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은 장가 들어 아이 하나를 낳고, 또 하나가 뱃속에 있을 때 출가한 스님이다. 훤하고 예뻐 이쁨 받았던 첫째 딸은 그만 중학교 때 병으로 죽고 말았다. 둘쨋딸은 사범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마 아버지 성철스님을 따라 비구니가 되었는데 받은 승명이 '불필' 이다. 필요하지 않다는 그 뜻이 아니라, '세상에는 쓰일곳이 없어 이윽고 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의 의미다.
원택스님의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1,2권을 읽으면서 불필스님의 성철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가 출간되어 있슴을 알았다. 당연히 읽어봐야 해서 연수도서관에서 빌려서 오늘, 읽기를 끝마쳤다.
불교의 참선과 교리가 개인사에서도 유용한 인생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법전스님의 책을 읽었고, 원택스님의 책을 읽었고 불필스님의 책을 읽은 후 느끼는 감회는 놀라웠다. 스님들의 가치 지향과 목사나 신부들의 가치지향이 달라도 이만저만 다른 게 아니다. 불교에 대한 인식이 확 바뀌는 순간이다. 스님은 인간이 곧 부처로 완성돼 있음을 알고 견성하고 마음을 밝히는 게 평생의 목표다. 목사나 신부의 존재이유는 그와는 좀 다르지 않은가.
이제까지 나는 피투된 존재로 막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이지만 엄청나게 잘못 인식된 자유지 진정한 '대자유'의 삶이 아니었다. 예절도 누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 어디에 기준을 맞추어 행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만 그러한가. 내 이웃 모두 그렇게 혼돈의 삶을 살다가 생을 마치리라. 그러나 난 운 좋게도 내 자유가 뭔가 단추를 잘못 꿰었고 왜곡되었고 삐뚫어졌음을 상기 3권의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집자하는게 끝나면 그 공덕으로 내 원력이 향상되어 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나는 지중한 인연으로 큰스님의 딸로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다. 그리고 열여덟살에 안정사 천제굴에서 뵌 순간부터 큰 스님은 내게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주변 분들은 나를 큰스님의 딸로서만 바라보는 듯하다.
나는 큰스님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큰스님의 영결식과 연화대 다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다비식 날 늦은 오후에야 금강굴 위 산등성이에서 사그라지는 다비장의 불꽃을 바라보며 절을 올릴 수 있었다. 과거, 현대, 미래를 다해 다시 만나 뵐 것을 약속하는 아홉 번의 절이었다.
교복을 입고 찾아간 나에게 큰스님께서 던지신 한마디.
"어두운 밤에 흰 눈을 보라."
이 첫 물음을 떠올리면서 서문을 맺는다
불기 2556년 하안거 해제일 석남사 심검당에서 불필 삼가 쓰다.
1장 인연
내가 태어난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는 북에서 동으로 뻗은 지리산 영봉의 엄혜산에 둘러싸여 있고, 서에서 남으로는 진주 남강으로 흘러가는 경호강 굽이에 안겨 있다.
아버지 성철스님은 할아버지에게 <천자문>과 <소학>등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나도 초등학교에 입학가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할아버지가 <동의보감>을 보시고 약을 지어주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섯 살 때였다. 외갓집에 가서 사촌들과 함께 놀고 있을 때였는데 외숙모가 단감을 가져와 반쪽씩 나눠주었다. 아이들이 많으니까 그랬나본데, 그것을 받고는 하루 종일 울었다. 나는 과일을 반쪽 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우스운 이유에서였다.
남자 사촌들과 어울려 자라면서 사촌들이 역기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나도 뒤지지 않으려고 역기를 들었다. 식구들 가운데 키가 작은 사람이 없는데 나만 크지 않은 것을 보면 한참 자라날 때 역기를 들었기 때문인 듯 하다.
나이 어린 막내 고모가 친구들과 쑥을 캐러 간다기에 쫓아갔는데 내가 나물 캐는 실력이 별로여서 바구니가 거의 비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대문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고모에게 소쿠리를 달라고 해 들고 들어가 "할머니 이거 내가 다 캤어요." 하고 자랑했다. 할머니는 기특하다고 하셨고, 그 후 고모는 다시는 나를 끼워주지 않았다.
1944년 일제강점기로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던 때 나는 단성초등학교(단성공립보통학교) 에 입학했다. 입학하던 날, 선생님 앞에서 면접시험을 보았는데 체질 시험을 보고 나서 창씨개명한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도록 했다. 이름만 쓸 줄 알면 입학을 시켜주었는데 나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은 할아버지께서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신 탓이었다.
언니는 할아버지의 훤한 인물을 닮아 이마도 반듯하고, 콧날도 오똑하고, 눈도 크고 아름다웠다. 키도 늘씬하게 커서 모두들 미인이라고 했고, 성격도 좋아 집안 식구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착하고 온순하던 언니가 6학년 때 경허스님의 <참선곡>을 보고는 문경 대승사에 계시던 아버지께 '출가하러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때 언니가 불교나 출가, 아버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에 가서 입을 것이라며 바지를 만들던 기억은 난다.
그당시 원주를 보시던 청하 노스님께서 언니의 편지를 받아보고는 '큰 중이 되려면 학교를 마쳐야 하니 졸업하고오라'는 답장을 보내셨다. 편지를 읽은 언니는 절에 가는 일을 포기하고 진주여중에 시험을 보아 합격했다. 묵곡리에서 진주여중에 들어간 사람이 처음이었을 만큼 언니는 총명했다.
언니가 열네 살이던 추석날이었다. 차례를 지내고 난 뒤,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친구들과 놀러갔다 오더니 아프다며 자리에 누웠다.그리곤 자기 손바닥을 한 번 쳐다본 후 엄마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나를 믿는 모양이지? 나를 믿지 마."
언니는 사흘 후 거짓말처럼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통도사에서 사십구재를 지냈다. 당시아버지가 통도사 산내 암자인 백련암에서정진하고 계셨기 때문에, 할머니가 그리로 정한 듯하다. 언니의 사십구재를 통도사에서지냈으니 아버지도 언니의 죽음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 식구의 일이나 지난 일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했던 분이라, 출가하고 싶다던 열네 살 큰딸의 죽음에 심정이 어떠하셨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되는 이름을 석순이라고 해서, 집에서 부르는 언니의 이름은 도경이 아니라 석순이었다. 나에게는 '명을 받아 오래 살라' 는 뜻에서 수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언니가 죽고 난 후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후에 안정사 천제굴로 아버지 큰스님을 만나러갔을 때 아무 말없이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본 큰스님께서 "무엇을 생각하노?" 하고 물으셨다. 어릴 때부터 '사람은 어디서부터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고항상 의문을 가졌던 나는 그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때 큰스님께서 <무상>을 한 번 일어보라고 말씀하셨다.
무상(無常) / 이은상
‘아니디아!’ 어허 천지가 무상하구나. 과연 무상인고.
아침 새 창 머리에 와서 노래하는가 하면 석양이 마당에 비껴 저녁 그늘을 누이니 이것이 무상인가.
뜰 앞에 심은 복숭아 나뭇가지에 향기로운 꽃송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돌아서서 그 나무 아래 어지러이 날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니 이것이 무상인가.
견우와 직녀 같이 웃으며 손목 잡고 사랑하다가 삼성(參星)과 상성(商星) 같이 등지고 헤어져선 원수가 되고, 어느 때는 한자리에 같이 앉지도 아니하다가 다시 보면 어깨 겯고 같이 웃는 시시변전(時時變轉)의 인정 그것이 무상인가.
저 이릉(李陵)이 하량에서 소무(蘇武)와 이별하며 인생의 덧없음을 일러 아침 이슬이라 하였던 말이 오늘은 뉘게나 상식같이 되었지마는 보라 어찌 인생뿐이랴. “나고 죽는 온갖 것 속에 자연만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하고 소동파는 외쳤지마는 슬프다 그 사람 자연도 무상한 줄 몰랐었구나.
산도 헐어지고 물길도 돋아나고 고목은 굽어 썩어지고 새솔 나 자라나고, 이라형 왕국도 변하고 역사도 바뀌고 천지도 옮기나니 이것이 무상인가.
그렇다. 염염찰나(念念刹那)에 나고 머무르고 달라지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던가. 우주가 통히 그대로 무상밖에 다시 또 무엇이랴.
‘아니디아!’ 자정이 넘어 깊은 밤. 소리도 없이 오시는 눈이 어깨랑 가슴 위에 내려 쌓이는 밤. 구트나 슬픈 기억을 한 아름 안고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찾아 돌아왔다.
희미한 등불아래 앉았으나 멀고 멀다! 아득한 마음을 감아 거둘 길 없다.
(ref. 아니디아 : 범어로 Anity. 무상이라는 뜻.)
간밤에 읽다 두었던 책 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드니 송운대사의 시집! 젖혀지는 대로 젖히고서 읽어 내려가매 그 중의 한 구절
"저 산에 많은 무덤 바라를 보게
장안에 사람들은 나고 또 죽고
슬프다 장생술을 못 배우고서
솔 아래 한 줌 티끌 되고 마누나
아우야. 이 밤이 지새도록 어디 가 놀며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새벽바람이 차구나. 네 병이 더치리니 어서 왜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빈방이 너를 기다린다. 돌아오너라. 지금 이 아름다운 달빛이 너를 찾아왔구나. 돌아오너라.
달이 기운다. 산 넘어 달이 기우네. 너무도 적막하여 미칠 것만 같구나.
저 지공(指空)이 입멸(入滅)했을 때 나옹선사 생사에 대한 자기의 소견을 말한 그 노래,
나는 것이란 맑은 바람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맑은 못에 달이 잠기듯
고요히 서산을 넘어 꺼져 가는 달빛
이제 내 앞에 ‘만사가 다 그만이라’는 큰 교훈을 내리고 있다.
한 자, 반 자, 한 치, 반 치, 낮추낮추 꺼져 가는 저 서산의 달은 참으로 죽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광경이다. 가버린 내 아우는 다시 불러올 수 없는 것같이, 지금 깜박하고 꺼져버린 저 달도 영원히 건져 올릴 수 없는 것이다.
슬프다. 이 영원한 고난을 헤어날 길이 어디메 있나. 내 가슴은 창검으로 찔리고 벤 것 같구나. 능엄경에 저 세존이 친히 아난(阿難)을 불러 이르되 “네 마음이 본시는 묘하고 밝고 깨끗했으나, 스스로 미혹하여 본시를 잃고 윤회를 받아, 생사 중으로 늘 뜨락 잠기락한다” 하였다.
그러나 여기 무슨 방법으로 이 고난의 경지를 벗어나 밝고 맑은 본심을 도로 찾을지 나는 둔하여 알지 못한다.
이 인생을 구원할 길이 어디 있는고. 캄캄한 내 눈 앞을 쓸어줄 사람이 없는가. 삼라만상이 고요할 뿐! 다만 적막이 천지에 찼을 뿐이다."
아버지 성철스님을 처음 만나다
'나에게는 왜 아버지가 없을까?' 하고 아버지의 부재를 처음 느낀 시기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었던 것 같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보지 못했던 큰스님에 대한 나의 이비지는 '거지일까?'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가족을 버린 채 산속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씩 미워하는 마음이 마음속에 쌓ㅇ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스님이라느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서울로 오니 큰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가벼웠던 것이다.
그렇게 서울 생활이 한창이던 때 묘엄스님이 찾아왔다.
"큰스님이 부산 묘관음사에 계시니 한번 찾아뵙자."
묘엄스님은 큰스님과 막역지우인 청담스님의 따님으로 일제강점기 때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그곳에 함께 계시던 큰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 박식함에 놀라 '스님이 알고 있는 것을 다 가르쳐주면 출가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삭발한 분이다. 당시는 출가한지 5년 쯤 되던 때였는데, 나보다는 5년 선배였고 도경 언니와는 동갑이었다.
다음 날,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서 앞에 앉아 있는 묘엄스님에게 내가 물었다고 한다.
"스님은 이 기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요?"
산속에서 지내는 스님들은 세상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묘엄스님은 그 당돌한 아이가 잊혀지지 않았는지 내가 출가한 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아마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중으로생각되었나 보지? 그렇게 묻더니 아예 기차는 화력으로 가는 거라고 설명까지 해주더라니까."
당시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묘엄스님에게는 내가 무척이나 철없어 보였을 것이다.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묘관음사 입구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질 무렵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을 따라 한참 올라갔더니 우둘두둘 무섭게 생긴 스님이 보였다. 상상 속에 그려왔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의 도반인 향곡스님이었다. 그때 아버지 큰스님은 전쟁을 예감하고 봉암사를 떠나 향곡스님이 있는 묘관음사로 와 있던 중이었다.
"철 수좌는 '오늘 이상한 사람이 온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어. 내가 잡아올 테니 잠깐 기다려라."
아버지 큰스님은 아마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어디론가 피해 계셨던 것 같다. 조금 있다가 향곡스님과 함께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눈이 부리부리한 스님 한 분이 나타났다. 마음속으로 '저 분인가?' 하는 순간, 그 분이 소리를 크게 질렀다.
"가라, 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삼촌의 손을 꼭 잡고 돌아서버렸다.
"짐에 가자, 삼촌!"
그러자 향곡스님이 내 손을 꼭 잡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다정하게 "니는 내 딸 하자"고 하시며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셨다. 맛있는 음식과 과자를 내놓으며 달래자 순진한 나는 아버지에 대한 일을 곧 잊어버렸다.
저녁 예불을 끝내고 돌아온 향곡스님이 물으셨다.
"그래, 니는 크면 뭐가 되고 싶노?"
"발명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그러면 니는 무엇을 발명하는 발명가가 되고 싶노?"
내가 대답했다.
"사람을 연구하는 발명가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문제를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내 말이 맹랑하게 들렸는지 향곡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셨다.
"철 수좌보다 더 크게 되겠는 걸."
함께 공부하시던 선방 스님들이 '저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고?' 하고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함께 갔던 묘엄스님과 묘찬스님, 삼촌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가라!' 고 호통을 치셨던 아버지 큰스님은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박대를 했어도 혹시 다시 찾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버리지는 못했다.
그날 향곡스님께서 주신 용돈 천 원으로 필통을 샀는데, 중학교때까지 오래오래 쓰며 간직했다. 삼촌은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 큰스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버지는 '세상이 바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아마 몇 달 후 일어날 한국전쟁을 예감하고 하신 말 같다.
아버지 대신 보호자 노릇을 했던 삼촌은 늘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호박'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삼촌은 '네 눈은 둥근 달을 닮았다'하며 사랑을 주었고, 나는 삼촌을 아버지처럼 의지하면서 따라다녔다. 혜화초등학교에 다닐 때, 수원에 있는 서울대 농대로 소풍을 갔는데 내가 도시락을 놓고 가지 그 먼 곳까지 쫓아와서 도시락을 전해주고 간 삼촌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리라.'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묘관음사에서 있었던 일도 바다에 모두 흘려보내고 서룽로 돌아왔다.
생명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 전쟁의 체험
큰스님을 만나고 온 다음 해인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서울이 갑자기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군인들이 탄 차들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미아리고개로 달려갔고, 사람들은 전쟁이 났다고 야단들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바뀌어 있었다.
며칠 뒤, 성균관대학교와 창경궁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군중심리를 악용한 재판은 한 시간 만에 끝났다. '이 사람은 이런 죄목이라서 악질분자다'라고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그러면 한 사람 한 사람 소나무에 묶어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바로 총살했다. 군중들은 손뼉을 치고 만세를 불렀다. 양심도 눈물도 없는 인민재판의 현장을 보면서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학교에 가면 공부는 하지 않고 김일성 장군 노래만 부르게 했다.
공포가 엄습하는 서울에 있을 수 없어서, 한 달 후 어머니와 나는 피난민 행렬에 끼어들었다. 서울에서 진주는 천릿길이다. 먼저 간 피난민들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가다가 차에 탄 그대로 강에 떨어져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300여 명이 일행이 되어 광나루를 거쳐 정처 없는 피난길에 나섰다. 종종 인민군들은 오른쪽에서, 우리 일행은 왼쪽에서 줄을 지어 가는 때도 있었다.
하늘에서비행기 소리만 나면 인민군도 피난민도 길가의 콩밭이나 숲속에 엎드려 숨었다. 우리는 빈집이나 강변에서 자기도 하고,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운명 속에서 자고 나면 또 어딘지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여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지나 도착한 곳이 낙동강 주변의 상주인 것 같았다. 길을 잘못 들어 산속으로 들어가니 바로 국군과 인민군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싸우는 격전지였다. 서울에서 7월 말쯤 떠나 낙동강 왜관 다리에 다다른 것이 한 달여 만이었다. 훗날 전사에서 다부동 전투로 기록된 역사적인 전쟁터에 와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변은 우리 일행뿐 아니라 사방에서 모여든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미군 정찰기가 피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떠서 상공을 돌았다. 인민군들은 공중에서 폭격하는 비행기를 제일 무서워했다. 우리 일행은 땟목을 타고 강을 건너 왜관 쪽으로 넘어갔다. 그곳으로 가니 국군들이 인민군과 싸울 준비를 하면서 피난민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국군을 만난 나는 어린 마음에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전투 중인데도 어떤 장군이 나를 어리다고 지프차에 태워주었고 어머니는 병사들의 트럭을 타고 뒤따랑셨다. 지프차를 타고 대구 근처에 도착하니 헌병이 서울에서온 피난민이라며 숙소를 정해 주었다.
피난을 오는 동안 물소리를 들으며 강변에서 잠을 작 들판이나 산에서별을 바라보며 하늘을 이불 삼아 지내다 보니, 지붕이 있는 숙소에서자는 것이 오히려 갑갑하게 느껴졌다.
마산에 도착해서 백조악기를 경영하던 외갓집에 갔더니 외가 식구들은 그때서야 피난을 간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걸어오면서 너무 지친 탓에 마산에서 3개월간 머물렀다. 추석 무렵,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우리는 진주로 걸어갔다. 부산, 마산, 대구만 대한민국이고 온 나라가 인민군 세상이었다.
인민군이 몰려 와 우리 집 소를 몰고 간다니까 할아버지께서 "이놈들아! 이북 소 다 잡아먹고 이남 소 잡아먹으려 왔느냐?" 하고 고함치셨다고 한다. 그러자 인민군들이 할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누었는데, 할아버지가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고 버티자 옆에 있던 친척분이 할아버지를 업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때 어디선가 총소리가 나자 동네에서는 할아버지가 그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났던 것이다.
