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7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러시아 포격으로 우크라이나 핵 연구소 파괴
2020년 제주기지전대 민간인 침입사건 발생
2020년 3월 7일 오후 2시,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집단 개척자들의 대표이자 세계평화대학 강정 캠퍼스의 수장인 송강호등 4명이 구럼비 발파 8주년을 맞아 출입을 거부당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강정천 멧부리 해안의 동방파제 철조망을 절단했다. 최수인과 윤혜성은 철조망을 절단한 후 즉시 도주했으며, 그 중 송강호, 류복희가 제주 해군기지 내에 무단 침입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경계 작전 책임자인 현창훈 제주기지전대장(해군 대령)이 보직 해임되었다
2016년 역대 최대규모(미군 1만7천 한국군30만) 한미연합군사훈련 키리졸브독수리훈련 시작
2013년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094호 채택
2012년 해군 제주 강정 앞 바다의 구럼비 바위 폭파
2011년 재일동포들의 '정신적 지주' 박병헌 명예회장 별세
고 박 명예회장은 재일민단 총무국장, 감찰위원, 부단장을 거쳐 1985년과 1988년 제38 및 39대 단장을 역임했다. 호(號)가 청송(靑松)인 그는 일본에 귀화하지 않고 끝까지 한국 국적을 유지해 재일동포들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았다. 경남 함양 출신으로 11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초등학교를 마친 후 고학으로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풍전등화의 조국을 두고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며 혈서를 쓰는 등 참전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스스로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작전 등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휴전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재일한국 학생동맹 중앙본부'를 결성, 부위원장으로 좌익의 이념공세에 대항했다.
민단 단장 재임시에는 조총련에 맞서 민단의 조직을 확대했으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 확보와 지문날인 철폐 운동 등을 벌였다.
1973년 자동차용 오디오, LCD-TV 등에 쓰이는 부품을 생산하는 대성전기(현 대성엘텍)를 창업한 박 회장은 재일한국투자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신한은행 출범에도 기여했다. 1987년에는 해외한민족대표자회의의 설립도 주도했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는 재일 상공인을 중심으로 후원회를 결성해 성금 525억원을 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보국훈장 삼일장, 대통령방위무공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국민훈장 모란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2009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 여배우 장자연, 숨진채 자택에서 발견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KBS2)에 출연 중이었던 탤런트 장자연이 2009년 3월 7일 오후 경기 분당의 자택에서 자살한 채 발견됐다.
장자연은 이날 오후 4시 30분쯤 같이 살고 있는 언니에 의해 숨진 채 발견 됐다. 이와 함께 분당경찰서 관계자들도 뒤늦게 신고를 받고 장자연의 자택으로 향했다.
이에 대해 제주도에 살고 있는 장자연의 한 지인은 최근 장자연이 소속사와 재계약 문제, 드라마 속 비중 문제 등으로 많이 괴로워했다고 밝혔다.
지난 2006년 제과 CF를 통해 얼굴을 알린 장자연은 2006년 방영된 SBS 드라마 ‘내 사랑 못난이’를 비롯해 몇 작품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데 이어, 이번에 비중있는 조역으로 '꽃보다 남자'에 등장했다.
한편 장씨가 전 매니저 유모씨에게 남긴것으로 알려진 성 상납을 강요받고 폭행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문건이 공개됨에 따라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해당 문건은 A4용지 6장 분량이며, 장씨의 지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2003년 수필가 박연구씨 별세
박씨는 1963년 월간 신세계 신인작품 수필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으며, 월간 수필문학 주간, 한국문인협회 이사, 계간 한국수필 편집인, 도서출판 범우사 편집위원을 거쳐 1999년부터 계간 에세이문학 발행인으로 활동해 왔다.
