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국의 내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오늘 열심히 연구하고 실력을 기르는 데 열심하여야 하오. 훗날 조국이 다시 빛을 찾는 날 여러분은 선진 민주주의 생활 방식과 그동안 기른 실력을 조국을 위해 발휘하여야 할[39] 게요. 아무쪼록 열심히 연구하시오.[81] | ” |
서재필은 이렇게 유학생들을 격려하는 한편, 멀리 이국 땅에서 배움에 열중하는 이들의 곤란을 이해하고 경제적인 보조를 아끼지 않았다.[81] 그는 오천석(吳天錫), 조병옥, 김활란 등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경제적인 보조를 많이 하였으며, 이들을 적극 격려하였던 것이다.[81] 후일 오천석은 서재필의 종손인 서명원에게 유학 당시를 회고하며 서재필에게 경제적인 보조를 받았다고 술회하였다.[81]
2005년 언론인 박선협은 친일 의혹을 제기하였다. 2005년 2월 박선협은 청와대에 ’신문의 날’을 혁파해야 한다는 민원을 제출했다. 독립신문이 친일 논조를 펼쳤고 창간을 주도한 서재필이 친일 행각을 벌였으므로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제정된 신문의 날은 다른 날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선협은 3월 15일 연합뉴스에 '광복 60주년의 해를 맞아 광복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우기 위해 청와대에 민원을 냈다'면서 '매국노 이완용도 독립협회에 참여했을 정도로 당시 서재필과 독립신문은 일본의 힘을 빌려 청나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고 밝혔다.[132]
이에 청와대는 "관련단체에 넘겨 검토하겠다"는 회신을 보내는 한편 문화관광부에 이관했으며 문화부는 신문협회ㆍ편집인협회ㆍ기자협회에 검토 의견 제출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132] 당시 문화관광부의 김정화 사무관은 “신문의 날은 정부가 제정한 국경일이 아니라 민간단체가 제정해 기념하는 날이어서 언론계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132]
박씨의 주장에 대해 언론단체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편집인협회의 최문기 사무총장은 “이사회에 보고해 논의는 하겠지만 신문의 날이 큰 문제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으며, 이천구 기자협회 사무국장도 “전문가에게 자문해 입장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답변했다.[132]
관련학계에서도 신문의 날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는 부정적인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진석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신문의 날은 서재필 개인이 아니라 독립신문 창간을 기념하는 날이며,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지로서 개화사상과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류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132]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김민철은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친일적 논조를 펼친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며 "독립신문의 의미가 과도하게 평가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신문의 날을 바꿀 정도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했다.[132]
일설에는 그의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독립운동에 대한 자금 투자가 아니라 미국 대공황의 영향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에 의하면 "그가 활동을 포기한 것은 1922년 2월인데 그의 필립 제이슨 상회는 1924년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점이다. 전재산을 날렸다는 사람이 몇년후까지 사업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다.[73]
주진오에 의하면 "1990년대 초의 한 연구는 1921년부터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서재필의 독립운동연구’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7집. 1993).[73]" 한다.
그는 1895년 귀국했을 때나 1946년 귀국했을 때 자신은 한글을 잊어버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글로 대화를 하여 그가 한국어를 완벽하게 잊었는가에 대해 의혹이 제기되었다. 1946년 귀국 이후 한 방송국에서 한국어로 방송하는 것이 녹음되어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73] 심지어 미국의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금광 채굴권 침탈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 (《The Independent》1896. 4. 16)이라는 것이다.[73] 그는 또 미국의 필리핀 · 하와이 · 쿠바 점령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시하였다.[73]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 ‘貴 政府’라 부르고 있다. (<독립신문> 1898. 5. 5).[73]
그가 조선인들에게 ‘계몽’한 내용 가운데에는 완전히 미국식 풍습을 모범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갈 때 파 ·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1. 14).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브레드를 먹게 되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0. 10)는 것이 있다.[73]
서재필이 '서재필이라는 이름으로 산 것은 그의 생애 가운데 1/3도 안 되는 기간이었으며 특히 1884년 정변 실패로 망명한 이후 그의 국내 체류기간 역시 4년도 안 된다[41]'는 비판도 있다.
