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七 章 血盟三傑
운학은 멀거니 벼랑 꼭대기를 쳐다보면서 세상에서 아름답다는 형용사(形容詞)는 모두가 이 낭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상에서 어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서는 사람들이
『폐월수화(閉月羞花)』
달이 숨고 꽃이 부끄러워 할 정도로 아름답다.
『침어낙안(沈魚落雁)』
물고기가 보고 놀라 가라앉고 나는 기러기가 보고 떨어질 정도로 아름답다느니 하는 따위의 표현은 분명히 대상을 잘못 골라서 한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낭자는 운학의 품에서 반달 같은 눈을 살며시 떴다.
그 두 줄기의 눈길은 분명히 사람의 마음을 뇌쇄시키는 청춘의 원천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신비스러운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운학의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마와 규염객의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소리도 그의 귀에는 전연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품에 안긴 소녀의 가슴 뛰는 소리 뿐!
그의 눈에는 그 낭자의 얼굴이 몽롱하게 보이기 시작하니 그의 시선마저 흐려지는가 싶었다. 넋을 잃고 물끄러미 소녀를 내려다보니, 낭자의 얼굴은 차츰 요원의 얼굴로 변하여 보이기 시작한다. 운학은 생시인지 꿈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요가 아가씨! 아가씨였구려……』
이때 갑자기 사나운 사나이의 목소리가 찌렁찌렁 울려 왔다.
『에이, 이 젖비린내 나는 애 녀석아!』
운학은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다. 낭자의 얼굴을 보니 분명히 요원은 아니었다.
운학은 실망이 컸다. 품 안의 낭자가 요원이 아님이 못내 서운하였다.
순간,
『휙---』
하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세 사람의 그림자가 번개같이 벼랑 위에서 골짜기를 향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운학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소녀의 갈빗대를 문질러 그가 찔린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땅에 눕혀 놓았다.
운학은 몸을 바로 잡고 떨어져 내려오는 세 사람을 기다렸다.
『쏴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세 사람의 몸이 골짜기로 내려왔다.
그들을 알아본 순간 운학은 전신의 열기가 싹 빠지는 것 같았다.
앞장 선 두 사람은 분명히 무림쌍영이고 뒤따른 사람은 화산의 능상 노파였으니 그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에이 젖비린내 나는 녀석! 너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
운학은 비로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면서 능상 노파를 향하여 일 장을 쳤다.
능상 노파는 가볍게 막으면서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물러 선 능상 노파의 미간에 몇 줄기의 주름이 잡혔다.
『팍!』
하는 소리가 들려오니, 노파가 들고 있는 강철 지팡이로 땅을 친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 지팡이를 들어 한쪽을 가리키며
『어허어, 하마가 또 나타났구나!』
하고 소리친다.
옆에 서 있던 모든 사람의 눈길은 일제히 능상 노파가 가리킨 곳으로 향하였다. 거기에는 아직 홍안이 채 가시지 않은 준수하게 생긴 소년이 서 있었다. 그는 하마였다.
운학은 새삼스럽게 하마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은 붉고 백옥 같은 흰 이에 칼날 같은 눈썹, 별 같은 눈, 아까는 자세히 보지 못했으나 나이가 상당히 젊어 보이며 준수한 얼굴에는 아직도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아 보인다.
무림쌍영은 먼저 복파보에서 운학이 신권금강 황방륜을 죽인 사실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마라는 사나이의 솜씨가 대단히 매운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한편 운학은 지금까지 하마라고 믿고 있던 여러 사람은 젖혀 놓고, 능상 노파가 가리킨 하마는 밤 가시 같은 호랑이 수염이 나 있는 사람 옆에 서 있는 소년을 가리켰기에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오와 싸우던 신룡검객 하마는 교전이 끝이 났는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큰 목소리로
『노망한 할멈! 할멈은 여러 번 귀문도우두진(鬼門道右頭陣)의 술법을 희롱하여 이 하가(何家)에게 낭패를 보게 하였었지! 나는 지금 화산으로 할멈을 찾아가서 복수를 하려던 차에 난데없이 이 귀신같은 두 놈을 만나서 하루 종일……』
하며 옆에 있는 무림쌍영을 가리킨다.
무림쌍영은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철필수가 정작이 화를 내면서
『네 어린 놈, 넌 도대체 누구냐? 건방지게 어른들을 어리둥절하게 말라.』
하마는 히죽거려 웃으면서,
『소인이 바로 성은 하요, 이름은 마이니라, 공동파의 제자이옵고 조적(祖籍)은 호남성 악주(岳州), 나이는 열여덟이다.』
추운비도 화난 목소리로
『빌어먹을 자식! 누가 너절하게 그 따위 소개를 하라고 했나?』
철필수사는 정말 하마를 보자 저도 모르게 뒤에 서 있는 운학을 보고서 호통을 친다.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어느 파의 누구란 말이냐? 너는 설마 머리는 감추고 꼬리만 내놓고 다니는 거북은 아니겠지?』
운학의 낯색이 일순에 퍼레지기 시작하더니
『나는 전진파 제 三十三대 장문이로다.』
하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여러 사람은 복파보에서 운학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또한 청목도장이 도제 운학을 찾고 있는 것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청목이 찾고 있는 운학이라는 놈이 설마하니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젖비린내 나는 아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작이,
『그렇다면 누가 신권금강을 죽였나?』
운학의 매서운 눈초리가 정적을 노려보면서,
『나밖에는 또 없지 않은가?』
정작은 의혹의 검은 구름이 자꾸만 쌓여가는 것 같으면서 마음속으로
---어째서 철교룡 온가는 저 놈을 하마라고 소개하였을까? 하마라는 놈은 변신술에 능하다는데 이번에는 속지 말아야지!
