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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14. 예수비전교회 주일낮예배 아름다운 사랑의 소중한 가치 유백선 목사
룻기 1:15-18
예수비전교회 주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한글비석로 24라길 76-5
(상계5동 136-55) 상담 : 유백선 목사, ybs9191@hanmail.net
대표전화 1899-9191, 02) 6221-6468, 010-8346-6468,
예수비전교회는 매주 화요일(오전 11:30~오후 1:30)에 “사랑의 국수잔치”를 열어 이웃 여러분들을 섬기고, 초대합니다. 오셔서 맛있게 드시고 교제하며 은혜를 나누시기를 소망하며 초청합니다. 예수비전교회 카페에는 삶의 행복과 깊은 감동을 주는 메시지가 더 많이 있습니다. 카페에 들어오셔서 함께 나누시고 예수님의 비전으로 복을 받고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
http://cafe.daum.net/jesusvision91 , http://cafe.daum.net/boram9191
웹툰 작가 예환 님이 쓴 “같이 살래유?”라는 이야기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홀로 과거에 가 있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면 제일 먼저 “제가 누군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할아버지에게 아주 괴로운 질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낯선 사람이 자신에게 ‘내가 누구냐? 내가 누군지 아느냐?’ 물어보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우리 가족은 겪지 않을 줄 알았던 치매가 할아버지에게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산책을 즐기고, 경로당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경로당에 가면 할머니가 서둘러 따라나섰습니다. 할아버지가 놀이터에서 걸음을 멈추자 할머니가 근처 의자에 앉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처음 본 사람을 대하듯이 물었습니다. “혼자 살아유? 나이는 몇이유? 누구랑 살아유? 바깥양반은 어디 갔시유?” 50년간 같이 살아온 인생의 동반자인데, 할머니를 못 알아보자, 서운했나 봅니다. “그려유. 나 혼자 살아유.” 그러자, 할아버지가 “같이 살래유?” 해서,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나 먹여 살릴 돈은 있수?” “자식들이 줘서 있지.” 이 대화를 통해서 순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기억이 돌아와서 할머니에게 장난을 친 것일까? 아니면 나이든 할머니에게 또 한 번 반한 것일까? 어쩌면 할아버지는 타임머신을 타고 할머니를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이 치매에 걸렸을 때 잊은 것이 감정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할아버지를 다그치지 않고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하셨는데 이것이 50년 묵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용돈을 몰래 쥐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할아버지, 그곳에서는 행복하시죠?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치매는 최근의 기억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나마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만약에 감정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런 느낌도 없고, 표정이 없고, 생각과 행동이 따로 놀게 될 것입니다. 감정을 잃어버리면 기쁨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슬픔도, 죄책감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감정을 잃어버리면 다른 행동장애가 나타납니다. 기억력과 감정은 뇌의 편도체에서 주관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왜 기억이 떨어지게 될까요? 세상물정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많이 경험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 감동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소소한 것을 보면서도 뭉클한 감동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감동이 오면 오래 기억하게 됩니다.
감동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성품과 행동이 좋지 않습니다. 성품과 행동이 고운 사람은 평생 감동을 줍니다.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은 뇌가 활성화 되고, 기억력이 더 좋아집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는 사람은 열정이 있고,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감동하면 뇌에서 좋은 호르몬이 나와서 육체가 건강하고, 정신이 건강하고, 영적으로 강건합니다. 감동의 문이 열려야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하늘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감동하는 마음에 사랑이 가득 차 있습니다. 감동과 사랑이 듬뿍 있는 사람이 멋진 사람입니다. 감동과 사랑은 삶으로 고스란히 기억하게 하는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감동을 남기는 의미 있는 삶을 살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룻기는 4장으로 아주 짧지만 아름다운 사랑과 충절로 가정의 모델을 보여주는 보석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룻기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고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룻의 모습을 자주 그렸습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is Millet)는 「이삭줍기」라는 유명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룻기가 왜 구약성경에 들어 있을까요?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 5절-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구원하러 보내신 예수님의 계보에 룻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요, 다윗은 룻의 증손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롬 10:11-13) 이 구원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복음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대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룻기의 시대적인 배경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입니다. 사사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 자기 기준, 자기 판단과 자기 소신에 옳은 대로 행동하였습니다.(삿 17:6) 오늘날도 사사시대처럼 자기 소신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 지역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과 기근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여겼습니다.(삼하 21:1) 아합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숭배하였을 때 엘리야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왕상 17:1) 기근과 지진은 종말의 징조요, 재난의 시작입니다.(마 24:7-8) 흉년은 기근으로 배고픔의 고통을 줍니다. 흉년은 민심이 흉흉해져서 서로 헐뜯게 됩니다. 흉년은 작은 희망과 비전마저 빼앗아버립니다.