정말로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이 쓰러져간 나날들이었다. 생명의 가치를 돌아볼 새도 없이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가 어떻게 넘어갔는지도 몰랐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생명의 덧없음을 뼛속까지 느꼈던 전쟁의 체험은 출가 전후에 삶과 죽음을 명상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듯하다.
2장 출가
"영원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진주로 내려와 진주사범 병설중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봄에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에 다디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보니 자그마하고 단단한 체구의 스님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그 스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큰스님께서 다녀가라신다. 그러니 방학이 되면 천제굴에 한번 와라."
얼마 전 종정을 지낸 해인사 방장 법전스님이셨다. 스님은 그때 안정사천제굴에서 아버지 큰스님을 모시며 정진하고계셨는데 '그 아이한테 한번 다녀와보라'는 큰스님 말씀에 심부름을 오신 것이다. 진주 시내에서 숙모가 해주는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그날 따라 집에 숙모가 없어서 식사를 제대로 대접 못해드렸던 기억이 난다.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를 찾아가려 길을 나선 적이 한 번 있었다. 아버지 큰스님이 법전스님을 보내기기 한 해 전 여름방학 때, 친구와 함께 마산 외가댁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아버지 큰스님이 마산 성주사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마산까지 간 김에 성주사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올까 갈등했었다. 그날 나는 '그렇게 나를 박대한 분을 왜 찾아간단 말인가' 하고 그냥 진주로 돌아오는 차를 탔다. 차 안에서 친구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무 말을 안했는데도 친구는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잊었다고 하지만 어린 나이에 혈연의 정을 다 끊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수십년 동안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이야기를 이제야 풀어 놓는다.
묘관음사에 계시던 큰스님은 전쟁이 나자 남쪽으로 내려와 고성 문수암에서 청담스님과 잠시 머물다가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갈 즈음 통영의 안정사로 자리를 옮기셨다. 한반도의 남쪽, 푸른 바다가 바라보이는 벽방산에 위치한 안정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큰스님은 안정사 위의 토굴에 초가집을 지어 '천제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법전스님의 시봉을 받으며 지내셨다. '천제'는 '
부처가 될 수 없는 존재', '불성을 갖지 못한 존재'라는 뜻으로, 부처조차 될 수 없는 천한 사람이 되어야 도를 닦을 수 있다는 철학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아침 일찍 천제굴 앞마당에서 만난 아버지는 여전히 불친절한 분이었다. 할머니가 이고 간 음식이며 과일을 내려놓자마자 나와 고모를 향해 "저 산 아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와라." 하고 명하셨다. 인사를 하기도 전이었다. 고모와 함께 음식 보따리를 들고 산을 내려가 생면부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돌아왔다. 그때 불편하고 화난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니, 스님께 인사드려야제."
그렇게 재촉하시는 할머니의 말씀에 따라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를 했더니, 초가집 앞마당에 서 있던 큰스님의 첫 마디가 이러했다.
"니, 참 못됐네!"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참, 잘 아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털어내지 못한 채 방에 마주앉자 거두절미하고 물으셨다.
"그래, 니는 무엇을 위해 사노?"
교회에 나간다는 할머니의 귀띔을 염두에 두고도대체 저 애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마음에서 물으셨을 것이다.
"행복을 위해 삽니다."
큰스님의 그 시퍼렇고 뚝뚝한 눈길을 받으며 내가 대답했다.
"그래? 행복에는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인 행복이 있는기라. 그라믄 니는 어떤 행복을 위해 살려고 하노?"
"어떤 것이 영원한 행복이고, 어떤 것이 일시적 행복입니까?"
큰스님은 여느 때와 달리 큰 목소리가 아닌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행복은 인격에 있지 물질에 있는기 아이야. 부유하더라도 인격이 부족하면 불행하고 궁핍하더라도 인격이 훌륭하면 행복한기야.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계발해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기라. 그라니 부처님처럼 도를 깨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고, 이 세상의 오욕락을 누리고 사는 것은 일시적 행복인기라."
식욕, 수면욕, 성욕, 재욕, 명예.권력욕을 오욕락이라 한다.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 행복이 있다'고 하실 때, 나는 벌써 나의 생을 결정내버리고 말았다. 큰스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바보가 아닌 이상 일시적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속으로 정리하며 다시 여쭈었다. 스님들을 싫어하면서도 내면의 세계는 불연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처럼 도를 깨치는 공부는 어떻게 합니까?"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면 도를 깨칠 수 있는기라."
단언하건대 나는 수많은 생을 큰스님의 회상에서 수행자로 살아왔을 것이다. 절에 와 살면서 가장 먼저 너낀 것이 '아, 내가 과거에 참선하던 중이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화두니 참선이니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조금도 낯설지 않고 '영원한 행복 추구'라는 한 말슴에 그토록 미워했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지면서 그것에 내 인생을 걸었겠는가.
큰스님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삼서근 麻三斤'이라는 화두를 주었다.
"옛날 중국에 동산이라는 큰스님이 있었어. 한 수좌가 동산스님에게 '스님,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제. 그러자 큰스님께서 '삼서근이니라'하고 대답하셨는기라."
나를 비롯해 할머니와 고모가 조용히 아버지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어째서 삼서근이라고 했는고? 니는 오늘부터 그것을 자나 깨나 생각해보그라. 마음을 닦는 것이 불교인기라. 화두참선은 마음을 닦기위해서 하는 것이제. '어째서 삼서근이라 했는고' 하는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마음의 본래 모습을 알 수 있는기라. 밥을 먹을 때나 공부할 때나 길을 다닐 때나 무엇을 하든지 '어째서 부처를 물었는데 삼서근이라고 했는고, 어째서?'라고 의심을 해라."
큰스님은 그렇게 화두에 대해 말하고 나서 몇 가지를 더 물어보셨다.
"어두운 밤에 흰 눈을 보라. 이게 무슨 말이고?"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앞 사람이 칼 소리가 난다 하니 수건을 주었다. 왜 수건을 주었느냐?"
그날 열 개를 물으셨는데, 마지막 물음이 남전스님의 유명한 '南泉斬猫남전참묘' 이야기였다.
"남전스님 문하의 승려들이 고양이에게 불성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동쪽과 서쪽으로 파당을 나누어 싸우고 있었는기라. 그러자 남전스님이 고양이를 움켜잡고 그들에게 '너희들 중에서 누구든지 바른 말을 한마디 하면, 이고양이를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제. 승려들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남전스님이 들고 있던 칼로 가차 없이 고양이 목을 두 공강 냈는기라. 밖에 나가고 없던 제자 조주스님이 저녁나절에 돌아오자 남전스님이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었제. 이 말을 들은 조주스님은 아무 대꾸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밖으로걸어나갔어. 그러자 남전선사가 무릎을 치면서, '그때 만일 조주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살았을텐데!'라고 했제. 그래, 니라면 우찌 했겠노?"
꽤 높은 선문답을 했던 것인데, 물으시는 대로 대답을 했다.
큰스님이 마지막 내 대답을 듣고는 "10년 걸망 지고 다닌 중보다 낫구나"하시면서 처음으로 활짝 웃으셨다.
훗날 큰스님은 나의 인생을 결정짓게 했던 '영원한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해인사 백일법문에서대중을 향해 이렇게 설하셨다. 그때 갓 서른이지난 나는 대중과 함께 앉아 법문을 들었다.
"불교는 상대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무한의 세계를 자기의 마음속에서 찾는다. 내 마음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이 현실 밖에 따로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불교를 믿으려면 자기에게 그러한 절대무한의 세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근본조건이다.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계발하여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
불교는 처음과 끝이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인간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계발해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나라는 이 존재가 수천년, 수만 년에 걸쳐 윤회를 거듭해온 생명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해가 쉬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도 나의 변화를 눈치채고 천제굴에 다녀올 채비를 하셨다.
"지가 올리는 없고 내가 가서 봐야제."
할아버지는 그간 가슴에 켜켜이 쌓인 것이 얼마나 많으셨던지 20년 만에 아들을 만나자마자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 라는 외마디 소리를 내뱉으셨다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만 훤칠한 대장부의 모습을 하고 있는 큰스님의 모습에 압도당해, 돌아올 때에는 더 이상 다른 말씀이 없으신 채
"정말 도인이더라!" 하고 감탄만 하셨다고 한다.
큰스님은 20년 만의 만남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할어버지께 "앞으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더" 하고 위로해 주셨다고 한다. 묵곡리로 돌아온 할어버니는 하인들과 함께 경호강으로 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쳐놓았던 그물을 손수 거두셨다. 큰스님이 출가했을 때 '석가모니는 불살생을 근본으로 한다니 나는 살생함으로써 내 아들을 빼앗아간 석가모니에게 복수한다'면서 쳤던 그 그물이었다.
나는 교생실습을 그만두고 절에 들어가 화두공부만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부산사범학교에 다니는 옥자에게 편지를 부쳤다.
"강의를 들을 때는 화두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가르치려고 하니 화두가 영 들리지 않는구나. 화두 말고 그무엇이 중요한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월명암으로 들어가 공부할 생각이다. 너도 와라."
남동생의 죽음을 겪으면서 삶의 허망함을 느끼던 옥자는 어머니와 함께 성철 큰스님을 뵙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사는 영원한 대자유인의 길이 있음을 알고는 길을 찾던 차였다. 옥자는 내 편지를 받고는 곧바로 달려왔다.
옥자와 나는 월명아에서 참선공부를 시작했다. 진주에서가까운 월명암은 할머니가 자주가서 정진했던 곳이었고, 당시에도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계셨다. 나로서는 본격적으로 집을 나오기 전에 예행연습을 한 셈인데, 집에서 허락을 받지 않은 출가 예행연습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학생을 가르치고 있어야 할 교생이 절에 들어앉자 학교는 물론 집에서 야단이 났던 모양이다. 교생이 없어졌다는 학교의 연락을 받고 삼촌이 찾으러 왔다.
"수경아, 고만 내려가자. 공부는 마쳐야 하지 않겠나?"
삼촌은 좋은 말로 나를 달랬다.
다음 날 삼촌은 내려가고 나는 절에 남아 동안거 한철 동안 정진한 후, 학교로 돌아갔다. 걱정하시는 선생님께 "공부 잘하고 왔습니다"하고 인사드렸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 보셨다.
나와 옥자는 월명암에서 헤어지면서, 졸업하고 한 달 후 집을 나와 큰스님에게 가자고 약속을 했다. 학교를 마치면 당장 닙을 나와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졸업한 뒤 바로 집을 나오면 집안 어른들이 충격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봄, 학교를 졸업하고 한 달 뒤에 교사 발령이 났다. 집에서는 교편을 잡으라고 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떠나기 전날 저녁이었다. 누구보다 교편을 잡으라고 강권하는 삼촌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나를 돌보고 사랑해주었던 삼촌의 청을 그냥 뿌리칠 수만은 없었다.
"제 소원을 들어주면 집을 나가지 않을게요."
"그래? 알겠다."
참촌의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지아비를 부처님에게 빼앗기고 딸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던 어머니, 모든 대소사에 아버지를 대신한 삼촌, 숙모 등 가족들이 모두 앉은 자리에서 내가 말했다.
"저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다. 누구든 제 죽음을 대신해 줄수 있다면 절에가지 않겠습니다."
잠시 좌중에 침묵이 흐른 후, 이윽고 할아버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우리 집안이 망했구나!"
세상 누구에게도 굽혀본 적이 없던 할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버지 큰스님이 '가야산 호랑이' 라고 불린 것은 할아버지의 강한 기질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총을 들이대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일제 때에도 손텨딸의 이름을 개명시키지 않아 초등학교 입학시험에서떨어지게 한 대쪽 같은 분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눈물을 보이시니 죄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부처님은 6년 만에 도를 깨치셨지만 저는 더 열심히 공부해서 3년 만에 도를 깨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오로지 화두를 깨쳐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어야지, 오욕락을 쫓는 바보는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을 때였다. 정말 나는 3년 안에 돌아올 생각이었고, 그럴 자신도 있었다 .그때는 영영 집을 떠나는 출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아마 할아버지께서는 20년 전에 출가한 큰스님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10년 만에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집을 나가셨던 큰스님. 할아버지는 마음속으로 핏줄은 못 속인다고 하셨을 테고, 내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가족회의를 한 다음날 아침, 할아버지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리자 "절에 가면 버섯은 송이버섯 외에는 절대로 먹지 말그라. 산에는 곳버섯이 많데이" 하고 당부하셨다.
집을 나온 후 나는 40여 년간 고향을 찾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내가 떠난 지 3년만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상언, 자는 사문이요, 아호는 율은, 관향은 합천이다. 조선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81년 동짓달 초하루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의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사셨다. 진양 강 씨인 할머니 강상봉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버지 큰스님이 장남이었다.
(7월23일월요일 11시30분, 노회찬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노동운동가로써 사이다발언의 창시자. 진보정당 별로 좋아하지 않치만 노회찬은 좋아했었다. 그가 현재 진행되고있는 드루킹 특별검사에게 조사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2회에 걸쳐 4천만원을 수수했던가 보다. 그는 청탁은 하지 않았다고 유서에 적고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사람이 많으니 하나쯤 죽어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단호하게 자존심을 지키리라곤 보지 못했다. 노무현대통령을 보는 듯하다. 만수는 베트남에 연애하러 갔고, 나는 말년의 씁쓸한 자괴와 외로움을 견디고 있다. 출근하면서 학교 밑 4거리에서 그런 생각이 펼쳐진 것이다. 모두가 묵묵히 견딜뿐 아닌가. 누가 생생하고 활기차고 정진하고 있을까? 전부 근근히 견디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라는 득오. 자 이제 아침 집자를 손놓고ㅡ 화단의 풀을 좀 뽑고나서 오후부터 집자를 해 보장. 누가 왜 일안하냐고 묻지는 안으리라고 확신한다ㅋㅋ09:30 현재)
큰아들인 아버지의 출가로 인해 할머니는 한쪽 눈을 잃으셨다. 아버지가 출가한 후 할머니가 의복이나 음식 등을 마련해서 아버지 계신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할아버지가 어는 날 "찾아다니지 말라"하고는 급기야 화롯불을 던지셨는데, 그만 할머니의 눈에 맞은 것이다. 그때 할머니는 왼쪽 눈을 실명하셨다.
한쪽 눈을 잃고도 출가한 아들을 뒷바라지하느라 그 먼 곳들을 마다 않고 찾아다니셨던 할머니, 어머니라는 존재가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에 비견되는 이유를 나는 할머니를 통해서 깨닫는다.
큰스님이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즐겨한 것은 할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큰스님은 어려서부터 책을 한번 잡으면 종일 놓지 않았다. 세 살 때 글을 익혀, 학식이 높았던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 <소학>, <대학>을 배웠다. 다섯 살 때에는 집안 어른을 따라 백일장에 갔다가 장원을 하는 등 남달리 총명해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때는 <서유기>, <삼국지연의> 같은 중국의 4대 기서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산모퉁이 양지바른 곳에서 해 지는 줄 모르고 읽은 적도 있다고 한다. "내가남에게서 배운 거라곤 소학교 6학년과 서당에서 배운 <자치통감>이 전부다. 그것 말고는 혼자 공부해서 알았다"고 할 만큼 큰스님은 모든 것을 독학으로 배우고 깨달았다.
큰스님이 아홉살 되던 해 서당의 선생님이 책을 덮으며 "타고난 천재성과 이미 갖추어진 환경이 있으니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탄복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큰스님은 머리가 총명했으나 몸은 강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달여주는 보약을 자주 먹었고, 요양 차 지리산 대원사에 자주 갔다. 묵곡리 생가에서 70리 떨어져 있는 절이다.
큰스님이 불교를 알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던 듯하다. 독서량이 엄청나지만 그 전까지는 사서삼경, 제자백가의 저서, 서양철학서 등의 책을 보았을 뿐 불교 책은 전혀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스님에게서 영가스님의 <증도가>를 얻어 읽고는 '아, 이런 공부가 있었구나!' 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의 심정을 "캄캄한 반붕에 횃불을 만난 것 같고, 한밤중에 해가 뜬 것 같았다"고 하셨다. 영가스님은 중국 당나라 때의 스님으로 <증도가>는 영가스님이 조계의 6조 혜능대사로부터 선의 요체를 듣고 하룻밤 만에 깨달음을 얻어 그 심경을 담은 것이다.
큰스님의 20대 시절 노트에 쓰여 있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라는 글귀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영원의 문제를 풀기 위해 출가하신 큰스님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은 한용운 스님의 <채근담 강의>였다. 그 가운데 유독 마음으로 휘몰아 들어돈 구절이 하나 있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한 자 글자도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비춘다."
이렇듯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經경을 찾기 위한 발걸음이 대원사로 향하다가 출가까지 이어진 것이다.
옛 풍습에 따라 일찍 결혼해서 20대 초반에 큰딸 도경을 낳았지만 큰스님의 구도열은 더 깊어만 갔다. 큰스님은 대원사에서 대혜스님의 <書狀서장>과 당시 발간되던 <불교>라는 잡지를 바탕으로 본인 스스로 '無무'자 화두를 들었는데, 42일 만에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한결같이 화두가잡히는 動靜一如동정일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방금 전(7월24일11:38분), 콧방귀하나를 꼈다. 이번 하기휴가가 이번주 금요일 퇴근시간부터 시작되는데 내 상상은 대원사든, 가지산 석남사든, 가야산 백련암이든 어느 계곡에 가 있을 것이며, 그늘에서 불교관련 책을 읽다가(물론 지금 집자하는 책은 반납하고 새로운 불교관련 서적으로) 갑자기 내 아버지의 환영이 보여왔던 것이다. 콧방귀이길 바란다. 지금 산으로 들어가기엔 뭐, 속도가 문제겠는가마는 속세에 익숙해진 내가 산사에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다 늙어버렸다.. 오늘 아침엔 안경을 안쓰고 출근하다가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아래 글은 원택스님의 글에서 베껴왔다)
'無무'라는 화두의 유래는 이렇다. 중국 당나라 시절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778!897)에게 물었다.
"개에게는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중국 선불교 전통에 큰 획을 그은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없다[無]."