운학은, 정작이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이면서 자기를 불신하는 태도를 보이자,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오른팔을 쭉 뻗으니 그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오는 붉은 장풍이 백옥색으로 변하면서 공중에 손바닥 모양이 새겨진다.
『윽! 옥현귀진(玉玄歸眞)이다!』
능상노파가 소리를 질렀다.
이 전진파 현문(玄門)이 지고(至高)의 내가무공(內家武功)을 듣기만 하다가 이때에 처음으로 보니 그 절묘함에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일제히,
『야---, 이 어린애 같은 놈아! 살인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옆에 섰던 능상 노파가 서슬을 시퍼렇게 세우면서
『비켜라. 이 노파님의 선견지명이 네놈이 전진파의 고수라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의 도제를 죽였느냐?』
운학은 이 말을 듣고 두어 마디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황방륜을 자기가 죽였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된 이상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문득 하마의 눈빛이 번뜻 빛났다. 운학의 뒤에 누워 있는 절색의 낭자에게 시선이 떨어졌던 것이다. 홀연 그는 대갈일성을 발한다.
『여러 대협, 영웅, 노선배께서는 왜 남의 낭자를 욕보인단 말이요?』
하마는 그 총명이 타인에 비교가 안 되리만큼 높은지라 낭자가 세 사람의 손으로 벼랑에 던져졌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능상 노파는 일순 놀라더니, 다음 순간 크게 노여움을 띠우면서,
『이 종년의 버릇을 내가 고쳐 주었을 뿐인데 왜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쏘아본다.
하마는 모든 사태를 깨달았음인지 남루한 옷매를 한번 고치고 나서 얼굴에 냉소를 띠운다.
『이 하가는 화산에 몇 수 비장되어 있는 장법(杖法)에 흥미가 나서 가르침을 받고 싶소!』
가르침을 받겠다는 말은 즉 도전하면 응하여 주겠다는 뜻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가만히 물러설 능상 노파가 아니었다.
능상 노파는 하마에 대한 노여움과 함께 운학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게 용솟음 쳤다.
노파는 하마를 노려보면서
『패군지장(敗軍之將)이 어찌 용(勇)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
하마는 노파를 조롱하듯이
『신권금강이 그렇게 함부로 까불어 대더니, 그 선생에 그 제자로군!』
화가 치민 노파는
『곤장을 받아라!』
하더니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장풍(杖風)이 두 갈래로 나뉘어지면서 하마를 쳤다.
하마는 가볍게 일격을 막고 의연히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일진일퇴!
이 때 운학의 마음속에서는
---하마는 고의로 노파의 약을 올려놓았겠다. 내 쌍권(雙拳)을 휘둘러 노파를 치면은 비겁하다는 말을 들을 뻔 했는걸! 그러나 노파의 손속도 보통이 아닌데……
한참 생각에 잠겨서 노파와 하마를 바라다보고 있으려니까 정작이 음흉한 웃음을 띠우면서
『운가 요놈, 받아랏!』
운학이 깜짝 놀라서 손을 들고 적을 맞이하려 할 때 등 뒤에 가벼운 일격을 받았다.
운학은 이 때 몸에 공력이 충만하고 있었다. 온 몸이 마치 잔뜩 잡아당긴 활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등 뒤를 엄습하여 온 장풍은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기에 운학은 재빨리 손을 뒤집어 반격하여 주었다. 그가 손을 뒤집어 반격하는 동작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빨랐다.
등 뒤에서 공격하던 사람은 순간적으로 운학의 장풍에 잡혀서 꼼짝을 못하였다.
운학이 장풍에 잡힌 사람 쪽으로 뒷걸음질쳐 가서 덥석 손을 잡아 보았다. 부드럽고 매끄로운 촉감에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실신하여 누워있던 미모의 낭자였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홍조(紅潮)가 남실거리고 있었다.
운학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쳐서 그에게로 다가가니 그윽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낭자는 부끄러운 듯이 손을 움츠리면서 가볍게 말을 한다.
『고마왔어요! 저는 돌아가겠어요.』
말이 끝나자 낭자는 몸을 돌리더니 숲속으로 뺑소니를 쳤다.
