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에 있는 정동진역은, 1962년에 개업을 했지만, 인구의 감소로 인해, 1996년 폐역이 된 작은 역입니다. 그러나, 폐역이 되기 직전인 1995년에 “귀가시계”라는 평을 얻었던,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비둘기호만 정차하던 역이, 정동진 해돋이관광열차가 큰 인기를 끌며, 무궁화호를 비롯한 모든 열차가 정차하는 역이 되었습니다. 인구의 감소로 폐역이 될 정도였다는 것만으로도, 정동진에는, 사람들의 매력을 끌만한 특별한 것도 없고, 면적도 적은, 해변가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랬던 역이, 모래시계의 촬영지가 되면서, 명소가 되었습니다. 또, 해남에 있는 “땅끝 마을”은, 동국여지승람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북온성까지 2천리라”하여, 삼천리금수강산이 시작점이라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발전되었지만, 알려지기 전에는, 해남에 있는 작은 바닷가였고,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어촌이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적었던 지역이, 관광지가 되어, 많은 이들이 찾게 된 것은, 그에 대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의미가 있기에, 우리의 관점이 변하고, 감각이 있기에, 우리의 반응도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겁니다. 본문을 보시면, 사도바울은, 여러 곳에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교회”라는 말을, 깊이있게 표현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지닌, 그 의미를, 디모데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럼,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의 의미를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된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의미는, 참으로 밀접합니다. 만약, 교회에 대한 본질적 자세와 순종과 실천이 바르게 정의되어있지 않다면, 평생을 교회다니고, 예배를 드렸다고 해도, 그것은, 명패에 불과할 겁니다. 명패에 불과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형식적인 믿음이 됩니다. 요즘, 교회들에 대한 소식들을 볼 때, 안타까움만 가득합니다. 모든 소식들에는, 그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정황들이 있겠지만, 그 뉴스를 접하는 저로서는, 저렇게 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이유가, 교회 밖의 사람들은 물론,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까지,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는 이 일에 대해, 악풀이 멈추지 않습니다. 전도할 때 만나는 이들은, 한결같이, 교회가 저래서 되겠냐며, 교회를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는 시기입니다. 교회들이 달려가야 할 푯대가 눈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로 인해, 또,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정든 교회를 떠나 무교회주의자가 되거나 가나안 교인이 되거나 사이버처치에 소속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중에는, 교회에서의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주변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아름답지 못한 일들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신앙의 정의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편리에 맞춰, 예배를 드리며, 헌금의 용도 역시, 자신의 취향을 따를 겁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를 공공의 재산이나 공공의 투자자산으로 생각하는 교인들도 생겨납니다. 그들은, 교회는, 성도들의 헌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들 모두에게 2%가 부족합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빠졌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신한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심을 믿는 다면, 교회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겁니다. 교회에 대한 그 의미가 바뀔 겁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의 사명으로 되돌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소집하여, 회개운동을 펼친 것처럼, 미스바 운동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어거스틴은, “교회를 어머니처럼 섬길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어머니 교회”로 불리는, “유월절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기능을 말하는 겁니다. 곧, 교회는, 어머니와 같이, 성도들의 믿음을 양육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교회의 의미에 대해,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말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의 전반부를 보시면,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현대판 마틴 루터로 불리는 “한스 큉”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령의 피조물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또, 성경을 보면, 상징적인 표현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몸으로 비유키도 하고, 또는, 건물로도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가장 포괄적인 면에서 그 의미를 찾는 다면,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엡 2: 19을 보시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합니다. 이를 새번역으로 보시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라”고 한 것은, 바울의 사역지가 이방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바울의 복음을 받고 개종하는 자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받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그들을 향해, “너희는 이제 이방인이 아니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한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사렛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며, 복음 안으로 들어올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우상신을 지칭하는 것의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의 “집”은, 헬라어로 “오이코스”라 하며, 그 의미는, “가정을 형성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헬라어의 의미를 살려, 본문을 다시 읽으면, “만일 내가 지체하며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으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교회를 건물로만 한정시킬 수 없습니다. 건물보다는, 하나님을 모신 성도들로 이루어진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된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운데, 모두가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를 전도하려고 애쓰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전도를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아버지가 예수를 믿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아들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자며 기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그 동안 제가 그렇게 소원하며 기도하던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예수 믿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라면서, 아버지께, “아버지도 예수 믿게 하셔서 감사합니다며 기도하세요”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형님되시는 하나님”이라고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깜짝 놀라며, “아버지,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리니까, “야, 좀 전에 네가 하나님보고 아버지라고 했으니, 하나님과 나와 촌수를 따지면, 하나님이 형님이 되실 것이 아니냐?”라고 했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큰 형님”이라고 호칭하거나, 자신을 가리켜, “예수 동생”이라고 하던 이들 가운데, 소망교회에서 목회하다 은퇴하신 김지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다른 이들은, 이단의 교주들이 대부분,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지만, 김지철 목사님은, 다른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사용어가 같기에, 한바탕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성도 중 한 분은, “그러면, 여 성도들은 예수님을 큰 오빠라 해도 됩니까?”