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漢蘇齋集 序
신도비명병서 인종 현구 찬에서
거듭 희준 교수의 요구에 의해
ㅡ 복청희준교수
문혜공 6대손 영 의 유거지 백현의 백현일고 서문
한소재 문혜공 문집 편집 출판
참조해주시기 바람
[1]松京懷古 (悲松都詩)
五百年來王氣終 操鷄搏鴨竟何功 英雄一去山河在 (豪華盡) 人物南遷市井空 上苑櫻花(煙霞)微雨後 諸陵草樹夕陽中 秋風客恨知多少(我來此日偏多感) 往事悠悠水自東
[1]松京懷古 (悲松都詩)
오백년래왕기종 조계박압경하공 영웅일거산하재 (호화진) 인물남천시정공 상원앵화(연하)미우후 제릉초수석양중 추풍객한지다소(아래차일편다감) 왕사유유수자동
[2] 次鐵原聚錢州
世上難兼鶴錢州 此亭形勝解人愁 靑山似畵圍平野 錄樹含風動素秋 麗祖乘龍何渺渺 弓王失鹿亦悠悠 憑闌睠得胸中輍 雲表何須汗漫遊
[2] 차철원취전주
세상난겸학전주 차정형승해인수 청산사화위평야 록수함풍동소추 려조승룡하묘묘 궁왕실록역유유 빙란권득흉중욕 운표하수한만유
[3]憂嘆自吟詩
自從人道起於人
父子相傳到此身
我罪伊何天不弔
未爲人夫鬢絲新
[3]우탄자음시
자종인도기어인
부자상전도차신
아죄이하천불조
미위인부빈사신
[4]鐵原都護府)제영
靑山似畵圍平野
綠樹涵風動素秋
철원도호부제영
청산사화위평야
록수함풍동소추
[5]報恩縣題詠재영
蓐食離懷仁 行穿山萬疊 忽此見平野 曠然心己愜
舘宇正輸奐 群峰如拱揖 沃壤連千畦 民居得安業
又聞風俗淳 招携相挈榼 怳若桃源遊 重來恐迷入
羅代三年城 當時幾相襲 麗季海寇繁 于戈久末(戢)
如今聖澤深 高枕送伏獵 持節復何爲 空自馳原濕
보은현제영
욕식리회인 행천산만첩 홀차견평야 광연심기협
관우정수환 군봉여공읍 옥양련천휴 민거득안업
우문풍속순 초휴상설합 황약도원유 중래공미입
라대삼년성 당시기상습 려계해구번 우과구말(집)
여금성택심 고침송복렵 지절부하위 공자치원습
[6]加平縣 題詠
夙駕抱川逾屈坡 卸鞍朝宗成小歇 行穿亂山澗曲深 一路縈紆多曲折 縱然叱馭跋涉難 試到此縣心已豁
崢嶸華岳鎭其北 巖壑猶堆太古雪 支爲衆峰擁一縣 千態萬狀摠奇絶 長川演漾日澄碧 疑是中有蛟龍窟
四時朝暮勝致鐃 筆難摹寫口難說 我行信宿澹忘歸 相對不唯篘豢悅 居民淳朴亦可知 庭少牒訴靜無聒
直欲卜築脫名韁 卒歲逍遙弄風月 上有堯舜野無賢 豈同沮溺便永訣 明朝還旆入江塵 魂夢定勞尋舊轍
[6]가평현 제영
숙가포천유굴파 사안조종성소헐 행천란산간곡심 일로영우다곡절 종연질어발섭난 시도차현심이활
쟁영화악진기북 암학유퇴태고설 지위중봉옹일현 천태만상총기절 장천연양일징벽 의시중유교룡굴
사시조모승치뇨 필난모사구난설 아행신숙담망귀 상대불유추환열 거민순박역가지 정소첩소정무괄
직욕복축탈명강 졸세소요롱풍월 상유요순야무현 기동저닉편영결 명조환패입강진 혼몽정로심구철
[2] 次鐵原聚錢州
世上難兼鶴錢州 此亭形勝解人愁 靑山似畵圍平野 錄樹含風動素秋 麗祖乘龍何渺渺 弓王失鹿亦悠悠 憑闌睠得胸中輍 雲表何須汗漫遊
[3]憂嘆自吟詩
自從人道起於人
父子相傳到此身
我罪伊何天不弔
未爲人夫鬢絲新
[4]철원도호부
(鐵原都護府)제영 靑山似畵圍平野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47권 강원도(江原道)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 이행(李荇) 1969~1970 【제영】 산은 옛 나라 천년의 한을 머금고 강회백의 시에, “산은 옛 나라 천년의 한을 머금고, 구름은 긴 공중 만리의 마음을 안았네. 예부터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까닭이 있으니, 원컨대 전인의 잘못을 보고 미래와 현재를 경계할지어다.” 하였다. 지세가 험준한 나라가 몰락된 뒤에 조준(趙浚)의 시에, “지세가 험준한 나라가 몰락한 뒤에, 반천년의 문물(文物)이 발흥하는 때로구나.” 하였다. 푸른 산은 그림같이 평야를 둘렀고 이맹균(李孟畇)의 시에, “푸른 산은 그림같이 평야를 둘렀고, 푸른 나무는 바람을 머금어 가을을 움직이네.” 하였다. 매미가 교목(喬木)에서 울어 초가을이 움직인다. 이원(李原)의 시에, “풀에 묻힌 옛 수도(首都)에 석양이 밝은데, 매미가 교목에서 울어 초가을이 움직인다.” 하였다.
푸른 산은 그림같이 평야를 둘렀고, 푸른 나무는 바람을 머금어 가을을 움직이네. 靑山似畵圍平野 綠樹涵風動素秋
[5]보은현(報恩縣) 제영 욕양연천휴(沃壤連千畦)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6권 충청도(忠淸道) 보은현(報恩縣) 이행(李荇) 1969~1970 보은현(報恩縣)題詠
산천방불무릉천(山川髣髴武陵天) 권진(權軫)의 시(詩)에, “===.” 했다. 옥양연천휴(沃壤連千畦) 이맹균(李孟畇)의 시(詩)에,
@2 집일본 한소재를 읊은 시
@. 李孟畇 大卿母氏 輓詞
(獨谷 <성석린> 集 上35)
백세토록 무위를 경계했는데 정녕 이별로의 연결을 촉탁했네
종자일로 멀다 이를 것이고 이웃을 옳게 선택하는 시로 돌아오네
百歲戒無違 丁寧囑結褵 云胡從子日 還是擇隣時
귤을 품을 생각 다시 못하더라도 일찍이 시를 그만둘 것을 들었어도
백살먹도록 천년에 한 연유되네 경맥의 한부분 정도 비고 잇슴의 마음을 알리
無復思懷橘 曾聞爲廢詩 仲由千載恨 空有寸心知
======
주1 어머니 생각에 귤을 먹지 않고 품어 가는 것
주2 자로 (공자의 제자)의 이름009 독곡의 李孟畇의 大卿母氏 輓詞
李孟畇大卿母氏挽詞 (獨谷 成石磷)
百歲戒無違 丁寧囑結褵 云胡從子日 還是擇隣時 無復思懷橘 曾聞爲廢詩。 仲由千載恨 空有寸心知。
@ . 敬齋집 권지 일 32 挽詩 (河敬齋 演)
보통 쓰는 덕과 보통하는 말은 세상에 드문바이요 재주가 많고 기예가 많기는 그대 같은이 드무네
庸德庸言世所希 多才多愛似君希
문중에 전하는 재상의 업은 태부에 올랐고 조부를 계승한 문장은 예위 (상서성) 를 맡았네
傳門相業登台府 繼祖文章典禮圍
곧은 줄기 바람소리가 비록 쓸쓸하나 가지에 내리는 비와 이슬은 오히려 꽃다우네
直幹風聲雖浙瀝 承枝雨露尙芳菲
우연히 우봉달에 시를 지어 작별하니 그 누가 분명히 길이 탄식하는 것 알리
偶然贈別牛峯月 雖識分明永歎(읊을탄)欷(흐느길欷)
라 했다
@ . 內舅李司諫。遷拜禮曹參議。 喜而有作。諱孟畇 泰齋集泰齋先生文集卷之一 詩○ 長篇 三十四首 1 送山陰趙使君 襄 之任
(10)重九日宴集戲作短歌錄呈李使君。
(11)內舅李司諫。遷拜禮曹參議。喜而有作。諱孟畇 내 외삼촌 사간이 예조참의의 벼슬에 제수되어 옮기니 기쁨이 있어 글을 짓다 휘 맹균 泰齋先生文集卷之一
내가 듣기는 주나라예조춘관은 吾聞禮曹周春官 오문례조주춘관。
천하의 문장이라야 절충한다하니 天下節文來折衷천하절문래절충。
국가참의로 명문문벌이되어 國家參議漢僕射 국가참의한복사。
높은 반열에 오르시다 職任淸要班序崇 직임청요반서숭。
공손히 예절바름으로인해 임금께서 뽑으셨도다 恭惟聖心重此選。공유성심중차선
늘 무리지어 함께상의하였고 서로같음을 도출하였네
疇咨每與論相同 주자매여론상동
지금 외숙부께서 새로이 벼슬을 제수 받으시매
卽今舅氏新得除。즉금구씨신득제。
옥패자락이 빛을 발하며 명예가 크게 융숭하구나
華裾玉佩光顯融。화거옥패광현융
어려운 갈림길서는 편수에 능통해 성은으로 다녀
亨衢着鞭行辟人 형구착편행벽인
========
주1 심지어 외숙이 司諫(從三品)에서 예조 참의(正三品)로 영전하는 일을 축하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기도 한다. 외숙이 더 좋은 자리, 더 높은 자리로 갈수록 궁지에 빠진 사람으로서는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할 것이다. 「八日歌. 奉舅氏」, 태재집 권1. 柳方善의 流配詩에 내재된 정서의 제 양상(金鎭鎬) 245
신채가 불꽃 처럼 빛나서 조정에 나가셨도다
神彩煥赫臨朝中。신채환혁림조중。
내가 한산 횡진강 주1 을 보건대
我觀漢山橫鎭江。아관한산횡진강。
숙기가 방박하여 주2 영웅이 나셨데
磅礴淑氣生英雄。방박숙기생영웅。
가정께서 한번 부르심에 목은께서 화답하니 주3
稼亭一唱牧隱和 가정일창목은화
사해를 분주하여 추풍을 다투니라
奔走四海爭趨風 분주사해쟁추풍
근원이 깊으니 가히 흐름이 마르지 않고
源深可見流不渴 원심가견류불갈
여경이 계속하여 끝이 없도다
餘慶衮衮長無終 여경곤곤장무종
병조예조 양참의 하니
兵曹禮曹兩參議 병조례조량참의
한집에 숙질이 동시에 영광을 얻으셨네
一家聯璧雙玲瓏 일가련벽쌍령롱
묘당에 앉아서 염매를 주4 읊었도다
繼坐廟堂調鹽梅 계좌묘당조염매
절은 나이에 삼공에 이르셨네
黑頭必將登三公 흑두필장등삼공
아아, 이 생질은 홀로 불행하여
吁嗟外孫獨不幸 우차외손독불행
흩날리는 쑥대처럼 타향에 떠돕니다
漂泊異鄕如飄蓬 표박이향여표봉
하늘인지 운명인지 누가 그리 만들었는지
天耶命耶誰使然 천야명야수사연
십 년이나 얽매어 새장에서 아파합니다
十載局促傷樊籠 십재국촉상번롱
군신의 만남은 예부터 어려운 줄 잘 알지만
端知際會古來難 지제회고래난
渭水에 사냥 안 했으면 태공망도 못 만났지요
不有渭獵無非熊 불유위렵무비웅
고관의 후한 봉록 어찌 그냥 받겠습니까
高官厚祿豈徒哉 고관후록기도재
임금 은혜 갚고자 마땅히 충성 다해야지요
欲報主恩當盡忠 욕보주은당진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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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한강 ㅡ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 ㅡ 을 보고 진강 ㅡ 양자강 남안에 있는 하항도시로서 대운하 교차지 로서 양주와 함께 발달한 도시
주2 숙기가 방박하여 ㅡ 자연의 맑은 기운 이 뒤섞여 떨어지는 소리
주3 雄창지화 숫컷이 한번 부름에 암컷이 화답하니
주4 염매 ㅡ 높은 벼슬 계속하여 이으시고 절개와 지조를 이어받아 보존하였다는 의미 열매가 익어서 떨어질 무렵에 소금에 절인 것
강과 산이 아득하고 길은 막혔고
湖山縹緲道途阻 호산표묘도도조
기러기 따라갈 날개가 없어 한입니다
恨無羽翼隨飛鴻 한무우익수비홍
언제나 가서 뵙고 이 마음을 말씀드리며
何時往謁說此懷 하시왕알설차회
祝壽하는 술 한 잔에 온갖 시름 씻으리까
壽觴一酌千愁空 수상일작천수공
時李種善拜兵曹參議 그때 이종선이 배병조참의에 제수되다
=========
49)「內舅李司諫, 遷拜禮曹參議, 喜而有作」, 태재집 권1.50)
“西伯將出獵, 卜之曰 ‘所獲非龍非彲非虎非羆. 所獲霸王之輔.’ 於是周西伯獵, 果遇太公於渭之陽.” 서백장출렵, 복지왈 ‘소획비룡비리비호비비. 소획패왕지보.’ 어시주서백렵, 과우태공어위지양.
