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결과
6.성직자로서 상담자 역할을 자리매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함
3)상담자 교육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남
반면 참여자들은 상담실습 및 수퍼비전을 통해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경험도 생기면서 상담자로서 교육을 받거나 역할에 임하는데 망설임이 일어나기도 한다.
출가해서 공부하다가 상담을 하게 됐는데 너무 내면의 세계를 파고 막 이러다 보니까 사람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과정도 있고 서로가. 상담을 같이 하게 되면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 그래서 상담을 이용해서 치유의 과정까지는 나는 손을 대고 싶지는 않고 그냥 성장, 지지해주고 요 정도까지는 내가 자신있다는 생각이 들어. 치유보다. 요게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보는 상담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 일반상담에서 워크샵 같은데서. 너무 빨리 뭔가를 보여줄려고 할 때는 어떨 때는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구. 그러니까 수술은 해놓고 사실은 영양제도 먹여야 하는데 그게 안 될 때 그런 부분, 그것이 내가 좀 주저하게 되는.(스님A)
수퍼비전 받은 거 하나 기억나는 거는 뜻하지 않게 공격을 당한다고 할까. 수퍼비전 주는 사람이 공격을 여자분이었는데. 어리둥절하고 거기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못했어요. 왜 저러지 그랬고 그 사람이 수퍼바이저니까 몇 명이 같이 받았어요 같이 수퍼비전을 받았는데 뚱딴지 같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는데 근데 뭐 그냥 지나갔죠 왜냐면 그게 당장에는 모르겠더라구요 내 문제인지 저 사람 문제인지 저 사람이 수퍼바이저라도 저 사람의 문제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냥 뭐 짜증내고 갑자기 공격적인 걸해서 당황했고 거기에 적당하게 내가 반응을 못했죠 당황스러워서 그 못한 거에 대해서 그 때 반응을 했었어야 돼나 그런데 그냥 그 상황에서는 그럴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그냥 반응을 안 한 게 잘했던 거 같다. 나중에는 느꼈어요 내가 잘한 건지 못한 건지 판단도 잘 안 섰고 그러니까 상담을 배우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적당한 어떤 반응을 했었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처음엔 했지만 시간 지나면서 에이 안한 게 나았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 거죠 지금도.(수녀A)
수업은 겁나게 들었죠. 대학원 다닐 때 수퍼비전하고 있는 건 계속 쫓아다니면서 들었죠 학회 이런 것.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저렇게 반응하는구나. 이런 거는 열심히 들었었죠. 그런데 교수님들이 가끔씩 발표하는 사람을 잔혹하게 혼내는 걸 보면서 놀래기도 하고. 아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막 이러기도 하고. 내가 나중에 내 사례를 만들어 발표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그렇게 해 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들고… 그러니까 수퍼바이저. 이게 딜레마이긴 한데 내 부분을 가지고 누구한테 얘기해서 피드백 받고 이런 것도 많이 했으면 하는 것도 물음표로 하나 있긴 한데, 워낙 자기성찰 자기점검을 계속 해오는 거니까. 실수하고 엎어지고 실수하고 엎어지고 끊임없이 하고 있는 건데.(목사B)
비구니A는 상담자의 전문성을 키워나가면서 점차 상담에서도 불교 사상에 기반한 기법과 자비심, 연민심 등을 활용하게 되었는데 기존 수퍼비전이 이러한 부분을 다루는데 미흡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 것에 대해서 수퍼비전을 해준 사람이 국내엔 없었어요. 저는 데이빗 프레이저 박사 선치료 하시는 분 그 분 워크샵을 5년 동안 참석하거든요. 그 분 워크샵에 가면 기본이 자비심이에요 수퍼바이저들도 자비심을 가지고 연민심을 가지고 수퍼비전을 해 주는 경우는 아직 없는 거 같애. 드문 거 같애. 있기야 있겠지만 내가 못 만났겠지만. 그런 거보다 약간 형식적이고 그런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비구니A)
스님A는 상담의 언어와 불교의 언어의 개념이 일치되지 않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종교에서 다루는 개념을 현대적인 심리학적 용어로 올바르게 설명할 필요성을 갖게 된다.