대표작 ‘바보네 가게’(1973년)를 비롯해 ‘어항 속의 도시’, ‘햇볕이 그리운 계절’, ‘사랑의 발견’, ‘환상의 끝’, ‘속담 에세이’, ‘매원수필’, ‘얘깃거리가 있는 인생을 위하여’ 등의 수필집을 남겼다. 평생토록 수필만을 써 수필의 장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수필문학상(1987), 한국수필문학상(1990), 한국문학상 수필부문(2001)을 수상했다.
2003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초대 대통령에 마로비치 선출
2003년 2월 유고슬라비아 연방 후신으로 새로 출범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초대 대통령에 몬테네그로 출신의 스베토자르 마로비치(Marovic·47)가 선출됐다.
3월 3일 구성된 126석의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의회는 7일 찬성 65, 반대 47, 기권 14표로 마로비치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마로비치는 취임식에서 “발칸반도에서 전쟁의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고 선언하고 “번영과 관용이 없다면 우리에게 유럽의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조국을 유럽 주류에 편입시키겠으며, 유엔의 유고전범재판소와도 협조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변호사 출신인 마로비치는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주장하는 밀로 듀카노비치(Djukanovic) 전 몬테네그로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졌다.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Kostunica) 전 유고연방 대통령은 세르비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퇴진했다.
마로비치 신임 대통령은 국방·외교·재정·대외무역·인권을 담당하는 5인 내각을 관장하게 된다.
앞서 유고연방 의회는 지난달 4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을 해체하고 느슨한 형태의 국가연합인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창설하는 헌장을 채택한 바 있다.
2003년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만장일치로 여섯 번째 재선
2003년 클리프 리처드 34년 만에 내한공연
1999년 미국의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사망
1995년 미국, 세계 최초 반창고처럼 상처에 붙이는 피부암 치료제 개발
1995년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 박사 별세
한국인 최초의 안과의사이자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 박사가 1995년 3월 7일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공 박사의 죽음은 “내가 죽거든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누구에게나 알리지도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는 유언 때문에 이틀이 지난 뒤에야 알려졌다.
공 박사는 평북 벽동군 출신으로 1926년 독학과 강습소 교육만으로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안과전문의로, 1936년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1938년 9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울 서린동에 공안과 의원을 개설했다. 그는 1938년 눈병치료를 받으러온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을 만난 것을 계기로 한글사랑과 한글기계화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공 박사가 타자기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해방전 경성제대 의학부 연구실에서 일할 때 영문 타자기를 보고 나서였다. 그후 일본어로 된 ‘소안과학’ 이란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한글타자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타자기 개발에 착수, 6개월간의 시행착오 끝에 1949년 한글이 가로로 찍히는 세벌식 타자기 발명에 성공했다. 이전에는 한글을 가로로 찍어 세로로 읽는 5벌식 타자기뿐이었다. 공 박사는 그 타자기로 한국 최초의 미국 특허를 받아냈다.
한글타자기가 발명된 초기에는 문교부장관의 면회신청마저도 거절당했으나 1953년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부터 한글타자기는 군대와 행정 부처에서 두루 널리 보급되어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이후로 쌍초점 타자기, 한글텔레타이프, 점자 한글타자기, 맹인용 한글워드프로세서 등을 잇따라 개발했다. 1988년에는 한글문화원을 설립해 한글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 자판문제 등을 연구하는 정열을 보였다. 외길 인생을 살아온 공 박사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수여됐다.
1994년 남성염색체 가진 불임여성, 인공임신 국내 첫 성공.
외형적으로는 여성이지만 남성염색체를 갖고 있어 임신이 불가능한 희귀질환의 환자가 타인의 난자를 이용, 임신하는데 국내 최초로 성공했다. 통상적인 시험관 아기를 포함, 인공임신 시술사례를 통틀어 타인의 난자를 기증받아 성공한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도 국내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이진용교수(57) 팀은 7일 “신체구조상 분명히 여성생식기를 갖고 있으나 유전적으로는 남성염색체(46 XY)를 지닌 스와이어증후군(Swyer syndrome) 환자 A씨(30대.여)에 대해 동생의 난자를 이용한 인공임신 시술이 지난해 11월에 성공, 현재 임신 5개월째”라고 밝혔다.
