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대기에 파문을 일으킨다. 여자는 작업대 앞에 앉는다. 스탠드 조명을 아래로 바싹 끌어내리지만 눈앞이 흐리다. 눈을 비벼도 안개가 보인다. 메스의 날이 안개 속의 불빛을 눈부시게 반사한다. 새의 턱과 목이 만나는 부분에 날카로운 메스 끝을 댄다. 육질에 닿지 않도록 아주 살짝 힘을 준다. 매끈한 알몸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끗한 가죽을 얻기 위해서. 의식이 아니라 손의 감각을 따라서 칼날이 새의 배를 종단한다. 턱밑에서 항문까지 단칼에 긋고 나서 얇은 가죽을 양쪽으로 젖힌다. 검붉은 속살이 드러나면서 절개선을 따라 조금씩 새어나오던 비릿한 피냄새가 확 달겨든다. 새의 몸통에 코를 가까이 들이댄다. 이 시들큼한 냄새를 여자는 지독히도 사랑한다. 어쩌면 이 냄새를 맡는 재미에 죽은 짐승들의 배를 가르는지도 모른다. 안개 속을 떠다니는 죽은피.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동안 죽은피의 비린내를 음미한다.
방향성이 약한 생피와 달리 죽은피는 자신의 최후를 알리는 강렬한 비린내를 풍긴다. 죽은피의 비린내는 짐승의 두툼한 거죽에서 스며 나와 기류를 타고 날아간다. 죽은피는 자신이 헛되이 썩어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널리 죽음을 퍼트려 주린 자들을 불러모으는 게다. 죽은 짐승의 고기를 뜯어먹고 사는 독수리나 하이에나 같은 놈들은 수십리 밖에서도 그 비린내를 맡아낸다. 고공을 비행하면서 바람결에 실려오는 죽은피 비린내를 귀신처럼 포착해내고 수풀 사이로 유유히 내려앉는 독수리. 오직 후각에만 의존해서 어둠을 휘저으며 험난한 초원을 가로지르는 하이에나.
산탄처럼 흩어지는 냄새를 쫓아 허공에 대고 코를 몇 번 킁킁거리며 죽은피를 찾아 헤매는 짐승들을 상상하다가 눈을 뜨고 그녀는 다시 메스를 집어든다. 칼날을 살짝 대어 새의 몸에서 얇은 껍질을 조심스럽게 분리해낸다. 몸통에서 가죽이 거의 다 떨어지자 가위를 집어든다. 머리통에 바짝 대어 목뼈를 끊어놓는다. 머리통이 아래로 툭 떨어지면서 가느다란 목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만질만질한 질감이 느껴지는 안구, 샛노란 테가 둘러진 검정색 눈동자에는 아직 영혼이 남아있는 듯 광채가 흐른다. 전투기 앞부분처럼 툭 튀어나와 있는 부리. 그 부리 윗부분에 더께처럼 얹혀있는 붉은 반점은 제왕의 징표 같다. 갈고리 같이 굽은 부리 끝으로는 무수히 많은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먹었으리라. 먹이를 다 먹어치우고 나서는 거친 바위에다 부리를 쓱쓱 문질러 엉겨붙은 살점을 떼어냈을 것이다. 부리 끝에는 아직도 그가 먹어치운 짐승의 살점이 말라 붙어있다.
새는 천연기념물 제323호인 매이다. 황조롱이나 개구리매, 새매 따위의 잡매가 아니라 그냥 매라고 했다. 날개를 넓게 펼치고 하늘의 제왕다운 모습으로 유유히 고공을 선회하다가 먹이가 포착되면 날개를 오므리고 시속 360km의 초고속으로 급강하하여 발톱으로 먹이를 낚아채는 매. 급강하의 속도는 동물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라고 윤사장이 말해 주었다.
뻬뜨꽁 쌔끼들이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댔지. 우리편은 순식간에 전멸해버렸어. 쨩글에 사는 묘족들이 날 데려다 총알을 빼내고 상처를 꿰매줬어. 그 놈들은 사람이 죽으면 박제를 해서 미라로 만들어 산 사람들 곁에 둔단 말이야. 야수들을 잡아다가는 박제를 만들어 방에다가 모셔두기도 하지.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죽은 자가 지녔던 강한 힘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어. 이런 놈을 곁에 두고 있으면 천하에 두려울 게 없을 거야.
대물을 붙잡아 올 때마다 격한 감동에 사로잡혀 아랫배의 총상을 까내 보여주며 그가 늘상 하는 말이다. 흥분해서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그의 몸에는 화약냄새와 죽은피 비린내가 감돌았다. 멸종 위기의 새이므로 몇백을 호가할 물건이라고 신경 써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고 그는 다시 떠나갔다.
날개에는 어떻게 이런 것으로 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질기고 뻣뻣한 플라스틱 질감이 느껴지는 억센 깃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날갯죽지를 붙들어 올리고 가죽을 들춰서 어깨뼈와 연결된 날개관절을 찾아낸다.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관절을 싹둑 끊어놓는다. 날개는 살집은 거의 없고 가볍고 단단한 뼈와 질긴 심줄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가죽을 벗겨낼 필요가 없다. 나무토막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무릎뼈 아래의 종아리도 마찬가지다. 무릎뼈를 자를 때는 허벅지의 가죽과 깃털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안구, 부리와 함께 허벅지에 수북하게 자라나 있는 깃털도 하늘의 제왕으로서 위엄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여자는 벼랑 위에 높다랗게 치솟은 굴참나무 꼭대기에 우뚝 서서 허벅지의 긴 깃털을 바람에 날리고 있는 매의 모습을 기억해낸다. 윤사장은 '저것 봐! 굉장하지. 저게 바로 하늘의 제왕이야. 저런 걸 박제해서 곁에 두면 정말 든든할 거야.' 하면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그는 지금도 산간벽지나 도서의 어느 절벽 아래에 진을 치고 숨어 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돌아올 때쯤에는 수염이 다시 원시인처럼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을 것이다. 벌써 그가 기다려진다. 죽은피 냄새를 그득히 묻혀서 돌아올 그 남자가.
목과 어깨, 무릎의 관절들을 모두 잘라내자 검붉은 새의 알몸이 가죽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된다. 마치 잘 다듬어진 통닭 같은 새의 몸통을 신문지 위에 놓아둔다. 이제 새의 가죽에는 날개와 아랫다리, 머리통이 힘없이 매달려있다. 여기에다 실을 매달아 조종을 하면 영락없는 꼭두각시인형이다. 새의 가죽을 작업대 위에 펼쳐놓는다. 스탠드를 움직여 불빛을 조절한다. 가늘고 긴 갈고리를 절단된 새의 목구멍으로 쑤셔 넣는다. 갈고리로 골 속을 휘저어 후벼내기를 몇 차례 반복한다. 날개와 다리는 그대로 두고 건조만 잘 시키면 부패하는 일이 없지만 머리통은 깨끗하게 비워내지 않으면 구더기가 들끓게 된다.