제일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서양의 단어와 동양의 단어가 매칭이 안 됐을 때. 어떻게 보면 같은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현상으로 됐을 때. 상담에서는 자아를 성숙시키는 쪽이고 불교에서는 자아를 없애는 과정이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 더 공부를 하고 이것을 나름대로 어떻게 설명 가능하게 할 것인가는 아마 내 몫이라고 생각을 해요 사실은. 자아성숙, 지금 그 공부를 하고 있어. 그래서 좀 뭐라고 그래야 할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종교에 관한 문제를 좀 더 체계적으로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상담의 언어라는 것이 내 한쪽만을 보고 있잖아 불교에서도 그렇고. 이걸 내 나름대로 확장시켜 나갈 필요는 있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자아라는 단어 하나를 갖고도 1년 내내 풀이를 해도 못할 판이고, 불교에서도 무상을 갖고 1년을 갖고 얘기를 해도 못할 판인데 이것을 어떻게 사실 공부해야 할 것인가는 좀. 상담하고 종교하고 충돌하는 부분이 그런 단어의 선택에 관한 문제.(스님A)
한편 목사B는 상담대학원과정에서 교수들의 권위와 비도덕성을 목도하면서 전문적 진로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교수가 도와줘가지고. 그래서 교수가 나한테 찍혔지 그때. 도둑질을 모른 척하고 도와 준거니까. 교수들도 그런 걸 적당히 옹호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그런 걸 발본색원해서 그런 건 안 되지 안 하고 덮고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또 예를 들어 교수가 있으면 어떤 친구한테 이것 좀 한 번 해봐라. 왜 저러지 하고 가만히 쳐다봤단 말이에요. 이 사람 패턴을 알고 싶으니까. 패턴 중요하잖아요 알고 봤더니 나중에 확인된 거지만 짐작이 된단 말이에요 왜 저런 지 관찰을 하면, 말 잘 듣고 잘 해오면 자기 사람으로 포섭해서 라인을 만들어서 쭉 끌고 가요 박사과정까지. 근데 싫어요. 안 하면 아는 체도 안 해…. 박사과정을 할 생각을 안 했죠. 거기서는 하고 싶지 않았죠.(목사B)
4)성직자와 상담자 간의 정체성 및 역할 갈등이 생김
전문적인 직업적 정체성은 직업군 안에서 요구하는 관습적 역할과 문화에 따르고 일정한 외적 조건을 갖출 것을 필요로 한다. 참여자들은 성직자와 상담자 간의 정체성과 역할을 모두 포함하게 되면서 일정 부분 차이와 갈등에 직면하기도 한다. 특히 참여자들은 종교계에서 상담에 대한 전문적 인식이 미흡하고 홀대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다.
이 종교계 안에서는 상담은 예전부터 해오던 거니가 좀 우습게 본다고 할까요 가볍게 여기는 그래서 안 배워도 된다 다 안다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이 있다 그러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높은 차원, 낮은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과 맞닿을 수 있는 진리가 있는 거고 그걸 터치하면 막연한 진리가 있을 뿐이다라고 느껴져요.(신부A)
종교 쪽에서도 자기들이 다 해결 못하니까 상담가나 의사나 이런 쪽에도 얘기해서 같이 써먹을 수 있도록 문을 넓혀야 된다고 봐요. 근데 이 사람들은 기득권이 있어서 뺐긴다고 생각하거든. 의사에게 가라거나.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에게 가라거나 이런 말을 감히 못하는 게 자기가 다 못하면서도 쪽팔리는 거죠. 뭐 쪽팔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내가 요거는 잘 모르니까 사람을 소개시켜주면 되지 그런 게 있어요 기존 질서에(목사B)
비구니A와 스님A는 자발적으로 상담공부를 해 나감에 있어 수행생활에 온전히 임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하여 동료 스님들의 우려의 시선을 받는다. 더불어 수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공부가 될 거라며 격려받기도 하는 양가적인 입장을 체험한다.