정확히 말하자면 '구자무불성(개에게는 불성이 없다)이라는 화두다. 이 말이 왜 화두가 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위로는 과거의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저 무물에 이르기까지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조주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 모순에 대한 의문, 의심이 참선의 출발이다. 성철스님은 이에대해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이를 의심하고 의심해가는 것이 무자화두의 참구고, 참선 정진"이라고 설명했다.
성철스님은 혼자 불교서적을 보면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고 집에서 참선 정진에 들어갔다. 정진을 거듭하는 가운데 큰스님은 차츰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한다. 그런데 집에서 참선 정진하니까 아무래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출가도 안 한 상태에서 그냥 대원사로 살러 들어갔다. 그렇게 막무가낼 들어갔으니 누가 환대를 해주겠는가. 대원사와 관련해 들은 첫번째 얘기는 당시의 나쁜 기억이다.
"젊었을 때 사상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불경을 보니까 불교가아주 마음에 들더라 이 말이야. 그래서 참선 좀 하려고 대원사를 찾아갔지. 그때 대원사탑전이 참 좋았어. 그래 거기 들어가 봤거든. 참선하기에 좋아 보이기에 안에 들어가 좀 있었지. 그런데 주지가 그걸 보고 펄쩍 뛰어. 본시 탑전이란 게 스님들만 있는 데지. 속인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한판 했지. 너거들은 살림 다 쌀고, 떡장사도 다 하고 그러고도 중이냐? 내가 불교참선 공부 한다는데 웬 말이 많냐. 그래 가지고 된다, 안 된다 하는 판인데 얼마안 가 주지가 갈렸어. 젊은 중이 주지대리인가를 맡았는데 그 사람하고는 그래도 말이 통했거든. 그래서 그 탑전에서 한겨울 보냈지!"
당시 대처승의 세속적인 삶, 특히 신도들에게 떡을 만들어 파는 상행위 등에 성철스님은 몹시 화가 났었다고 한다. 격한 성격의 성철스님이 그렇게 노발대발 한판 해대는데 속인이나 마찬가지였던 대원사 스님들이 이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후 대원사 탑전에서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용맹정진이란 하루 24시간 자지 않고 허리를 방바닥에 대지 않은 채 끼니때를 제외하곤 꼿꼿이 좌복에 앉아 참선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사람들이 가고 오는 것도 모른 채, 밤낮으로 열심히 정진만 했다고 한다. 성철스님에게 자주 들은 두 번째 기억은 정진 당시의 심경이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에 호랑이가나타나 사람을 해친다는 소문이 자자했거든. 그래서 나도 호랑이밥이 될까 겁나서 밤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정진했지. 하루는 갑자기 '내가 뭐 땜에 이리 겁을 먹는고' 하는 생각이 들었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호랑이를 겁내 떨고 있는 내모습이 우습단 말이야. 호랑이에잡혀먹힐 때는 먹히더라도 겁내지 말아야겠다 싶어 그 뒤부터는 방문을 확짝 열어놓고 잤지. 그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었거든. 그 다음부터는 호랑이를 안 무서워하게된 거라. 그래서 낮이나 밤이나마음대로 쏘다녔제."
일타스님이 늘상 재미있게 들려주는 성철스님 자랑이 바로 그 깨달음에의 확신이다.
"성철스님은 대원사 탑전 예기만 나오면 신나 하셨지. 입에 침을 튀기면서 설명하시는데, 얘기를 하다가 입에 넣었던 밥숟가락을 확 빼면서 말하는 거야. '그게 42일 만이었어. 내가 42일 만에 동정일여가 됐거든. 동정일여가 되니까 정말 참선 부지런히 하면 도인 되겠다 싶데.' 늘상 얘기하면서도 그 대목에선 늘 흐믓해했지."
성철스님은 42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에 올랐다지만, 막상 대원사는 '이 고집 센 속인' 이 여간 골칫거리가아닐 수 없었다. 속인이 혼자서 탑전 선방에 버티고 앉아 있으니 여러 가지로 불편했던 것이다.
고민하던 대원사스님들이 큰절인 해인사로 공문을 보냈다. 이상한 청년 한 명이 수행한다며 탑전을 차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냐는 문의였다. 그러자 해인사에서 효당 최범술스님이 대원사로 찾아왔다.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찾아온 스님이 출가 이전 속인 신분인 성철스님을 보고는 해인사 행을 권했다.
"해인사가 절도 크고 좋은 곳이니 같이 갑시다. 지금 해인사에는 용성스님(1864~1940,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과 만공스님(1871~1946년 근대 선불교의 대가) 같은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그분들이꼭 청년을 데려오라고했소."
성철스님은 처음에 이 제안을 거부했다.
"여기 대원사도 조용하고 참선하기 좋은데, 뭐 하러 일부러 해인사로 찾아가겠습니까?"
하는 수없이 범술스님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잘 생각해 보고 꼭 한번 해인사로 오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얼마 뒤 성철 스님은 마음을 바꿨다. 성철스님은 해인사로 찾아간 경위에 대해이렇게 말씀하셨다.
"얼마 있다가 해인사같은 큰 절도 괜찮겠다 싶은 마음이 들더란 말이야. 그래서 대원사를 떠나 해인사로갔지. 그런데 나보고 오라캤던 최범술스님이 없어. 이고경스님이 주지를 하고 있더군.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지. 최범술스님이 찾아오라고 해서왔는데 없어서 당신을 찾아왔다. 나는 중은 싫어하는데 부처님을 좋아해 참선 공부 좀 하려고 그런다고 말이야. 별로 듣기 좋은 얘기를 한 거는 아닌데, 어째 이리저리 말을 해보니까 통하는 거라. 그 스님이 좋아하더라."
이고경 스님도 당대의 유명한 스님으로서 성철스님의 그릇을 알아본 듯하다. 성철스님의 말은 계속되었다.
"고경스님이 생면부지 초면인데, 일단 자기 방에서같이 자고 다시 예기하자는 거야. 그래서 이런저련 얘기를 하다가 주지 방에서 하룻밤을 잤지. 다음 날 내가 다시 나는 공부하러온 것이니 공부할 방을 달라고 했더니 고경스님이 원주스님을 불러 선방에 머물게 하라고 하더라구. 그런데 원주가 안 된다는 거야. 속인을 선방에서 받은 일이 없다는 거야."
언래 속인은 선방을 드나들 수 없다. 하물며선승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참선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지 고경스님은 이 청년은 다른 사람과 틀리니까 시키는대로 선방에 들게 하라며 원주를 야단쳤다고 한다. 성철스님이 출가 예기를 할 때 은근히 힘을 주어 말하는 대목이다.
"고경스님이 주지가 받으라면 받지, 무슨 말이 많냐며 꾸짖으니 원주가 뭐라고 하겠어. 원주스님이 '에이, 모르겠다' 며 나를 선방으로 데려가더군. 가보니까 퇴설당(해인사의 옛 선방으로지금은 방장실)이더구먼. 속인으로 선방에 들어가 참선한 거는 그래 내가 처음이고 마지막일 거야."
(이상이 성철스님이 출가할 때의 기이한 행적인데 나로서는 흥미끄는 대목이라 특별히 원택스님의 책에서 옮겨 왔다. 파격적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파격적 대접을 받을만하면 받는 것이고 X도 모르는게 탱자탱자하면 나중엔 들통나 쫒겨나는 거 아니겠나..ㅎ 저간의 사연들도 왜 없겠는가 마는 참으로 코뿔소같은 돌진이 아닐 수 없다. 남은 예기를 마저 옮기자..)
彌天大業紅爐雪(미천대업홍로설)이요
跨海雄基赫日露(과해웅기혁일로)라
誰人甘死片時夢(수인감사편시몽)가
超然獨步萬古眞(초연독보만고진)이로다.
하늘 넘친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빛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성철스님의 出家頌]
해인사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36년 3월 출가를 했다. 큰스님은 당시의 정황과 심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해인사 선방에 참선 정진한다고 앉아 있으니까 여러 사람이 날 찾아오대. 노장들한테 내 궁금한 거를 막 물어봤제. 그런데 노장들이 뭘 하나도 모른다 아이가. 실망하고 있던 차에 동산스님이 찾아온 기라. 지금 생각해 보면 건방졌제 내가. 맨날 그랬던 것처럼 그 스님에게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제."
동산스님은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을 큰스님으로, 일제하에서 의학을 전공한 엘리트다. 3.1독립선언에 서명한 민족지도자 33인에 포함된 용성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했다. 1950년대 불교 개혁과정에서종정으로 현대불교의 기틀을 잡은 고승인데, 당시엔 백련암에 머물고 있었다. 출가도 않은 청년이 이런 큰스님에게 당돌하게 물었다고 한다.
"나는 이리저리 공부했는데, 스님 생각은 어떻소."
동산스님은 초면이 이런 질문을 해대는 당돌함이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처음엔 이상한 놈이라는 표정이었는데 조금 지나서는 빙굿이 웃었다고 한다. 성철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동산스님이 혼자 웃다가 대답은 안해주고 백련암에 놀라 오라고 하고는 그냥 가더만. 그래서 내가 백련암으로 찾아갔지. 어지간히 반가워하대. 그러더만 나보고 '중 되라' 고 그래쌌는 기라."
"그래 나는 중 안될락 願力원력 세운 사람이라 캤지. 진짜로 중 될 마음은 통 없었던 기라. 그런데 내 이름, 불명을 지었다며 주는데 보니, 성철 性徹성철이더라고. 지금 내 이름 아이가. 나는 아무 말 안했는데, 언제 날 받았다고 계를 준다고 오라는 기라."
젊어서부터 고집이 대단했던 성철스님. 더욱이 출가 않기로 결심한 사람ㅇ 그 마음을 굽힌 계기는 영 심심하다. 별 이유나 계기도 없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중은 정말 안될라캤는데, 그 노장을 가만히 보니까 싫지가 않더란 말이야. 그래 어째 하다보이 영 이상하게 돼버렸어. 강제로 계를 받은 거야. 동산스님의 상좌가 된 기라."
이렇게 성철스님은 출가했다. 동산스님과의 인연. 성철스님은 원래 동산스님의 둘째 상좌다. 그런데 해방된 후 맏상좌가 환속하는 바람에 맏상좌가 됐다.
동산스님을 따라 부산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한 철을 난 성철스님은 범어사 산내 암자인 내원암으로 가서 할아버지 격인 용성스님을 시봉했다. 용성스님이 동산스님의 스승이니까, 용성-동산-성철로 이어지는 선불교의 맥이 완성된 것이다.
당시 용성스님은 3.1운돈으로 구속됐다 풀려나 범어사 내원암에 머물고 있었다. 용성스님은 다른 스님들은 모두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손자뻘인 성철스님만은 꼭 "성철수좌" "성철스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철스님이 그 까닭을 물었다.
"스님이라고 부를 만한 중이 있어야지. 그런데 너를 대하니 스님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참선 정진 열심히 해라."
용성스님은 성철스님을 그토록 미더워했다. 그래서 서울 대각사로 옮겨갈 때에도 성철스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예"하고 대답만 하고는 부산역에서 도망쳐 버렸다. 노장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가 성철스님답다.
"노스님 따라갔다가는 평생 시자 노릇만 할 것 같은 기라."
(이상은 원택스님의 책에서 옮겨 온 것임을 밝힌다.)
한번은 큰스님이 계신 범어사 원효암으로 찾아갔더니 동화사 금당선원에 있다가 은혜사, 운부암을 거쳐 금강산으로 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큰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했던 해가 1940년이었으니 출가한 지 4년쯤 지났을 때였다.
할머니가 천리 길을 물어물어 온갖 고생을 감내하면서 금강산 마하연까지 찾아갔는데 큰스님은 "이렇게먼 길을 왜 오셨소!" 하고 고함부터 치며 냉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아니, 난 니를 보러 오지 않았다. 하도 금강산이 좋다고 해서 금강산 구경하러 왔제"라고 했다. 이 대답에 큰스님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고 한다.
급기야 할머니로 인해 대중공사가 열렸다. 먼 길을 오신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 구경을 시켜드리든지 아니면 마하연에서 퇴방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대중공사의 준엄한 명이 떨어졌다. 부처님도 따라야 하는 대중의 뜻이 큰스님에게 내려진 것이다. 수행 공동체에서 대중의 뜻은 누구나 따라야 하는 법도이고 출가의 법규이다.
다음 날부터 큰스님은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여 할머니를 모셨다. 개울이 나오면 손을 잡아 건너고, 험한 오르막길을 만나면 등에 업고 오르고,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이면 앉아 함께 쉬기도 하면서 만폭동, 보덕암, 묘길상, 장안사, 삼불암, 표훈사, 정양사 등의 내금강과 신계사, 옥류동, 접기암, 구룡폭포, 상팔담, 만물상 등의 외금강을 두루구경했다.
"아들 등에 업히기도 하고 떠밀리기도 하고 험한 곳에서 손과 팔을 잡혀 이끌리기도 하믄서 보낸 일주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서질 않았는기라.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제. 하도 좋아서 극락세계가 따로 없다는 생각까지 했는기라."
불교에 귀의한 할머니는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았다. 그때 받은 불명이 超然花초연화였다. 그 뒤로 할머니는 세속에서 불자로 반듯하게 사셨다. 계를 지키며 채식을 하고, 동안거와 하안거는 진주 월명암, 정취암 등에서 열심히 정진하셨다.
큰스님이 출가한지 20년 후, 내가 집을 나온 이듬해에 할머니는 묵곡리 집에서가족들과 국일암의 성원 노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하셨다. 성원 노스님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아직도 화두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성성하다" 하셨다고 한다. "내일 갈 것이니 죽기 전에 삭발을 부탁한다" 하시며 "다음 생에는 출가하여 불필의 상좌가 되겠다"고 하셨다는 말씀을 성원 노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라는 어머니의 청을 물리치고 결국 집을 떠나자, 외로움과 서러움을 삭이지 못한 어머니는 진주 월명암에 계시던 성원스님의 안내를 받아 파계사 성전암으로 큰스님을 찾아갔다고 한다. 큰스님과 단판을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큰스님이 철조망을 두른 채 정진하던 때라 누구도 큰스님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서 물러 날 수는 없었다. 당시 성전암에는 행자 세 명이 큰스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었던 동업행자(천제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인기척이 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웬 젊은 부인이 스님 뵙기를 청해요. '큰스님께선 지금 아무도 안 만나주시니 그냥 돌아가주십시오' 라고 했는데도 스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만 반복해요. 해질 무렵이 되자 그분이 어딜 갔는지 사라졌어요. 당연히 돌아갔나 보다 하고 저녁 공양을 마쳤죠. 공양이 끝나고 큰스님이 시자실로 오셔서 막 말씀하시려고 하는데, 우당탕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낮에 보았던 그분이 들이닥치는 거예요."
바로 그때 큰스님이 크게 고함을 치셨다는 것이다.
"빨리 쫒아내! 머 하노? 빨리 쫒아내라니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큰스님을 쳐다만 보고 있었고, 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를 쫒아내려고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어머니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셨다.
"스님, 내가 할 말이 있어 왔소!"
사람이 얼마나 황소고집이기에 하루 종일 숨어 있다가 난데없이 나타났는지, 또 큰스님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른 채 시자들은 어머니를 성전암에서 파계사까지 끌고 내려왔다. 그때서야 단념을 했는지 어머니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분이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천제스님이 알게 된 것은 몇 해가 지난 후였다.
할아버지가 운명하셨다는 소식이 성전암에 닿자 큰스님은 동업행자에게 문상을 다녀오라고 했다.
"상가에 도착해 문상을 하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소복을 입은 맏며느리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 거예요. 어디에서봤나 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몇 년 전 저녁 무렵에 억지로 쫒아낸 그 부인인 겁니다. 얼마나 무안하고 참담한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가 쫒겨날 것을 뻔히 알면서 큰스님을 찾아간 것은 '그렇게 도가 좋으면 혼자가면 되지 왜 하나밖에 없는 딸까지 데려가느냐? 딸만이라도 돌려주면 이 세상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볼 것이요' 하고 담판을 짓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말 한 마디 꺼내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으니, 빈 걸음으로 돌아오던 그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3년 안에 도를 깨치고 돌아오겠다는말을 믿고 있던 어머니는 10년을 기다려도 딸이 돌아오지 않자 석남사로 나를 찾아왔다. 한창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던 나는 10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더욱 냉정하게대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느냐' 는 말 한다디는 물론, 따스한 눈길 한번 건네지 않았다. 큰스님이 나에게 그랬듯이 인정에 끌리면 부모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판단으로 어머니를 지나가는 행인처럼 대한 것이다. 어머니는 "독사보다 더 지독하다!" 하시면서 끝내 발길을 돌리고 마셨다.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출가를 꿈꾸었던 언니, 평생 화두를 여의지 않은 채 임종을 앞두고 삭발한 후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 완고한 유학자였으나 돌아가실 때는 "이놈들아, 나는 성철스님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시면서 눈을 감으신 할아버지, 오십 대 중반에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어머니. 이러니 '우리 집안은 전부전생의 스님들이 온 것 같다'는 내 생각을 누가 틀리다고 하겠는가.
3장 친필 법문 노트
자기가 본래 부처이거늘 그것을 모르니
월명암에서 헤어지면서 옥자와 그렇게 약속했전 나는 집을 나온 뒤 부산역에서 옥자를 만나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파계사 성전암에 계신 아버지 큰스님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천제굴을 떠나 경북 달성군 파계사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기신 큰스님은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머물면서 한 번도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치열하게 용맹정진하셨다. 큰스님의 개인사에서는 물론 한국불교사에서도 이 '洞口不出(일주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정진하는 금족의 수행)10년'의 의미는 깊다. 10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철조망을 쳐놓고 외부사람들은 만나지 않은 채 수많은 경전과 조사어록을 살펴봄은 물론, 수학과 과학 등 다른 학문도 연구하셨다. 경전을 읽고 참선하면서 한국붉의 앞날을 준비한 것이다.
성전암에 도착해 큰스님에게 삼배를 올리고 말씀을 드렸다.
"참선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나왔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큰스님과 내가 닮은 점이 있다면 필요 없는 말은 안 하고 필요한 말은 요약해서 한다는 것이다(나는 요약을 잘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조금 있다) 그때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무처님께서 6년 만에 깨친 도를 3년 안에깨쳐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급했겠는가.