엘리멜렉은 흉년이 들자 아내(나오미)와 두 아들(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모압은 “아버지의 소생”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이 죄악으로 멸망할 때 소알로 나왔습니다. 그 후에 불안하고, 절망했던 두 딸들이 아버지(롯)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자식을 얻었는데, 모압은 큰딸이 얻은 자식입니다.(창 19:33) 모압 족속은 다신교를 믿었는데, 그모스를 국가의 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민 21:29) 그모스 신에게 아이를 제물로 바쳤습니다.(삿 11:18) 모압은 사해 동편 해발 900m의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당시에 모압지방은 식량이 넉넉해서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모압으로 이사를 갔는데, 얼마 후에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습니다.
나오미는 남편이 죽은 후에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 후손을 통해 위로를 받기 위해서 두 아들을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의 며느리들이 모압 여인들이었습니다. 첫째 아들(말론)은 오르바와 둘째 아들(기룐)은 룻과 결혼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0년쯤에 두 아들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서 모압에 갔는데, 모압에서 더 큰 흉년을 당했습니다. “나오미(ימענ/na’omiy)”는 “즐겁다, 기쁘다”는 뜻인데, 이름처럼 기쁘게 살지 못했습니다. 즐겁게 살지도 못했습니다. 흉년에 쓰디 쓴(마라) 인생으로 환란과 고생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과부가 된 나오미가 역시 과부가 된 두 며느리와 함께 사는 삶이 행복할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가장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시어머니는 손주를 낳아준 며느리를 사랑하고 예쁘게 봐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며느리는 남편을 낳아준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지 않겠어요? 사위가 장모님을 대할 때나 장모님이 사위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수십 년을 같이 살아도 한 가족이 되지 못한 가정들이 많습니다. ‘나는 시집에 왔다. 나는 장가들었다. 저건 남의 식구다. 저건 처가 식구다.’ 이런 생각, 이런 마음을 뛰어넘어야 행복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모든 며느리들이 ‘하와’를 가장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하와와 아담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모압에서 더 큰 흉년을 맞았던 나오미가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흉년을 풀어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두 며느리들이 마음에 걸려서 말했습니다. 여기서 나오미의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8절-9절을 보면,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자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재혼시킬 자식들이 없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니 나는 너희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13절) 여기서 “아프다(마라르/ררמ/marar)”는 말은 “맛이 쓰다, 분통이 터지다, 고통스럽다, 괴롭다, 마음이 상하다, 슬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나오미는 왜 남편과 두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 여기서 “치셨다(아쯔아/האצי/yatse’ah)”는 말은 “떠나다, 나가다, 퇴장하다, 실패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큰 며느리(오르바)는 재혼시킬 자식이 없고, 여호와께서 나를 치셨다고 하자, 시어머니를 따라 나설 마음을 접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으니 함께 할 수 없고,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떠났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말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세요.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나오미가 룻에게 강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룻이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세요.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 말 속에 룻의 아름다운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룻의 마음이 왜 아름답다고 할까요? 사실 현재의 룻은 뭔가 기대하고, 소망을 가질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재산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집에서 재혼할 상황도 아닙니다. 자신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의 미래가 전혀 행복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의무만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룻이 시어머니를 굳이 따라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룻의 가정관입니다. 룻은 나오미를 어머니로 받아들였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시어머니로 부르지 않고 어머니로 부르고 있습니다. ‘딸은 어머니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딸도 갈 것입니다. 어머니가 머무시는 곳에 딸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곧 딸의 백성입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어떻게 하느냐?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로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룻은 어머니를 지키고, 어머니와 함께 하는 것을 옳다고 여겼습니다. 룻은 결혼하고 나서 가정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결혼하면 나는 완전히 그 집 식구요, 그 집의 딸이다. 나의 운명은 남편의 집에 달려 있다. 남편이 살아 있든지, 죽었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나오미도 룻을 딸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룻이 시어머니에게 의(義)와 효(孝)를 다할 때 하나님께서 행복의 보너스를 주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찾겠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룻은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다가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룻이 도리를 다하고, 효도하는 모습에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고, 칭찬했습니다. ”수고하는 저 어여쁜 여인이 누구냐?“ ”나오미의 며느리인데,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정성껏 봉양하고 산다네.“ 그 소문이 상처(喪妻)하고 혼자 지내는 보아스에게도 들렸습니다. 엘리멜렉의 친족이었던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룻은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통해 낳은 아들이 오벳입니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요,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리아 노보가 말했습니다. “시간을 가장 잘 측정하는 방법은 그중 얼마나 많은 부분을 사랑에 바쳤느냐를 가늠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누구에게 사랑을 바쳤습니까? 나는 어디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고 있습니까?
둘째는 룻의 신앙관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가정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룻은 그모스 신을 버리고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서로에게 평안과 위로를 줍니다.(롬 1:12)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합니다.(고전 2:5)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앞서야 행복합니다. 이 믿음은 내가 마땅히 행할 도리를 다하게 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인생의 흉년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은 그 자체가 소중한 가치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완전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이 머문 가정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생명이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배웁니다. 아름다운 사랑이 머무는 가정이 곧 교회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이 머문 가정이 천국입니다. 이제 우리의 가정이 아름다운 사랑과 섬김으로 천국을 이루고,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소중한 가치를 배우는 천국으로, 천국의 삶을 함께 나누는 소중한 가족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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