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은 황남동에 있는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으로
고분 공원 조성 계획에 따라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 조사하였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으며
남쪽 무덤을 먼저 만들고 뒤이어 북쪽 무덤을 잇대어 만들었다.
무덤 구조는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남분에는 남자가 묻혔고, 복분에는 여자가 묻혔으며
이들은 부부로 추정된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주인공들은 화려한 황금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마립간기의 왕릉으로 보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현재 학계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제17대 내물왕과 제18대 실성왕, 제19대 눌지왕 중 한 명으로 추정한다.
(아래 사진 글 참조)
이곳은 찬란한 신라문화의 보배들이 가득히 묻혀있는 역사 깊은 능역이다.
천 수백년 오랜세월에 봉분은 허물고 푸초 우거진 섶에 어지런운 민가가 들어서서
이름마저 잃어버려 폐허의 터가 되어있다
이에 민족문화의 자주적연구와 자랑찬 유산의 알뜰한 보존을 위하여 황남대총의 발굴조사가
1973년 7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2년 2개월에 걸쳐 실시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황금보관을 의지하여 5만여점에 이르렀고 천년 신라의 영화로운 문화를
세계 만방에 다시 한번 선양한 크나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1976년 5월 봉분을 원형대로 복원하면서 목관자리에 석곽을만들어 출토된 유물을 안치하고
발굴기록을 돌에 새겨 묻었다.
이 사업은 번영하는 조국의 우렁찬 기상 아래 영광괸 민족문화의 계발에 이바지한 역사적 사업이라
이 일을 돌에 새겨 여기 세운다.
황남대총의 우측 봉분(남분:남자가 묻힌 봉분)
황남대총의 우측 봉분(북분:여자가 묻힌 봉분)
이 두 개의 봉분이 황남대총
이명(異名)은 경주 제98호 고분이고 무덤의 규모는 남.북분을 포함한 전체 길이가
남북방향으로는 120m, 동서길이는 82m이다.
높이는 남분이 22.2m, 북분이 23m이다.
황남대총 - Daum 백과(참조하세요)
참 크고 넓었습니다.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서 이 곳 가까운 곳에 사는 이들은
간혹 들려서 시간을 보내면 참 좋은 곳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이만한 역사적이고 잘 관리된 공원 같은 곳도 많지 않잖습니까.
위 대릉원 안내 표지판에서 보시다시피
산처럼 큰 봉분들이 펼쳐져 있어서 놀라웠습니다.
이 많은 봉분들을 어떻게 다 만들었을까?
그것도 이 한 곳에...
이 봉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생했을까?
이 봉분들의 주인의 위세는 어떠했을까...
목백일홍에 붉게 피어난 꽃과 푸른 잔디가 찰 어울립니다.
천천히 여유롭게 가다가 발길을 멈추고 의자에 앉아있기도 하고
그랬으면 좋으련만...
아내가 천마총만 관람한 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대기소에서
기다리니 그저 발길만 바쁩니다.
경주까지 와서 따로 상경하는 일이 발생되면 안되어서...쩝!!
요거는 봉분이 아닐겁니다.
그럼에도 봉분처럼 흙무더기가 봉분처럼 쌓여 있습니다.
대나무들도 자라고...
이 대나무와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저 아래에 있는 사진 미추왕릉의 설명글에 대나무 군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고 또 보고...
걷고 또 걸어도 좋은 길입니다.
경주 미추왕릉 사적 제175호
이 능은 신라 제13대 미추왕(262~284)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미추왕은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후예로 제12대 첨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김씨 가운데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 냈고,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였다.
다음 왕인 유례왕 때, 청도의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 오자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병사들이 홀연히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 왕릉 속으로 사라졌다 하여
죽장릉 혹은 죽현릉으로 불렸다고 한다.
미추왕이 죽어 대릉에서 장사지냈으며 왕릉은 홍륜사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능은 경주분지 한가운데인 대릉원 내에 있다.
능의 남쪽에 숭혜전이 있어 해마다 제향을 받들고 있다.
외형은 봉토분이며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주변의 다른 무덤과 마찬가지로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미추왕릉 입구
이 능에 한 가족이 먼저 와 있습니다.
그런데...
능 앞에 의자 모양의 돌이 있는데
아마 사람들이 그 돌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고 싶을 것입니다.
대개가 그렇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실겁니다.
이 왕릉은 특히 능 주변에 울타리를 쳐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이 나무들이 당시에 심어졌던 나무는 아니겠지요. ^%^
아마 이 왕릉을 복원 관리할 때 심어지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오래된 나무들을 보면 깊은 감회가 새롭습니다.
미추왕릉 앞에 놓여있는 상석은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보다시피 상석과 붙어 있는 둘레에...
그래서 사람들이 상석 위로 올라가서 떡하니 앉아 사진을 찍기도 할 것입니다.
에이...저는 절대 그러지 않지요. ㅎㅎ
첨성대가 있는 곳 화장실....^&^
첫댓글
맨 마지막 사진...
이 곳에 가보신 분은 없으실겁니다.
첨 봅니다
ㆍ
이 가을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네요
예전에 저 커다란 릉도
가 보했는데
그것도 혼자서 말예요
그런대로 즐거웠어요
70년대에
발굴했다는 것이..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먹고 사는 게 먼저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