A씨는 지난 해 11월 중순 정상적 여성인 동생으로부터 기증받은 난자와 자신의 남편 정자를 결합시켜 얻어진 수정란(시험관아기)을 자궁에 이식받았다. 이교수는 “현재 초음파를 이용, 태아의 심장박동을 들을 수 있으며, 태아의 머리직경이 3.1㎝에 이르는 등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발육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남성 염색체를 가진 환자의 임신은 세계적으로 단 3건의 성공사례만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스와이어증후군이란 남성염색체를 갖고있는 태아가 임신 6주쯤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환 발달이 안돼 여성생식기를 지닌 채 태어나는 염색체 기형의 일종이다. 이 경우 여성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사춘기를 지나서도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으며, 난소가 없으므로 난자를 기증받기 전에는 임신이 전혀 불가능한 질환이다.
A씨는 지난 85년 무월경증상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스와이어증후군이란 판정을 받았다. 88년 결혼 이후 여성호르몬 치료를 받기 시작했으며 90년부터 5차례의 인공임신 시술을 시도한 끝에 이번에 성공했다.
우리나라의 법체계에 따르면 이번에 임신된 태아와 A씨는 모자관계가 성립되나 의학적으로는 A씨의 남편과 처제 사이의 아이일 수 밖에 없어 법적-의학적 관계 불일치에 따른 논란이 예상된다
1991년 고(故)박정희 대통령 아들 박지만씨, 마약 상습복용협의로 구속
1989년 2월 마약복용 혐의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씨가 히로뽕 상습복용혐의로 구속됐다. 1990년 7월, 11월, 12월과 1991년 1월 등 4차례에 걸쳐 히로뽕을 코로 흡입하거나 정맥주사를 맞아온 사실을 확인, 구속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1990년 7월 히로뽕가루 3~4g을 히로뽕 밀매자인 김명숙씨로부터 2백만원에 구입, 차순영씨 집에서 차씨 등과 함께 코로 흡입했다. 박씨는 또 1990년 8월 중순 구속된 김씨 집에서 김씨로부터 히로뽕 6g을 5백만원에 매입, 1990년 11월 자신의 집에서 차씨 등과 함께 코로 흡입하는 등 지난 1월말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히로뽕을 상습적으로 복용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1989년 이란,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 문제로 영국과 단교
이란 정부가 1989년 3월 7일 샐먼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와 관련, 이 작품의 출판금지를 거부한 영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한다고 발표했다. 이란 정부는 영국측에 이 문제에 관해 입장을 밝히도록 요구한 시한인 1주일이 지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루시디의 작품이 회교에 대해 모욕을 가했다는 점은 시인했으나 이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옹호하는 한편, 이란에 대해 호메이니가 루시디에 대해 내린 ‘처형명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었다.
영국은 호메이니가 회교를 모독한 이 작품의 저자인 루시디에게 2월14일 ‘처형명령’을 내린 후 이란 주재 외교관 전원을 철수시킨바 있다. 이란은 단교발표와 함께 영국 정부가 ‘악마의 시’ 출판을 금지하고 루시디를 기소하면 이 책을 둘러싼 위기가 진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1989년 시인 기형도 사망
1987년 영국 여객선 전복 사고
1983년 달성냉천 자연원 사자가 사육사습격, 살해
1981년 방송위원회 발족
1981년 KBS, 상업광고 개시
1980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유럽연합(EC) 외상회담, 경제협력협정 조인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이 중동방문
평화협상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평화안이 이스라엘과 이집트로부터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얻음으로써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체결 전망이 밝아진 가운데 이집트-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연쇄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1979년 3월 7일 중동순방길에 올랐다.