재가 가득 담겨 있는 플라스틱 통에 손을 담근다.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감촉이다. 참나무를 완전히 연소시켜 만든 고운 재는 불 냄새를 머금고 있다가 천천히 뱉어낸다. 아직 습기가 남아있는 가죽 안쪽에 재가 닿는 순간. 잊혀질 듯 하던 죽은피 냄새는 불 냄새와 만나면서 다시 한번 강렬하게 피어오른다. 그 냄새에 여자는 잠깐 시야가 몽롱해지면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재는 방습제로 사용된다. 백반이나 화공약품으로 무두질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손에 닿는 감촉과 오래도록 은근하게 배어 나오는 불 냄새 때문에 여자는 재를 고집한다.
재가 마르는 틈을 이용해서 철사로 새의 골격을 만든다. 윤사장이 원하는 맹금의 자세는 한껏 몸통을 낮추고 쫙 펼쳐 올린 양 날개 사이로 고개를 쑥 빼어 올리고 주둥이를 벌려 포효하는 모습이다. 적을 향해 울부짖는 듯한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가 살아나야 한다는 점을 윤사장은 거푸 강조했다.
얼기설기 철사를 엮어 골격을 짜고 거기에 솜을 두텁게 입혀 노끈으로 동여 묶는다. 그렇게 완성된 심에다가 가죽을 씌워 눈대중으로 모양을 가늠한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는 생각이 들자 목구멍 속으로 철사를 깊이 쑤셔 박아 머리통을 고정시킨다. 그 다음 날개와 다리의 뼈에 철사를 깊숙이 박아 넣는다. 머리통과 사지가 감쪽같이 심에 연결된다. 가죽이 탱탱하게 부풀도록 심과 가죽 사이의 뜬 공간에 솜을 자잘하게 찢어 밀어 넣는다.
꽉 조인 점퍼의 지퍼를 잠그듯 가죽을 잡아당겨 절개선을 맞춘다. 가슴께와 아랫배께 두 군데에 집게를 물려놓고 나무 조각으로 날개를 받쳐 세운다. 새는 주둥이를 있는 힘껏 벌려 고함을 지르며 여자를 쏘아본다. 까륵까륵까르륵 부르짖는 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 맴을 돈다. 여자는 성난 살쾡이처럼 험상궂은 표정으로 새의 눈을 노려보며 크약! 소리를 내지른다. 구구구 까르륵까르륵 카락카락 고함소리에 놀랐는지 조용히 잠을 자던 새들이 일제히 잠꼬대를 해댄다. 파닥파닥 홰치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염통이 격렬하게 박동질을 해대는 것을 느낀다. 윤사장이 요구했던 자세가 생생하게 살아나 있다. '이야 굉장하군. 역시 넌 정말 대단해.' 윤사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여자의 머리통을 붙들고 거칠게 볼을 비벼댈 것이다.
릴에서 0.6호의 가느다란 플로러 카본사를 풀어낸다. 한번에 새의 배를 모두 꿰맬 수 있을 만큼 길게 잡아 뽑은 다음 습관적으로 송곳니로 물어뜯는다. 예전에 쓰던 명주실이나 모노필라멘트사였다면 쉽게 툭 끊어졌을 터이지만 이건 잘 끊기지 않는다. '힘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질긴 실을 써야해.' 릴을 건네주며 강철만큼 강하다고 했던 윤사장의 말을 기억해내고 여자는 가위로 싹둑 잘라버린다. 침낭에서 바늘을 뽑아들고 바늘귀에 실을 꿴다. 어차피 깃털을 부풀리고 나면 봉합선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목표가 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정교한 박제. 가늘고 긴 뱀의 꼬리처럼 실을 길게 늘어뜨린 바늘을 손에 들고 있다. 여자의 염통이 다시 발작적으로 방망이질을 해댄다. 장시간 동안 환자의 배를 열어 젖혀놓고 몸 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종양들을 성공적으로 떼어내고 나서 복부를 봉합하는 의사처럼 가슴이 벅차 오른다. 여자의 손이 새의 목덜미를 헤집어 열고 들어가 가죽 안쪽에 바늘을 찌른다. 밖으로 비어져 나온 바늘 끝을 잡아 뽑아낸다. 여자의 손은 능숙하게 다시 건너편 가죽에 바늘을 꽂으면서 갈라진 배를 꿰매어 간다. 재봉틀의 동작처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척척 바늘땀을 떠내려간다. 항문 앞에서 바늘땀은 끝난다. 마무리 매듭을 짓고 가죽에 바짝 붙여 실을 잘라낸다. 손바닥으로 깃털을 쓸어 내리자 봉합선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새를 뒤집어 바로 세운다. 겉으로 보아선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작업이 하나 남아있다. 화룡점정. 눈알을 빼내고 의안을 넣어야만 한다. 아직 광채가 번득이는 안구는 쓸만해 보이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수분이 빠져나가 주글주글해져버릴 것이다. 갈고리로 안구를 후벼 긁어낸다. 안구가 있던 자리를 솜으로 깨끗하게 닦아낸 다음 접착제를 바르고 의안을 집어넣어 고정시킨다. 장난감 공장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의안은 오히려 실물보다 더 사실적이다. 여자는 부드러운 솔로 새의 깃을 빗질하여 준 다음 정면에서 쏘아본다. 텅 빈 목구멍이 허전하다. 새의 혀를 놓친 것이다. 그녀는 벌써 쪼그라든 혀를 찾아 잘라서 떼어내고 붉은 플라스틱 혀를 꽂아 넣는다. 까륵까륵까르륵 새의 고함소리와 푸드덕거리는 날갯짓소리가 귓속에 가득 찬다. 매의 부리와 발톱에 찢기는 짐승들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온다. 두그덕두그덕 대지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도 들린다.