낭자가 사라진 뒤에도 그 자태는 운학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그윽한 향기가 운학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운학의 귀에는 추운비 나적우의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아, 이 비린내 나는 녀석아! 너 한번 겨루어 볼 작정이냐? 어떻게 할 테냐?』
운학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몸을 휙 돌려
『좋다. 겨루자!』
그는 좌우의 손을 일제히 휘두르니 교묘한 장풍의 줄기가 맴을 돌면서 쏟아져 나왔다.
철필수사는 음흉한 냉소를 지으면서 몸을 옆으로 뽑아 운학의 일 장(一掌)을 맞았다.
운학은 또 다시 사람을 살상한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몸을 도사리고 공격을 회피하였다. 바위처럼 우뚝 서서 공격을 이리 저리 피하여 주었다.
그는 곁눈으로 능상 노파와 하마의 혈전(血戰)을 보고 있었다.
이 때 능상 노파는 본성을 발휘하여 강철 지팡이를 미친 듯이 휘둘러대니 하마는 거기에 말려들어서 수세(守勢)에 몰려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운학은 마음의 초조감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또한 심한 수법을 써서 그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다.
운학이 초조해서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침착한 목소리로 껄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하아하! 여러 놈이 한 사람을 치고 늙은이는 젊은이를 위압하고 있으니 이거 돼먹지 않았군!』
운학이 서 있는 바위 위로 번개같이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손을 번쩍 들어 무서운 장풍으로 능상 노파를 내려친다.
그러나 능상 노파의 실력도 대단하였다. 몸을 왼쪽으로 날려 장풍을 피하더니 손바닥을 위에서 아래로
『휘익』
하고 움직이면서 파도 같은 장풍을 날려 보냈다.
두 사람의 싸움은 당대 무림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손속이었다.
운학과 겨루고 있던 무림쌍영도 넋을 잃고 멀거니 그들의 싸움을 보고만 있었다.
이때,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쏴아---』
하며 날카로운 장풍이 능상 노파를 치니 노파는 몸을 비틀거리면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다. 보니 왼쪽 어깨까지의 옷소매가 잘라져 쭈글쭈글한 맨살이 나왔다.
이 뜻하지 않은 침입자가 능상 노파와 겨루는 초식은 정말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즉 장풍으로 상대방을 치는 것처럼 위장하여 거꾸로 상대방을 휘어잡는 초식으로 재빨리 바꾸는 술법인데 흔히 볼 수 없는 술법이다. 능상 노파의 노련한 솜씨로도 감히 피하지를 못하고 옷자락을 찢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능상 노파 자신도 습격하는 자의 공력이 자기 보다는 한 수 위라는 것을 자인하는 눈치였다.
운학은 저도 모르게 침입자의 공력에 놀라움과 존경심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 침입자의 얼굴 모습으로 봐서 나이가 대단히 어려 보았으나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마치 얌전한 선비와도 같이 생겼으니 그가 그렇게 무서운 공력의 소유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능상 노파는,
『이 놈아! 정말 지팡이 맛을 보려 온 거냐?』
노파는 마음속으로 한풀 꺾여 있으면서 그에게 지고 싶지가 않았는지, 위엄을 보이고 싶었는지, 소리를 버럭 질러 말을 하자 불의의 침입자는
『당신 생각이 옳다고 하여 둡시다.』
태연스러운 침입자의 대답을 듣고 난 능상 노파는 몸을 움직여서 공격을 시작하여 하자 갑자기 우레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가야, 자네가 훌륭한 무림의 의협이란 것을 믿고 말하겠다. 오늘 네가 다른 사람과 싸우려고 왔다면 나는 이 싸움에 참견을 하지 않겠다, 석 달 뒤에 내가 황산의 신녀봉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그리로 오려무나!』
하마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니 바로 그 규염객 안오였다.
안오라는 것을 알자 하마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놈이 내가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운가라는 성의 사나이도 오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하마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좋다. 이번 일을 설명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으니 三개월 뒤에 반드시 단신(單身) 찾아 가마!』
이 말을 들은 규염객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능상 노파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너는 三개월 뒤까지 목숨이 지탱할 것 같으냐?』
하마는 크게 웃으면서 대답을 회피하고 있으려니까, 불의의 침입자가 한발 앞으로 나서면서 능상 노파에게 공손히 읍하더니
『노선배께서는 본인의 우매함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운형(鄆兄)이 댁의 사문의 영도(令徒) 황방륜 소협을 살상했을 때의 목격자가 바로 저올시다.』
운학은 먼저부터 이 선비와 같은 침입자의 공력에 감탄하고 있던 차에 이 말을 듣고서는 그가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능상 노파는 이 선비와의 일 초에서 자신이 참패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니 분노와 수치감으로 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노파는 자기 자신 동요하는 기색을 억지로 감추면서도, 속으로는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더욱이 상대는 아직 아이티를 채 벗지 않은 어린 소년이 아닌가, 동자의 그 어디에 그토록 무서운 공력이 숨어 있었던가, 보면 볼수록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선비는 다시 입을 열고
『본인의 눈으로 그 당시의 정경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때 영도 황방륜께서는 생각을 잘못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능상 노파는 본래부터 속이 좁은 인물인지라,
『요놈! 함부로 흑백(黑白)을 떠들지 말아라!』
그러나 선비형의 침입자는 조금도 꺼려함이 없이 똑똑한 목소리로,
『본인 한약곡(韓若谷)이 비록 무명의 무리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허튼 소리라고는 해보지를 않았소이다.』
이때 성급한 무림쌍영 중의 추운비 나적우가 그의 성급함을 참지 못하고
『그렇다면 당신은 더 똑똑히 황노제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말을 하시오.』
한약곡은
『신권금강 황방륜이 운학을 궁지에 몰아넣고 먼저 손을 썼기 때문이오.』
운학은 마음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운가(鄆家)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고 있는 것이 궁금하였다.
