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은 북경시 서북 교외에 위치, 도심에서 약 19키로미터 거리로 청나라 때의 황실
원림과 행궁이었다. 이화원의 원명은 청의원이며 1764년에 건조되었다. 부지 290헥타
르, 그 중 수면이 220헥타르이다. 원내는 궁정구, 전산 전호구, 후산 후호구 3개 경치구
로 나뉜다. 전당, 누각, 정자가 도합 3,000여칸으로 황제와 황후가 정치 활동을 하며 휴
식, 유람하던 곳이다.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1888년에 자희태후가 해군 경비 500만
냥 배근을 유용하여 재건, 10년만에 완공, 이름을 "이화원"으로 고쳤다. 이화원은 북쪽은 만수산을 등지고 남쪽은 곤명호를 안고 있다. 불향각을 주체로 지형과 수면을 충분히 이
용하여 가산의 조성으로부터 길의 주향, 전당. 누가의 배치로부터 다리의 조형에 이르기
까지 중국의 전통적 원림 조성 기예를 충분히 계승, 발양함으로써 상부 상조의 전체적인 원림 예술 효과를 나타내었다.
[동궁문]
이화원 정문이다. 문은 삼명이암의 무전식 건축으로, 중간 정문은 "어로"로 황제, 황후가 출입하고 양쪽 문은 왕공, 대신들이 출입하며 태감, 병졸들은 남북 양측 옆문으로 출입
하였다. 편액의 "이화원" 세 글자는 광서 황제가 쓴 것이다. 운룡석에 구슬을 갖고 노는
두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는데 용은 황실의 존엄의 상징이며 또한 유지와 칙령의 표징
이다.
[인수전]
궁정구의 주요 건축물의 하나로서 원명은 근정저, 광서 연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
어지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이다. 인수전은 청나라 말년 자희태후와 광서 황
제가 정무를 보던 대전이며 또 한 중국 근대사상 변법유신 운동의 획책지의 하나이다.
1898년 광서 황제가 이 대전에서 개량과 두령 강유위를 소견하고 총리 각국 사무 아문장
경상행주로 임명, 이로부터 유신 변법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봉건 보수세력의 반대로 "백일 유신"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낙수당]
대형 사합원으로 자희태후의 침전이다. 대전은 붉은 기둥에 회색 지붕으로 조형이 특이
하고 웅장 화려하다.
[대희루]
큰 정원 "덕화원"내에 건조, 현재 중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최대의 고대 극장으로서 높이
21미터, 상,중,하 3층으로 나뉜다. 아래층 천정판 중심에 천창을 내어 위층 무대와 통하
게 되어 있으며 중간층 무대는 권양기로 도구와 배경을 위 아래로 오르내릴 수 있게 교
묘하게 설치하여 변화 무궁하다.
[자희태후(서태후)]
자희의 성은 엽혁나라,청나라 제7대 황제 함풍(1851년~ 1861년 재위)의 귀비로서 함풍
이 죽은 후 "수렴청정"의 명의로 48년 동안이나 조정의 대권을 독점하였다. 1905년 네덜
란드 화가 Hubert Vos가 초청에 의해 자희태후의 초상화를 그렸다.이해 그의 연세 70을 넘었다.화상은 현재 덕화원 내에 보전되어 있다.
[장랑]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총 길이 728미터, 도합 273칸의 화랑으로 중국 회
랑 건축 중 제일 크고 제일 길고 제일 명성이 높은 장랑이다.장랑의 채색화 제재는 꽃,
새, 나무, 돌, 산, 물, 인물 등 매우 광범위하다. 8세기 중엽 건륭 황제(기원1736-1796년
제위)가 궁정의 화가를 서호에 파견하여 사생하게 하였는데 546폭의 서호 경치를 그려
장랑의 273칸 화랑의 들보에 전부 옮겨 그렸다.금세기 60년대 중국정부는 서호풍경화를 보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특색을 지닌 채색화 1만 4천여폭을 더 그려 장랑을 제일의 화랑으로 되게 하였다.
[불향각]
만수산 전산 비탈 21m 높이의 거색기반 위에 건축, 남쪽은 곤명호를 마주하고 북쪽은
지혜해불전을 등지며, 이 불향각을 중심으로 각 건축군이 매우 정연하고 대칭되게 양날
개로 펼쳐지면서 서로 호응하여 마치 한마리의 박쥐모습을 하고 있다.1860년 불향각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그 후 원상태로 재건하였는데 이는 라마교의 건
축물이다.
[청연방(석배)]
석방이라고도 한다. 1755년에 건조, 몸체는 거석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총길이 36m, 상
하2층 선실이 있다. "물(백성)은 배(왕조)를 띄울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을
취하여 청왕조는 반석과 같이 튼튼하여 물이 전복시킬 수 없음을 비유하였다.
[17공교]
곤명호 동쪽 제방과 호심의 남호도를 연결하는 대형 석교로서 총길이 150m이다.교두와
난간 기둥에 도합544마리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는데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중국이야기10-이화원의 봄
-서태후와 흥선대원군
황사의 습격이 이미 멎었지만 베이징의 봄은 서울의 봄에 비해 아름답지 못하다. 공해에 찌들지만 새로운 계절을 만나면 활기를 찾는 서울의 나무와 꽃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근본적인 토질 등 여건이 식물이 자라기에 서울 만한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만에 베이징 나들이에 나를 잡은 것은 '이화원'( 和園)이었다. 갑작스럽게 내 머리속에서는 '이화원의 봄'이라는 문구가 만들어졌다. 이화원은 청조말기의 여걸 서태후를 연상시킨다. 비슷한 조어를 가진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 주인공은 역시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봄이라는 시간과 생의 모습이 비슷한 두 인물이 나를 어떤 복잡한 감정속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나른한 봄날 나는 이화원의 동쪽에 위치한 동방문을 통해 서태후를 만나러 들어갔다. 입구를 넘어 작은 계단을 넘어서자 마자 앞으로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이화원 전체 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쿤밍호(昆明湖)다. 중국에서 베트남과 접경한 서남향 윈난성의 주도인 쿤밍의 이름을 딴 호수에 서역에서 불어온 바람이 스치고 나의 귓전에 다가왔다. 하지만 그 바람은 서역의 향기와 더불어 이 대역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신산한 땀 냄새가 배어있었다. 다름아니라 290만 평방미터의 이화원은 백성들이 직접 파서 만든 호수와 그 호수에서 판 흙으로 만들어진 만수산(萬壽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만수산의 북쪽 '향암종인지각'의 통로로 본 모습. 여행온 노인의 모습이 왜소하다. 향암종인지각의 일부인 '다보탑'의 모습.
군비는 이화원의 건립에 쓰이고
800년전 금(金)대에 행궁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 이화원은 청(淸)대에 건륭제 때, 지금의 규모를 갖추었다. 하지만 아편전쟁이후 중국을 휩쓸은 문화재 귀신 영불연합군에게 약탈된 것은 물론이고 많은 건물이 소실됐다. 하지만 이화원과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서태후다. 그녀는 1888년 자신의 은거장소를 만들기 위해 고궁에서 2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화원을 대대적으로 증개축했다. 서태후는 계속되는 열강의 침입에 맞서 증강이 필요한 해군에 쓰일 돈 3000만냥을 이화원을 위해 썼다.