환청이다. 새는 지금 저승으로 열린 대지 위를 활공한다. 안개가 자욱한 강가의 풀밭이 눈앞을 스친다. 봉합과 동시에 새의 영혼은 이승을 떠났다. 묘족들에게 박제는 죽은 사람에게 행하는 염(殮)과 같이 영혼을 떠나보내기 위한 의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염과 달리 강력한 힘은 껍질 안에 가두어두고 그것의 소유주인 영혼만 쫓아보낸다. 육체에서 가죽을 벗겨내는 것은 영혼과 그것이 소유했던 힘의 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절개면을 봉합하는 행위는 영혼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거죽과 거기에 깃들어 있는 힘에 미련을 갖지 못하도록 못박아 두는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박제가 완성되었다. 짐승의 영혼이 지배했던 힘은 이제 인간의 몫이 되었다.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신문지 위에 내려놓은 새의 몸통을 주워 올린다. 메스로 배를 가른다. 내장을 빼내고 나서 수박을 쪼개듯 몸통을 두 동강으로 자른다. 솔부엉이와 황조롱이에게 반씩 나눠주기 위해서다. 드러난 내장을 헤쳐서 쓸개를 찾아낸다. 떼어낸 쓸개를 물에 슬쩍 헹군 다음 글라스에 떨어뜨리고 그 위에다 소주를 들이부어 반쯤 채운다. 단숨에 쓸개와 소주를 꿀꺽 삼켜버린다. 박제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저승에라도 다녀 온 듯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온몸의 기력이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 같다. 윤사장은 환청이 들리고 쉽게 지치는 것은 정신이 쇠약해진 탓이라고 했다. 쓸개가 정신의 기력을 돋우는데 효험이 있다고 동의보감에 적혀있단다.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짐승의 배를 가르고 나면 반드시 쓸개를 발라내 소주와 함께 들이켜 버렸다. 그러나 눈앞의 안개는 더욱더 진해지기만 했다.
아침 일곱 시. 야생의 새들은 벌써 잠자리에서 한참 먼 곳으로 날아가 주린 배를 두둑이 채웠을 시간이다. 셔터 문틈으로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올 때부터 지저귀기 시작했던 새들이 셔터를 올리자 미친 듯이 울어댄다. 조류원은 순식간에 새들의 울음소리로 아수라장이 된다. 새들은 항상 초조하게 아침을 기다린다. 야생의 새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새벽 네다섯 시가 되면 벌써 희부윰한 여명 속에서 짖어댄다. 새들이 그렇게 아침을 기다리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허기 때문이다. 새들은 어둠 속에서는 날지도 먹지도 못하므로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져서 밤이 지금보다 조금 더 길어진다면 지구상의 주행성 새들은 멸종할지도 모른다. 새들은 체내에 에너지를 많이 비축해 두지 못한다. 그들의 몸은 하늘을 날기 위해 최소한의 몸무게만 갖도록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안 되는 에너지는 밤을 지나는 동안 모두 고갈되고 하루만 꼬박 굶으면 낙조된다. 그래서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새를 죽이기 십상이다.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여자는 환기를 시키기 위해 유리문을 열어두고 개수대에서 새의 몸통을 주워들고 나온다. 죽은피의 비린내를 맡고 솔부엉이와 황조롱이가 찌익찌익 먹이를 재촉하는 낮은 울음을 울며 쇠창살 사이로 부리를 들이민다. 여자는 황조롱이의 우리 앞에 선다. 내장에서 간을 떼어 부리 가까이 대었다가 다시 빼앗아 버린다. 화가 난 황조롱이는 흉기 같은 발을 쇠창살 틈으로 쑥 뻗어서 낚아채려다가 실패한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횃대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른다. 여자가 다시 간덩어리를 황조롱이 앞에 들이민다. 억센 부리로 덜컥 물고 끌어당긴다. 여자도 있는 힘껏 잡아당긴다. 일부가 황조롱이의 부리에 잘려 떨어져나간다. 두 동강 내어놓은 고깃덩어리를 황조롱이와 솔부엉이에게 각각 한쪽씩 선심을 쓰듯 던져 넣어 준다.
모이그릇을 일일이 확인한다. 부리로 정교하게 씨앗을 까먹는 핀치와 앵무의 모이그릇에는 언제나 껍질이 수북하다. 그걸 모르는 초보자들이 껍질을 모이로 착각하고 먹이를 주지 않아 새를 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자는 모이그릇에서 껍질을 걷어내고 알곡을 가득 채워 넣는다. 앗! 구관조가 자신이 밤새 낳은 듯한 알을 깨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다.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던 새는 흰자와 노른자가 뒤섞인 걸쭉한 액체가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부리를 앞세우고 여자를 올려다본다. 마치 썩은 인육을 뜯어먹다 들킨 까마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저리 가지 못해! 우리 안에 손을 넣어 새를 밀친다. 흥분한 새는 '저리 가지 못해!'라고 여자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소리를 지르며 커다란 부리로 여자의 손을 쪼아댄다. 새를 한번 세게 때려주고 깨진 알을 빼앗아버린다. 여자는 깨어진 알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서광숙씨!"
낯설지만 귀에 익은 이름이다. 환청인가. 여자는 천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환한 햇살이 내리치는 문 앞에 거구의 남자가 서있다. 순간적으로 여자는 남자에서 바람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서광숙씨 맞지요?"
여자는 비로소, '그래 내 이름이었군.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야.'라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함부로 자라난 수염과 며칠 감지 않은 듯한 길게 자라난 곱슬머리. 그런 것들이 남자에게서 바람냄새가 난다고 생각하게 만든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기억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찾아낼 수 없다.
"서광호씨 아시지요, 서광호. 그 사람이 오빠 맞지요?"
뒤통수를 둔기로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여자는 멍해져버린다. 남자가 사라진 골목길을 흐려진 동공으로 한동안 내다보고 있다. 서광호라는 이름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맹금의 부리에 숨통이 끊기고 마지막 발악을 하는 새처럼 힘없이 파닥거렸다. 남자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강남 H아파트 노부부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오빠라는 말을 전해주면서 정말로 모르고 있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의심의 눈빛을 흘겼다. 보게 되거든 지명수배전단이 전국에 뿌려졌으니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자수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십수년 전에 헤어지고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자 남자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지.'라고 말하며 코웃음을 뿜어내기까지 했다.