「齊太公世家」, 史記 卷32. 大東漢文學 (第三十七輯) 246.
50)장편시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치 아이가 울며 보채듯이 마음속에 품은 바람을 쏟아내고 있다. 문왕의 고사로써 군신의 만남을 읊어 외숙의 영전은 임금에게 인정받은 것이라며 축하한다. 문왕이 사냥을 나가려 할 때 占辭에 말하기를,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며, 범도 아니고, 곰도 아니다. 얻을 것은 패왕의 輔佐로다.” 하는 말을 듣고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더니 渭水 북쪽에서 낚시질하는 太公望을 만난다.
50)즉 문왕이 사냥을 안 나갔으면 ‘곰 아닌 것[非熊]’, 즉 태공망을 못 만났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외숙에 대해 읊은 부분이지만, 윗사람이 찾아주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말하고 있다. 외숙의 榮轉을 축하하는 속에 자신의 상황을 끼워 넣어 해배를 도와줄 것을 읍소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나그네 시름겨워 잠은 적고, 몸은 비천하여 업신여김 많이 받네[客愁仍少睡, 身賤更多欺]”라며 처지를 한탄하고는, 바로 이어서 “절개는 서리 견디는 대나무에 비기고, 마음은 해를 향한 해바라기와 똑같건만[節擬凌霜竹, 心同向日葵]”이라 했다. 유배지의 시름과 수난 속에서도 자신은 절개와 충심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충심이나 임금의 은혜, 절개를 읊은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유방선은 자신이 처한 시대상황을 절실히 의식하고 있었음을 엿보게한다. 이런 類의 작품을 문면 그대로 이해하여 ‘憂國’이나 ‘忠情’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유방선은 이미 아버지의 죄에 연루되어 있었으므로 유배지에서의 이러한 협소한 思考와 運身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추호라도 불만스런 심정은 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시국을 읊거나 기타 정치・사회 문제를 읊은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읊는 데 국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처지를 호소하고 도움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내용은 임금이나 외숙에 국한되지 않고 벗에게 보내는 작품에도 많이 보인다.
每逢京使問平安 매봉경사문평안 서울 사신 매번 만나면 평안한지 물어보고
又見鄕人喜得官 우견향인희득관 마을 사람 만나면 자네 벼슬을 기뻐하네
재자고의소대용 재자고의소대용 才子는 본디 성대에 쓰여야 하고
逐臣唯待聖恩寬 축신유대성은관 쫓겨난 신하는 오직 임금 관용만 기다리네
單衣歲冷無由改 단의세랭무유개 홑옷이라 날이 추워도 갈아입을 수가 없고
麤飯朝飢不厭飡 추반조기불염손 거친 밥이라 아침 허기에도 실컷 먹지 못하네
窮達自知元有賦 궁달자지원유부 窮達은 본래부터 정해진 줄 아니
敢將衰朽欲彈冠 감장쇠후욕탄관 노쇠한 주제에 감히 장차 벼슬하려 할까51)이 시는 아마 趙瑞康에게 부치는 시로 보인다.
(12)短歌行。贈李正郞而立。名安柔。號西坡 (25)短歌行。贈吳仲安 欽老。
(26) 八日歌。奉舅氏。
4.八日歌。奉舅氏。
泰齋先生文集卷之一 / 詩○長篇 三十四首 26 柳方善의 流配詩에 내재된 정서의 제 양상(金鎭鎬) 245
주1 이맹균은 유방선이 영천에서 지낼 때 知永川郡事를 맡은 적이 있었다.
작년 팔일은 경락 (지명이름)에 있었고
去年八日走京洛 거년팔일주경락
금년 팔일은 유락에 있도다
今年八日在流落 금년팔일재류락
작년 팔일간은 술에 많이 취했더니
去年八日醉團圝。거년팔일취단란
금년 팔일간은 취하지 않했도다
今年八日苦寂寞。금년팔일고적막
백년 팔일은 능히 어떻게 하며
百年八日能幾何。백년팔일능기하
수리광음을 주2 망각해야 겠도다
愁裏光陰都忘却。수리광음도망각
가슴속에 광기가 남아 있어
胸中但有狂氣餘。흉중단유광기여
제영함으로 어찌 미학을 구차이 하겠는가
題詠何曾拘美惡。제영하증구미악
옛일의 감회에 노래 지어 외숙께 드리니
感舊作歌獻舅尊 감구작가헌구존
잠시 멈춰 淸覽하시고 제 말씀 들어주소서
倘留淸覽聞吾言 당류청람문오언
저작년 갑신 여름 팔일 동안은
曩在甲申夏八日 낭재갑신하팔일
책상을 지고 양촌 선생을 찾아 뵈었네
負笈始謁陽村門 부급시알양촌문。
구의 강미해서 함장 주3 으로 모셨네
摳衣講磨侍函丈 구의강마시함장
침잠네서 신혼가는 것을 알지 못했네
沈潛不知經晨昏 침잠불지경신혼。
문장은 바로 이태백 두자미 문풍을 좋아하고
文章直慕李杜風 문장직모리두풍。
도학은 정자 주자를 본받았네
道學竊效程朱論 도학절효정주론。
평생에 다행히도 큰 뜻을 품어
平生自幸抱大志 평생자행포대지
堯舜 시절 君民의 마음 그치지 않더니
堯舜君民心未已 요순군민심미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재앙을 만나
居然一朝竟遭罹 거연일조경조리
슬프게도 이 소원을 시험할 길 없었지요
怊悵此願無由試 초창차원무유시
저의 죄가 가득한 줄 본디 알기에
固知己罪當貫盈 고지기죄당관영
목과 머리 보존한 건 참으로 뜻밖이라
得保首領眞不意 득보수령진불의
하늘이 널리 베푸시어 仁으로 사물 기르시니
皇天誕施育物仁 황천탄시육물인
보잘것없는 제게도 죽음은 면하게 하셨지요
致令微軀免誅死 치령미구면주사
=======
주1 그 상대는 바로 외숙인 李孟畇이었다. 그는 목은 이색의 손자이며, 서론에서 소개한 유방선의 외조부 李鍾德의 아들이다. 이맹균은 유방선이 영천에서 지낼 때 知永川郡事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영천에 유배된 유방선으로서는 더욱 도움을 청하고 싶고, 또 청하기에도 좋을 여건이었다. 외숙에게 처지를 호소하는 시가 4수 나오지만, 외숙은 도움을 주지 않은 것 같다.
주2 근심속 헛된 세월
주3 함장(선생)으로 추대하는 것
드디어 영천으로 가 쇠잔한 인생을 붙이고
遂向永城寄殘生 수향영성기잔생
땅이나 파면서 임금 은혜 갚으려 했지만
欲將耕鑿報君賜 욕장경착보군사
산 깊고 땅 구석져 사립문에 풀만 가득
山深地僻草滿扉 산심지벽초만비
읍내엔 아는 사람 한둘도 없고
邑中相識無一二 읍중상식무일이
客窓에 낮은 길어 무엇을 하오리까
晝長客牕復奚爲 주장객창부해위
겨우 하는 일이 사륙변려문 글 짓는 것뿐
只管儷六與騈四 지관려륙여병사
갑자기 골목에서 長明燈을 다투는데
忽聞閭巷爭明燈 홀문려항쟁명등
그걸 보니 도리어 당시의 일 생각납니다
見之却憶當年事 견지각억당년사
좋은 시절 만날 때마다 쉬이 서글퍼지니
每遇良辰易慘悽 매우량진역참처
시나 써서 무료히 客愁를 달랩니다
賦詩聊以慰羈思 부시료이위기사
48)
========
‘天下和同之象’ ‘천하화동지상’ 이라 하였다. 尙書注疏 권12.
46)
두 갈래 보리에 관한 古典의 기록은 많다. 그 중 後漢書 에는 漁陽太守 張堪이 狐奴에서 전답을 개간하여 민생을 안정시키자,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뽕나무에는 가지가 없고, 보리에는 이삭이 두 개씩 달렸다. 장군이 정사를 행하니, 즐거움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桑無附枝, 麥穗兩歧. 張君爲政, 樂不可支]”[상무부지, 맥수량기. 장군위정, 악불가지] 고 한 기록이 있다. 後漢書 권61, 「張堪傳」.