쇄국정책으로 서구문물을 막고, 근정전 등의 개축공사를 했던 흥선대원군보다는 규모가 휠씬 큰 공사를 시작한 그녀는 이미 적잖은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듯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 유산을 남겼다. 비록 명문가문이지만 미관말직을 지내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지만 그녀는 1851년 함풍제의 후궁이 되었다. 아들을 낳은 것은 물론이고 총명한 머리로 인해 함풍제의 총애를 받으며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후궁이 된지 십년만에 함풍제가 죽고 어린 아들 동치제가 황제에 오르자 섭정을 시작했다. 동치제는 명색이 황제였지만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밀려 베이징의 환락가를 탐익하다가 18세의 어린 나이로 죽는다. 어린 황제의 아내는 임신을 했지만 시어머니의 등살과 그늘에 밀려 결국 출산도 하지 못하고 남편의 곁으로 간다. (사진설명: 이화원의 중심이되는 건물인 불향각의 모습. 뒤, 봄을 맞아 붉게 피어난 꽃을 이미지 처리했다.)
서태후는 가고, 꽃들은 피고
1백수십년전에 고궁에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며 나는 이화원을 걸었다. 막 피어난 벚꽃, 목련, 모란, 사과꽃 등으로 인해 정원은 봄을 실감하게 한다. 동궁문 쪽으로 걸음을 걸어 이화원 건물들의 처음격인 인수전(仁壽殿)을 시작으로 이화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인수전은 서태후가 정무를 본 곳으로 그녀가 생활하던 유품들이나 흔적들이 유리문안에서 이국의 관광객들에게 비춰주고 있었다. 인수전의 바로 뒤편에 있는 덕화원(德和園)은 호사취미에도 관심이 많았던 서태후를 위한 극장으로 거대한 무대를 갖추고 있다. 거대한 건물이외에도 이미 봄이 닿은 이화원의 정원은 그 화려한 건축물과 꽃, 막 새싹을 돋기 시작하는 나무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미 서태후는 역사속의 인물이 되었지만 이화원의 초목들은 여전히 그때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려는 듯 막 활기를 띠고 있었다.(인수전쪽의 뜰에 자리한 오래된 화석의 모습. 뒤, 이화원을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배위에서 바라본 만수산의 모습)
청왕조의 마지막 영화가 깃든 곳
아들이 죽은 후에도 섭정의 지위에서 물러나기 싫었던 서태후는 3살인 조카 광서(光緖)를 황위에 올리고 섭정을 계속했다. 높은 학식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화가였던 서태후는 조카가 성장하며 의식이 커가 사회의 변화를 알아가자 결국 조카도 궁중에 유폐시켜 존재를 잃게 한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그녀는 이미 열강과 한족에 밀려 빛을 잃어가던 만주족의 국가 청나라를 세워보려는 의지가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정책보다는 황권이라는데만 집중했지 빛을 잃어가는 세계사속의 청나라는 정확히 보지 못했다. 캉유웨이, 량치아차오, 쑨윈 등 민족주의적 지식-활동가들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외세의 힘은 그들이 대적하기 불가능할 만큼 강대했다.
그녀는 광서제와의 갈등은 물론이고 의화단과의 타협, 공친왕과의 문제등을 생각하기 위해 원래는 '여름궁전'인 이화원에 자주 들렀다. 그녀는 동궁문으로 들어서 인수전 등에서 일이나 유희를 즐기다가 서유기, 삼국지 등을 표현한 1만 4천여개의 그림이 쭉 그려져 있던 긴 복도 장랑(長廊)을 따라 가며 사색하며 행로를 정했을 것이다. 728미터의 긴 장랑을 따라가다면 대리석으로 만든 화려한 배 석방(石舫)에 닿는다. 대리석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조각하나하나가 화려한 이 배에서 서태후는 쿤밍호 너머로 움직이는 달을 구경했다.(사진설명: 길게 늘어선 장랑의 입구에 목련이 지고 있다. 뒤, 불향각에서 바라본 쿤밍호의 모습)
이제는 백성들의 쉼터로
하지만 권력은 역사와 시간 앞에서는 무위한 것. 서태후는 1908년 11월 자신이 유폐한 광서제가 죽은 이틀후 죽는다.
그녀의 삶은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이전의 굴욕에서 벗어나 권력을 행사했던 흥선대원군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흐름은 이전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전개된다. 김동인의 소설로도 다시 살아났던 흥선대원군의 집인 운현궁도 나무와 꽃들이 적지 않아 지금은 아름다운 봄이그윽할 것이다. 동인의 소설은 살육을 마다하는 외척세력의 득세에 '상가 집의 개'처럼 천대와 멸시를 당하는 흥선의 힘든 시절로 시작된다. '구밀복검'의 흥선이 조대비의 조카 조승하를 만나 그의 뜻을 펴게 되는 갑자년 봄에 이르러 이 소설은 끝난다. "운현궁은 정치의 중심지이며 따라서 이 나라의 중심지로 되었다.…옛날 흥선이 관직을 내어던진 이래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던 이 집에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고 말하며 끝나는 소설이후에 흥선의 모습을 잠시나마 생각해 본다.
서태후나 이하응은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정치적으로나 국제환경에서도 비슷한 갈등을 겪으며 살았다. 그들의 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모두 역사가 되었다. 훗날 그 흔적들을 찾아 다니는 쓸쓸한 객들에게는 화려한 초목과 더불어 세월의 무상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제 이화원을 찾아다는 이는 황제가 아니라 중국이나 외국의 관광객들이다. 여름에는 과거 황제들의 여유를 겨울에는 자연스럽게는 거대한 스케이트장이 되는 이곳에서 역사를 그려볼 뿐이다. (사진설명:아름답게 피어난 사과꽃 너머로 보이는 불향각의 모습. 뒤, 향암종인지각의 주변에는 봄꽃 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북경시의 서북쪽 16km에 위치하고 있는 공원. 청대에 여름별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총면적은 267ha으로, 인공으로 만든 곤명호(昆明湖)와 만수산(萬壽山)의 규모에 놀랄만
하다. 곤명호는 이화원의 총면적의 3/4를 차지할 만큼 큰 호수이다. 만수산은 이 호수에
서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이다.
이화원은 금나라 1153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명대에 몇개의 건물이 들어섰고, 청의
건륭제(乾隆帝)가 1750년에 곤명호를 확대하고 그 흙으로 만수산을 만들었다. 북경 자체
가 평야지대로 자리잡고 있어 거대한 산을 만들고 인공호수와 수로를 북경의 곳곳에 만
들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이화원은 영, 불연합군의 북경 침략시 파괴되었는
데, 서태후가 1888년 해군의 군함건조비를 유용하여 이화원을 재건하였다.
