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조선시대 고지도
백두산의 지명은 ⌜산해경⌟에 불함산(不咸山), ⌜후한서⌟ 동이전 개마산, ⌜위서⌟ 도태산과 태황산, ⌜당서⌟에 태백산 등으로 나타난다.
⌜금사⌟에는 장백산(長白山), 백산(白山)이라 하여 오늘날 중국에서 통칭하는 “장백산”의 유래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백두산 명칭은 고조선에서 불함산, 고구려에서 태백산, 고려에서 백두산, 백산으로 불리다가 조선 세종 연간부터 백두산, 장백산,백산으로 혼용되어 나타난다. 대체로 중국과 시대별로 같은 지명을 사용해 왔으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통칭하는 “백두산”은 고려시대부터 중국과 독자적으로 사용한 명칭이다.
고려시대 백두산에 대한 제사의 흔적은 1131년(고려 인종9) 묘청이 평양 임원궁에서 세운 팔각당에서 백두산 관련 신을 모셨던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이첨(1345-1405)이 고려도(高麗圖)에 그려진 산맥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 철령에 이르러 별안간 솟아오르며, 풍악이되고 거기서 중첩 되어 태백산, 소백산, 죽령, 삼화령, 추양산으로 이어졌다고 기술한 점에서 고려시대 백두산을 조종산(祖宗山)으로 인식하였음을 시사한다.
1402년 5월 이희등이 제작한<혼일강역대국지도>에서도 중국 산 묘사와 달리 함경도 일대부터 지리산 지역까지 조선 산맥을 연결하여, 백두산을 조종산으로 인식하는 지리관념이 나타난다. 1414년(태종14)산천 정비과정에서 백두산은 함길도의 소재관이 영흥에서 봄가을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조선 전기 백두산치제(致祭)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1437년9세종19) 시행된 국가 제사 예전(禮典)의 정비과정에서 지리산, 삼각산, 송악산, 비백산(鼻白山)등 4대 산이 국가의 중사(中祀)대상으로 지정되었을 때 백두산은 제외되었다. 이는 중국을 섬기는 제후국 조선은 경내(境內) 명산대천에 한하여 제사지내야 한다는 이념이 국가의례 정비과정에 반영된 것으로 조선전기 백두산을 조선 경내로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양성지는 1456년(세조3) 명산대천 제사 개정을 논하면서 백두산을 고려경비(高麗境碑)남쪽에 위치 하였기 때문에 조선 경내로 설정하여 장백산을 북악, 구월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금강산을 동악, 삼각산을 중악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성지의 개혁안은 끝내 실행되지 못하였으나 그가 백두산을 북방 경계의 지표로 인식 했던 것은 고려 윤관 장군이 여진을 물리치고 공험진 선춘령에 세운 고려경비의 위치와 관련 깊다. 고려경 까지 확장된 양성지의 관방인식은 18세기 제작된<<요계관방지도>>,<서북피아양계도>,<조선여진양국경계도> 등에 계승되어 선춘령근처 “고려경비”표기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463년(세조9) 정청과 양성지 등이 제작했다는 <동국지도>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 16세기 중반(조선방역지도)와 1531년(중종26)목판본으로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의(팔도총도)에는 국가적 제사 대상이 되는 산과 하천을 중심으로 소략하게 표시 하였다. 여기서 백두산은 국가적 사전 정비에서 제외 도었음에도 지도에 크고 뚜렷하게 묘사되었다.
17세기 후반 청과 조선인들이 벌목과 채삼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범월사건이 양국간 외교문제로 대두되자 백두산을 비롯한 함경도 이북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청나라 강희제는 장백산을 청조의 발생지로 간주하고 1677년 사신을 파견하여 장백산에 이르는 경로, 제례를 올리기 좋은 장소를 파악하게 하고,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이란 봉호를 내려 치제 하도록 하였다. 이후 청나라가 백두산 측량을 시도한 것은 1679년(숙종5)부터 청나라 차사(差使)들이 평안도 청천강 이북 여러 읍과 북관, 삼수, 갑산 등지와 영흥지방까지 그린 지도를 휴대하고 함경도에 와서 백두산을 측량하려 하였다.
1691년(숙종17)청에서 차사를 보내 백두산 일대 조사를 위해 길을 빌려 줄 것을 요구 한 대이어 1692년에도 차사를 보내 국경 조사를 요구하였으나 조선측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1697년(숙종23) 중국을 다녀온 남구만이 성경통지(盛京通志)를 입하여 장백산(長白山)이란 명칭으로 표기되고 높은 준봉이 겹친 큰 산악으로 그려 졌으나 산 정상의 천지는 생략되었다. 또한 조선과의 경계를 압록강과 토문강(土門江)으로 적었는데, 여기서 토문강은 조선의 두만강에 해당한다.
1706년 이이명이 중국에서 묘사해온 지도를 바탕으로 숙종에게 올린 10포 병풍형식의(요계관방지도)는 북방지역의 운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이후 관방지도 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규장각에 소장된 (요계관방지도)는 백두산을 QORTOr으로 채색하여 청록의 다른 산들과 차별화 하였고, 특히 이전지도에서 백두산 정상에 거의 보이지 않던 천지를 그려 민족 영산으로서 백두산 신성을 강조 하였다. 이와 같은 백두산 천지의 묘사는 주로 1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 이전 고지도 에서는 백두산의 윤곽만 그리거나 여러준봉이 겹친 산악만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1713년 백두산 정계와 고지도
강희 연간에 수차례에 걸친 청나라의 백두산을 비롯한 국경 조사의 시도가 조선측의 반대로 성사 되지 못하였다. 이에 청에서는 <황여전람도> 제작을 목적으로 1709년 지리적 측량에 익숙한 서양인들을 활용하여 봉성지방의 형세를 두루샇피고 산형등을 지도로 제작하였고, 그들일행이 백두산도 조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왔다.
이후 청과 백두산 정계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 된 것은 1711년(숙종36)말 범월한 조선인에 의해 청나라 사람이 살해되는 사건이 비롯되었다. 청에서는 살인 장소의 조사를 빌미로 백두산 일대까지 조사할 목적으로 차사를 파견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백두산에 육로가 개통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의 요구를 회피하였지만 1712년(숙종28)백두산을 조사하기 위해 목극등(穆克登,1664-1735)일행을 파견하자 결국 박권(1658-1715)을 접반사로 차출 하였다.
1712년 5월 조선과 청사이 국경을 정하는 정계(定界)는 백두산에 대한 인식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정계에 참여한 조선 실무자를 중심으로 1712년 백두산 유람 기록이 다수 저술 되었다. 목극등이 접반사로 참여했던 박권의<북정일기>, 역관 김지남의<북정록>, 그리고 백두산에 동행 하였던 김지남의 아들 김경문의 전언을 듣고 기록한 홍세태(1653-1725)의 <백두산기>가 대표저 작이다. 이들의 기록은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파견되어 백두산 정계가 확정되기 까지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 할 수 있는 주요 사료이다.
목극등은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의 물이 한줄기는 동쪽으로, 한줄기는 서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나뉘는 곳을 분수령이라 하고 거기에 비를 세웠는데 소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이다. 정계비문 머리에는 가로로 크게 대청(大淸)이라 새기고 세로 배열로 “오라총관 목극등이 변경을 조사 하라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분수령에서 돌에 기록한다.” 강희51년 5월15일 이라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