47)
“성주께서 새로 등극하시니 모두의 마음이 부절처럼 일치합니다. 종조(宗祧)가 끝내 기댈 것이고 사직이 길이 걱정 없을 것입니다. 덕은 이미 堯임금처럼 높고, 제도는 오직 순임금의 다스림을 본받으리다. 바라건대 毋不敬하사 만세토록 강토를 누리게 하소서[聖主新登極, 群情若合符. 宗祧終有賴, 社稷永無虞. 德已同堯峻, 文惟法舜敷. 願言毋不敬, 萬世享蘿圖].” [성주신등극, 군정약합부. 종조종유뢰, 사직영무우. 덕이동요준, 문유법순부. 원언무불경, 만세향라도]
태재집 권1.大東漢文學 (第三十七輯) 244
임금에게 아무 원망도 없이 은혜롭다는 점을 얘기하면서도 자신의 딱한 처지를 절실히 호소하고 있다. 게다가 충심도 함께 버무려져 있다. ‘大志’를 말하여 스스로의 능력과 꿈을 은근히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이 꺾이는 서러움을 부각시켰다. 만일 자신을 변명하고 합리화한다면 오히려 미움을 받을 수 있다. 지은 죄가 크다는 점을 자복하고 농사나 지으며 은혜를 갚겠노라 하고도 너무 궁벽하고 시름겨움을 또 늘어놓는다. 장편답게 시에 담은 내용이 사설처럼 구구하다. 그래서 시로서의 깊이나 함축과 여운은 별로 없다. 이런 시에서는 단순한 처지의 호소가 아니라, 해배의 도움을 바라는 절실함이 쉽게 포착된다.
심지어 외숙이 司諫(從三品)에서 예조 참의(正三品)로 영전하는 일을 축하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기도 한다. 외숙이 더 좋은 자리, 더 높은 자리로 갈수록 궁지에 빠진 사람으로서는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할 것이다. 48) 「八日歌. 奉舅氏」, 태재집 권1. 柳方善의 流配詩에 내재된 정서의 제 양상(金鎭鎬) 245
(27) 贈李秀才 (33) 戲贈朴竹隱
@ . 목은께서 손자 맹균을 읊은 시
집일 1
@. 진관사(眞觀寺)로부터 맹동(孟童)이 돌아와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낌이 있어 짓다.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 제10권 시(詩) 진관사(眞觀寺)로부터 맹동(孟童)이 돌아와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낌이 있어 짓다.
맹동은 글 읽던 곳으로부터 돌아오고 / 孟童回自書窓下
이 할아비는 금중으로부터 돌아와서 / 祖父歸從禁苑中
칠언 장구 율시를 암송하게 하였더니 / 暗誦七言長句律
양대 장원의 풍도를 멀리 이었네그려 / 遠承兩代狀元風
밤에 듣자니 말은 아직 번잡한 게 많았으나 / 夜聞言語猶多雜
새벽에 보니 얼굴은 이미 풍만해져가누나 / 曉看顔容已向豐
오직 원하는 건 너희들이 열심히 예를 지켜 / 且願汝曹勤守禮
한산의 남은 복이 무궁하게 되는 거란다 / 韓山餘慶儘無窮
한산은 긴 강가에 우뚝하게 자리했고 / 韓山突兀長江上
진포의 물은 큰 바다로 흘러들어가네 / 鎭浦朝宗大海中
향리에선 그 뉘 집이 숨은 덕을 쌓았던고 / 鄕里誰家積玄德
문장은 우리 이씨가 중원 문풍을 지녔다오 / 文章我李有華風
민가는 촘촘하나 지경은 더욱 후미지고 / 閭閻櫛比地逾僻
곡식은 구름처럼 쌓여 해마다 풍년인데 / 禾稼雲屯年屢豐
문득 왜구를 만나 지금 다 탕진했기에 / 却被東倭今蕩盡
액운이 장차 다하리라고 모두들 말하누나 / 摠言艱厄數將窮
[주-D001] 맹동(孟童) : 목은의 큰아들인 종덕(種德)의 소생으로 맹균(孟畇) 등 4형제가 있는데, 그중에 맹균을 가리키는 듯하다.[주-D002] 양대(兩代) 장원의 풍도 : 목은이 일찍이 과거(科擧)에 장원했고, 목은의 큰아들인 종덕(種德) 또한 과거에 장원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진관사(眞觀寺)로부터 맹동(孟童)이 돌아와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낌이 있어 짓다.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 제10권 시(詩) 진관사(眞觀寺)로부터 맹동(孟童)이 돌아와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낌이 있어 짓다.
@ 중손(仲孫) 맹균(孟畇)이 좌창동(左倉洞)으로 돌아오면서 인하여 그 외조댁(外祖宅)을 들르다.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 제14권 시(詩) 이색(李穡) 2000~2003
맹균이 하룻밤을 내 집에 와서 묵으니 / 孟畇一夜宿吾家
친애의 정 깊기도 해라 기쁘기 가이없네 / 親愛情深喜莫涯
외손은 꼭 성취할 것을 기대할 만하려니와 / 宅相必成眞可竢
문풍은 다시 떨쳐 다행히 어긋남이 없으리 / 文風復振幸無訛
좌창동은 멀어라 낙락장송이 무성하고 / 左倉洞遠雲松暗
삼현문은 높아라 저녁노을이 비껴 있네 / 三峴門高夕照斜
늘그막엔 아손들을 자주 보아야 하니 / 老境兒孫宜數見
모름지기 꽃이 피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 歸來須及未開花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 제14권 시(詩) 중손(仲孫) 맹균(孟畇)이 좌창동(左倉洞)으로 돌아오면서 인하여 그 외조댁(外祖宅)을 들르다. 이색(李穡) 2000~2003 맹균이 하룻밤을 내 집에 와서 묵으니 / 孟畇一夜宿吾家 친애의 정 깊기도 해라 기쁘기 가이없네 / 親愛情深喜莫涯 외손은 꼭 성취할 것을 기대할 만하려니와 / 宅相必成眞可竢 문풍은 다시 떨쳐 다행히 어긋남이 없으리 / 文風復振幸無訛 원문 이미지
@. 맹균(孟畇)이 왔다가 또 가다.
목은시고 제35권 / 장단음(長湍吟)
고공은 청요의 관직으로 대관을 또 논박하니 / 考功淸要駁臺官
그 직책에 어떤 이가 간담이 떨리지 않으리오 / 守職何人不膽寒
네가 모습은 의젓해도 입에선 아직 젖내가 나니 / 醞藉汝今猶乳臭
그래서 노옹이 성랑의 탄핵을 받아 주고 있단다 / 老翁甘受省郞彈
병났다는 내 소식 듣고 특별히 와서 보고는 / 聞吾病發特來看
보통 때처럼 날 대하고 그냥 훌쩍 돌아갔네 / 見我如常却去還
생각나네 선흥사로 임금님 피신하셨을 때 / 坐想禪興龍遯野
석양에 새 한 마리 아득히 사라지던 일이 / 斜陽飛鳥渺茫間
[주-D001] 맹균(孟畇) : 목은의 첫째 아들인 종덕(種德)의 둘째 아들 이름이다. 우왕(禑王) 11년(1385)의 진사(進士) 출신으로, 이때 관직이 고공사 좌랑(考功司左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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考考功淸要駁臺官。守職何人不膽寒。醞藉如今猶乳臭。老翁甘受省郞彈
聞吾病發特來看。見我如常却去還。坐想禪興龍遯野。斜陽飛鳥渺茫間。
@. 장단 현령(長湍縣令) 문군(文君)과 석벽에서 다시 노닐었다. 문군의 마중을 받고 물이 한데 모이는 상류까지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고 음식을 먹으며 즐기다가 늦게야 돌아왔는데, 이 자리에 맹균(孟畇)과 유기(柳沂)가 참석하였다. 이날 문생인 맹사성(孟思誠)과 이치(李稚)가 와서 소식을 알려 주기를, 대성(臺省)이 전의 일을 또 논핵하여 함창(咸昌)으로 부처(付處)하였다고 하였다. 목은시고 제35권 / 장단음(長湍吟)
장단의 현령은 풍류의 정취도 넉넉해서 / 長湍縣令足風情
노생 위로하려고 술병 들고 꽃구경 왔네 / 携酒看花慰老生
배를 타니 기분은 벌써 하늘 위에 앉은 듯 / 已信船如天上坐
사람도 거울 속을 지나는 착각이 들었다오 / 又疑人向鏡中行
그물에 물고기 펄떡펄떡 누가 즐겁지 않으리오 / 錦鱗掛網誰不樂
술단지에 밥알이 둥둥 흥분을 가누지 못하였소 / 綠蟻盈甌吾欲狂
해 저물어 집에 와서는 깊이 자성을 하였나니 / 日暮還家深自省
조물이 주고 또 뺏는 것을 다시 확인했으니까 / 乘除造物更分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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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長湍縣令文君。再游石壁。文君邀至上流合幷處。捕魚設食。晚歸。有孟畇,柳衍,門生孟思誠,李稚。來報臺省又論前事。赴處咸昌
여장단현령문군。재유석벽。문군요지상류합병처。포어설식。만귀。유맹균,류연,문생맹사성,리치。래보대성우론전사。부처함창
長湍縣令足風情 携酒看花慰老生 已信船如天上坐 又疑人向鏡中行
錦鱗掛網誰不樂 綠蟻盈甌吾欲狂 日暮還家深自省 乘除造物更分明
장단현령족풍정。휴주간화위로생。이신선여천상좌。우의인향경중행。
금린괘망수불악。록의영구오욕광。일모환가심자성。승제조물경분명。
@ 목은시고 제35권 / 함창음(咸昌吟)
伯孫孟畇。隨我南來。家人來報妹病殆甚。予勸之曰。兄弟天倫也。一死無由再見。汝宜急去。吾在此。如汝所見親戚滿鄕。日相從。何所慮。吾已老無他望。唯汝祖母尙未來耳。孟畇乃拜而去。獨宿一夜。因有感焉。明日乘醉。乃錄一篇。
백손(伯孫) 맹균(孟畇)이 나를 따라서 남쪽으로 왔는데, 그의 누이가 병들어 매우 위태로운 상태라고 집사람이 소식을 전해 왔다. 이에 내가 맹균에게 권하기를, “형제는 천륜(天倫)인데, 한번 세상을 떠나면 다시 만나 볼 길이 없으니, 너는 급히 가서 보도록 하라. 나는 여기에 있어도 네가 보다시피 친척들이 향리에 가득하여 날마다 상종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나는 이제 늙어서 다른 소망은 없다만, 단지 너의 조모(祖母)가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하였다. 이에 맹균이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하룻밤을 혼자 묵다 보니 느낌이 없지 않기에 다음 날 술에 취한 김에 시 한 편을 지어서 기록하였다.
세교는 이륜을 중히 여기고 / 世敎重彝倫
인정은 은의를 숭상하나니 / 人情尙恩義
이 두 길을 행여 벗어난다면 / 兩塗或泛駕
금수와 본시 다르지 않을 터 / 禽獸固無異
그래서 옛날 요순 시대부터 / 爰從堯舜來
대소에 아름답게 여겼느니라 주1 / 小大斯爲美
지친들끼리 서로 해친 일들이 / 至親有相殘
역사 책에 즐비하게 전해지기에 / 纍纍照靑史
늙은 내가 항상 마음 아파하면서 / 老我常痛心
책을 덮고 탄식하여 마지않았나니 / 掩卷歎不已
척령의 시를 주2 읊어 노래하다 보면 / 吟哦鶺領詩
지는 해에 슬픈 바람 이는 듯하였도다 / 落日悲風起
유씨 집안에 출가한 너의 누이는 / 汝之柳氏妹
일단 문상의를 주3 면하긴 했다 해도 / 旣免聞床蟻
병마에 얽힌 것이 일 년이 되어 가니 / 纏綿歲將周
병세가 자못 쾌하다곤 하지 못할 텐데 / 其勢殆不利
더구나 지금 너에게 특별히 알려 왔으니 / 況今特來報
빨리 가 봐야지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 汝行安可止
할아비가 혼자서 거한다는 이유로 / 毋以我獨居
우우의 정의를 주4 저버리지 말지어다 / 而墜友于意
이에 흔연히 행장 꾸려 떠났나니 / 欣然騰裝去
나의 손자는 과연 삼한의 군자로다 / 三韓一君子
일단 쫓겨난 할아비를 시봉한 뒤에 / 旣侍祖翁貶
친누이가 죽을까 걱정하며 떠났으니 / 又恐親妹死
이는 천리가 마음에 발한 것으로서 / 天理發於心
천년만년토록 전해질 일이로다 / 流光千萬祀
이에 내가 이 시를 지어 읊어서 / 我且題此詩
뒷날 사관의 자료로 제공하노라 / 採擇從史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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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래서 …… 여겼느니라 : 《논어》 학이(學而)의 “선왕들의 법도를 보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그래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이에 따른 것이다.[先王之道斯爲美 小大由之]”라는 말을 요약한 것이다.