새장 청소와 모이 주는 일을 끝낸 여자는 유리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간다. 골목 건너 맞은 편에 있는 애견센터의 셔터를 드르륵 들어올린다. 주먹만한 강아지들이 유리벽을 튀어 오르며 꼬리치고 짖어댄다. 개들이 마실 물을 갈아주고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준다. 여사장은 집에서 아점을 먹고 한 시나 되어서야 어슬렁거리며 나올 것이다. 여자는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간다. 여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각 간밤의 광란을 증명하는 토사물이 여기저기 쏟아져 있다. 허기진 비둘기들이 행인들의 발길을 눈치보며 알갱이를 쪼아먹고 있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비둘기를 노리고 쓰레기봉지 뒤로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다. 곧 덮칠 듯한 기세다. 훠어이! 여자는 발을 세게 구르면서 소리를 질러 비둘기떼를 쫓아 날린다. 비둘기는 도시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야생의 새이다. 도둑고양이들처럼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과 친해지지도 않는다. 비둘기와 도둑고양이는 애완용으로 길들여졌으나 도망쳐서 자유를 얻은 대신 도둑질이나 구걸로 어렵게 연명해야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천적관계의 먹이사슬에 얽혀있다.
마치 여자와 여사장처럼. 여사장은 윤사장의 아내이다. 여사장은 시골농장에 틀어박혀 새 모이 주는 일이 지겨워 남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여사장은 새에 미쳐있는 윤사장에게서 멀리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지만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묶여있는 듯했다. 애견센터와 조류원이 모두 윤사장의 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달아날 곳은 없어 보였지만 여사장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네가 아직 어리니까 그놈이 좀 예뻐해 주는 것 같지? 나처럼 늙어봐. 거들떠보지도 않을 걸. 그래 그놈하고 잘 살아봐. 두고 봐라. 나는 곧 훌훌 털고 떠날 테니까.' 여사장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그녀는 여자와 윤사장의 관계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여자를 서울로 불러 올린 것도 곁에 두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윤사장이 며칠 서울에 올라와 있을 때면 여사장의 신경은 곤두선다. 잠시도 감시의 고삐를 늦추는 법이 없이 둘의 동태를 주시한다.
비둘기들은 하늘을 한번 선회하고 나서 다시 이쪽으로 날아와 전깃줄 위에 줄지어 내려앉는다. 비둘기떼를 다시 쫓아 날려보내기 위해 돌멩이를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쿵쿵 보도블럭에 발을 구르며 손을 휘저어 위협하지만 비둘기들은 외면하고 있다. 성이 난 여자는 거친 숨을 씩씩 내쉬며 질주하기 시작한다. 눈앞에 아뜩 안개가 자욱해진다. 급강하하는 매처럼 어지럽다. 땅바닥이 어지럽게 출렁거린다. 한참을 기관차처럼 달려 찻집과 액세서리 가게가 즐비한 번화가를 지나간다. 번잡한 거리를 빠르게 통과한다. 색을 걸머메거나 백을 손을 들고 등교를 하는 여대생들로 여자대학 앞은 북적대고 있다.
다리의 난간을 붙잡고 헉헉 숨을 돌린다. 대학으로 들어가는 길 밑으로는 기찻길이 지난다. 전동차가 아니라 디젤기관차들이 달릴 수 있도록 마련해준 녹슨 선로. 1906년에 개통된 이 선로는 원래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간선 중에 하나였다고 했다. 오빠도 이 길을 지나쳐갔을 것이다.
철둑길을 따라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아? 북쪽으로 가면 휴전선이고, 남쪽으로 가면 서울이야.
오빠는 선로 위에다가 대못을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엄마아빠는 운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고 했다.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어서 돌아올 것이라고 다짐하듯 말해주기도 했다. 기차가 지나가면 대못들이 불꽃을 튀기면서 퉁겨나갔다. 오빠는 침목 사이에서 어렵게 찾아낸 못들을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납작하게 눌린 못들은 작은 장난감 칼 같았다. 오빠는 모양이 잘 나온 놈들만 골라 모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생긴 것에는 '신검 엑스칼리버'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못을 기차바퀴에 눌러 만든 그 칼은 일종의 화폐 같은 것이었다. 그것으로 연필, 필통, 심지어는 손목 시계까지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오빠가 물물교환의 질서를 따르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힘으로 빼앗으면 되었으니까.
이제 이런 건 필요 없어. 진짜 칼을 가질 거야.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오빠는 철둑길에 올라서서 여태껏 모아온 칼을 저 멀리 개천을 향해 힘껏 내던져버렸다. 그것들은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천변의 자갈밭에 흩뿌려졌다. 오빠는 여자의 조막손을 자신의 손아귀에 꼭 감싸쥐고 자신도 이제 어른이 되었으므로 서울에 가서 엄마아빠의 일을 도와 돈을 많이 벌어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돌아오겠노라고 틀림없이 돌아오겠노라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해주었다. 십수년 전 그렇게 오빠를 기차에 태워 떠나보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가 '선영아 사랑해!'라는 광고를 많이 봤죠이. 그러면 여러분, 선영이가 누굽니까? 누구 아는 사람 손들어봐요...... 여기에서 선영이가 누군가, 누가 선영이를 사랑하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거이죠이....... 다시 말해 본질이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이죠이. 그러면 뭣이 중요하냐? 이미지. 바로 껍데기가 중요한 거이죠이........ 요새는 마음이 예뻐야 한다, 영혼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 말하면 욕먹지 않습니까요이. 마음이 보입니까? 영혼이 참말로 있습니까? ....... 우리 앞에 참말로 있는 것은 껍데기들이죠이. 보이고 만질 수 있고 과시할 수 있고 소유하고 팔고 살 수 있는 것이 참말로 중요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요이...... 그래서 여러분들도 메이커 있는 옷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바야흐로 거죽이 중요한 시대이다 이 말씀이죠이......
특강 포스터를 보고 찾아 들어간 강의실. 말끝마다 '...이'를 붙여 억양에 맛깔 나는 굴곡을 만들어내고 있는 늙은 학자는 텔레비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번쩍번쩍 광이 나도록 기름을 잔뜩 발라넘긴 헤어스타일, 이마에 붙은 큼직한 흑사마귀, 찢어지는 목소리와 걸쭉한 사투리. 코미디를 방불케 하는 학자의 언행은 좌중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강의실은 박장대소로 후끈하다. 어려운 것도 같고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인 것도 같다. '거죽이 중요한 시대이다.'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거죽이라면 내 전공이 아닌가. 여자는 뒷문으로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 나와 그 말을 가슴에 품고 유유히 교정을 걷는다.
"새가 죽었어요. 외로워서 죽은 거라고 엄마가 그랬어요."
