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 이덕형의 생애와 흔적을 찾아서(上)
-국난극복의 ‘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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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 이덕형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집터임을 알려주는 유허비(오른쪽). |
한음 이덕형(1561~1613)은 이름만 나오면 바로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과 연결되는 학자요, 문인이었다. 겸하여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던 정치가로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두 정치가의 충성심과 지혜 때문에 망하기 직전의 나라가 중흥(中興)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음은 현재까지의 정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한음의 5세 연상이었고, 한음보다 5년 뒤에 63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음보다 10년을 더 살았던 분이다. 한음 연보의 기록으로 보면 한음이 18세인 때 23세의 오성과 친구로서의 사귐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만난 친구가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우정을 키우면서 죽는 날까지 서로를 가장 잘 알아주던 지기(知己)였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과 협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 나라가 건져질 수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의 우정과 지혜의 공유만으로도 한 편의 역사서가 이룩될 수 있는 멋진 자료다. 이 나라의 역사에 그런 멋진 인간관계가 실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조금 높은 지위에 있다는 사람들, 조금 학식이 있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일수록 서로를 시기하고 반목하거나, 어느 새 서로를 등지며 불화와 배신을 일삼으며 추악한 비방과 악담으로 조용할 날 없이 싸움질만 하는 사례를 볼 때, 오성과 한음의 멋진 우정의 유산은 정말로 값지고 본받아야 할 시대적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성의 유적지를 찾은 다음 바로 한음의 생애를 되짚어 보면서 그의 유적지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인들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광해군의 패악스러운 정치가 계속되자 강력히 항의하던 한음 이덕형은 탈관삭직되어 사제(私第)가 있던 당시의 광주(廣州) 땅,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칩거하고 있다가 병이 도져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광해군의 패정에 항의하다가 양주의 노원(蘆原)에 물러나 있던 오성대감 이항복은 한음의 부음을 듣고 곧바로 사제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哭)하고 한음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그들은 아름다운 정을 잊지 않았으며, 무덤 속에 넣은 한음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백사는 한음의 높은 학덕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일로 그들의 우정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 한음의 가계
광주(廣州) 이씨인 한음의 가계는 대단한 명문이다. 고려말엽에 포은 정몽주와 함께 했던 이집(李集)은 호가 둔촌(遁村:오늘의 둔촌동에서 살았다)이며 직신(直臣)으로 큰 명성을 얻었던 분이다. 그 아래로 이인손(李仁孫)·이극균(李克均) 부자는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이극균은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참살당한 어진 정승으로 세상에 유명했으니 그의 5대손이 바로 한음이다. 여러 곳의 원님을 지낸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琠)의 누이동생인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당시의 서울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특한 두뇌를 타고난 한음은 소년 시절에 벌써 글 잘하고 얌전하기로 이름 났고 그를 만나본 어느 누구도 그의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4세 때에 외숙인 영의정 유전의 집이 있는 포천의 외가에서 지낼 때 당대의 글 잘하기로 이름 높던 양사언(楊士彦)·양사준(楊士俊)·양사기(楊士奇) 형제들과 어울렸다. 양사언의 시에 화답하여, “들은 넓어 저녁빛 엷게 깔리는데 / 물이 맑자 산그림자 가득해라 / 녹음 속에 하이얀 연기 이는데 / 아름다운 풀언덕에 두세채 집이로세(野闊暮光薄 水明山影多 綠陰白煙起 芳草兩三家)”라고 읊자, 봉래 양사언은 “그대는 나의 스승이지 맞수가 아닐세”라고 말하며 뛰어난 한음의 글 솜씨에 탄복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면서, 한음의 시는 조선시대에 계속 교과서에 실려서 인구에 회자하는 시가 되었다.
# 31세에 대제학에 오르다
어린 시절부터 시 잘하고 글 잘 짓던 한음은 18세에 생원시에 수석하고 진사시에는 3등으로 합격하여 온 나라에 이름을 펄펄 날렸다. 17세에 뛰어난 예언가(豫言家) 토정(土亭) 이지함(李之함)의 눈에 들어 토정의 조카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산해는 당대의 문장가이자 영의정으로 한음의 장인이 되었다. 관상을 잘 보던 토정이 한음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을 예언하면서 사위로 삼으라고 권하여 조카인 이산해가 한음을 사위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그대로 전해져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마침내 20세에 문과에 급제하는데, 이때에 25세인 백사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했고, 한음의 집안 형님인 이정립(李廷立 : 뒤에 광림군(光林君)에 봉해지고 참판에 오름)도 급제하여, ‘세 이씨’가 바로 그들이었다. 동방(同榜)으로 급제한 이 세 사람은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함께 옥당인 홍문관에 들어가 승승장구로 벼슬길이 트이게 된다.