[주-2] 척령(鶺鴒)의 시 : 형제간의 우애(友愛)를 읊은 노래이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급한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구절이 있다.
[주-3] 문상의(聞床蟻) : 몸이 허약해져 꼼짝하지 못한 채 병석에 누워 있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가 심장이 두근거리는 병을 앓으면서 병석에 누워 있을 적에, 침상 밑의 개미 기어가는 소리를 듣고는 소가 싸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聞床下有蟻動 謂是牛鬪]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84 殷仲堪列傳》
[주-4] 우우(友于)의 정의(情意) : 형제간의 우애를 말한다. 우우는 《서경》 군석(君奭)의 ‘우우형제(友于兄弟)’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 이 판서(李判書) 구직(丘直) 가 두 단지의 술과 백미 열 말을 보냈기에, 이렇게 감사하는 시를 지어서 맹균(孟畇)에게 읊어 드리도록 하였다. 목은시고 제35권 / 장단음(長湍吟)
늘씬한 키가 간짓대 같아 조정 반열에 우뚝 / 長身直幹秀朝班
공무에 엄격해서 사적인 청탁은 어림도 없지 / 莅事精强不得閑
빈궁한 사람 구해 주던 일 지금은 드물기만 하니 / 記舊贐窮今世少
먹을 것 없는 이 몸을 동정할 사람이 뉘 있으랴 / 有誰憐我食方艱
향기로운 두 단지 술에 정미를 한 하얀 쌀 / 朋酒吹香白粲精
명실상부하게 정과 기가 온몸에 도는구나 / 生精行氣實符名
쫓겨난 중에 기쁘게도 어진 분 음식을 받았으니 / 謫中喜得仁人饋
취하고 배부른 태평의 노래를 주1 부르게 해야겠네 / 醉飽應敎詠太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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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취하고 …… 노래 :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는 태평 시대의 기상을 읊은 시로, 음식을 대접한 주인에게 손님이 감사드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 “술로 벌써 취하였고, 덕으로 이미 배불렀네.[旣醉以酒 旣飽以德]”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判書 丘直。 送朋酒白粲十斗。以此爲謝。當使孟畇誦之。
長身直幹秀朝班。莅事精強不得閑。記舊贐窮今世少。有誰憐我食方艱。
朋酒吹香白粲精。生精行氣實符名。謫中喜得仁人饋。醉飽應敎詠大平。
@ 맹균(孟畇)에게 글을 읽히러 해안사(海安寺)로 보내면서, 앞서 장손 맹유(孟㽥)에게 글을 읽히러 진관사(眞觀寺)로 보낼 때에 지은 시운(詩韻)을 사용하다. 牧隱藁 牧隱詩藁卷之二十五 詩 送孟畇讀書海安寺。 用眞觀送長孫孟㽥讀書詩韻。
상응의 법칙 가운덴 두 마음이 없나니 / 相應法中無二心
대현들이 당일에 이걸 애써 찾았었는데 / 大賢當日苦相尋
누가 우세군으로 하여금 교화를 행해서 / 誰敎祐世君行化
해안사의 공덕 숲을 만들어 내게 했는고 / 化出海安功德林
送孟畇 讀書 海安寺
相應法中無二心 大賢當日苦相尋
誰敎祐世君行化 化出海安功德林
@. 松都懷古。次李孟畇韵。
止庵遺稿 (이철보(李喆輔) 冊一 원문이미지 [詩] b_071_004a
曆數其如五百終。當時謾費統三功。孱孫失政人心去。烈士殉身國事空。
燕語斜陽芳草外。鳥啼微雨上林中。연어사양방초외。조제미우상림중。
前朝物色惟明月。夜夜淸光廢堞東。전조물색유명월。야야청광폐첩동。
否德由來祿永終。創垂當日問何功。부덕유래록영종。창수당일문하공。
窮兵却昧文治重。事佛還敎伯業空。궁병각매문치중。사불환교백업공。
古寺鍾鳴殘照裡。荒臺薺合斷烟中。고사종명잔조리。황대제합단연중。
傷心善竹橋邊事。長使英名滿海東。상심선죽교변사。장사영명만해동。
松京懷古 (悲松都詩, 開城府題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맹전<畇>으로 표기하여 검색되지 않음>) 五百年來王氣終 操鷄搏鴨竟何功 英雄一去山河在(豪華盡) 人物南遷市井空
上苑櫻花(煙霞) 微雨後 諸陵草樹夕陽中 秋風客恨知多少(我來此日偏多感)
往事悠悠水自東 天地已歸三尺定 山河誰借一丸封 憑君莫問前朝師 江韓如今盡向東
@. 손자 맹균(孟畇)과 경동(敬童)에게 보여 주다. 牧隱藁 牧隱詩藁卷之三十四 詩 示孫孟畇敬童 이색(李穡) 1626
두 손자 잇따라 귀한 이름 얻고 나서 / 兩孫連貴名
편지 급히 보내고는 내 옆으로 쪼르르 / 馳書來我傍
서책에 새 옷을 지어 입히려고 하는데 / 欲作書冊衣
겉 종이가 두세 장쯤은 필요하다나요 / 表紙三兩張
요구하는 물건은 하찮기 그지없다 해도 / 所須雖甚薄
그 뜻이야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으리오 / 其志何可量
마음가짐을 바르게 함이 우선 첫째요 / 太上正心術
문장을 잘하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니 / 次乃能文章
끝내는 군자다운 유자로 우뚝 서서 / 終爲君子儒
우리나라를 혁혁히 빛내도록 하라 / 赫赫邦家光
노옹의 마음이 너무도 기쁜 나머지 / 老翁喜之甚
붓을 적셔 몇 줄의 시를 적어 보노라 / 濡筆題數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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示孫孟畇敬童
兩孫連貴名 馳書來我傍 欲作書冊衣 表紙三兩張 所須雖甚簿 其志何可量
太上正心術 次乃能文章 終爲君子儒 赫赫邦家光 老翁喜之甚 濡筆題數行
당(唐)나라에 들어가 곽자의(郭子儀)와 함께 안남(安南) 지방을 공략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원문 이미지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 제34권 시(詩) 손자 맹균(孟畇)과 경동(敬童)에게
@ 14. 치평요람 국조요람편 집일 3
【150】 그 뒤 선종황제(宣宗皇帝) 때 서원군(瑞原君) 이친(李𡩁)이 사은표문(謝恩表文)을 받들고, 도총제(都摠制) 이맹균(李孟畇)은 전문(箋文)을 받들고서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니, 【151】 서반(序班) 이첨상(李添祥)이 이맹균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 사람 가운데 심중(心中)에 1만 명을 당해 낼 병법(兵法)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맹균이 대답하기를, “섬나라 오랑캐와 야인(野人 여진(女眞))이 모두 와서 성심을 다해 복종하여 나라가 태평하게 된 지 오래니, 비록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니, 이첨상이 말하기를, “노왕(老王) 【노왕은 우리 태조(太祖)를 지칭한 것이다.】 이 바로 그 사람이다. 문무(文武)의 덕(德)과 재능이 세상에서 그와 필적할 자가 없는 대장군(大將軍)이다. 어떤 사람이 시켜서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까지 왔다가 바로 돌아갔으니, 참으로 우리 조정의 충신이다.”라고 하였다.
@ 1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본조
이종선(李種善) 이종학(李種學)의 아우이며, 나이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이계린(李季疄) 이종선(李種善)의 아들로서, 세조(世祖) 때에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 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무(恭武)이다. 이계전(李季甸) 이계린(李季疄)의 아우로서, 세조(世祖) 때에 정난 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에 봉해졌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에 이르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맹균(李孟畇) 나이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이숙치(李叔畤) 청백하고 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세종(世宗) 때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렀다. 이숙묘(李叔畝) 벼슬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이축(李蓄)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이훈(李塤) 이축(李蓄)의 아들이며, 성종(成宗) 때에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벼슬이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이르렀고,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이우(李堣)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며, 두 번 문과에 올랐고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는데 일찍 죽었다. 이파(李坡) 이우(李堣)의 아우이며, 나이 18세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갔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명헌(明憲)이다. 사람됨이 총명하였으며,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다. 이봉(李封) 이파(李坡)의 아우이며, 을유년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고,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고, 문장에 명성이 있었다.