한약곡은 나적우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신권금강은 단번에 화산의 경천일박(驚天一搏)의 술법으로 운형을 공격했습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초식을 형장께서 갑자기 만나셨다면 형장도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능상 노파는 버럭 화를 내면서
『뭣이 이놈!』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탁!』
하며 손을 뒤집어 장풍을 일으켜서 등 뒤의 향나무 한 그루를 두 동강이로 잘라 화풀이를 하였다.
그러나 청년 한약곡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러나 이 운형은 오직 삼분불양(三分拂揚)의 심법을 써 가면서 여러 번 피하고 있었을 뿐이었소.』
무림쌍영도 옛부터 같은 사제 황방륜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약곡의 이야기에 다소 수긍되는 점이 있었다.
그들은 눈길을 슬그머니 옆으로 옮겨서 운학을 바라보았다.
이 때 운학은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서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약곡은 다시,
『최후까지 참던 운형이 이런 말을 했소이다. 신권금강 가시오. 우리 싸우지 맙시다. 그러나 신권금강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옥쇄와전(玉碎瓦全)의 날카로운 초식으로 운형을 공격하였으니 여러분이 운형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말을 듣는 무림쌍영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옥쇄와전의 술법이란 화산파의 신권(神拳) 중의 최후의 초식인데, 그것은 양쪽이 모두 상처를 입고 나서 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상대를 죽여 버리는 극독(劇毒)에 달한 초식이다.
한약곡은 얼마동안을 조용히 서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하여 위기절정에 달한 운형께서 군산추체의 정묘한 초식을 발휘하니 그만……』
운학은 이 자세한 한약곡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가 자기 사문의 초식을 마치 자기 집 보물을 들여다보듯이 설명하는 것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크게 놀랬다. 도시 이 한약곡은 어떤 존재인가? 그러자 한약곡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간다.
『나는 오직 휑 하는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신권금강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설명은 자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초식의 설명까지 곁들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당시에 사건의 시종을 확실히 파악할 수가 있게 하였고, 또한 꾸민 데가 없어서 이야기에 조리가 서 있었고 이로정연(理路整然)하였다.
무림쌍영은 이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서 있었다.
자기가 보지 않고서는 이렇도록 자세히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림쌍영은 능상노파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은 좋겠느냐는 눈치를 보이고 지시를 기다렸다.
능상노파는 이야기가 끝이 나기가 무섭게 표독한 소리로,
『어린 녀석이 주책없이 지껄여대는구나. 자네 말대로라면 운가는 벌써 선천기공(先天氣功)을 단련했던 말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에는 한약곡도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저는 오직 휑 하는 거대한 음향만 들었을 뿐이요. 가 봤을 때는 이미 영도께서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능상노파 자신도 분명히 자기의 제자가 주책없이 까불다가 죽었으리라는 것은 추측이 갔다.
그러나 지금 여러 사람 앞에서 그것을 긍정할 만한 아량이 있는 노파가 아니다. 어떻게든지 생떼를 부려서라도 운학을 죽일 구실을 찾으려 하였다.
노파는 한 번 껄껄거리고 괴상한 웃음을 웃더니
『흥 전진파의 고도(高徒)! 선천기공이라! 복파보에서 허세를 부리던 늙은이가 알고 보니 빈껍데기였댔구나. 그 청목도장 같은 놈이 무슨 덕행이 있었겠나!』
노파는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면서
『운가야! 네가 만약 선천기공을 써서 저기 석순(石筍, [註] 돌고드름의 일종)을 격파한다면 내가 뒤도 안 보고 도망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은 너는 한낱 거리를 방황하는 무뢰배(無賴輩)에 지나지 못하니 내가……』
태연하게 이런 독선적인 이야기를 퍼부을 수 있는 그를, 나이의 탓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았다.
그러나 노파는 원래가 교활하기로는 남에게 뒤지지 않기 때문에 운학이 벌써 청목도장에서 선천기공을 배운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그가 저렇게 거대한 석순을 잘라 버리지는 못하리라는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때 갑자기 천지를 요동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니
『이 노망스러운 할멈아! 그따위 소리에 놀랄 사람이 어디 있는 줄 아느냐?』
소리를 지른 사람은 바로 신룡검객 하마였다.
