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섬 대공습 (Operation Hailstone) - 5
11. 일본군의 반격
공습 전날인 1944년 2월 16일 시점의 트럭 기지 소재 가동 항공 전력은 A6M 제로센 전투기 39대, D3A 99식함상폭격기 45대, B6N 텐잔 28대, G4M 육상공격기 20대, J1N 겟코 야간전투기 9대, B5N 97식함상공격기 7대, 수상기 26대, 합계 174대였다.
2월 17일 오전 09시 시점의 트럭 기지 가동기체는 제로센 약 20대, 겟코 야간 전투기 2대, 텐잔 11대, 97식함상공격기 5대, 99식함상폭격기 4대, 수상 전투기 9대 정도로 대폭 줄어든 숫자로 집계되었다.
일본 요코스카에 있는 연합함대사령부에서 트럭 섬 공습 소식을 접한 시간은 이날 오전 11시 01분(JST)으로 제11항공함대의 육상공격기, 함상공격기 전력을 트럭 정박지로 파견해 내남양부대 지휘관을 겸직한 제4함대 사령장관의 지휘를 받도록 '연합함대 전령작 제947호'를 통해 지시했다.
16시 22분에 연합함대는 제11항공함대와 제2항공전대의 이동 가능한 항공병력 전체 전력, 제13항공함대의 제705항공대와 제331항공대를 내남양부대에 편입하여 제61항공전대의 마리아나 제도 진출을 명령하는 '연합함대 전령작 제948호'를 발령했다.
그리고 내남양 소재의 전 육상기를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카쿠다 가쿠지(角田覚治) 해군중장이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이 발령에 의한 항공기 이동 대수는 남서방면에서 약 100대, 라바울에서 100대, 21일에 제1항공함대에서 170~180기였다.
정찰기의 보고를 받아 제4함대는 오전 09시 06분에 적정을 보고함과 동시에 '함공 12대, 함폭 4대 공격 준비 중' 이라고 발신했지만 실제로는 제501항공대의 전투 폭격기(250kg 폭탄을 장착한 제로센) 5기, 제552항공대의 99식함상폭격기 소수기에 의한 주간 공격을 감행했을 뿐이었다.
이들은 함대 방공 헬캣과 대공포화에 모두 격추되었다.
이날 밤 일본군은 모엔 섬(Moen-하루시마/春島)에 잔존하는 97식함상공격기 4대를 미국 함대 공격을 위해 출격시켰는데 이 기체는 라바울에 진출할 예정인 제2항공전대 소속기 또는 제582항공대 소속기 였다.
또한 티니안의 제22항공전대 사령관은 육상공격기로 땅거미가 질 무렵인 박모 공격을 지시하고, 제753항공대와 제755항공대의 육상공격기 7대(정찰용 2대 포함)를 오후에 출격시켰다.
2월 17일 밤의 월령은 23일이었지만 하루 종일 구름이 끼어 있던 해상이라 하현달은 가려져 있었다.
각 공격대는 미 기동부대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기동부대 상공에서는 엔터프라이즈의 F4U-2 콜세어 야간전투기가 요격을 실시했다.
제58.2기동전단 초계라인을 뚫은 티니안 소재 제755항공대의 육상공격기 1대가 20시 30분에 뇌격을 가해 순양함 1척 격침을 보고했는데 실제로는 항공모함 CV-11 인트레피드에 어뢰 1발이 명중되었다.
인트레피드가 좌현으로 선회하는 도중 우현 함미 흘수선 아래 4.5m의 수심에서 방향타 바로 앞의 194번 프레임에 폭발한 어뢰로 인해 11명의 승조원이 전사하고 몇 개 구획이 침수되었으며 방향타가 좌현으로 돌아간 상태로 수리가 불가능하게 고착되었기 때문에 이틀 동안 우현 스크류를 공회전 하면서 좌현 스크류는 고속으로 작동하여 방향타 고착에도 조함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승조원들은 임시변통으로 스크랩 캔버스와 해치 커버로 급조된 돛을 만들어 진행 방향을 조절하여 2월 24일 진주만에 도착하였다.
진주만의 드라이독에 들어가 손상된 방향타는 아예 제거해 버린 상태로 임시 수리를 하고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헌터스 포인트 해군 조선소(Hunters Point Naval Shipyard)로 3월 16일 도착한 이후 6월 9일에 제대로 수리를 완료하고 진주만 인근에서 2달 간 훈련을 거친 다음 9월 초부터 서부 캐롤라인 제도로 합류하였다.
항모 인트레피드의 어뢰 피격은 우박 작전에서의 미 해군 최대 피해였다.
한편 미군도 18일 새벽에 항공모함 CV-6 엔터프라이즈의 제10뇌격비행대(VT-10) 소속 TBF-1C 어벤저 12대가 항모 함재기로는 최초로 야간 폭격을 위해 출격하여 일본 함선에 야간 공습을 가했다.
야간 폭격에 사용된 TBF 어벤저는 레이더를 시험적으로 장비하고 각각 4발의 500파운드 폭탄을 탑재하여 트럭 기지에 남아있는 함선에 저공 폭격을 감행했다.
전과는 13발의 명중탄과 7발의 지근탄을 기록했으며 선박으로 오인된 섬에 2발의 명중탄을 내었다.
하지만 어벤저 1대가 해군 소속 잡용운송함 소야(宗谷)의 대공포화에 격추되면서 지근탄을 기록하는데 그쳤으며 나머지 11대는 엔터프라이즈로 피해 없이 돌아왔다.
트럭 기지 다케시마 비행장(竹島 飛行場-Eten Airfield)에서는 다음날의 요격에 대비해 제204항공대에서 잔존 기체의 수리와 정비를 실시해 A6M 제로센 6대를 가동할 수 있게 되어 폭장한 후에 미 항공모함 공격 계획을 세웠지만 주간 마지막 공습 때 기체 부근에 떨어져 있던 시한신관 장착 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전 기체가 비행 불능이 되고 말아 계획을 중지하고 말았다.