이화원은 중국의 전통건축의 하나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아름드리 나무들과 모든 것이 인조로
축조되어 있어 인간의 위력을 실감나게 한다. 정문인 동궁문을 지나 인수문을 들어서면 인수전이
있다. 인수전은 서태후가 정무를 보던 곳으로, 그녀가 생전에 사용하던 각종 집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인수전 북쪽에는 덕화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3층 건물로 서태후의 전용극장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서태후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70만냥의 은을 들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태후는 이 극장에서 연극을 보거나, 자신이 몸소 경극에 출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덕화원
뒤에는 이락전이 있다. 이락전에는 서태후가 외국에서 선물로 받았다는 각종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독일에서 받았다는 자동차도 눈길을 끈다. 덕화원을 뒤로 하고 호수쪽으로 나오면
대리석으로 만든 석주(石舟)라는 배가 여행객을 기다린다. 서태후는 이 석주를 타고 달맞이를
했으며, 보름달맞이 때는 수천의 구연들이 촛불을 들고 춤을 추며 서태후의 흥을 돋구었다고 한다.
낙수당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복도는 세계에서 가장 긴 723m나 되는데, 이 회랑의 안과
외관에는 당시 가장 그림을 잘 그린다는 화가들을 전국적으로 초빙하여 산수화 등 여러 종류의
그림을 벽면에 그리게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이화원
글쓴이: 한 상진
※ 출처 및 참고 문헌:
한상진 박사학위 논문《한-중 말대 황가원림 비교연구》
(원 논문의 중문내용을 한글로 번역함)
1. 造園目的(조원목적)
우리는 소풍을 가고 여행을 가고 답사를 다니면서 국내든 국외든 역사, 문화, 예술적인 요소와 관련 있는 건축물과 그 주위의 경관을 본다. 또한 만지며 느끼는 가운데 그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과 더불어 왜 만들어 지고 조성되었는지를?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혹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이화원은 청조 건륭15년에 창건(創建)되었으며 그 당시 청의원(淸園)이라 불렀다. 불교를 숭상하는 건륭황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였으며, “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느라 돌아보며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遊目賞心)” 때문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하는 (敬天勤民)”대사(大事)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청의원의 건설은 단지 돌아보며 즐기는 것에만 있지 아니하였다. 그 당시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고 즐기며 놀 수 있는 곳이 아주 많았다. 청대의 강희, 옹정, 건륭 3대 황제 중 건륭황제가 불교를 특별히 숭상하였는데 , 불교를 사상통치의 토대로 보았다.
건륭황제는 북경지구의 중요한 불교장소에 친히 가서 향불을 피웠으며 자신을 스스로 충실한 불교제자라 (칭하였다)
자랑하였다. 청의원의 건조는 (建造)는 사실상 西山의 풍경이 수려한 이 곳에 (이 장소에)불교의 정지(淨地)를 개척한 것 이다. 《만수산대보은연수사비(万壽山大報恩延壽寺碑)》에 건륭은 아래와 같이 기재하였다. 瓮山을 곤명호의 양지쪽에 세워 호를 만수(曼壽)라 하였으며 범궁(梵宮)을 창건하여 대보은연수사라고 명명하였다.
사당과 묘우의 건축물, 불상종류 또한 많았으며 건물처마의 날개는 마치 날개를 펴고 하늘을 빙빙 날아다니는 새의 날개와 같았으며, 건축물이나 그 장식물이 눈부시게 화려했다. 기원 1750년에 이르러 청조 건륭황제는 원정사(圓靜寺)의 기초 상에 대보은연수사를 수건(修建)하여 모친의 생신을 축하하였는데 그때에야 옹산을 만수산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이전부터 불러오던 김해(金海)를 크게 준설하여 곤명호(昆明湖)라 이름을 고치고 전체원림을 “청의원(淸園)“이라 불렸다. 그후 기원 1860년에 파괴로 청의원의 목구조 건축은 이미 모두 없어져 남은 것이 거의 없어졌다.
가원1888년, 자희태후(慈禧太后)는 자신의 사치하고 향락한 생활을 만족하기위하여 국가가 처한 어려움과 열강의 침략으로 위한 나라를 돌보지 않고 청의원의 낡은 기초 하에 수리와 복원을 진행하였으며 “이화원”이라 개명하였다. 현존하는 원림은 이시기에 수리한 것이다.(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2. “問名心曉”的 傳統藝術 (”문명심효“의 전통예술)
특정한 의경(意境)을 창조하기 위하여 중국은 자고이래 명산대천 혹은 풍경명승지에 왕왕 유명인이 조각을 하고, 시인이 서문을 기재하고, 유한된 문자를 사용하여 특정 풍경점(風景點)의 무한 된 의(意)를 취하였다. 언어로는 원림 중의 산수를 주제로 하여 표현하였으며, 문자로는 마음에 둔 사상이나 의경을 표현하였다. 산수풍경을 시와 그림이나 음악으로 나타내었으며 다른 한 면으로는 이러한 문자로 하여금 사람들의 연상(聯想)을 풍부하고 감동되게 하여 원림예술을 더욱 감화시켰다. 이러한 문자를 통하여 중국원림예술과 중국문학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
오대말기(五代末期)에는 당대시가(唐代詩歌)발전의 기초 상에서 영련(楹聯)을 발생시켰으며 일종의 문학형식으로 송(宋)대에 이르러서는 발전을 가져왔다. 원림에 있어서도 점차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으로 되었다.
이화원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 왜 “이화원”이라 이름을 지었을까? 질문을 던지며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냥 지나쳐 버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부모님이 작명을 하던, 작명가에 의뢰하던 일평생 따라다니며 이름값을 한다.
북경 청대황가원림에 있어 각 경점(景点)들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황제의 어필로 만든 것 이며, 당시의 경점은 편액(扁額)과 영련(楹聯)에 기재된 의미와 일치하였으며 그 무엇으로도 비길 수 없는 의경(意境)을 표현하였다.
청조의 원림은 주경돌출식(主景突出式), 박채명경(博采名景), 집금일원 (集錦一園) 등으로 집약되며 특히 “집금일원”식 배치 중에서 청조 황가원림은 철학, 유가학, 천문 등의 사상 중에서 자연변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유하여 개괄적으로 명명하였다.
조설근(曹雪芹)의 《홍루몽(紅樓夢)》에서 “가정(賈政)”은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풍경과 물가의 많은 정자에 듣기 좋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비록 이보다 더 아름다운 꽃, 나무, 산수풍경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若大景致, 若幹亭, 无字標題, 任是花柳山水, 也斷不能生色).”고 언급한 바와 같이 대련, 편액은 원림 가운데 소홀히 하지 못하는 작용을 한다. 이화원은 현존하는 대련, 편액이 비교적 많은 황가원림으로써 예술상에서 장단점이 있고 내용상에서도 비록 정화(精華)된 것도 있지만 부실한 것도 적지 않다.
특히 원(園)을 건설할 때, 소수봉건제왕의 향락용도로 그 대련과 편액이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고 봉건사상과 아첨하고 영합하는 문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련, 편액 중의 경명들은 풍경묘사, 역사전고(典故), 의경의 창조 등으로 말하면 오늘에 와서 전통조경, 건축, 문화와 예술연구에 대하여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정화된 것과 부실한 것은 물론하고 이를 알 필요가 있으며 또한 응당히 갖추어야 할 문화수양의 하나이다.
다음은 이화원의 주요 경점(景點), 경물(景物), 건축물에 대한 경명(景名)과 이를 나타내고자 문명(問名)을 언급하고자 한다.
