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12교회, 인초가 건너는 다리] 追錄(2/2)
원정스님과의 인연은 군복무중에 시작되었다. 원정스님은 해인사에서 훈련소를 거치지않고 현지입대한 군승병이었다. 분주하게 돌아가던 영내는 오후 5시가 되면 영외거주자들이 전부 퇴근하고 도심속의 조용한 별천지가 된다. 연중 사계절 어김없는 오후 5시, 정확히 말하면 4시50분 부터 배식이 시작되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취침소등이 이루어지는 밤 10시까지는 거의 한가한 시간이 된다.
내무반에는 군종병과 군승병이 각각 한명씩 있었는데 군종병은 영내의 교회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고 군승병은 암자를 관리하고 있었다.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다니다가 입대한 군종병 ‘정은태’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무던히도 우리 내무반 요원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었다. 별반 특별한 일이라고는 없는 무료한 군대생활인지라 예수믿고 천당가자는 그의 끈질긴 설교(?)를 우리는 늘 재미삼아 들어주고 있었다.
권유인지 설교인지 강권인지가 모를 그의 입담이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우리는 또 똑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어이, 돌태, 그라믄 니 하나님 봤나?” 하고. 그의 본명은 ‘정은태’이지만 우리는 늘 그를 ‘돌태’라고 부르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에 투철한 그도 ‘니 하나님 봤나~ ?’ 라는 직설적 물음에는 난감하기 그지 없는 듯 했다.
봤다고 하면 또 다른 허다한 해괴망측한 질문들이 놀림감으로 쏟아질테고 못봤다고 해도 그러면 뭣을 믿느냐는 역공이 뒤따를테니 난감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때가 되면 늘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말문을 닫아버렸다. “주여~, 불쌍한 저들을 구하소서...” 그리고는 누가 말을 걸어도 그날 저녁에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어이, 원정아 부처님 얘기 좀 해봐라” 하면서 말머리를 돌리게 되는데 그의 속명은 ‘차O완’이고 불교의 법명은 ‘원정’이었다. 그는 1년쯤 후임이 되는 쫄병인지라 내무반에서 늘 조심스러웠다. 고참들의 명인지라 그는 해인사 이야기들을 슬슬 꺼집어 내게 되는데 배고프고 잠이 모자랐던 행자시절 이야기며 통제가 안되는 해인사 스님들의 일상 이야기들을 재미삼아 들려주곤 했었다.
점호를 마친 스님들이 월담하여 해인사 아래 숙박동에 내려가 곡차를 마시다가 취해 난동을 부리면 신고를 받은 종무소 당직스님들이 찦차를 타고 내려가 체포(?)해 와서 징벌하는 이야기며 벼룩 서말을 길에 풀어놓아 몰고 갈수는 있어도 스님 세명을 한곳으로 몰고 가기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등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풀어놓았다.
그리고는 모두 지루한 군생활의 하루를 마감하고 스르르 잠이 드는 것이었다. 주말마다 격주로 외출을 나가게 되는데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별로 갈곳이 마땅찮았던 나는 그가 관리하는 암자를 찾아가 시간을 같이 보내다가 돌아오기도 하였고 군의 선임으로서 제식훈련도 제대로 모르는 현지입대 후임인 그를 각별히 보살펴 주면서 그가 말하는 불교 이야기들을 잘 들어주곤 했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내가 제대하는날 그는 나를 붙들고 이렇게 당부했다. “이형, 제대하고 나서 좀 있다가 내가 해인사로 돌아가면 꼭 해인사로 찾아 오이소, 보통 행자생활을 6개월 시키지만 이형은 특별히 3개월에 끝내도록 하고 좋은 스승 만나서 한도 원도 없이 마음껏 공부하도록 해 드릴테니 꼭 해인사로 찾아 오이소” 하는 것이었다. 날더러 해인사 와서 중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그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성철스님의 상좌였다는 사실을... 그는 천제, 원정, 원택으로 이어지는 성철스님의 두 번째 상좌였던 것이다. 좋은 스승 만나서 마음껏 공부하도록 해 드리겠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나를 성철스님의 법문에 들여 제자로 만들어 불교공부를 마음껏 하도록 배려하겠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성철스님은 불교계에서 그만한 지위와 능력이 있는 분이었으니까... 그랬으면 아마 원정스님의 후임으로 성철스님의 상좌노릇을 하다가 지금쯤 어느 사찰의 주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 하 하... 세상사 모를지고.
여하튼 나는 병역의무를 충실하게 마치고 만기 제대하여 사회로 돌아와 직장생활에 전념하며 눈코 뜰 새 없는 각박한 생활전선에 몰두하고 있었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날 집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원정스님이 화면에 나타났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세히 보고 있으니 해인사 경내와 암자들을 소개하고 있는 프로그램인데 원정스님이 동자 하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은 무슨 건물인데 어느 대사께서 언제 건축하셨고 어떤 역사를 품고 있으며 팔만대장경은 무엇이며 등등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동자야~ 가자...” 하면서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곤 하고 있었다. 불현듯 군대생활 당시의 원정스님이 회상되었다. 언제 한번 해인사로 찾아가 봐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수년의 세월을 또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해 하기휴가때 드디어 마음을 작정하고 아내와 같이 차를 몰고 해인사로 찾아갔다.