또 그 여자아이다. 목걸이에 매달린 열쇠가 반짝 빛난다. 여자아이는 죽은 새가 들어있는 새장을 들고 오도마니 서서 여자를 쳐다본다. 초콜릿을 먹다 묻혔는지 입 주변과 핑크색 옷의 가슴 부분이 더럽혀져 있다. 맨 처음 여자아이는 십자매를 사가지고 갔다가 한 달도 안되어 죽여 가지고 왔다. 다른 새로 바꾸어주었지만 죽여오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나중에는 엄마가 값싼 새라서 잘 죽는 거라고 했다면서 좀더 비싼 새로 달라고 해서 잉꼬 한 마리를 주었다. 관리하는 법을 잘 타일러 주었지만 또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여 온 것이다. 여자아이는 초콜릿이 범벅된 손을 디민다. 더럽혀진 만원 짜리 몇 장이 쥐어져 있다. 여자는 그 중에서 두 장을 빼내고 나서 여자아이의 손아귀를 쥐어준다. 죽은 잉꼬를 꺼내고 살아있는 한 쌍을 다시 넣어준다. 여자는 죽은 잉꼬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냉장고에 넣는다. 맹금들의 내일치 식사로 제공될 것이다.
저리 가지 못해!
등뒤에서 구관조가 소리를 친다. 부리에 알을 물고 있다. 부리에 찔려 깨진 구멍에서 점액질이 줄줄 흐르고 있다. 식란증(食卵症)이라는 불치의 병이다. 우리 안으로 손을 들이민다. 구관조가 파닥거리며 거칠게 반항을 한다. 발톱으로 여자의 손등을 할퀸다. 아얏! 비명을 내지르며 손을 빼낸다. 저리 가지 못해! 저리 가지 못해! ...... 구관조는 끝도 없이 재잘대고 있다. 길게 할퀴어진 자국을 따라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온다. 에탄올을 들이부은 다음 거즈로 가볍게 닦아내고 반창고를 붙인다.
면장갑을 낀다. 저리 가지 못해! 저리 가지 못해! 우리 안에서 여전히 나불대고 있는 구관조를 노려본다. 닥치지 못해! 여자가 소리치자 구관조가 메아리처럼 '닥치지 못해!'하고 맞받아 친다. 우리 안에 손을 쑥 집어넣어 재빠르게 놈을 잡아챈다. 손아귀에 힘을 꽉 준다. 닥치지 못해! 닥치지 못해! 구관조가 가쁘게 말소리를 뱉어낸다. 팔딱거리는 새의 작은 염통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더욱더 힘을 주어 손아귀를 조이자 구관조의 부리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푸석하게 새어나온다. 새를 바닥에다가 힘차게 패대기친다. 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새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새의 시체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냉장고에 처넣는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불치의 병에 속하는 식란증에 걸린 놈들은 안락사를 시켜주는 게 상도에 속한다. 고객을 속이고 식란증에 걸린 놈을 팔아 넘겼다가 환불을 넘어서 정신적 피해 배상까지 요구받은 적이 있었다. 혼자 사는 신경질적인 여자였는데 새가 자신이 낳은 알을 파먹는 것을 보고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새 값의 열 배에 가까운 위자료를 요구했었다.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누굴까.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한참을 망설이는 동안 벨소리가 끊어진다. 여자는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기를 내려다본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거기 조류원이죠? 하는 고객의 물음이나, 다 되었어? 하면서 매 박제에 대해 물어오는 윤사장의 목소리를 기대하면서 수화기를 집어든다.
"서광숙씨 계십니까?"
무쇠처럼 강한 느낌이 드는 선이 굵은 남자 목소리이다. 꾹꾹 눌러 은폐시켜 놓았던 무언가가 뚜껑을 밀치고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것 같다. 여자는 숨을 멈춘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옳을까. 어떤 목소리로 답변을 해야하는 것일까. 심장 박동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린다. 전화선 저쪽에까지 전해질까 부끄럽고 두렵다. 다행히 저쪽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전화가 끊긴 것일까. 여자는 그대로 수화기를 떨어뜨려 버린다. 누구였을까. 아침에 다녀간 수사관의 목소리는 아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가 적요하고 메마른 골목길로 빠르게 밀려온다.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가게 밖에 내다놓은 새장 앞으로 우르르 쏟아지듯 모여든다. 아이들 뒤로 우편배달부가 나타난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손에 든 우편 뭉텅이에서 주소를 살피며 우편봉투 몇 장을 뽑아 여자의 손에 쥐어주고 다시 우편물들을 뒤적이며 뒤돌아 나간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몹시 시끄러워진다. 마음 같아서는 몇 대 쥐어박아 멀리 쫓아내 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여사장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야말로 애완조의 진정한 수요자라는 게 여사장의 지론이었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여자는 수화기를 재빠르게 집어든다.
"조류원입니다."
"그렇죠. 조금 전에 전화한 사람입니다. 서광숙씨 되시죠?"
남자는 윤사장에게 소개를 받았다면서 긴히 부탁할 일이 있어 오늘 중으로 찾아가겠노라고 위치를 묻는다.
각종 요금 고지서이겠지 하면서 무심코 내려다본 우편물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놀란다. 고지서는 모두 여사장의 명의로 되어있다. 여자는 유심히 봉투를 살핀다. 발신자란에는 '초등학교동문회'라고만 적혀있으며 문산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편지 봉투를 뜯는 여자의 손끝이 심하게 떨린다.
너에게만은 미안하구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헤어졌던 그곳에서 한번 보자.
여자는 황급히 편지지를 구겨 손아귀에 감싸쥐고 조심스럽게 밖을 살핀다. 염통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벌떡벌떡 뛰어다닌다. 곧 피가 솟구칠 것 같은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 꾸욱 누른다. 아침부터 초등학교 쪽 모퉁이에 주차되어 있는 짙게 선팅 된 봉고차에 의심이 쏠린다. 언제부터 감시한 것일까. 도청 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화장실로 들어가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변기에 뿌리고 물을 내린다. 변기에 털썩 주저앉는다. 술을 마셔야겠다.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내들고 와서 작업대 위에 내려놓는다. 강렬한 비린내를 풍기는 쓸개를 삼키고 싶지만 꺼내놓은 것이 없다. 술을 따라 마신다. 작업대에 손을 깔고 이마를 뉘어 심장에서 나는 고동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밖은 여전히 하교 길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끄럽다.
"손님 오셨다!"