『신증』 이언호(李彦浩)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제영】 산천잉수금유고(山川孕秀今猶古) 고려 김자수(金子粹)의 시에, “동국의 문장을 집대성(集大成)하였으니,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에 으뜸이었네. 산천의 품은 정기 지금도 예같으리니, 묻노니 어느 사람 그 이름을
진강연우심유적(鎭江煙雨尋遺跡)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목은 노야(牧隱老爺) 높은 명성 이 고을에서 비롯하여, 청년에 북경 유학[北學]하여 과거에 올랐네. 대대로 잠영(簪纓)인데 시서(詩書)가 있고, 역사에 빛나는 사업은 상세하다. 두자미(杜子美) 웅(雄)한 시(詩)는 우주에 훤전(喧傳)되고, 사씨(謝氏) 집 꽃다운 풀 지당(池塘)에 가득하다. 진강(鎭江) 연우(煙雨) 속에 남긴 자취 찾으니, 다만 저 고깃배가 나루 곁에 떠있구나.” 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국조보감 제7권 세종조 3 21년(기미, 1439) 신숙주(申叔舟) 등 1994~1996 국조보감(國朝寶鑑) (1) 21년(기미, 1439) ○ 상이 이르기를, “종실의 하인들이 민간에서 횡포를 부리는데, 이것은 다른 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금지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종정시(宗正寺)가 친속(親屬)들을 관장하여 잘못을 규찰하였으나 앞으로는 종친의 과실을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규찰하여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領議政黃喜、右議政申槪、贊成李孟畇ㆍ成抑、參贊河演等議啓曰: "先王義刑義殺, 所以刑一人而懼億兆之人, 不敢肆意於爲惡, 則是乃正直輔翼, 而若其有常之性也。 是知輕刑, 適所以惠姦寇害善類, 而有害於治道。 朱文公曰: ‘俗儒姑息之言, 俗吏自營之計, 一以輕刑爲事, 然刑愈輕而反以長其悖逆作亂之心, 使獄訟愈繁。’ 豈不信哉? 今好生至仁, 出於天性, 每當斷刑, 特加欽恤, 反覆考究情法輕重, 以求生理, 或有纖毫未盡者, 輒從輕典, 故當死而原免者甚多。 若更求活法而輕之, 則深恐人皆輕犯, 作惡日滋矣。 且《大明律》與《唐律》, 竝無此三罪可原之文, 舍律而行, 亦乖於理。 若如聖敎, 因飢竊盜, 非常時作賊之比, 姑可以情原其輕重大小而處之, 至於三犯, 則豈宜輕恕? 昔鄭 子産有火烈民畏水弱民狎之訓, 而太叔不從, 卒有興兵攻盜盡殺之擧, 輕刑之弊, 古亦有之矣。 大抵盜賊被獲者, 十無一二。 一人作賊, 雖至累次, 未發覺者常多。 雖或發覺, 而累次抵罪者, 亦不肯止, 循至三四犯, 今皆免死, 被盜之人曰: ‘何不殺盜, 使我破蕩家産而至於飢寒乎?’ 痛憤之甚也。 人旣痛憤, 天必厭之, 天必厭之, 則災變隨之矣。 今犯死罪者, 率多頑凶悍惡, 而未見良善之人邂逅犯之者也。 今死刑幾至累百, 誠可驚憂。 然今年繫獄, 只二十五人, 自甲寅年以來, 中外滯獄者, 積累致然。 若以死刑之多而更行活法, 則是不忍於爲惡之人, 而反忍於無辜被盜之人也。"
중외의 사형수가 190인이었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하니, 황희(黃喜), 신개(申槩), 이맹균(李孟畇), 하연(河演)이 아뢰기를, “선왕이 의리에 입각하여 형벌을 가하고 사형을 내렸던 것은, 한 사람을 처형함으로써 만백성을 두렵게 하여 감히 함부로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벌을 가볍게 하면 간악한 자들에게는 혜택이 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해가 됨에 따라 정치하는 도리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천성적으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지극히 인자한 마음을 가지셔서 매번 형벌을 판결할 때마다 정상과 형벌의 경중을 반복 궁구하여 살려낼 방도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혹시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기만 하면 가벼운 법을 적용하시기 때문에 사형을 받아야 할 죄수가 사형을 면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옛날 정자산(鄭子産)은 ‘불은 뜨겁기 때문에 백성들이 경외하고 물은 약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우습게 여긴다.’고 경계를 하였는데도, 대숙(大叔)이 따르지 않다가 마침내 군사를 출동하여 도적을 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형벌을 가볍게 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피해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미치게 됩니다. 원하건대, 한결같이 율문(律文)대로 하소서.” 하니, 따랐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연려실기술 별집 제13권 정교전고(政敎典故) 형옥(刑獄) 이긍익(李肯翊) 1966~1967 18
신개(申槩)ㆍ이맹균(李孟畇)ㆍ하연(河演)이 아뢰기를, “선왕의 의리로써 형벌하고 의리로써 죽이는 것은 =======
○ 세종 21년 기미에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가 1백 90명이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흉년이 자주 들어, 도적이 횡행하며 성내서 다투는 일이 많아져, 사형수가 전보다 배나 많으니, 내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한다. 매양 옥사(獄事)를 듣고 결단할 때마다 일찍이 가엾게 여기지 않는 때가 없었다.싸우고 때리며 희롱하다가 사람을 죽인 일 같은 것은 법으로는 마땅히 죽여야 하겠지만, 본래 살인할 마음이 없는 것이며, 절도 3범이나 관가의 돈과 곡식을 도적질한 것은 대개 궁한 사람들의 범행이니, 정리상 동정할 만하므로 내가 살려 주려고한다.” 하니, 황희(黃喜)ㆍ신개(申槩)ㆍ이맹균(李孟畇)ㆍ하연(河演)이 아뢰기를, “선왕의 의리로써 형벌하고 의리로써 죽이는 것은 한 사람을 형벌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감히 악한 짓을 마음놓고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여기서 형벌을 경하게 하는 것은 다만 간사한 무리를 도와주고, 선한 사람들을 해치게 되므로 정치하는 도리에 해가 되는 것입니다.지금 전하께서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지극한 어지심은 천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형벌을 결정할 때마다 반복하여 상고하고 연구하여 정리와 법의 경중으로 보아서 혹시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으면 문득 가벼운 법을 적용하게 하였기 때문에, 죽어야 할 사람으로 면죄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옛날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불은 그 기세가 맹렬하니 백성이 두려워하고, 물은 그 기세가 유약하니 백성이 업신여긴다.’고 교훈하였는데, 태숙(太叔)이 좇지 않다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형벌을 가볍게 하는 해는 그 피해가 선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것이오니 한결같이 법률의 조문에 따르기를 원합니다.” 하니, 그 말대로 좇았다.
한소재집 편집 내용 (그외 서문 발문 신도비문 행장이 있습니다 )
@ 16 漢蘇齋集 序
우리 려말선초 (조선 태종.세종의 세대) 에 온아 순효 정학 하신 선비가 있었으니 바로 문혜(한소재) 이공으로 이름은 맹균이다. 대개 그당시에는 사우가 성하여 그 풍족함은 백세를 내놓을 만하였다
공은 일찍이 소년등과하여( 고려 우왕때 15세에 과거에 뽑혀), 예(例)대로 고공좌랑, 성균 직학(成均直學)에 보임되었다 다시 내서사인에 전임되었다(32). 계사년(43) 겨울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성균관대600주년 기념관에 역대기관장 명단에 동판으로 세겨있음)으로 전보되었다 공조 판서로(53) 배임되었다가 곧 예조 판서로 옮겼다. 여러 번 이조와 병조 판서를 지냈고
병진년 겨울에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되었는데 판이조사는 그대로 겸했고, 기미년(69)에 좌찬성으로 승진되었다.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졸(卒)하였으니, 나이 70이다. 부음이 들리매,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조문하고 부의(賻儀)를 내렸다
시호(諡號)를 문혜(文惠)라 하였으니,학문에 부지런하여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부드러운 자질로써 백성을 자애함이 혜(惠)이다 예(禮)로써 장사하였는데 왕세자(王世子)도 또한 조문(弔問)하고 부의를 내렸다.
수십차례 편전에 올라 입대하여 제정무를 논할 시에 여러 가지 상소와 진언등이 있어 전한다 무릇 그 일생동안 감정과 포부를 읊은 시나 제현 (河演先生)들과의 묻고 답한 글들이 적지 않으나 용사의 불길에 함께 타버려서 남은 것을 수습하였지만 시6수와
왕조실록에서 의 계 진언 전 상소 상서 등 수십여건을 구하여 한권의 책으로 묶어 집에다 보관하여 지금 후손이 영원히 전할 수 있도록 공의 여러 종친이 방18대손 고 현구의 뜻으로 나에게 편차를 바로 잡아주기를 부탁하고 또 서문을 청하고 간 후에 전화로 거듭 책망하고 매우 깨우쳐줌으로써 감당하지 못하나 당연한 말씀이었다
나는 오백칠십년후에 태어나 몸소 직접 볼수 없었던 것이 한인데, 더욱 애석한 것은 문헌이 흩어지고 없어져 전하는 것이 없음이로다 내(喜濬) 가만히 살펴보니 성품이 온양하고 일찍부터 가업을 이어서 시문이 전아한 것은 온아이며 무릎이 닿은 자리는 구멍이 파져 풀도 나지 않았으니 봄바람도 지극한 효성을 알았다 함은 순효이며 오직 기소물욕 물시어인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않는다--에만 힘쓰고 학문을 하되 이치를 밝힌 것은 정학이다의 세가지 중에 한가지만 있어도 백세에 으뜸이거늘 하물며 모두를 겸비한분이시니
그 정의는 비록 백대가 되어도 오히려 이야기할 수 있었기에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본 원고에 따라 간략히 수정을 더하여 사우와 연원의 바름을 붙이고 한소재집 서문으로 삼는다
我麗末鮮初時(朝鮮太世宗之世) 有溫雅純孝正學之士曰 文惠(漢蘇齋)李公諱孟畇 盖其當時師友之盛 尤有足以百世也 公嘗以少年登科(十五擢第, 高麗 禑王 ), 例補 考功佐郞(26), 成均直學 遷內書舍人(32)。癸巳冬(43),遷成均大司成,拜工曹判書(53),禮曹判書, 累歷吏兵曹判書。 丙辰 冬(66),陞議政府右贊成, 仍兼判吏曹事,己未(69), 陞左贊成 行至開城府卒, 年七十 訃聞, 輟朝二日, 致弔致賻。 諡文惠, 學勤好問文, 柔質慈民惠 以禮葬之, 王世子亦致弔致賻 數十次對便殿論諸政務 其時 諸上疏陳言 等有傳 凡其一生詠懷之作 諸賢問答之文 不爲少龍蛇之燹隨入之 其收拾燼逸餘者 堇得 詩6首 其外得 王朝實錄 議啓陳言箋上疏上書 等 數十餘件 爲一冊藏于家 今後雲所以爲不朽之傳 諸宗以傍18代孫故賢求之意囑不侫釐整編第且請弁卷首者行後以諸通信之責譬甚重有不堪承當念 不佞生於五百八十載之下 恨未得親見於身 尤可昔者 文獻散逸以無傳也 (喜濬) 竊惟性稟溫良 早承家業(牧隱의 仲孫) 詩文典雅 溫雅也 膝處皆芽草不生 春風應解至孝情 純孝也 惟務己施 [己所不欲 勿施於人:論語] 爲學明理 正學也 有一於此 尙可百世 況兼有之乎 其誼雖百世猶可講遂不散終辭就本稿畧加丁乙因附師友淵源之正爲文惠公文集序..
二千十年 庚寅 季春 日 二十一代孫 經濟學博士 信興大敎授 喜濬 謹序
@ 17 . (간행축간사) 乙未 文惠公派譜 跋
氏之有譜, 所以尊祖宗敦孝悌之義也. 族譜之行, 始於蘇明允, 入我朝爲尤盛, 如或不講, 則其流必至於使同姓視若塗人之歸矣, 可不懼哉! 我朝韓山之李, 自稼牧兩先生以後, 爲世望族, 而其麗不億, 繼代之昭昭班班, 派分支流之歷歷可考者, 皆由於譜事之次序修明故也. 吾宗譜事之修, 已爲五十餘年, 則不得不就此可修, 而苟欲撮合韓李之大同爲譜, 則事鉅力綿, 未可以時月可成. 我先祖 文惠公諱孟畇, 是國初名賢也. 其文章也道德也筆法也, 爲世膾灸, 今不必更贅, 而其後裔之散四方而居者甚多. 但事力不瞻, 故諸宗發議, 只擧 文惠公派爲派譜, 而今年閏三月設譜廳于應聲山齋室, 奚輯草單, 合而成編, 以付剞劂, 而竣功于六月仲旬, 其於吾宗, 豈不大幸也哉! 然府使公第四子將仕郞公派及孫監察公派, 居于開城長湍開豊, 而南北相隔不得同譜, 恨莫甚焉. 後之雲仍克體斯義, 待事力之稍舒, 竣發宗議, 得修大同譜, 則雖百代之遠, 不至於視若路人矣, 宜各勉旃哉!
檀紀四千二百八十八年乙未中夏上澣.