일단 스님들이 나를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에요 하나는 뭐냐면 그다지 좋은 모습으로 보지 않는 관점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굉장히 핵심으로 이루고 있고 가치 있는 건데 거기에 내가 온전히 발을 던져놓고 불교적인 수행방법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르게 표현하면 선방에 가서 참선을 하거나 그러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게 바라보고 측은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있어요. 또 다른 스님들의 관점은 내가 승가 안에서 경험했던 어려움들을 그분들도 경험하고 계시기 때문에 상담은 참 잘했다 그리고 박사학위 받은 것도 정말 대단하다 그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스님이 승가 스님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좋겠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두 입장이 있고 또 일반 심리상담을 공부한 쪽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스님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지만 다들 스님은 좋겠다 그 좋겠다라는 의미가 심리치료 공부도 하면서 불교공부도 하니까 두 가지를 다 하니까 참 좋겠다 이렇게 표현하시기도 하고 스님이 이런 공부를 해서 참 좋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고.(비구니A)
아는 스님들 도반스님들 반은 우려해 또. 00스님으로 살아갈 것인가 상담가 000로서 살아갈 것인가에. 그런데 우리 도반스님들의 입장으로서는 00스님으로서보다 사실은 상담가 000라는 사람으로 이게 너무 강하게 될까봐 이 우려인 것 같에 그걸 엄청 불안해하고 있고.(규범에서 게을러지는) 그런 것 때문에 도반스님들도 어떻게 니가. 그런 부분 때문에 걱정도 해 주지 사실은. 근데 이제 그걸 문제는 알고 있다는 것. 내가 그래도 좀 늘어져도 용서를 해주는 구나 알고 있으니까 같이 공부하는데 도반스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또 그 스님들도 그렇게 경책을 해주는 것 같아. 꾸짖어주는 것 같아. 성장 중의 하나니까.(스님A)
성직생활에서 특히 성직자와 상담자 간의 정체성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는 전문가적 입장을 취하는데 있어 구조적인 역할의 갈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스님A는 상담공부를 하며 전문가적 역할에 대한 정체성을 놓고 딜레마에 빠진다. 목사B는 목사지만 임시적으로 부목사의 직위로 갖고 아동센터 상담자로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에 갈등을 느끼기도 한다. 지금도 이런 딜레마에 빠져 사실은. 내가 승려로서의 00스님이라는 이름이 더 강할 것이냐 상담가 000라는 이름이 더 강한 것인가에 대한. 어느 것이 더 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사실 하는데 내 인생이 00스님으로서 최소한도 51%는 가야 되고 상담가로서 000라는 것은 많아봤자 49%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거는 앞으로 내가 계속 짊어져야 할 딜레마이지. 2%에서 왔다갔다. 지금 사실 학교를 다니면서도 그런 딜레마에 빠져요 사실은. 여기 일도 바쁘고 학교일도 바쁜데..(중략) 그게 종교인으로서 종교인이자 상담전문가가 되잖아. 그게 어떻게 보면 한계인 것 같고 이거를 사실은 깨면서 엄청나게 큰 무엇인가는 올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것이 좀 두려워.(스님A)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담임목사 10년 하다가 부목사로 돌아온 거에요. 부목사인데 실제로 주로 월요일에서 금요일은 아동센터에 풀타임으로 있는 거에요. 그리고 주일만 일하는 구조인거죠. 그 다음에 목사님이 자리 비우면 채워주는 구조 그러니까 특수한 상황이죠 이 구도는 임시 구도고 지금은.(목사B)
일부 불교참여자들은 전문적인 상담자 역할을 자의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승가 안에서의 공동생활이 어렵겠다는 판단이 서게 된다.