1919년 한인연합대회 의사록에서도 그의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었다. 회의 벽두에 애국가가 아닌 미국 국가를 부르게 하고,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의장 취임사에서도 ‘만일 대회 진행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사임하겠다’는 것을 못박고 있었다.[73]
그가 미국인임을 자처한 것 외에도 미국 시민권자 자격으로 비교적 덜 탄압을 받은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서재필이 안전지대인 미국에서 미국 시민으로 살았기에 자신의 경력에 오점을 남기지 않은 것[73]'이라 지적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그는 안전지대였던 미국에서 미국 시민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력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73] 반면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체포와 고문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럽게 투쟁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자신의 오랜 투쟁 경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매도하고 만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73]'라고 지적하였다.
주진오는 '사실 서재필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상황 판단력과 현실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다. 그 결과 미국으로 건너간 다른 초기 이주민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주변인으로 살아간 반면에 그만은 중심부로 살아간 반면에 그만은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는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며 ‘세계인’의 선구였는지도 모른다[73]'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독립신문> 소유권을 일본에 팔아 넘길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때 일본 공사측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고 구두 계약까지 맺기에 이르렀다.[73] 서재필은 출국 직전 일본 공사관에 구두 계약을 이행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독립신문 매수의 건’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898년 1월 15일). 만일 일본측이 약속을 지켰다면 <독립신문>은 일본 정부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73]
양아버지 서광하는 생부 서광효의 6촌 형제였다. 큰딸 스테파니 제이슨은 미국인과 결혼했다.[104] 화가인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아버지를 곁에서 도왔다.[104]
형 서재춘의 손자 서태원(전 감신대 교수)은 6·25 전쟁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되어 갔고 [133][134] 6.25 전쟁 이후의 생존 자손으로는 종손자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서희원, 서태원의 아들이며 서재필의 종증손자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로 있는서동성 등이 있었다. 서동성은 변호사업 외에 이민100주년남가주기념사업회 공동회장과 서재필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종손 서명원은 생부를 잃고 백부의 손에 자랐다 하며, 후일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서재필이 귀국할 무렵에 살아남은 일족은 형 서재춘의 후손인 서찬석, 서태원, 서명원, 동생 서재우의 아들 서호석 등이 있었다.[135] 그밖에 신분을 숨기고 살던 여동생 서기석의 후손들도 존재하였다. 1983년 당시 종손 서희원의 증언에 의하면 서재필의 친족이 50여 명 정도가 미국에 살고 있다고 증언하였다.[136]
그밖에 그의 넷째 이모의 아들 이승학은 해방 후 감사원장과 총리 서리를 지낸 법관 이한기의 증조부였다.
미국 교민사회에서 서재필은 미국 주류 사회에 최초로 성공적인 진입을 이룩한 인물로 기려지고 있다.[41] 미주지역에서 한국의 통일운동을 전개해 온 임창영, 현봉학 등이 가졌던 서재필에 대한 존경심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재필을 이승만과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와 통일운동의 선구자로 간주하였다.[41]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서재필을 지목하였다.[138]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때는 지목되지 않았고,[138]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18표로 3위를 하였다.[138]
조병옥은 그가 우리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미국식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배우고 나가서는 그 현실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최초의 선각자라고 평가하였다.[37]
서재필은 개화사상가, 혁명가, 독립운동가, 군인, 의사, 정치가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5] 생계를 돌보지 못하면서까지 한인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송건호는 "그는 이 땅에서 다시 견줄 바 없는 개혁, 구국, 자유, 독립의 애국투사였으며 조국의 장래와 동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사랑의 봉사자였다.[126]"라고 하였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초당파적 정치가'를 염원하는 중도파에 의해 1년2개월 동안 귀국했던 서재필(徐載弼)은 조국의 통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최후의 봉사를 한 셈이었다고 평가하였다.[139]
대한제국 정부에서 추방당하면서 2만 4400원의 거액의 위약금을 요구한 것에 대해 서울대학교 교수 신용하는 "이 부채(서재필이 받아간 2만 4400원을 가리킴)는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7만 6000 달러를 모두 독립운동에 투입함으로써 충분히 청산하였다.[78]"며 "이때 그는 병원 외에도 60~70명의 종업원을 둔 문방구점과 분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다. 여기서 그의 헌신적 애국심과 그의 인품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이때 그가 가져간 2만 4400원은 비난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78]"고 평하였다.