등급이야 정승의 아래이지만 선비들을 통솔하고 학술과 문장의 주도권을 쥔 대제학이라는 벼슬은 조선 시절에는 선비들이 가장 선망하는 벼슬이었다. 판서급의 지위로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에도 능해서 만조백관의 추앙을 받아야만 그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대체로 노성(老成)한 벼슬아치들이 발탁되게 마련인데, 31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한음은 대제학의 지위에 올랐다. 나이도 젊고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듭 사양했지만, 예조참판에 겸직으로 임명되었으니 조선 500년 동안 31세의 대제학은 한음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만큼 그의 역량은 뛰어났고 학문과 문장도 그런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방증해주고 있다.
32세에는 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을 만났다. 좌의정으로 서애 유성룡이 있었고 도승지로 이항복이 일하고 있을 때여서 이들이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의주로 선조대왕의 파천을 감행하고 끝내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일을 그들이 수행했다. 백사 이항복은 임금과 함께 먼저 평양에 도착했고,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 그들과 담판하다가 혼자 남게 된 한음은 뒤에 혼자서 평양에 도착하자 숙소도 없어 백사의 숙소에 동숙하면서 전쟁에 대비할 전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감동적인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백사와 한음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마음 먹고 우선 명나라에 원군을 간청하는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의견을 모아 함께 건의하자 명의 원군을 청하기로 정했고 그 대표자로 한음이 선정되어 명나라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한음이 명나라로 떠나던 광경은 정말로 비장했다. 한음을 보내려고 남문 밖으로 나온 백사에게, 한음은 말이 한필이어서 하루에 이틀의 거리를 달리 수 없음을 한탄하자 백사는 타고 있던 말을 풀어주면서 “원군을 청하여 함께 오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쌓인 시체더미에서나 찾아야지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오”라고 간곡히 당부하자, “원병을 청해내지 못하면 나는 뼈를 반드시 중국의 노룡산 속에 묻고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오”라고 한음이 굳은 결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들 두 충신의 확고한 의지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하여 임진왜란의 급한 불을 어느 정도 끌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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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의 신도비명을 이가원 교수가 한글로 번역한 비문을 새긴 기념비. |
# 38세에 정승에 오르다
임진왜란의 참상은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다. 사실상 나라는 망한 상태였고 인민의 고통과 시름은 형언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명나라 군대의 힘으로 평양성이 탈환되고 끝내 한양이 수복되어 임금이 서울로 돌아왔지만 죽음의 도시인 서울은 사람이 살아갈 곳이 아니었다. 덕망 높은 신하들인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이 힘을 합해주고 백사와 한음이 손을 맞잡고 중흥의 일에 앞장섰기 때문에 그나마도 나라의 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란 중에 여러 판서를 역임하던 한음은 38세의 4월에 왕족 아니고는 처음으로 가장 젊은 나이에 우의정에 오른다. 이 일도 역사에 드문 일이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는 동안 숱한 모함과 반목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는 오직 나라와 국민을 살려내려는 하나의 마음으로 충성을 다 바쳤다. 정유재란까지 겹쳐 7년의 긴긴 전쟁을 대신의 지위에서 겪은 한음은 갈고 닦은 학문과 인품을 최대한 활용해서 국난 극복에 생애를 바쳤다.
광해군의 폭정을 만나 그는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나라에서 탈관삭직이라는 고난에 처해야 했다.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마련한 운길산 수종사 아랫마을인 송촌리의 사제마을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놓고 아직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유유히 흐르는 용진강(북한강)을 바라보면서 53세의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가까워오는 오늘, 우리가 찾은 송촌리의 사제마을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풍우에 시달려 부러지고 찢겨, 한 그루는 밑동만 겨우 살아있고, 한 그루는 그래도 노거수로 살아 황량한 마을에 한음이 살았던 집터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