文惠公十五代孫承俊再拜謹跋.
을미년 한산이씨문혜공파보(韓山李氏文惠公派譜)의 발문
씨족이 족보를 간행하는 것은 선조를 존숭하고 효제의 인륜을 도탑게 행하려는 취지이다. 족보의 간행은 소명윤(蘇明允)1)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더욱 성행하였다. 만일 족보의 일을 강구해두지 않으면, 그 여파는 반드시 같은 씨족끼리도 길에서 만나는 낮선 사람처럼 대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두렵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한산 이문은 가정(稼亭)과 목은(牧隱) 두 선생 이후 명망 높은 문중이 되어 그 후손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세대를 이어온 계보가 명확히 드러나고 파가 나누어져 지손들이 계통을 이룬 것을 낱낱이 상고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족보의 차서가 정비되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혜공파 족보가 정비된 지 이미 50여년2), 이제 이 파보를 증수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한산 이씨 문중의 대동보와 함께 연계하여 편찬하려고 하면, 방대한 사업에 비해 물력이 현저히 부족해서 일정한 기간에 마칠 수가 없다.
우리 선조 문혜공(文惠公)께서는 존함이 맹균(孟畇)이고 조선 개국 초기 명현으로, 선생의 문장, 도덕, 그리고 글씨가 세상에서 널리 일컬어진 바이니 이제 다시 군더더기 말을 더할 필요가 없다. 그 후손으로 사방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 매우 많지만, 다만 물력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문혜공파만으로 파보를 간행하기로 여러 종중에서 발의하였다. 금년 윤삼월에 응성산(應聲山) 재실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자료들을 모아 합해서 책을 이룬 뒤 판각에 붙인 바3) 6월 중순에는 마칠 것이니, 우리 문혜공파를 위해 어찌 크게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부사공(府使公)4)의 넷째 아드님이신 장사랑공(將仕郞公)5)파와 손자이신 감찰공(監察公)6)파는 개성 장단군과 개풍군에 살고 있지만, 남북으로 서로 분단되어 족보에 함께 수록하지 못하였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후대의 자손들이 족보를 편찬하는 이 의리를 잘 새겨서 물력에 다소 여유가 생겼을 때 종중의 논의를 모아 발의하여 대동보를 편찬할 수 있게 된다면, 비록 백 대 뒤의 먼 자손이라 해도 길에서 만나는 생면부지의 사람으로 보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후손은 의당 각자 힘써야 할 것이다.
단기 4288년 을미년 음력 5월 상순.
문혜공 15대손 승준(承俊) 재배하고 삼가 발문을 쓰고
17대손 승준(承俊)의 손자 봉규 번역하다.
<각주>
1) 북송 문인 蘇洵의 字. 소동파의 부친으로 문장과 더불어 예학에도 밝았다. 세대별 차서를 명료하게 들어내는 체례를 창안하여 족보를 간행하였는데, 현재까지도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2) 문혜공파의 세보는 1905년 李容稙(목은 18대손) 등에 의해 韓山李氏世譜文惠公派로 편집 발췌 간행되었다. 1955년 이 파보를 간행할 때로부터 50년전의 일이 된다.
3) 1955년에 간행된 이 파보는 동활자로 간행한 이른바 石印本이다.
4) 존함은 保基이다. 판중추공(존함 孟畛)의 제3남으로 문혜공에게 출계하였다. 利川府使를 역임하였다.
5) 존함은 漬이다. 將仕郞은 조선시대 從九品 東班 文官에게 주던 品階이다.
6) 존함 允苾이다. 監察은 조선시대 司憲府의 정6품 관직이다.
신도비명병서,
공의 선계는 여말의 대현으로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데학이요 호는 가정이시고 휘는 곡이신데 나라의 흥학에 크게 공헌하신 분이요. 대유로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우문관대제학이신 목은선생은 휘 색이신데 이 두분은 곧 공의 증조와 조부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종덕이신데 봉익대부 지밀직사사요 호는 현암이시고 시호는 문양이시다. 어머니는 진주유씨요 첨의평리판소부사 혜손의 차녀요 찬성사 진주백 유의 손녀이시다. 공은 소년등과하여 예대로 성균관직학에 제수되고 여러곳에 옮겼다가 사재소감에 올랐다. 비로소 조선왕조에 들어와 태종2년 (1402)에 내서사인에서 지단양군사로 나갔다가 만기되어 예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엇다. 6년(1406)에 집의에 올랐으나 언사로 인하여 원주적소에 있다가 이해 칠월에 방면귀환하여 지영천군사로 나갔다. 태종 십일년 (1411)에 지승문원사에 오르고 십삼년(1413)에 성균관대사성을 받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태종 십오년 (1415) 1월에 우사간대부로 옮겼는데 이때 태종께서 해서지방에 강무를 나가려하매 공이 “흉년에 혹시나 백성의 원망이 있을듯하니 나가지 마옵소서”하고 계청하니 태종께서 “과연 그렇다”하고 정지하였다. 십팔년(1418)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라 규휼미를 농번기에 한하여 그 량을 배가할 것을 건의하여 생업에 지장이 없도록할 것을 계책하더니 윤허되어 즉시 시행하였다. 이듬해 사월에 판한성부사가 되어 돌아왔다. 세종4년(1422)에 예조참판으로 옮겼다가 얼마안되어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는데 한 돌만에 불러 공조판서를 제수하니 도민들은 유임토록 해줄 것을 상소하였지만 묘당에서 공의 재기를 중하게 여겨 윤허하지 않았다. 예 병 이 3조의 판서를 여러번 전임하고 의정부참찬에 사헌부대사헌을 겸하면서 더구나 유후 선위사 진위사 진향사 원접사 등 외국과의 섭외임무를 더한 것이 여러차례였으니 국사에 남달리 노고가 많았던 분이다. 세종십년 (1428)에 다시 이조판서 십일년 (1429)에 예문관대제학에 전임되었다가 십이년 (1430) 사월에 사은사의 명을 받고 북경에 다녀와서 칠월에 다시 의정부참찬이 되었다. 세종 십팔년 (1436) 지중추원사에 판이조사를 겸하였다가 겨울에 의정부우찬성으로 올라 판이조사를 겸하였고 더하여 예문관대제학에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니 이와같은 파격적인 일은 공에게서 비롯 되었던 것이다. 실로 세종께서 특별히 주목하고 공의 재능과 기량이 심중함을 외모만으로도 뚫어지게 알았으니 이것만으로도 가히 알 만하다. 십일월에 옷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한 것은 접반사로서의 노고를 치하한 것이다. 공의 남김없는 충심으로 군은에 보답하려 하였음은 신하된 사람의 귀감으로서 일세에 현달하였으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얼마 안되어 좌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이십년(1438) 팔월에 공이 병을 얻었더니 세종께서 이 소식을 듣고 특별히 탕제를 내리시며 명하기를 조카 연기로 하여금 시탕보호토록 하시니 과연 연기는 곁에서 의관을 풀지않고 극진히 하였으나 효험을 얻지못하고드디어 팔월 삼십일에 돌아가셨다. 세종께서 부보를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어 조정의 정무를 쉬게하고 철시토록 하였으며 부의를 후하게 내리시고 예관을 보내서 치제토록 하였다. 제문에 이르기를 “풍자가 온아하고 성품이 단정하며 정성스러웠도다. 대대로 유자의 행실을 전승하여 업으로 닦고 일찍이 출중하게 장원하여 신하로서 좋은 건의가 많았고 교육을 널리 펴 모범을 주었으며 외직에서는 백성들이 그 덕을 사모하였도다. 시관으로서는 훌륭한 인재를 가렸고 내게는 의지할만 한 보필이었도다. 옛덕을 추모하게되니 참으로 슬프도다.” 세자 또한 치전하고 제문에 이르기를 “학문이 정박하시니 삼조를 도와 명성과 업적이 많았고 스승이 되어 본받을만함이 많았습니다. 백년이 다 가도록 그 높은 풍도를 사모하렵니다. 하였다. 문혜라고 시호를 내렸으니 부지런히 묻고 배웠으니 문 이요 백성을 사랑하고 기꺼이 화목하였으니 혜 라 하였다. 황해도 금천군 우봉 오이능 판중추공 묘하 곤좌로 예장을 모셨다. 정경부인 전의이씨는 형조전서 구직의 따님이요 판증추원사 정간의 누이요 판전교시사 안락 김인관에게는 외손녀이다. 복선자는 천도지상인데 공이 자녀를 기르지 못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스스로 탄식하여 읊기를 내 죄가 무엇이기에 하늘이 돌보지 않아 아비가 못되고 백발만 성성한고 하였다. 계씨 판중추공의 삼자 보기를 후사로 정하여 후손이 번성하니 오늘의 경복은 하늘의 보답이 어김없음이로다. 오호라 공이 몰하신지 오백오십년의 오랜 세월에 묘도에 비갈이 없음은 무슨일인가? 여러 후손들이 의논하고 비용을 걷어모아 빗돌을 마련하고 비명짓는 일을 희준교수가 찾아와 재능이 변변치 못하고 천견한 나에게 찬술을 거듭 청하니 거유석학의 지난 자취와 훌륭항 행적을 혹시라도 오랜 세월이 흘러 인멸할까 두려워 감히 가승과 국사에서 발쵀(췌)하여 대략을 서술한다. 명하노니 유학을 탐구하고 참된 공부하여 늙도록 덕망을 쌓았네. 벼슬이 이상에 올라 좋은 계책 자주 올리고 외직에선 지친 백성 흥기시켰네. 인재는 현우를 분명히 가려뽑고 천하에 대공을 세운 분이로세. 후사가 없었던건 신의 이치가 거짓인가 어찌 무자를 탄식케하랴 자손들은 참으로 아름답도다. 어진분의 아름다운 업적은 백세의 귀감이니 찬란한 빗돌에 새겨 묘도에 세우노라.
公諱孟畇字士原姓韓山李氏 漢蘇齋其號也 生於麗季恭愍王辛亥 西紀 1371年 松都之舊第 生得天姿端正稟性溫雅 善讀書史探究精硏早有文名 年方十三登進士 二年後中文科 試官 鄭圃隱先生極爲推獎 咸爲大成可期
公之先世則 麗末 大賢 正堂文學都僉議贊成事 右文館大提學 號稼亭諱穀 有功於興學 大儒三重大匡門下侍中 判典理司事 右文館大提學 號牧隱諱穡 右兩賢於公爲 曾王考與大考也. 考諱種德奉翊大夫知密直司事 號玄巖諡文襄 妣晉州柳氏 門下僉議評理判少府事 蕙孫之次女 贊成事 晉州伯 洧之孫
공의 선계는 여말의 대현으로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데학이요 호는 가정이시고 휘는 곡이신데 나라의 흥학에 크게 공헌하신 분이요. 대유로 대유로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우문관대제학이신 목은선생은 휘 색이신데 이 두분은 곧 공의 증조와 조부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종덕이신데 봉익대부 지밀직사사요 호는 현암이시고 시호는 문양이시다. 어머니는 진주유씨요 첨의평리판소부사 혜손의 차녀요 찬성사 진주백 유의 손녀이시다.