대전대 총장을 역임한 이광린(李光鑛)과 언론인 송건호(宋建鎖)는 서재필을 '한국 의 볼테르'라고 평하였다.[140] 그리고 (학자들 중에도) 서재필을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와 견주어 '한국 의 볼테르'라 부르는 학자도 있다.[141]
서재필이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힘이 넘치고 주장이 명확한 연설로 유명하다면, 윤치호는 특유의 온화함과 차분함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감화시키는 연설이 특징[38] 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그가 양반이라는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에게서도 역시 강렬한 양반의식(양반으로서의 우월의식)을 느낄수 있었다." 고 평가했다.[131] 허정에 의하면 그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태도는 이미 상당히 미국화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142] 또한 허정은 그가 차갑고 냉소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그가 한국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되고 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그는 독립신문 설립 과정에서 단 한 푼의 자본을 댄 바가 없었음에도 신문사를 자기 명의로 등록했으며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소유권을 일본에 양도하려 했었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운영만 윤치호에게 넘긴 채, 자신은 하는 일 없이 편집인의 명목으로 많은 연봉을 받기로 계약을 맺었다.[143]"고 비판하였다.
그는 '서재필은 귀국후 철저하게 미국인 제이슨으로 행세하였다. 또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정식 관리가 아닌, 고문관이 되어 최고의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경우에도 제손박사 또는 피제선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1994년 유골 송환 직전 TV에서 방송된, 미국 메디아에 있던 그의 유골항아리) 텔레비전을 유심히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의 묘비명에도 역시 필립 제이슨으로 적혀 있다.[73]'고 비판했다. 이어 '1898년 4월 남은 7년 10개월분 봉급에다가 두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여비까지 보태어 받아냈다. 이 때 <독립신문> 창간 비용은 공제되었다.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고 있는 조국에 그렇게 막대한 돈을 강요하였던 것이다'고 하였다.[73]
또, 주진오는 그가 "'독립신문' 등을 통해 그는 동학혁명이나 의병 운동을 철처하게 비난하고 있으며 열강의 이권 침탈과 시장 개방 요구를 '문명화'로 합리화하거나 옹호했고 심지어 독립신문사에서 각종 서양 물품을 판매하기도 했다.[144]"고 비판하였다.
방선주 박사(한림대 교수)도 ‘서재필은 과거를 회상할 때 무책임할 정도로 시일을 혼동하였고, 냉엄한 이국 사회에서의 처신상 그때그때 적당히 호도하는 습성이 있었다’고 하였다.[73]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던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 재해석이 유행이 된 최근에 와서는 서재필이 친일파 이완용과 친밀해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을 정도였다는 점과 독립신문의 시국관, 친미적 시각 등 부정적인 평가문제들도 역사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5]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73]'는 비판도 있다.
사학자 최태영은 "일부에서는 서재필선생이 미국 국적을 가졌고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꿨다고 비판하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생각했지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진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127]"며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상명대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그가 미국 땅에 묻혀 있는 것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다. 그에게는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거부하였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었다.[73]'고 지적하기도 했다.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한, '독립문의 건립자'로도 알려져 있다.