미군 공습 첫날인 2월 17일의 일본군 항공기 손해는 출격 후 미귀환 67대, 지상 격파 96대에 이르렀다.
12. 2월 18일의 공습
제58기동부대의 공습은 이틀째인 2월 18일 오전 중에도 계속 이어져 각 항공모함에서 2차례의 출격이 이어졌고 당하는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제3파 까지 약 100대의 함재기 공습이 진행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튿날이 되자 트럭기지에서는 더 이상 공습에 대응해 띄울 수 있는 요격기가 사라졌다. 전날인 17일 출격한 전투기 중 단 1대만이 겨우 살아 돌아왔던 것이다.
미 해군 제58기동부대가 이틀 간 출격시킨 공격대는 2시간 간격의 총 8파로 연 1,250회의 전투 출격을 통해서 해상 목표물에 400톤의 폭탄과 어뢰를 사용했고, 지상 목표물에 94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일본군이 보기에는 트럭 기지 상공에서 머물며 공격하는 제파들의 시차로 1시간 간격으로 이틀간 총 12파의 공격대가 공습을 가해온 것으로 추산되었다.
전날의 공격으로 항행 불능 상태였던 구축함 후미츠키(文月)는 18일 오전 2시에 야간공습으로 지근탄이 작렬하면서 손상과 침수가 더 심해지자 승조원들은 함을 포기하고 침몰해갔다.
현재 후미츠키는 우돗(Udot-게쓰요지마/月曜島) 북쪽 해역 수심 37m의 해저에 가라앉아 있다. 함교와 1번 연돌은 붕괴되어 있고 함교 부분에서 선체가 절단되어 함수측은 좌현 방향으로 기울어져있으며 함미측은 똑바른 상태로 바닥에 놓여있다.
이틀 전 2월 16일 오후에 미 잠수함 SS-305 스케이트(Skate)의 뇌격으로 격침당한 경순양함 아가노(阿賀野) 생존자 489명을 구조해 트럭 정박지로 향하고 있던 구축함 오이테(追風)는 도중에 트럭기지를 탈출해 황급히 도주하고 있는 제27구축대 소속 구축함 시구레(時雨)와 하루사메(春雨) 2척을 만났다.
그 중 구축함 하루사메의 함장 토미타 토시히코(富田敏彦) 소좌는 우오노 야스히로(魚野泰弘) 대위의 바로 전임 오이테 함장이었다. 토미타 소좌는 오이테와 마주쳤을 때 우오노 대위에게 퇴피를 권했지만 “명령이라 일단 안으로 들어간다.” 라고 답하고 지옥도가 펼쳐진 트럭 환초를 향해 돌입해 갔다.
사실 구축함 오이테는 16일 23시 30분 아가노 승조원 구조 종료 후에 사이판으로 회항을 청원했지만 사령부는 “곧바로 트럭으로 되돌려야 한다.” 고 명령해 어쩔 수 없이 트럭 정박지로 향하고 있었지만 “사이판으로 회항하라.” 라는 통신도 17일에는 수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꼭 트럭으로 들어올 필요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공습 2일째인 2월 18일 아침 제1파가 트럭 상공에 나타났을 때 오이테는 트럭 환초 북쪽수로를 통과 중이었는데 오전 7시경에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벙커힐 소속 TBF 어벤저 편대에 포착되어 공습을 받았다.
탄약을 양륙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약 5분여에 걸쳐 전탄을 발사해버리고 이후로는 회피 기동만으로 운명을 시험할 수 밖에 없었다.
기총 소사와 지근탄에 의해 함장 우오노 야스히로 대위가 전사하고 선임 장교로 포술장인 마츠다 미츠오(松田光夫) 중위가 지휘를 했지만 그도 곧 전사하여 구조된 경순양함 아가노 포술장인 이마이즈미 쇼지 소좌가 지휘를 했다.
이후 오전 7시 35분쯤 고속으로 우현 전타 후 다시 좌현으로 회피기동을 하던 중 오이테의 함교 후방부 우현 기관실에 벙커힐 소속 TBF 어벤저가 발사한 어뢰 1발이 명중하여 대폭발을 일으키며 치명타를 가했다.
좌현으로 전속 선회하며 함 전체에 가해진 엄청난 관성과 원심력의 균형을 어뢰가 한순간에 깨트리고, 밀고 들어오는 후방 선체로 인해 용골을 부러뜨려 반으로 절단된 지 불과 10여초 만에 침몰해버렸다.
때마침 병원선 덴노마루(天応丸)는 단독으로 트럭 정박지를 탈출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초호를 떠나던 덴노마루는 구축함 오이테와 만나 엇갈릴 때 수기신호로 되돌아 나가도록 권유했지만 오이테에서는 “후의는 감사하다, 하지만 본 함은 명령을 받아 북쪽수로(北水道)로 항행한다.” 라고 답신했다고 한다.
직후 덴노마루는 오이테가 북쪽수로 남쪽에서 굉침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어서 미군기는 해면을 떠도는 오이테의 생존자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기총 소사를 가하여 전사자가 늘어났다.
전사자는 오이테 승조원 172명, 경순양함 아가노 구조자 중 전사자는 함장인 마츠다 대좌 이하 489명, 공작함 아카시의 편승자 수십명 이었다.
생존자는 26명으로 구축함 오이테 승조원 4명, 사카가미 시즈히로(坂上静弘) 경순양함 아가노 주계장을 포함한 아가노 승무원 22명이 인근 섬으로 헤엄쳐 도착하거나 항로 부표에 매달리는 등으로 구조됐다.
병원선 텐노마루도 커터 보트를 내리고 굉침한 오이테의 생존자를 구조했다. 오이테와 같이 아가노 생존자를 구조해 돌아오던 제28호 구잠정은 속도가 느렸던 탓에 공습을 모면하고 19일이 되어서야 트럭 정박지에 도착해 아가노 생존자를 공작함 아카시에 인도했다.
그리고 회항 부대를 조직하여 공작함 아카시, 표적함 하카치(波勝), 구축함 하루사메(春雨), 아키카제(秋風), 후지나미(藤波) 등과 함께 팔라우로 향했다.