그 결과 3월 31일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30년 동안의 적대관계와 4차례에 걸친 전쟁을 청산하고 역사적인 평화 협정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 평화조약 체결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하며 카터 대통령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과장없이 말해서, 그가 한일은 우리 세대의 가장 훌륭한 업적 중의 하나다."라고 말했다. 참관인 자격으로 이 조약에 서명한 카터는 이제 "평화가 왔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말하고 "우리는 결국 평화의 첫 단계, 길고 험한 장정의 첫 단계에서 승리했다"라고 덧붙였다.
1978년 한미합동 팀스피리트78 작전개시
1976년 영국·아이슬랜드 어업 분쟁
1976년 모로코, 알제리와 외교단절
1969년 골다 메이어 여사, 이스라엘 총리에 피선
1969년 3월 7일 이스라엘에 건국 이래 최초로 여성을 총리로 하는 내각이 발족했다. 레비 에시콜 수상이 급사함에 따라 노동당중앙위의 지명을 받아 전 외무장관인 70세의 골다 메이어 여사가 총리로 선출됐다. 그 당시 여성총리의 탄생은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 전 총리, 인도의 간디 총리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메이어 여사는 1898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1906년, 여덟 살 되던 해 미국으로 이주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다. 1921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마파이당(노동당 전신)에 입당하여 두각을 나타낸 그녀는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조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독립 후에도 소련 주재 이스라엘 초대대사(1948년), 크네셋 의회 의원(1949년), 노동부장관(1949년), 외무부장관(1956년) 등을 역임했다. 1950년 남편이 죽은뒤 그해 벤구리온 수살이 각료들에게 히브리 성을 갖도록 권유하자 그녀는 죽은 남편 메이어슨과 비슷한 이름 가운데 '밝게 비추다'는 뜻의 '메이어'를 선택했다.
1969년 가을, 메이어 여사는 중동분쟁 논의 차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미국 언론들은 그녀의 곱슬곱슬한 금발머리와 작은 체구, 온화한 용모로 “할머니가 장바구니를 들고 왔다.”고 크게 보도했고, 그녀는 가는 곳마다 열렬한 ‘메이어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메이어 여사는 정작 그 ‘장 바구니’에 팬텀 전투기 25대와 스카이호크 공격기 85대, 닉슨 대통령으로부터의 장기경제원조를 넣고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제 3 차 중동전쟁 승리의 여파를 타고 정치적으로 크게 안정된 시기에 정국을 이끌어 1973년 말의 총선거에서도 노동당을 다수당으로 이끌었으나 제4차 중동전쟁 전망에서의 실패와 정부 및 여당내의 내분으로 인해 1974년 4월 8일 결국 총리직에서 해임됐다.
제4차 중동전쟁은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욤키푸르 전쟁'이라고 불리는데, 2,500명의 이스라엘군이 전사하고 엄청남 군비가 소모됐다. 결국 6일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국가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전쟁이었다. 골다 메이어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4년 뒤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9년 서울 세운상가에서 화재, 점포52 소실 부상10명
1969년 아폴로9호, 달착륙과 모선 랑데뷰 재도킹 완전 성공
1969년 동백림 사건 관련 복역중이던 이응노 화백과 최정길 형집행정지 석방
1966년 드골, 나토(NATO)에서 프랑스 철수 선언
1965년 미국 흑인 인권보장 시위
미국 흑인들이 앨라배마주 셀마시에서 평화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인종차별과 투표권의 제한, 공공시설 사용의 차별 등을 없애라고 요구했다.
백인 민권운동가들도 이 시위에 합세했다.
시위대는 셀마 브라운 교회를 출발해 50마일 떨어진 몽고메리 시까지 시가행진을 벌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행진을 원천봉쇄했다.
이날 흑인들이 시위를 벌인 셀마시는 마틴 루터 킹 2세가 주도한 흑인투표인 등록운동의 중심지였다.
1956년 경주박물관의 신라금관 도난
1953년 용초도(龍草島) 포로수용소 폭동
북한 포로 약2천명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 용초도는 거제도 옆에 위치한다.
1952년 미국-쿠바 군사원조협정 조인
1951년 국회 6.3.3.4학제 채택
학제 개편 : ‘6-5-4에서 6-3-3-4’로. 1951년 3월7일 단행된 학제개편의 골자다.
