 혁명 이후 기욤 윌랑에 의해 시작된 오르페온 운동과 흡사한 면이 있다.
아뭏든 1939년 9월 7일 브라질 독립기념일에는 3만명의 국민 학교 학생들이 빌라 로보스의 지휘로 합창을 연주했다. 1941년과 1942년에는 4만명의 어린이들이 1천명 규모의 브라스 밴드의 반주로 공연을 가졌다. 선율을 금방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빌라 로보스가 고안한 계명창법은 1936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국제 음악교육협회 주최 학술 대회에서도 선을 보인 바 있다. 여행 스케줄에 차질이 생겨 빌라 로보스 는 대회 마지막 날 프라하에 도착했다. 급하게 스케줄을 연기하여 빌라 로보스는 2성부 돌림노래를 가르치는 계명창법을 시범연주해 보였다.
빌라 로보스가 내린 결정이 한결 같이 호응을 받았던 것이 아니다. 지방마다 국가를 부르는 방식이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안 그는 브라질 국가의 정확한 연주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결정하기 전에는 국가 연주를 전면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빌라 로보스를 비롯하여 평론가 안드라데 무리치, 시인 올레가리오 마리아노 등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의 연구 결과 브라질 국가를 부르는 과정에서 무려 59개에 달하는 연주상의 오류가 통용되어 왔음이 밝혀졌고, 공식적인 국가의 악보를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빌라 로보스는 애국자가 아니라는 비난과 함께 자신이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는 속셈을 보이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저돌적이면서도 기상천외한 그의 성격은 작품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그래프 용지를 사용한 새로운 기보법을 창안해 내었다. 그는 우선 그래프 용지에 산과 풍경, 건물등을 구상해 놓고 이것을 악보로 옮겼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이런 방식으로 쓴 "뉴욕 스카이 라인의 선율"이라는 곡도 있다.
빌라 로보스는 브라질의 민속음악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치 바르톡이나 코다이가 헝가리 민속음악에 대해 했던 것처럼. 빌라 로보스는 어떠한 형태의 브라질 음악이라도 모두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음악을 작곡하는데 있어서 대해 매우 직관적인 감각을 중요시했다. 이것이 그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그가 전통적인 서구식의 음악 교육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과장이 섞인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다른 작곡가들의 영향을 거부한다고 선언했지만, 그는 뱅상 댕디가 쓴 '작곡법'(Cours de Composition musicale)을 열심히 공부했고, 바하, 바그너, 푸치니는 물론이고 드뷔시 등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곡가들의 악보를 섭렵했다. 19세기말 브라질은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후 프랑스와 정치, 문화적으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이러한 연대감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전까지 계속되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빌라 로보스는 10살때 부터 불어책을 읽었고 21세때든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빌라 로보스 생존 당시 브라질에는 수많은 음악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들 대부분은 빌라 로보스가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발전해 갔다. 그는 브라질 음악 아카데미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리오데자네이로에는 빌라 로보스의 절친한 친구인 아니시오 테이세이라가 음악예술 교육 자문위원회를 창설했다. 국립 오르페온 합창학교(Conservatcrio Nacional de Canto Orffonico)역시 빌라 로보스가 창설한 기관이다.
빌라 로보스의 작품 목록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은 빌라 로보스 박물관에서 발행한 목록이다. 이 목록만 해도 무려 331 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대충 장르별로 본다면 '브라질 풍의 바흐' 시리즈가 9곡. 브라스 밴드을 위한 음악 19곡, 코로스 연작이 16곡, 독주 악기를 위한 작품이 5곡, 협주곡이 22곡, 합창곡 105곡, 합창 편곡이 86곡, 실내악 43곡, 종교음악 51곡, 관현악곡 67곡, 성악곡 105곡, 오페라 7곡, 교향곡 12곡, 기타를 위한 음악 16곡, 바이올린곡 9곡, 첼로곡 18곡 등이다. 무려 3천곡에 달하는 작품을 썼다는 빌라 로보스. 같은 작품이 여러가지 매체로 발표된 것을 제외한다면, 리오데자네이로에 있는 빌라 로보스 박물관에는 7백곡 정도의 작품이 남아 있다.
1943년 그는 난생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뉴욕 대학으로부터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초청을 받아 1945년 2월 22일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자신의 작품을 미국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이때 프로그램은 코로 제12번, '루데포에마'의 관현악 편곡, 브라질 풍의 바흐 제7번으로 꾸며졌다. 1948년 7월 9일 그는 병세의 악화로 뉴욕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 덕분에 한동안 기력이 회복되는 듯하다가 결국 다시 병석에 드러 눕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여생을 투병 생활로 일관했다. 마지막 7년 동안 그는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객원 지휘를 맡았다. 말기 작품의 특징은 매우 간결한 소재를 즐겨 사용했다는 점이다. 1957년에 작곡된 현악4중주 제17번은 빌라 로보스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주 전인 1959년 10월 16일에 부다페스트 현악4중주단이 초연한 곡이다.
빌라 로보스는 1959년 11월 17일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48년 그는 마누엘 데 파야의 뒤를 이어 프랑스 예술원의 회원이 되었다. 1955년에는 독일 저작권 협회로부터 리하르트 시트라우스 메달을 수여받았다. 1957년 4월 3일자 뉴욕 타임즈는 빌라 로보스의 업적을 기리는 논설을 게재했다. 브라질 교육 문화부 장관은 탄생 70주년이 되는 1957년을 '빌라 로보스의 해'로 정하고 연주회, 세미나, 레코딩 등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벌였다. 빌라 로보스는 파리에 갈 때면 언제나 아르카드 17번지 베드포드 호텔에 묶었다. 이곳은 브라질 황제 페 드로 2세가 19세기말까지 살았던 곳 이기도 하다. 그는 브라질의 민족음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민족음악은 바로 나요"
-이장직(음악평론가)
[주요 작품목록]
피아노 음악:
브라질의 시
깨어진 뮤직 박스
어린이의 노래
브라질의 기상
뉴욕의 스카이 라인
세레나데 풍
쇼팽 예찬
고통의 왈츠
마술의 요람속에서
브라질 밀림의 향수
협주곡:
첼로 협주곡
기타 협주곡
기타 전주곡(전 5곡)
브라질 풍의 바흐
브라질 민요 조곡(1908~1912)
판타지아(섹서폰, 3개의 호른, 현악을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