이 하마의 한 마디는 능상노파의 꿍심을 깨뜨려버렸다.
능상노파는 멈칫하였으나 못들은 척하고서는 운학을 바라보면서,
『운가야! 너 도대체 해 낼 자신이 있느냐? 없느냐?』
운학은 가벼운 미소를 띠우면서,
『그까짓 것 어려울 것 없지!』
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의 옷이 떨리더니 한 가닥의 도가(道家)의 선천기공이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휭!』
하는 소리를 내면서 한 가닥 바람이 일더니 멀리 떨어져 있는 방대한 석순은 드디어, 산산조각이 나며 돌 부스러기가 소나기 쏟아지듯 한다.
천하를 뒤엎는 무림 중의 인물들도 십 년의 선천기공이 이미 절전(絶傳)되었다고 여겨 왔으나 오늘 운학의 몸에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고 크게 놀랬다.
능상노파는 이 모양을 보고 얼마동안을 멀거니 서 있다가 억지로
『흥!』
하는 콧소리를 남긴 채, 긴 지팡이를 거두고서는 몸을 돌려 엎어지며 고꾸라지면서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철필수사 정작과 추운비 나적우는 더욱 간이 콩알만 하여지고 간담이 서늘하여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靑山不改 綠水長流!(청산은 변하지 않고 푸른 물은 오래 흐른다. 오늘 우리는 물러가 주마!)』
이렇게 한 마디 하고는 역시 꽁무니를 빼서 도망쳐 버렸다.
한약곡은 이 때 온 하늘을 뒤덮고 있는 먼지와 돌가루를 바라보면서 백석(白晳)같은 얼굴에 일종의 형용하기 어려운 신색(神色)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운학은 유유히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어
『이젠 오해가 아주 풀리니 속이 시원하군! 하마는 정말 좋은 사람이더군! 내가 위급하여지자 앞장서서 능상노파를 약을 올려 나의 위기를 모면케 하여 주었고 또 이 한약곡 역시 나를 위하여 지난 일을 설명하여 오해를 풀어 주었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또 있나!』
이 때 하마가 큰 소리로
『운형의 선천기공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절학(絶學)이라 하겠습니다. 하마라는 이름이 남의 위명(僞名)을 쓰고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으니……』
운학은 하마와 한약곡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운학은 자기가 하마의 이름을 잠시나마 도용(盜用)하던 일을 생각하여
『소제가 고약한 짓을 하여 하형에게 누명을 쓰게 하였으니 마음속에서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약곡이 호탕스럽게 웃으면서 운학의 말을 가로막고
『소제와 운형, 한형을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구면 같구려! 운형이 마지못하여 황방륜을 죽였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요!』
하마는 나이가 몹시 어렸다. 젊은 사람끼리 서로 뜻이 통하자 흉금을 터놓고 웃고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한형께서 방금 쓰신 그 솜씨는 정말 훌륭합니다그려! 어느 사문(師門)이신지?』
한약곡이 웃으면서
『소제의 몇 수 조잡한 공력이 어찌 명문대가의 전수(傳授)라 하겠습니까?』
운학은 천성이 솔직하고 곧은지라 크게 웃으면서,
『한형께서는 어떻게 소제의 천성(賤性)을 아십니까?』
한약곡이 웃으면서,
『운형의 성함이 천하에 떨치니 자연히 소제도 알게 되지 않았겠소!』
운학은 늠연히 한약곡을 바라보다가 눈이 그와 마주 치자 한약곡이 싱긋 웃으니 마음에 선뜻함을 느꼈다.
한약곡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우러나오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마는 본래 총명과 기지가 바른 사람이라서 급한 어조로,
『오늘 이렇게 셋이 만나니 평생에 잊지 못할 날인가 하오. 소제가 한 잔 사고 싶어지는군요!』
그는 껄껄대고 웃더니 다시
『객(容)은 있는데 술이 없고 술이 있다 해도 안주가 없으면 취하여 무엇 하겠소!』
말하며 웃는 그의 태도에는 호기(豪氣)가 가득 차 있었으니 유아독존(唯我獨尊)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하마는 남루한 옷 주머니 속에서 작은 술병을 꺼내면서,
『소제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배웠으나 신통하지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술의 쓴 맛에 재미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이 호로병(葫蘆甁)의 미주(美酒)는 양은 적습니다마는 적어도 오십 년 이상 묵은 매화주(梅花酒)라서 성(性)이 사납고 순도가 높아 뒷맛이 더욱 향기롭고 강하니 두 분께서 맛보심이 어떠시오?』
운학은 옷이 남루한 청년을 바라보면서 비록 봉두난발(蓬頭亂髮)에 누더기 옷을 입었으나 얼굴에는 영기가 흐르고 두 눈에서는 슬기로운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서는 마음속으로
(---이 청년 기협(奇俠)은 이 세상풍진(世上風塵)을 풍류(風流)로 유회하겠는걸! 당대의 진짜 인걸이군!---)
한약곡이 빙그레 웃으면서,
『술이 있으나 안주가 없으니 좋지 못하군요! 소제가 한 가지 안주를 진헌(進獻)하겠소이다.』
갑자기 그는 손을 뻗쳐 두 개의 돌을 집어 유성처럼 허공을 향하여 던지니 한 쌍의 들꿩이 푸드득거리며 땅으로 곤두박질하여 떨어졌다.