굉침한 구축함 오이테는 1985년 2월 28일에 트럭 북쪽수로 남동 약 10km, 파누엘라(Fanuela)섬 북서 약 4km의 수심 73m의 해저에서 발견되었다.
선체는 2번 연돌 후방에서 절단되어 함수부는 완전히 전복된 상태이고 함미부는 바로 선 상태로 가라앉아 있다.
구식 미네카제(峯風)급 구축함 타치카제(太刀風)는 2월 4일 라바울에서 트럭으로 인원과 물자수송을 위해 항해하다가 초호 내의 쿠옵 환초(Kuop Atoll-君島環礁.키미시마)에 함 전방부가 좌초되고 말았는데 수차례 이초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거듭하다가 좌초된 상태로 공습을 맞이하게 되었다.
타치카제는 F6F 헬캣 전투기에 극심한 기총소사를 겪은 후 기관실에 어뢰 공격을 받아 18일 오전 08시에 선미부터 침몰하였다.
❚특설급유선 후지산마루(特設給油船 富士山丸-Fujisan Maru)는 1931년 8월 27일에 건조된 이노쇼지(飯野商事) 소유의 유조선으로 등록톤수 9,527총톤에 전장 150.4m, 독일산 만디젤(MAN Diesel) 엔진 1기로 최고속력 18.7노트를 낼 수 있었다.
1941년 11월 22일자로 일본 해군에 징용되어 12월 10일에 특설운송선(급유선)으로 등록 변경되고 의장공사를 진행하였다.
제6함대 보급부대로 배속되어 남방 작전, 알류샨, 솔로몬 제도, 마셜 제도 등으로 연료 수송임무를 수행하였다.
1944년 2월 3일에 급유선 신코쿠마루(神国丸-10,020톤), 특설운송선 아마기산마루(天城山丸-7,620톤) 및 호위 구축함 하루사메(春雨), 시구레(時雨)와 함께 수송선단을 구성하고 발릭파판(Balikpapan)을 출항하였다.
2월 13일에 미 잠수함 SS-178 퍼밋(Permit)의 공격을 받지만 회피하고 2월 14일에 트럭 정박지에 도착해 있다가 공습을 받게 되었다.
후지산마루는 하역 중이었지만 즉시 기동하여 모엔섬(Moen-하루시마/春島)과 두브론섬(Dublon-하츠시마/夏島) 사이의 해역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계속해서 직격탄을 맞아 대공포가 파괴되는 등의 피해를 입어 응급 수리 끝에 항행을 재개하여 2월 17일 공격에서는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18일도 공습은 반복되어 이날도 항행하며 회피기동을 펼쳤지만 기관실에 맞은 직격탄과 지근탄으로 인한 탑재 폭뢰의 폭발로 화재가 발생하여 서서히 침수되어 좌측으로 쓰러지면서 오전 11시경 하루시마 동남쪽 수심 40~60m의 지점에서 선체 앞부분의 일부가 해면에 노출된 상태로 침몰했다.
❚특설급유선 신코쿠마루(神国丸-Shinkoku Maru)는 1940년 2월 완공된 마지막 가와사키형 유조선으로 1941년 8월에 징용되어 개조 공사를 거쳐 구레진수부(呉鎮守府) 소속으로 진주만 공습 시 제1항공함대 급유대 8척 중 1척 이었다.
신코쿠마루는 나구모의 항모 기동부대가 실시한 모든 작전에 급유지원을 하면서 미드웨이 해전까지 이어졌고 그 후에는 주로 유전지대와 트럭의 연합함대 기지를 오가며 중유 수송을 담당하였다.
2월 14일에 급유선 후지산마루 등과 함께 발릭파판에서 트럭에 도착하자마자 제3도난마루(第三図南丸)에 연료유를 이송하고 페판 섬(Fefan-아키시마/秋島) 북서쪽에 정박 중 미군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7일 오전의 공습에서 CV-10 요크타운 SBD 돈틀리스 급강하폭격기의 폭탄 1발을 맞아 기관실에 큰 파공을 만들었다.
다음으로 그날 늦게 CV-17 벙커힐의 TBF 어벤저 6대가 어뢰를 발사했지만 모두 빗나가고 말았는데 초호 내의 투하 지점 수심이 너무 얕았기 때문일 수 있다.
다음날 18일 아침 소속이 불분명한 어벤저의 어뢰 공격으로 오후 늦게 침몰하였는데 다른 기록으로는 CV-6 엔트프라이즈 소속 어벤저의 폭격으로 기관실 인근 우현 선체를 타격하는 매우 근접한 지근탄으로 침몰시켰다고 한다. 전투와 침몰 과정에서 16명의 승조원을 포함한 총 86명이 전사했다.
신코쿠마루는 수심 38m ~ 40m 해저로 수직으로 가라앉아 돌출된 상부 구조물 깊이가 12m, 갑판이 20m의 깊이에 놓여져 있다.
❚특설급유선 다이산도난마루(第三図南丸-Tonan Maru No.3)는 일본수산(日本水産) 소유의 포경모선으로 1938년 9월 23일 완공되었다.
전장 169m에 최대 속력 14.1노트, 19,209총톤의 대형선으로 남극해에서 포경선단 고래가공선으로 운영되다가 1941년 11월 10일에 일본해군에 징용되어 특별운송선(잡용선)으로 요코스카진수부(横須賀鎮守府) 소속으로 보급대에 편입되었다.
그 후 베트남, 사이판, 팔라우, 라바울, 콰잘레인, 트럭, 홍콩 등 전 전역을 돌면서 병력, 무기, 연료, 항공기 등 군수품을 운송하였고 1943년 2월 15일 특별운송선(급유선)으로 이적되었다.
제3도난마루는 뜻하지 않게 미해군 마크 14 ‘어뢰스캔들’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선박으로 태평양 전쟁 중에 몇 차례 미국 잠수함의 뇌격을 받았다.