큰스님은 우리에게출가하라는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다. "수행자는 가난부터 배우고 下心하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저 마을에 내려가 탁발부터 해보거라" 명하셨다.
수행자는 평생 동안 내 것을 소유하지 않고 빌어먹으면서 공부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큰스님께서는 수행자의 기본은 하심과 무소유이며, 그래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고 싶으셨던 듯하다.
하루빨리 공부하고 싶었던 우리는 훌륭한 스님들이 태백산 홍제사에서정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로 가기로 결정했다. 안정사 천제굴에서 큰스님을 극진히 모셨던 법전스님은 이렇게조언해 주었다.
"홍제사에서는 잡곡만 먹고 지내는데 그곳으로 바로 가면 적응이 안 될 것이니, 해인사말사인 청량사에서 한 철 나고 그리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 말씀을 듣고 해인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매화산 자락의 청량사로 갔다.
청량사로 떠나는 나와 옥자에게 큰스님께서 노트 한 권을 내놓으며 둘이 함께 보라고 하셨다. 직접 쓰신 법문 노트였다. 처음 발심하여 출가한 수행자들이 굳은 신심으로 열심히 수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써주신 것으로, 수행에 대한 지침이 담겨 있었다. 지금 읽어봐도 큰스님의 법문은 명철하면서도 현대적인 언어로 쓰여 있어 귀에쏙쏙 들어온다. 1950년대, 그러니까 큰스님의 연세 사십 대 중반에 작성하신 것인데 어쩌면 그렇게 내용이 일목요연하고, 문장 또한 군더더기 하나없이 논리정연핮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단정하게 써내려간 큰스님의 법문노트는 다음과 같은 머리말로 시작되었다.
호화코 부귀코야 맹상군만 하련마는
백 년이 못하여서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오
과연 그렇다. 생자필멸은 우주의 철칙이라, 大海巨山대해거산도 필경은 파멸하거든 하물며 그 사이에끼어 사는 구구한 미물들이랴! 천하에 없는 부귀영화를누리는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죽음을 못 면해서 소나무 밑에서티끌이 되나니, 모든 부귀영화는 일장춘몽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낙양성 십 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몇몇이냐'라고 노래함도 이 소식을 전하여 주는 것이다.
草露人生, 초로인생, 풀잎의 이슬 같은 인생!
들판의 저 화초는 겨울에 죽었다가 봄이 오면은 다시 꽃이 피건마는, 오직 이 인간은 한 번 죽으면 아주 가서 몇 천 년의 세월이 바뀌어도 다시 돌아오는 이 없으니, 우주는 인생의 분묘라 함은 이룰 두고 이름이라. 참으로 영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만고영웅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아방궁을 크게짓고 밤을 새워가며 천하 풍류를 다하여 이 설음을 씻어보려고노력하였건마는 순식간에 여산의 한 줌 흙이 되고 말았으니, 이러한 발악은 교수대에 오르는 죄수의 歌舞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인생은 영원한 비극에서만 그치고 말 것인가? 어떠한 一縷일루의 희망이 있는가?
다음을 자세히 읽어보라.
큰스님은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임을 보여주는 많은 실례를 들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법문을 써놓으셨다.
부처님께서 도를 깨치시고 처음으로 되치시되 "기이하고 기이하다. 모든 중생이 다, 항상 있어 없어지지 않는[常住不滅]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을 모르고 헛되이 헤메며 한없이 고생만 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깝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 허망한 우리 인간에게 영원불멸의 생명체가 있음을 선언한 첫 소식이다. 그리하여 암흑속에 잠겼던 모든 생명이 영원한 구원의 길을 얻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랴. 억만 겁이 다하도록 예배드리며 공양 올리고 찬탄하자.
영원히 빛나는 이 생명체도, 도를 닦아 그 광명을 발하기 전에는 항상 어두움에 가리어서 전후가 캄캄하다. 그리하여 몸을 바꾸게 되면 전생 일은 아주 잊어버리고 말아서, 참다운 생명이 연속하여 없어지지 않는 줄을 모른다.
도를 깨치면 봉사가 눈뜬 때와 같아서 영원히 어둡지 않아, 천번 만번 몸을 바꾸어도 항상 밝아 있다. 눈뜨기 전에는 몸 바꿀 때 아주 죽는 줄 알았지마는, 눈 뜬 후에는 항상 밝아 있으므로 몸 바꾸는 것이 산 사람 옷 바꿔 입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눈뜨기 전에는 항상 業업에 끄달려 苦고만 받고 조금도 자유가 없지마는 눈을 뜨면 대자유와 대지혜로써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실생활에서보면, 아무리 총명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도를 깨치기 전에는 잠이 아주 들어서는 정신이 캄칸하여 죽은 사람과 같이 아무것도 모른다(맞다). 그러나 도를 깨친 사람은 항상 밝아 있기 때문에 아무리 깊이 잠을 자도 캄캄하고 어두운 일이 절대 없다.
이것이 明과 暗을 초월한 절대적 광명이며, 곧 불성의 자체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깨쳤나를 시험하려면 잠을 자보면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천하없이 크게 깨친 것 같고 모든 불법 다 안 것 같아도, 잠잘 때 캄캄하면 참으로 바로 깨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큰 도인들이 여기에 대해서가장 주의하였던 것이다.
상주불멸하는 법성을 깨치고 보면, 그 힘은 상상할 수도 없이 커서 비단 세속의 학자들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말하는 법성은 깨치고 보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나서서 천만 년이 다하도록 그 법성을 설명하려 하여도 털끝 하나만치도 설명하지 못할만큼 신기하다. 시방허공(十方虛空)이 넓지마는 법성의 넓이에 비교하면 법성은 크나큰 바다와 같고 시방허공은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거품 같다. 허공이 억천만 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지만 법성의 생명에 비교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하다"
고 하시니, 이것이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의 설명이다. 이러한 거룩한 법을 닦게 되는 우리의 행복이란 어디다 비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古人고인은 이 법문 한마디 들으려고 전신을 불살랐으니, 이 몸을 천만 번 불살라 부처님께 올려도 그 은혜는 천만분의 일도 갚지 못할 것이다. 오직 부지런히 공부하여 어서 빨리 도를 깨칠 때, 비로소 부처님과 도인 스님들의 은혜를 일싱 갚는 때이니 힘쓰고 힘쓰라!
다음은 參禪窮行참선궁행(참선 정진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법문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방세계에 가득 차는 음식, 의복, 금은보화로써 시방세계의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천만년 예배를 드리면 그공덕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 많은 공덕도 苦고 받는 중생을 잠간 도와준 공덕에 비하면 천만분의 일, 억만분의 일도 못 된다."
영명 선사가 말씀하였다.
"널리 세상에 참선을 권하노니, 설다 듣고 믿지 않더라도 성불의 종자는 심었고, 공부를 하다가 성취를 못하여도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는 훨씬 많다."
자명선사는 임제종의 대표적인 도인이다. 분양 화상 밑에서 지내면서 추운 겨울에도 밤낮으로 정진하였는데, 밤이 되어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탄식하였다.
"고인은 도를 위하여 먹지도 아니하고 자짇 않았거늘, 나는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게으르고 방종하여 살아서는 시절에 보탬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에 이름 없으니 너는 무엇하는 놈이냐?"
이암선사는 공부할 적에, 해가 지면 눈물을 흘리며
"오늘도 또 이렇게 헛되이 보냈구나!" 하며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수도팔계
1. 희생
오직 영원한 자유를 위해서 一時 소소한 영화는 완전히 버려야만 한다.
2. 絶俗
생사의 근본은 음행에 있나니 이는 諸佛제불의 통설이다. 음행을 끊지 못하면 成道는 못한다. 첫째 체력을 고갈하고, 둘째 정신을 파멸하고, 셋째 항상 애욕에 사로잡혀 무한한 번민과 고뇌가 끊어지지 않고, 넷째 생산 양육에 몰두케 되고, 다섯째 사후 隨(따를수)愛수애 受生해서 끊임없이 윤회에 빠지게 되나니, 끊어야 한다.
3. 고독
수도에는 인정이 원수다. 서로 돕고 서로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이것이 생사윤회의 출발이니 일체의 선인악업을 다 버리고 영원의 자유와 더불어 독행독보해야 한다. 참으로 고독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무상대도는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니 일반인과는 삼팔선을 그어놓고 살아야 한다.
4. 賤待
남에게 대접받을 때가 망하는 때이니 일시의 대접에 팔려 영원한 활로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천대받고 괄시받는 때만이 참으로 나아가는 때다.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은 나를 제일 방해하는 魔軍이다. 온갖 중상모략의 침해로써 나를 적대하는 사람보다 더 큰 은인이 없다. 모든 공부 방해인을 제거해 주고 많은 인내심을 북돋아주어 도를 일취월장케 해주니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
5. 下心
내 못난 줄 알 때에 비로소 철 나는 때이다. 가장 낮은 곳은 자연히 큰 바다가 되지 않는가. 이런 곳이 아니면 광대무변한 도는 들이지 못하는 법이다. 남의 존경과 대접은 총알과 같이 피하고 독사같이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무엇을 묻든지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해야 한다.
6. 專念
한 몸으로 두 길은 못 간다. 영원한 자유는 화두를 바로 깨쳐 자성을 보는見性 데 있다. 그 외에는 모두 邪路다. 몇 백 년 동안 밥 이야기를 해도 배부르지 않는다. 오직 실지로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팔만법보도 여기 와서는 魔障마장이니 그 외 일체 언어문자리오. 오직 화두만 참구할 뿐이다.
7. 努力
모든 성공의 大小는 노력의 여하에 정비례한다. 고인들은 不言不眠, 사력을 다한 不斷不休의 노력으로 성도했다.
8. 苦行
모든 타락과 실패는 懈怠(게으를해.게으를태)해태에서 온다. 그리고 신도의 돈은 중을 죽이는 설비상이다. 고인이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철칙을 세움도 여기에 있다. 남의 밥 먹고 내 일을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는 만사 不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정법이 두타제일인 가섭존자에게 가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도 청량사 시절의 초발심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초발심일 때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라는 말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초발심 때처럼 쭉 밀고 나가면 깨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입승은 선원 대중의 규율과 기강을 세우고 수행 정진을 지도하며, 병법과 부전은 예불과 불전 의식을 담당한다.
주지는 절의 행정과 재산권을 대표하여 사무를 총괄하며, 공양주는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밥)와 대중들의 공양을 담당한다.
별좌는 후원(부엌) 살림을 관리하며, 다각은 차 담당, 지객은 절에 오는 손님들을 안내하는 일을 담당한다.
나는 마호였는데, 대중 스님들이 옷에 먹이는 풀을 쑤는 소임이었다. 풀을 한번도 쑤어본 적이 없던 나는 재료로 받은 밀가루를 큰 물통에 확 풀어버렸는데 풀도 죽도 되지 않아 스님들이 야단이었다. 결국 나는 첫 안거를 소임 없이 지냈다. "우리 두 번 자지 말자." 졸리우면 스님들의 머리맡에 누었다가 눈을 떠보면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옥자와 나는 서로 깨우는 법도 없었다. 일어나보면 한 사람은 벌써 밖에 나가고 없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밤에는 대웅전 앞마당을 거닐기도 하고, 거닐다가 다리가 아프고 피곤하면 대웅전 기둥 한 모퉁이에 기대어 잠깐 쉬었다. 한밤중이면 산속의 짐승들이 얼마나 소리를 크게 내어 울어대는지 처음에는 얼굴이 새파래져 법당으로 들어올 때가 많았다. 옥자는 무서움이 없었지만 나는 무서움을 많이 탔다. 하루는 이렇게 짐승들을 무서워하면 산중에서 어떻게 공부하나 싶어 일부러 깊은 밤중에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올라가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데 혼자 무서워했구나 싶었고, 그 후로는 무서움을 타지 않게 되었다.
"씨를 거두어놔야 봄에 씨를 뿌리는데, 그냥 몽땅 베어버렸단 말이냐?"
그런데 우리가 지나간 자리의 고추들이 모두부러져버렸다.
일하는 데는 서툴렀지만, 노상 주지 스님의 꾸중만 듣는 행자는 아니었다. 밤에 잠을 쫒기 위해 대웅전 앞마당을 거닐고 있으면 주지 장일스님께서기특하다고 하시며 사탕을 살짝 입에 넣어주셨다. 당시는 사탕이 귀하던 시절이라 장일스님이 아주 자비스럽게 느껴졌다.
청량사 시절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정진했는지, 지금 석남사 선원에서 유나 소임을 맡고 있는 현묵스님이 그때를 회상하면서 한 말이 있다.
"출가도 하지 않은 가시나들이 와서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출가한 우리들이 부끄럽더라구. 그래서 현각스님과 함께 안거를 마치자마자 제주도로 갔지. 아주 멀찌감치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 가서 도만 닦을 생각이었다니까.
큰스님께서는 법문 노트에 수도생활(의식주)의 근본정신으로 12두타행(12고행)을 이렇게 적어주셨다.
.성하고 새 것은 누가 주더라도 받지 않는다.
.여벌 옷은 쌓아두지 않는다.
.누구든지 청해서 주는 것은 받지 않고 오직 얻어서만 먹는다.
.가난한 집이나 부잣집이나 가리지 않고 차례로 얻어먹는다.
.한 번 앉아 먹고 두 번 먹지 않는다.
.조금 얻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구걸하지 않는다.
.오후에는 과즙과 꿀물도 먹지 않는다.
.산이나 들이나 인가와 먼 고적한 곳에서 살고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다.
.항상 묘 터에서 사람의 뼈들을 보며 정진하여 무상을 깊이 느껴 발심을 돕는다.
.집 안에서 살지 않고 항상 나무 밑에서 공부한다.
.나무 밑도 반 집 안 같아서 오히려 애착이 생기는 고로 아무엇도 덮이지 않는 곳에 산다.
.타락은 게으른 데서 오므로 항상 앉아서 눕지 않고 용맹정진한다.
참선자는 화두가 생명이다. 모든 주변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부처라는 큰 믿음(大信心), 부처인데 못난 중생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한 분한 마음(대분심), 화두에 대한 큰 의심(대의심)으로 정진하다 보면 화두일념이 된다.
청량사에서 하안거를 보내고 큰스님이 계시는 성전암으로가서 상기를 하소연했다.
큰스님께서 상기 내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氣海丹田 腰脚足心 (기해단전 요각족심)
이 글을 써주시면서 이렇게 일러주셨다.
"좌복에 앉아 온몸의 기운을, 높은 절벽의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고 足心족심에 생각을 두면 열이 내릴기라."
상기가 나아질 즈음, 큰스님께서는 "태백산 홍제사로 인홍스님을 찾아가라."고 하시며 다음 수행처를 정해주셨다. 홍제사로 가는 길에경북 문경시 운달산의 김용사에 들렀다. 정진이 칼칼하기로 소문난 월혜 노스님을 찾아뵙고 싶어서였다. 인홍스님의 상좌였던 묘영스님이 우리를 안내했다.
내가 인사를 드리자 "진주 학생인가?" 하고 반가움을 드러내셨다. 내가 머리를 깎지 않은 채 절에 들어와 공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 것 같았다. 마흔두 살 때 안동의 한 포교당에서 청담스님의 법문을 듣고 사흘 만에 출가를 감행한 분이다. 밤을 새워가며 만류하는 판사 아들의 손을 뿌리치고 윤필암으로 가서 삭발을 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방납자들의 귀감이 되셨다.
월혜 노스님은 우리가 찾아뵌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예순둘의 나이였다. "널도 사지 말 것이며, 돗자리에 말아서 그대로 화장해라" 한 것이 월혜 노스님의 유언이었다고 한다. 죽음 자체도 무소유처럼 보였던 월혜 노스님의 떠나시는 모습은 그 자체로 나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저렇게 세상을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출가한 후 많은 스님들의 다비식을 보아왔지만 월혜 노스님처럼 조촐하고 검소한 다비식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저렇게 월혜 노스님처럼 생사 발심해서 이름 없는 도인으로 청정 검소하게 살다가 긴 침묵 속으로 돌아가리라."
저녁볕이 서산에 걸릴 즈음 경북 봉화군 소천면에 있는 홍제사에 도착했다. 인홍스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머리는 짧게 잘랐는데, 지금 행자들이 주로하는 쇼트커트는 우리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성불하고 나서 머리를 깎겠다는 야무진 결의를 하고 있었다.
목욕을 하고 마당에 나와 있는데 멀리서 몇몇 스님들이 걸망에 산초를 가득 담아 지고 절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편안하고 평화로워 보여 스님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태백산은 눈이 오면 무릎까지 쌓였다. 하루종일 자지 않고 눈 속에 살아야지 했다. 그야말로 눈이 좌복이 되었던 것이다. 달빛 아래 쌓인 흰 눈빛은 선문답이라도 하듯 희고도 밝았다. 마음의 눈을 여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두운 밤에 흰 눈을 보라!"
바로 자성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닌가.
정월 초하루 날이었다. 잠시 정진을 멈추고 아침으로 떡국을 먹은 뒤, 모든 스님들이 모여 '성불도놀이'를 했다. 성불도 놀이는 성불을 목표 지점으로 정해놓고 주사위를 던져 성불에 이르는 각 단계에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는 놀이다. 명절 기분이 나는 가운데 놀이가 시작되었는데, 무심코 던진 것이 곧바로 수행의 높은 단계인 경절문으로 들어가 나는 세 번 만에 주불이 되었다.
곧 법당에 법상이 차려지고 더벅머리 행자인 내가 법상에 올라가 앉았다. 인홍스님을 비롯하여 법문을 하러 오셨던 일타스님, 모든 대중 스님들이 가사 장삼을 수하고법상을 향해 삼배를 했다. 일타스님께서 부처님께 법을 청하는 청법을 하셨다. 나는 겁도 없이 법상에 올려놓은 주장자를 높이 쳐들어보인 뒤 묵묵히 앉아 있다가 죽비를 세 번 치고는 법상에서 내려왔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스물한 살 행자 시절의 풍경화이다. 출가 시기에는 선후가 있으나 공부를 이루는 데는 선후가 없다. 누가 간절히 목숨을 내놓고 공부하느냐에 따라 성불의 선후가 정해질 뿐이다.