여사장이 작업실로 고개를 들이밀고 소리친다. 여사장 옆에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여대생인 듯한 아가씨가 서있다. 여자를 확인한 여사장은 손님에게 여러 가지 새를 보여주면서 장단점을 늘어놓는다. 혼자 살면서 기를 것이라면...... 조카들이 기르도록 할 것이라면...... 새끼를 많이 낳기를 원한다면...... 번식을 원하지 않는다면...... 여사장은 숙련된 솜씨로 활기차게 소개를 해주고 여자에게 다가와 며칠 꽃구경을 다녀올 것이므로 가게를 좀 봐달라고 부탁한 후 애견센터로 건너간다. '훌훌 떠버릴 수도 있어'라고 묘한 미소와 함께 덧붙이는 그녀의 대사에는 사내아이 같은 설레임이 묻어있었다. 윤사장이 와서 누구랑 어디로 갔느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 하는 걱정이 스쳐간다. 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작업실을 빠져나간다. 손님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새장으로 눈을 돌린다. 여자는 그녀의 옆모습에 짙게 드리워있는 그늘을 읽을 수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일 것이다. 기숙사의 꽉 짜여진 틀이 싫어 이 근처 어디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동안 몇 번의 연애를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을 것이다. 남자들이란 도둑고양이 같아 언제든 달아날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을 쏟아 부을 남자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새나 아니면 강아지를 데려다 놓고 그녀가 가진 모든 사랑을 기울여줄 것이다. 손님에게 새들을 소개해주면서 여자는 간간이 골목을 곁눈질하면서 주위를 살핀다. 모퉁이의 봉고차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 순간 손님이 물음을 던진다.
"이 새는 이름이 뭐지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알을 잘 품도록 후미진 구석에 놓아둔 금화조의 우리로 다가가고 있다. 호기심에 눈빛이 반짝 빛난다. 식란증이 아니라도 유전적으로 나쁜 습관을 물려받고 태어나는 새들이 있다. 자연 상태에서의 뻐꾸기 같은 놈들처럼 금화조도 알을 낳아놓고 품지를 않는다. 금화조의 알은 농장에서는 부화기에 깨우며 부화기가 없는 영세한 조류상이나 가정에서는 가모(假母)를 써서 깨우기도 한다.
그런데 여자는 알을 낳아 자신의 가슴털로 포근하게 품어주는 금화조 한 쌍을 찾아내었다. 윤사장은 아주 보기 드문 경우라고 했다. 여자는 금화조가 자신의 힘으로 깨워서 길러낸 새끼들에게 짝을 지어주었는데 그놈들도 알을 품기 시작했다. 윤사장은 알을 품는 유전인자가 따로 있는 것 같다고 말해지만 여자의 생각은 달랐다. 버림받은 새들은 직관적으로 자신이 버림받은 것을 안다. 가짜 엄마가 아무리 잘 먹여준다 해도 말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을 알아버린 이상 그들은 모성애를 믿지 않는다.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금화조들이 알을 버렸던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어미의 사랑을 받고 자란 놈들은 스스로 알을 품고 있지 않는가.
손님에게는 십자매 한 쌍을 팔았다. 금화조를 원했지만, 십자매가 초보자들이 기르기 가장 쉬운 새이며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면 금방 새끼를 쳐서 북적북적한 대가족을 이루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리라고 말해주자 망설이지 않고 가져갔다.
호사스러워 보이는 중년의 부인이었더라면 화려한 색의 깃을 길게 늘어뜨린 중대형 앵무를 권했을 터이다. 상처가 많은 여대생들의 새가 밀실에 숨겨놓은 애인이라면 귀부인들의 새는 일종의 장식품이다. 별다른 취미나 특기가 없어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중년 부인들에게 새는 약간의 노동으로 자신의 다정다감한 성품과 고상한 취미를 은연중에 과시하기 딱 좋은 소일거리인 셈이다.
봉고차를 빠져 나왔던 남자가 도너츠 상자와 음료수가 담겼을 법한 검의 비닐봉지를 들고 다시 봉고차 안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오빠가 정말 사람을 죽인 것일까. 그가 열세 살, 내가 열 살. 십오년 전이다. 그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여자는 자신이 없다. 그는 거기에서 기약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거기에 가면 그는 짐승이 죽은피 냄새를 귀신처럼 맡아내듯 나를 찾아낼까. 그가 보낸 편지가 맞기나 한 것일까.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젊은 아가씨네."
쿵. 남자는 묵직한 가방을 테이블 위에 떨어뜨리듯 내려놓는다. 더러운 가방 속은 다람쥐를 생포할 때 쓰는 올가미 달린 낚싯대, 뱀을 포획할 때 쓰는 망, 철제 덫, 탄피 등의 잡동사니로 가득 채워져 있다. 땅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남자는 보일 듯 말 듯한 엷은 미소를 씨익 웃어 보이며 가방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손을 타 번들번들한 나무상자를 꺼낸다. 보통 다람쥐나 뱀 따위를 사로잡아 담아두는 상자이다. 상자 뚜껑에 남자의 손이 다가가자 여자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멀찍이 떼어낸다. 상자를 열어 꺼내어 보여준 것은 새이다. 백설처럼 눈부시게 하얀 새.
"무슨 새인 거 같아?"
수수께끼를 내듯 남자가 나직이 묻는다. 남자의 얼굴에는 '도저히 모르겠지. 답은 나밖에 몰라.'라고 말하는 듯한 자랑스러운 표정이 담겨있다. 그러나 남자의 기대와 달리 여자는 벌써 알아채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알비노.
"알비노 까치."
남자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곧 환하게 펴진다.
"알고 있었군. 흰 새는 상서로운 징조지. 더구나 흰 까치는 행운을 물어다 주는 길조라고 하지. 이걸로 박제를 만들어서 집에다가 두면 돈이 절로 굴러 들어올 테지. 마침 새로 사업을 시작할 참이었는데 이제 갈퀴로 돈을 긁어 담을 일만 남은 거야. 모든 일이 잘 풀리겠지. 어때? 그렇겠지?"
희망에 찬 음성으로 크게 웃으며 남자가 동의를 구하듯 외친다. 어떤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분명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남에게 과장해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뭔가에 몹시 취한 듯이 보인다. 그에게 흰 까치는 전시용도 노리개도 아닌 다만 재물을 부르는 부적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박제의 포즈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다만 빠른 시일 내에 연락을 달라고 했다.
