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단적 인식의 '판단중지'를 요구한 회의
주의 명제 <피론주의 개요>
박경귀
Classic 138: <피론주의 개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오
유석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2012), 170쪽.
현대문명의 모든 씨앗은 고대 그리스에 있었다. 그리스 문명을 깊이 탐색할수록 이런 현상을 더욱 확실하게 느끼 게 된다. 고대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원천이자, 현대문명의 자궁이었던 셈이다. 당연히 철학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철학에 이어지는 모든 논쟁적 사상의 단초가 고대 그리스시기에 태동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아카데미 학파의 전통이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철학의 근간으로 이어졌다면, 반아카데미 학파로써의 피론주의 역시 르네상스기에 다시 주목받고 데이비드 흄, 데카르트, 헤겔에 영향을 미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관점에까지 맥이 이어졌다.
고대 중국에서 제자백가가 백가쟁명으로 쏟아낸 저작들은 하나같이 군주를 위한 통치의 담론으로 정치학의 범주에 머물렀다. 그들은 진정한 철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인간과 자연,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을 통해 형이상학, 논리학, 자연학, 생물학, 정치학, 윤리학, 의학 등 제 분야에서 철학적 산출물을 쏟아냈다.회의주의(懷疑主義, Scepticism)로 일컬어지는 피론주의(Pyrrohnism) 역시 인식론의 중요한 갈래로 고대 그리스기에 이미 등장했다. 우리가 피론주의를 다시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2007-250?)의 저작 덕분이다. 피론(BC 360?-BC 270?)의 철학을 담은 저작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3세기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저술한 <피론주의 개요>가 르네상스기에 재발견되고, 1562년에 현대적으로 편집 발간된다.
이 책은 피론주의의 핵심을 잘 정리하고 있다. 회의주의자들은 아카데미학파의 주장을 독단주의로 규정하고 이들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 이들은 플라톤의 제자들이 이어받은 아카데미학파의 진리의 발견이 가능하다는 인식론을 비판하고, 진리의 상대성을 강조하면서 사물과 현상에 대한 단정적 판단을 미루는 ‘판단중지(epoche, 判斷中止)’ 또는 ‘판단유보'를 선언한다. 특정한 사유에서 ‘판단중지’(판단유보)를 통해 '마음의 평안'(Ataraxia)과 ‘감정의 순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이 에포케를 강조하는 이유는 독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식의 판단 근거 그 자체부터 회의(懷疑)하기 때문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판단중지’(판단유보)를 끌어내는 10가지의 대립적 논증을 자세히 소개한다. 회의주의자의 열 개의 논증방식은 피론주의의 핵심이다.
이들은 생물의 다양성, 사람들 간의 차이,감각기관의 다양한 구조, 위치와 거리, 장소, 감각의 혼합, 감각 대상들의 양과 구조, 상대성, 발생 또는 조우가 빈번한지 드문지, 행동규범과 관습, 법률, 신화에 대한 믿음, 독단적 신념에 기인한 열 가지 논증을 정립했다.
회의주의자의 논증은 인간의 범주에서 생물의 범주까지 확대된다. 인식론의 주체를 인간에 한정하지 않고 다른 동물들과의 비교를 통해 인간의 독단적 믿음과 독단적 결론의 무모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인간이 하얗 게 보이는 것을 흰색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하얗게 보이는 것이 누런색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다른 생물들에게는 또 다른 색깔로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러 사람이 동일한 색깔로 생각하는 어떤 물체도 사람들 간의 차이, 감각기관의 구조, 위치와 거리 등 다양한 논점에 따라 달리 판단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결국 단순히 감각표상만으로 인식된 것을 그대로 확정적인 것으로 볼 경우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무수히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 관점을 인정하여 ‘판단중지’함이 마땅하다는 의미다.
회의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표상 역시 믿을 수 없게 된다. “벌꿀이 나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쓰게 느껴진다”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회의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감각표상을 다른 감각표상보다 선호할 수 없고, 증거나 판단기준을 가지고서도 어떤 감각표상을 선호할 수 없다면, 상이한 조건 하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감각표상들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독단적 믿음이 범하는 오류를 경계한다. 인간의 감각과 인식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확정적 언표(言表)로 인해 빚어지는 오류를 막기 위해 '판단중지'(판단유보)만이 옳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들의 주장 역시 허점이 많다. 그들이 주장하는 ‘판단중지(판단유보)'가 과연 온전하게 옳다고 그들은 믿고 있을까? 만약 그들이 옳다고 믿고 있다면 이 주장 역시 독단적 믿음에 해당한다. 반대로 ‘판단중지(판 단유보)'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잘 모르는 것이라면, ‘판단중지’를 판단할 대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 아닐까?
이러한 질문은 아카데미학파를 논박할 때 사용하는 회의주의자들의 질문과 동일한 방식이다. 당연히 회의주의자들에게 똑같이 던져질 수 있는 질문이다. 회의주의자 역시 자신들의 ‘판단중지’의 판단근거에 대한 독단적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일체의 인식에서 확언(確言)과 결론을 피하고 회의를 품고 ‘판단중지’를 요구하는 피론주의의 철학적 관점은 마음의 평정에 안주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독단적 믿음으로 진리를 확신하는 대신 끊임없이 회의하며 궁극적 진리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주류 철학에 대해 경종과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이들이 던지는 철학적 이슈를 의미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독단주의자들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단언할 때 야기되는 더 이상의 탐구의 중단을, 회의주의자들은 경계했던 것이다.
회의주의의 난점은 독단주의에 대한 명확한 반대명제를 대립시키고 특정한 인식의 '판단중지'에 멈춤으로써 명제와 반대명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인식의 세계를 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판단중지’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치자. 어떤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인식과 논의에서 대체 ‘판단중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 인식의 불완전성은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을 통해 진보해 나가는 것 아닐까? 회의주의자는 무오류에 대한 지나친 강박과 만사에 대한 부정적 회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합리적 이성주의와 회의주의는 영원한 대립각으로 철학자들을 괴롭힐 듯싶다. 회의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도 오로지 합리적 이성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가 헬레니즘 시기에 한때 유행했지만, 그리스 철학 사상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 합리적 이성주의가 인류 문명과 인간의 인식을 이끌어 온 주류임도 분명하다. 하지만 당대의 여러 관점의 상대적 제약에 늘 유의하며 궁극적 진리를 향해 모든 현상과 인식의 판단을 회의적 시각으로 재검증하는 장치 또한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