나는 홍제사에서 한 철을 보내고 봄 햇살에 눈이 녹아 길이 드러나자 하안거 할 곳을 찾아나셨다. 하안거와 동안거 사이를 산철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에 전국을 다니며 수행하는 것을 만행이라고 한다. 옥자와 나는 선재동자가 선지식으로 찾아가는 심정으로 대승사의 말사인 문경 윤필암으로 떠났다. 아버지 성철 큰스님이 공부하셨던 곳에 다니며 정진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묘엄스님은 당신이 구술한 <회색고무신> 에서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철스님께서 저를 앞에 앉히시고는 '너의 아버지와 나의 사이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하셨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믿어라 하니 피식 웃음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살아보면서 겪어봐 가면서 믿겠습니다." 했지요. 그러자 성철스님이 '그래, 왜 그러느냐?' 라고 되물으시더군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요. 아버지도 못 믿는데' 라고 대답을 하니 모두들 웃으시더군요.
성철 큰스님은 1941년 덕숭산 정혜사에서 청담스님을 처음 만났다. 만공스님 회상에 철을 지내러 갔다가 평생 도반을 만난 것이다. 그때 큰스님은 생식을 하고 있었는데 순호스님이 솔잎을 따와서 말린다. 콩을 불린다, 쌀을 찧는다 하면서 열심히 도와 주었다.
그런 인연들이 봉암사 결사로 이어졌고 훗날 두 분은 조계종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주춧돌이 되셨다. 청담스님과 큰스님이 함게 있으면 하루 종일 이야기만 하시고 밖에도 잘 나오지 않으셨다 한다. 큰스님은 청담스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사실 바깥 사람들은 청담은 알아도 순호스님은 잘 모르지. 순호스님이 자신도 모르게 정화 불사의 중심이 되어서 오늘의 조계종터를 닦느라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는가. 인욕보살이라 칭찬도 욕도 들으면서 많은 큰스님들을 모시고 정화불사를 밀고 나갔지. 청담으로 세상에 나가기 전 순호수좌의 정진력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어."
큰스님께서 청담스님의 얘기를 들려주시다가 호탕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윤필암 위에 있는 묘적암에서의 한 철 정진도 잊을 수 없다. 나옹선사의 <토굴가>를 외우면 그야말로 나옹스님이라도 된 듯 기백이 살아났다.
靑山林 깊은 골에 한 칸 토굴 지어놓고
松門을 半開하고 돌밭 길을 배회하니
綠楊春 三月下에 춘풍이 건듯 불어
뜰 앞에 百種花는 처처에 피었는데
풍경도 좋거니와 物色이 더욱 좋다
그 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서 最貴한고
一片 無爲 珍妙香을 玉爐中에 꽂아두고
寂寂한 明窓아래 묵묵히 홀로 앉아
10년을 기한정코 一大事를 궁구하니
일찍이 모르던 일 금일에야 알았구나.
하안거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팔공산 성전암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큰스님이 성전암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계셨기 때문에, 찾아뵐 수 있는 날은 안거가 끝난 다음 날 뿐이었다.
"하이고 건방지게! 니 언제 공부해 봤다고 공부가 되니 안 되니하노?"
묘적암에서 하안거를 끝낸 후 성전암으로큰 스님을 찾아봡고 "열심히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여쭙자, 형형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씀하셨다.
큰스님의 회상 가운데 가장 엄격했던 때가 성전암 시절이었을 것이다. 출가하기 전, 안거를 마치고 찾아뵈면 큰스님께서는 우리들이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살피기 위해 이것저것 물으셨다. 옥자와 나, 둘 중 하나만 대답을 잘못해도 같이 쫒겨났다.
큰스님의 대화 방식은 앞뒤 설명도 하지 않고 그냥 툭, 거두절미하고 묻는 식이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바로 주장자가 날아왔다. 어느 비 오는 여름 날, 큰스님이 갑자기 불호령을 내리면서 둘고 있던 우산으로 내려치는 바람에 온 몸에 멍이 든 적도 있다.
"가!"
이 말이 떨어지면 나는 눈치 빠르게 도망가는데 옥자는 행동이 느린 탓에 매를 맞곤 했다. 여름에 쫒겨나는 것은 그래도 괜찮았다. 추운 겨울 눈이 온 날이면 정말 막막했다. 어느 해 동안거를 마치고 찾아뵈었는데, 또 무엇을 잘못했는지 불호령이 떨어졌다.
"인자 이것들 절에 놔둬서 아무 소용 없데이. 속가 집으로 내쫒아버려야제."
전날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성전암까지 걸어갔는데, 가자마자 집으로 보낸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질려 큰스님 방을 도망치듯 나왔다가 다음 날 새벽 예불 시간에 성전암을 빠져나왔다. 어찌나 배가 고픈지 부엌에 들어가 솔잎 속에 묻어놓은 당근을 몇 뿌리 꺼내 눈에 쓱쓱 닦아 먹고는 힘을 내어 새벽에 도망쳤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가시나들 찾아서 하나는 진주로 보내고 하나는 부산으로 보내라" 하시는 큰스님의 엄명을 받고 시자들이 우리를 찾으니, 사람은 간 곳 없고 비탈진 언덕의 눈 위에 뱉어놓은 당근 껍질만 보이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천제스님이 우리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니, 산돼지도 큰스님 잡수시라고 먹지 않는 그 귀한 당근을 행자님들이 훔쳐 먹었습니까?"
출가해서 두 해가 지난 여름이었다. 또 큰스님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자 "나가라!" 하시곤 애꿎은 시자들을 향해 소리치셨다.
"저 가시나들 속가로 보내라. 절로 다시 가면 내 그 절을 불사를기야." 그리고는
"너거들, 법문 노트 내놓고 가라고마" 하시는 게 아닌가. 큰스님의 말 한 마디는 그대로 법이었으니, 생명처럼 지니고 다녔던 친필 노트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트는 다시 큰스님의 서고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천제스님에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천제스님은 그내용을 베껴적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었고, 그 후로는 친필 노트 원본을 보지 못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했다. 분한 마음을 내서 공부하라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혼자 걸어가라'는 뜻이다. 그렇다. 공부는 홀로 걸어가는 것이다.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이 이 공부다. 의지하는 것이 있으면 철저히 공부만 하겠다는 생각이 흩어진다.
1.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君不見
군불견
2.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絶學無爲閒道人 不除妄想不求眞
절학무위한도인 부제망상불구진
3.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
4.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법신각요무일물 본원자성천진불
5. 오음의 뜬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五陰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오음부운공거래 삼독수포허출몰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을 부술 수 없도다
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 당당히 길을 가거니
버마재비 수레 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구애되지 않나니
대통(竹筒) 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대 위해 결단해 주는도다.
큰스님께서는 법문 노트에서 '계율로 스승을 삼으라[以戒爲師]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최후로 부촉하셨다.
"내가 설사 없더라도 계를 스승으로 삼아 잘 지키면 내가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부디부디 슬퍼하지 말고 오직 계로써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라. 너희가 계를 지키지 못하면 내가 천년만년 살아 있더라도 소용이 없느니라."
지당한 말씀이다. 계는 물을 담는 그릇과 같다. 그릇이 깨어지면 물을 담을 수 없고, 그릇이 더러우면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 흙그릇에 물을 담으면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흙물이 되고 말며, 똥그릇에 물을 담으면 똥물이 되고 만다. 그러니 계를 잘 지키지 못하면 추하고 더러운 사람의 몸도 얻지 못하고 악도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어찌 계를 파하고 깨끗한 법신을 바라리오. 차라리 생명을 버릴지언정 계를 파하지 않으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이렇게 적었다.
욕심 가운데 제일 무서운 것이 색욕이다. 색욕 때문에 나라도 망치고, 집안도 망치고, 자기도 망친다. 이 색욕 때문에 나라를 다 망쳐도 뉘우칠 줄 모르는 것이 중생이다. 그러므로 수도하는 데도 이것이 제일 방해가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것이 하나뿐이기 다행이지, 만약 색욕 같은 것이 둘만 되었던들 천하에 수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색욕을 끊지 못하고 도를 닦으려 한다는 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이다"라고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다.
젊은 날 큰스님께서 수행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열두 가지 항목이 있다. 큰스님은 이를 '십이명'이라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젊은 날 얼마나 철저히 자신을 경계했는지 알 수 있다.
아녀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리라.
속세의 헛된 이야기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으리라.
돈이나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으리라.
좋은 옷에는 닿지도 않으리라.
신도의 시주물에는 몸도 가까이 하지 않으리라.
비구니 절에는 그림자도 지나지 않으리라.
냄새 독한 채소는 냄새도 맡지 않으리라.
고기는 이로 씹지 않으리라.
시시비비에는 마음도 사로잡히지 않으리라.
좋고 나쁜 기회에 따라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절을 하는 데는 여자아이라도 가리지 않으리라.
다른 이의 허물은 농담도 않으리라.
"아무리 해도 상기가 완전히 낫질 않습니다."
큰스님께서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안을 내리셨다.
"상기는 간단히 없어지는 병이 아이다. 할 수 없제. 쉬어가면서 천천히 할 수밖에. 장기전으로 대처해야제."
장기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집을 나올 때 3년 만에 공부를 마치겠다고 큰소리를 쳤고, 실제로 그럴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장기전이라니, 믿기지 않는 마음에 다시 여쭈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정진해야 합니까?"
"한 길로만 가면 성불할 수 있는기라. 서서히 해라."
그런데 나는 천천히 쉬어가면서 하는 그 '서서히'가 더 어려웠다. 집을 나온 지 한 해가 넘은 그때까지 큰스님은 단 한 번도 출가하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그날 처음으로 출가에 대해 언급하셨다.
"장기전으로 가려면 머리를 깎아야제. 출가해라."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붓과 종이를 꺼내셨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붓과 종이를 꺼내셨다.
"不必과 百拙. 나와 옥자에게 내린 법명이었다.
'백졸'은 백 가지, 즉 만사에 못난 사람이 될 때 만능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옥자가 법명을 기뻐하자 큰스님께서는 이름에 대한 게송을 써주셨다.
깊은 산속 높은 곳에 머무르니
나이 육십에 이르러 자유자재함이라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을 벗어나야
금일에 이르러 이제 백졸승이 됨이라.
"하필 왜 불필입니까?" 하고 여쭈니, 큰스님께서는 "何必하필을 알면 不必(불필)의 뜻을 안다"고하셨다. 세간에서는 불필이라는 나의 이름을 두고 흔히 '필요 없다'는 뜻으로 나름대로 해석해, 부처님의 아드님이신 라훌라에 비견하곤 한다.
그것도 맞겠다 싶어서 토를 달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불필이라는 이름을 내리신 큰스님의 뜻은, 세상에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신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름에 포함되어 있는 더 깊은 선지는 내가 공부를 다해 마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숨어 사는 도인은 언젠가는 남의 눈에 띄니 중근기인 기라. 중생을 제도하는 도인은 명리승이고, '내 떡 삿' 하는 도인은 공부도 하지 않고 자기도 속이니 제일 하근기인기라. 제일 상근기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인기라.'
'불필'이라는 법명을 받고 석남사로 가서 인홍스님에게 인사를 드린 뒤 "큰스님께 법명을 받고 출가하러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내가 꿈에 안약을 두 개 받았다"고 하면서 좋아하셨다.
경남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있는 석남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을 개창한 신라 도의 국사가 824년에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다. 인홍스님은 이곳에서 퇴락한 사찰을 중창하고 비구니 회상을 열었다.
스물한 살이던 1957년 가을, 인홍스님을 은사로, 자운 율사스님을 계사로 석남사 대웅전에서 사미니계를 받으면서 나는 본격적인 출가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흙뭉치를 든 채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얼마나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한 번 해보고는 아래에서 기와를 위로 올리는 일을 했다.
계를 받고 난 뒤에도 나의 후원 생활은 여전히 문제가 되었다. 사미니계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보궁에서 부처님전에 정진의 원을 세우고 손가락을 연비한 스님이 공양주를 살고 있었다.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상태로 공양주르 사는 모습이 안타까워, "제가 대신 공양주를 살겠습니다" 하고 자원했다.
그런데 내가 솥을 씻으면 물이 모두 흘려내려 부엌 바닥이 한강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내가 부엌에 들어가기만 하면 함께 공양주 소임을 보던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스님 제발 부엌에 들어오지 마세요! 우리가 다 떠내려가요!"
한국 비구니의 역사는 한국불교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한국의 비구니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들여온 아도화상이 머물렀던 집의 주인인 모례의 누이 사씨에게서 시작된다.
律藏율장에 의하면 비구니들은 <팔경계법>을 수지하고 비구와 비구니 교단의 계사 각 10명에게서 계를 받아야 한다. 율사 자운스님은 비구니가 비구니계단에서 계를 받은 뒤 비구계단에서 다시 계를 받는 이부승수계 의식을 확립하셨고,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암 큰스님께서 열반하시자 어떤 선지식을 모시고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한 끝에 내가 선택한 분이 성철 큰스님이다.그러니 너희들은 두 번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믿고 공부하기만 하면 된다."
서른 네 살에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에서 출가해 한암스님 회하에서 공부를 한 인홍스님은 큰스님을 뵙고 수행의 전기를 맞았다. 1949년 겨울, 인홍스님은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으로 어수선하던 오대산을 떠나 묘관음사로 갔는데, 그곳에서 향곡스님과 수행을 하고 계시던 큰스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 큰스님은 '왜색 불교를 척결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 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이끌다가 전쟁을 예감하고 그곳에 와 계시던 터였다.
당시 인홍스님은 묘관음사 인근의 마을에 방을 얻어놓고 정진했다. 비구 스님과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계율 때문이었다. 인홍스님은 묘관음사에서 일정 시간 정진하고 탁발, 걸식해 가며 수행을 거듭했는데, 장일스님, 성우스님, 묘찬스님, 등이 당시 도반이었다.
"다시 말해 보시오." 인홍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산철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날 인홍스님은 큰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들었다.
"하루 중 아무리 바쁠때라도 화두가 끊어지질 않고 꿈속에 밝고 밝아 항상 한결같아도, 잠이 깊이 들었을 때 문득 화두가 막연하면 다생겁으로 내려오는 생사고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날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이 대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해서 기필코 성불하리라'는 다짐을 하며 크게 재발심을 하셨다고 한다.
그일이 있은 후 아침 정진을 하고 나서 묘관음사 연못가를 포행하며 화두를 들고 있던 인홍스님에게 큰스님이 공부의 경계를 물었는데 대답하지 못하자 못으로 밀어 넣었다고 한다.
"겨우 연못에서 빠져나왔지만 이미 옷은 물에 푹 젖어 얼음이 쩍쩍 달라붙었지. 바랏바람이 오죽 차야지. 그러나 나는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대로 서서 정진하며옷을 다 말렸지. 그때 내 정신이 돌아왔다. '조금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것조차 버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살아오면서 그때 발심했던 마음을 철두철미 잊지 않고 살았다."
묘관음사에서 큰스님을 뵙고 큰 경책을 받은 인홍스님은 그 후 마산 성주사에서 40여 명의 대중과 함께 대중 결사를 시도했다. 내가 처음 뵈었던 홍제사에서도 성주사에서 결사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중을 이끌고 계셨다.
그리고 큰 스님이 지으신 '납자에게 주는 열 가지 당부[衲子十曷]를 읽게 했다.
1. 無常
한 조각 그믐달이 겨울 숲 비추니
몇 개의 백골들은 숲 사이에 흩어져 있네.
옛날의 풍류는 어디에 있는가
덧없이 윤회의 괴로움만 더해가는데.
2. 安貧
누더기 더벅머리로 올연히 앉았으니
부귀니 영예니 구름 밖의 꿈이로다.
쌀독에 양식은 하나 없지만
만고의 광명은 대천세계 비추네.
3.精勤
물 긷고 나무하는 일은 옛 스님 가풍이요
텃밭 매고 주먹밥은 참 사는 소식이라.
한밤에 송곳 찾아도 오히려 부끄러워
깨닫지 못함을 한숨 지며 눈물로 적시네.
4.貞節
몸 망쳐 도를 없애는 데는 여색이 으뜸이라
천 번 만 번 묶어 화탕지옥 들어가네.
차라리 독사를 가까이 할지언정 멀리 둘지니
한 생각 잘못 들어 무량고통 생기도다.
5. 愼獨
어둔 방에 혼자서 보는 이 없다 말라
천신의 눈은 번개 같아 털끝도 못 속인다.
합장하고 정성껏 받들어 모시다가도
갑자기 성을 내어 자취를 없애니라.
6. 下心
법계가 모두 비로자나 부처님인데
어느 누가 현우와 귀천을 말하는가.
모두를 부처님처럼 愛敬하면
언제나 적광전을 장엄하리라.
7.利他
슬프다, 뜬구름 같은 이 세상의 어리석은 중생이여
가시덤불 심어놓고 천도복숭 바라도다.
나를 위해 남 해침은 죽는 길이고
남을 위해 손해 봄이 사는 길이네.
8. 自省
내 옳은 것 찾아봐도 없을 때라야
사해가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니라.
내 잘못만 찾아서 언제나 참회하면
나를 향한 모욕도 갚기 힘든 은혜이니.
9. 回頭
꿈속의 쌀 한 톨 탐탁하다가
金臺의 만 겁 식량을 잃어버렸네.
무상은 찰나라 헤아리기도 힘든데
한 생각 돌이켜서 용맹정진 않을 건가.
10. 因果
콩 심어 콩 나고 그림자는 형상 따라
삼세의 지은 인과는 거울에 비치는 듯.
나를 돌아보며 부지런히 성찰한다면
하늘이나 다른 사람을 어찌 원망하리오
생전에 '가지산 호랑이'라고 불렸던 인홍스님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스님을 의미하는 僧승 자를 해체하여 보아라. 사람 人인 변에 일찍 曾아니냐. 보통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먼저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제자는 일체중생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청빈으로 수도생활의 생명을 삼고, 일체중생을 위하여 기도하며 끝없이 하심하고 봉사해야 한다."
새벽 예불이 끝난 후 절 6백 배 혹은 천 배를 마치면 6시에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대중 법공양이 시작되었다.
回鉢偈회발게: 부처님을 생각하는 게송
부처님께서 태어난 곳 가필라성 밖 룸비니 동산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 마가다국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하신 곳 바라나시 근교의 녹야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 구시니가라성 근처의 사라쌍수 아래
展鉢偈: 발우를 펴면서 하는 게송
부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내 앞에까지 이른 응량기
내 지금 얻어 발우를 펴니,
원하옵건대 일체중생이 함께,
평등하게 삼륜이 공적하여지이다.