차갑고 냉정했다는 평가가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을 지낸 허정(許政)은 후일 그가 매우 정열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회고하였다.[131] 그의 독립심과 투지는 대단하였다. 박영효나 서광범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라는 자존심[131] 과 함께 노동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같은 양반집 도련님인데도 철도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마쳐 의사가 되었다.[131] 고 하였다. 또한 개인주의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허정은 서재필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다고 회고하였다.[131]
서재필이 배재학당의 젊은 학생들과 애국적인 시민을 독립협회로 모으는 데 기여했다면 윤치호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양심적인 중견 관료들과 개혁적인 젊은 관료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협회의 내적 통합에 기여했다.[145]
급진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정국에서 서재필과 달리 점진 노선을[145] 택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족 또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재적인 신변의 위협 때문에 결국 유학이란 명분으로 망명객이 되어 십년 이상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재필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38]
서재필이 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고투하였던데 반해[38],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에서도 교회와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에 연설의 경험을 풍부하게 축적할 수 있었다. 작은 일까지 매일 기록하는 꼼꼼한 성격과 겸손하며 성찰적인 태도 덕분에 남의 장점을 수용하여 늘 나아가고자 노력한 윤치호의 연설에는 깊이가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 망명 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와 그 세속화된 형태의 미국의 시민종교(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은인 홀렌백이 '선교사가 된다면 대학교 학비를 대겠다'는 요청을 뿌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잊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그 자체가 사회운동을 대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때로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미국식 사유와 생활 방식을 조선에 이식하여 그 근본적인 급진성을 통해 사회운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146]
반면에 윤치호는 기독교 개종 이후 삶의 중심을 언제나 신앙에 두었다. 개종의 동기는 개인적 차원이었지만 개종과 동시에 민족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조선을 언제나 결부시켰다. 조선 문화에 깊게 뿌리박은 가족주의적 습속을 돌파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그 낡은 구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조선의 사회에 예수의 가르침을 설파할 책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종교와 민족을 하나로 놓고 사유하는 윤치호의 선지자적 태도는 독립협회 회원 및 참여 민중 대부분에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146]
서재필은 대를 잇는다는 개념 자체를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극도로 혐오하였다. 서재필은 문중에서 서재필이 아들이 없음을 염려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계획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쓸데없는 일들이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살아 있소. 이제 새삼스럽게 양자를 세운다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소이다."하고 거절해버렸다. 이어서 "이런 생각은 모두 고루한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사상을 길러가는 것이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할 수 있는 길이오.[116]"라며 "부지런히 일이나 하고 착실하게 살기 위한 새로운 힘을 연구하시오."라고 덧붙였다. 서재필은 후사가 끊어진다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문중에서는 서재필이 아들이 없어 후사가 끊어짐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114] 서재필의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임을 말해 주었다. 그는 이미 가족관념을 청산한 인물이었다.[115]
서재필은 서울의 친척집에도 다니지 않고 공무가 끝나면 조선호텔에서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116] 그가 귀국하자 서씨문중에서는 들끓기 시작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소란을 몹시 싫어하였다.[116] 친척들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 역시 친척들의 존재를 외면하였다. 서재필이 양자 입양을 거절하자, 그에게 종증손 중 한명인 서동규를 봉사손으로 입양하라는 문중의 권고가 있었지만, 서재필은 그 권고 조차도 물리쳤다.
서재필은 한국인의 가족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가족주의가 바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주의를 만드는 원인이며 이방인을 배척하는 근간이라 생각하고 끔찍히 여겼다. 서재필은 지나친 형식 위주의 완고한 족벌의식은 조국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116] 서재필의 이러한 풍모를 두고 그의 둘째딸인 뮤리엘이 후에 지적하여 말하기를 '파파는 심플맨이에요.'라고 하였다. 송건호는 서재필이 형식과 금전과 동양적인 가족 관념을 청산한 크나큰 인물이었다[116] 라고 칭송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재필은 탈조선화 된 인간이라 하였다. 서재필은 가족주의와 혈연에 대한 집착이 사회를 폐쇄적, 배타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봤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성재 이시영의 장례식 때 신익희가 장례위원장이었다. 이시영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승만은 빈소를 찾아 분향하고 상제에게 조의를 표한 후 돌아서다가 두 손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익희에게 "그래도 성재장은 이런 고몰고몰한 손자들이 있었구려"라고 하였다.[147]
신익희나 그의 비서 신창현에 의하면 이승만은 이시영의 손자들을 보더니 '눈귀에 다시 눈물이 지적지적하였다' 했다. 나중에 신익희는 비서이자 종손인 신창현에게 "그 어른 오랜 미국 생활로 아예 우리나라의 대를 잇는다든가 하는 종법 관념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을 줄 알았는데, 자기가 아들도 없고 손자조차 없음을 마음속 깊이 한으로 품고 계신 것이 역력히 보이더라."라고 했다.[148] 신익희는 이승만이 후사가 없음을 한으로 여겼다고 술회하였다.