《일하존문록(日下尊聞錄)》에 의하면 “청의원은 만수산 산기슭에 건원하였는데 원명원서쪽에서 약 2리 떨어졌으며 앞부분은 곤명호이다. 고종(건륭)이 대보은연수사를 건설할 때 만수산이라 명명한 동시에, 옥천(玉泉)의여러갈래 물줄기를 소통시키고 서호(西湖)에 모이게 하여 물을 유입하여 역명(易名)으로 일컫기를 ”곤명호“라 하였다. 곤명호에는 戰艦(군함)을 설치(배치)하여 복건과 광주의 순양제도를 모방하여 매번 복일(伏日)마다 향산(香山)건예영(健銳營-정예군)을 곤명호에서 수군훈련을 실시하였다.
1860년에 영국, 프랑스연합군에 의해 훼손되었다.1888년 에 이르러 자희(慈禧)황태후의 지시 하에 해군경비를 유용하여 재건설을 하였다. 그 시기에 광서(청 덕종)황제는 이미 성년이 되어 친히 정사를 볼 나이가 되었고 자희 황태후도 광서(덕종)에게 정치를 이양하고 물러나 은거하여 노년을 보양하겠다고 진심이 아닌 뜻을 내비쳤다. 광서는 효성과 공경을 표시하기위하고 모후의 환심을 얻기 위해 ”이화원“이라 이름을 개명하였다.
건륭30년《(淸園)청의원즉경(淸園卽景》에서는, 그 당시 청의원의 묘사를 아래와 같이 (언급)기재하고 있다. “산은 만수라 부르고, 물은 청의(淸-맑은 물결)라 부르는 園의 이름이 아주 적합하다.
《우후어원즉경(雨后禦園卽景)》에서는 “한 삿대의 봄물이 청의를 불어나게 한다”고 기재되었으며,《만수산청의도영(万壽山淸圖詠)》에는 “산은 만수라 불리워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며, 원의 이름을 청의로 불리운다...” 이와 같이 청의는 물과 관련이 있었으며 수 공간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표출하고 있다.
산을 만수산(万壽山)이라 한 것은 만수(万壽)라는 단어가 축 사(祝詞)에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청의원(淸園이)라 한 것도 청의(淸)가 원(園)중의 맑은 물결을 형용한 것이다. 제왕(帝王)이 모든 산천(山川)과 수경(水景)의 나라를 다스리기에 전력을 다하니 , 지혜와 인을 지닌 자들은 이를 계기로 천하에 제왕의 은혜를 알린다고 하였다.
2)이화원: 이양충화(養沖和)의 원(園)이라 하였다:
①“”는 양(養)으로서 노인들이 보양(몸조리),휴양한다는 뜻이고 “和‘는 마음이 평온하고 기운(태도가)이 화평(온화)하다는 뜻으로써 즉, ”이화(和)“는 정신을 수양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평온하고 태도가 온화하게 한다는 뜻이다. 즉 양생하여 태도가 온화하다는 뜻이다.(和園) 이화원의 重建목적과 결합시켜보면 이 해석은 중요한 것이다.
②“”는 역경(易經)중의 점괘 이름인데 《易經ㆍ第二十七》에서 이르기를 “만물은 천지에서 생장하고, 성인은 현명한 자와 수많은 백성을 양육하니 그때가 되면 ”이()“의 의미는 지극히 크고 광대하다”고 하였다.
“養”은 더 나아가서 천지와 성인이 만물과 만민을 봉양하는 것으로, “和”는 조화롭고 화평(온화)하다는 의미이며 또한 천기(날씨)가 좋아 자연재해가 없이 풍년이 들어 국태민안(國泰民安)하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경명(景名) : 청리관(聽館)
*문명(問名) : 최근에는 이화원 내의 중국요리를 식사하며 무희들의 춤과 노래를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되는 곳인데 건물입구의 편액에 쓰인 청리관이라는 한자를 보면 대충 감을 잡는 곳이다.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감상 한다는 뜻으로서 聽의 (리)는 새 이름인 꾀꼬리로 황리(黃), 황앵(黃鶯)이라 부르기도 한다. 털색이 노랗고 주둥이는 옅은 빨간색이며 울음소리가 귀 맛좋고 과일을 잘 먹는다고 한다. 청리명(聽리鳴) 은 고대놀이의 樂趣이다.
청리관은 건륭 때의 구명(舊名)으로 연극을 보고, 감상하는 장소이며 1892년(광서18년), 덕화원으로 수건(修建)하였으나 이 연극 무대는 그대로 놓아두고 사용되지 않았다. (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경명(景名) : 십칠공교(十七孔橋 額題二) : 靈龜偃月(영타언월)
*문명(問名) : 이화원 동궁문에서 곤명호수변으로 나와 남쪽방향으로 내려다보면 넓은 호수에 무지개가 떠있는 것처럼 아아치형의 큰 교량이 놓여져 있다.
십칠공교는 악어처럼 혹은 반월형의 달같이 생겼다는 뜻이다. “영타” 의 한자 중 “타(龜)”는 양자강 악어를 말하며 猪婆龍(저파용)이라고도 불리우며 파충동물로 길이가 2m가 되는데 강과 하류 기슭의 굴속에서 살고 있다. 반월형으로 된 물건은 모두 偃月(언월)이라고 말하는데, 예를 들면 언월영(偃月營),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등 이 있다. (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경명(景名) : 경복각(景福閣)
*문명(問名) : 한국에도 조선궁궐인 경복궁이 있는데 북경이화원에도 같은 이름의 경복각이 있어, 이전에 북경을 방문한 사람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여 질문을 던지기도 했던 곳이다.
만수산 중턱에 자리 잡은 “경복각”은 건물의 규모는 한국궁궐인 “경복궁‘의 규모가 아닌 단체건축물이지만 각(閣)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경복각의 출처를 알아보면 그 문명을 깨닫게 된다.
‘경복“이란, 더 할 수 없이 크나큰 행복(洪福天), 즉 무상(无上)의 행복을 뜻한다는 문명(問名)의 각(閣)이며, “경복”중의 경(景)은 크다는 뜻으로 《詩ㆍ小雅ㆍ小明》의 “介爾景福(개이경복)“에서도 크게 복이 있음을 의미한다.
삼국시기 위나라에도 ”景福殿“이 있었다. 《昭明文選(소명문선)》에는 《景福殿賦(경복전부)》가 있다. (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3. 相地(상지)
황가원림인 이화원은 황가기파로서 제 특징을 자아내고 있지만 강남사가원림의 형상과 공간구도를 일부 모방한 것도 있다.
북경 이화원 곤명호(昆明湖)는 항주 서호(西湖)를 본 딴 것으로, “교묘하게 소주(蘇州)의 호수와 제방을 본 따고 소주의 많은 화의(畵意)를 빌렸다”는 말은 아주 솔직한 표현이다. 그러나 배운(학습한) 이후의 효과는 모방 가운데 창조가 있어 전체적인 정황은 제 각기 자기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조짐이 있는 것이다.
각 공간은 지형조건과 주위환경에 따라 조경을 하였으며, 마치 “이곡동공”(異曲同工: 곡은 달라도 교묘한 솜씨는 똑같다/ 방법은 다르나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이라 할 수 있다.