몇 시간을 달려 해인사에 도착하여 종무소에 들어가 원정스님을 찾았다. 종무소에서 안내를 맡아보고 있는 스님 한분이 “원정스님이라... 그런분 안계시는데요” 한다. “아니 몇 년전에 TV에서 보았고 군생활을 같이 한 친구인데요” 하니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그런 스님은 해인사에 안계신다고 한다. 난감하지만 안계신다는데야 어쩔수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품고 아래쪽 숙박동으로 내려와 식사를 하려고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
식사를 주문해 놓고 식당의 주인양반에게 말을 걸었다. “원정스님을 찾아왔는데 종무소에 가서 물어보니 그런 스님 안계신다고 하네요, 군생활을 같이했고 몇 년전 해인사를 소개하는 TV에도 나왔던데...” 하니까 “그래요, 그 스님 속명이 무엇인데요?” 하고 물어서 “차O완입니다” 하니 “차O완이... 그 친구 독일 간호원 만나 결혼해서 독일 갔어요” 한다. 머리가 띵~ 했다. 숙박동의 가게 주인들은 절 소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옛날에 종정스님의 운전기사를 했다고 하면서 불교계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고 그런 경우는 흔한일이니 놀랄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먼길을 친구 찾아 온 나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원정스님과 꼭 연락이 닿도록 한번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그날 해인사 숙박동 어느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 다음해이던가 다시 그 식당을 찾아가 원정스님의 소식을 물었더니 결혼하고 독일로 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어딘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원정스님은 원래 성철스님의 상좌였는데 결혼하여 독일로 간후 그 아래에 있던 원택스님이 성철스님의 상좌로 있다가 지금은 성철스님이 계시던 백련암을 물려받아 그 밑의 상좌에게 맡겨놓고 있으며 원택스님등이 이곳 해인사의 주력그룹이 되어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차O완(원정스님)은 독일에서 돌아온 후 부인이 수년전에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는 아마 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원정스님과 친하게 지내는 원악스님은 대구의 갓바위가 있는 동화사에 있는데 아마 연락처를 알것 같다고 하면서 물어서 알려 주겠다고 한다. 원악스님은 지관스님이 총무원장할 때 그밑에서 총무부장을 지냈다고 하고 원정은 지금 서울에서 박공예에 관한 재능이 있어 전시회도 가끔 연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원정스님의 속가 형제가 4남1녀인데 진주에 살고 있는 그의 누님이 1년에 한번쯤 고향계가 있어서 이곳에 들러는데 그때 만나게 되면 원정(차O완)의 소식을 알아놓겠다고 해서 휴대폰 전화번호를 남겨놓고 돌아왔다. 그 식당 주인양반이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산에는 중앙동 도심 한복판 40계단 가까운 곳에 ‘고심정사(古心精舍)’ 라는 지하1층 지상6층의 제법 큰 규모의 도심사찰이 있다. 중앙동에 천초탕이라는 목욕탕이 있었는데 불심깊은 노부부가 운영하다가 돌아가시면서 해인사 백련암에 기증하고 돌아가셨는데 성철스님이 입적하신후 상좌인 원택스님이 이곳에 불사를 일으켜 절을 짓고 성철스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도량으로 개설하여 바로 그 원택스님이 주지로 있는 사찰이다.
어느날 고심정사로 찾아가 원택스님을 만났다. 직장에 근무할 때 성철스님이 계시던 해인사 백련암의 독실한 불자였던 강O진여사(사장님의 부인)의 백련암 관련 심부름으로 몇 번 백련암에 드나들 때 성철스님의 상좌로 있으면서 백련암의 살림을 맡아 하고있던 원택스님을 몇 번인가 만났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백련암의 성철스님과 원정스님과의 관계를 전혀 몰랐을 때이다.
고심정사 주지실로 올라가 원택스님과 수인사를 나누고 원정스님 이야기를 꺼내었더니 “아이구 사형, 반갑습니다. 어서오십시오” 하면서 도반의 길에서 같은 스승을 모셨던 절집의 사형(師兄), 원정의 친구가 찾아왔으니 반갑게 맞아주었고 스스럼없이 나에게도 사형이라는 호칭이 따라왔다. 차 한잔을 대접 받으면서 원정스님과의 군생활 인연을 이야기하고 그의 소식을 물었더니 아는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런후 어느날 낯선 전화번호로 걸려온 전화 한통을 받으니 원정스님 차O완이었다. 끈질긴 추적 끝에 원정스님 차O완과의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군생활의 추억담을 나누면서 회포를 풀었고 근황을 물으니 다시 승적을 회복하여 서울 근교의 어느 사찰에 주지로 있다고 한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되면 상세한 그의 후일담을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