상담자로서의 역할을 해야겠다. 그렇게 가고 싶다. 그렇게 가게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요. 전문상담자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승가 안에 들어가기 두려워요. 여기서 전통적인 승가라고 하면 사찰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그 승가 안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의미에요. 왜냐면 그 안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발생하는 공동생활이 있고 그 공동생활을 함께 해야 되거든요 그러자면 지금 하고 있는 전문상담가의 일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병행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스님이지만 전문상담가의 길을 갈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또 다른 형태의 만들게 될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죠.(비구니A)
제가 특히나 다른 지역에 가서 명상지도하고 또 다른데 가서 프로그램하고 일반사찰에서 시간들이 제 시간들을 병행하거나 힘들겠더라고.(스님B)
한편 성직자가 신도를 대상으로 구조화된 심리상담을 해 나가기에는 현실적인 애로사항이 따른다.
물론 차이는 있어요 표면적이고 형태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어떤 차이냐. 형식에 있어서 매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횟수만큼 지속적으로 한 사람을 상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는 또 아쉬운 상태다. 다수 또는 부정기적으로 한두 번 내가 우리 교도 한 사람을 정해진 시간에 10번 만난다 다른 교도들이 가만있지 않겠지 그런 어려운 점은 있어요. 우리 교당 교도들 제외하고 다른 교당 교도들은 그렇게 해서 올 수 있겠지 정해놓고. 그런데 우리 일이 심리상담을 하기에 적당한 세팅은 아니에요. 교도들이 요청하는 데는 어디든지 간다 일 생기면 그런 주의기 때문에 시간을 정해놓고 상담하기 적절치 않아요. 일단 장소도 여기(공개교당)서 할 수는 없잖아요. 장소의 부적절성 물론 큰 교회나 성당처럼 교당이 건물이 따로 있는 데는 개인상담실이 있긴 한데 그것만 전담으로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교무A)
참여자들은 신도들의 상담이 대다수 위급하거나 절박한 수준이 아니며, 장기적 관계에서 신도들이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예배와 종교생활에 더 치중하게 된다고 보고한다.
교도들이 꺼내놓는 문제들 중에 상당한 수는 속된 말로 귀엽다. 가볍거나 그 정도면 충분히 허용할 수 있는데 과도한 종교적인 신앙, 신념에서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들, 모범생들의 걱정 대체로는. 또는 반대도 있어. 부모가 모범생교도여서 겪는 아이들의 일탈. 또 그것을 못 받아들여서 겪는 부모님의 걱정 그런 것들 하지만 교도소를 가거나 소년원을 가거나 그런 정도로 센, 부부가 이혼을 하거나 물론 교도 중에서 이혼한 사람은 있지만 이렇게 바람을 피워서 누굴 두드려 패거나 하는 그런 이머저시한 긴급 위기상담은 없다는 거지.(교무A)
교인상담은 많이 안했고 그 분들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이게 워낙 상담의 기본이라 그 때 같이 있어줘도 충분해요. 그 사람들은 속 얘기 잘 안 해요. 그 사람들은 예배드릴려고 하지 자기 개인 얘기 잘 안 해. 혹시 그들이 필요한 때면 그렇게 개발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절박하지 않아요.(목사B)
또한 신도를 관리하는 성직자의 입장으로서는 신도상담시 심리적인 작업을 충분히 하면서도 종교적인 주제와 인지적 작업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고 언급한다.
일반상담으로는 충분히 허용할 수 있는 주젠데 종교적으로 봤을 때는 허용하기가 난처한 예를 들면 "교당 교도생활을 그만하고 싶습니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일반 심리상담 현장이었으면 "당신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만두고 싶습니까?" 쪽으로 질문을 하겠지만 종교적인 상담에서는 내 교도가 그만둔다면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법이지. 어딜 가냐. 그건 상황에 따라 하겠는데. 그래도 심리상담을 했기 때문에 강요하지는 않고. 심리상담적 측면에서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측면에서 풀어서 이렇게 얘기하죠. 부모자식 간에 갈등이 있을 수 있다. 부부문제가 있을 수 있다. 교무 우리 교도를 대하는 교무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런 점을 좀 더 마음을 냈으면 좋겠다. 또는 전생에 니가 지은 과보가 있으니까 그 과보를 녹여내고 미래의 복을 장만하려면 이 위기를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된다는 인지적인 얘기가 좀 더 많이 나가게 되죠.(교무B)
<성직자의 상담자 역할 통합경험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정원경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