(중략)
收鉢偈:발우를 거두는 게
공양을 마침에 색신의 기운이 충만하니
시방삼세에 부처님의 위신력을 떨침이라.
인연 공덕 돌리어 마음에 두지 않고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을지어다.
죽비3성이 울리면 합장하고 법공양을 마친다.
"발우를 펴고 반듯하게 앉아 제대로 먹어라. 법복을 입고 염불하고 난 다음 먹는 그 좋은 밥을 두고 마을 사람들처럼 먹어서야 되겠느냐?"고 하셨던 스님의 호통이 그립다.
언젠가 석남사로 출가한 학인 한 사람에게 속가에서 알고 지내던 남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스님께서 이를 알고 찾아오지 못하게 하라고 한두 번 타일렀으나, 남자가 계속 찾아오는 것을 처리하지 못했다. 그러자 스님께서 학인의 가사를 벗으라고 하고는, 그 자리에서 죽죽 찢어버리셨다. 이에 그친 것이 아니다. "너는 수행자로살 자격이 없다"하시며 가사장삼을 환수하고 입고 왔던 옷을 입혀 산문 밖으로 내보냈다.
석남사에 하루는 낯익은 비구 스님 한 분이 찾아왔다. 한 해 정도 석남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은사 스님의 권고로 출가한 부목 출신의 스님이었다. 우리는 반가운 얼구롤 합장 한 번 한 채 각자 일하기에 바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외출을 하고 돌아온 은사 스님께서 이 사실을 알고 가사장삼을 차려 입고 나오셔서 그 젊은 스님께 삼배를 하시곤 잘 대접해서 보내셨다.
우리가 "인사나 받으시지 장삼까지 수하고 절을 하세요?" 하고 여쭈었더니 "무슨 소리를 하느냐? 저 스님은 예전의 부목이 아니고 헌헌장부의 길을 가고 있는 출가자가 아니더냐?" 하셨다.
은사 스님은 또 내것 네것이 없으셨던 분이다. 한번은 지리산 대원사에 볼 일이 있어 모시고갔는데, 주지이신 법일스님은 불사가 힘드셨던지 법당을 상량만 해놓고기와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은사 스님은 돌아와 석남사의 여력이 있는 신도에게 '대원사 법당 기와 좀 올려달라'고 부탁하셨고, 그 후 대원사 법당의 기와가 올려졌다.
은사 스님은 또한 큰스님들을 초청해서 학인들을 공부시켰다. 학인들이 청담스님의 금강경, 운허스님의 능엄경, 향곡스님.자운스님의 법문, 일타스님의 보살계 법문 등 기라성 같은 큰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며 정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것도, 후학들을 폭넓게 공부시키려 했던 은사 스님의 소신과 철학 때문이었다.
젊어서는 어른은 다 그런 줄 알았다. 내가 육십이 넘고 칠십이 넘어보니까 은사 스님의 지도자로서의 면목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훌륭하셨음을 알겠다. 큰 어른이었다. 그신심과 원력을 누가 따라간단 말인가.
스물다섯일 때인 1961년 3월에(내가 61년생이니 스님의 현재 나이는 25*58=83세이시네요) 통도사 金剛戒壇금강계단에서 율사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통도사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단으로그곳에서 계를 받는 것은 부처님 앞에서 계율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는 의미가 있다.
비구니계를 받고 도를 묻기 위해 스승을 찾아 돌아다니는 雲水衲子운수납자의 길로 나섰다. 어느날, 새벽 예불을 마친 뒤 걸망을 졌다. 석남사 일주문을 나와 언양까지 30리 길을 걸어나오니 세상 모든 곳이 정진도량처럼 느껴졌다. 몇 면 동안 대승사 윤필암과 묘적암, 해인사 국일암과 극락전, 지리산 대원사, 도솔암 등을 두루 다니며 수행에 전념했다. 자유로이 운수납자의 특권을 마음껏 누린 때였다.
큰스님은 신도들을 위해 아무개 잘되게 해달라는 축원을 못하게 했다.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고 수행하는 것으로 불공을 해야지 복을 달라는 것으로 불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셨다. 중생이 본래 부처님을 자각하고 모든 대상을 부처님으로, 부모로,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 참된 불공이라 하셨다.
아래는 큰스님의 법문 노트 내용이다.
"일체중생의 죄과는 곧 자기 죄과니 일체중생을 위하여 매일 백팔참회를 여섯 번 하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행한다. 그리고 건강과 기타 수도에 지장이 생길 때는 모두 자기 업이니 일일 3천 배를 일주일 이상씩 특별 기도를 한다. 또한 자기의 과오만 반성하여 고쳐 나가고 다른 사람의 시비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수도의 목적은 이타에 있다. 이타심이 없으면 이는 小乘外道소승외도이니, 심리적.물질적으로 항상 남에게 봉사한다. 자기 수도를 위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남에게 봉사하되 추호의 보수도 받아서는 아니 된다.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환자나 빈궁한 사람을 보거든 특별히 도와야 한다.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는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밀행제일이라 한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이라도 귀신도 모르게 한다. 오직 대도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성 가운데 쌓아둘 따름,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 한 푼어치 착한 일에 만 냥어치 악을 범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만 손해 볼 뿐이다.
예수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오른손으로 남에게 물건을 주면서 왼손도 모르게 하라."
세상의 종교도 그렇거늘, 하물며 우리 부처님 제자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지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천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행!
실행 없는 헛소리는 천 번 만 번 해도 소용이 없다. 아는 것이 천하를 덮더라도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한 털끝의 가치도 없는 쓸데 없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고인은 말하였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나니,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말했다.
"옳은 말 천 마디 하는 것이 아무 말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오직 실행만 있을 뿐 말은 없어야 한다.
도솔암에서 나와서 혜춘스님은 태백산 각화사 동암으로 떠나고, 철마스님과 백졸스님 그리고 나는 중산리를 거쳐 법계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천왕봉을 올랐다. 그런데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내려가다 길을 잘못 들어 산속을 헤메었다.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어 계곡만 따라 내려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가던 길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해골을 보게 되었다. 지리산은 빨치산들의 소굴이었던 곳이기 때문에 그들 중 누군가의 해골이었을 것이다. 해골을 앞에 두고 염불을 한 후 대원사로 내려왔다.
(시천면의 산천재를 보고, 작년 여름 갔었던 그 길의 끝에 산청IC로 갈 때 지났던 대원사도 보고(구글로) 천왕봉 아래의 법계사와 중산리도 확인했다. 이번 휴가 중에 법계사로 해서 천왕봉까지 한번 올라가 볼까?? 그런 생각으로 법륜스님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아이고 바보야, 내같으면 잘뙜다카모 넘겨줘삐야지ㅋㅋ )
큰스님께 법문을 듣고 발심해서 출가한 분이 여럿 있지만 아마 가장 대표적인 분이 혜춘스님과 철마스님일 것이다. 두 분 모두 자식을 두고 발심 출가하셨다.
성철스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추운 날씨에도 해인사 추녀 밑에 거적을 깔아놓고 큰스님의 가르침을 돌아보듯 하염없이 앉아 있는 혜춘스님의 사진을 보고 숙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혜춘스님은 큰스님으로부터 자식까지 두고 출가했으니 누구보다 열심히 정진하리라는 경책을 많이 받은 분이었다.
혜춘스님은 함흥여고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내려와 출가했다. 혜춘 스님은 인홍스님보다 10여 년 정도 아래였으나 돈독한 도반처럼 서로를 아끼셨다. 한국불교 정화 불사 때도 아버님인 유 변호사를 고문으로 모셨고, 그 후 태백산 홍제사에서 인홍스님과 함께 정진했다. 석남사 불사가 한창일 때는 곁에서 인홍스님을 도왔고, 석남사에 선원을 열었을 때 선방에서 늘 입승을 보면서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1972년 3년 결사를 끝낸 후에는 석남사를 떠나 해인사 보현암 선원을 열어 많은 후학들을 이끄셨고, 이후 전국 비구니회 회장을 역임하셨다.
나의 사형인 철마스님은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산 성주사로 출가해 뼈를 깍는 노력으로 정진에만 매진하신 분이다. 어린 두 아들에게 새어머니를 얻어주고 출가하여 성주사 멸빈암에서 일주일 동안 먹지도눕지도 않으며 오직 생사를 건 용맹정진을 하셨다. 그때 한 경계가 나서 36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면서 노래하고 춤추니 함께 있던 스님들이 어리둥절하여 눈이 둥그래졌다고 한다.
몸을 잊고 열심히 정진하다가 상기가 나서 온몸이 불더잉처럼 뜨거워지고 너무 고통스러워지자 큰스님에게 여쭈었다. "조금 쉬어 가라. 서서히 하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도 쉬지 않고 그대로 정진하여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던 중 사자산 법흥사에서 머물던 어느 날 법당 문을 열고 소나무 사이로 비친 달빛을 보는 순간, 상기가 일시에 내려갔다고 한다. 법흥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보궁이다.
존경하는 선배 스님들이고 젊은 시절 함께 정진한 세월이 많기에 그분들의 삶을 아는 대로 써보았다.
운수납자로 수행하던 시절, 행자의 신분으로 정진했던 태백산 홍제사를 다시 찾았다. 단발머리 행자로 있으면서 졸음을 쫓으려고 눈 속을 거닐고 달빛 서린 눈밭에서 정진했던 곳을 삭발하고 찿찿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법전스님이 사자암이라는 이름을 지어놓으셨다.
나물을 뜯어다가 찬을 마련하고 김치 한 그릇 놓고 상을 차렸다. 상을 앞에 두고 세 사람이 수저를 들자마자 법전스님께서 우두둑 돌을 깨물었다. 스님께서 밥을 푸셨는데 우리는 손님이라고 위의 밥을 퍼주시고 당신은 아래의 밥을 뜨셨다. 그런데 돌이 잘 일어지지 않았는지 그런 일이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내 이가 시원찮으니 돌을 넣지 말아요" 하셨는데 첫 숟갈에 돌을 깨물게 했으니 어찌나 죄송한지 저녁을 먹고 바로 내려왔다. 우리가 이십 대 중반, 스님이 삼십 대 후반일 때의 일이다.
법전스님은 안정사에서 큰스님을 모시고 산 이후 도솔암, 백련암 등지에서 농사와 정진을 함께 하며 살다가 김천 수도암에서 15년 동안 머무르셨다. 그곳에서 퇴락한 가람을 중수하고 선원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셨고, 이후 해인사 큰스님 곁으로 오셨다. 큰스님께서 입적하시고 10년 후에 종정 자리에 오르셨으니, 한평생 얼마나 철두철미 정진에만 힘쓰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번 놓아두면 움직이지 않는 절구통 같다고 해서 '절구통 수좌'로도 불렸는데, 언제인가는 내가 이렇게 여쭤본 적이 있다.
"스님은 어째 그렇게 한 번도 졸지 않으십니까?"
법전스님께서는 예의 특유의 화법으로 짧게 대답하셨다.
"적게 먹어요."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하는 해인사 전통의 용맹정진 때도 유일하게 졸지 않은 사람이 법전스님이었다고 한다. 해인사에 사시는 수십년 동안 선방에서 법전스님이 조는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함께 정진해 본 수좌들의 이야기다.
"화두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면, 졸 수 있는가?"
법전스님은 큰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한평생을 큰스님의 가르침 그대로 사신 분이다. 큰스님이 직설적인 것에비해 법전스님은 조용하셨지만, 공부를 시키는 데 있어 맹렬한 점은 다르지 않았다. 수도암 선원에 계실 때 수좌 한 사람이 종무소에 있는 전화를 쓰는 것을 보고는 "수행하는 사람이 왜 전화가 필요한가!"하면서 전화통을 부수었고, 수도암 위의 조그만 암자에서 홀로 정진하고 있는 상좌에게는 설령 수도암에 불이 나더라도 내려오지 말라고 일렀다고 한다.
아마 법전스님처럼 말씀이 없으신 분도 드물 것이다. 인사를 드리고 나면 잘 지내시는가, 한마디 하시고는 가만히 앉아 계신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퇴설당을 지나는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런데 종정에 취임하실 때 가사장삼을 선물로 올렸더니 그옷을 입고 취임식에 다녀오셔서는, 그렇게 말없는 분께서 고마운 마음을 표하셨다.
나는 지금도 일 년에 몇 차례 퇴설당으로 스님을 찾아뵙고 안부를 여쭙는다. 건강에도 어찌나 철두철미하신지 세수 아흔이 가까운 데도 정정하시다. 법전스님은 자기 원칙에서 한 치의 후퇴도 없으셨던 큰스님의 생활태도를 그대로 배우신 듯하다. 지금도 항상 제 시간에 108배를 하시고, 공양하는 시간, 산책하는 시간에 일분일초도 틀림이 없으시다.
큰스님이 돌아가신 후 나와 인연 있는 수행자들은 법전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고 있다. 스님께서 후학들 곁에 오래 머물면서 지도해 주시리라 믿는다(법전스님은 2014년 10월 별세하셨다. 불필스님의 자서선은 2012년 출간되었으니 법전스님 돌아가시기 2년전에 쓴 글이 되겠다. )
비구니계를 받고 3년 정도 여러 곳을 다니며 정진하다가 석남사로 돌아와 은사 스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모로 돌아누우셨다. 한창 석남사 불사가 진행되어 도울 사람이 필요했고 석남사 선방에서 수행할 수도 있었건만 밖으로 돌아다니다 온 내가 못마땅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초발심 때였는지라나는 은사 스님의 마음을 짐짓 모른채 하고 떠났었다. 그동안 은사 스님은 퇴락한 사찰을 보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불사를 진행하는 한편 선원을 열어 정진하고계셨다. 하도일이 많아 소임을 맡은 상좌들까지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 할 정도였다.
은사 스님께서 얼마나 힘 있게 일을 몰아붙였는지 어느덧 석남사는 정진 도량으로 입지를 굳혀 출가하는 사람은 석남사로가면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성전암에 도착하자 마침 포행 중이던 큰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간의 이야기를 들은 큰스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이런 방책을 내놓으셨다.
"너거들 대장 아직 죽으면 안 된다. 살려내야 하는기라. 이렇게 하그라. 돌아가서 능엄주와 대참회로 삼칠일 기도를 해. 스무하루 동안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일분일초도 그쳐서는 안 된다. 향을 피워놓고 두 사람은 백팔대참회를 하고 두 사람은 능엄주를 해라. 기도하는 동안 대웅전 법당 안에 일반인들은 들여놓지마라."
큰스님의 말씀을 듣자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석남사로 돌아와 맏사형인 묘경스님에게 큰스님의 말씀을 전한 후 대중공사를 해서조를 짜고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집전하는 부전을 16명으로 구성하고 능엄주를 하는 두 사람, 백팔참회를 하면서 절을 하는 두 사람, 이렇게 네 사람을 한 팀으로 네 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시간씩 교대하면서 24시간 내내 21일 걸친 장좌기도를 시작했다.
은사 스님의 수술은 무려8시간이나 걸려서 끝이 났다. 수술을 집도한 원장은 "췌장이 곪아서 터져 있었는데도 살아난 적이 기적입니다. 천명 중 한 사람도 성공하기 힘든 수술이라서 결과를 본국에 보고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은사 스님을 살려내야 한다는 대중들의 한마음이 하늘을 움직인 것이다.
사흘 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스님은 우리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시원하구나. 수술대에 누워 있는데 문수보살님과 보현보살님,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나타나시더니 제 분 모두 내 주위에 둘러서서 배를 만져주시더구나.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었어."
21일 동안의 장좌불와 기도를 회향하는 날 퇴원하신 스님은 가사장삼 수하신 채 석남사 대웅전 한가운데 서서 삼배를 올리셨다. 1964년 늦가을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혼연일체를 이루었던 아름다운 기도 회향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 일휴스님이 되시다
쉰일곱이시던 1965년 봄, 어머니는 석남사에서 정자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다. 은사 스님의 은사이셨던 정자스님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었는데, 이처럼 돌아가신 분을 은사로 삼아 계를 받는 것을 '위패 상좌'라고 한다. 그렇게 어머니는 은사 스님과는 사형사제 관계가 되었고 나에게는 사숙님이 되었다. 자운스님으로부터 一休일휴 라는 법명을 받고 수계를 받은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휴스님으로 사셨다.
다음은 성철 큰스님의 말씀이다.
"하루는 서울서 자운스님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해. 생전 전화하지 않는 스님인데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전화기를 들고 다짜고짜 '자운스님 무슨 일이요' 하니 '안 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 가만 있으소. 종정 선출이 있었는데 원로스님들이 의견을 모았어. 절대 안한다는 말만 하지 마소' 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끊어버리데."
나는 자운스님께서 해인사 홍제암에 한 번씩 오시면 인사를 갔는데 그때마다 "니는 우에는(백련암) 잘 안 해도 되고 나한테만 잘하면 돼" 하시며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중복에 석남사 스님들은 옥류동 계곡에서 물맞이를 하고찰 떡국을 하거나 감자전을 구워 먹으며 더위를 식힌다.
다른 스님들은 옥류동으로 나간 사이에도 백졸스님과 나는 일휴 스님 곁을 지켰다.
"시원한 수박을 먹고 싶구나."
일휴스님이 그렇게 수박을 밥숫고 싶다고 하자 때마침 어느 비구 스님이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수박을 한 차 싣고 왔다.
백졸스님과 늦게 옥류동에 올라가 대중 스님들과 저녁을 먹고 바위 위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시자가 달려왔다. '가셨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서둘러 내려와보니, 저녁 공양에 찰 떡국을 한 술 잡수시고 두 술째 뜨다가 그대로 앉아 숨을 거두셨다고 했다. 출가 하신지 16년 째 되던 음력 6월 6일이었다.
가신 모습에서는 모든 상이 다 떨어져서 그리움도 애착도 기다림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사흘 후 장작더미에 불이 훨훨 타고 육신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다시 그 재를 동서남북으로 뿌리니 사람의 한 생이 허무하였다.