1943년 7월 24일 트럭 제도 서쪽 해상에서 미 잠수함 SS-283 티노사(Tinosa)의 어뢰를 맞았을 때 티노사는 총 15발의 어뢰를 발사하고 그 중 12발이 명중했지만 어뢰 신관의 결함 때문에 폭발한 것은 2발 뿐 으로 나머지는 모두 불발이었다. 그러나 폭발한 어뢰가 방향타와 스크류에 손상을 입혔기 때문에 자력 항행을 할 수 없어 트럭 섬까지 예인되었다.
폭발한 어뢰와 선체에 삐죽삐죽 박혀 있는 불발 어뢰로 인한 손상 정도 때문에 제3도난마루는 유조선(탱커)으로서가 아니라 바다에 떠 있는 중유 탱크로서 잠시 트럭 섬에 머물게 된다.
8월에 일본 본토로 회항 명령이 내려왔으나 제3도난마루같은 대형 선박을 예인해 갈 마땅한 함선이 없어 트럭에서 임시 수리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트럭 환초의 두브론(Dublon-夏島)섬 서쪽과 페판(Fefan-秋島)섬 북쪽 사이에 위치한 수리 정박지에서 공작함 아카시(明石)가 장기간에 걸친 수리를 실시한 결과 1943년 11월에 다시 유조선으로 복귀해 유류 수송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44년 2월 17일 공습 당시 공작함 아카시, 구축함 후미즈키, 기요스미, 야마기리, 수송선 호요마루(宝洋丸)와 켄쇼 마루(乾祥丸)가 이 정박지에 대기 중이거나 수리를 받고 있었다.
제3도난마루는 1월 27일과 28일 양일 간 특설급유선 니치에이마루(日榮丸-10,020톤)로부터 3호 중유 6,730t과 1호 중유 400t 이전받았고, 2월 14일에 신코쿠마루로부터 중유를 탱크에 이송 받아 둔 상태로 17일 공습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 항모 CV-17 벙커힐의 SB2C 헬다이버 급강하폭격기와 CV-6 엔터프라이즈의 폭격기에 의해 폭격을 받아 전방 선창에 2발의 명중탄에 피격되어 불타오르면서도 침몰 징후는 없었지만 다음날인 18일에도 CV-10 요크타운의 SBD Dauntless 급강하폭격기에 후방 선체에 수 발의 지근탄과 최소 1발의 명중탄을 맞았다.
폭발 충격과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재에 의해 선체 접합부들이 느슨해지며 좌현 후미쪽 침수가 진행되어 19일 02시 10분 제3도난마루는 해저로 침몰하며 총 315명이 전사했다.
제3도난마루는 전후 남극해에서 포경을 재개한 일본수산이 1951년 3월에 인양에 성공하고 수리하여 ‘도난마루(図南丸)’ 라는 이름으로 포경 가공선으로 다시 운용하게 된다.
❚특설잠수모함 헤이안마루(特設潜水母艦 平安丸-Heian Maru)는 닛폰유센(日本郵船) 소유의 원양정기 화객선으로 요코하마와 미국 시애틀을 오가는 태평양 횡단 노선을 주로 운항하였다.
등록톤수 11,614총톤에 전장 163.3m, 2기의 브루마이스터&바인 디젤(B&W Diesel)엔진으로 최고 속력 18.4노트의 성능으로 1930년 11월 24일 완공 되었다.
1941년 8월에 미일 관계가 악화되어 감에 따라 시애틀에서 빈 배로 급히 출항하여 요코하마 항으로 돌아왔다. 이후 10월 3일 일본 해군에 징용되어 16일자로 요코스카 진수부 소속의 '특설잠수모함'이 된다.
12월말 까지 미쓰비시중공업 고베조선소에서 의장공사를 받던 중 12월 20일에 제6함대 제1잠수전대 소속의 잠수모함으로 입적되었다.
공사에 의해 구경 15cm 갑판포 4문, 2연장 93식 13mm 기관총 2기, 110cm 탐조등, 90cm 탐조등, 3.5미터 거리측정기 1기 등이 장비되었다. 트럭 섬 공습 시에는 12년식 12cm 대공포 2문, 96식 25mm 연장 기관포 2기, E27형 전파 탐지기 2기, 삼식 수중 청음기 1기 등으로 교체되거나 증설하였다.
콰잘레인 환초, 라바울, 트럭 등을 왕복하며 수송임무에 사용되다가 1943년 11월 14일에 요코스카에서 트럭으로 가는 제3115선단에 합류하여 출항하였다.
선단은 헤이안마루와 특설항공기운반함 케이요마루(慶洋丸), 특무함(운송함) 이라코(伊良湖) 3척의 수송선에 호위로는 제16구축대 구축함 유키카제(雪風)와 해방함 오키(隠岐)가 동행하였다.
항해 도중 11월 19일에 미 잠수함 SS-247 데이스(Dace)가 선단을 포착하고 가장 큰 헤이안마루를 노리고 3발의 어뢰를 발사하였으나 회피하였고, 데이스는 북위 22도 15분 동경 148도 20분 지점에서 선단을 호위하던 해방함 오키(隠岐)의 22발에 이르는 폭뢰 공격으로 인해 함미 어뢰발사관실의 밸브가 손상되는 등 피해를 입고 추적을 중단하게 되었다.
데이스는 취역한지 4개월 된 가토급 잠수함으로 초대 함장은 조셉 F. 엔라이트 소령이었다.
불과 4일전에 일본 항공모함 쇼카쿠(翔鶴)의 이동 정보를 접수하고 포착하였으나 엔라이트 소령의 판단미스로 멀리 바라보기만 한 체 놓쳤고 이번엔 비교적 쉬운 먹잇감도 놓치고 말아 이후 절치부심한 엔라이트 소령은 1년 뒤 SS-311 아처피쉬(Archerfish) 함장으로 부임하여 대형 항모 시나노(信濃)를 격침하게 된다.
헤이안마루는 11월 24일에는 트럭에 도착하고는 침몰할 때까지 트럭을 떠나지 않고 잠수함에 보급 물자를 계속 공급하였다. 1944년 1월 15일에는 훈련 부대인 제11 잠수전대로 편입되었다.
