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탄강진하도10첩병(王世子誕降陳賀圖十疊屛)-고종의 둘째아들,
왕세자가 될 원자의 탄생을 기념해 산실청 관원들이 만든 병풍이다.장대한 궁중잔치 분위기가 읽혀지듯,
왕세자의 탄생은만백성의 축복이었다.
-그리고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나면종 1품 벼슬을 받을 이가 선정됐으니,,
그 주인공이 바로 왕의 유모,봉보부인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유모를 통해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면서 아이의 품성이 저절로 유모를 닮아가게 된다.. 믿었다.
-왕실의 유모는 아기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는 산모 중에 후덕하고 건실한 성품을 가진 여인으로 선발했다.
특히 왕세자의 유모는왕세자가 왕 위에 오르면‘봉보부인’이라 하여 종 1품 벼슬을 받았는데,
오늘날 부총리급의 높은 벼슬이다.
-양반가 여성들이 남편의 품계에 따라 외명부 품계를 받긴 했지만
남편이 아닌 자신의 공로로 품계를 받는 여성은 왕세자의 유모, 즉 봉보부인이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도 봉보부인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고종의 유모가 사망하자 그 장례를 논하는 고종과 신화들의 대화다.
“봉보부인의 장례에 행해야 할 여러 일들은 한결같이 전례(典禮)에 의거하되,
후하게 거행하도록 호조와 예조에 분부하라.”고종 28년 12월 28일 승정원일기 中
-봉보부인의 장례를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치루도록명하고 있다.
영조조 기미년(영조 15) 봉보부인의 장례에는 2등의 예장(禮葬)을 사용하였고,
정묘조 을사년(정조 9)에는 기미년의 예에 따라 거행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고종 28년 12월 29일 -승정원일기
-봉보부인에 대한 왕의 예우는 극진했다.
역대 어느 왕도 자신의 유모를 홀대한 적이 없을 정도로 유모는 귀한 존재였다.
-왕세자의 보양과 인성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유모,
봉보부인!하지만 유모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병에 걸린 왕세자를치료하는 것도 유모의 몫이었다.
-그런데 의원도 아닌 유모가어떻게 왕세자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일까?
승정원일기에 그 답이 있다.
영조 세자에게 약을 먹이는 것이 매우 어렵다
권성징 사탕을 많이 섞으면 약의 맛이 매우 쓰지는 않을 것이며 작설의 맛 또한 매우 담백합니다.
현기붕 작설을 심하게 달이면 맛이 더욱 좋지 않으며 젖을 통해 드시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영조 13년 7월 30일 승정원일기 中
-유모를 통해 약을 먹이느냐, 왕세자에게 직접 먹이느냐를 두고 나누는 대화다.
-대게 아이는 비장과 위가 약해 독한 약을 직접 투약할 경우 장기가 손상될 우려가 있다.
하여 아이에게 먹일 약을 유모가 대신 먹고젖을 물려 간접적으로 약이 아이에게 전달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왕세자의 병이 악화되면제일 먼저 유모를 살폈다.
-영조 28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하루에도 11번이나 대변을 볼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다.
영조와 약방 관원들은 적절한 처방을 내리기 위해 논의를 했는데,
당시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유모의 음주습관이 세손의 병의 원인일 것이라고추측하고 있다.
영조 : 유모가 술을 자주 마신다.
심하게는 밤에도 술을 마셔 아이의 옷에서 술 냄새가 난다
김약노 : 유모가 술을 마시는 것은 매우 금기해야 할 일입니다.
영조 : 이번 세손의 병은 아마도 술에 상한 듯 하다.
김한철 : 지극히 공경한 지위에 있으면서 유모가 어찌 감히 술을 마실 수 있습니까?
신이 만약 언관이라면 죄를 청할 것입니다.
영조 : 유모가 자신의 공을 지나치게 과신했다. 영조 28년 2월 2일 승정원일기 中
-그런데 이상한 점은 영조는 유모의 음주습관을 참고하여 약을 처방하도록 지시했다.
유모가 술을 즐긴다면 유모를 바꾸면 그만일 터!
왜 영조는 유모의 죄를 감싸고 있었던 것일까?
-당시 양반가에서는 한번 선택된 유모를 바꾸는 것이 아이의 건강과 인성발달에 좋지 않다..
라는 믿음이 강했다.
특히 왕실에서는 유모를 바꾸는 것이 왕세자의 운명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정조의 첫아들로 3살 되던 해에 세자로 책봉된 문효세자. 하지만 5살, 너무도 짧은 생을 살다갔다.
당시 세자의 병명은 홍역이었다.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조선시대,
홍역으로 목숨을 잃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언관들과 유생들은 해당 의생과 유모의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젖은 소아의 목숨입니다. 어찌 5,6세를 채우지 않고 유모가 크고 작은 병을 겪지도 않았는데
경솔하게 먼저 젖을 끊는 것이 어찌 보양하는 도리겠습니까 !! 정조 10년 6월 1일 승정원일기 中
-세자가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젖을 끊어 세자에 대한 보양의 도리를 잃어버리게 했다는 것,
그것으로 세자의 죽음의 책임을 유모에보고 귀로 들은 모든 것을288년 동안의 기록,
승정원일기!
그 철저한 기록정신이 있었기에우리는 오늘 흥미진진한 역사의 한 가운데 서 있다.
-하지만 당시 문효세자의 유모는 병이 들이 잠시 젖을 끊었던 것이어서 그 죄를 물을 수 없었고,
-조선왕조 대대로 유모를 극진히 대접하던 왕들은 유모의 허물 앞에서는그 어느 누구보다 관대했다.
-이처럼 승정원일기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조선시대 새로운 여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사를 좋아 하다보니
잘 읽었습니다 감사 ^&^
잘 읽었습니다. 유모의 역할이 중대하죠.
아마도 스승과 같이 솜긴거 겉야요
재밋게 읽고 갑니다.~~~
수고 하셨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