국민학교 6학년과 중학교 5학년 과정을 거치고 4년제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제에서 중학 과정을 6년으로 늘리고 고등과정을 삽입한 것이다.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굳이 학제를 고치고 나선 것은 미국식으로의 전환, 기본적으로 대학 진학 전까지 12년을 공부하는 미국의 학제를 국내 실정에 맞게 본뜬 것이다.
이때 마련된 학제는 약간의 수정만 거친 채 58년이 지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고 있다.
학제를 개편해도 2년제 교육대학, 5년제 실업고등전문학교, 전문대학 및 특수학교 등의 설립 같은 부분 개편에 그쳤을 뿐이다.
3공화국 정부가 1965년 발표한 6-6-4제로의 전환 계획도 불과 1년 만에 없었던 일로 돌아갔다.
서슬 퍼렇던 3공 정부가 학제개편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이고 무산된 이유는 또 무엇일까.
미국 등 선진국의 추세에 따른다는 명분은 각 집단의 반발에 막혔다.
각급 학교의 선생들은 물론 각계에 포진한 명문 고교 출신의 동문들이 학제개편을 가로막고 나섰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2006년 ‘5-3-3-4’로 이어지는 학제 개편방안을 장기검토 과제로 내놓았었다.
새로운 세대들의 신체 발달과 진로 선택, 국제화 추세에 부응하자는 뜻에서 나온 학제 개편안은 더 큰 논란을 불렀다.
‘미국식 교육체제로의 종속’이라는 비난에서, 입시 경쟁을 1년 앞당길 것이라는 우려, 자칫하면 1, 2년 선후배끼리 동시에 사회에 진출하는 혼란을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1946년 경부선에 특급열차 첫 운행
1938년 미국 바이러스 학자 데이비드 볼티모어 출생
1936년 독일, 로카르노조약 폐기, 라인 비무장지대 진주
1933년 낙동강교 준공
1926년 뉴욕과 런던간 첫 대서양 횡단 무선전화 교신 성공
1899년(조선 고종 36) 제생의원, 산부인과 소아과 내외과 안과 진료 시작
1876년 미국 특허사무국, 벨의 전화 발명 특허 인정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 발명 특허를 인정받았다.
벨은 농아들을 위한 시화법 체계를 세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리에 관한 실험을 계속했다.
1873년 그는 보스턴대학교의 음성생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기계수리공 토머스 웟슨의 도움으로 전기로 소리를 전달하는 기구를 고안했다.
1876년 3월 7일 미국 특허사무국은 벨의 전화 발명을 특허번호 174465로 인정했다.
벨의 전화 발명은 곧 상업적으로 응용되었지만, 특허 소송에 연루되기도 했다.
1877년 벨은 메이벌 허버드와 결혼했고, 1880년 프랑스로부터 볼타상을 받았다.
벨은 평생 농아 연구와 함께 전보, 광전화, 포노그래피, 수중익선, 셀렌전지 등 새로운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연구한 것들 중에는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은 것이 많다.
언제 어디서나 통신이 가능하게 된 ‘초(秒)테크 시대’를 열어 준 전화기는 단 2시간 차이에 발명왕의 이름이 바뀌었다.
1876년 2월 14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엘리샤 그레이가 거의 동시에 전화 발명 특허 신청을 했다.
그런데 미국 특허 사무국은 그해 3월 7일 ‘전기 진동을 일으켜 목소리나 그 밖의 소리를 전신으로 전달하는 방법과 기구’란 특허(번호 174465)를 벨에게 주었다.
벨이 그레이보다 2시간 빨리 특허를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벨의 이 발명으로 미국 전역에 전화기가 보급돼 10년 후인 1886년엔 15만 가구가 전화기를 소유하게 됐다.
이후 전화는 세계인의 필수품이 됐다.
벨은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후 그레이 등으로부터 무수한 소송에 시달리기도 했다.