1975년부터 서재필 기념재단이 건립되어 학생들의 장학금 지급, 장학 사업, 의료 지원 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1996년 4월 1일에는 한국 프레스센터 서울갤러리에서 한국프레스센터 등의 주최로 <서재필과 독립신문>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2004년부터는 서재필 기념재단에 의해 서재필의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수여되고 있다. 그가 만년에 거주한 저택인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제이슨 하우스는 딸 뮤리엘 제이슨이 계속 거주하였고, 남편 사별후 혼자된 장녀 스테파니 제이슨이 함께 살았다. 두 딸이 죽자 서재필 저택 제이슨 하우스는 한인사회에 의해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004년 서재필 기념관이 그의 저택 제이슨 하우스에 개관되었다.
2002년 4월 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그의 어록비가 제막되었다.[149] 어록비 전면에는 “합하면 조선이 살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요…”로 시작되는 76자의 글이 새겨졌다. 이 글은 서 박사가 미국에서 육성 녹음해 1949년 3.1 운동 3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공개된 연설문 ‘조선동포에게 고함’의 일부이다.[149] 서재필의 조선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육성 연설문 내용의 일부가 녹음되어 현재 전하고 있다.
2008년 5월 6일 워싱턴 DC 소재 주미 한국대사관 총영사관 앞에 서재필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서재필 동상 초석 정면에는 '최초 한국계 미국인―한국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개척자'라고 씌어 있다.[150] 전신 청동상은 이재길 전남대 미대 교수가 조각했다. 좌측 면에는 이은상 시인이 서 박사 생애를 압축한 한글 헌사를 담았고, 우측 면에는 서 박사 전기를 저술한 이정식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의 영문 헌사가 있다.[150] 2011년에는 서재필 언론문화상이 제정되었다.
1948년 7월 21일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는 10시 25분에 개표되어 11시 5분에 개표가 종료된다. 이때 서재필의 표가 나오자 윤치영 의원은 외국 사람에 투표할 수 없다며 무효 선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서우석 의원이 외국인에 대한 투표는 마땅히 무효를 선언해야 된다며 발언을 이어가게 되고, 다른 의원들도 가세하면서 장내소란이 이어졌다.
당시 국회에서 사회를 보던 김동원 부의장은 서재필 박사가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분명하지 않으니 오후에 결정하겠다고 하자, 서우석 의원은 서재필 박사가 군정의 최고의정관으로 미국인 신분으로 입국했다며 또한 그가 입법의원에 와서 정당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한 발언 중 '나는 미국 사람인 까닭에 조선에 와 대통령 될 수 없다고…… 다만 된다면 외국 사절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2000년에는 독립기념관 연구원 홍선표가 엮은 'My Days in Korea'가 발간되었다.[151] 이는 서재필이 1896년부터 1948년 사이에 국내외 신문과 잡지 등에 영문으로 발표한 수필 강연문 방송원고 등을 모은 것이다.[151] 2008년 5월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서재필 광야에 서다》(고유, 2008)가 출간되었다. 이는 곧 제1회 디지털 작가상 역사 팩션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의 종증손자 중 한 명은 유길준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한다.
서재필의 출생지는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동복군 문덕면 가내리 529(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9)의 이기대가이다. 아버지 서광효가 살던 본가는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1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었다. 방치된 서재필의 본가는 2006년 2월부터 논산시의 주도 하에 복원 사업이 계획[152], 추진되었다.[153]
2005년 3월 3일부터는 논산시에서 서재필 박사 추모제를 거행하였다.[154] 이후 매년 3월 3일 논산 연무읍에서는 서재필 추모제가 거행된다. 구자곡면 화석리 등에는 서재필의 부모 묘소와 형 서재춘 내외의 묘소가 소재해 있다. 본래 그의 가족들의 묘소는 육군훈련소자리 근처에 소재해 있었으며 어머니 묘소는 연무대 자리에 있었는데, 후에 논산 제2훈련소가 들어오면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옮겨졌다 한다.
외가인 보성군 용암리 529번지 이기대가 근처 문덕면 용암리 1024에는 서재필기념공원이, 문덕면 용암리 1026-1에는 서재필기념관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