저녁 여덟 시. 여자는 셔터를 내린다. 바닥까지 바짝 내리지 않고 머리통만큼을 띄워둔다. 평상시처럼 실내의 모든 불을 끄고 나서 문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뺨을 대고 밖을 내다본다. 봉고차에 불이 들어오고 시동을 거는 소리가 난다. 놈들이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여자는 저녁 여덟 시에 취침을 해서 새벽 세시에 일어나 암실 같은 작업실에서 박제작업을 하고 아침 일곱 시에 문을 연다. 밖에서는 저녁 여덟 시에 잠자리에 들어 아침 일곱 시 무렵 일어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아침 일곱 시까지 열한 시간의 여유가 있다. 여자는 혹시 교대조가 없나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재빠르게 가게를 빠져 나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거리는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행인들뿐이다. 골목을 빠져나가 너른 길로 들어서자 행인들과 취객으로 몹시 북적거린다. 몇 번씩이나 그들과 어깨를 부딪히면서 인파를 헤치고 빠르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신촌역에서 아홉 시를 조금 넘어 출발하는 표를 끊었다. 여자는 차갑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선로를 내려다본다. 남북을 연결하는 공사가 끝나면 이 선로는 신의주에서 만주로 시베리아로 유럽의 파리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한동안 텔레비전에서 떠들썩하게 보도를 했었다.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인 것일까. 이 보잘 것 없이 낡아빠진 선로가 대륙을 횡단하다니.
기적을 크게 울리며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선다. 다섯 량 짜리 통근자용 디젤 동차다. 이렇게 작은 기차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그마하다. 내부 구조도 특이하게 되어 있다. 의자의 일부는 일반 통일호 열차처럼 앞을 바라보게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일부는 지하철처럼 긴 의자가 측면을 바라본다.
'운정으로 돌아간다.' 차창에 기대어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오빠가 떠난 뒤 여자는 고아원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원장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고아원에서 오빠는 폭군이었다. 아이들을 때리고 그들의 물건을 빼앗고 이유 없이 괴롭혀대기 일쑤였다. 오빠가 왕이었다면 여자는 공주였다. 오빠가 떠나고나자 아이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어 오빠가 빼앗아다준 물건들을 다시 빼앗아갔다. 아이들은 원장의 눈을 피해 집요하게 여자를 괴롭혔다. 주먹질을 했고 발길질을 했다. 여자의 몸에는 피멍이 가시지 않았다. 어혈을 문지를 때마다 여자는 자신의 몸 속에서 스며 나오는 죽은피의 비린내를 맡았다.
"새를 좋아하느냐?"
여자는 아이들에게 맞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딸꾹질을 해대고 있었다. 퉁퉁 부은 눈을 손등으로 연신 비벼대면서 원장을 올려다보았다. 원장은 뜬금 없이 새를 기르는 자신의 친구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기에 가면 얼마나 고운 빛깔의 새들이 있는지, 그들의 노랫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신의 친구는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며칠 후 윤사장이 여자를 데리러 왔었다. 그는 이제 막 아프리카 탐험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사파리 재킷과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지프 안에는 죽은피의 냄새가 비릿하게 감돌았다. 낯선 곳으로 실려가는 동안 여자는 불안과 초조로 움츠러들었다. 작은 새처럼 가슴이 뛰었다. 새들이 우짖는 소리가 가득한 농장이었다. 여자는 거기에서 새 기르는 법과 박제 기술을 전수 받았다. 윤사장은 지프를 몰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희귀한 새들을 카메라에 담아오거나 엽총으로 사냥해왔다. 한두 달씩 집을 비우는 일은 예사였다. 여자는 새들을 돌보면서 윤사장이 잡아다 놓은 새들을 박제했다. 더 이상 박제할 새가 없어지면 윤사장이 기다려졌다. 그의 몸에서 배어나는 죽은피 냄새가 뒤섞인 야생의 향기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운정역. 대합실에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없다. 그는 어딘가에 숨어 지켜보고 있을까. 여자는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는다. 정말로 그가 나를 찾아올 수 있을까. 갑자기 여기까지 찾아온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미련을 가진 것은 참으로 미련한 짓이다. 오빠란 사람도 나 자신도. 새처럼 훌훌 날아가 버렸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저 하늘 어디에서 잃어버린 새를 찾겠다는 것인가. 도망친 새들은 굶어죽을지언정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미련을 갖는 새는 더러운 비둘기들뿐. 나는 왜 새처럼 달아나지 못했을까. 고등학교까지는 보내주었지만 대학은 어렵겠다고 원한다면 떠나라고 윤사장이 말했다. 열아홉이 되던 해였다. 윤사장 때문이었을까 새 때문이었을까 여자는 새장처럼 갑갑한 그곳에 남았다.
"새의 죽음을 낙조라고 해."
새는 언제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파충류였던 그들의 조상은 땅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피나는 노력 끝에 날개를 갖도록 진화했으며, 날개가 생긴 뒤로는 잠조차도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잔다. 하지만 죽을 때는 결국 땅에 떨어진다. 그래서 새의 죽음을 낙조(落鳥)라 한다고 윤사장이 말해주었다. 태풍이 불어닥쳤을 때였다. 윤사장은 농장을 비우고 없었다.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쌓아올린 새장이 넘어지면서 부서지고 문이 열렸다. 무수히 많은 새들이 바람을 타고 달아났다. 여자는 새들을 붙잡기 위해 폭풍우를 헤치고 날뛰었지만 허사였다. 오랫동안 좁은 새장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잘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들도 바람에 몸을 맡기고 휩쓸리듯 멀리 날아가 버렸다. 윤사장이 돌아왔을 때 농장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여자는 윤사장을 따라 숲으로 가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들을 자루에 주워담았다. 윤사장은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자루에서 죽은 새들을 쏟아내었다. 새들을 묻고 나서는 자그마한 봉분을 돋우어주었다. 결국 오빠는 땅바닥에 떨어져 비참하게 죽게 되겠지. 그를 땅에 묻고 도독한 봉분에는 때깔 좋은 잔디를 입혀줘야 할 것이다.
서울로 가는 막차시간을 묻는다. 열한 시 이십 분이라고 매표원이 친절하게 말해준다. 여자는 표를 끊고 역사 앞 공터로 나온다. 서울발 열차가 들어왔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그르 쏟아져 나온다. 대부분이 퇴근한 회사원들이거나 서울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사람들이다. 밤이 늦었기 때문에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역사를 빠져나간다. 공터 주변에는 가로등 기둥을 짚고 서서 웩웩 토악질을 하는 군인들이 간혹 눈에 띈다. 여자는 팔짱을 지르고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공터를 한바퀴 돌고 나서 벤치에 앉는다. 실오라기 같은 것이 얼굴을 살짝 간질인다. 얼굴을 훔쳐낸 손바닥 안을 들여다본다. 날벌레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가로등을 올려다본다. 무수히 많은 날벌레들이 불빛을 보고 날아올라 가로등 주위에서 얇고 투명한 날개를 저어대고 있다. 날개에 힘이 파한 놈들이 머리 위로 가볍게 떨어져 내려앉고 있다.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미끄러져 내리기도 한다. 여자는 벤치에서 일어서 머리카락과 옷을 털어 낸다. 비듬처럼 떨어져 내리는 날벌레떼. 개울가의 습지에서 불빛을 보았겠지. 불빛을 보고 막연한 힘에 이끌려 여기까지 날아왔겠지. 땅바닥에는 오늘밤 안으로 죽을 하루살이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툭 새 한 마리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꼭대기에서 작은 점 몇 개가 내려오면서 점점 커졌다. 새였다. 툭 툭툭 툭툭툭 처음엔 한두마리씩 떨어지다가 마침내는 굵은 빗방울처럼 무수히 많은 새들이 죽어 떨어졌다. 길바닥은 순식간에 죽은 새로 뒤덮였다. 두 팔을 들어올려 쏟아지는 새의 비를 팔뚝으로 막아내면서 비명을 질렀다. 잠을 자는 내내 두렵고 뒤숭숭한 꿈에 시달리면서 독이 든 먹이를 삼킨 짐승처럼 몸을 뒤틀었다.