1877년 문을 연 벨 전화회사는 18년간 무려 600건의 법정 공방을 치러야 했다.
지난해 말 미국 언론인 세스 슐먼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비밀 추적’이란 책에서 “벨이 그레이의 작동 원리를 홈쳤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벨은 특허를 받은 뒤 사흘 뒤에야 통화 실험에 성공했다.
특허 신청도 후원자인 가디너 그린 허버드가 변호사를 통해 미리 하라고 지시해 빨리 한 것. 하지만 벨은 단 한 건의 소송에서도 패하지 않았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벨은 아버지가 만든 시화법을 농아들에게 가르쳐 주는 일을 하며 소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캐나다를 거쳐 미국 보스턴에 정착한 벨은 1872년 농아 교사들을 훈련시키는 학교를 세웠고 이듬해 보스턴대 음성생리학 교수가 됐다.
소리의 전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벨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기계 수리공이자 모형 제작자인 토머스 웟슨을 끌어들여 소리를 전기로 전달하는 기구를 고안하게 됐다.
벨은 전화를 발명한 뒤에도 개인적으로 18개, 동료와 공동으로 12개의 특허를 받는 등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그의 천재성이 없었다면 국내에서만 4350만 명(지난해 12월 기준)이 휴대전화를 쓸 정도의 오늘날 무선통신 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1875년 프랑스 작곡가 라벨 출생
1872년 추상미술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 몬드리안 출생
1866년(조선 고종 3) 천주교 서적 소각과 5가작통법의 강화 시달
1793년 프랑스, 스페인에 선전포고
1785년 이탈리아 소설가 만초니 출생
1399년 조선왕조, 한양에서 개경으로 천도
1274년 토마스 아퀴나스 사망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1274년 3월 7일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녀원에서 병사했다.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였던 그는 생애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복도, 그리스도교화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 형성된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가 남긴 많은 저작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신학대전`이다. 그는 이 책에서 유일신의 존재와 그 본질에서부터 창조 죄 신앙 희망 사랑 정의 용기 절제 그리스도론에 이르는 기독교 교의의 전 분야를 문제, 답변, 반론, 반론에 대한 응답 형식의 토론에 담아냈다.
그는 자신의 철학에서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을 종합했는데, 그의 사상은 토마스주의라고 불린다. 1225년 이탈리아 로카셰카에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나폴리대학에서 공부하고 도미니크 교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파리대학의 신학부 조교를 비롯, 이탈리아 등지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161년 제15대 로마제국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사망
제15대 로마제국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161년 3월 7일 그의 제위 계승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75세였다. 그는 봄볕처럼 온화한 성격에 무슨일이든 온건하게 해결하려 애를 썼으며, 균형감각이 뛰어난 황제였다. 허영심도 없었고 추문과도 무관했다.
그의 양자이자 후임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평하기를 "온화한 성품에 결정은 신중하되 결정된 사항은 단호하게 실행하는 불변의 의지를 소유했다"고 평했다. "노동과 근면을 사랑하고 신상필벌을 중요시 여겼다"는 이른바 외유내강의 전형이었다. 안토니누스의 치세 23년은 제국 전역에 평온한 질서가 감돌던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는 그의 책무가 `개혁`에 있지 않고 `개혁`을 정착시키는 일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에 따랐다.
그는 86년 9월 로마 근교의 라누비오에서 태어났지만 원래 그의 먼 조상들은 과거 로마에 정복된 갈리아인(프랑스인)이었다. 몇대 전 조상들이 로마로 이주했으므로 그는 로마로 이주한 이민 3세나 4세가 되는 셈이다. 회계감사관, 원로원, 법무관, 집정관 등 로마의 엘리트 코스를 모두 거친 그가 황제로 즉위하게 된 것은 10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전임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양자로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를 자신의 양자로 지명하는 조건으로 평소 그가 눈여겨 보아오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안토니누스의 양자로 지명케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차차기 황제까지 지명한 셈이 되었다.