,公之少年捷科(擢第)例除成均館直學。 累轉陞司宰少監, 始入朝鮮王朝 太宗2年除內書舍人,知丹陽郡事, 考滿환拜藝文館直提學 6年拜執義 以言事被謫(貶)原州。 是歲7月宥環知永川郡事。 太宗11年陞知承文院事,13年拜成均館大司成累辭不允,太宗15年1月移拜 右司諫大夫 時太宗欲爲講武於海西之計 公啓請歉歲作民弊不可 太宗可之乃停止 18年陞除 忠淸道觀察使,公上啓以爲難民賑救恤米 量限農繁時增倍 以勸農民之生業 太宗依允公卽時施行 翌年4月 判漢城府事謝還 공은 소년등과하여 예대로 성균관직학에 제수되고 여러곳에 옮겼다가 사재소감에 올랐다. 비로소 조선왕조에 들어와 태종2년 (1402)에 내서사인에서 지단양군사로 나갔다가 만기되어 예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엇다. 6년(1406)에 집의에 올랐으나 언사로 인하여 원주적소에 있다가 이해 칠월에 방면귀환하여 지영천군사로 나갔다. 태종 십일년 (1411)에 지승문원사에 오르고 십삼년(1413)에 성균관대사성을 받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태종 십오년 (1415) 1월에 우사간대부로 옮겼는데 이때 태종께서 해서지방에 강무를 나가려하매 공이 “흉년에 혹시나 백성의 원망이 있을듯하니 나가지 마옵소서”하고 계청하니 태종께서 “과연 그렇다”하고 정지하였다. 십팔년(1418)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라 규휼미를 농번기에 한하여 그 량을 배가할 것을 건의하여 생업에 지장이 없도록할 것을 계책하더니 윤허되어 즉시 시행하였다. 이듬해 사월에 판한성부사가 되어 돌아왔다.
世宗4年移拜禮曹參判 未久施除京畿道觀察使 週期召還擢拜,工曹判書,閭巷爭留願借冠君之情陳疏 啓聞廟堂以公器重而不許 禮吏兵三曹遍歷累轉重任。陞秩 議政府參贊、兼帶司憲府都憲。不時公以奉命持節數多 若留後司宣慰陳慰進香遠接使等 涉外職務賢勞 於國事則不可殫記 世宗十年移拜吏曹判書,十一年移拜藝文館大提學 十二年四月以謝恩使 承命徃(왕)北京專對而還 同年七月深拜議政府參贊,세종4년(1422)에 예조참판으로 옮겼다가 얼마안되어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는데 한 돌만에 불러 공조판서를 제수하니 도민들은 유임토록 해줄 것을 상소하였지만 묘당에서 공의 재기를 중하게 여겨 윤허하지 않았다. 예 병 이 3조의 판서를 여러번 전임하고 의정부참찬에 사헌부대사헌을 겸하면서 더구나 유후 선위사 진위사 진향사 원접사 등 외국과의 섭외임무를 더한 것이 여러차례였으니 국사에 남달리 노고가 많았던 분이다. 세종십년 (1428)에 다시 이조판서 십일년 (1429)에 예문관대제학에 전임되었다가 십이년 (1430) 사월에 사은사의 명을 받고 북경에 다녀와서 칠월에 다시 의정부참찬이 되었다.
世宗十八年 知中樞院事、兼判吏曹事, 冬,特陞議政府右贊成, 仍帶判吏曹,加之藝文館大提學 兼帶吏判可謂異例 如此破格自公始矣 實由主上之眷注益篤 公之才器深重 藻鑑洞徹之所致卽此可見矣 十一月賜表襄一件 以襃伴接外使之勞猗歟哉 公之殫竭忠心圖報君恩 可以爲人臣者龜鑑 顯達一世不亦善手 俄陞左贊成。 二十年 八月 公疾作 世宗聞報而特賜湯劑 命使姪子衍基侍湯調護
세종 십팔년 (1436) 지중추원사에 판이조사를 겸하였다가 겨울에 의정부우찬성으로 올라 판이조사를 겸하였고 더하여 예문관대제학에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니 이와같은 파격적인 일은 공에게서 비롯 되었던 것이다. 실로 세종께서 특별히 주목하고 공의 재능과 기량이 심중함을 외모만으로도 뚫어지게 알았으니 이것만으로도 가히 알 만하다. 십일월에 옷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한 것은 접반사로서의 노고를 치하한 것이다. 공의 남김없는 충심으로 군은에 보답하려 하였음은 신하된 사람의 귀감으로서 일세에 현달하였으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얼마 안되어 좌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이십년(1438) 팔월에 공이 병을 얻었더니 세종께서 이 소식을 듣고 특별히 탕제를 내리시며 명하기를 조카 연기로 하여금 시탕보호토록 하시니
衍基侍側不懈而 不得奏효(効)竟以八月三十日病卒於官 訃聞世宗震悼 朝廷停務市井撤市 厚賜賻賵遣禮官 賜祭 祭文略曰 風姿溫雅, 性稟端慤。家傳儒素,早捷巍科,薇垣荷槖, 多所啓沃。 芹宮敷敎, 觀風西道, 人懷棠茇。 肆予器重, 眷注益篤。屢掌銓選, 藻鑑洞徹。 擢置巖廊, 倚爲輔弼。 追惟舊德, 予心是惻。世子致奠有曰 學問精博。 弼寬三朝 爲賓爲師, 多所儀刑。 과연 연기는 곁에서 의관을 풀지않고 극진히 하였으나 효험을 얻지못하고드디어 팔월 삼십일에 돌아가셨다. 세종께서 부보를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어 조정의 정무를 쉬게하고 철시토록 하였으며 부의를 후하게 내리시고 예관을 보내서 치제토록 하였다. 제문에 이르기를 “풍자가 온아하고 성품이 단정하며 정성스러웠도다. 대대로 유자의 행실을 전승하여 업으로 닦고 일찍이 출중하게 장원하여 신하로서 좋은 건의가 많았고 교육을 널리 펴 모범을 주었으며 외직에서는 백성들이 그 덕을 사모하였도다. 시관으로서는 훌륭한 인재를 가렸고 내게는 의지할만 한 보필이었도다. 옛덕을 추모하게되니 참으로 슬프도다.” 세자 또한 치전하고 제문에 이르기를 “학문이 정박하시니 삼조를 도와 명성과 업적이 많았고 스승이 되어 본받을만함이 많았습니다.
庶幾百年, 永仰高風 諡文惠, 學勤好問(근어학문)文, 柔質慈民(애민화열)惠。 禮葬于 黃海道金川郡牛峰吳李陵 判中樞公墓下坤坐之原 貞敬夫人全義李氏 刑曹典書丘直之次女 判中樞院事貞幹之妹 判典校寺事安樂金仁琯之外孫 福善者天道之常 而公無生育何故 憂嘆自吟曰 我罪伊何天不弔 未爲人夫鬢絲新 遂以季氏 判中樞公三子保基 定後嗣孫曾蕃衍 至今慶福延綿 天道報施有如不미矣 백년이 다 가도록 그 높은 풍도를 사모하렵니다. 하였다. 문혜라고 시호를 내렸으니 부지런히 묻고 배웠으니 문 이요 백성을 사랑하고 기꺼이 화목하였으니 혜 라 하였다. 황해도 금천군 우봉 오이능 판중추공 묘하 곤좌로 예장을 모셨다. 정경부인 전의이씨는 형조전서 구직의 따님이요 판증추원사 정간의 누이요 판전교시사 안락 김인관에게는 외손녀이다. 복선자는 천도지상인데 공이 자녀를 기르지 못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스스로 탄식하여 읊기를 내 죄가 무엇이기에 하늘이 돌보지 않아 아비가 못되고 백발만 성성한고 하였다. 계씨 판중추공의 삼자 보기를 후사로 정하여 후손이 번성하니 오늘의 경복은 하늘의 보답이 어김없음이로다.
嗚呼 公之歿殆及五百五十年之多 尙無墓道之碑未知何由 而今者諸孫詢謀 鳩財圖成修碑 刻銘之役 復請喜濬敎授 後學之以菲才淺見 不敢撰述巨儒碩學之徃(왕)蹟 猶恐愈久而煙滅無傳故巧諸家乘國史拔萃 而敍寬耳系之 銘曰
精硏儒學 誠正工夫 耆舊宿德 位躋二孤 前席啓沃 屢陳嘉謨 分符方面 疲殘起蘇 專掌銓選 藻鑑賢愚 鄧公無嗣 神理亦誣 何歎無育 寶樹美瞴 賢人茂績 百世是模 刻銘貞石 竪(豎)賁阡途 오호라 공이 몰하신지 오백오십년의 오랜 세월에 묘도에 비갈이 없음은 무슨일인가? 여러 후손들이 의논하고 비용을 걷어모아 빗돌을 마련하고 비명짓는 일을 희준교수가 찾아와 재능이 변변치 못하고 천견한 나에게 찬술을 거듭 청하니 거유석학의 지난 자취와 훌륭항 행적을 혹시라도 오랜 세월이 흘러 인멸할까 두려워 감히 가승과 국사에서 발쵀(췌)하여 대략을 서술한다. 명하노니 유학을 탐구하고 참된 공부하여 늙도록 덕망을 쌓았네. 벼슬이 이상에 올라 좋은 계책 자주 올리고 외직에선 지친 백성 흥기시켰네. 인재는 현우를 분명히 가려뽑고 천하에 대공을 세운 분이로세. 후사가 없었던건 신의 이치가 거짓인가 어찌 무자를 탄식케하랴 자손들은 참으로 아름답도다. 어진분의 아름다운 업적은 백세의 귀감이니 찬란한 빗돌에 새겨 묘도에 세우노라.