곤명호는 절강성 항주(浙江省 杭州)의 서호처럼 三面이 호수와 산이고, 一面이 성(城)인 대산대수(大山大水)의 形勝(형승)을 구비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2가지 기본조건은 서호의 산수결구형제(山水結構形制)를 모방한 것이다. 한 가지는 西山을 배경으로 만수산이 홀로 우뚝 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항주)西湖는 진산진수(眞山眞水)로 물은 서북의 영은(靈隱)에서 유입된다.
항주 서호 중에, ”소제”의 제방은 횡(가로방향)으로 놓여있고 “백제”는 종(세로방향)으로 놓여 있어 이 둘은 횡과 종으로 배합되어 조화를 이루는(蘇堤橫恒白堤縱(소제횡항백제종)동시에 수(水) 공간과 제방의 구도를 잘 조합시켰다. 호수 중 3개의 섬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고 소제(蘇堤)는 주요하게 서호(西湖)남북의 교통을 연결해 주는 제방인 셈이다.
그 서쪽방향에는 경관적으로 흡인 할 수 있는 상응한 위치에 교량 6개 놓았으며, 또한 물이 잘 순환되어 흐르도록 하였다.
西湖의 산수구조는 아래와 같이 개괄할 수 있다.
“三面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산 가운데 호수를 조성하였으며 고산(孤山)이 가운데 솟아 있으며 긴 제방은 종횡으로 되어있다. 3개의 섬은 흩어져있으나 이들 상호간의 주차(主次:주와 차의 관계)가 분명한 가운데 호수는 내외(內外)로 구분되고 내부와 외부는 서로 통하게 하였다. 호수 가운데 섬이 놓여 있고 섬 가운데 호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
곤명호의 척도(尺度)는 서호보다 작지만, 만수산이 곤명호에 있는 것은 고산이 서호에 있는 것 보다 더욱 돌출하다.
그리고 주산구도(主山構圖)중심이 전원(全園)의 예술 효과를 이끄는 면에서 서호를 능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민간(民間)의 풍경구와 제왕(帝王)궁원의 의경(意境)과 거시적 방면에서의 차별을 나타내는 점이다.
청의원은 기본상 진산가수(眞山眞水)인데 그것은 곤명호와 옹산박(瓮山泊)의 차별이 크기 때문이다.
이화원(청의원)의 서제(西堤)는 거시적 공간구도 면이나 기세 상에서 항주 소제(蘇堤)처럼 설치목적이 교통을 위한 기능이 아니었으며 규모를 초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요하게는 저명한 유명한 경물(景物)을 모방하여 설치 한 것이다.
西堤六橋는 옥대교(玉帶橋)를 제외한 교량은 물 흐름을 순통(順通)하게 하는 기능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조경방면에서 아주 큰 작용을 발휘하였다. 항주 소제육교(蘇堤六橋)의 미시적 경관효과(微觀效果)는 서제육교(西堤六橋)처럼 정교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서제의 여섯 개의 교량이 경관, 기능적으로 각자의 특징을 갖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 모방 중에 창조가 있다는 것을 표출하고 있다.
항주의 소제육교는 “풍경대수필(風景大手筆)'로 마치 대붓으로 대범하게 휘둘러 만들어 놓은 것으로 비유되지만 서제육교는 ”정공세작(精工細作)으로 세밀하게 정성 들여 한 작업으로 비유된다. 북으로부터 남(쪽)까지 류교(流僑:청의원 때 류교라 이름짓고 이화원 중건 후 계호교(界湖橋)라 부름), 상저교(桑苧橋)(후에 빈풍교(빈風橋)라 부름), 옥대교(玉帶橋), 경교(鏡橋), 연교(練橋), 계호교(界湖橋:청의원 때 계호교라 이름짓고 이화원 때 류교라 개명했다.) 가 있는데 교량의 재료, 조형과 색채가 각자 특색을 구비하면서도 완전한 일체감을 이룬다.
옥대교의 아치형 곡선은 보는 사람마다 첫 눈에 반하게 하여 잊을 수 없게 한다. (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4.立意(입의): 創造意境; 창조의경
중국 고전원림예술 중 특정한 의경(意境)을 창조하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 중의 하나이다. 즉 유한적인 공간 내에 그림 같은 경물(景物)을 배치하여 표현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일반적인 감정을 시로 만들어 내고 사람의 정신을 도태하는 것으로부터 정경을 융합하는 예술효과에 도달케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시정화의(詩情畵意)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원림의경(園林意境)의 개괄인 것이다.
특정한 의경을 창조하기 위하여 중국은 자고이래 명산대천 혹은 풍경명승지에 왕왕 유명인이 조각을 하고, 시인의 서문기재, 유한된 문자를 사용하여 특정 풍경점(風景點)의 무한된 의(意)를 취하였다.
청의원이 창조한 의경의 경지는 또한 “지자락수,인자락산(智者樂水, 仁者樂山:지혜로운 자는 생각이 항상 움직이므로 흐르는 물을 즐기고, 어진사람은 마음이 안정 불변하므로 변동 없는 산을 즐긴다.)”의 전통을 계승하여, 자모(慈母)와 황제(皇帝)가 만수무강할 것을 축원하였다.
또한 거울처럼 맑은 수경을 창조하는 입의(立意)의 방면을 발휘하였다. 대수(大水)는 황제의 은택을 비유하고, 은택을 광범하게 베푸는 것도 바로 황은(皇恩)의 호탕함을 보여주는 경지인 것이다.
청의원은 평화롭고 태평하여 혼란하지 않음을 상징하여, 마치 맑은 거울같이 맑은 눈으로 백성의 정을 세심하게 살핀다는 것이다.
이화원을 여행하며, 답사하며 제일 먼저 안내되어 내 발자국의 흔적을 남기는 곳이 동궁문(東宮門)일 것이다. 동궁문을 들어가기 전 유심히 뒤를 돌아보면 우뚝 세워진 패방이 놓여있다.
이 동궁문 밖의 패방(牌坊)은 양면에 액제(額題)가 써있는데 동쪽방향을 향하는 동액제(東額題)인 ‘함허(涵虛)’, 이화원방향을 바라보는 서쪽 서액제(西額題)에는 “엄수(엄水)” 라는 제(題)를 씀으로서 사물의 가장 요긴 한 것을 끌어내는, 즉 두 개의 의경을 함유한 화룡점정(畵龍点睛)으로 전체를 생동적이고도 두드러지게 하였다.
현실적인 경물(景物)로부터 말할 때 ‘함허’는 사람들에게 이화원 안이 대면적의 수면이라는 것과 더불어 수경원(水景園)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알려주고 있다.
‘함허“는 수면(水面)을 내포하여, 마치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진다는 뜻을 지닌다. ”엄수’는 사람들에게 이화원 내에 돌출한 산경(山景)을 포착하였으며 하나의 자연적인 산수원(山水園)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중국의 전통적 문물(文物)은 “탁물언지(託物言志 : 작자가 사물이나 물건, 동식물 등의 일정한 특징을 의탁하여 자신의 감정, 사상, 정조를 표달한다)”에 매우 신경을 쓴다.
때문에 사의(寫意)는 모사와는 달리 뜻이나 생각을 옮겨놓는다. 회화(繪畵) 등에서 사물의 형식보다도 그 내용, 정신에 치중하여 그리고 작업하는 일로부터 한 공간에서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해준다.