라기까지 했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면, 자신을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과 동등한 신적인 위치에 올려놓게 됨으로, “예수 형님”이라는 표현은, 신성모독이며, 이단적 표현으로 볼 수 있기에, 이러한 표현은 자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모임에 임재하시는 의미로 받아야 합니다. 존 칼빈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왜 부르는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양자되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받으셨을 뿐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함께, 고전 6: 19을 보시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목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집인 우리 신목교회 위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5절의 후반부를 보시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라고 합니다. “이 집은 하나님의 교회”라고도 할 수 있지만, 여기에, “살아계신”을 넣은 것은,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고하게 한 것입니다. 신학자 존 스토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수 3: 10의 여호수아 말로 대답을 합니다. 여기를 보시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형식적이거나 문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핵심입니다. 우리 가운데,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대상으로 약속할 분 계십니까? 약속은 존재의 대상끼리 합니다. 레 26: 12을 보시면,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후 6: 16을 보시면,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합니다. 이로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합니다. “터”의 헬라어는, “헤드라이오마”로, “굳게하다, 견고케 하다, 기초”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건물을 견고하게 받쳐주는 대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터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면서, 성도들이 두 부류로 나뉘는 데, 하나는, 믿음의 성숙을 이루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나마 있던 믿음까지 잃고, 세속화로 흐르는 자라는 겁니다. 딤후 4: 10을 보시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합니다. 데마와 같이,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세상의 유혹에 휩싸여 믿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금속탐지기로 모래사장을 살피며, 금을 찾듯이, 자신들의 의지와 생각으로, 믿음을 찾다가 세상의 유혹 앞에 무너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터”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단이나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로부터,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게 지켜나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돌이키고, 오직,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갈 6: 17을 보시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지금까지 예수를 믿으며, 성도로 살아오는 가운데,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게 잡음으로, 핍박이나 유혹으로 실족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가족으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믿음의 터”가 되는, 증거가 있습니까?
지난 2017년 11월에 포항에서 5.4의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8년 12월에 또 다시, 포항에서 약 2.2km 떨어진 바다에서 지진이 있었습니다. 이 지진으로, 우리나라가 지진의 안전지대라는 의식이 바뀌었습니다. 이들 지진으로, 포항에는 커다란 피해가 있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지진을 대비하여, 건물을 건축했더라면, 피해는 줄었을 겁니다. 또, 작년 2018년 9월에는, 밤 11시경 상도동에서, 유치원 건물이 붕괴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근처에서 공사를 함으로, 건물의 바닥이 꺼짐으로, 10도 가량 기울어지면서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신앙의 터를 되돌아 볼 수 있습니다. 요 14: 6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지만, 구원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에 우리는 설득되어 갑니다. 행 4: 12을 보시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하였는데, 이 말씀이 부인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터 위에, 믿음을 세우고 있습니까? 엡 2: 20을 보시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이 터 위에 세우고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는, 범죄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성도로서의 길을 가며,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소유할 진리의 기둥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다시금, 이 터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움으로, 우리 신목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고 합니다. 교회는 경건의 비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며, 탄성을 자아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진리의 위대함을, 감격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밀”이라는 말은, 원어로 “뮈스테리온”이라하며, 영어에서, “미스테리”의 어원이 됩니다. 그래서, 한글킹제임스는, “경건의 신비”로 번역했고, 카톨릭 성경은, “신앙의 신비”로 번역했습니다. 그럼, 경건의 비밀이 가리키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존재로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만약, 예수께서 성육신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 분을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 비밀은, 사람인 우리가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또, 이 비밀은, 사람에게 속한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교회가 소유하는 가장 크고, 위대하며, 놀라운 보화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펼쳐서,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성경인데, 우리는 과연, 성경을 읽으며, 얼마나 감동을 합니까?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하는 만큼,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통해, 증거되어지는 십자가의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눈시울을 적시며, 그 사랑에 감동을 하고 있습니까? 임마누엘 칸트는, “희미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과 자신의 내부에 있는 양심을 보며, 감탄과 숭경을 더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비밀인,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과 그의 백성들을 이끌고 계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도 감동이 없습니다. 또,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 우상을 앞에 두고, “크다”라고 외쳤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성도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 교회의 생명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마 28: 20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합니다. 교회가 경건의 비밀 위에 세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다는 겁니다. 교회가 어떠한 이유로든, 전도를 중단하는 것은, 교회로서 모든 기능을 중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 앞에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주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의미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신앙의 터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날마다 충성하며, 그 터 위에서, 든든히 세워져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