사십구재가 있던 날 별당 앞 연못의 물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무지개가 가지산에서 뻗어서 별당 앞 연못에 뿌리를 내리니 연못이 황금빛으로 보인 것이다. 후에 일타스님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 근래 보기 드문 일이라 하셨다.
큰스님께서 1955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10여년 동안 성전암에 칩거하며 철조망을 두르고 계실때, 석남사 대중들은 안거가 끝나기 전날 큰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운문재를 넘곤 했다. 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내려 성전암까지 걸어가면 저녁나절이 되었다. 철통같이 둘러쳐진 철조망에 구멍을 내어 겨우 들어가서 숨소리를 죽이고 큰방에 앉아 있으면 큰스님이 나오셔서 주장자로 내쫓으셨다.
겨울에 신도 못 신은 채 주장자를 피해 밖으로 나오면 성전암 주변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시자 스님들은 소쿠리에 신발을 담아 밖으로 내주곤 했는데, 날은 저물어 석남사로 되짚어갈 수는 없고 캄캄한 밤중에 간신히 산길을 내려와 큰절 파계사에서 자곤 했다. 어느 해 동안거에는 지금 지리산 영원사에 계시는 석주 노스님이 신발을 내준 적도 있다.
돌아오면서 우리는 '공부를 하지 않고는 큰스님의 진면목을 볼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더 분한 마음을 내어 공부했다. 법문을 해주고 밥을 주는 것도 법이지만 천대받으며 쫓겨나는 것도 법이다.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기둥이 서기 때문이다. 세세생생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리 쫓아냈겠는가. 쫓겨나면서 얻는 큰 힘은 박대를 받고 쫓겨난 사람만이 안다.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쫓겨난 생각은 잊어버리고, 안거가 끝나면 또 우리들은 네 시간 동안 걷고 걸어서 운문재를 넘었다. 대구에서 30리 길을 걸어 성전암에 도착하면 다시 쫓겨나는 일을 10년 동안 반복했고, 그것은 어느새 석남사의 전통처럼 되어버렸다.
은사 스님은 법문을 들어러 가는 일을 한 번도 멈추지 않으셨다. 한번 믿은 스승이었기에 일편단심 신심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찾아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큰스님의 서릿발 같은 주장자는 신명을 바쳐 스스로 공부하라는 자비의 현현이었다.
큰스님이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간의 동구불출을 마친 것이 1965년이다. 그해 여름 큰스님은 경북 문경의 김용사로 옮겨 하안거를 지내셨고, 같은 해 겨울 동안거 기간에 대중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셨다. 큰스님의 초전법륜이었다.
은사 스님은 석남사 소임자 몇 사람만 절을 지키라 하고 대중 모두에게 법회에 참석할 것을 명하셨다. 우리는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점촌까지 온 후 60리 길을 걸어서 김용사에 도착했고, 양진암과 대성암에서 20일간 머물면서 큰스님의 사자후를 들었다.
석남사 대중을 비롯한 사부대중이 참석한 운달산 법회는 부처님 당시의 영산회상을 방불케 하였다.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도 그때 큰스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큰스님의 사리탑 건립 건으로 누님인 홍라희 씨를 만났을 때 "저는 3천 배가 무서워서 큰스님을 뵙지 못했는데 동생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큰스님은 운달산 법회를 마친 뒤 자운스님의 권유로 1966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와 동안거를 지내셨다.
1967년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한 큰스님은 동안거를 맞아 100일에 걸친 법문을 시작했다. <백일법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세존께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二邊(가변)에 친근치 말지니 苦와 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正等覺정등각이라 하느니라."
너희들이 세상의 향락은 버릴 줄은 알지만, 고행하는 괴로움도 병인 줄 몰라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
중도가 불교의 근본입니다. 중도는 모순이 융합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서로 대립되어 있는데, 불교의 중도법에서는 선과 악을 떠나게 됩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서로 통해버리는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모든 것이 통합니다. 서로 통하는 것이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는 식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도법문이라는 것은 일체만물, 일체만법이 서로서로 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된 양변인 生滅이 서로 융합되어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 것이 바로 큰스님이 강조했던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다.
해인사에서 우레와 같은 백일법문을 들은 지 1년 만에 석남사에서 3년 결사가 시작되었다.
"스스로 공부해야지 무슨 법문을 듣는다고 찾아옵니까? 석남사도 인자 웬만큼 정리되었으니까 3년 결사한번 해보시오." 비바람 새는 석남사 법당을 정리하고 선방을 열어 대중과 함께 정진한 지 10여 년이 흘렀을 때, 큰스님이 대중들과 함께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간 은사 스님에게 하신 말씀이다.
큰스님은 석남사 누각인 침곌와 선방인 심검당을 지었을때도 손수 이름을 지어주시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써주셨다.
조주의 노인검이여
찬 서리 빛이 번쩍번쩍하도다.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몸뚱이가 두 동강이 나리라.
1969년 음력 10월 15일, 동안거와 함께 3년 결사가시작되었다. 내 나이 서른셋, 출가한 지 13년이 되었을 때였다. 결사 대중은 모두 열세 명으로 은사 스님을 비롯해 장일, 성우, 혜관, 혜춘스님 등 어른 스님들과 법희, 법용, 백졸, 불필, 혜주스님 등 젊은 스님들이었다.
큰수님은 결사 대중들에게 결사기간 동안 지켜야 할 수좌 5계를 주셨다.
하루 네 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벙어리처럼 지내며 잡담하지 않는다.
문맹같이 일체 문자를 보지 않는다.
포식, 간식을 하지 않는다.
적당한 노동을 한다.
온 도량의 분위기가 칼날처럼 살아 있어 누구 하나라도 태만하면 스스로 살이 베일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던 시간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공양주 한 사람은 공양하고 대중들이 심검당으로 올라갈 때면 부엌문을 열고 그 뒷모습을 향해 합장하곤 했다고 한다. 후학들에게 심검당이 언젠가는 저렇게 공부해 보리라 발심하게 하는 것이 되었다.
석남사에서행자 생활을 마치고 강원을 가는 대신 석남사에남아 참선공부하는 것을 택한 영운스님은 큰스님께 화두를 받으러 갔다가 <육조단경>을 앞뒤로 막힘없이 외우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다 외우고 갔더니 백만 배 기도를 하라는 과제를 주셨고, 석남사대중과 함께 참선을 하고 하루에 1080배씩 절을 했다. 졸음이 쏟아지고 춥고 배고픈 겨울 새벽녘, 공양주가 뜨끈하게 끓여온 누룽기 국물을 먹으면 외풍으로 얼었던 몸이 풀리곤 했다.
영운스님은 3년 결사회향과 함께 백만 배 기도를 마쳤는데 가사 한 벌이 다 떨어져 나갔다. 영운스님은 총무 소임을 볼 때 교무를 보며 함께 일했고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석남사 주지가 되었다.
(아침엔 흐렸더니 다시 햇볕이 뜨거운 평일낮이 되고 말았네요. 나는 일하기 싫어하는 방재영이 데리고 마당의 향나무 손질을 합니다. 그리고 혹여 쓰러질까 겁나서 시설부로 돌아와 선풍기와 에어콘에 몸을 맏기며 잠시 집자를 합니다. 마음이 급해요, 내일이면 금요일이고 이 집자를 얼른 마치고 또 책을 빌려야 하니까요. 7월 26일 10:43)
정말 한치의 빈틈도 없이 여법하게 진행된 결사였다. 그러나 결사 회향을 앞둔 어느 날 젊은 선객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저녁공양 시간에 "어른 스님들의 절이 빠르니 좀 천천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하고 건의를 드렸으나 일주일이 지나도 절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랫자리에 있던 혜주스님이 예불을 집전하던 법용스님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더 이상 빠른 속도로 절을 하지 못하겠다는 시위임을 알아챈 나도 절을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리들이 절을 다 하고 보니 어른 스님들보다 5분이 늦어 있었다.
법당 중앙에서 절을 한 어른 스님들의 안색이 좋지 않으셨다. 누구보다 은사 스님이 화가 많이 나신 듯했다. 당신 상좌들이 시위를 주도했으니 다른 스님들 보기에 불편하셨을 뿐만 아니라 긴장감이 감도는 결사 중에 그런 반란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야단이 있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우리 세 사람을 부르시곤 옥류동으로 가자고 하셨다.
드디어 평평한 풀밭에서 멈추시고 우리를 말없이 바라보시는데 그 눈빛이 정말 무서웠다.
"앉아라."
순간 대나무지팡이로 혜주스님의 어깨며 등판을 내리치셨다.
"탁! 탁! 탁!"
대나무 지팡이가 법용스님에게로 옮겨가자 '기다려서 맞을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돌아서서 내려왔다. 어른 스님들은 노학시면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노기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다. 큰스님께서 진노하실 때도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은사 스님도 마찬기지이셨으니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백일회향을 마치고 3년 결사 회향 법문을 들으러 간 우리들에게 큰스님께서는 "그동안 무슨 공부를 했겠나" 하고 차갑게 한마디 던지시고는 "그래도 3년 결사를 끝까지 해낸 대중은 비구.비구니를 합한 조계종 전체에도 드물다"고 말씀하셨다.
은사 스님이 돌아가시고 스님의 서고를 정리하다가 큰스님의 친필편지를 발견했다.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언제 무슨 일로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3년 결사 즈음에 받으신 것이 아닌가 싶어 여기 기록해 둔다.
"현세는 잠깐이요 미래는 영원하다.
잠깐인 현세의 환몽에 사로잡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잃게 되면
이보다 더 애통한 일은 없다.
만사를 다 버리고 오직 정진에만 힘쓸지어다.
화두를 깨치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행복을 얻나니라.
깨치지 못하고 무한히 연속되는 생사고를 받을 적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신명을 돌보지 말고 부지런히 참구하라.
예순이 넘으면서부터 '비가 오는데 오늘은 안 나가면 어떨까' 하는 갈등이 일어났고 그때 '아, 이게 바로 늙어가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원효선사가 "부서진 수레는 달리지 못한다(破車不行)고 말씀하신 심중을 알 수 있었다. 몸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는 늙어 정진에 매진할 수 없는 '파거불행'의 나이에 이른 것이다.
세속의 일도 그렇다. 무엇을 해도 두렵지 않고 자신감이 넘칠 때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일에 전념해야 한다. 의심 없이 일심으로 뚫고 나가면 길이 보인다.
3년 결사를 끝낸 1972년 봄, 심검당에 두 그루의 보리수를 심었다. 그 중 한 그루가 40여 년이 지난 지금 크고 무성하게 자라 봄이면 꽃향기가 가득하고 여름이면 더위를 식혀준다. 가을에는 열매가 영글어 보리수 염주로 스님네를 반긴다.
이제노승이 된 지금 그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도반 스님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발원한다.
발원하노니
철석같은 바른 신심으로 무루선(성자가 일으키는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선)을 닦아
크나큰 지혜와 덕, 커다란 용맹심으로
일체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고
법의 바다 영원히 청정하며 편안하여지이다.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마음 한가운데 감사라는 밑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으면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불안할 때, 가만히 마음의 흐름을 살펴보면 감사하는 마음이 적거나 감사함을 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처음 절에 간다고 했을 때 큰스님께서는 "항상 대중 속에서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하시며, 모든 일에 감사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하는 글을 주셨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하거나천하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
어린아이거나 다 부처님 같이 섬기되
아주 나쁜 사람을 지극히 존경하고
원한이 깊은 원수를 깊이 사랑하고 보호하라.
나를 헐뜯고 욕되게 하는 것은 참 법문이요
침해하는 것은 큰 불사니
말없이 항상 기쁜마음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라.
외우고 다니려는 뜻에서 우리는 이 글을 감사 주력이라 불렀고, 대중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감사하는 생각을 진언처럼 외웠다. 큰스님의 가르침처럼 많게는 몇백명에서적게는 몇십 명까지 많은 대중들이 모여 사는 도량에서 화합이 되지 않으면 발전이 있을 수 없다. 가정, 나아가 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창 불사를 돕고 있던 어느 날, 스님께서 함께 외출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알고 보니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던 이후락 씨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석남사가 있는 울산이이후락 씨의 고향이었으며 그의 부인이 가끔 석남사를 찾는 인연이 있었다. 이후락 씨 집에 도착하니 만나기로 한 그의 부인이 부재중이었다. 조용히 앉아 기다리는 스님의 모습에서지도자로서의 고뇌가 느껴졌다. 한 시간이 지나자 그의 부인이 나타났다. 기댜리시게 해서 미안하다는 부인에게 은사 스님이 호통을 치였다.
"어디 이렇게 신도가 스님을 기다리게 합니까?"
한참이나야단을 치는 모습이 대중공사에서 제자인 우리들을 야단치시는 모습처럼 당당했다.
이후락 씨를 두 번째 만나던 날도 스님을 모시고 갔는데, 집무실에서 그를 만나고 나온 스님이 돌아오는 길에 말씀하셨다.
"무엇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묻길래 경전 번역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온 대중이 나와서 일을 하고 있고, 일하는 사람들의 노임을 제때 주지 못해 소임작 자리를 피하는 일이 있을 만큼 어려운 시기였기에 당연히 불사이야기를 하셨을 줄 알았다.
역경원이 34년 동안 대장경 번역 작업을 계속해서 2000년 9월 드디어 한글대장경 전318권을 완간했다. 당시조계종 종정이던 효봉스님은 은사 스님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면서 "참으로 출격장부(격식에서 해탈하여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사람)다"라고 하셨다.
나는 영운스님과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에 가서하안거를 나기로 했다.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은사 스님께서 대웅전을 다시 짓느라 누각에 모셔놓은 부처님을 개금불사하라고 말씀하셨다. 비용도 시간도 없었지만 은사 스님의 말씀은 그대로 법이니 다른 길이 없었다. 그때 마침 출가한 대안. 대성 두 스님의 부모님들이 딸의 음성이라도 듣고 싶다며 석남사에 전화 공사를 하라고 3천만원을 내놓았다.
스님들의 부모님을 만나 양해를 구하고 그 돈으로 먼저 개금불사를 했다. 그런데 개금불사가 끝나고 한 달 후 정부에서 전화 공사를 해주어서 10만원에 전화를 놓을 수 있었다. 그때 '불사란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하는생각이 들었다.
남쪽에 있는 석남사에서 북쪽인 오대산 지장암까지는 워낙 길이 멀어서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도착하니 수행 대중 24명은 상원사 위에 있는 북대 쪽으로 곰취를 뜯으러 가고 없었다. 하루 늦었지만 먼저 온 기분이었다. 이틀이 지나니 대중 스님들이 오대산 깊은 산속의 산나물을 한 짐씩 지고 돌아왔다. 그때의 입승은 지금 석남사의 유나인 현묵스님이었다. 하안거는 3일 후에 시작되었다.
비구니의 위상이 거의 없던 시대에 먼저 길을 걸으며 헌신했던 선배 스님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그 위상이 바로 서고 정진에 힘을 기울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항상 선배 스님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안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옥수수를 밭에서바로 따서 가마솥에 서 삶아 먹었는데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반찬으로는 항상 산나물이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맛이 으뜸가는 것은 곰취였다. 가을에는 머루와 다래가 풍성했다. 산이좋아 산에 사는 기쁨을 누리고 사는 출가자에게 더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십대 후반, 1년 동안의 교무 소임을 마치고 다음 정진할 곳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안거가시작되는 전날이라 마음이 바빴다. 은사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일어서는 순간 스님께서 명하셨다.
"교무 소임을 한 번 더 해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만년필을 멀리 던져버리고 그대로 일어섰다. 은사 스님은 기가 막히셨을 테지만 붙들지 않으셨다. 점심 공양 후 언양에서 버스를 타고 지리산 대원사로 가는데, 향곡 큰스님께서도 버스에 타고 계셨다.
그런데 양산을 지나는 순간 버스의 앞바퀴가 빠져버렸다.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밖을 내다 보니 옆은 산이고 그아래는 절벽이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향곡 큰스님께서도 걱정이 되었는지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만 석남사로 들어가지!"
할 수 없이 석남사로 돌아오자 은사 스님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나가는 문턱은 낮지만 들어오는 문턱은 높은 법이다."
당신 말을 거역하고 나갔으니 이 기회에 상좌의 기를 꺽어보려는 눈치셨다. 스님은 옆에 있던 몽둥이로 나를 내려치셨다.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소리쳤다.
"말로하지 때리기는 왜 때리노?"
그리곤 주지실 책상 위에 있던 잉크를 벽에 던져버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철마스님은 웃고만 있다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훗날 철마스님은 그때의 광경을 자주 재현하곤 해서 젊은 날 앞뒤없이 은사 스님게 불효했던 일을 부끄럽게 했다.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성격인 나는 바르다 싶으면 그자리에서 결정하여 실천하고, 그르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불같이 열을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밖에서 볼 때는 굉장히 과격한 사람으로 비춰질 때가 종종 있다. 친족들에게 냉정하고,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고, 말을 해야 할 때는 요약해서 간단히 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후학들의 말이, 나는 웃고 있어도 무섭다고 한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쳐졌을 것이다. 그런 내가 필십이 넘어 조금씩 풀어졌다. 가끔은 나도 노래를 부르는데 내 18번은 '황성옛터'다.
종회의원이신 천성산 내원사 주지 수옥스님, 지리산 대원사 주지 법일스님, 석남사 주지 은사 스님 이렇게 세 분이 내원사에서 만나 이른 아침부터 종회 일로 한양 길을 떠나셨다. 내원사 길은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산길이고, 길게 뻗은 계곡으로 흐르는 물은 내원사의 자랑이다. 그런데 인적 드문 산길에서 세 분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자로 뒤를 따라 가던 나는 '저분들은 내가 있는 것도 모르나봐' 하면서 미소 짓고 있는데, 갑자기 은사 스님이 "내가 대장이다" 하시면서 "5분간 돌아가면서 대장이 되라"고 명령을 하셨다.
수옥스님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천성산 내원사를 크게 일으키고 조계종 종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종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다. 내원사는 지금 비구니 스님들의 정진 도량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법일 스님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원사를 일으켜 세우셨다. 법일 스님은 대웅전보다 탑전을 먼저완공하셨는데 성철 큰스님께서 속인의 신분일 때 수행하셨던 곳이었다.
지리산 영봉 천혜의 자연공간에 자리한 탑전은 정진하는 스님들에게 큰 신심을 일깨워주는 곳이었다.