예를 들면 작자가 어느 하나의 크고 높은 산의 형상이나 풍경을 좋아하지만 그 산을 그대로 다른 장소에 건설하지는 못한다. 그 형상과 유사한 특별한 돌로 산봉우리의 우뚝 솟은 모양을 표달 해 준다. (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5.布局 (배치)
1) 宮苑建制(궁원건제)
이화원(청의원)은 북경의 서쪽 교외에 위치해 있고 중국최대의 고대 황가원림(皇家園林)이다. 인공건축과 자연산수의 결합을 바탕으로 한 조원수법(造園手法)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화원의 총면적은 290ha이고 그 중 수면이 4분의 3을 차지하며 전통건축면적이 5만㎡를 차지한다. 이화원은 궁정(宮廷)일 뿐만 아니라 또한 원유(園)이기도 한데 황제의 정치상, 생활상의 수요에 적응된다. 원(園) 중에는 천자백태(千姿百態)의 각 형태의 원림건축이 3천5백여 간이나 있다. 전원(全園)은 주요하게 만수산, 곤명호의 두 개 부분으로 조성되었고 북쪽으로는 산을 의지하고 남쪽방향은 물과 인접해 있어 호수의 빛과 산의 색채는 어우러져 상호 생기가 흘러넘치고 있다.
이화원은 ‘전궁후원(前宮后苑)“, ”전조후침(前朝后寢)의 체제로 궁원을 건제(建制)하였다. 이화원의 총체적 배치구성은 산과 호수, 자연지세의 환경과 제후(帝后)의 거주공간으로써 사용요구에 근거한 궁정구역(宮廷區), 생활구역(生活區) 및 만수산곤명호경구(萬壽山昆明湖景區)로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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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구역(宮廷區域)
동궁문(東宮門) 내부공간은 봉건제후(封建帝后)가 왕공대신(王公大臣)과 조회하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인수전(仁壽殿)을 중심으로 하며 전(殿)앞의 양측의 남북배전(配殿), 그리고 인수문밖의 남북 9경방(卿房)과 동궁문 밖의 남북조방(朝房)을 포함하고 있다. 이 조의 건축군은 동궁문밖의 ‘함허’, “엄수” 패루(牌樓)로부터 정연히 대칭되어 배열되었으며 동궁문, 인수문을 통과하여 인수전의 중축선 양측 까지 다가간다.
청조의 제후들은 여름에는 원(園)안에서 살았으며, 바로 인수전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또한 외국사절을 접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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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거주구역(生活居住區域)
인수전(仁壽殿) 뒷면(북쪽)은 바로 옥란당(玉瀾堂), 의운관(宜蕓館)과 락수당(樂壽堂)으로 조성된 봉건제후의 생활거주 구역이다. 이구역은 우회곡절(迂廻曲折)한 유랑(游廊)으로 연결되어 3개의 대형 사합원(四合院)을 소통해 준 것이다. 락수당의 남쪽은 곤명호와 인접되였고 북으로는 만수산을 의지하였으며 동쪽에는 덕화원(德和園), 대희루(大戱樓)가 있고 서쪽은 또 유람구역으로 긴 “장랑(長廊)”의 입구와 긴밀히 연결 된 이곳이 생활구역의 주체(主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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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산곤명호의 경치구역(경관구역)
이 구역은 공간구분 상 이화원의 주체 공간일 뿐만 아니라 전원(全園)의 정화(精華)부분이다. 만수산곤명호구는 만수산의 전산(前山), 곤명호와 후산, 후호의 3개 공간의 큰 범위로 구분할 수 있다.
다만 곤명호의 남호(南湖), 서호(西湖)를 포함하여 이화원 전 구역은 4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공간부분은 만수산 동부의 동궁문, 인수전등으로 조성된 조정(朝廷)과 거주(居住)공간 부분이다. 이 부분은 건축물의 분포가 엄밀(嚴密)하고 궁정(宮廷)의 기개를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거주공간의 건축 체량(體量)은 크지 않고 유리기와(알루미늄과 나트륨의 규산 화합물을 태워서 만든 유약의 일종, 유리유약을 발라서 구운 오지기와, 청기와와 황금색 기와가 있으며 궁전이나 사원 따위의 건축에 쓰이는 고급품임)를 사용하지 않고 궁정 안은 꽃과 수목으로 식재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건축물의 숨결이 비교적 농후하게 하였다.
상기 건축군의 동북쪽에는 무석(无錫)의 기창원(寄暢園)을 모방하여 만든 해취원(諧趣園)이 있는데 규모는 작으나 풍경이 십분 아름답다.
두 번째 공간부분은 만수산의 전산(前山)이다. 이곳은 체형(體型)이 거대한 배운전(排雲殿)과 불향각(佛香閣)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는 12조(組)의 작은 소건축군(群)을 배치하였다.
세 번째 공간부분은 만수산 후산(后山) 과 후호(后湖) 이다. 후산은 한 조(組)의 라마교 묘우(廟宇)를 중심으로 하였는데 그 중에서 장족의(서장의 소수민족)건축특색이 풍부한 대(臺), 탑(塔)등이 포함되었으며 주위에는 소량의 소형건축 군 외에, 수목을 전면적으로 식재 하였는데 아주 조용한 환경을 형성하였다.
후호는 한 갈래 동서방향으로 기다란 곡절(曲折)모양의 계류인데, 원래 중간부분 양안(兩岸)에는 소주(蘇州)의 임수(臨水)거리를 모방하였고 양안은 임목이 울창하고 풍경이 깊숙하여 마치 고요함 가운데 자연스럽게 조성한 것이 전산(前山)부문과의 대비가 매우 성공적이다.
네 번째 공간부분은 곤명호의 남호(南湖)와 서호(西湖)이다. 이곳은 주요하게 수면공간이다. 수면공간에는 도서(島嶼)로서 돋보이게 하였으며 각 섬에는 형식이 다른 건축이 세워져 있으며 그 중에서 용왕묘(龍王廟)섬, 십칠공교(十七孔橋)와 만수산(萬壽山)이 멀리서 서로 마주하고 있어 광활한 호수면을 공제(控制)고 있다.
호수 서쪽에는 한 갈래의 긴 제방이 있고 제방에는 6개의 형식이 다른 교량이 있으며 제방의 수양버들로 인해 두드러짐의 효과는 완연히 강남수향(江南水鄕)의 경치를 연상케 한다.
2)산수간자(山水間架) : 산수의 공간구성 틀
이화원의 산수의 공간구성 틀은 장수를 축원하는 뜻을 빌어 “주경돌출식(主景突出式)”배치를 취했다. 이화원의 총면적은 290ha로서 그 중 수면이 4분의 3을 차지하며 고건축 면적은 5만㎡이다. 전원은 주요하게 만수산과 곤명호로 조성되었고 북쪽에는 산이 접해있고 남쪽에는 수면이 있으며 호수와 산은 빛과 색을 발하여 상호간 생기를 발하고 있다. 이화원의 총체적인 배치는 산, 호수, 자연지세, 주위 환경과 제후거주원의 사용요구에 근거하여 궁정구, 생활구 및 만수산곤명호경구로 나뉜다. 때문에 이화원의 산수의 공간구성 틀은 전 원의 총체적 배치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
전궁후원과 전조후침의 전통적인 배치형식은 청의원이 원명원의 부속원이라는 성질과 결합하여 육로(陸路)궁문을 동(東)쪽으로 방향을 향하기로 결정했다.