새벽 세시다. 여사장이 돌아오겠다고 한 날이다. 이틀에 한번 꼴로 애견센터에 찾아가 먹을 것을 충분히 넣어주거나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시간외에는 셔터를 내리고 전화선 코드도 뽑아내 버린 채 며칠째 계속 방안에 틀어박혀 먹고 자는 일만 되풀이했다. 여사장에게는 며칠 쉬었노라고 말해주면 그만일 터이다. 하지만 여사장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눈앞의 현실이 비로소 명징해진다. 여자는 냉장고에서 술병과 흰 까치를 꺼내온다. 글라스에 반쯤 채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눈앞이 흐리다. 안구를 가득 채운 안개. 술기운이 조금 올라와서야 메스를 든다. 칼날을 대려고 흰 깃털을 헤치자 창백한 외피가 드러난다. 백색증에 걸린 돌연변이 까치. 병든 새가 행운의 징표라니. 형제들과 다른 색의 깃털 때문에 갖은 수난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부모에게까지도 내침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며칠 방에서 뒹구는 동안 몸이 몹시 축났는지 박제를 만드는 내내 눈앞이 기우뚱했다. 눈앞의 안개가 더욱 진해졌고 미세한 두통이 그 안개 속을 떠다녔다. 까치의 쓸개를 술잔에 넣어 마시고 나자 노골적으로 피로가 밀려왔다. 흰 까치를 선반 위에 올린다. 잉꼬 한 쌍과 중형 앵무 한 쌍. 구관조. 매. 흰 까치. 박제된 열네 개의 눈동자가 여자를 쏘아본다. 온몸의 근육이 풀어졌으므로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작업실 옆에 붙어있는 자신의 골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텅텅텅 누군가 셔터를 세게 두드린다. 계속해서 요란하게 두드려대는 소리에 여자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새들이 불안하게 파닥거린다. '나갑니다. 나가요.'라고 말하려하지만 목에 걸려 몸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한다. 간신히 셔터를 올린다. 문 앞에는 그 여자아이가 새장을 들고 서있다. 잉꼬 두 마리가 새장 바닥에 떨어져있다. 아이는 여자에게 새장을 들이민다.
"죽지 않는 새를 주세요!"
"죽지 않는 새?"
여자는 아이가 가져온 새장에서 죽은 새를 꺼내 신문지에 둘둘 말아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작업실 선반에서 박제된 잉꼬 한 쌍을 내려와 새장 안의 횃대 위에 앉혀 고정시킨다. 다시는 떨어져 죽는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해준다. 아이는 좋아서 밝게 웃으며 손에 묻은 초콜릿을 하얀 치맛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아내고 새장을 들고 팔짝팔짝 뛰어간다. 새장 안의 새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횃대에 붙어 앉아있다.
와줘서 고마웠다. 미행이 붙어있었어. 먼발치에서만 봤다. 이 나라를 뜰 거야. 도청되고 있어 긴말은 못한다. 나중에 종착역에서 다시 보자. 잘 살아라.
정말 그가 거기에 있었던 것일까. 운정에서 돌아온 날 새벽 오빠의 전화를 받았다. 새처럼 훌훌 날아간 것일까. 이 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위로는 철책이 가로막고 있는 섬과도 같은 곳인데 어디로 달아난단 말인가. 밀항이라도 기도한 것일까.
맞은 편 건물의 유리창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는 여자의 동공 속으로 불타는 새 같은 석양의 햇빛덩어리가 곤두박질치듯 떨어진다. 애견센터의 간판도 온통 핏빛이다. 여사장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든다. 그녀는 언제나 새처럼 훌훌 달아나고 싶어했으니까. 어디선가 죽은피 비린내가 풍겨온다. 윤사장이 몰아오는 냄새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당분간은 그의 곁에 머무르기로 마음을 굳힌다. 종착역이라면? 서울역, 도라산역, 신의주, 파리...... 아니면 생의 종점을 말한 것일까. 알 수가 없다. 텔레비전에서 말한 유라시안 철도가 완공된다면 그때쯤 기차를 타고 아름드리 침엽수가 우거진 타이가숲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시베리아를 횡단할 것이다. 새처럼 훌훌 날아가다가 힘이 파하면 아무 데서나 떨어져 죽을 것이다.
-끝-
■ 소설부문 심사평 : “완결에 가까운 문체에서 창조적 정열 느껴”
예심을 거친 28편의 작품을 넘겨받았다. ‘진주신문 가을문예' 모집은 응모작의 수준을 충실히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중편소설 1편, 단편소설인 경우에는 2편의 투고를 받게 되어 있다. 중편 ‘지평선에 서다'와 단편 ‘족쇄' ‘방' ‘빈센트의 나무' ‘낙조'가 마지막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족쇄'와 ‘방'은 주제의식의 내적 견결성이 부족하였다. ‘지평선에 지다'는 중편 분량으로 문체도 비교적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 남북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행적이 사건의 전개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의미의 심화가 부족하다.
같은 작가의 단편 ‘빈센트의 나무'도 참작하면서 다른 한 편 ‘낙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끝없이 위로 날아오르는 새의 운명이 박제 과정의 정밀한 작업을 통해 의미 짙은 승화를 이룬다. 작품에 나타나는 길, 연결 공사를 하는 철로, 도라산역, 시베리아, 파리, 종착역은 전망도 틔우고 삶의 궁극도 응시한다. 아울러 완결에 가까운 문체에서 저절로 창조적 정열을 느끼게 한다. 예술의 본분을 일깨우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