석남사가 자리해 있는 가지산은 영취산, 신불산, 천왕산, 운문산, 고헌산, 문복산과 함께 영남의 칠산으로 꼽히고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기도 한다. 쌀바위에서 산위를 잇는 능선 일대의 바위들은 얼음골 폭포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해 내고 상봉에는 늦은 봄까지 흰 눈이 장관을 이룬다.
심검당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주지인 법희스님이 아래로 빨리 내려오라는 연락을 해왔다. 석남사 마당에 내려가보니 멋진 신형 차 한 대가 서 있는데 새로 출시된 갤로퍼라고 했다. 사슴목장까지만 한번 가보고 점심 공양 전에 돌아오자며 입승을 보던 현묵스님과 함게 차에 올라탔다. 사슴목장까지는 자주 가는 행선 길이기에 금방 다녀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절기는 여름의 문턱에 다다라, 지나는 길가에는 백도라지며 붓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이름 모를 풀꽃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사자평에 이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광야 위에 온갖 꽃들이 황홀한 자태를 뽐냈다.
풍경에 도취되어 가다 보니 저만치 표충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공교롭게도 험한데다가 좁아서 올라갈 수 없는 산길이 나왔다. 어쩔 수없이 밀양을 지나고 청도를 거쳐 가지산을 한바퀴 돌아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문 앞에 은사스님께서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서 계셨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밖에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계실 줄은 몰랐다. 저녁을 먹고 은사 스님이 계신 심검당으로 올라갔더니 평상에 앉아 계시던 스님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인정사정없이 우리들의 어깨를 내리치셨다.
다음 날 선방에 들어가보니 우리들의 좌복이 다락으로 치워지고 없었다. "불법은 이제 망했다. 입선하고 생사해탈을 구하는 납자가 어찌 자리를 비울 수 있단 말인가?" 은사 스님은 그렇게 호되게 꾸지람을 하며 큰방에 들여보내주지 않으셨다. 3일 동안 매일 올라와 참회를 한 후에야 큰방에 앉을 수 있었다.
안거가 끝난 후 우리는 사자평의 풍경을 요리조리묘사하면서 은사 스님을 설득했다.
"그렇게 산이 좋은 줄 몰랐어요. 꼭 한번 가보셔야 합니다."
"그래, 얼마나 좋았으면 입선도 잊었겠느냐. 한 번 가보자."
결국 은사 스님께서도 다녀오시고는 "한 번은 가볼 만한 참 좋은 곳이다" 하시며 웃으셨다. 곁에 살면서도 단 두 번밖에 다녀오지 못한 사자평의 그 아름다움이 지금도 여전한지 궁금하다.
(그곳을 이번 여름휴가 때 다녀오고 싶어지네. 갈 데가 너무 많타ㅋㅋ)
석남사가 품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 중에 빼놓을 수없는 곳이 옥류동이다. 욕류동은 화강암이 가지산 정상에서 만폭동을 지나면서 10리나 이어진 아름다운 계곡인데, 옥처럼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우리 석남사 대중들에게는 경전을 외우며 다니는 산책길이고, 여름이면 시원하게 쉴 수 있는 쉼터이며, 후학들은 점심을 싸서 소풍을 가는 곳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해인사 국일암에서정진하고 있을 때 법정스님을 처음 뵈었다. 당시 법정스님은 해인사 소소산방에 머물고 계셨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대적광전에서 방장 스님의 법문이 있었는데, 법문을 듣고 나오던 어느 날 법정스님이"차 한잔 마시고 가세요"하고 청하셨다.
백졸스님과 함께 남산이 바라다 보이는 소소산방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내가 물었다.
"스님께선 왜 출가를 하셨습니까?"
법정스님께서 담담한 목소리로 답하셨다.
"자유가 좋아서요."
이번에는 법정스님이 물었다.
"스님들은 왜 출가하셨습니까?"
내가 대답했다.
"저도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고 싶어서 출가했습니다."
법정스님께서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을 통한 보살행을 주장하셨다. 법정스님의 말씀에 내가 밀어붙였다.
"화두공부 외에 다른 공부는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대자비심으로 육바라밀, 곧 남을 돕는 큰 불사를 지어 공부를 성취하려는 사람은 송장을 타고 큰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과 같다고 조사 스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닌 것도 맞다고 우기는 뱃심으로 살 때였으니 그렇게 나의 주장을 밀고나갔던 것이다. 법정스님은 그날 우리에게 비구니 스님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처음이라고 하면서차를 대접해 주셨다.
훗날 법정스님께서는 봉은사 다래헌에 있을 때 출가를 하고 싶은 여자 대학생들이 찾아오면 사람 됨됨이를 보아가며 석남사로 보내주셨다. 그들 중에는 내 상좌가 된 사람도 있다.
송광사 불일암에 계실 때, 법정스님이 보내주신 내 상좌와 함께 찾아간 적이 있었다. 산위로 올라가다 문득 갈림길에서 표지가 없길래 "불일암!" 하고 크게 외쳤더니 법정스님이 내려오셨다. 그때 청빈한 삶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는 불일암의 안쪽을 보았다. 그리고 출간때마다 석남사로 직접 부쳐주시는 책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시는 스님의 내면을 엿보았다.
불일암을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 뒤인 몇 해 전 겨울이었다. 은사 스님 일대기의 서문을 부탁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잠깐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가 필요했다. 그래도 차마 지팡이를 짚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 사립문 앞에 놓고 들어갔다.
어느 덧 칠십이 넘은 법정스님과 나는 손을 마주잡고 반가운 마음을 나누었다. 상원도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사실 무렵이어서 "물을 떠다 드시기 힘들 텐데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게곡물이 얼면 얼음을 떼어내 녹여서먹는다"고 하셔따. 내 건강을 물으시기에 "저는 요즘 다리가조금 아픕니다"라고 했더니, "몸이 아플 때 하심하게 되죠. 저도 얼마 전 장작을 패다가 다리를 좀 다쳤는데 하심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하셨다.
법정스님은 그날 은사 스님 책의 서문을 기꺼이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는 사립문 앞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그 후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원택스님 그리고 법정스님께서 보내주신 내 상좌 원욱과 병문안을 갔다.
몹시 힘들어 보이는 스님께 "쾌차하세요' 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 손을 잡아드리는 것으로 병문안을 대신했다. 법정스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서 미안합니다" 하시곤 옆에 서 있는 원욱에게 짧게 한 마디 하셨다.
"스님, 잘 모셔라."
다녀오고 사흘 만에 법정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 스님 생전의 삶처럼 검박하게 치러준 송광사에서의 다비식을 보았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그삶의 자취만은 그대로 나아, 뒷사람들에게 교훈과 그리움의 길을 열어 보이고 있다."
법정스님께서은사 스님의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의 서문 첫머리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간 절을 짓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는데 상좌들이 많이 생기다 보니 함께 공부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해인사에 금강굴을 짓게 되었다. 해인사에서 소임을 보고 있던 천제스님과 의논해 금강굴을 짓고 난 후 큰스님이 아실까 두려워 3년 동안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못난 중으로 숨어서 공부만 하겠다는 약속에 상반 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금강굴을 짓고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큰스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호되게 꾸짖는 경책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하기 어려우니라.
공부에 손해되는 일은 일체하지 않아야 한다.
만사가 인연 따라 되는 것이니
모든 일은 인연에 맡겨두고
쓸데없는 신경은 필요 없다.
나와 남을 위한 일 착하다 해도
모두 생사윤회의 원인이 되나니
원컨대 소나무 바람 칡넝쿨 달빛 아래에
샘이 없는 조사선을 깊이 관할지어다.
인사를 드리러 갔던 석남사스님 한 분에게 던져 보낸 이 편지를 받고서야 겨우 인사를 드리러 갈 수 있었다. 큰스님은 지난 일은 묻지 않으시는 성정대로 금강굴에 대해 다시 말씀하지 않으셨다.
금강굴 짓는 데 큰 힘을 보탠 상좌의 부모가 "저희들 스님(딸)이 시주를 받아 얻어먹으면 빚이 되어 공부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공양한 것으로 살아가면서 수행하면 어떨까요?" 하면서 논 스무마지기를 시주할 뜻을 비쳤다.
그 일을 큰스님께 의논드리자 "여러사람에게 복을 짓게 해야지 한 사람에게만 복을 지을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주는 거라고 다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금강굴에 오는 사람은 자질을 본다지요?"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사람을 차별해서가아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천상천하에 제일가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어찌 자질을 보지않을 수있겠는가. 뚜렷한 목표의식을 보는 것이다. 목표 없이 그저막연하게 청빈한 삶이 수도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면 백이면 백 중도에서 무너지고 만다.
큰스님이 지으신 <선문정로>가 간행된 후부터는 그책을 공부하게 해서 선에 대한 뜻을 세우게 하고 있다. 큰스님이 입적하실 때 "내가 가고 나면 그것을 의지해 공부하라" 하신 책이다.
1976년부터 1989년까지 큰법당인 금강보전, 선원인 문수원, 요사채인 금강굴을 지었다.
큰스님 생전에는 꾸중만 들었는데, 내 상좌 하나가 큰스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큰스님이 가시면 저희들은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하고 여쭈니 "너희들 스님한테 지도 받아라"하셨다고 한다. 다른 공부 방법이 있겠는가. 생전에 큰스님이 지도하셨던 방식 그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한번은 점잟게 생긴 할아버지 한 분이 금강굴을 찾아오셔서는 손녀딸을 내놓으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내놓지 않으면 국보위에 유괴죄로 고발하겠습니다."
당시는 국보위라는 데가 세상을 주름잡고 있던 때였다. 손녀인 내가 출가할 때 눈물을 훔치셨던 할아버지 생각도 나고, 학교를 마치자마자 출가해버린 손녀에 대한 그분의 심정도 이해되어 조용히 말씀드렸다.
"국보위에물어보지 마시고 손녀한테 먼저 물어보세요. 그리고 설득해서데려가세요."
물론 손녀는 산을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고 할아버지는 그대로 돌아가셨다.
지금 보면 나의 상좌들은 모두 바보 같다. 항상 남한테 지고 산다. 어떤 때는 내가 잘못 가르쳤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강원이나 다른 곳에서는 조금 바보스럽다 싶으면 "금강굴 출신인가?"히고 묻는다고한다. 휩쓸리지 않고 규율에 맞추어 살다 보니 너무 보수적이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보다. 하지만 출가자는 수행 없이는 당당할 수 없으니 현실 앞에서는 답답해도정진은 잘하는 수행자가 되게하고 싶다.
상좌 한 사람이 출가하기 전 언니와 함께 백련암에서 3천배 기도를 하고 있는데 큰스님이 다가오셔서 두 사람에게 물었다고 한다.
"너거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벙이 무엇인 줄 아나?"
"암입니다."
"아이다."
"마음병입니다."
"그것도 아이다."
"그럼 뭐라예?"
"게으름 병이 제일 큰 병이다."
백련암에 올라가 큰스님을 뵙고 도향선이라는 법명을 받은 그 보살은 하루 3천 배씩 천일기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절을 하던 보살과 법당 밖에 있는 나의 눈이 마주쳤다. 볕이 따스하게 느껴지던 봄날이었다. 나중에 "절을 하다가 왜 밖을 봤어요?" 하고 물으니 대답이 이랬다.
"절을 하다가 밖을 한 번 돌아보면 저 산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이 다 꽃으로보여요. 그거 한 번 보고 절하려고 밖을 쳐다보는데스님이 서계시던 걸요."
삼천 배 천일기도를 무사히 끝내고 와서 보살이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스님! 저는 깨진 사발을 완성품으러 만들 수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만사가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것은 긷하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마음의 힘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님, 저는 인간에게는 무한한 힘이 있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깨달았어요. 만 배를 할 땐 죽을 것 같아도 안 죽더라고요. 누구나힘들어도 해볼 필요가 있다싶어요."
"합천하면 해이나인데 합천에 사는 신부님이 스님들의 생활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선을 지도받으려면 먼저화두를 받아야 합니다. 화두를 받기 위해서는 3천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 모두 법당에 가서 3천배를 하게 했는데, 수녀님의 옷차림으로는 절하기가 어려워 머리에 쓴 베일만 빼고는 회색 승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수녀님은 절을 잘하는데, 신부님이 1, 700배를 하고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다.
"스님과 신부님의 약속인데 자존심도 없습니까? 약속을 어겼으니 성당에가셔서 하루에 108배를 한 달만 하고 오세요."
분명히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갔는데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 후 부산에 있는 한 신도분이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최신부님이 금강굴에서 3천배를 하다가 못했다면서 스님들 생활이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하시던데요?"
큰스님께서는 "사람 사람이 금덩어리 아님이 없는데,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똥덩어리로착각하고 산다. 수행을 해서 눈을 뜨면 자신이 본래 금덩어리인줄 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수행을 하다 보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하늘을 마음껏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솔개의 수명은 80년이다. 그런데 솔개가 40년쯤 되면 산정에 올라가 반년에 걸쳐 고행을 한다고 한다. 기어져 쓸모없게 된 부리는 바위에 쪼아 부수고 무딘 발톱도 새로 난 부리로 뽑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거워진 깃털마저 뽑아 정리한 후, 새로운 부리와 발톱과 깃털로 새롭게 40년을 산다고한다.
가야산 단풍이 빨갛게 타오르던1993년 늦가을, 창밖이 환해질 무렵이었다. 큰스님께서 해인사 퇴설당에서 11월 4일(음력 9월 19일) 열반에 드셨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법랍 58세, 세수 82세로 열반의 종소리와 함께 가야산 해인사는 큰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영결식은 1993년 11월 10일.
스님들의 염불의식이 끝나고 종단의 대표 스님들과 문도의 대표 스님들이 솜방망이에 불을 붙였다. 이어서 '거화'라는 구령에 맞추어 일제히 연화대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동시에 다비를 지켜보던 스님들이 외쳤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나오십시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나오십시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나오십시오."
가을의 아름답던 단풍들은 그 빛을 잃은 듯, 그날따라 온 산중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앞의 글은 원택스님의 <성철스님 시봉이야기>에서 빌렸다. 내가 큰스님의 영결식과 다비방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비 후 100여 과의 사리를 모아 사십구재가 치러지는 동안 사리친견법회를 열자 종교를 초월한 100만 대중이 모여들어찬탄했으니 불교사에 드물고 드문 일이었다.
열반하신지 3년 후인 1996년 9월 19일 생가를 복원하는 기공식이 있었다.
불가에서 겁이란 길고 긴 시간을 말한다. 100년에 한 번 선녀가 내려와 사방 40리 되는 바위를 옷자락으로 스쳐서 모두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1겁이라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될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겁외란 그 기나긴 시간 밖이라는 뜻이니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인 세계를 의미한다.
겁외사에 큰스님의 유물들이 들어올 때 '여긴 내가 살 곳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섰다. 큰스님의 상좌가 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원택스님에게 연락해 회향 전에 인수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힘들게 해놓으셨는데 어떻게 받습니까?" 하면서 사양했다. 거듭 세차례나사양하기에 "그러면 겁외사를 큰스님 딸의 절로 남게 할 겁니까?" 했더니 그제야 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2001년 3월 30일 봄날이었다. 회향식을 진행하는데 난데없이 폭설이 내려 주위의 경치는 일시에 설경으로 변화하였다.
생가와 겁외사 건립 회향식을 마치고 금강굴에 돌아와 쓴 글이다. 겁외사에 관한 일은 회향식이 있던 다음 날부터 완전히 손을 떼서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고, 지금은 내가 했다는 생각조차 없다. 하지만 그 뒤로 "스님, 왜 이렇게 늙으셨어요?"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니 아마도 그때 한 고생 덕분인듯하다.
상좌와 함께 백련암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면회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데가마땅치 않아 원택스님이 거처하는 방에 들어가 있었는데, 시자 생활을 하며 큰스님의 원고를 정리할 때라방이 어질러져 있었다. 상좌에게 "네가 좀 정리해 봐라" 하고 치우게 했는데 나중에 원택스님이 보고는 "제 방에는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겉으로는 순해 보이지만 내면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원택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승에대한 존경심과 그리움을 전한다.
"마음을 다해 시봉한다고 했지만, 돌아보니 큰스님을 보아도 보지 못한 것 같고 만나도 만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첫댓글 덥다 바깥은 가마솥에 옥수수를 삶는가?!
참매미 노래하는 여름, 오늘 처음 내 귀에 들어오다
유튜브에서는 성철스님의 법강의가 들리고 있다
숙면일여..에 대한 말씀이 깊었다
깊이 잠들면 아무 꿈도 꾸지 않는다
꿈이 얕아지면 비로소 꿈이 꾸어지는 것인데
숙면할 때도 화두가 성성히 살아있을 수 있을까??
이론은 있지만 현실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한다
성철스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영원에서 영원으로>집자를 마치고 연수도서관에 반납하러 가다
자전거를 타고 연수역 옆 계단을 올라
도서관입구, 수박과 참외의 줄기를 수직으로 올라가게 해 놓아
회화적인 모습으로 참외.수박이 철구조물에 앉혀져 있다
동물원 원숭이 보듯 사람들이 조소지으며 스쳐 지난다
산과 강 옆의 보드라운 황토에 자릴 잡고
짚을 깔아 건조한 엉덩이로 노랗게 미소지어야 할 참외가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당최 알수없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허기진 영혼이 서가를 돌아
알짜배기 살찌울 것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숲에 들어가니 나무가 보이지 않네
세권의 책이 쉰여덟의 중년에 잡혀 터벅터벅 신연수역을 향하는
늦은 오후에
몸을 둘로 나눌 수 없듯이
마음도 몸과 너무나 닮았어라
산과 절을 활자로 찾아다니다 보니 예수님이 자꾸만 흐릿해진다
그래도 아주 없어지지는 않아요
그런 과정속에서 법륜스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더라
더 불교가 깊어지고 좋아지니 이걸 어쩌면 좋아요?!
그런 중간중간 법륜스님이 예수님을 현재로 모시고 오십니다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에 묶여, 창을 쯔르는 병사를 향해
'용서해주십시요' 라고 기도하는 예수님을 법륜스님이
"어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무릇 종교가는 저렇듯 관용적이어야 하는 거란걸
타 종교를 헐뜯어 내려 그 낙오된 사람을 끌고 오려는 악의
법륜스님의 넓은 품 속에서 다시 되살아나오시는 예수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