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의자 (퇴고) 김현정
출근한 딸아이의 방이 화장품과 벗어 놓은 옷가지로 어수선하다. 무엇부터 치워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햇빛 한줄기가 스포트라이트처럼 먼지를 환하게 비춘다. 빛이 아니었으면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을 먼지가 민망한 듯 이리저리 날리다 책장 구석으로 숨는다. 책장엔 동화책이 꽂혀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읽던 책들이다. 딸아이에겐 소중한 추억이었는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한 권을 꺼내 첫 장을 넘겼다. 동화 책 속 의자그림 옆에 낙서처럼 삐뚤삐뚤 그려 넣은 엄마라는 글자가 보인다. 딸아이가 그린 ‘엄마’ 가 잊고 있었던 시간들로 나를 이끈다.
나는 아이들이 잠들기 전 침대에 함께 누워 동화책을 읽곤 했다. 즐겨 읽던 책들 중 하나가 [엄마의 의자]다. - 아이의 엄마는 식당에서 일을 했다. 집에 큰불이 나서 가구와 살림도구가 모두 타버렸다. 엄마는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해서 새로 살집을 마련했다. 아이는 엄마가 편안히 앉아 쉴 수 있는 의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의자를 사주기 위해 아이는 병에 동전을 모았다. 병에 동전이 가득 찼을 때 아이와 엄마는 벨벳 바탕에 장미꽃무늬가 가득 있는 안락 의자를 샀다. 저녁에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그 의자에 앉아 편히 쉬었다. - 대략 이런 줄거리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맞벌이를 했다. 퇴근 후 서둘러 집안일을 하고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세아이들은 동화책 속에서 일하는 아이의 엄마를 보며 나를 떠올렸다. 책 속의 아이처럼 유리병에 동전을 가득 모아서 예쁜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안락의자를 사러 가는 것을 상상했다. 안락의자를 엄마에게 사줄 희망에 볼이 발그레해지며 이 책을 매일 밤 읽어 달라고 졸랐다. 나는 동화책을 읽어 줄 때 이미 장미꽃이 가득 그려진 안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친정에 가면, 아버지는 헐렁한 고무줄바지와 빛 바랜 셔츠를 입고 삐꺽 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쇠잔한 어깨와 마른 다리를 드러낸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연세가 든 탓에 눈도 희뿌연 막이 살짝 덮여 탁해 보였다. 그러나 가끔씩 아버지는 창문을 내다보다 반짝 희망의 한 가닥을 다시 잡았다. 그럴 때 아버지의 눈은 구름속을 뚫고 나온 달빛처럼 말간 푸른빛을 띄었다. 그렇게 다른 시공간에서 서성이다 현실로 끌려 나올 때는 “으어 헉 ”하며 느닷없이 신음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고함를 질렀다.
아버지의 무능력을 훔쳐보고 있던 나는 그 고함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런 저런 원망으로 가득 찬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되려 화를 냈다. “아, 놀래라. 아버지는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요.” 내 말을 못들은 걸까. 어느새 아버지는 무심한 표정으로 창 너머 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소싯적 기억을 더듬어 지난 세월을 복기하거나 고요히 마음을 다스려 기약 없는 내일을 꿈꾸는 모양이다. 역할을 잃어버린 가장은 이 집의 난민이 되어 겨우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세상과 무관하고 무해한 아버지의 과거와 현실이 엉켜 있는 자리다. 삐꺽 거리는 의자에 앉아 꿈꾸는 아버지야 말로 가난하고 게으른 주인 덕분에 아직 버려지지 못한 고물 의자였다.
내 젊은 날의 불안과 시련은 모두 아버지의 실패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다. 무엇보다 엄마는 아버지 대신 사업실패로 떠안은 빚을 갚고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갔다. 아버지는 더러워도 허리 굽히고 손 비비며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아이들처럼 아버지에게 편안한 의자를 사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하고는 안락의자에 앉아 연분홍 진달래가 만발한 먼산을 아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런 아버지를 상상하기 싫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아버지의 낡은 의자에 앉아 쉬었다. 노을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에 회색 빛 그림자로 사라지는 먼 산이 보였다. 아버지가 바라보던 곳을 나도 보았다. 의자에서 아직 식지 않은 아버지의 온기가 느껴졌다. 애처로운 아버지의 회한과 잔인하게 던지던 나의 원망 섞인 시선들이 칡넝쿨처럼 엉켰다. 넝쿨은 의자에 앉은 내 몸을 휘감고 올라와 목을 졸랐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안고 “아 아아”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아버지를 소리 지르게 했던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실패의 기억들과 무기력한 자신에서 벗어 나고 싶은 안타까움이었던 것을. 아버지의 의자는 앉으면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잊게 된다는 하데스의 ‘망각의 의자’ 인 줄 알았다.
동화책을 펴 들고 장미꽃이 그려진 ‘엄마의 안락의자’ 와 딸아이의 낙서를 천천히 훑어본다. 엄마에게 사주고 싶었던 의자 옆에 그려 놓은 ‘엄마’ 라는 글자가 너무 고마워서 울컥한다. 아이들은 늦게 돌아오는 엄마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막상 돌아오면 나는 집안 일로 바빴다. 그리고 피곤 하다는 이유로 다정한 말한마디 해주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런 안타까움과 원망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지친 엄마가 안락의자에서 편히 쉬기 만을 바랬다. 아이들처럼 나도 아버지가 안락의자에 앉아 쉴 수 있도록 해야 했는데. 세상의 잣대로 아버지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지 말았어야 했다. 안락의자에 앉아 과거를 후회한들 아버지의 마음이 편해질 리 없고 내마음의 짐도 덜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서일까 오늘도 내 마음 속에서 아버지는 삐걱거리는 불편한 의자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애간장이 녹는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그 아버지의 의자에서 나는 울음 섞인 후회로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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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올리면 되는거네요.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