2월 17일 제58기동부대의 공습이 시작되자 재빨리 출항하여 제6함대 사령장관 다카기 타케오(高木武雄) 제독과 그의 참모진과 함께 두브론 섬(Dublon-夏島) 북쪽으로 회피 기동을 시작했지만 석호 내에서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인 헤이안마루에 대한 적의 공격은 무자비했다.
오전 중에 좌현 선미에 직격탄 1발, 지근탄 수발을 맞아 추진기 하나를 파손시키고 선미 6번 선창이 침수되었지만 승무원의 필사적인 비상 배수와 선수 탱크에 연료를 주입하여 트림을 수정하는 등 응급 수리로 침몰을 면하고 일몰 후 두브론 섬으로 돌아와서 다카기 중장과 적재된 잠수함용 95식 산소어뢰 일부를 하역하였다.
다음날 18일 다시 시작된 이른 아침의 공습으로 좌현 중앙부에 직격탄 2발과 CV-17 벙커힐 소속 TBF 어벤저에게 어뢰 1발을 맞고 중갑판과 하갑판, 기계실 일부가 파괴되어 화재가 발생되었고 함교와 95식 어뢰가 남아있는 선창을 위협하며 침수가 진행되자 타마키 함장이 05시경 총원 퇴함 명령을 내린 이후 09시 30분에 전복 침몰했다.
헤이안마루의 타마키 함장을 포함한 대다수의 승조원은 해안으로 무사히 도착했지만 총 1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현재, 헤이안마루는 나츠시마(Dublon-夏島)의 북서쪽 수심 36m 지점에서 좌현이 해저에 맞닿은 횡전 상태로 가라앉아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잠수모함답게 선창에 95식어뢰와 잠망경 등 잠수함 관련 적재 화물들을 볼 수 있다.
❚일반징용선 샌프란시스코마루(桑港丸-San Francisco Maru)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뜻하는 “상항”(桑港)의 한자 음역어 이다.
등록톤수 5,341총톤 규모로 1919년에 완공되어 무역선으로 종사하다가 1937년에 일본 육군에 징발되었고 1942년 1월 20일에 육군 징용에서 해제되자마자 일본해군에서 징발하여 ‘일반징용선(잡용선)’으로 분류되었다.
샌프란시스코마루는 1944년 1월 20일에 군수물자를 적재하고 요코스카를 출항하여 2월 4일에 트럭에 도착하였다.
두브론 섬과 에텐(Etten-다케시마/竹島)섬 동쪽의 제4함대 정박지에 닻을 내리고 있다가 17일 공습을 맞이하였는데 첫날에는 직격탄은 없었지만 공격에 노출되어 선박 중앙에서 화재로 인한 연기가 발생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인터넷 상의 트럭섬 공습 사진 중에도 옅은 연기를 길게 뿜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다.)
첫날은 운 좋게 보내고 18일의 이틀째 공습에서 요크타운, 벙커힐, 에식스 공격 그룹이 폭격을 가하여 에식스 소속 TBF 어벤저의 500파운드 폭탄을 수 발 맞고 연기와 화염을 내뿜으며 선미부터 가라앉았다.
이 공습으로 5명의 승조원이 전사했다.
샌프란시스코마루는 에텐섬 동쪽 800m 지점에서 수심 64m의 해저로 침몰했는데 상부구조물이 42m, 갑판이 50m 정도의 수심에 놓여 있다.
선체는 똑바른 상태로 가라앉아 선교 앞 갑판에는 95식경전차(九五式軽戦車) 3대와 이스즈(Isuzu) 94식 트럭(4x2/1.5톤) 등이 남아 있고, 1번 선창에서 4번 선창까지 기뢰와 기폭장치, 항공폭탄, 포탄 상자, 탄약, 통신케이블, 전차, 트럭, 연료 드럼, 항공기 바퀴, 항공기 부품, 대형 트럭, 어뢰, 폭뢰, 지뢰 등이 산적해 있다.
❚일반징용선 레이요마루(麗洋丸-Reiyo Maru)는 1920년 12월 27일 완공되어 동양기선(東洋汽船)의 뉴욕 항로, 샌프란시스코 등으로 운항되고 있었지만 1941년 10월 10일에 육군에 징용되어 동남아 방면 공략작전에 수송선으로 종사했다. 그 후 1943년 11월 17일에 해군의 일반징용선(잡용선)으로 징발되어 활용되었다.
1944년 1월 25일 요코하마에서 식량, 장비, 석탄, 상륙정 및 283명의 인원을 싣고 제3125 갑선단(第3125甲船団)을 구성하여 2월 4일에 트럭으로 입항했다.
1944년 2월 17일 이른 아침에 CV-9 에식스 소속의 SBD 급강하폭격기에 의해 1,000파운드 폭탄을 중앙부와 선교 바로 뒤편에 각각 명중탄을 맞았다.
약 10분 후, CV-11 인트레피드의 함재기는 선교 뒷부분에 다시 1발의 직격탄을 가했고 선미 부분은 지근탄을 기록했다.
폭발에 의해 촉발된 맹렬한 화재는 3번 선창에서 시작해 적재 탄약과 연료에 인화하여 여러 차례 폭발이 일어나며 2번 선창으로 번져나갔다.
공습으로 승조원 8명이 사망했으며 폭발과 화재는 이틀간 이어지다가 2월 19일에 두브론 섬 동쪽 2km 위치에서 침몰하였다.
수심은 64m 지점으로 상부구조물은 47m, 갑판은 56m ~ 59m의 깊이에 잠겨있어 깊은 수심의 침몰선 중 하나로써 산호를 비롯한 해양생물의 부착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일반징용선(잡용선)인 세이코마루(西江丸-Seiko Maru)는 등록톤수 5,385총톤의 화객선으로 1940년 7월 17일 완공되어 일본에서 미국, 호주, 유럽 등지로 화물 운송과 중국과 일본 간의 여객 및 화물 운송을 하였다.