---이 사람의 내공의 힘은 보통이 아닌걸---
하마는 마음속으로 겁이 나면서도 몹시 기뻐하며
『소제가 언제나 거지들과 어울려서 지나는 동안에 규화계(叫化鷄)라는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웠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소제가 규화계 아닌 규화야치(叫化野稚)의 요리를 만들어 진상하오리다.』
세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깊은 정을 느꼈다.
사실 운학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약곡에 대하여 부단의 경계심을 갖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그 경계심은 봄날의 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세 사람의 대화가 쌓일수록 서로의 정리는 깊어만 갔다.
해는 어느덧 서산에 기울었는지 골짜기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하마가 일어서면서
『두 분께서는 저 쪽 바위 위에 올라가셔서 바위소금을 캐어주시오. 저는 이 두 마리의 들꿩을 요리하여 오겠습니다.』
화산 골짜기는 옛부터 바위 소금의 생산지로 유명하던 곳이었다.
운학과 한약곡이 한 주먹의 바위소금을 얻어가지고 돌아왔을 때 하마도 만면에 웃음을 띠우면서 뗄 나무와 축축한 진흙을 가지고 왔다.
하마는 진흙에 소금을 넣고서는 진흙으로 들꿩을 발라 모닥불 속에 넣고 굽기 시작하였다.
모닥불의 불꽃은 어두운 골짜기를 환하고 붉게 물들이며 타올랐다.
하마는 계속해서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집어넣으면서 익기를 기다린다.
불빛에 비친 하마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니 아름답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것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서로의 처지가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세 사람이 모두 적막한 방랑객의 심정이요, 둘째는 세 사람이 모두 불꽃과 같은 격렬한 호걸의 정과 웅장한 뜻을 가졌다는 점이다.
호로병의 술을 모두 비우고 두 마리 꿩도 뼈만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모닥불은 점점 꺼져 들어가기 시작하니 산골짜기의 한밤은 차가운 냉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 사이 모닥불보다도 더 세고 강하게 교차된 그들 세 사람의 우정은 냉랭한 대기의 싸늘한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약곡은 운학의 손을 잡고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醉惠挑燈看劍 夢回吹角速營 취혜도등간검 몽회취각속영
八百理分毫下軍 五十弦 塞外聲 팔백리분호하군 오십현 새외성
沙場秋點兵 사장추점병
취중에서는 등불에 비친 칼을 보고,
꿈속에서는 뭇 진영에 호각을 분다.
팔백 리 안팎은 휘하의 군대요,
五十현의 소리는 요새 밖에 울린다.
가을의 백사장에는 군사로 넘쳐흐르도다.』
운학은 웃으면서,
『우리 세 사람이 한 번 보자 구면 같고 형제 같으니 오늘 밤 지금부터 화산으로 놀러감이 어떨까요?』
하마는 손뼉을 치면서 좋다고 찬성을 하니 세 사람의 흥취는 최고까지 고조하였다.
한약곡은
『우리 세 사람은 날이 저문 것을 한탄할 지경입니다. 오늘 저녁 이 자리에서 이성(異姓)이나 형제의 골육을 맺음이 어떻겠습니까?』
운학은 호기스럽게,
『바로 내 뜻이 그러하오!』
하마는 의견을 말하기도 전에 향(香)을 삼고 초승달을 향하여 절을 하니 운학과 한약곡도 말없이 큰 절을 하였다. 하마가 낮은 목소리로,
『오늘 우리 세 사람은 이성(異姓)이지마는 형제의 의(義)를 맺겠나이다. 비록 세 사람이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지금부터 오직 동년, 동월, 동일에 죽을 것과 환난(患難)을 서로 돕고 재화(災禍)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이 맹세를 어길 때는 천지가 주륙(誅戮)할지니 황천후토(皇天后土)는 굽어 살피소서.』
이 세 사람은 반나절을 사귄 뒤에 바로 정중하게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었으니 한약곡이 큰형, 운학이 둘째형, 하마가 나이가 가장 어리니 막내가 되었다.
아마도 이 결의형제는 숙명으로 맺어진 연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한 번의 결의로 인하여 훗날 무림에 미친 영향은 컸으며 또한 운학의 일생도 크게 변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달빛은 대지를 비추고 한 더미의 모닥불은 차차 꺼져가기 시작하였다.
봄---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 있어서 환희의 계절이다.
언덕 위의 풀은 파릇파릇 새싹을 내밀었고 이름 모를 야생화(野生花)가 도처에 만발하였다.
들판의 좁은 길을 세 필의 준마가 질풍처럼 달리고 있으니 말 위의 기사는 한결같이 영준하기 이를 데 없고 그 기상이 또한 볼수록 늠름하다.
