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세 할머니 생일을 맞아 자기를 선언한 이야기다.
남편과 나이가 같다. 대학에서 같은 학년 둘은 그때 부터 사귀었다고 했다.
두 부부 사이에는 딸만 둘를 두었다.
부부는 대학을 졸업 하자 바로 결혼했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 온후 남편은 큰 건설 회사에서 건축 설계사로 일를 했다.
아내는 남편의 뒷 바라지와 자식 키우는 몸으로 주부로 생활를 했다.
이민 생활에 어려움은 조금 있었으나 별로 큰 고생없이 큰 딸은 하바드 의과 대학을 들어 갔었고 무사히 졸업을 했다.
작은 딸도 역시 어렵잖케 대학에 입학 했고 졸업을 했다. 큰딸은 의과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보니 동생 보다 결혼도 늦게 했고
결혼을 늦게 하였으니 역시 아들과 딸도 늦게 두었다, 큰딸의 남편도 역시 의사로 큰 병원에서 근무 하고 있다.
작은 딸은 공무원으로 취업을 했었고 거기서 남편을 만났고 남편도 역시 공무원 이다.
큰 딸이 늦게 결혼을 했는데 아이를 갖지 않려고 하여 할미가 아이를 돌봐 줄터이니 하고 겨우 외손자와 외 손녀를 두었다.
할머니는 외손자와 외손녀를 키웠다. 큰딸은 돈은 잘 벌지만 의료 사고가 하는, 걱정이 없지도 않아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 집은 건축 설계사이기 때문에 보통 집보다 빼어 나게 화려 하고 그러나 그 집은 부모님 집으로되어 있다.
할머니는 외손자도 키우고 집 살림도 건사 하고 있다.
그러나 이틀에 한번 파출부가 청소도 하고 집안일를 도와 주고 있다
그렇게 삶을 살아온 할머니는 살아 가면서 자기는 없고 의사의 어머니 손자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아내로 살아 오다가 보니
바쁠 때는 잘 모르다가 한가하고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 지니 자기는 아무 한일도 남긴 일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생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집에서만 생활 하는 할머니가 살아 온 삶, 살아가는 삶을 생각 해 볼때 별로 만족 한 삶도 아기 자기한 삶보다 살맛이 없는
그런 삶의 연속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때 마다 큰딸이 자주 함께 여행을 하였으나 자기 본인의 의사가 아닌 딸의
어머니로 딸를 따라 세계 많은 나라를 관광도 하고 여행도 다녔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 권사에 까지 믿음이 대단 하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 60을 지나고 70에 가까워 올 무렵 부터 남편 뒷 바라지와 딸 학교 그리고 취업등을 무엇 하나 자기에게
만족이란 허망 그 자체 뿐이란 것이 몸으로 닥아왔다.
자기도 스스로 무엇인가 하고 만족을 얻어야 하겠는데 집은 풍부하고 화려 하나 어딘가 가슴속을 가득 채우는 만족이 없었다.
만족, 무엇가 어디엔가 한구석 그 빈곳을 체워주고 싶어 졌다.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 공부만 하고 취미 생활도 없이 살아온 세월이 허무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나도 이제라도 나를 위하여 스스로를 위하여 무언가 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할까 처음에는 라인땐스를 취미로 시작 하다가, 별로 신통 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것도 본인을
위한것 운동도 되고 땀을 흘리니 기쁨도 있었으나 그 순간이 오래 가지를 못 하였다.
운동을 하면서 생각해 본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나닐때 가장 하고 싶었든 일이 무엇인냐고 먼옛날 하고싶었던 한가지
추억 속을 헤메고 상념에 잠겨 본다. 그 속에 지금도 자리 하고있는 한가지, 무대에 서고 무대 앞에 나가 이야기하고 노래 하거나
춤추며 거기에서 여러 관중들 앞에서 박수도 받고 희열를 얻고, 그꿈을 이루는것, 기쁨에 만족을 얻는것, 머리속에스치는 그
옛날의 재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찾아 나선것 우선 춤을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집을 나서거나 만혼의 이혼 그 생각은 얼토 당치도 않는 웃음거리, 할아버지와 헤어져 딴 살림을 차리려는 그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 였고 교회를 떠나 살자는 것도 물론 아니 였다.
지금은 고전 한국 무용을 배우고 있다. 선생을 잘 만났다.
학교 다닐때 생각만 했었지 공부 밖에 모르는 부모님 밑에서 춤은 어림 없는 소리 그렇게 흘러온 70년 세월 이였다.
선생은 같은 학교 무용과를 졸업 했다. 따져 보니 할머니의 2년 후배 참 그 방면에 둔 한 나였다. 세월은 잘 하나 못하나 2년이
흘러 갔다. 무대에 설 기회도 없쟎아 있었다. 조국 대한민국을 알리는 그런 자리의 그런 무대 였다.
지금은 화관무와 난타, 부채춤을 작은 무대 만이 아닌, 큰 무대에도 가끔은 오르면서 춤도 추고 박수도 받고 있다.
재미도 있고 희열 그것이 무었인지 가슴에 부듯한 비워 있던 한구석을 조금씩 채워 가고 있다.
지난 72년 생일, 50주년 금혼식에 자기 선언을 자신있게 이야기 하는 소릴 나는들었다.
하나님을 섬기는일 거기에 조국을 위하는 일도 함께 한다는말, 그리고 지금 부턴 할아버지의 아내 만이 아닌 내이름 그대로
한국을 알리는 프로그램 그 종이위에 "출연 이 혜욱" 하는 한줄 자기 이름 있는, 무대에 서서 박수와 기쁨을 얻는다고...
그래서 그는 72년 생일 맞아 친구와 함께 하는 무용팀과, 할아버지와 딸과 사위 앞에서 지금 부턴 난, 나를 위하여 시간을 할애
하고 무대에 서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자기(自己) 나의 시간을 가질 터이니 그렇게 알아 달라고....
하염 없이 집에서 시간만 보내는 할머니와 주부와 아내의 자리에서 몇시간이나마 그 집 그자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가진다고...
집에서 하는일 청소도 하고 남편에 시중도 들고 손자와 손녀 함께 노는 재미도 다 알고 있다는 말도 함께 하면서 이제 내가
나이가 더들고 병들고 나약 해지면 친구도 줄어 들고 쓸쓸 함도 더 할것이며 사회와도 멀어 질 터이니 이 나이 이힘 이라도 있는
지금, 사회에 기여 하고 조국에 이바지 하는 나 될것임을 이야기도 하였다.
이자리에 함께한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빌면서, 내가 그 자리에 없다고 안되는 일은 없겠지만 나로 인하여 함께 한 그 자리가
더 발전되고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해 할 수 있다면 그곳에 머물고 싶다고 하면서 자기 지금의 조금 빈 가슴을 선하고
아름 다움으로 채워 가는 자기가 되겠다고 그의 72세의 생일에 말하는것을 들었다.
백년을 살아 보니 하는 저자 김 형석 교수는 "사람은 성장 하는 동안 늙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생의 황금기는 60- 75세
라고" 하였다. 또 75세가 지나 갔다고 갑작이 쇠하여 들거나 늙지는 아니 할 것이다.
함께 살아 가는동안 하고자 하던 일, 취미 생활를 살려, 너 나 함께 72세 할머니가 자유를 선언 하는것 같이 복되고 참된 자기
만족의 길로 걸어봄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가져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