일본 해군의 요청에 따라 1943년 4월 16일에 해군지정선이 되어 일본 영해 내에서 전쟁물자를 운송하다가 6월 30일에는 아예 일반징용선으로 구레진수부로 소속되어 해군성에 배속되었다.
세이코마루(西江丸)는 대형발동정 7척, 건축 재료, 폭약류 및 잡화류 등 6,500톤의 화물을 적재하고 1943년 7월 24일에 제3724선단으로서 해방함 후카에(福江), 특설항공기운반함 모가미가와마루(最上川丸), 특설운송선 야마기리마루(山霧丸)와 함께 트럭을 향해 요코스카를 출항하였다.
트럭 섬 북북동 425km 해역을 지나던 7월 31일 야간 23시 07분에 미 잠수함 SS-266 포기(Pogy)가 발사한 어뢰가 우현 4번 선창 및 기관실에 명중된 모가미가와마루가 격침되었다. 일단 해당 해역을 벗어났다가 8월 1일 새벽에 다시 돌아온 세이코마루와 해방함 후쿠에, 니시에마루는 모가미가와마루의 승선자인 제802항공대 및 제552항공대 항공부대원 약 600명을 구조하였다.
하지만, 06시 10분에 또 다른 잠수함 SS-280 스틸헤드(Steelhead)가 발사한 어뢰 중 1발이 세이코마루의 우현 4번 선창에 명중되어 4번과 3번 선창이 급속히 침수가 되었지만 적재하고 있던 건축용 목재 덕분에 침몰은 모면하였다.
그 날 오후 늦게 구사일생으로 트럭 정박지에 입항한 세이코마루는 다음날부터 제4공작부(第四工作部)에서 배수 및 수리를 진행하게 되어 트럭 기지를 떠나지 못했다.
에텐(Eten)섬 북단에서 정동쪽으로 약 800 ~ 1,000m 떨어진 해역에서 닻을 내리고 있던 17일 아침 엔터프라이즈 소속 SBD 돈트리스의 급강하폭격에 후방 화물 선창 양쪽을 직격당하여 큰 폭발이 측면 선체를 날려버렸다. 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고 검은 연기로 주변은 금세 가득 차 버린 상태에서 선미만 겨우 보이는 지경이었다.
그러다보니 한 낮 동안에는 더이상 공격받지 않다가 화재를 진화한 늦은 오후에는 에식스 소속 함재기에 500파운드 폭탄 1발을 맞았다.
다음날인 18일 아침에는 벙커힐에서 날아온 공격기가 2발의 폭탄을 더 명중시켰지만 화물을 모두 하역하고 텅 빈 선체는 18일 정오에 공습이 끝났을 때 여전히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러나 빈약한 선체에 가해진 많은 폭발 피해에 침수가 누적되어 19일 일찍 단 1명의 전사자와 함께 침몰했다.
바닥 수심 56m의 해저에 바른 자세로 가라앉아있는 세이코마루는 선수 갑판포가 있는 곳은 36m, 메인 갑판은 42m, 선창 바닥은 47m의 수심이 나오는데 선실에는 각종 개인소지품과 화장실, 도자기, 무선 장비 등이 있다.
선미에는 몇 개의 비행기 프로펠러가 있지만 나머지 선창들은 비어있는 상태다.
❚특설운송선(잡용선) 겐쇼마루(乾祥丸-Kensho Maru)는 1938년 8월 30일 완공한 4,862총톤의 이누이키센(乾汽船)의 화객선으로 1940년 9월 14일에 일본 해군 요코스카 진수부 관할로 징용되었다.
1943년 12월 14일에 제5142선단(第5142船団)을 편성하여 트럭 공습 시 같이 격침되는 제29호구잠정의 호위 아래 물자 보급을 위해 트럭을 출발하여 12월 19일에 콰잘레인으로 도착하였다. 하지만 도착한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B-24 폭격기 16대의 공습으로 1발의 폭탄이 기관실에 명중하여 화염에 휩싸였다. 침몰을 방지하기 위해 가까운 해안으로 좌초하였고 불은 3시간 만에 꺼졌지만 항행 불능이 되고 말았다.
1944년 1월 3일에 요시다마루(吉田丸)가 예인하여 그날 밤 로이 섬(Roi Island - 일본명: 루오트(ルオット-Ruot)에 도착하여 계속 정박해 있다가 1월 29일에 모모가와마루(桃川丸)가 예인하여 2월 4일에 트럭 섬으로 귀항하였다.
트럭 도착 후 두브론 섬 서쪽과 페판 섬 북쪽 사이의 수리 정박지에서 공작함 아카시의 도움으로 응급 수리를 받다가 17일 공습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전 공습에서 요크타운 소속 공격기들에게 선미에 1,000파운드 폭탄을 맞았을 수도 있으나 명확하지 않으며, 그 후 에식스 소속 공격기가 1,000파운드 폭탄을 직격하여 화염과 검은 연기를 토해 내면서도 17일은 견뎌내었다.
다음날 18일에는 공격할만한 표적이 부족해진 엔터프라이즈, 벙커힐, 몬트레이의 함재기들이 겐쇼마루를 집중 공격하여 폭탄과 어뢰를 명중시키고 큰 피해를 입혔다고 보고했으나 침몰하는 것을 본 조종사는 없었다.
적재 화물이 없어 직격탄에도 하루 이상을 버틴 겐쇼마루는 수리 정박지에서 좌현으로 20도 기운체로 해저 40m 바닥으로 침몰하였다.
상부 구조는 수면으로부터 18m, 갑판은 24m이고 해저면은 선체 길이에 따라 32~40m 수심에 있다.
현재 선수와 선미에는 12cm 갑판포와 포탄이 남아 있으며 선교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쌍안경, 전신기, 나침반, 무전 장비 및 금고가 있다. 갑판 아래에는 맥주와 사케 병이 있으며 선창에는 배관 자재, 밸브류가 있고 기관실로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상대적으로 얕은 수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선체 외부 및 내부 탐색이 모두 가능하여 다이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 중 하나이다.