동팔소(東八所), 서팔소(棲八所)를 포함한 후침복무성(后寢服務性)용지(用地)는 산록에 인접한 궁(宮)이 있는 평지에 위치하였다. 수로(水路)로 원(園)에 진입하면 남(南)으로부터 수의교(橋)에 들어서고 정면으로부터 점차 원(園)의 경관을 서서히 접목하게 된다.
곤명호 이전의 옹산박의 크기, 규모, 형태는 이화원의 변천과정을 알아보는 중요한 단서이다. “옹산박(瓮山泊)동제(東堤)”의 기지(基址)는 1991년 1월 5일의 “청결공정(공사)” 중에서 그 규모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준설공사의 성격으로 곤명호수 밑바닥의 퇴적물 등을 청결케 하고 물 흐름을 원활히 소통시켜 주는 공사를 하였는데 이와 동시에 이 공사를 통하여 곤명호수의 역사적인 변천을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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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수면공간을 서호(西湖), 남쪽의 수면공간을 양수호(養水湖)라 일컫는다. 이렇게 하니 자연히 “1지3산(一池三山)”의 황가원림전통을 계승, 발전하였다.
모든 공간처소의 발전은 억지로 틀에 맞춘 것이 아니라 지형에 따라 알맞게 조합한 것(因地制宜인지제의)이다. 1지3산(一池三山)은 원래 1지5산(一池五山)이라는 말이 있다. 즉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원교(員嶠),대여(岱輿)이다. 곤명호에는 6개의 섬이 있으나, 비교적 선명한 것은 지춘정, 용왕묘, 치경각, 조감당과 봉황돈(鳳凰墩) 5개 섬이다. 그러나 이 5개 섬 중에서 또 3개 섬에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봉래(蓬萊) 등 구명(舊名)으로 인한 것이 아니며, 주요한 섬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 남호도의 용왕묘는 그 위치가 현혁(顯赫)하여 그 어느 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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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建築布置 (건축배치)
●軸線處理(축선처리)
이화원의 축선은 만수산을 축으로 하고 산의 형상에 근거하여 건물을 건축하였다. 배운 문(排云門)으로부터 불향각(佛香閣)의 남북 중축선과 북궁문 (北宮門)으로 부터 향암종인문각(香巖宗印文閣)의 남북축선 2갈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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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體建築, 建築組, 建築群組合爲一體(단체건축, 건축조, 건축군조락을 한 일체로 조합)
이화원 내의 건축물과 건축군은 그들의 성질과 내용에 따라 분류한다면 대체적으로 13개로 나눌 수 있다. : 궁전(2곳), 사묘(寺廟)(16곳), 정원 건축군(14곳), 소 원림(16곳), 단체점경(單體點景)건축(20곳), 장랑(長廊)(2곳), 희원(戱園)(1곳),성관(城關)건축(6곳), 촌사(村舍)(1곳), 시사(市肆)(상점건물:2곳), 교량(11곳), 원문(園門5곳), 후근(后勤)보조건축(5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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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山構室, 其趣恒佳 (인산구실, 기취항가: 자연지형에 의한 건물조성은 아름다움에 다다른다.
이화원 3,000여개의 정(亭), 대(臺), 루(樓), 각(閣), 헌(軒), 관(館), 랑(廊), 사(), 사(寺), 묘(廟), 교량(橋梁), 방(舫)은 자연지형의 지세에 적합하게 만수산에 분포되어 있다. 곤명호수 변에 배치된 건축물들은 湖光山色(호광산색)이라 불리 울 만큼 건축물이나 장식물이 황금빛과 푸른빛으로 휘황찬란하여 그 이름을 날린 대형 황가원림이다. 이는 중국고전원림 건축기술을 높은 경지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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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篇一律和 千變萬化 (천편일률과 천변만화)
(建築主要類型和平面, 立面變化與統一; 건축의 주요 유형과 평면, 입면변화와 통일)
청의원에 대해 언급하자면 그 중 궁정(宮廷)건축은 척도가 비교적 크고 간 수가 많고 곁채(廂房: 행랑, 결간, 집의 주체가 되는 간의 동서 양쪽에 딸린 간살)를 갖추고 원락(院落-정원)도 그에 따라 크다. 반대로 원림(園林)건축은 척도가 비교적 작고 간수가 적으며 곁채도 갖추지 않고 원락도 작으며 전체적인 건축군의 크기는 작고 정교하며 가볍고 영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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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質感和色彩 (질감과 색채)
이화원은 (획일적인) 천편일율적인 건축양식을 적용했다기 보다는(지양하고) 황가원림의 기파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비록 일부 건축은 청기와 지붕, 소식채화(蘇式彩畵)등 비교적 조화롭고 온정한 색조(色調)로서 건축을 장식하였지만, 주요한 부분의 건축군(建築郡), 예를 들면 배운전(排云殿), 불향각(佛香閣) 등은 색채처리에 있어 의연히 화려하고 웅장하였다(十分富麗堂皇). 이런 가운데 건축물과 주위의 자연산수, 주요 경관 간에 색채방면을 언급하자면 일종의 강열한 대비관계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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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細部處理 (園의 세부처리)
청의원은 규모가 크고 웅장한 부위(部位), 예를 들면 전산(前山)과 후산(後山)의 중앙 건축군은 일률적으로 “대식(大式)”작법을 사용하였다.
기타 구역(地段)에서는 황가 원림건축 중의 가장 소박(簡朴)하고 간결한 “소식(小式)”작법 과 민간 풍격(風格)이 서로 융합되어 섞인 변체(變體)식 작법을 사용하였다. 바로 이런 변체로서의 건축장식으로 하여금 전체(整個)인 원림은 화려함중에 적지 않은 소박함과 담아(淡雅)함이 섞인 민간적인 향토(鄕土)분위기도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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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鋪地 (포장)
만수산 전후(前後), “주체(主體)건축군”의 중축선 양측은 상호 대칭되는 건축의 실외지평(地平)선은 거의가 모두 동일한 등고선 상에 있다. 그러나 중축선과 비교적 떨어진 좌,우에서 상호 균형을 이룬 일부 분경점(景點)의 경관들은 모두 근접한(相近) 실외 지평표고(地平標高)를 취하였다.
한편 만수산은 쳔연적인 산세의 첩낙조합(疊落組合: 겹겹이 층을 이룬 지형)으로 되어 있어 중축선과 주요경관요소를 고려한 배치요구에 따라 건축 대기(臺基- 기초단)를 조성하고 통로로 랑(廊)과 계단을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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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植物種植設計(식물식재설계)
청의원은 건원 전(建園 前), 원래의 서호(西湖)는 연꽃과 제방 버들(버드나무)로서 당시에 이름을 날렸다. 만수산은 옹산(甕山)이라 불렀으나 실은 고립된 하나의 산체(山體)로서 비교적 공간구성 면에서 융통성이 없었다.