맨 뒤에서 달려오던 남루한 옷의 소년이 입을 열었다.
『큰형, 형이 말하는 사형영전(蛇形令箭)이란 도대체 어떤 인물입니까?』
세 사람 중에 얼굴이 흰 청년이 말고삐를 늦추면서,
『하삼제(何三弟), 너의 신룡검객이란 이름이 강호에 떨치고 있어 무림의 소식에 상당히 밝은 데도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 두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허나 이 영전의 주인은 바람과 같이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사나이라 합니다.』
하마는 대답하고 말을 달리면서 앞을 보며 무엇인가 생각을 하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어
『그 위인은 마음이 엉큼하고 솜씨가 매워서 화양(華陽)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백학파(白鶴派)의 늙은 무사 소문종(簫文宗)을 죽였답니다. 우리가 그를 쫓아 화양에 닿을 때는 벌써 뺑소니를 쳤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그의 자취나 그림자마저 찾아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중간에서 달려오던 사나이가 뒤를 돌아보면서
『우리들은 엊저녁 여관에서 말을 보느라고 잠시도 쉬지 못하였거니 그때 놈이 멀리 도망쳤는지도 모르겠군!』
그 중의 한 사람이
『어쨌든 상관없어. 우리는 그 놈의 정체만 밝혀내면 되는 거야! 자아 가자!』
이 세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결의형제의 의를 맺은 한약곡, 운학, 하마의 삼형제였다.
세 사람이 걸친 옷은 여전히 남루한 그대로였다.
오직 변한 것이 있다면 운학의 허리에 한 자루의 장검(長劒)이 꽂혀 있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세 필의 준마는 하늘 높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질풍과 같이 북쪽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야아! 개울이다. 말에게 물을 먹일 수가 있게 됐다.』
길 왼쪽에 한 줄기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약곡이 소리친다.
세 사람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 말에 물을 먹이기 시작하였다.
냇가에는 꽤 넓은 모래밭이 있었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바위가 흩어져 있어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하마는 알맞은 바위를 골라 자리를 정하고 앉으면서 나뭇가지로 모래밭 위에다, 언덕 위에 있는 고송(古松)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운학과 한약곡이 눈을 둥그렇게 떠서 그림을 보고서는,
『삼제는 정말 다재다능(多才多能)하구려! 이 그림으로 봐서 정말 당대의 화공에 못지않은걸!』
한약곡이 감탄하면서 말을 하니 하마는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겸연쩍은 듯이,
『저의 이 그림은 스승에게 이어받은 가르침도 아닌데, 이렇게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을까요?』
이 겸양스러운 말을 운학이 슬쩍 받아 넘기면서,
『자네는 대단치 않게 여길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로는 저 고송의 모양이 자네 그림만 못한 것 같으네. 고송의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가 남김없이 그림 속에 표현이 되어 있거든!』
하마는 과분한 칭찬의 소리를 듣고는 싱긋이 웃으면서 손끝으로 모래 위에 일주경천(一柱驚天)이라는 넉 자를 썼다.
한약곡이,
『삼제의 글씨 또한 절묘하기 이를 데 없군!』
그러나 운학은 깜짝 놀랬다.
글씨체가 많이 눈 익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하였으나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그 글자의 흔적, 그 자취, 어찌 그리도 눈에 익숙한 글인가---)
따그닥! 따그닥, 세 사람은 다시 말에 올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운학이 소리를 질렀다.
『저것 봐, 저게 뭐지?』
하마와 한약곡이 운학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앞에 보이는 소나무 가지에 두 개의 물건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세 사람은 일제히 말고삐를 당겨 번개같이 그 쪽으로 달려가서 자세히 보니 사람의 시체가 축 늘어져 걸려 있었다.
세 사람은 나무 아래로 뛰어 갔다. 두 구의 시체는 죽은 지가 꽤 오래 되어 보였다.
왼쪽 시체는 六十 정도의 노인이요. 오른쪽 시체는 三十여 세의 청년으로 보였다.
하마는 시체를 풀어 땅에 내렸다.
두 시체의 가슴패기에는 한결같이 붉은 핏빛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운학이 침통한 목소리로,
『막남(漠南) 금사문(金砂門)의 인장(印掌)이로군!』
한약곡은 의문스럽다는 듯이 그 노인의 늙은 몸을 더듬어 보니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쇳덩어리가 떨어진다. 운학이 재빨리 집어보니 짤막한 한연대(旱煙袋 = [註]쇠로 만든 연기통)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하마가
『철연옹(鐵煙翁) 장경(張卿)이다!』
『그렇다면 옆의 젊은 사람은 그의 문하생에 틀림없겠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가 한참 무엇인가 생각을 하더니
『장경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해서 금사문파 사람에게 주검을 당하였을까?』
하마가 멀거니 소나무 밑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깜짝 놀라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큰 소나무에는 사형영전(蛇形令前)이 박혀 있었다.