❚일반징용선(잡용선) 하나가와마루(花川丸-Hanakawa Maru)는 1943년 10월 25일 준공된 가와사키키센(川崎汽船)의 화객선이었다.
건조 5일만에 징발되어 제110선단으로 참가하여 가오슝(高雄)으로 갔다가 제226선단으로 편성되어 12월 17일 일본 모지(門司)로 무사히 돌아왔다.
귀항 후 12월 25일 일본 해군에 정식으로 징용되어 일반징용선(잡용선)으로 등록해 구레진수부 소속으로 해군성에 배속된다.
곧장 제3125갑선단(第3125甲船団)에 편성되어 육군 병력과 건설자재, 항공유 드럼 등을 적재하고 요코스카를 출항하여 2월 4일 트럭에 도착하였다.
2월 17일 공습에서는 제4함대 정박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어 공격당하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18일 오전에 다시 돌아온 CV-17 벙커힐(Bunker Hill)과 CVL-26 몬트레이(Monterey) 소속 2개 편대의 공격기가 북동 수로(Northeast Pass) 상공에 도착하여 북쪽으로 가로질러 서쪽 끝 피아누 수로(Piaanu Pass)에 도달할 때까지 환초를 우회했다. 편대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톨 섬(Tol Island-스요지마/水曜島)에 접근하면서 고도를 낮췄다.
톨 섬의 남동쪽 끝에서 450m 떨어진 곳에 하나가와마루가 정박하고 있었다.
대형을 이루어 비행하는 벙커힐의 첫 번째 편대가 어뢰를 투하하여 어뢰 1발이 함체 중앙에 명중하고 즉시 적재된 항공 연료를 점화하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온 수면 위로 불타는 유막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불타는 유막이 조류와 바람을 타고 북동쪽의 우돗(Udot-게쓰요지마/月曜島)섬으로 흘러가 맹그로브 늪지에 화재가 발생하여 일부 건물로 번졌다.
공격이 비록 더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2발의 어뢰가 더 발사되었고 네 번째 어뢰는 빗나가면서 톨 섬에 명중하여 연료 도크와 교회를 불태웠다.
다행히 사제는 우돗 섬에 포로로 잡혀있어 불길을 피할 수 있었다.
하나가와마루는 어뢰 공격 시에 육군 병력과 물자를 하역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 216명의 육군과 승조원이 선상에서 전사하였다.
현재 하나가와마루는 수심 33m의 해저에 똑바로 가라앉아 있으며 상부 구조물이 15m, 갑판이 23m의 수심에 위치해 있다.
선미 포대에는 대잠용 구경 12cm 단포신 갑판포가 장착되어 있으며 선창에는 많은 시멘트 포대와 연료 드럼이 쌓여있다.
얕은 수심으로 배 전체가 산호, 해면, 해조류 등 다양한 해양 생물로 화려하게 뒤덮여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트럭 제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외딴 곳인데다가 바다가 거칠고 항공유 드럼에서 가솔린이 누출 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탐방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반징용선 산키산마루 (山鬼山丸-Sankisan Maru)는 1942년 3월 20일 완공된 등록톤수 4,776총톤급 니폰유센(日本郵船) 소속 화물선으로 민간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건조되었다.
하지만 1943년 10월 7일에 일본 해군에 일반징용선(잡용선)으로 징용되어 요코스카 진수부 소속선으로 해군성에 배속되었다.
일본 본토와 사이판 방면 수송도 하였지만 베트남, 태국, 중국, 조선의 쌀 운송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산키산마루는 1943년 11월 25일 사이판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돌아와서 1944년 1월 23일 ~ 31일까지 요코스카에 머물며 군수물자를 적재하여 즈이카이마루, 류코마루, 다이호마루와 함께 선단을 구성하여 제29호구잠정, 제64호구잠정, 특설구잠정 제6호타쿠난마루의 호위를 받고 도중에 특설소해함 케이난마루, 제32호구잠정이 호송대에 합류하였다.
트럭에는 2월 12일에 도착하여 우만(Uman-후유시마/冬島)섬 서쪽 해안에서 대기하며 가득 들어찬 군수물자를 하역하지도 못한 체 공습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4년 2월 17일 미 항모 CV-17 벙커힐을 출발한 VB-17소속 4대의 SB2C 헬다이버 급강하폭격기가 아마기산마루(天城山丸)를 공격한 후 산키산마루를 공격하여 1,000파운드 폭탄을 전방 갑판에 명중시키고 이어서 VF-18의 F6F 헬켓 전투기가 기총소사로 400발 이상의 명중탄을 쏟아 부었다.
다음날 2월 18일에 항모 벙커힐에서 헬다이버가 다시 돌아왔고 선미 화물창에 직격탄을 맞아 후방 선체가 산산조각이 났고 중앙 상부 구조물이 파괴되었다.
초기 직격탄에 의해 시작된 화재가 번져 적재된 탄약에 인화되어 대폭발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으며 이러한 폭발로 인해 후방 선체가 사라지다시피하고 최후미 말단부만 따로 분리되어 남기고 침몰하였다.
산키산마루는 선수를 우만 섬으로 향한 채 수심 27m의 해저에 가라앉아 있고 갑판은 15m의 수심에 놓여있으며 중간 선체가 폭발로 사라져버리고 따로 떨어져 나간 선미는 60m 떨어진 지점 48m 수심에 남아있다.
1974년에 1번 선창에 적재되어 있던 284개의 폭뢰와 각종 포탄, 탄약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부식된 탄약 내부에서 흘러나온 피크린산(Picric Acid)으로 인하여 몇 년 동안 해양생물이 죽고 자라지를 못하였다.
현재 선수에는 96식 3연장 25mm 기관포가 남아있고 갑판과 선창에 있는 파괴된 이스즈 94식 1.5톤 트럭(Isuzu Type 94 TU-10)과 나무상자에 든 7.7mm 소총 및 기관총 탄약, 기폭 장치, 항공기 부품(날개, 바퀴, 성형 엔진 및 카울링) 및 기타 화물이 마스트 및 구조물의 다른 부분에 다양하게 자생한 산호와 함께 어울어져 있다.