《제경경물약(帝京景物略)》중에 옹산을 “토지가 메마르고 도처에 초목을 볼 수 없다”는 민둥산으로 묘술 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수미청려(秀美淸麗) 옥천산과 서호를 하나로 합쳐 불렀다. 그러나 조원의 지형선정 면에서 보면 서호와 옹산이 형성한 북산남호(北山南湖)의 지모결구(地貌結構)는 양호한 방향성이 있을 뿐 만 아니라 기세가 매우 광활하였다.
주요한 기존 식물군락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의 혼합림이고 후계하(后溪河)에는 주요하게 떡갈나무와 유송 등의 수종이었다.
건원(建園)하는 동시에 만수산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광범하게 식재하였으며 옹산은 “도처에 무덤이다”는 면모(面貌)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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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置石和綴山 (치석과 철산- 돌 배치와 산 다스림)
이화원 인수전과 곤명호 사이의 지역은 궁전구와 거주구에 위치해 있지만 원대(元代)의 “야율초재”(耶律楚材)의 사묘와 인접되어 있다. 이 지역은 유람구의 경계(交界 경계지역)이기에 , 토산에 돌을 혼합하여 가산(假山)을 쌓았다. 이는 두 지역의 공간을 땅 가름(갈라놓는) 하는 동시에 , 경관을 시각적으로 가로막는 장경처리 (障景處理)와 유도했다. 이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동선체계를 공간과 결합시켜, 가고자 하는 공간을 진입할 때 시각적인 면에서 먼저 공간을 축소한 후에(收縮) 이를 벗어나면 전면에 갑자기(豁然) 확 트이는 색다른 경관을 대하는 효과를 가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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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景点分析 (주요경관지 분석) (諧趣園; 해취원)
해취원(諧趣園)은 이화원의 동북모퉁이, 만수산의 동쪽비탈에 위치해 있으며 원명(原名)은 혜산원(惠山園)이다. 가경(嘉慶)시기에 중건(重建)하여 지금의 이름 해취원(諧趣園)으로 개명하였다. 건륭19년(1754)《어제혜산원8경시서(御制惠山園八景詩序)》에 :“江南.... 名曰惠山園(강남… 명왈혜산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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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問名 (이름의 來原)
景名(경명): 기창원(寄暢園)
問名(문명):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一觸一詠, 亦足于昌敍幽情....因寄所托, 放浪形骸之外(일굉일영, 역족우창서유정....인기소탁, 방랑형해지외)”의 문장에서 景名(경명)을 취하였는데 이는, “술을 마시며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시를 읊기도 하지만, 정감이 어린 그윽한 산천을 직접 거닐며 이를 회상하는 것이 더욱 즐겁구나...이것은 내 자신의 정신을 이미 산천의 아름다움에 위탁하였기에 가보지 못한 산천역시 마음이 쏠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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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相地 (상지)
해취원의 “상지”(相地)가 합리(合宜)함을 언급한다면 우선 (먼저) 그가 “방중유창(倣中有創: 모방 가운데 창조함)” 의 대상인 절강성 무석의 기창원(寄暢園)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무석기창원(無錫寄暢園)과 혜산원을 묘사한 글에서 “雙河舟溯慧溪灣, 雅愛秦園林壑間. 月鏡光含窓, 雲伸聲澗潺潺, 淸幽已擅昆陵境,規寫曾敎萬壽山,一沼一亭皆曲肖,古柯終覺勝其間(쌍하주소혜계완, 아애진원림학간. 월경광함창렴렴, 운신성요간잔잔, 청유이천곤릉경, 규사회교만수산, 일소일정개곡초, 고가종각승기간)라 하였다.
상기 글은, “무석 쌍하구(雙河口)의 배들이 아름답고 고요한 강의 굽이돌이에 정박하였고, 유람객들은 진원(秦園)의 산림과 산간을 좋아했다.
거울 같은 둥근 달빛이 창살에 쏟아지고, 운해(雲海)에서 떨어지는 산간의 물은 졸졸 흐르는데, 그 그윽하고 청아한 운치 있는 경치는 곤릉(昆陵)과 견주었다. 이러한 정경을 만수산의 구조와 배치에 따랐으며 한 개의 정자, 하나의 늪지, 호수도 흡사하게 하여, 결국 고가(古柯)라는 조원가의 판단응 해취원이 만수산을 초월하였다“고 묘사하므로, 건륭황제로 하여금 기창원을 모방하여 만수산 동쪽 기슭(산록)에 해취원의 전신인 혜산원(惠山園) 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3) 立意 (입의)
해취원의 입의(立意)에 대해서는 건륭황제가 1751년 봄에 남방으로 순찰(순시,시찰)하면서 그곳의 기창원(寄暢園)에 묵게 되었다. 그 때 이곳에 매혹되어 “박채명경, 집금일원(博采名景, 集錦一園: 널리 명경(名景)을 취하여, 하나의 園을 걸작품으로 조성하였다.)”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조성할 택지를 선정하고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는 창조적인 것도 있었다. (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4) 布局 (배치)
해취원은 기창원을 모방한 것인데 그 학습한 효과가 오히려 모방 중에 창조적인 것에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인 정황은 각자 모두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청출우람이승우람(靑出于藍而勝于藍: 청색은 남색에서 나왔지만 남색의 경향보다 우위에 있다)”의 경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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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水間架 (산수간가)
두원(兩園)의 공통점은 모두 배산임수(背山面水:산을 등지고 물을 향함)의 건축물을 지은 것이다. 다른 점은 기창원은 원산(遠山-멀리 떨어진)인 구룡산(九龍山)과 근산(近山-인접한)인 석산(錫山)이 있다.(관련사진게재, 이하내용 생략...)
● 中軸線處理 (중축선처리)
해취원은 의경(意境)에 있어 한 차례의 개조(改建 개축,재건)와 다시금 중건(重建 다시 건설함)을 거친 후의 의경(意境)은 예전과 크게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서태후가 이화원을 중건한 것과, 당년(1750년)에 건륭황제가 건원(建園)한 목적이 다르기에 건축밀도 또한 증가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이런 정황 하에서도 해취원은 여전히 원(園) 내에 건축물이 많지만 복잡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 느낌을 유지했다. 이는 주요하게 두 갈래(兩條)의 중축선이 질서 있게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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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建築 (건축)
비록 해취원의 건축밀도(密度)는 그 생활수요에 의하여 과대(過大)하지만, 건축의 한 면으로써 청식궁실(淸式宮室)의 표준적인 작법(作法)에 따라 화려하고 웅대하였으며, 다른 한 면으로는 될 수 있는 한 자연산수와 서로 배합되어 사념(邪念)이 없이 소박하고 아담하였다(淸朴雅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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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點景 (점경)
해취원을 두루 유람하여 거닐어 보면, 초기에는 건륭의 《혜산팔경시(惠山八景詩)》에서 서술한 재시당(載詩堂), 묵묘헌(墨妙軒), 취운루(就雲樓), 담벽재(澹碧齋), 수낙정(水樂亭), 지어교(知魚橋), 심시경(尋詩逕), 함광동(涵光洞)은 이미 그 인상이 지난날의 연기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함 원당(涵遠堂), 음녹(飮綠), 세추(洗秋) 등의 건축물은 아직도 사람들로 하여금 여전히 미련을 가지게 하여, 계속 머무르며 돌아가는 것을 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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