一九九四年 甲戌季春 日 傍十八代孫 賢求 謹撰
史傳 -- 文惠公(漢蘇齋)卒記文
(前左贊成李孟畇卒)。 孟畇字士原, 穡之孫也。 年十三中進士試, 十五擢第, 例補成均直學。 累官至司宰少監, 遷內書舍人, 出知丹陽郡事, 考滿拜藝文館直提學。未幾, 除司憲執義, 以言事貶原州。 及賜環, 知永川郡事。 歲辛卯, 召拜知承文院事, 尋陞判承文院事, 癸巳冬, 遷成均大司成, 上書乞免, 遂除左司諫。 乙未冬, 陞禮曹參議, 累遷至敬承府尹。 戊戌, 出爲忠淸道觀察使, 還拜漢城府尹。 壬寅, 遷禮曹參判, 明年, 拜工曹判書, 尋遷禮曹判書, 累歷吏兵曹判書。 未幾, 拜議政府參贊、兼司憲府大司憲。 戊申, 復拜吏曹判書, 庚戌, 又拜議政府參贊, 乙卯, 復拜吏曹判書。 丙辰秋, 遷知中樞院事、兼判吏曹事, 冬, 陞議政府右贊成, 仍兼判吏曹事, 己未, 陞左贊成。 至是, 自貶所赴京, 行至開城府卒, 年七十。 時人憐孟畇受制於婦人, 老不安死也。 訃聞, 輟朝二日, 致弔致賻。 諡文惠, 學勤好問文, 柔質慈民惠。 以禮葬之, 王世子亦致弔致賻。 孟畇性稟溫良, 早承家業, 爲詩文典雅。 無子。
전 좌찬성(左贊成) 이맹균(李孟畇)이 졸(卒)하였다. 맹균의 자(字)는 사원(士原)이며 이색(李穡)의 손자이다. 1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세에 과거에 뽑혀, 예(例)대로 성균 직학(成均直學)에 보임되었다.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사재 소감(司宰少監)으로 되었고, 다시 내서 사인(內書舍人)으로 전임되었다가, 외임(外任)으로 나가서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로 되었으며, 고만(考滿)이 되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제수되었고, 얼마 못되어 사헌부 집의(執義)로 되었으나 언사(言事)로써 원주(原州)로 귀양갔다. 사면이 되어 지영천군사(知永川郡事)로 되었고, 신묘년에 소환(召還)되어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로 배임(拜任)되었다가 곧 판승문원사로 승진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전보되었으나 상서(上書)하여 해면되기를 청하였는데, 드디어 좌사간(左司諫)으로 제수되었고, 을미년 겨울에 예조 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여러 번 옮겨져서 경승부 윤(敬承府尹)으로 되었다. 무술년에 다시 외임으로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로 있다가, 돌아와 한성부 윤(漢城府尹)에 배수(拜授)되고, 임인년에는 예조 참판으로 전보되었으며, 다음해에 공조 판서로 배임되었다가 곧 예조 판서로 옮겼다. 여러 번 이조와 병조 판서를 지냈고, 얼마 못되어 의정부 참찬 겸 사헌부 대사헌으로 배임되었고, 무신년에 다시 이조 판서로 제수되었으며, 경술년에 또 의정부 참찬으로 배수되었으나, 을묘년에 다시 이조 판서로 배명(拜命)되었다. 병진년 가을에 지중추원사 겸 판이조사(知中樞院事兼判吏曹事)로 전보되었고, 겨울에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되었는데 판이조사는 그대로 겸했고, 기미년에 좌찬성으로 승진되었다. 이때에 와서 귀양갔던 곳에서 서울로 오다가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졸(卒)하였으니, 나이 70이다. 당시 사람들이, 맹균이 부인에게 압제(壓制)를 받아 늙어서 죽음도 편하게 못했음을 불쌍하게 여겼다. 부음이 들리매,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조문하고 부의(賻儀)를 내렸다. 시호(諡號)를 문혜(文惠)라 하였으니, 학문에 부지런하여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 부드러운 자질로써 백성을 자애함이 혜(惠)이다. 예(禮)로써 장사하였는데 왕세자(王世子)도 또한 조문(弔問)하고 부의를 내렸다. 맹균은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일찍부터 가업(家業)을 이어서 시문(詩文)이 전아(典雅)하였다. 자식은 없었다.
跋文
齊景公이 公子에게 政事를 묻자 公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노릇하며 신하는 신하노릇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노릇하며 자식은 자식노릇하는 것입니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子貢이 어떠하여야 이 선비라 말할 만합니까. 하고 묻자 公子께서 말씀하셨다. 몸가짐에 부끄러워함이 있으며 四方에 使臣으로 가서는 君主의 命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 이를 만하다 (可謂士矣) 나라에는 政治가 잘돼야하고 백성에는 선비가 많아야 좋은 나라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특히 朝鮮朝에서는 선비가 政事에 참여하는 것을 指向하는 儒敎國家이었다. 한 사람의 일생 그 삶의 評價는 그 시대 그 나라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현시대가 세계화로 되어가고는 있지만, 그 한 국가의 槪念은 古今이 다를 것이 없으니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임금이 다스려 가장 文物이 盛하고 太平聖代로 稱頌되는 朝鮮朝 世宗大王時代 그때 聖君 世宗大王의 敦篤한 信任을 받아 일생을 國政에 참여했으며 臨終에 임금이 심히 애통히여겨 朝廷의 政務를 쉬게하고 撤市토록하였으며 祭文을 지어 致祭토록하였던 그 臣下 左贊成 文惠公 李孟畇 이 신하의 行蹟을 如實히 볼 수 있는 文惠公實記 이 實記에 의하면 공께서는 세상이 다 아는 名門 韓山李氏로 타고난 姿態가 端正하고 성품이 溫雅하며 독서를 즐기고 學問을 깊이 探求하여 名聲이 드러나드니 高麗朝에 十五세에 등과하여 大成할 人材로 칭찬을 받았고 朝鮮朝 太宗 十三年에 成均館 大司成 同十五年에 右司諫大夫에 올라 凶年에 講武를 중지할 것을 啓請하여 允許를 받았고 同十八年 (서기1418년)에 忠淸道觀察使에 올라 농번기에 救恤米를 倍加할 것을 計策하니 윤허되어 즉시 시행하였다. 世宗年代에 禮 兵 吏 三曹의 判書를 重轉任하고 議政府參贊에 司憲府大司憲을 겸임하면서 외국과의 涉外業務를 더한 것이 여러차례였다. 世宗 十八年 (1436) 右贊成에 올라 藝文館大提學에 吏曹判書를 겸하였으니 이 같은 破格的인 일은 公에게서 비롯되었다. 곧 左贊成으로 승진하였다. 聖君 世宗大王 그 신하 李 孟畇, 公子님께서 말씀하신 君君 臣臣 이요 可謂士矣 이다. 公께서는 高麗朝에 벼슬을 시작하여 王朝가 바뀌는 어려운 시기를 거쳐 새 王朝 朝鮮朝의 임금다운 임금 世宗大王의 신하다운 신하가 되어 內政 外職 外交 敎育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니 그 行蹟이 훌륭하다 하지 않겠는가. 이런 훌륭한 史實이 서기 千九百九十四年 방손 賢求氏의 撰文으로 永慕里에 神道碑를 세운 후로는 모든 여건상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學問的 探究心과 後孫된 使命感이 透徹한 喜濬敎授가 拔萃 編輯하였으니 物心兩面으로 精誠을 다한 勞苦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며 敦稙 前韓山鄕校典敎께서 나에게 跋文을 책임지우거늘 淺學 菲才한 내가 감히 跋文을 지어 누를 끼칠가 두렵고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 實記를 보는 後孫이나 後學들은 깊이 省察하여 公을 본받아 精硏學問하고 誠敬工夫하여 德을 쌓아 베풀어 (修己治人 忠恕) 世上과 萬物을 도웁고 이롭게하는데 (補世長民) 一助하는 바 있어 先祖와 先賢 後孫과 後輩에 부끄럽지 않게하기 삼가 바라는 바이다.
(成均館 典仁 前 韓山鄕校 典校(典敎) 韓山李氏 文惠公派宗中 會長 敦稙의 도움으로 지음)
西紀 二千十年 六月 日 十七代孫 溫珪
@23. 栢峴逸稿 문혜공 육대손 영 유거지 백현의 일고 에 대한 序文
庚午年 整理牧隱之遺墨 出版增補國譯牧隱先生年譜後 年前 組版文惠公文集(牧隱之孫, 二十一代祖)與雲溪論叢 吾問雲溪整備栢峴逸稿中 至今栢谷逸稿 辛卯年驚鐘宗中, 是雲溪的人格之瑞氣!
경오년 목은의 유묵을 정리하여 증보국역목은선생연보를 내고, 연전에 문혜공문집(목은지손, 이십일대조)과 운계논총을 내면서 백현일고를 정비하고 있다더니 비로소 백곡일고로 신묘년에 종중을 놀라게 하니, 운계의 인격을 보여 주는구나!
文章散在爲無意味行世間 栢谷之遺墨 詩ㆍ賦ㆍ頌ㆍ策ㆍ表ㆍ雜文 與後孫文 收集文章 栢谷之精神爲栢峴逸稿或栢谷逸稿라, 栢谷之魂魄錚錚, 出衆韓山李氏 栢谷後孫 今至十三代祖溪隱 十代祖栢隱(進發) 松亭(父) 至雲溪 又代代至鍾䄷出於藍, 韓山家門之榮光永遠耳라. 韓山李氏文惠公派判書公栢峴宗中之無窮發展礎石基盤而後孫之龜鑑耳니라.
여기저기에 흩어져 無意味하게 돌아다니던 栢谷의 遺墨 詩, 賦, 頌, 策, 表, 雜文과 後裔들의 文章을 찾아 栢谷의 精神을 한 곳으로 모으니 栢谷逸稿라, 栢谷의 魂魄이 錚錚하고, 出衆한 韓山李氏 栢谷의 後孫들이 이제 十三代祖溪隱 十代祖栢隱(進發) 松亭(父) 雲溪에 이르고 다시 鍾䄷에 의해 나타나니, 韓山家門의 榮光은 永遠하리라. 韓山이씨 文惠公派 判書公 栢峴宗中의 無窮한 發展의 基盤이 되고 後孫의 龜鑑이리라.
雲溪吾親舊. 靑年時節 爲公務員 擔當國事 隨時封牧隱與栢谷之大志思想 收集文章保管耳, 不惑(40)以後於信興大學校 講義指導後學奉旨實踐栢峴的崇高遺志 以何物稱頌無量矣而 又勞力敎後學等 諸弟子擔當國事於國家之要職 出衆 韓山李氏與栢峴之氣魄矣라.
雲溪는 나의 親舊다. 靑年時節 公務員으로 國事를 擔當하며 틈틈이 牧隱과 栢谷의 뜻을 받들어 文章을 모아 保管해 왔고, 不惑<40>이 되어서는 信興大學校[信韓大學校]에서 後學을 指導하여 栢峴의 崇高한 遺志를 받들어 實踐하고 있으니 그 무엇으로 稱頌하리오. 뿐만 아니라 後學들도 나라의 要職에서 國事를 맡고 있으니 韓山李氏 栢峴의 氣魄이 表出한 것이리라.
雲溪 艱難生活 布施貧寒家産 增補國譯牧隱先生年譜出版 而栢谷逸稿 又出版하니 奉行先祖之崇高雄志於財産 自己實踐矣而라.
雲溪는 어려운 生活 속에서도 어려운 家産을 나누어 增補牧隱先生年譜을 내고 이어 栢谷逸稿까지 出版하니 財産보다 先祖들의 崇高한 뜻을 받드는 것을 몸소 實踐한 것이다.
先人歐陽脩(唐代 文人)曰 文章之麗 言語之工 爲不足恃而 惟修於身 施於事者 爲可以不朽.* 文章之麗 言語之工 爲不足恃而 惟修於身 施於事者 爲可以不朽 凡父
傳此文句子孫 希望家門文筆財物永遠而子孫成就十分之七 爲先祖幸心 此句謹書于序文後尾.
옛날 歐陽脩(唐代 文人)는 말하기를 ‘문장의 화려함이나 언어의 기교는 부족하며 오로지 몸을 닦고 사실에 열중하는 일이야 말로 영원한 것’이라 하였다. 무릇,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가문이 영원하기를 바라시었다. 하지만 아버님 말씀을 七分이라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 말씀을 序文後尾에 부쳐 삼가 쓴다.
咸安後人 竹志(쭉띠) 趙政來 辛卯年 孟春에 글을 쓰다.
첫댓글 @ 16 漢蘇齋集 序 근서
신도비명병서 인종 현구 찬에서
거듭 희준 교수의 요구에 의해
ㅡ 복청희준교수
문혜공 6대손 영 의 유거지 백현의 백현일고 서문
한소재 문혜공 문집 편집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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