『우리 또 당했군!』
하마가 힘없는 소리로 말을 하자
『그렇지 않아! 이 두 사람이 사형영전 주인에게 맞아 죽었다면 그가 설마하니 혈인장(血印掌)의 전인(傳人)이 될 수가 있었을까? 요즈음 듣건대 화양파의 소문종(蕭文宗) 노무사의 무술은 소천성(小天星)의 장력을 써서 내장을 분쇄한다는데, 두 시체의 혈인장이 외문의 공력에 의한 것임을 볼 때 이 사형영전의 화살은 두 시체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지도 몰라!』
듣고 있던 한약곡이,
『이 시체는 죽은 지 오래인가?』
하마가 시체의 손을 이리 저리 만져본다.
『어젯밤에 죽었군!』
『더 머물 수 없네. 우리는 앞으로 가세.』
삽시(霎時)에 황진이 하늘을 찌르듯 치솟고 세 필의 준마는 광야의 좁은 길을 달려 다시 북쪽으로 향하였다.
말 위에서 운학이
『삼제, 너는 강호에서 견문이 가장 높지 않은가? 네가 듣기에는 당대무림에서 누가 가장 고수라고 하던가?』
『나 역시 그리 똑똑히 알지를 못합니다.』
세 사람은 묵묵히 광야를 달리니 어느덧 산길로 접어들면서부터 날이 어둡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생각났는지 하마가
『아! 이상하다 이상한 걸』
한약곡이 하마를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삼제, 무엇이 이상하다는 거야!』
『형, 그 철연옹의 몸을 묶었던 밧줄을 기억하십니까?』
운학은 새삼 기억이 난 듯이
『응, 기억하고 있어. 그 밧줄 참 이상하더군! 흰색과 붉은 색의 삼줄이던데, 나도 보고 참 이상하다고 느꼈어!』
『나도 눈에 익은 끈이더군! 분명히 어디선가 본 기억은 나는데……』
하마의 말을 듣고 운학이 급히 다시 묻는다.
『어디서 보았단 말인가?』
하마가 재촉을 받자 머리를 갸우뚱거리더니
『음! 농남(隴南) 천전교(天全敎)의 총타(總舵) 중에서 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천전교?』
천전교는 요사이 새로 일어난 무림의 신비한 조직이었으며 교주가 누구라는 것을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교주의 사람들은 모두 무공이 고명한 인사들의 모임이라 이 년 만에 무림에서는 대교(大敎)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룡검객 하마는 단검(單劍)으로 천전교의 사대당주(四大堂主)를 죽였으니 무림에 큰 파문을 던졌음은 물론, 이로 인하여 무림에 하마의 이름이 크게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한약곡의 시선이 이상스레 빛을 발하며
『그 사형영전의 주인이 천진교의 사람인지 모르겠군!』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마는?』
하마가 한약곡의 말이 맞는다고 주장을 하였으나 정확한 것을 알 길이 없었다.
세 필의 말이 산허리에 도달하였을 무렵, 앞에 세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하마는
『우리 각기 앞에 보이는 세 갈래의 길로 한사람씩 흩어져 가면서 이 신비에 쌓인 영전의 비밀을 캐어내야 합니다.』
한약곡이,
『누가 이 길과 똑바로 뚫린 길로 가겠니?』
『좋을 대로 하시오. 난 왼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세 갈래의 길은 앞으로 가면 반드시 합쳐져서 다시 한 가닥의 길이 될 것입니다.』
하마가 예상을 말하자 한약곡이 실수하여
『합쳐지지 않아!』
하마가 기이하다는 듯이
『어째서 그렇게 보십니까?』
의견의 대립이 생기자 운학이 참견하면서
『그까짓 것 상관할 것 뭐 있소. 내가 가운데 뚫린 길을 가리다.』
『자아 그렇다면 우리 가자!』
한약곡이 원기 백 배 오른쪽으로 굽어 말을 달리니 운학은 가운데 길로 접어들며 채찍을 높이 휘두른다.
얼마 가지 않아서 길은 점점 험하여지고 좁아졌다.
말은 헉헉 하며 억지로 앞을 향하여 달리더니 별안간 앞발을 번쩍 들고 요란하게 울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운학은 깜짝 놀라 앞을 살펴보니 길이 뚝 끊어져 버리고 눈앞에는 하늘까지 치솟은 절벽이 보였다.
말이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음을 알자 운학은 말에서 내린 다음에 말의 잔등을 가벼이 두드리면서
---너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하기가 무섭게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운학의 몸은 절벽을 타고 위로 솟아 산언덕에 올랐다.
산언덕에서 본 경치는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을 이루고, 지금까지 맛보지 못하던 감상에 운학을 몰아넣어 버린다.
좌우 양편에는 빽빽하게 숲이 우거져 있었고 금빛 석양이 나무 위를 비춰서 금빛 바다를 이루니 사람으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번뇌를 느끼게도 하며 또한 한 가닥의 우울한 심정에도 빠지게 하여 자기를 망각하여 버리는 것 같아서 불길한 예감에 빠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