❚일반징용선 모모가와마루(桃川丸-Momokawa Maru)는 가와사키중공업(川崎重工業)주식회사 소유의 등록톤수 3,829총톤 화물선으로 1941년 3월 31일 완공되어 일본 연안 화물선으로 운항하다가 1943년 6월 18일에 일반징용선(잡용선)으로 요코스카 진수부에 소속되었다.
이후 일본 연안, 마셜제도 콰잘레인 환초, 로이섬, 트럭 등지를 오가며 주로 콘크리트, 연료 드럼, 석탄, 항공연료 드럼, 대소 발동정 등의 화물을 운송했다.
1944년 1월 29일 로이섬에서 제6283선단을 꾸려 출발하였는데 지난 12월에 B-24 폭격기의 공습에 기관실을 직격당해 항행불능이 된 겐쇼마루(乾祥丸)를 예인해서 2월 4일에 트럭 정박지로 입항하였다.
17일 첫날 공습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18일에 CV-17 벙커힐 소속의 SB2C 헬다이버 급강하폭격기의 1,000파운드 폭탄이 적재된 기뢰를 직격하면서 유폭되어 화염이 지속되다가 두브론 섬 남동쪽 800m 위치에서 좌현을 아래로 전도되어 1명의 승조원과 함께 수심 40m의 해저로 침몰하였다.
현재 모모가와마루는 서로 연결된 전방 1번과 2번 선창 내부에 연료 드럼, 공랭식 성형엔진, 날개, 프로펠러, 바퀴 같은 항공기 부품이 있으며 그 중 L2D 수송기(Showa/Nakajima L2D)로 식별되는 것도 있다.
최소 3대의 트럭이 있으며 3번 선창에는 더 많은 트럭과 비행기 부품이 적재되어 있다.
❚일반징용선 다이로쿠 운카이마루(第六雲海丸-Unkai Maru No.6)는 1905년 12월 영국에서 건조된 전장 100m에 등록톤수 3,220총톤의 비너스(Venus)라는 화물선으로 1921년 일본의 나카무라 세이시치로가 구입해 제6운카이마루로 이름을 바꾸었고 1936년에 모회사인 나카무라기선(中村汽船)으로 이적되었다.
최고속도 9노트에 불과한 구식의 석탄연료 증기선은 1944년 1월 5일에서야 수송선 부족에 시달리는 일본 해군에 일반징용선(잡용선)으로 징용되어 첫 수송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요코스카에서 화물을 적재하고 출발하여 사이판을 거쳐 2월 4일에 트럭 기지에 도착해 있다가 17일, 18일 양일간 공습을 당하게 된다.
첫날에는 CV-9 에식스 소속 함재기에 의해 오전 공격을 받고 좌현에 직격탄을 맞았고 오후에는 벙커힐과 요크타운 함재기의 공격을 받았는데 요크타운 소속기에게 선체 중앙에 1,000파운드 폭탄을 맞고 선교가 큰 화재에 휩싸였다.
이 화재는 밤새 진압되지 못하고 18일 아침 항모 에식스에서 온 공격기가 선수부에 명중탄을 내며 일시적으로 선수를 수면 위로 들어 올렸을 때 까지 불타오르고 있었다. 공습이 끝나고도 여전히 불타고 있던 제6운카이마루는 얼마 지나지 않아 3명의 승조원 전사자와 함께 우만섬 (Uman-후유시마/冬島) 북동쪽의 제6함대 정박지 수심 40m 바닥으로 침몰하였다.
현재 선체는 해저면에 똑바로 앉아있으며 갑판은 수심 30m, 상부 구조물은 25m 수심에 걸쳐있다.
제6운카이마루는 트럭에서 가장 선령이 오래된 배이며 3인치 갑판포가 아직 남아있고 전방 갑판 주변에는 랜턴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다.
선창은 부츠, 술병, 방독면 및 도자기, 상자를 포함한 많은 개인 물품이 들어 있는 1번 선창을 제외하고는 비어있다.
이렇게 트럭 정박지에 투묘되어있던 크고 작은 보조함선들이 대규모의 빈 틈 없는 항공 공격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폭탄과 어뢰의 제물이 되어 차례차례 격침되어 갔다.
한편, 1942년 4월에 완공된 수상기모함 아키츠시마(水上機母艦 秋津洲)는 공습을 받으면서도 18일 아침 트럭 정박지에서 탈출에 성공해 19일에 본 목적지였던 월레아이 환초(Woleai Atoll)에 도착하였다.
수상기모함 아키츠시마는 H8K 2식비행정, H6K 97식비행정 같은 대형 비행정의 정비 보급이나 구난을 임무로 하는 함정으로 비행정모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아키츠시마는 1944년 2월 초순 독립혼성 제5연대 약 1,000명을 포나페(Ponape)섬으로 수송하기 위해 해방함 오키(隠岐)에 호위되어 2월 8일에 임무를 완료하고 2월 11일 트럭 정박지에 도착해 있다가 공습을 맞이하게 되었다.
공습 당시 아키츠시마는 특설운송선 아이코쿠마루(愛国丸)로 부터 월레아이 환초로 향하는 해군 제68경비대를 인계받아 특설급수선 닛포마루(日豊丸)와 함께 월레아이 환초로 향할 예정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공습으로 닛포마루와 아이코쿠마루가 침몰하면서 제68경비대 승선 장병들도 전사했다.
트럭 정박지 탈출 후 아키츠시마는 19일에 월레아이 환초에 들러 팔라우에서 호위하러 온 유구모(夕雲)급 구축함 12번함 하야나미(早波)와 2월 24일 아침에 합류하여 2월 25일 낮에 팔라우에 도착하고 사이판을 경유하여 요코스카로 귀항했다.
병원선 덴노마루(天応丸)는 혼란한 와중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받기는 했지만 별다른 피해는 없이 단함으로 북쪽수로로 탈출을 개시하여 눈앞에서 굉침해버린 구축함 오이테(追風)의 생존자를 구조하여 사이판으로 도피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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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